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고추농사
문일선
올해도 고추를 심었다. 아카시아 꽃이 필 무렵, 땅에 지온이 최하6도가 유지 되면은 우리는 고추밭을 다듬는다. 겨울철 내내 잠자고 있는 밭을 깨워 인심이 후한 농부인양 푸짐하게 밑거름을 넣어주고 그래도 양이 덜 차 미량요소인 붕사와 병충해 방제약품을 고루 뿌려 이랑에 비닐 멀칭을 한다. 고추는 매운 농사다. 모종을 심는 순간부터 일거리가 주렁주렁 열매만큼이나 매달려있는 작목이다.
7월의 따가운 햇볕아래 농부의 구술땀으로 익어가는 고추농사가 우리부부에게는 갈수록 힘이 부치어 금년에는 달랑 50주만 심자고 몇 번씩 다짐했던 밭두렁의 약속도 헌신 발 내팽개치듯이 오히려 공을 하나 더 얹혀 500주를 덜컥 심고 말았다. 그놈에 욕심과 어리석음이 서로 만났으니 고생은 불 보듯 뻔하다. 이제 별수 없이 뙤약볕과 맞장을 뜨게 생겼으니 고추처럼 매운 시집살이 문은 활짝 열리고 말았다.
내가 굳이 고추농사를 짓는 데는 나름 이유가 있다. 과도한 농약사용을 피하고 주기적인 예방 방제로 농약으로부터 비교적 안전한 고추를 얻기 위함도 있지만 그 보다 나에게는 고춧가루에 얽힌 어머님의 아픈 기억이 눈앞에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이다. 중학교 1학년 때다. 이른 아침 장에 가시는 어머님을 따라나섰다. 산비탈을 손수 개간하여 여름 철 내내 가꾼 마른고추 20근과 참깨 2되가 담긴 보퉁이를 머리에 이고서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산허리를 휘어 감고 있는 마을뒷산 큰 고갯길에 올랐다.
나는 어머니의 치맛자락사이로 얼핏얼핏 보이는 하얀 고무신을 따라 걸었다. 고갯길은 점점 가파르고 숨이 턱까지 차올라 이내 헉헉 거렷다. 어머니는 그런 내가 안쓰럽게 보였는지 자꾸 뒤돌아보시며 “아가 다리 아프지? 연신 염려스러운 눈길을 보내셨다. 생각해보면은 무거운 짐 머리에 이고 계시는 어머님이 나보다는 몇 곱절이나 힘이 들었을 텐데, 그때는 어리다는 이유로 그걸 몰랐다. 우리는 몇 번씩이나 숨을 고르며 고갯길을 넘어서 삼십 리 길의 굴다리 방앗간에 도착했다. 다리위로는 철로가 지나가고 아래는 우마차가 지나는 양동시장으로 들어가는 북동 굴다리 장목이었다.
장날이면 장사꾼 들이 미리 나와 길 양편으로 쭉 늘어서서 시골에서 가져간 농산물을 흥정하는 곳이기도 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로 연기에 검게 그을린 방앗간에 고추방아와 참기름을 짜 기위해서 아침 일찍 서둘러 왔지만은 먼저 온 사람들이 기름때가 번질거리는 나무의자에 즐비 하게 앉아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방앗간의 메케한 연기를 피해 길 건너 대장간으로 다가갔다. 시뻘겋게 달구어진 쇳덩이가 망치소리에 맞추어 낫도 되고 호미가 되어서 나오는 것이 참 재미있고 신기했다. 대장간의 옆에는 자전거포도 있었고 옆에는 하얀 쌀을 멍석위에 수북이 쌓아놓은 쌀집과 조금 떨어진 곳에 약방도 보였다. 모두가 시골과 달리 낯선 풍경이었다.
