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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사천
50∼60년대 정다운 한국을 다시 보려면 四川에 가라!
서울대 朴漢濟 교수의 중국 中世로의 시간여행(16)
1996년 8월, 나는 중국 친구인 북경사대 Z교수와 함께 이른바 사천(四川)기행을 다녀온 적이 있다. 사천으로 들어가는 길은 역사적으로 두 가닥이 있었다. 하나는 거대한 세 굽이 협곡, 삼협(三峽)을 통하여 남에서 북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제갈량의 계책에 따라 유비가 촉으로 들어간 것이 바로 이 길이었다. 또 하나의 길은 관중(關中)에서 남으로 산악지대를 넘는 길로, 흔히 ‘촉도’(蜀道)라고 한다. 현재의 보계(寶鷄)에서 산관(散關)을 거쳐 남하하는 것으로, 756년 당 현종이 안록산(安祿山)의 반란군에 쫓겨 도주했던 길이며, 234년 제갈량이 관중으로 진출하기 위해 오장원(五丈原)에서 사마의(司馬懿)와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 진군했던 바로 그 길이다.
중국의 지형도를 보고 있노라면 세계의 지붕 청장고원(靑藏高原)의 동쪽 끝지점에 움푹 팬 거대한 웅덩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이 지역을 일러 ‘사천’이라 한다. 1,000∼3,000m급 산들로 구성된 다파산맥(大巴山脈)∼민산산맥(岷山山脈)∼무산산맥(巫山山脈)이 여러 겹의 주름으로 에워싸면서 만든 거대한 분지가 바로 사천이다.
사천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이백(李白)은 ‘촉으로 가는 길, 저 푸른 하늘에 오르기보다 더 어렵구나’(蜀道難難於上靑天:蜀道難)라고 했다던가. 조물주가 아무리 험준한 자연적 장벽을 마련하더라도 인간은 끝내 길을 내고야 만다. 가파른 암벽을 한발 한발 쪼아 만든 길이 바로 촉도이고, 그 가운데 압권은 역시 가륭강(嘉隆江) 상류 하반에 만들어진 잔도(棧道)다. 촉의 전설상의 시조인 잠총(蠶叢)이 열었다는 촉도의 일부인 것이다.
원숭이도 오르려면 애를 먹는다는 촉도는 시인묵객들에 의해 흔히 ‘인생길의 험난함’에 비유되기도 했다. 나이 50을 갓 넘긴 시점에 필자가 여행길을 사천으로 잡은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필자가 살아온 굽이굽이 인생길 50년! 앞으로 신께서 허여한 시간이 얼마일지 모르지만, 지나온 길보다 그 굽이만은 더 곡절이 많을 것 같은 두려움이 당시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있었던 까닭이다.
道敎 聖地巡禮
四川에 가면 1950∼60년대의 정다운 韓國을 만날 수 있다. 특히 50대 이상 연령의 한국인들이라면 못내 그리워하던 옛 시절이 그곳에 고스란히 멈춰 서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四川은 갖은 세파에 시달린 그대들의 가슴에 난 멍든 상처를 일부나마 쓰다듬어 줄지도 모른다. 지금쯤 구불구불한 논두렁에는 메뚜기와 여치가 날고, 샛노란 잎들 사이로 튀어나온 각양각색의 꽃들이 밭을 온통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논밭 사이에 산재한 竹林과 그 사이의 초가지붕에 흙벽의 농가, 그 마당에서 삼베 바지저고리의 아저씨가 대광주리를 짜고 있을 것이다. 작은 역사 너머의 길가 싸구려식당 문 위에는 낯익은 ‘四川飯店’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고, 웃통을 벗은 아이들이 손을 흔들어 줄 것이다.
四川은 道敎의 발상지이며 성지다. 도교라는 종교가 등장한 것은 後漢 王朝가 쇠락해 가던 시기와 맞물려 있다. 중앙의 정치는 外戚과 宦官들에 의해 농락되고 백성의 생활은 점차 도탄에 빠져들었다. 반복되는 정치적 혼란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참상 앞에 노정되었던 당시 民衆들에게는 목숨이나마 부지해 주었으면 하는 희망조차 한갖 허망한 꿈일 뿐이었다.
정치적 혼란과 동반된 한발과 疫病 등 자연재해가 거듭되는 위협 속에서 공포와 비애를 느낀 민중들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 유랑길에 올랐다. 그들에게 희망의 가느다란 불빛이 보이는 땅이 바로 1,900여년 전의 四川이었다. 사천은 天府로 지칭되는 豊饒와 1,000∼3,000m급 산들로 둘러싸여 지형적으로 隔絶된 지역이었다. 고달픈 인생길에서 받은 정신적인 고뇌로부터 해방되는 길은 神力에 의지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런 민중의 열망이 이곳을 중심으로 道敎라는 종교로 응결되어 나타났던 것이다.
