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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장윤수 원문보기 글쓴이: 라울
사진 : 박도성 Luciano Arts & Communications
“쌈지길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이름 그대로 길이고, 길을 통해서 문화와 만나길
원하는 거죠, 이런 낭만과 문화적 추억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질 수
있다면 쌈지길은 성공한 겁니다.” 천대표의 일성이다.
첫 인상이 뚝배기 처럼 투박하다.
약간은 부조화처럼 보이는 화려한 머플러가 트레이드 마크다.
매일 머플러는 의미를 정해놓고 음양오행에 따라 요일 별로 다른 것을 매고 나온다.
그 투박함과 머플러에서 은근히 끌리는 깊은 내공이 보인다.
살아오신 이력 자체가 간단치 않으니 흘러나오는 매력은 당연하다.
강원도 김화에서 1943년에 태어났으니 우리나이로 65살이다.
평생을 공직에 있었다.
작년에 광주 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낸 경기미술관장 김홍희 씨가 부인이다.
패션잡화 브랜드로 경영 자체가 예술이 되어버린 문화마케팅을 전개하는 (주)쌈지
천호균 사장이 친 동생이다. 딸 역시 이화여대를 졸업하고 설치미술을 하고 있으며,
사위 가브리엘 크로츠는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에 쌈지의 “딸기가 좋아”를 설계한
건축가 최문규 씨와 함께 쌈지길도 설계한 건축가다.
누이 세분도 미술과 음악을 하며, 작은 아버지는 유명한 사진작가다.
이쯤 되면 문화적 감수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친이 대지주여서 해방 후에 서울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는데 7살 때 백러시아 사람에게서 탭댄스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명문 경기고등학교를 다녔는데 법대나 상대를 가는 것이 당연한 풍토였는데 국어선생님(동아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장용학씨)의 영향으로 서울대 철학과도 아니고 등산반 활동을 할 수 있는 연세대 철학과를 가기로 결심했다. 철학과를 가려고 마음을 정하니 따로 입시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기에 학교 가서 놀면 다른 학생들에게 방해가 되니 책보고 등산 다니면서 서울 화신백화점 뒷골목 스탠드바 술집 마담에게서 “지루박”을 배우고 빡빡머리를 모자로 감추고 카바레도 다녔다.
대학가서 연대 산악반 리더가 되었는데 “비선대 학생” 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설악산 바위 오르는 재미에 푹 빠져 지냈다. 그야말로 거칠 것이 없는 질풍노도의 젊은 시절을 보낸 것이다.
대학졸업 후에 이후락 씨가 청와대 비서실 기능을 강화하기 위해 사람을 뽑자 지원하여 청와대에서 외교와 국방담당 행정관으로 12년을 근무했다. 매일 아침 새벽에 나가서 밤새 각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외교적 사안들을 분석하여 보고하는 일을 하였다. 군사정권 시절에 청와대에 근무했으면 권력에 대한 욕심이 생기기 마련이지만 이와는 반대로 유신말기 권력의 도구가 되는 것이 싫어서 탈출을 모색하고 있는데 뉴욕문화원이 생기자 자원하였다. 1979년 4월 뉴욕생활을 시작하면서 비로소 자신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용솟음치고 있었던 문화적 욕구를 마음껏 발산 한다.
뉴욕에서 천대표의 집은 그야말로 ‘문화살롱’ 이었다. 현대무용가 홍신자, 소프라노 홍혜경 등 우리 문화예술인 들이 모였고 백남준과 현대무용가 머스커닝햄과 깊은 교류를 시작한다. 백남준을 한국에 처음으로 알린 사람도 바로 천 대표다. 그 때 천대표는 외교관 부부들을 초청해 블루스 ․ 지루박 등을 가르쳤는데 복잡한 스텝은 다 빼고 간단한 스텝만으로 만든 “천호선 댄스”는 인기 최고 였다.
그러한 실력을 살려 2005년 5월에는 대학로 문예진흥위원회 대강당에서 열린 국제현대무용제에서 “<쑈쑈쑈는 계속되어야 한다>를 재활용하다” 공연에 최고령 무용수로 출연해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인생의 재미가 춤 보다 더한 것이 없다는 그의 주장이다.
덴마크와 캐나다 까지 해외문화원에서 10여년 근무하면서 세계 문화의 흐름을 몸소 체험하면서 즐기고 놀았다. 문화원에서 판소리와 전통예술만 해외에 알릴 것이 아니라 현대 한국의 문화예술을 외국에 소개하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이 일에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우리의 젊은 화가들을 외국에 소개했는데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고 한다.
