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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일이가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내게 내밀었을 때… '이제 글 못 쓰겠다' 그런 생각 들더라
장편소설 '만다라'의 작가 김성동이 한 중앙지 문학 담당 기자와 인터뷰 할 때다. 인터뷰를 요청받은 김이 인터뷰 장소로 경복궁 근정전을 골랐다. 김은 기자에게 소주를 사오라고 했다. 둘은 죽기살기로 깡소주 갖고 낮술을 그렸다. 김은 현장에서 절대 자기 얘기를 적지 못하도록 압박을 가했다. 묻고 대답하고, 그래선 자기를 절대 읽을 수 없다고 했다. 대취한 기자는 다음날 숙취를 머금고 아지랑이처럼 아물거리는 어제의 '난담(難談)'을 누비옷 깁듯 기사로 적었는데 김은 그 글에 적이 흡족했다고 한다. 도처에 시인이다. 그런데 시는 '골다공증'을 앓고 있다. '샐러리맨' 같은 나약한 시인의 일상. 더 이상 그들한테서 '원시적 아우라'를 발견하기 어렵다. 먹고살기 어렵다. 객기가 아니라 민·형사에 저촉되지 않는 '광기(狂氣)'가 그리운 시절, 한 시인을 추억해본다. 그 시인의 별명은 '뜬금없이'다. 그는 장정일의 문학적 출발점에 서있다. 장정일이 문학적 방황을 할 때 시를 어떻게 쓰는 지를 통합논술 개인지도하듯 가르쳤다. 덕분일까, 장정일이 87년 '햄버거에 대한 명상'으로 한국 최연소로 김수영 문학상을 거머쥔다. 하지만 그는 그 일로 인해 더 시에서 멀어진다. 장정일은 날로 그의 문학적 아우라를 넘어서고 있었다. 지역 시인들은 그를 'UFO'쯤으로 치부한다. 동굴처럼 살다가 어느 날 야반도주하듯 대구를 떴기 때문이다. 지난 20여년간 지역 문인들도 잘 모르는 반짝거리는 일을 만들며 다녔다. 방송가에선 꽤 유명해 '다큐멘터리물의 귀재'로 평가한다. 고교 중퇴인데도 서울 방송가에서 그의 저학력을 문제삼는 이는 없었다. 실력 때문이다. 미국 하버드대 출신 승려 현각을 등장시켜'만행(卍行)'이란 프로그램을 만든 것도 그였다. 도올 김용옥의 유학시절 얘기도 적었다. 방송 때문에 10여년간 전국을 이잡듯 뒤지고 다녀 그만큼 전국의 절대풍경을 꿰차고 있는 이도 드물다. 한국 사찰의 족보와 선승들의 이면도 뒤졌고, 한때 출가할 뻔 했고, 이젠 옻전문가로 변신해 있다. 지난 13일 오전 11시30분 동대구역 로비에서 그를 만났다. 흰 구레나룻, 철지난 우중충한 상의, 형형하면서도 해쓱한 표정. 앞산의 한 옻닭집으로 자리를 옮겨 반주를 겸해 인터뷰했다. 그는 체인스모커, 담배를 손에서도 놓지 않았다. 그는 이 인터뷰가 어쩜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다고 고백했다. 오후 5시쯤 그와 헤어졌다. 그가 명덕네거리 근처까지만 데려가달라고 부탁했다. 차에서 내려 걸어가는 그의 뒷 모습에서 모처럼 청명한 시마(詩魔) 한자락을 발견했다. 내 울부짖은들 천사의 대열에서/어느 누가 귀담아 들어 주랴(릴케의 장시 '두이노 비가' 도입부) # 장정일은 독서광…그게 부럽다 - 다들 장정일의 오늘을 있게 한 인물이라고 기억하는데. "정일이가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내게 쑥스럽게 내밀었을 때 굉장히 기뻤다. 첫 장을 넘기자 이제 글 못 쓰겠다 이런 생각이 들더라.'이 유고 시집을 나의 스승이신 박기영 형에게 바칩니다' 이렇게 쓰여 있었던 것 같다. 문득 엘리엇이 에즈라 파운드에게 쓴 서문이 생각나더라. 그 뒤에 에즈라파운드는 한 동안 글을 제대로 발표 못했다." - 장정일이 꼭 회색인간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 도대체 어떤 사람인가. "장정일을 마지막 본 건 모친 장례식장이었다. 그때 난 '이 친구 세상 넘어가는 능력이 탁월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독서광이다. 그게 정말 부럽다. 나는 책을 놓은지 20년이 넘는다. 난 길은 책 밖에 있고 삶은 행동이라 본다. 그 친구는 활자 속에서 출렁거리면 살고 있는 것 같다." - 대구 시절 심지다방에서 세기말적 난동을 부렸던 것 같은데. "심지라, 중앙파출소 맞은편에 있던 지하다방, 내게는 '마음의 땅'이다. 거기를 아지트로 정한 건 내가 대구YMCA 옆 한국미술학원에서 급사를 하고 있어서 다. 참 쟁쟁한 젊은 시인들이 거기로 몰려들었다. 