四川은 지금도 여전히 중국의 民草들에게 안식의 땅으로 남아 있었다. 1억3,000만명이 넘는 인구가 四川에 모여 살고 있다. 역사적으로 四川은 避難 流浪者의 종착지였다. 황제답지 않게 政事보다 로맨스에 빠진 나머지 皇位는 물론 목숨까지 담보할 수 없었던 唐 玄宗이 최후의 피난처로 선택했던 곳이 바로 四川이었다. 詩聖 杜甫뿐만 아니라 明·淸 시대의 破産 貧困流民이 그곳을 찾았고, 최근에는 日帝의 침략을 피해 蔣介石의 國民黨 政府도 이곳으로 옮겨왔던 것이다. 時代를 초월하여 階級의 高下, 財産의 多寡를 따지지 않고 버림받고 쫓긴 자들을 한없이 포용하는 곳이 바로 四川이다. 그대 지금 시름이 깊거든 四川으로의 여행을 계획해 봄이 어떨지!
‘험난한 인생길’ 같은 蜀道
필자 또래 사람들은 ‘386세대’나 ‘475세대’와 달리 세인들로부터 그 등록마저 허락받지 못한 특징 없는 사람들이다. 어릴 때에는 식탁에 놓인 갈치 토막에 감히 젓가락도 대지 못하고는 ‘언제 아버지가 되어 보나’하고 세월 가기만 기다리며 살아왔지만, 아버지가 되고 나니 어느덧 ‘자녀지상주의’라는 거대한 물줄기가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패스트푸드식 식단에 억지로 입맛을 맞추어야 하면서도 불평 한마디 내뱉지 못하는 지지리도 못난 세대다.
50대의 나이에, 60년대 학번에 40년대 출생인 우리 ‘564세대’. 우리 세대가 그렇게 바라던 50대는 가장의 ‘위세’라는 말마저 오히려 사치스러운 단어가 되어버린 영락없는 김정현의 소설 “아버지” 바로 그 모습이다. 몸은 병들어 시들어가고 천직으로 믿고 인생의 전부를 걸었던 직장에서 모멸찬 괄시를 받고는 거리로, 지하철로 하염없이 무거운 발길을 옮기며 한없이 눈물짓는 우리 564세대! 그래도 그 얼굴들이 보고 싶어 동창회에 나가면 즐거운 이야기보다 애달픈 사연들을 많이 들어야 하는 우리다.
인생을 하루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막 석양의 초입에 들어선 셈인데…. ‘석양이 아름답다’(夕陽紅)고 누가 말했던가! 당대의 시인 이상은(李商隱)이 갈파했듯 설사 ‘석양이 무한히 아름답다 한들 단지 황혼에 가까울’(夕陽無限好 只是近黃昏:樂遊原) 따름이다. 아름답기는커녕 일그러진 석양의 모습을 한 우리는 이제 곧 영락없이 황혼으로 떨어질 것이다.
어느 누군가 말해 주었다. 사천에 가면 1950∼60년대 한국의 농촌을 그대로 볼 수 있을 것이라고. 그 말을 믿고 아름답던 옛 시절을 만나기 위해 사천을 멀다않고 찾아 나선 것이다. 우리 세대에게는 고등학교 시절 읽었던 “두시언해”와 “삼국지”는 차라리 찌는 여름에 쏟아지는 한줄기 시원한 소나기와 같은 것이다. 필자가 사천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것들 때문이었다.
소설이란 허구이지만 쓸데없이 사람을 사로잡는 마력이 있다. 연속극 “왕건”의 내용이 90% 이상 거짓으로 꾸며졌다 하더라도 온 국민이 온통 그 스토리 전개에 울고 웃듯 말이다. 필자도 한때는 유비와 제갈량의 인간됨에 흠뻑 빠진 적이 있었다. 또 당시 읽었던 “두시언해” 중 ‘촉상’(蜀相)을 줄줄 욀 수 있을 정도로 그 시절은 아직도 필자의 주위를 맴돌고 있다.
‘승상의 사당을 어디 가 찾으리오(丞相祠堂何處尋)/ 금관 잿밖 잣남귀 삼렬한 데로다(金官城外柏森森)/ … 세번 돌아봄을 어지러이 함은 천하를 위하여 헤아림이니(三顧頻繁天下計)/ 두 조를 거리침은 늙은 신하의 마음이니라(兩朝開濟老臣心)/ 군사를 내어 가 이기지 못하여 몸이 먼저 죽으니(出師未捷身先死)/ 기리 영웅으로 하여금 눈물이 옷깃에 가득케 하노라’(長使英雄淚滿襟)
그 시절은 진실로 우리의 전성시대였다.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종교가 절실해짐을 느끼게 된다. 특히 반백(半百)을 넘긴 나이가 되면 더욱 그러한 것 같다. 그래서인지 이전에는 가지도 않던 법당을 찾는 횟수가 늘어가고 있다. 전에는 아내와 같이 법당에 들어설 때면 쑥스러워 좀처럼 부처님 앞에 꿇어앉지 않았는데 요즈음에는 혼자 가더라도 오래 꿇어앉아 있는 경우가 많아졌다.
사천은 도교(道敎)의 성지다. 중국 최초의 종교왕국이 건립되어 20여년 간이나 지속되었고, 도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했던 성한(成漢·302∼347)왕조가 세워졌던 곳이 바로 사천이다. 왜 사천이 도교의 성지가 되었었는지를 알아보고 싶었다.
