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OHlkrEEk0JI
지난 18장에는 엘리야의 갈멜산에서의 영적대결과 엘리야의 간절한 기도로 3년 6개월의 기근이 끝나고 비가 오는 내용을 살펴봤습니다. 놀라운 영적승리의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19장은 18장과는 대조적인 분위기를 보게 되는데 고난당하는 엘리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불의 역사, 비의 역사를 경험한 이후에 다음에 나올 자연스러운 내용이라고 한다면 아합과 이세벨이 처단을 당하든지 아니면 우상을 숭배하는 아합정권이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나라가 새로워지는 것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엘리야가 이세벨 왕비에게 쫓겨다니는 장면이 나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1절과 2절을 보시겠습니다. 1절, 2절..
아합이 왕궁으로 돌아간 후에 갈멜산에서 있었던 일을 아내 이세벨에게 자세히 고합니다. 말하니 에 해당되는 단어 ‘나가드’는 ‘보고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을 보면 소위 북이스라엘 정권의 실세는 아합이 아니라 이세벨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됩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것이 2절의 이세벨의 반응입니다.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는 맹세를 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놀라운 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보통 이런 일을 당하게 되면 두려운 마음이 들게 되는 것이 정상인데 이세벨은 두려운 마음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분기탱천해서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위협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악의 화신이라 할 만큼 그 마음이 매우 강퍅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역사 가운데 열가지 재앙을 경험하던 애굽의 바로왕도 이세벨과 같은 부류의 사람입니다. 열가지 재앙 앞에서 꿈쩍도 하지 않고 아들이 죽고 나서야 비로소 마음이 흔들렸던 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세벨은 바로에게 명함도 내밀 수 없을 것입니다.
결코 보기 드문 장면이 아닌 것은 신약에 와서도 예수님을 반대하고 핍박하던 종교지도자들도 이런 모습을 보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나 수많은 기적과 이사를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기는커녕 또 다른 기적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면 본문의 이세벨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문제는 엘리야의 마음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는 순간, 오만가지 복잡한 감정이 들었을 것입니다. 실망과 절망과 두려움이 그것입니다. 실망은 엘리야가 기대한 것과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기 때문이고 절망은 이런 역사가 나타났음에도 변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하나님의 역사는 한계가 있단 말인가? 라는 생각 때문이고 두려움은 이렇게 강퍅하고 강력한 여인이라면 정말 내가 죽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18장에서 불의 역사, 비의 역사를 경험했을 때 천국을 경험했다면 지금은 지옥을 경험하고 있는 엘리야인 것입니다.
■3절에 보시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피해 브엘세바로 이동하게 되는데 브엘세바는 이스라엘의 남쪽끝 경계선이고 출발했던 갈멜산은 북쪽 경계선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갈멜산에서 브엘세바까지 직선거리로 약 180킬로가 됩니다. 사실 브엘세바까지 이동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 벧엘이라는 곳 정도까지만 와도 더 이상 피하지 않아도 됩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북이스라엘의 손길이 더 이상 미치지 않는 남유다 땅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이스라엘 땅 전체를 벗어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브엘세바까지 오게 된 것인데 이는 엘리야의 절망과 실망과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알게 해 주는 장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4절에 보시면 브엘세바까지 와서 하룻길을 더 들어가서 한 로뎀나무아래에 앉아서 자신을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역을 행하다가 낙심에 빠진 전형적인 모습을 엘리야가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을 성경에서 여러 군데에서 발견하게 되는데 요나서에도 보시면
■욘 4:3.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내 생명을 거두어 가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니
하나님은 요나에게 앗수르에게 가서 회개하라 외치라 말씀하십니다. 요나는 이 명령을 따를 수 없었는데 앗수르는 빨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없어져야 할 민족이라 생각했는데 회개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나가 한 말이 앗수르가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게 되느니 차라리 저를 죽여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런 사역을 하느니 차라리 안하겠다는 것인데 사역을 행하고 열매가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진 엘리야와 같은 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민 11:14-15 책임 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15 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 당함을 내가 보지 않게 하옵소서
모세의 경우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은 했지만 광야에서 생활하는 가운데 매일 만나만 먹다 보니 고기도 먹게 해 달라고 모세에게 아우성을 치고 항의를 하고 심지어 애굽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하니까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모세가 차라리 죽여달라고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엄청난 기적으로 출애굽은 했지만 그 다음도 평탄한 길로 인도하셔야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던 것에 실망한 모세가 드린 기도입니다.
