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소중한 당신 7월호 연재 - 눈을 뜨니 보이네"
“너나 잘 하세요.”
송용민 신부
권위 상실의 시대이다. 가정에서 부모도, 학교에서 교사도, 교회에서 성직자와 수도자조차도 예전처럼 무조건 존경 받고, 권위를 내세울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엄마들은 입버릇처럼 “우리 아이는 내 말을 도통 듣지를 않는다.”고 푸념하고, 학교에서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혼내는 것이 두렵다고 하소연한다. 연일 사회를 뒤흔드는 안면수심의 사건 사고들을 보면 사회 질서와 가치관을 형성해주는 기존의 권위들이 무너지고, 과거처럼 모두가 문제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권위를 찾기가 힘들어졌다.
옛 향수를 일으키는 “옛날에는 말이야”라고 한탄 섞인 이야기도 이제는 세상 물정 모르는 한물간 사람들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부모님을 향한 효도의 의미도 달라졌고, 학교에서 선생님을 향한 존경심도 사라진지 오래다. 부모는 재정적인 후원자가 아니면 잔소리와 자식에게 짐이 되는 존재가 되어버린 듯 하고, 선생님들은 스승의 날에 아이들과 학부모이 주는 선물이나 촌지를 피해 다녀야 하는 우스운 신세가 되었다.
어린이 미사 강론 시간에 아이들에게 “나에게 엄마는 어떤 사람일까요?”하고 질문을 던져본 적이 있다. 마이크를 들고 대답을 구하던 내게 어떤 어린이는 “밥 해주는 사람”, “잔소리 하는 사람”이라 당당하게 말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이 언제냐는 물음에는 “엄마가 집에 없을 때”, 이유인즉 하고 싶은 오락을 실컷 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해 성당 뒷자리에 앉아 있던 엄마들을 당혹하게 만든 적이 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고 있는 여동생과 매제를 가끔 만날 때면 요즘 초등학교 선생님들의 꿈은 빨리 은퇴하고 연금 받아 편하게 사는 거란 말을 듣는다. 아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학부모들을 대하는 것이 더 힘들기 때문이라니 할 말 다했다. 엄마들이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건 효(孝)의 도덕적 가치라기보다는, 자식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낼 수 있는 재정적이고 실용적 능력에 좌우되는 세상이다. 농담처럼 회자되듯이 자녀의 성공비결은 할아버지의 재정능력,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라는 말까지 들리고, 도가 지나친 엄마들의 내리 사랑은 입시교육을 넘어 대학생활과 군대생활에까지 미치고 있으니 기성세대가 보기에 환장할 노릇이다.
종교에서 누리던 성직자의 권위 상실도 예외는 아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관리하고 전달하는 성직자들이 누렸던 과거의 독선적 권위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성직자들에게 바라는 도덕적 요청은 둘째 치고, 인격적인 성숙이 되지 못한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설자리가 좁아지고 있다. 사제의 독신생활이 안쓰럽게 여기던 신자들은 이제 ‘무자식이 상팔자’인 사제들을 부러운 눈으로 쳐다본다. 완전히 달라진 세상이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권위를 필요로 한다. ‘권위’란 때로 내가 심정적인 동의를 하지 않아도 나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권력’과는 다르다. 권위는 내 삶을 더 가치 있게 만들어 주고, 삶의 의미를 일깨워 주는 사람을 향한 존중과 경의에서 시작된다. 최근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존경하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무신론자들도 적지 않다. 신의 존재를 믿을 수는 없지만, 교황님이 자신의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행보 안에서 그들은 신을 향한 한 인간의 숭고한 사랑과 용기를 보고, 교황님께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드러내는 것이다. 참된 권위는 자신의 삶의 표양을 통해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을 때 나타난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은 이들이 몹시 놀라며 “그분께서 율법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마르 1, 22)는 복음서의 이야기는 삶의 표양을 보여야할 당대의 지도자들의 잘못된 권위 의식에서 볼 수 없었던 예수님의 언행일치와 가난한 이들을 향한 겸손의 삶이 유대인들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살아 있는 권위 그 자체일 수 있는 이유는 인간이 지향해야 하는 삶의 관심이 욕망의 사회 속에서 이기적 자기만족이 아니라, 모든 이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임을 예수님 안에서 깨달았기 때문이다.
어느 영화의 한 장면에서처럼 이제는 누구의 잘못을 지적하고, 훈계하기보다는 “너나 잘 하세요.”란 말을 내 자신에게 먼저 던져야 하는 때가 아닐까 싶다. 세상을 다른 눈으로 본다는 것은 먼저 “너 자신을 알라.”는 소크라테스의 명언처럼, 남에게 나를 과시하기보다 먼저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 지를 깨달을 수 있는 겸손의 지혜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란 생각이 든다.
첫댓글 단비같은 신부님 글 잘 읽고 갑니다.
늘 건강하세요~^^
그런데 화면에 부호 같은 것이 계속 뜨네요~
진정한 권위의 정의에 공감하면서
오늘도 변함없이 신부님의 글속에서
감동의 에너지를 축적할 수 있어서 감사드립니다.
신부님 항상 건강유의 하시고 주님의 은총
가득하시기 기원드립니다.*^^~~
글을 읽어내려가며 신부님을 뵙는것같은 마음에 무척 반가워하며 ...^^
'권위'...한 사람으로서의 자리,엄마로서의자리,아내로서의 자리~잠시 생각하고 갑니다.
더위에 지치시지마시고 건강하시길 기도하며^^
신부님 저희 본당으로 글 모셔갑니다^^~
잘 읽고 갑니다 신부님감사 합니다 신부님 만난이후신앙의 믿음을 알아갑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참된 권위'를 예수님 안에서 다시 찾아지기를 기도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