신축된 북경서참(北京西站)에서 발차하여 정주∼낙양∼서안을 거쳐 종점 성도(成都)로 향하는 특급(特快)열차를 탄 시간은 밤 11시였다. 이튿날 오후 서안을 지난 기차는 보계시에서 좌회전하더니 진령산맥(秦嶺山脈)을 기어오른다. 그것은 기차가 아니라 고성능 굴삭기를 장치한 철제 두더지였다. 기차는 깎아지른 산비탈을 작은 구멍을 내며 뚫어가고 있었다. 건너편 산이 보이더니 금방 암흑이다.
기차도 힘이 달리는지 실내등마저 꺼버린 상태다. 산허리에 걸린 구름 사이로 기차는 숨을 몰아쉬며 오르고 있었다. 동행한 Z교수가 이백의 ‘촉으로 가는 친구를 보내며’(送友人入蜀)라는 시를 적은 쪽지를 건넨다.
높은 산이 사람의 얼굴 바로 앞에 우뚝 솟고(山從人面起)/ 타고 가는 말머리 옆에서 구름이 피어난다(雲傍馬頭生)
정말 이백의 표현 그대로다. 산맥을 넘었다 싶더니 금세 세상은 온통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유방(劉邦)이 항우(項羽)에게 기피되어 한왕(漢王)으로 봉해진 후 절치부심하던 한중(漢中) 땅도, 이백이 ‘아름다운 수목들이 울창하게 드리워져 잔도(棧道)를 덮을 것이다’(芳樹籠秦棧)라던 그 잔도의 모습도 모두 어둠 속에 잠겨버리고 간혹 역사의 불빛만이 차창을 지날 뿐이었다. 북경으로의 귀로에 그것들과 만날 것을 기약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사천은 사방으로 둘러싼 산맥의 주름에서 발원한 수많은 강을 경계로 몇 지역으로 나뉘어 있다. 특히 사천의 서북지역인 ‘서촉지방은 하늘에서 물이 샌다’(西蜀漏天)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우(降雨)지역으로 유명하다. 크고 작은 수계가 핏줄처럼 얽혀 있지만 모두 장강으로 흘러든다.
사천이라는 이름도 여기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즉, 네개의 하천-① 민강(岷江)·금사강(金沙江)·타강(?江)·가륭강 ② 민강·타강·가륭강 ·오강(烏江) ③ 장강(長江)·민강·타강·가륭강-이 흐르는 지역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천’이란 선비족이 말을 타면서 부르던 노래인 ‘칙륵가’(?勒歌)에 나오는 칙륵천(?勒川)의 ‘천’ 혹은 고구려 고국천왕(故國川王)의 ‘천’의 용례에서처럼 ‘평원’ 혹은 ‘땅’(壤).의 뜻이라는 설이 더 유력하다.
사천이란 양천(兩川)에서 삼천(三川:三蜀), 그리고 사천(四川)으로 그 행정구역이 변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명칭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이 지역의 구분은 수차례 변화 과정을 거쳤다. 즉, 진시황의 통일후 이 지역은 파군과 촉군으로 양분되었다가 한대에는 익주(益州)로, 서진대에는 양주(梁州)와 익주로, 당 태종 시기(627)에는 익주를 검남도(劍南道), 양주를 산남도(山南道)라 하였다. 그후 당 숙종 시기(757)에는 검남도를 검남동천절도사(劍南東川節度使)와 검남서천절도사로 분리하는 등 사천을 두 지역으로 나누었다.
이 시기가 바로 ‘양천’시대다. 당 대종(代宗) 시기에 들어 검남동도, 검남서도에다 산남서도가 설치되어 양천이 ‘삼천’이 되었다. 송나라 진종(眞宗) 시기(1001) 사천 지역에 천섬사로(川陝四路), 즉 익(益)·재(梓)·이(利)·기(夔) 등 4주로(州路)를 둠으로써 드디어 역사상 ‘사천’이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등장하게 된다. 이 시대에 들어 사천선무사(四川宣撫使)·사천제치사(四川制置使) 등의 지방관 명칭이 나타난 것이다. 사천이 정식 성(省)으로 등장한 것은 원(元)대부터였다. 송대의 천섬사로를 사천행성(四川行省)이라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사천성의 시작이다. 이후 약간의 변동이 있기는 하였지만 송대에 정해진 사천의 행정구역이 그대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고대에는 사천분지를 파촉(巴蜀)이라 불렀다. 파와 촉은 지명인 동시에 종족명이며 국명이기도 하였다. 감숙성에서 발원한 가륭강을 경계로 천동(川東)지역을 파, 천서지역을 촉으로 대개 구분하였지만 당시 파촉의 용례는 반드시 이 지역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파의 경우 한수(漢水) 중류에서 장강 중류지역까지 포괄하며, 촉도 북으로는 섬서·감숙의 남부에서 남으로는 운남·귀주 지역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가리키기도 하였다.
진시황이 통일할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파촉의 풍요로운 땅을 직할령으로 두었기 때문인데, 이후 여러 왕조에서도 파촉의 중요성은 누누이 강조되었다. 특히 중국 고대 왕조의 수도가 주로 두어졌던 관중과의 관계에서 사천은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파촉이 ‘배후지’로서 충실하게 역할해야만 관중이 수도권으로서 제 구실을 수행하게 되고 천하 통제도 용이해진다. 따라서 고래로 관중을 먼저 얻은 자는 다음으로 파촉을 취하려 했던 것이다.