대건고 박덕규, 부산의 이산하, 전주의 하재봉, 서울의 류시화(안재찬), 이문재, 대건고의 안도현, 계성고의 구광본, 대건고의 이정하, 이인화, 박남철 등이 성지순례하듯 왔다. 심지는 당시 서라벌 예대 다음으로 문학이 세다는 경희대 문학과 직거래했다." - 이후 시로 안나가고 전방위 방송작가로 터닝한 이유는. "시의 외연이 넓어졌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82년 언론사 신춘문예에 시 '사수의 잠'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고 뒤에 두번째 시집 '숨은 사내'를 통해 세기말적 기운을 뽑아내고 지쳐버렸다. 나도 먹고 살아야 했다. 언론 통폐합된 후 서울 언론들의 지방 거점이 사라졌다. 자연 지방의 얘기를 전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나도 그 수요에 부응했다. 전국 장터 얘기, 이철희·장영자 사건과 포항 5인조 강도 사건의 뒷얘기도 추적했다. 밤에는 염매시장, 곡주사 등에서 술을 마셨고, 배용균 감독이 만든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의 스태프를 중심으로 영상다큐물도 만들었다." # 방송작가 변신…10년간 전국일주 - 당신은 방송 일 때문에 10년간 전국 일주했다. 그건 큰 복인 것 같다. 그래서 대한민국 산하의 족보를 꿰차고 있는 것 같다. 계절별 여행포인트를 정리해달라. "대한민국, 참 좋은 곳이다. 봄에는 달마사 -해남- 미황사 부도전 루트가 끝내준다. 또 지리산 상무주 가는 길도 죽인다. 영원사에서 상무주로 가는 외길 진달래와 철쭉이 피면, 그 길 끝에 놓인 상무주 앞이 또한 절창이다. 여름에는 울진 왕피천 최상류에서 영양 수하 계곡으로 가는 길, 가을에는 태백산맥 고갯길을 찾아라. 태백에서 노령산맥으로 뻗어내린 고갯마루에서 노랗게 물든 분지의 가을과 그 사이를 오가는 구름. 뭐 이런 것들만 보아도 편안할거다. 겨울은 정선에서 동해로 넘어가는 백복령 길목인데, 눈이 내리면 차가 끊기니 날이 저물 때 올라가서 태백산맥이 남쪽으로 달리고, 바다는 하늘을 가르고, 지나온 길이 땅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보는 재미도 괜찮을거다." - 프리랜서 활동 중에서 가장 보람있었던 프로그램은. "서울서 방송작가를 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쓰러졌다. 아버지는 대구에서 맨처음 옻닭집 맹산을 연 한량이다. 미치도록 돈 벌어 허망하게 탕진하는 스타일이었다. 아버지 때문에 대구서 잠시 머물렀는데 그때 대구 KBS 제작부장으로부터 부탁이 들어왔다. 5부작에 제작비만 3억원 들어가는 작품인데 계획대로 안 흘러가고 다큐 제작비도 얼마 안 남아 궁여지책 끝에 낙동강 1300리 여성 탐험대를 만들었다. 낙동강 페놀 사태 이후였다. 여성의 눈으로 어머니 강, 낙동강을 체험시키는 콘셉트를 정했다. 아마 지방방송국 다큐물 중 시작부터 보름간 반향을 피운 건 이게 유일할 거다. 그 해 방송대상을 받았다." # 6·25전쟁은 원자폭탄과 관련있다? - 6·25전쟁이 원자폭탄과 관련성이 있다면서 밀착취재를 했다는데. "나는 6·25전쟁의 기원을 원자폭탄 전쟁으로 보는 사람이다. 피란민인 아버지한테 '왜 피란 오셨어요?' 하니까 '원자폭탄 때문이야. 그 무서운 일본놈들도 그것 때문에 망했다'고 말했다. 일본이 흥남에서 원자폭탄을 개발하려고 했던 사실들을 파고 들었지. 6·25전쟁 뒤편에 서 있는 미국 군수업체, 일본의 행동, 소련의 희귀금속 강탈 등등. 모스크바 KGB 창고에 관련 정보가 남아 있다고 한다." - 요즘 현각 스님이 뜨고 있는데 그 분을 한국에 맨처음 소개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만행은 하버드 출신의 현각 승려 이야기이다. 원래 아리랑 방송에서 한국을 떠나면서 만들었던 작품이다. 내가 아는 스님과 그의 만행기를 옮긴 것인데, 출연하기로 한 스님이 사라지는 바람에 대타로 현각에게 초점을 맞추었다." - 방송과 결별하고 다시 대구 만촌동으로 돌아와 칩거했는데 그때 어떤 성찰을 했는가. "한국 방송은 보수적이고 급진적 팩트에는 몸을 사린다. 한 마디로 정치적이다. 서울 신촌 봉원사, 원자폭탄 이야기 등 내가 만들었던 세 작품 모두 방송불가였다. 만촌동. 그때 나는 다른 장르를 꿈꾸고 있었다. 방송 카메라도 있고, 시간적인 여유. 그래서 영상시라는 것을 시도해 보고 싶었다. 