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림으로 그린 듯한 성장과정
김재익 수석은 1938년 충남에서 태어났다. 개인적인 성장과정은 잘 몰라서 기술하지 못하지만 그의 학력과 경력 과정만으로만 볼 때, 흔히들 말하는 엘리트 오브 엘리트였다.
경기중 - 경기고 - 서울대 외교학과 - 서울대학원 (국제정치학) - 한국은행 재직 - 하와이 주립대 대학원 (경제학 석사) - 스탠포드 주립대 대학원 (통계학석사, 경제학박사)
참고로 경기고등학교는 2년만에 검정고시로 클리어해서 서울대에 입학.
그렇게 학업을 마치고 국내에 돌아온 후에는, 살아 있는 경제통이라 불릴 만큼 경제 분야에서 그 능력과 두각을 드러내게 된다.
경제기획원에 근무하면서 단 5년만에 경제기획관 - 기획국장 - 경제협력 차관보를 거쳤으니 그 능력을 짐작해 볼 수 있겠다.
차관보를 거치면서 그는 한국개발연구원의 연구원으로 이직을 결심하는데, 이때 전두환 정권은 그를 대통령의 경제 담당교사로 초빙하게 된다.
이때부터 김재익 수석은 운명처럼 전두환 대통령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경제 분야의 주축을 담당하게 된다.
사람들은 청렴하고 강직했던 성품의 그가 악명 높은 전장군 아래에서 일하게 된 이유가 아내 때문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김 수석은 서울대학원 수료 후 한 여성을 만나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그 신부 이름이 이순자였기 때문. 공교롭게도 전장군의 영부인과 동명이인이다. 실제로는 김 수석의 부인은 그가 5공화국에서 일하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2.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잘 말하는 사람'
김재익 수석이 전장군의 경제교사가 된 이유는 물론 경제분야의 전문가여서였지만, 무엇보다 뛰어났던 건 복잡한 이론이나 지식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시키는 능력이었다고 한다. 예를 들기 위해 그의 일화 중 하나를 꼽자면, 그는 어머니에게 '인플레이션'의 개념을 이렇게 설명했다고 한다.
'인플레이션이라는 건 돈에 물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물을 많이 타면 탈수록 양은 늘어나지만 그만큼 묽어지고, 가치가 떨어지게 됩니다.'
보통 공부깨나 한 사람이면 이론이나 지식을 설명할 때, 원래 그래서이든 일부러로든 복잡한 용어와 전문가들이나 알 수 있는 용어를 쓰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겸손한 성품으로 절대 자신의 지식을 뽐내는 일이 없었고, 이론이 되었든 자신의 사견이 되었든 상대방에게 명료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전장군은 자신이 군이라면 몰라도 경제분야에는 확실히 취약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당시 허화평 등과 같은 유능한 참모진이 있긴 했지만, 단순하고 알기 쉽게 경제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인물로는 김재익 수석이 적임이었다. 이후 김 수석은 전장군의 경제 교사로서 새벽 5시부터 약 두시간씩 경제강의와 경제정책설명 등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이후 전장군이 그를 본격적으로 기용하면서 '경제 쪽은 자네가 대통령이야!'라며 전폭적인 신뢰를 보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3. 안정적인 경제발전으로의 발돋움
수많은 경제적 업적들이 있지만, 이 부분은 누군가 예전에 잘 정리해서 올렸는데 쓸쓸히 묻혀 있던 글을 참조하는 편이 좋을 듯 하다. 내용이 많아 핵심만 캡처했는데, 링크 타고 보는 게 다소 불편하겠지만 한번 보는것도 좋을 것 같다. 여기서는 인플레이션 해결 부분만 서술하려 한다.
원문 링크) http://www.ilbe.com/4762761
당시 5공화국이 직면한 경제적 문제는 인플레이션이었다. 박통 때 실시했던 대기업 중심을 통한 중화학공업 육성화와 수출지향 경공업호황이 경제의 파이는 기적에 가까울만큼 크게 키워냈지만, 그 거대하고 급진적인 외적 발전이 내적으로는 점점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농업을 예로 들자면 성장용 비료를 너무 많이 투입해서 생산량은 늘어났지만 토양이 병들고 있었던 상태라고 보면 되겠다.
김재익 수석은 인플레이션을 막아내는 것이 가장 시급한 문제라 판단했다.
'나라가 망하려면 세가지 현상들이 일어납니다. 인플레이션, 소득분배의 역진, 공무원 부패가 그것입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뒤의 두가지의 원인은 결국 인플레이션 때문이므로, 물가부터 먼저 잡아야 합니다.'
그는 수출 중심에서 수입 중심의 정책으로, 무조건적인 성장지향이 아닌 긴축정책을 택했다. 내부의 반발과 일부 전문가들의 우려도 있었지만, 정책을 진행할때만큼은 그는 확신을 가지고 강하게 밀어붙였고, 결국에는 요동치던 물가를 잡는데 성공한다. 뿐만 아니라 무역 자유화 등을 통해 경쟁력을 키우면서 자생력을 지닌 안정적인 경제가 정착할 수 있는 밑거름을 마련했다.
4. 오늘만이 아닌 미래를 생각했던 미래지향적 경제학자
그는 당시 인플레이션 해결에만 힘을 쏟은 게 아니었다. 그는 지하철과 버스의 연계라는, 지금 기준에서는 우리가 너무나 당연히 누리는 대중교통 시스템과 정보전자통신기술이 대한민국의 주력산업이 될 것이라고 했는데, 이 모든 것들이 1980년대, 30년도 전에 한 사람으로부터 출발했다. 실제로 그가 추진하고 기획했던 모든 것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문민정부 때에 와서야 빛을 발하게 된다.