파촉은 첫째, 관중이 천하 통제를 수행하는 출구(出口)로서의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먼저 파촉을 장악하면 ‘상류지세’(上流之勢)를 이용하여 장강 중·하류 유역을 통제할 수 있었다. 관중을 얻고 파촉을 얻지 못하거나, 파촉을 근거지로 하면서도 관중을 얻지 못하면 천하를 얻는 데 문제가 있었다. 예컨대 전·후한 교체기에 공손술(公孫述)이 파촉을 얻었지만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가 관중을 차지해 버림으로써 천하를 얻는 데 실패했다. 조조 역시 관중을 얻었으나 파촉이 유비에게 점거됨으로써 천하를 얻는 데 문제가 많았다.
둘째, 사천은 풍요로운 지역이다. 물산이 풍부하여 중국 고대 부자들의 기록인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는 파의 과부 청(淸)과 촉의 탁씨(卓氏), 촉의 정정(程鄭) 등 이곳 출신이 상당수 등장하고 있다. 사천 지역의 명산물은 촉의 포목과 공(퉟)의 죽장(竹杖)이었다.
실크로드 개척자인 전한의 장건(張騫)이 대하(大夏:현재의 사마르칸드)에 갔을 때 촉의 특산물들이 티베트와 인도를 경유하여 그곳에 들어와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이런 대외교역은 사천의 풍요를 가져다 주었다. 촉 성도 출신으로 전한시대 최고의 문장가였던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문장력 하나로 촉의 갑부 탁씨의 딸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하다. 명예를 돈과 바꾼 것이다.
천하를 얻으려면 파촉을 취하라
현재 사천성은 두개의 중심축을 가지고 있다. 수도 성도와 중경(重慶)이 그것이다. 성도가 촉의 중심이라면 중경은 파의 중심이다. 이 두 지역을 한데 묶어 성투지구(成?地區)라고 한다. 성도는 원래부터 사천의 중심이었고, 현재까지 그 중심으로의 위치를 굳건히 지키고 있지만 중경은 그렇지 않다.
서진(西晉)시대 상거(常據)의 저작으로 현존 중국 최고의 지리서의 하나인 “화양국지”(華陽國志)는 이곳 사천을 그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 가운데 ‘파지’(巴志)에 나오는 파자국(巴子國)의 수도 강주(江州)가 바로 오늘날의 중경이다. B.C. 4세기 진(秦) 혜왕(惠王)이 장의(張儀)를 파견해 파자국을 토벌하여 파군(巴郡)을 편성한 이후 이 지역은 강주 혹은 파라 불렸다. 수·당 시대에는 투주(?州)로, 송대에는 공주(恭州), 나중에 중경으로 바뀐 것이다.
성도 사람들은 성도를 천부(天府)라고 부른다. ‘하늘에서 부여받은 풍요로운 땅’이라는 뜻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지금도 이곳 자유시장에는 싱싱한 겨울 야채가 넘쳐난다. 성도라는 명칭은 2,400여년전 주(周)나라 말기 촉왕이 비현(?縣)에서 이곳 성도로 수도를 옮겼을 때 1년에 시(市)를 이루고 3년에 도(都)를 이루었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또 비단 생산이 성하다 하여 금성(錦城), 금직(錦織)을 관리하는 관리를 두었다 하여 금관성(錦官城)이라고도 한다. 두보의 시 ‘촉상’에 나오는 ‘금관재’가 바로 이것이다.
성도는 원래 ‘촉금’(蜀錦)으로 불리는 비단의 대표적 생산지로 유명하지만, 옛 파자국의 땅인 중경도 견직물로 유명했다. 전국시대말 진나라가 파자국을 합병한 후 이 지역민에게 세금으로 반드시 포목을 내도록 하였다고 하니 파자국의 견직물이 당시 크게 호평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장강과 가륭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언덕에 자리하고, 또 운무 낀 날이 많아 ‘산성’(山城) 혹은 ‘무도’(霧都)라고 불리는 장강 연안의 도시 중경은 예로부터 수상교통의 중심이었고 지금도 장강 하류로 가는 연락선은 거의 여기서 출발한다.
1997년 북경(北京)·상해(上海)·천진(天津)에 이어 중앙직할시로 승격됨으로써 사천성에서 분리되어 중국 내륙의 경제거점으로 발전하고 있지만 필자가 방문했던 1996년에는 사천성의 일부였다. 현재 인구 1,487만명으로 중국 최대의 도시로 성장한 데에는 한때 정부가 여기에 두어졌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1939∼45년 장개석(張介石)이 국민당 임시정부를 두었고, 주은래(周恩來)가 이끄는 중국공산당남방국(中國共産黨南方局)과 팔로군판사소(八路軍辦事所)도 이곳에 두어졌다. 항일과 혁명의 주무대였던 셈이다. 중경시는 원래 인구 20만명 정도의 중소도시였는데 항일전쟁 시기 국민정부가 임시수도로 정하면서 갑자기 100만명에 이르러 오늘의 중경이 되었던 것이다.