본문의 엘리야, 요나, 모세가 보여주는 공통점은 연약한 한 인간의 모습입니다. 이들도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 심정을 가진 적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통해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첫 번째 메시지는 사역을 행한 후에 기대와 다른 현실에 대해 낙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얼마든지 정반대의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들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괴리감은 더욱 크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원래 이들은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이니까 이런 것이고 우리는 결코 이들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없도록 성경은 연약한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시간표에 하나님의 시간표를 맞추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놀라운 역사 다음에 바로 이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시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데 있어서 우리의 예상과 다른 모습으로 역사하실 때가 있음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15절부터 보시면 하나님은 낙심에 빠진 엘리야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물과 떡을 먹이시고 난 후에 다시 다메섹으로 올라가서 하사엘에게 기름부어 아람의 왕으로 삼고 북이스라엘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북이스라엘 왕으로 삼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엘리야를 대신할 선지자로 세우라 말씀하십니다.
낙심에 빠진 엘리야에게 이 말씀을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네가 생각한처럼 하나님의 역사가 끝났거나 한계를 보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해서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시고 있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생각하건대 저 악한 아합과 이세벨은 오히려 길길이 날뛰니 도대체 하나님은 왜 저들을 심판하지 않으시는가 라는 것이었습니다만 심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이 이미 세워진 것인데 이를 엘리야가 이해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게 된 실망인 것입니다.
■왕상 22:35. 이 날에 전쟁이 맹렬하였으므로 왕(아합)이 병거 가운데에 붙들려 서서 아람(벤하닷-하사엘의 아들) 사람을 막다가 저녁에 이르러 죽었는데 상처의 피가 흘러 병거 바닥에 고였더라
■왕하 9:33-35 이르되 그를(이세벨) 내려던지라 하니 내려던지매 그의 피가 담과 말에게 튀더라 예후가 그의 시체를 밟으니라 34 예후가 들어가서 먹고 마시고 이르되 가서 이 저주 받은 여자를 찾아 장사하라 그는 왕의 딸이니라 하매 35 가서 장사하려 한즉 그 두골과 발과 그의 손 외에는 찾지 못한지라
왕상 22장과 왕하 9장에 보시면 아합과 이세벨의 최후의 장면을 보여주는데 아합은 엘리야가 왕으로 세운 하사엘의 아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이세벨도 마찬가지로 엘리야가 세운 예후를 통해 처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만일 이 사실을 미리 엘리야가 알았더라면 결코 본문의 모습처럼 죽느니 사느니 절망에 빠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결코 한치의 오차도 없고 악을 그냥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며 정확히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앞서 말씀드린 모세나 요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일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그 다음에 되어진 사건들을 통하여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감당하는 중에 낙심되는 경우도 있고 의심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를 기억하시면서 다시 힘을 내시고 소망 가운데 달려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한가지 더 보시면 8절에 엘리야는 다메섹에 가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산 호렙에 들르게 되는데 호렙은 과거 모세가 십계명을 받았던 시내산을 말합니다. 9절에 보시면 이곳에 동굴이 있는데 그곳에 가서 머물게 되는데 이곳에서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몇 가지를 보여주시는데 처음에는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바람, 두 번째는 지진, 세 번째는 불이 있었는데 여전히 그곳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가 불이 있고 난 후에 세미한 음성이 들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본격적으로 나타난 것은 엄청난 사건이 아니라 세미한 음성을 통해서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은 말씀속에서 말씀을 통해 계속해서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알리시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엄청난 바람과 지진과 불 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지 말고 말씀속에서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나기를 힘써야 함을 말씀하는 것임을 묵상할 수 있습니다.
바람과 지진과 불이 없으면 하나님이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말씀 속에서 세미한 음성으로 여전히 역사하시는 분이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고 사명을 향해 달려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