바로 그때다. 바로 코앞에 있는 국밥집의 가마솥에서 펄펄 끓어오르고 있는 순대국 냄새에 이끌리고 말았다. 내 어린마음에도 다른 사람들에게 눈치체일까 싶어 지나쳐가면서 슬쩍 한번 오면서 또 한 번 국밥집에 눈을 떼지 못하고 곁눈질로 힐끔힐끔 거리며 그 앞을 맴돌고 있었다. 드디어 정오를 알리는 오포소리가 울리자 가마솥 안에서 있던 돼지순대가 좌판대위로 성큼 올라왔다. 자르르 기름기가 흐르는 뜨거운 김이 무럭무럭 피워 오른다. 어디 그뿐인가 갓 삶아내어 물기를 머금고 있는 쫄깃한 국수사리는 금방이라도 후루룩 목구멍으로 넘어 갈 것만 같아 입안 가득고인 침이 꼴깍 넘어가고 만다.
나는 어머님이 쳐다볼까 싶어 억지로 고개를 옆으로 돌렸지만 이미 돼지순대에게로 끌려간 내 눈길을 놓아주지 않았다. 진한 국물냄새가 사방으로 휘젓고 다니자 뱃속에서도 꼬르륵 꼬르륵 맞장구를 치면서 야단법석이다. 넌지시 내 모습을 바라보시던 어머님이 “아가 배고프지? 그래도 나는 아닌 척 고개를 가로 저었다. 어머님은 내손을 이끌고 길 건너 가판대로 갔다. 나무판자로 만든 사과상자위에는 벗겨진 껍질 사이로 노란속살이 빠끔히 보이는 빨간 밤고구마가 큰 것과 작은 것으로 편이 갈라져서 3개씩 꼬챙이에 꿰어져 있었다.
어머니는 작은 꼬챙이를 집어서 그중에서도 큰 것을 빼어서 나에게 주시며 체하니 먼저 물을 마시라며 주전자에 물을 한 컵 따라주시더니 어머니도 벌컥벌컥 연거푸 몇 잔을 마신다. 그러고 나서 당신은 이제 배가 불러 더 이상 못 먹겠다고 한 개 남은 고구마를 한사코 내 앞으로 밀어 놓고 일어나셨다. 나는 그런 어머니의 성화에 못이기는 척, 한개 남아있는 마저 게눈 감추듯이 먹었다. 어머니의 잔잔한 미소가 스쳤다. 내배가 아무리 고픈들 새벽부터 무거운 짐 머리에 이고오신 어머님의 허기에 비할까?
하루해가 가로수의 미루나무에 걸려있을 때에야 우리는 방앗간을 나섰다. 급해진 발걸음을 재촉해 봤지만 고갯길아래 당도 했을 때에는 별빛하나 없는 어둠이 이미 내려 앉아있었다. 나는 앞장서신 어머님을 바짝 뒤따르고 있지만 고갯길의 무덤 앞을 지나칠 때 마다 귀신이 벌떡 일어나서 내 머리 뒷 꼭지를 잡아당길 것만 같아서 오금이 저리고 땀은 홍건하게 배여 나왔다. 어머니와 나는 서로가 말 한마디 못하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드디어 고갯마루에 올라섰다. 멀리 마을의 불빛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서야 쭈뼛거리는 무섬증도 사라지고 이제는 집에 나왔다는 안도감에 젖어 있을 때다. 갑자기 앞서 가시는 어머님의 비명소리가 들리고, 머리에 이고 있던 대야가 저만치 굴러 떨어졌다. 어머니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것이다. 당신에 상처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방으로 흩어진 고춧가루와 참기름 냄새가 진동하는 깨진 유리병을 손에 움켜쥐고 너무나 허망하고 망연자실하여 울먹이셨다. 차비가 아까워 어린자식 하루 종일 굶겨가며 걸어왔는데 아이고, 이를 어쩔 거냐!