날이 새자 사천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구불구불한 논두렁에는 메뚜기와 여치가 날고, 늦여름의 샛노란 잎들과 그 위로 튀어나온 가지각색의 꽃들이 밭을 온통 물들이고 있었다. 논밭 사이에 산재한 죽림과 그 사이의 초가지붕에 흙벽의 농가, 그 마당에서 삼베 바지 적삼을 입은 아저씨가 열심히 대광주리를 짜고 있다. 아침을 먹을 시간인지 논두렁을 따라 고삐를 잡고 소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는 무척이나 낯익은 아이들.
작은 역사 너머의 길가 싸구려 식당 문 위에는 ‘사천반점’(四川飯店)이라고 마구 갈겨쓴 간판이 걸려 있다. 50년대말 필자의 고향 장터마을의 중국집 상호 그대로다. 1년에 한번도 제대로 들어가 보지 못하였지만, 주방 창문 사이로 새어나오는 자장면 냄새에 정말 환장할 수밖에 없었던 그 시절이 눈 앞에 문득 나타난 것이다. 사천기행은 타임머신을 타고 1950∼60년대 고향마을로의 시간여행 그것이었다.
사천으로 가는 길은 듣던 대로 과연 멀고 멀었다. 북경을 출발한 지 30여 시간, 이틀 밤을 열차에서 보내고 3일째 아침 8시쯤에 사천성의 중심 성도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성도에 도착하니 날씨는 활짝 개 있었다. ‘촉견(蜀犬)은 햇빛이 나면 짖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바짝 갠 날이 거의 없는 성도 지방이지만, 먼 길을 찾아온 손님을 대접하는 듯 8월 여름 하늘에 뭉게구름만이 두둥실 떠 있다.
출구를 나오니 필자와 같은 시대 역사를 전공하면서 동갑내기이기도 한 S대학 C원장이 그 지위에 맞지 않게 반바지 차림으로 저만치에서 반갑게 손을 흔든다. 그는 몇년 동안 사천 북부 소수민족 아바(阿?)족이 생산한 귀한 녹차를 사서 한국까지 부쳐주던 친구였다.
그의 관심을 끌 만한 무엇이 필자에게 있었던 것인지 아직도 알 수 없는 일이지만 그는 필자를 진정한 친구로 대하였다. 그러나 그는 3년전 타계했다. 6개월에 한번씩 우송되어 오던 차엽이 문득 끊어지고 3개월여가 지난 1998년 여름 어느날 나는 그의 부음을 전해 들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중국 도교의 본산 청성산(靑城山)을 오르면서 그가 한 말이 두고두고 잊혀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박선생! 한국에서 태어난 것을 행복으로 여기시오. 조국이 나의 건강도, 청춘도, 행복도, 학문도 다 빼앗아 갔오. 이 도교 사원에 오면 나는 젊은 날 조국이 나에게 안겨준 아픔을 잠시 잊게 된다오!”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소위 ‘문화대혁명’(1966~76)의 깃발 아래 신강(新疆) 어느 병단에 소속되어 강제노역으로 10년을 보냈다고 했다.
그 사이 사랑하는 가족은 죽거나 흩어지고 젊음은 가버렸던 것이다. 그의 가슴에는 10년의 세월만큼이나 큰 구멍이 패였다. 그 공허를 그나마 메워 주는 것이 믿음이었다. 그는 틈만 나면 아내와 같이 그 도교 사원을 찾는다고 하였다.
“박선생, 왜 중국의 민중(老百姓)들이 도교를 그토록 믿는지 아시오? 체제가 우리를 그리로 보낸다오.”
그는 원래 섬서(陝西)성 출신으로, 어릴 때는 유복한 가정에서 자랐다. 인생에서 가장 찬란해야 할 시기에 조국은 그에게 쉽게 지워지지 않는 깊은 아픔을 남겼다. 그후 그는 사천을 찾아온 현대판 유민이 되었다. 거기서 아내를 만났고, 새로운 가족을 일구었다. 그러나 조국이 준 상처로 하룻밤도 깊은 잠에 빠져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가 간혹 필자에게 이메일을 보내오곤 했다. ‘Dear Professor Park, I love you!’가 전부였다. 그가 아는 영어는 그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영문마저 필자를 위해 아마 누구로부터 특별히 배웠을 것이다.
대학 게스트하우스에 여장을 풀자마자 C원장은 성도 지역 위진남북조사 전공 교수 10여명을 집결시켜 두었다며 제갈량의 사당 무후사(武侯祠) 옆 식당으로 안내한다. 환영 오찬모임인 셈이다. 오찬이 끝나고 성도 시내 관광에 나섰다. 중국의 여타 대도시에서는 느껴지지 않는 청량감이 성도를 에워싸고 있었다. 사람보다 꽃들이 많아 보였다. 오대(五代) 후촉(後蜀)의 맹창(孟昶)이라는 자가 성내에 이르는 곳마다 부용꽃을 심었다 하여 용성(蓉城) 혹은 부용성(芙蓉城)이라는 아름다운 이름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 때문인지 도시의 도로망도 부용꽃처럼 몇가닥의 순환로로 구성되어 있다.