그때 구상한 것이 블로그에 영상으로 시와 소설 그리고 여러 가지를 섞고 싶었다. '나 자전거가 생각하기에 세상은 바퀴를 굴리는 자와 굴러가는 바퀴를 바라보는 인간이 있다' 이렇게 첫 문장을 써 놓고 종일 사이클 선수들을 관찰했다." # 이제는 옻 전문가로… - 그런데 어떻게 갑자기 옻 전문가로 변신하게 됐나. "만촌동 시절 한 사람이 찾아왔다. 아버지가 운영하던 맹산 옻닭집 다니던 사람인데 옻에 관한 책을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그래서 다시 옻에 대한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마지막으로 영천 황물탕 옆에 옻나무 숲을 만들어 옻샘을 만들려고 했다. 그 물로 된장을 담그면 먹고 살 걱정이 없다는 얘기였는데, 그 때부터 나는 옻에 홀려 옻의 산지 충북 옥천까지 왔다. 원래 옥천은 우리나라 삼대 옻 주산지 중 한 곳이다. 인연이 있어서 그런지 남쪽의 옻 주산지인 원주 신림, 함양 마천에도 살았다. 처음에는 그냥 그 동네에 있는 조그만 빈 집 하나 구해서 책을 쓰려고 했다. 원자폭탄 이야기, 비구니 사찰 이야기, 옻 이야기, 된장 이야기, 계약금도 세권이나 받았다. 책 쓰는 동안 먹고 살아야 하니까 옻된장이나 만들어 팔려고 했다. 옻에 더 깊게 간여할 수밖에 없고 결국 5년전 내가 주도해 옥천을 옻특구로 만들었다. 280여 농가가 40만 그루를 식재했다. - 당신을 폐인, 엉뚱한 사람, 좌충우돌 말썽꾼 등등으로 언급하는데 당신은 어떤 사람인가. "선배들이 나에게 라스트 건맨이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최후의 총잡이, 낭만주의 끝에 서 있는 인간이란 뜻이겠다. 70년대 순수를 주장할 때 참여였고, 80년대 참여를 주장할 때 순수를 섬겼다. 시대 유행에 동조하지 않고 싶었다. 차라리 폐인이었으면 좋겠다. 삶을 시처럼 살아 보려다 실패한 것 같다." - 지금은 돈 없으면 힘을 못쓴다. 돈과 도(道)의 상관관계에 대해 설명해달라. "사실 내 주머니에 돈이 남아 돌았던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어렸을 때는 선배들 등쳐서 술 얻어 먹는 재미로 돈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친구들 모두가 가난 했으니 가지고 다닐 필요도 없었다. 돈을 돌아가게 하는 것이 도이다. 너무 한곳에 오래 고여 있으면 썩게 되는 게 도다. 깨달음? Let me see?" ))) 박기영은 195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나 대구서 자랐다. 82년 언론사 신춘문예 시부문에서 '사수의 잠'이 당선돼 문단에 나왔다. 87년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란 시집으로 한국 최연소로 김수영 문학상을 받은 장정일의 문학적 스승으로 화제가 된다. 고교를 중퇴한 뒤 '대구의 이상'처럼 예술지상주의적 행각을 벌인다. 대구시 중구 심지다방을 베이스캠프로 삼아 경희대 78학번 박덕규, 하재봉, 이문재, 류시화 등과 직거래하면서 대구 문단에 세기말적 문학풍조를 조장한다. 80년대 언론 통폐합 상황에서 전방위 프리랜서 작가로 변신한다. 80년대 낙동강 페놀사태 이후 낙동강 1300리 여성 탐험대를 조직해 환경다큐물을 만들어 방송대상을 차지한다. 이어 대구~서울~캐나다를 오가며 KBS전국일주, 사이언스 2000년, 6시 내고향, 신한국기행, 특종 비디오 저널, 현각 스님의 만행, 원자폭탄 이유 등 굵직한 다큐물로 서울 방송가에서 주목받는다. 이후 아리랑TV, 바둑TV, 불교TV, SBS 비디오 저널리스트로 활동 폭을 넓힌다. 5년전에는 대구서 처음으로 옻닭을 소개한 아버지의 뜻을 잇기 위해 옻 연구가로 변신, 충북 옥천에 진을 치고 옥천 옻특구의 산파역이 된다. 현재 옻 된장과 간장 보급에 앞장서고 있다. |
첫댓글 아하!!평소 내심 궁금한 내용이 실린 기사 잘 봤습니다.철길사진은 바람같습니다^&^-종의 생존과 지속적인 번영-이제까지 자연에서 그 이상의 원칙을 발견하지 못했다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오감을 섞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진화한다(다윈 그 후 어쩌구에서...) ... 참옻들의 도전과 진화를 위해 건배!!../우리를 키운 건 8할의 바람이었다 (미당서정주시인).
평소 내심 그리 궁금한게 뭐 였수? 물어나보지..ㅎ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