어둠속에 묻혀버린 골짜기에는 애달픈 흐느낌만 일렁이었고 선혈이 낭자한 어머님의 손을 붙들고 쏟아지는 나의 눈물은 땀에 절여서 짭짤하게 간이 매여 있었다. 세월은 60여년을 훌쩍 넘겨버렸지만 지금도 그날의 고갯길의 참기름 냄새와 고춧가루로 붉게 물들어진 길바닥위에서 애통해 하시던 어머님의 얼굴위에 빨갛게 고추가 익어가고 있다. 그래선지 나는 해마다 봄이면 연례행사처럼 어머님의 고추농사를 시작한다.
첫댓글 아주 감동스러운 글입니다. 차비 아끼려고, 수확한 고추와 참깨를 머리에 이고 삼십 리 고갯길을 걸어가, 굴다리 방앗간에서 참기름 짜고 고추 빻았는데, 그만 돌아오던 어두운 산길에 넘어져, 참기름 병 깨지고 고춧가루 흩어졌으니...
막 삶아 냄새 풍기는 돼지 순대 대신, 삶은 고구마 사 먹고 물 배 채우던, 어머니와 함께 겪은 어린 시절의 눈물겨운 추억이 다시 고추 500주 심게 하는군요. 모종 심는 순간부터 일거리가 주렁주렁 매달리는 고추를.
('다음 맞춤법 검사기'에 옮겨 오타 몇 군데 수정하면 좋겠습니다)
삼일선생님 감사합니다.
다음 맞춤법은 검사기 한번도 사용 안해 봤는데 배워볼랍니다.
도움을 주시어 정말 고맙습니다.
@뱃사공 아, 저런. 어쩐지 그러신 것 같았습니다. 검사기 사용법 간략히 작성해서 올려드립니다.
@삼일 이재영 안그래도 딸이 오면은 물어볼까 했는데 자세한 사용법 알려주시어 고맙습니다.
며칠전에도 한글 글자크기 조절하는 법을 잃어버려 딸한테 물어 다시 배웠습니다.
늙어도 낡지는 마라고 했는데 그게 그리 쉽지가 않네요. ㅋ
@삼일 이재영 배움을 주신 삼일선생님 덕분에 지금 당장 사용하고 있습니다.
@뱃사공 네, 금세 익히셨군요. 저 글은 내용이 좋아서 어디 수필 공모전에 응모해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엽서시 문학공모" 들어가면 각 장르의 거의 모든 공모전이 다 자세히 나옵니다. 등단을 위한 '신인문학상' 부문과 상금이 걸린 각 주제별 문학상이 있으니, 찬찬히 살펴보시면 적당한 공모전이 있을 겁니다.
(예를 들면, "제15회 한민족 효사랑 글짓기 공모전"이 얼핏 보이네요. 상금 수십 만 원에 7월 말 마감입니다.
혹시 수필가 등단을 생각하시면, "제62회 '문학의 봄' 신인상 공모" 추천합니다.마감 4월 30일)
소중한 추억입니다.
코끝이 맵싸해집니다.
그 시절은 어찌그리 가난했는지요~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낡아가고 있는 저는 콘크리이트에 갇힌 가난만 알았었는데
구수하고 넉넉한 촌에도 이런 아픈이 있었군요.
'아가, 배고프지?' 나를 아가라 불러 주시던 어머님을 어찌 잊을 수 있으시겠나요?
몸도 완전치 않으시다면서 고추 모종 500주를 심으셨다기에 컴에다가 눈을 흘겼습니다만
다 읽고나니 고개가 주억거려 집니다.
고추장이나 김장을 담지 않는 들할매네는 고작 1~2근이면 일년을 살 수있는 고추가루인데
어머님은 그리움으로만 두시고 담부턴 쬐끔만 하시기를....
남는 여유는 사모님과 도란도란 행복하셔요.
맞아요 그 시절에는 그렇게도 모두 가난했습니다. 따지고 보면 불과 몇십 년 전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