사천은 중국 역사상 피난지로 유명하다. 4세기초 북방 유목민족에게 중원 땅을 물려주고 피난을 떠나야 했던 소위 ‘영가(永嘉)의 난’ 때 피난 행렬은 세 가닥 길로 이어졌다. 첫째 가닥이 관중에서 사천으로, 둘째가 하남에서 호북·호남으로, 세번째가 산동 지역에서 강소 지역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당대에도 사천은 피난지로 유명했다. 현종(玄宗)이 사랑하는 여인 양귀비(楊貴妃)를 마외역(馬嵬驛)에서 마지못해 죽이고는 안록산의 반란군을 피해 목숨이나마 건지려고 향하였던 곳이 바로 사천이다.
당나라의 시성(詩聖) 두보(杜甫)의 피난처 역시 사천 성도였다. 757년 48세 나이의 두보가 수도 장안(長安)을 떠나 이곳 성도에 와서 초당을 짓고 3년간 살았던 터에 청대에 세운 두보초당(杜甫草堂)이 자리하고 있다. 피난살이였지만 그의 일생 중 가장 평화로운 생활을 보내게 해 준 곳이 바로 사천 성도였다. 그는 그곳에서 ‘강촌’(江村) 등 240여수나 되는 주옥같은 시를 지었다고 한다.
동짓날 황폐한 마을(荒村建子月) / 외로운 나무 있는 늙은이의 집이로다(獨樹老夫家) / 눈은 내리고 배는 가는데(雪裏江船渡) / 바람 앞에 대나무 숲은 기울고(風前逕竹斜) / 촉주 한잔이면 내 시름 이기련만(蜀酒禁愁得) / 돈이 없으매 어디 가서 외상술을 마시리오(無錢何處?)
그러나 두보초당은 피난생활터라기에는 너무 화려했다. 그 정도 생활이라면 피난살이를 마다할 사람이 누가 있을까? 가난한 옛 시인을 뒷사람들이 욕되게 한 것일 뿐이다.
民草들에게는 안식의 땅이었던 사천
사천은 오갈 곳 없는 사람들을 이렇게 무한히 포용하는 땅이었다. 마음껏 마실 술은 제공해 주지 못하였지만 굶기지는 않던 곳이 바로 사천이었다. 사천대학 옆 망강루공원(望江樓公園)은 당대의 여류시인이며 기생인 설도(薛濤)의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곳이다. 설도는 원래 장안 사람이었으나 전근한 아버지를 따라 이곳에 오게 되었다.
그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가세는 기울어 마침내 악기(樂妓)가 되고 말았다. 시재가 뛰어났던 설도는 많은 작품을 지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여교서(女校書)라 칭송했다. 그가 마실 물을 긷고 시를 쓰기 위해 만든 독특한 종이인 설도전(薛濤箋)을 만들었던 우물이 설도정(薛濤井)이다. 그는 대나무를 좋아했다. 그가 심은 대나무는 지금 남아 있는 것만도 130종이 넘는다고 한다.
그래서 망강루공원은 대나무공원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사천은 대나무 산지로도 유명했다. 송대 사천이 배출한 대시인 소동파(蘇東坡;1036∼1101)는 대나무를 무척 좋아해 “식사할 때 고기는 없어도 되지만 사는 곳에 대나무가 없어서는 안된다”고 했다. 고향 사천에 대한 끔찍한 사랑의 표시리라. 필자의 고향집 뒤편에도 죽림이 무성하다.
역대 피난민들이 이곳을 택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높은 산으로 겹겹이 싸여 있는 자연적인 방어벽과 풍부한 물산 때문일 것이다. 사천은 지금도 중국 최대의 쌀 생산지이지만, 예로부터 흉년이 없는 곳이었다.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의 촉한(蜀漢)이나 오대 전촉, 후촉이 그러하듯 사천은 단순히 하나의 분지가 아니라 한 나라로 독립해도 될 만한 충분한 인력과 물력을 갖추고 있었다. 이 지역이 중국의 판도에 들어간 것은 B.C. 4세기말 진나라의 정복 후의 일이지만 파촉은 그 이전 중원과는 다른 독자적인 문화가 형성, 유지되고 있었다.
사천이 원래부터 비옥한 땅이었던 것은 아니다. 중원세력에 의해 정복된 당시의 상황에 기초해 만들어진 “상서”(尙書) 우공편(禹貢編)에 의하면 이곳에서 나오는 토지세인 전조(田租)는 전국 가운데 하상(下上:7/9)급이고, 특산물의 공납인 부(賦)도 하중(下中:8/9)에 랭크될 정도로 낙후한 곳이었다. 사천이 풍요의 땅으로 변한 것은 이 땅에 염·철·시·공관(鹽·鐵·市·工官)을 두어 적극 개발한 진·한제국 시기부터였다.
이리하여 ‘비옥한 들이 천리나 되어 하늘이 내려준 토지’(沃野千里 天府之土) 혹은 ‘육해’(陸海)라는 명칭과 함께 ‘물산이 풍부하여 민은 흉년의 근심이 없다’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이다. 이 사천을 개발하여 비옥한 토지로 만든 것이 한두 사람의 힘으로 가능한 것은 물론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진나라 이빙(李?)·이이랑(李二郞) 부자가 만든 도강언(都江堰) 덕분으로 돌리는 데는 크게 이론이 없다. 도강언은 건설 당시뿐만 아니라(天府之國 富庶之源泉) 2,000여년이 지난 지금의 사천 사람에게도 혜택을 주고 있는 것(千古不廢 沿用至今)이다.