백남준 씨의 우주 오페라 3부작 ‘굿모닝 미스터 오웰’ ‘바이바이 키플링’ ‘랩 어라운드 더 워드’와 과천 현대미술관 ‘다다익선’등 그의 여러작업을 직간접으로 도와드렸고 그의 사상적 좌편향도 우리쪽으로 가깝게 한 계기를 제공했다.
서울로 발령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있는 힘을 다해서 한국의 문화를 알렸기에 이 후의 삶은 보너스 다”라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귀국해서도 문화공보부 문화예술국장과 국회 문화관광위원회 수석전문위원(차관보급)으로 일했으니, 2003년 9월 쌈지길을 오픈하기 전까지 무려 25년 동안 불모지나 다름없던 우리의 문화정책을 입안한 셈이다.
천대표와 대화할 때 마다 느낀 점은 참으로 겸손하다는 것이다. 고위공무원을 지냈으면 어깨에 힘이 들어갈 법도 한데 부드러운 목소리에 어디서도 그러한 권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자유스럽고 어디서나 볼 수있는 옆집 아저씨와 같은 편안함이다.
천대표는 IMF가 터졌을 때 (주)쌈지가 구조조정을 하고 인원을 줄이려 하자 동생 천호균사장에게 회사가 빚을 지고 있는 것도 아니니 루즈벨트 대통령이 뉴딜정책의 일환으로 Federal Art Project를 실시하여 대공황 때 예술인들을 지원하여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에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주고 그 후 미국이 세계미술의 중심무대로 우뚝설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도 IMF로 예술인들이 어려운 상황이니 실험정신이 강한 젊은 작가들에게 공간을 마련해 주도록 권유하여 만든 것이 그 유명한 “쌈지스페이스”다. IMF때 모두가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먹고사는 문제가 우선이고 예술은 뒷전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뛰어난 혜안이 아닐 수 없다.
지금 대안미술 공간으로서 쌈지스페이스를 떼어놓고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실험정신과 상상력, 창조성이 뛰어난 우수한 젊은 작가들의 산실이 되었다. 공간을 마련했던 쌈지의 천호균 사장이 작품하나 임의적으로 넣지 못할 정도로 철저하게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원칙을 중요시 하고 있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인사동은 밤 문화가 없어요, 밤 문화가 살아나려면 공연이 있어야죠” 1월29일부터 백남준의 작품을 전시하는데 구라파에서 해프닝을 했던 플럭서스(fluxus)그룹의 작품이 위주가 될 예정이다. 곁들여서 인간문화재인 무당 김금화 씨를 모시고 추모 굿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와 별개로 매주 금요일 밤에는 정기적인 공연 계획도 세우고 있다.
*플럭서스 그룹 : 원래 의미는 설사나 출혈 따위를 통해 이상 유출시키는 것을 말하며, 해프닝이 가진 개인의 몸짓의 표현속에 갇히는 경향을 따로 그룹을 조직한 것으로 해결하려한 젊은 예술가의 모임
백남준의 영향을 받아서 일까 우리 문화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 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것을 때려부수는 ‘다다’를 실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우리 문화정책의 현주소가 과거의 것을 지키고 복구하기 위한 박물관 예산이 미술관 예산 보다 많은 상황인데,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하는 미술관 예산이 훨씬 더 많아져야 앞으로 나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민의 정부 시절 민중미술이 못다한 것을 하려고 하면서 분풀이를 하고 운동이나 제도개혁에는 많은 성과가 있었지만 에너지들이 정치적인 형태로 나타나 국제적인 작품이 나오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몹시 아쉬워 했다.
문화의 세기를 말하고 문화가 국가경쟁력이라고 하지만 기초예술의 토양은 아주 빈약한 상태여서 기초예술을 강화하고 관객수준을 끌어 올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아울러서 싱가포르의 경우 똑같은 건물은 짓지 못하도록 제도화해 놓고 있는데 우리의 경우 지자체의 문화예술회관 마저도 판박이 형태로 지어지고 있는 점은 창의성 부재며 문화자산의 큰 손실이라는 것이다.
천대표는 인사동은 정조시대 실학파 박지원, 박제가, 이종무 등 백탑파가 모여서 개혁을 말하고 학문을 논하며 술을 마셨던 곳으로 그러한 정서를 바탕으로 “쌈지길”을 통해서 사람들이 서로 소통하여 편안하게 골목길을 걷듯이 안식을 얻고 우리 문화적 정체성을 확고히 할 수 있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래서 쌈지길은 골목길의 연장인 것이다.
국회에 계실 때 문화정책 때문에 천 대표를 여러번 뵐 기회가 있었지만 그 때와는 다르게“쌈지길”에서 만난 문화적 자유인 천호선 대표야 말로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풍성한 나라”가 되길 원했던 원했던 김구 선생의 말을 떠오르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