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연극
국립극장의 개관과 함께 시작된 50년대는 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혼란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9·28 수복 후 정부의 특별한 배려로 극단 <신협>을 중심으로 한 문예중대가 군대내에 설치되었는데, 반공극을 위시하여 세익스피어와 사르트르 등의 고전을 공연하였다. 국립극장 재건에 관한 건의는 51년부터 계속되어 왔는데 별 진행이 없자 유치진은 극장직을 사임한다. 그러던 중 53년에야 대구에서 국립극장이 재건되고 서항석이 극장장으로 취임하여, 윤백남의 <야화>를 개관공연으로 올린다. 그러나 이때 대부분의 극단들은 이미 서울에서 공연을 하고 있었고, {신협}은 유치진의 주도하에, 유치진 作 <나도 인간이 되련다>, 오상원 作 <녹스른 파편> 등을 공연하였다. {신협}은 국립극장 창립 당시의 전속극단이었으나 극단장이 서항석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재계약을 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협}과 국립극장은 서로 반목하게 되어 극계는 한동안 침체를 겪는다.
이러한 침체기 중에도, 1954년에는 국방부 주최로 6·25 기념공연 <불더미 속에서>(김진수 作)가 무대에 올려졌고, 같은 해 문교부 주최의 제2회 연극경연대회와 한국연극학회 주최인 대학극경연대회가, 53년에는 역시 연극학회 주최로 전국남녀 중고등학교 연극경연대회가 개최되어 연극계의 활력을 불어넣고자 하였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침체기를 뚫고 새롭게 연극을 중흥하고자 한 연구극단이 생겼는데, 바로 [제작극회]이다. [제작극회]는 대부분 대학연극경연대회 출신의 대학극 주도 신인들이었다. 이들은 성명서를 통해 '사실적이건 상징적이건 간에' '현대극 양식'을 표방하며, 1956년 7월 <사형인>(차범석 번역, 차범석 전근영 공동연출)을 창립공연으로 올린다. 이들의 의의는 많은 신진들의 배출에 있다고 하겠는데, 극작가에 차범석, 김자림, 박현숙, 연출가에 오사량, 김경옥, 허규, 최창봉, 연극학자에 이두현 등으로 연극계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편 이들 이외에도 국립극장 희곡현상, 신춘문예, {현대문학} 등을 통하여 하유상, 이용찬, 임희재를 위시하여 오학영, 김상민 등의 극작가가 등단했으며, 58년에는 ITI(국제극예술협회)의 한국본부가 창립되어 국제적인 연극 교류의 길을 텄다.
50년대의 희곡은 6·25를 소재로 다루기 시작했는데, 이데올로기의 문제에 있어 민주주의는 선이요, 공산주의는 악이라는 흑백논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유치진의 <통곡>, <나도 인간이 되련다>, <푸른 성인>, <청춘은 조국과 더불어>, <한강은 흐른다> 등이 있다.
한편, 차범석의 희곡에는 6·25의 상처가, 다른 사회문제와 얽혀서 종종 그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빈궁을 다룬 작품 <밀주>, <사등차>, 물질과학문명과 구세대의 몰락을 그린 작품 <불모지>, <계산기>, 윤리적 부패와 위선을 고발한 작품 <공상도시>, <귀향>, 휴머니즘이 나타난 작품 <성난 기계> 등이 그러한 경향의 작품이다. 차범석의 작품은 전란 그 자체나 이데올로기 문제보다는 그것이 우리에게 남긴 상흔에 주목하고 있다.
1955년 신춘문예에 <奇留地>로 등단한 임희재는 <복날>, <무허가 하숙집>, <꽃잎을 먹고 사는 기관차>, <고래>, <종전차> 등의 작품을 발표한다. 그 역시 전후에 전란의 상처를 안고 빈궁하게 살아가는 삶을 그렸는데, 애정 어린 따뜻한 시각이 깔려 있다.
이 외에 주목할 만한 작가와 작품으로는, 하유상의 <딸들 자유연애를 구가하다>, <젊은 세대의 백서>, 이용찬의 <가족>, <모자>, <기로>, 김자림의 <돌개바람>, 박현숙의 <사랑을 찾아서>, 오상원의 <녹스른 파편>, <잔상>, 김상민의 <비오는 성좌>, <향연의 밤>, 김경옥의 <슬픈 종말>, <잔해>, <배리>, 오학영의 <꽃과 그림자>, <생명은 합창처럼>, <심연의 다리>, <항의> 등이 있다.
50년대의 주목할 만한 사실에 연극교육기관의 등장을 들 수 있다. 1953년 10월 최초로 서라벌예술학교가 연극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으며, 59년에는 중앙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60년에는 동국대학교에 연극영화과가 생겨 연극인 양성의 길을 확고히 하였다.
50년대의 희곡은 나름의 꾸준한 노력과 실험이 보이기는 하였으나, 해방과 전란이라는 사회적 혼란으로 인하여 충분한 문학적 수련을 쌓을 시간과 여유가 없었던 까닭에 극의 형식이나 깊이에 있어 새로움을 주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축적된 노력은 60년대에 들어 현대극으로 도약하는 발판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