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중도의,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올바른 마음의 판단에
기초한 생활의 매일매일의 노력이 이루어질 때,
자신 속으로부터 독선적인 마음은 사라지고,
인류는 모두 형제라고 깨닫고,
위대한 자애의 힘으로, 우리의 영위기(靈圍氣)는 높아져 간다.
자기가, 중도를 밟지 않고 해 온 결점의 수정을,
용기를 갖고 했을 때, 마음은 정화되고,
자기 자신이 광명으로 충만되어 가는 것이다.
마음의 정화(淨化)가 나아감에 따라,
수호령이나 지도령이나 혼의 형제들은,
우리의 새로운 혼의 진화에의 노력에 대해서,
서로 협력하여 영감을 주거나, 직접 말을 걸어,
인생의 지침을 올바르게 가르쳐 준다.
지도령(指導靈)은, 새로운 인생학습에 대하여 가르쳐 인도하며,
그 마음에, 스스로 깨달을 수 있는 광명의 길을 열어주어,
보다 나은 방향으로 바로잡기 위한 협력을 아끼지 아니한다.
반대로, 자기보존이나 자아아욕, 교만 따위가,
그 마음에 싹트면 어두운 영위기로 스스로의 마음이 뒤덮혀 버리기 때문에,
지도령이나 수호령들의 협력을 얻지 못한다.
그뿐 아니라, 지옥령이나 동물령, 끝내는 마왕에게,
그 마음을 침범 당하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의 움직임은,
그처럼 선악(善惡) 어느 쪽으로도 변하기 쉬운 것이다.
올바른 마음의 토대가 되는 법칙을,
확실히 알아야 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말법의 세상이 되면, 인간은 판단하는 마음의 척도를 잃기 쉽다.
스스로 혼란에 빠져, 부조화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
부조화의 씨앗은, 결국 자기 스스로 뽑아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제거하지 못하면,
혹독한 지옥계에서 그 부조화한 마음의 수정을, 완수해야 한다.
지옥계로 가는 결정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선(善)한 신(神)의 마음이,
자기자신의 인생항로에서의 마음의 본연의 자세와 행동을 재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자기를 재판하는 것이며,
그 재판은 공정무비한 판단으로 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현상계의 재판은,
인간이 만든 법률에 의해서 타인을 재판하고 있다.
재판관의 생각이나 사상적인 배경, 개인적 감정도,
그 판결에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나 본래 인간이 인간을 재판하는 것은 할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피고의 신병 구속(身柄拘束)으로,
육체적인 행동은 제한할 수 있어도, 마음의 속박은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음은, 스스로의 상념에 의해서, 자유자재로 변하는 것이다.
그러나 중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 마음은,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만다.
특정한 종교가들은, 벌을 받는다고 해서,
신자의 마음에 족쇄를 채워, 조직의 세포로 만든다.
신불(神佛)은, 절대로 벌 같은 것은 내리지 않는다.
벌은 스스로의 마음과 행위가, 만들어 내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릇된 교리를,
욕심많은 사람들에게 강제로 주입시켜서 악용하고 있는 지도자는,
자신의 마음속에 큰 의문을 가지고 있을 터이다.
의문을 가지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마음의 영역을 점점 더 작게 하여, 풍부한 마음을 잃고 만다.
제목이나 경문을 올리면 구원받는다.
등으로 뇌세포만 혼란시킬 뿐, 마음의 평안은 얻을 수 없다.
스스로의 마음의 존엄성을 깨달았을 때는,
헤매고 있었던 그러한 자기자신을 안타깝게 생각할 것이다.
태어날 때까지는, 천상계에서, 마치 영화의 스크린에 비친 화면을 보는 것처럼,
이 지상계의 험한 생활을 충분히 알고 있었는데도.
성장함에 따라서 미망(迷忘)의 인생을 보내고,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어 내고 마는 사람들이 많다.
둥글고 넉넉한 마음에 왜곡을 만들어,
상처투성이의 인생을 보내고 마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세 걸음 나가면 한 걸음 물러서서,
자기의 마음과 행위를 반성하여, 괴로움의 씨를 뿌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반성이란,
내재된 위대한 지혜의 샘을, 파는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차원을 초월한 실재의 세계로부터,
그 사람이 구하는 질(質)과 양(量)에 비례한,
모든 지혜를 빌려주는 지도령들의 존재가 있다.
반성은,
자기를 새롭게 다시 보는, 의식의 전환 작용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자기를 새롭게 다시 본다는 것은,
자기를 객관적으로 보는 일이며 거기에는,
자아가 있어서는 안 된다.
객관적으로 보면, 자기의 결점이나 장점이 확실히 나오는 것이다.
그 결점을 고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그 뿌리를 뽑아 없애는 것이다.
자기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수호, 지도령도 동시에, 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의 마음속에는, 진실과 거짓이 동거하고 있는데,
반성에 의해서, 거짓된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낼 수 있다.
그것이 반성의 크나큰 공덕이다.
결점의 뿌리가 제거됨에 따라,
우리는 깨달음에의 일보를 도장찍은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음에의 단계가 전진함에 따라,
관자재(觀自在)의 힘이, 우리의 마음속에서 솟아 나온다.
자유로운 마음을 얻어, 집착에서 벗어나,
생사를 초월한 대오(大悟)를 얻는 것이 가능하도록 되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고독하지 않다.
마음의 세계, 실재계에는,
우리의 혼의 형제들이나 친구들이 있어서,
항상 현상계에서 수행하고 있는 우리들을, 지켜봐 준다.
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육체주의 오관번뇌도,
이와 같은 경지가 되면,
바로 소멸하여,
스스로 깨달음의 보리가 되는 것이다.
(주;
벌*번뇌--->반성--->보리
마음에 일어나는 욕심으로 인한, 육체의 반응,
채워지지 않은 욕심으로 인한, 육체의 부조화.
우리는, 육신만이 아닌 영혼의 존재라는 믿음의 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육신을 위한 욕심은 허망하다는 것을 알겠지요.
영혼의 존재가 긴가민가 할 정도라면, 믿음의 정도가 낮으면 낮을수록
육신을 위한 욕심은 어느 정도 당연하다 생각할 것입니다.
반성은, 우리는 영혼의 존재임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것이 아닌지요.
그래서, 육신을 위한 욕심을 채우려고 한 것에 대한,
실수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아차차 실수이다.’ 라고 반성할 때, 웃음과 함께, 기쁨이 일어나더군요.
특히 어렸을 때의 일이...
(자는 도중에 말이죠..신기하게도...마음에 기쁨이...)
인연있는 이여,
참고하소서,
P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