중국의 유명한 역사학 교수 겸 작가인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흔히 드는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단정한 바 있다.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면 도강언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하였다. 만리장성은 이미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 지 오래 되었지만 도강언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민중을 위해 맑은 물을 보내주고 있다.
도강언이 존재했기 때문에 제갈량과 유비의 지략이 꽃필 수 있었고, 이백과 두보와 육유(陸游)의 시문이 존재할 수 있었다. 장성의 수축을 지시한 진시황의 명령에는 웅장함과 경악스러움 그리고 잔인함이 묻어나지만 이빙의 명령에는 지혜와 인자함 그리고 투명함이 짙게 배 있다. 장성은 반이 실질이라면 반은 겉치레였다. 그러나 도강언은 처음부터 그 목적이 명료했다. 도강언에 가면 2,000여년 전에 죽은 이가 여전히 물의 흐름을 지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강심에 있는 초소 앞에 서면 너는 이쪽으로 가고 자네는 저쪽으로 가게 라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천으로의 시간여행을 떠나면서 위치우위가 그렇게 격찬한 이 도강언의 소개를 빠뜨린다면 뜻있는 분들은 사천의 헛것만 보고 왔다고 필자를 욕할 것이 뻔하다. 그래서 이 글의 본론인 도교를 이야기하기 전에 도교의 본산 청성산(靑城山) 동쪽 15㎞에 위치한 도강언을 잠시 소개하려 한다.
도강언은 성도에서 59㎞ 지점에 있는 민강 상류에 건설된 수리시설로, 전국시대 진나라 소왕(昭王) 때인 B.C. 251년 촉군태수로 부임한 이빙이 민중을 이끌고 만든 거대한 물막이다. 천서고원에서 발원하여 한때는 그 상류가 장강의 발원지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던 민강의 거센 물결이 도강언을 경과하면서 착하디 착한 관개용수로 변한다. “익주기”(益州記)라는 책에는 이 도강언이 ‘험한 물결을 잔잔하게, 수해를 수리로 변화시켰다’
(化險爲夷 變害爲利)고 소개되어 있다. 또 이로써 천서평원은 천백년 래에 ‘기한을 모르는 옥야천리의 육해라 칭해지는’(不知飢寒 沃野千里 世號陸海) 땅으로 변한 것이다. 도강언이 어떤 구조를 가졌기에 이런 큰 변화를 가져오게 한 것인가? 도강언은 어취(魚嘴)·비사언(飛沙堰)·보병구(寶甁口) 3부분으로 되어 있다. 어취는 의미 그대로 강 가운데 고기의 입처럼 생긴 분수제(分水堤)로, 민강 물을 두 줄기(內·外江)로 나눈다(分水魚嘴)고 하여 붙인 이름이다.
외강은 홍수시의 배수로로 민강의 본류와 연결되고 내강은 보병구를 통과한 후 천서평원의 농전을 관개한다. 비사언은 내강에 토사가 흘러드는 것을 막고 수량을 조절하는 것이며, 보병구는 강 바로 옆에 솟아 있는 옥루산(玉壘山)을 절개하여 만든 취수구(取水口)다.
옥루산록에는 도강언의 개착자 이빙과 그 아들을 추모하는 사묘인 이왕묘(二王廟)가 있다. 남북조시대에 창건된 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송대 이후 역대 왕조는 이빙 부자를 왕으로 봉하여 추존하고 있다. 실제 왕이 아닌 자가 왕으로 칭해지는 사람은 중국 역사상 공자·관우(關羽)·악비(岳飛) 그리고 이빙 부자 정도가 아닐까 한다. 도강언은 한마디로 ‘수재와 한재란 사람 손에 달린 것’(水旱從人)이라는 말을 증명해 주는 중국이 자랑하는 건축물임에 틀림이 없다.
도교 궁전이 즐비한 청성산에 입산하기 전에 너무 다른 소리를 많이 한 것 같다. 도교는 뭐라고 딱 부러지게 규정하기 힘든 특수한 종교다. 다른 종교에서 흔히 보이듯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문제를 확실하게 파악한 위에서 조직된 교설(敎說)이라는 것도 없으며, 또 그에 기초한 실천적 수양 방식도, 그것을 제창했다고 믿게 하는 교조(敎祖)도 없는 것이 특징이다. 즉, 도교는 어느 특정인물에 의해 제창되어 지속된 종교라고 보기는 어렵다.
또 다른 종교에서처럼 내세에 비중을 두기보다 현실의 인생에 모든 것을 걸며, 거기에 최고 가치를 둔다. 도교에서는 현실에서의 삶 자체가 기본적인 전제이며 삶의 욕구의 추구가 근본적인 목적이다. 충실한 삶-질병의 예방과 치유, 재앙의 모면, 건강과 부귀의 획득, 가문의 번영, 쾌락-과 그러한 삶을 무한히 연장하려는 욕구가 기본적인 전제다. 이런 욕구를 신비적 실천이나 수양에 의해 혹은 초인간적인 힘에 의지함으로써 달성하려는 것이 바로 도교다.