기업들의 비리거래와 지하경제의 움직임을 막는 기본이 된 금융실명제는 김영삼 정부때의 업적으로 남아 있는데, 사실 이건 김 수석이 야심차게 기획하고 밀어붙였던, 본인이 직접 초안까지 입안한 정책이었지만 전장군이 끝끝내 보류해 버린 케이스. 당시 전장군은 어느정도는 측근들을 감쌀 필요도 있었고, 친인척이었던 장영자 사건 등을 덮기 위해서라도 추진되지 못했다고 보여진다.
요새 워프LTE를 가열차게 밀고 있는, 전국의 통신망 인프라를 책임지는 KT. KT는 김재익 수석이 자신의 후배였던 오명, 홍성원 등의 정보통신분야 인재들에게 전국적인 통신망 확충과 개발을 맡겨 태어난 산물이다. 설립 당시 이름은 잘 알려져 있듯 한국통신. 이후 ISDN, ADSL 등 초고속통신망의 폭발적인 수요라는 열매를 맺으면서 우리 나라가 정보통신 강국으로 부상한 때가 바로 김대중 정권 때. ㄷㄷ
그 외에도 김 수석은 지리적인 이점을 통해 한국을 싱가폴처럼 금융 허브로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해외 금융자본 유치에 중점을 두는데 그 결과 지금의 신한은행과 시티은행(구 한미은행)이 정착되게 된다. 노무현대통령이 꿈꿨던 동북아 경제 허브는 이미 김 수석이 초석을 닦아놓은 뒤였다.
5. 1983년 10월 9일의 비극, 아웅산 테러
이 날은 전두환 대통령의 미얀마 순방이 있던 날이었다. 그러나 일정 장소였던 아웅산 묘소로 가는 시간 조율로 전대통령이 오는 시간이 다소 늦춰지게 되었고, 참모진들만 먼저 가서 도착해 있었는데 그 곳에서 폭탄이 터지게 된다. 전대통령 암살을 위해 북한이 꾸민 엄청난 범죄, 아웅산 테러 사건이었다.
이민호가 주연한 드라마 '시티헌터'에서도 이 사건을 다룬 바가 있으며, 개그맨 심현섭씨 부친께서도 이때 화를 입으신 것으로 유명하다.
이 사고로 발생한 사망자는 17명. 사망자 대부분이 부총리, 대통령 비서실장, 재무차관, 외교부대사, 현직 국회의원 등 정무직의 수많은 중진들이었다. 또한 안타깝게도 이 17명에 포함된 김재익 수석.. 그 또한 순직하고 만다. 45세라는 비교적 젊은 나이에 너무나도 아까운 죽음이었다. 당시 경제 관료이자 현재 한국 선진화포럼 이사장에 있는 남덕우씨는 당시 김재익 수석의 죽음을 두고 너무나도 아까운 인재를 잃었다며 크게 통탄했다고 한다.
그 사건 이후 순방일정은 모두 취소되었고, 대외적으로 늘 강한 모습만 보이던 전장군도 이때만큼은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한다.
6. 조용하지만 추진력있던, 부당한 권력 속에서 불의하지 않았던 사람
김재익 수석의 성품은 물과 같았다고 한다. 어느 곳에서든 강렬함을 발하거나 극적인 행동을 하진 않았지만, 한번 행동할 때는 폭포처럼 강단 있는 모습을 보였다. '앙심 먹고 ~한다' 라는 그의 말버릇처럼, 그는 한번 자신이 시동을 건 일은 멈추지 않고 진행시키는 뚝심이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반대세력만이 아닌 전두환 대통령마저 강력하게 반대했던 법안도 소신있게 밀어붙여 관철시켰는데, 그때 그 정책이 현재 우리나라 세금 재원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부가가치세 법안이다. 이 정책 하나로 대한민국의 예산 바운더리의 레벨 자체가 달라진 셈.
또한 그때 당시는 인사청탁이 난무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단 한번도 받아주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거부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김 수석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옷장에서 수백장의 이력서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었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또한 인사청탁을 부탁받았지만, 아들에게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알리지 않고 조용히 묻어두셨던 것.
7. 김재익의 빛과 그림자
김재익 수석에게 있어서 좋은 업적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김 수석에게 부정적인 입장을 지닌 당시 3허 중 한명이었던 허화평씨는 김 수석의 정책에 꽤나 문제가 있는 것들도 많았다 한다. 지금도 한창 잘나가는 중화학공업 정책이 인플레를 불러오는 주범이라 판단, 중화학분야에 크게 부정적이었다는 점은 분명 지금 기준에서는 잘못된 점이라 할 수 있다. (근데 또 아이러니하게도 이걸 못하게 보류시킨게 전두환 대통령;;)
또한 급격하고 안정적인 경제발전 자체도 당시 3저현상에 힘입은 기적으로써, 어느정도 그의 면목보다는 다소 부풀려진 점이 많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하지만 그를 알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두가 말한다. 그가 아웅산 테러로 죽지 않았다면 한국 경제는 지금보다 훨씬 달라져 있었을 것이며, 전두환대통령 또한 학살자의 이미지로만 남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그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멀리 경제를 바라보고 실행했던 선구자이자, 조용함 속에서 거침없이 행동하는 경제개혁가였다고.
될 수 있다면 모두가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간간이 올라오는 '전두환 대통령의 위엄' 등과 같은 경제안정화 업적들의 뒤에는 모두 한 사람, 지금은 국립현충원 제1유공자 묘역에 잠들어 있는 김재익 수석이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