2008년 <시와시학> 포엠토피아 신인상 당선작
나뭇잎 과자 (외 4편) / 조영민
나뭇잎 과자 / 조영민
국도 변 캘리포니아 모텔 앞 과자들이 수북하다 봄부터 가을까지 준비한 캐나다 국기 과자 물고기 과자
나무는 장마로 웃자란 빗방울의 껍질들을 벗겨 맛있는 소스를 뿌린다 포도알 같은 알맹이도 섞어 넣고 달빛도 골고루 뿌렸다 불꽃이 센 맑은 날은 과자가 타지 않게 뒤집어 노릇노릇 구웠다
길가에 한 잎 한 잎 갓 구운 과자들이 쌓인다 잘 구워진 과자 위에 붉은 과일 한두 개로 멋을 부렸다
숲길을 걸을 때 바삭바삭 과자 깨물어 먹는 소리
배가 부른 숲은 봄날 여기저기 꽃다발을 준비한다
삽 / 조영민
중앙로 신축상가 건설현장 거푸집 사이로, 이른 비가 내린다 빗소리를 끌어다 덮고 하나둘 벽에 기댄 잡부들 오늘은 공치는 날, 발치에 삽을 던져두고 모두 봉안당 같은 독방에 들었다 자루가 부러지고 이가 빠진 늙은 삽들 파내려 간 길이 보이지 않는다 관절을 앓는 김씨 아들이 대기업 과장이라는 한씨 눈을 감아도 잠이 오지 않는다 담배는 오래된 필기구 갖가지 사연을 받아 적은 몸이 습관처럼 메모를 한다 찬찬히 제 주름을 읽는다 지나온 시절을 한 장씩 꺼내 보면 밑줄을 그었던 날들은 얼마나 많았던가 닳아버린 삽들 연신 재채기를 해댄다
빗소리에 젖을 만큼 젖었다 비는 좀처럼 그치지 않는다
봄, 부풀어오르다 / 조영민
남해 바닷가 봄 언덕이 잔뜩 바람을 물고 천천히 바람을 풀어놓는다 겨우내 시들시들한 줄기나 이파리들이 감자 줄기처럼 김해, 왜관을 거쳐 대구, 용인을 지나 청계천 습지에 울긋불긋 크고 작은 풍선들을 띄워 놓는다 즉석에서 봄은, 아이들이 좋아하는 별 모양이나 강아지 모양 어른들을 위한 튀밥 모양을 만들기도 한다 빨대를 꽂으면 쉽게 불어지는 튤립 금세 펑펑 튤립이 피어나고 들을 달리던 아이들이 민들레를 건드려 작은 풍선들이 일제히 하늘을 날아오른다 담벼락을 타고 오른 호박들 고구마가 부풀어오르는 가을까지 쉬지 않고 바람이 분다 실편백나무도 겨울을 지내려면 허허실실한 바람이 들어가야 한다 더러 바람이 새어나간 사과들은 빗발에 쉽게 떨어지거나 탄저병에 걸린다 사과를 먹는 것은 바람도 함께 먹는 일이다 적당한 바람기가 우리를 윤택하게 만든다 한 시절을 넉넉히 견디게 한다 머리카락 몇 올이 이마에 나풀거리던 봄이 우리나라 곳곳에 바람을 먹인다 봄은 폐활량이 크다
사라지는 것들 / 조영민
잎사귀가 구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여름을 보냈네 한 번 구겨지면 철근처럼 휘는 잎사귀 양푼에 남은 밥처럼 햇볕을 싹싹 긁어 먹은 것 같은 손으로 웅덩이 속 별들이 구더기처럼 꿈틀대는 밤에 천천히 별을 말아쥐고 구부러졌을 잎사귀 낙엽이 온몸으로 잡으려 하는 것은 깡통같이 텅 빈 석양이었을까 지금은 창밖의 소나기도 구겨지고 단단히 다렸던 달도 구겨진 가을 모퉁이 벌써 가을은 폐가의 문처럼 삐거덕거리네 잎사귀가 구부러지는 줄도 모르고 나는 여름을 보냈네
가을 호수에 앉아 / 조영민
슬픔을 깁는다 피가 스민다 한 땀 한 땀 깁다 보니 길이 보인다 잘 말려둔 분꽃향을 한 뼘 한 뼘 덧대고 저녁의 숨소리도 단단히 덧댄다 슬픔이 수면을 치며 날아간다 호수는 울렁울렁 제 몸에 슬픔을 가두고 머리맡에 달 하나를 띄워두고 나는 달을 접고 또 접어 물갈피에 감춘다 술렁술렁, 귀 같은 파문이 일렁거린다 수많은 귀들이 태어난다 바람에 귀들이 젖는다 나뭇잎 하나가 커다란 귓구멍으로 들어가고 있다 퍼즐처럼 떨어진 이파리들이 검은 물 밑에 가라앉고 있다
조영민 시인 전남 장흥 출생. 2006년 서울예대 문창과 졸업. '시동네' 동인.
■ 심사평
본심으로 돌려진 열 사람의 작품들을 읽었다. 신인으로 등단하고자 치열한 자기 수련을 거친 응모작들이라기보다는 우선 시를 만드는 일에 급급하다는 인상이 짙었다. 시단의 평균 수준에 미달하는 작품으로서는 아무래도 패기 있는 신인으로 내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객쩍은 항간의 희화적인 음담을 시로 쓴 것도 보였는데 도대체 '시정신'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고 그런 언어유희를 감행할 수 있는 것인지. 물론 유희 본능에서 예술이 기원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시가 단순히 유희 자체로 끝날 수야 없는 일이 아닌가. 시는 언어의 보석이며, 그 속에서 빛나는 것은 시인의 영혼이라는 점을 명심할 일이다. 더러는 시의 제목을 영어로 쓴 것도 볼 수 있었다. 아무리 무조건적 경제 우선이라는 해괴한 세태 속에 휩쓸려 산다 할지라도 시인이 자기 정체성을 상실하고서야 도대체 무엇을 제대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시의 본문을 영어로 쓰지 않은 것을 차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는지. 모름지기 시인은 우리말의 최전선을 사수하는 자가 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조영민 씨의 「나뭇잎 과자」외 4편을 당선작으로 민다. 그는 소재에서 시를 끄집어내는 능력이 다른 응모자들에 비하여 가장 돋보였다. 낙엽 밟는 소리를 "과자 깨물어 먹는 소리"로 찾아내는 순수함이 있었고, 「삽」에서는 건설 현장의 늙은 인부들과 "닳아버린 삽들"을 동일시하여 표현하는 따뜻한 시인의 시선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가을 호수에 앉아」는 산문시이기는 하나(굳이 산문 형태의 이런 형식을 써야 할 필연성이 있는지) 자기만의 내면세계를 참신한 감각으로 무리 없이 형상화한 점에 신뢰가 갔다. 이 시인은 앞으로 좀더 폭넓은 사유의 세계에 눈을 돌려 시세계를 넓혀가야 하는 게 그의 과제로 보인다. / 강인한 (시인)
<시와시학> 2008년 여름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