도교가 신도로서 일체감을 갖게 된 시기로 도교의 성립 시기를 잡는다면 동진(東晉)말∼남북조 초엽인 4∼5세기의 교체기가 될 것이다. 그러나 나름으로의 교법(敎法)을 갖고 그것에 기초한 교단(敎團)이 조직된 것을 도교라 부를 경우, 그 시원은 후한말(2세기말)까지 소급된다. 즉, 장각(張角)의 태평도(太平道)와 삼장(三張:張(道)陵-張衡-張魯)의 오두미도(五斗米道)가 그것이다. 양교의 선후관계는 명확하지 않으나 그 교법만을 볼 때 오두미도가 태평도의 영향을 받아 그것을 더욱 발전시킨 측면이 있다.
사실 이 도교 계열 종교의 발생은 현재의 산동·강소(江蘇) 일대의 연해(沿海;海濱) 지역과 극히 관계가 깊다는 것이 정설이다. 오두미도를 창건한 장씨 가문도 강소성 북부인 패국(沛國) 출신이지만, 태평도(太平道)의 교법을 창시한 장각도 하북성 남부의 거록(鉅鹿) 사람이다. 장각은 그가 바로 ‘황건(黃巾)의 난’의 수령이었기 때문에 그 반란활동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을 뿐 태평도의 종교적 활동에 대해서는 충분히 전하는 기록이 없다.
후한 순제(順帝:146∼144 재임)때 산동 낭야(琅邪) 사람인 궁숭(宮崇)은 그의 스승 우길(于吉)이 신인(神人)에게서 받았다고 전해지는 “태평청령서”(太平淸領書) 170권을 헌상했다. 현존 도장(道藏:도교의 모든 경전을 모은 책)에 수록된 “태평경”(太平經)이 바로 그 후신인데, 장각은 이것을 얻어 태평도의 교법을 창시했다는 것이다. 태평도라는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장각이 태어난 시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그가 태평도를 제창하여 활동한 시기는 그 교도들이 누런 두건(黃巾)을 쓰고 후한 정부에 반대해 일제히 봉기한 해인 동시에 그가 죽은 해이기도 한 184년까지의 10여년 간이다.
이 10여년 사이에 장각은 수제자 8명을 각지에 파견하여 교화에 힘쓰도록 한 바, 중국 동반부의 광대한 지역인 서(徐)·유(幽)·기(冀)·형(荊)·양(楊)·연(탏)·예(豫) 등 8주에 걸쳐 신도 36만명을 얻고 그들을 군대로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태평도의 기본 교단조직이 방(方)이고, 전국에 총 36방이 있었다. 이 종교단체는 184년 어느 배교자에 의해 밀고당해 후한 왕조로부터 금지되고 박해당하지만, 결국 종교전쟁인 황건의 난을 통해 정부에 격렬하게 대항하였고, 후한 왕조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갔던 것이다.
중국 역사상 가장 감동적 건축물, ‘都江堰’
태평도의 교법에 의하면 신은 사람의 일상행위를 살펴보고 죄를 범하면 그 벌로 병을 내리게 되어 있다. 즉, 다욕(多慾)은 죄로써 만병의 원인이 되며, 병은 신이 내린 징벌인 것이다. 병에 걸린 사람은 먼저 자기의 죄과를 반성하고 신 앞에서 참회·고백함과 동시에 다시 죄를 짓지 않을 것을 맹세한 후 영험한 힘이 있는 부적과 물(符水)을 마신다. 이때 성직자인 사(師)는 아홉 마디의 죽장(竹杖)을 손에 들고 주문을 외워 신의 용서를 구한다.
2세기 중엽인 후한 순제·환제(桓帝) 무렵 패국 사람인 장릉이 촉의 학명산(鶴鳴山;현재 사천성 劍閣縣 소재)에 와서 수행하여 오두미도라는 이름의 종교를 만들었다. 신자(道民)들에게 오두(五斗)의 미(米)를 공출하도록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 것이다. 앞서 도교의 발생이 중국 동부 연해지역과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였지만, 사실 엄격한 의미의 종교로서의 도교의 시작은 태평도보다 사천 지역에서 시작된 오두미도(五斗米道:天師道)쪽이 시기적으로 빠르다고 할 것이다.
장릉의 도교활동은 세상에 주목을 끌 정도는 아니었던 반면, 장각의 태평도는 후한 사회를 붕괴 직전까지 몰고갈 정도의 대란을 일으킨 종교단체로 급작스럽게 부상하여 세상의 주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오두미도는 장릉의 아들인 장형과 손자인 장로가 계승하여 그 교파를 확장해 갔고, 교법은 장로의 시기에 와서 대성되었다. 장로는 192∼193년경 한중 지역에 종교왕국을 세웠다. 카리스마적 세습 씨족인 장씨가 장생의 영약 제조를 독점하고 천사(天師:天上의 敎師)라는 칭호를 전유하고 있었다. 교단조직은 사군(師君)-치두(治頭)-좨주(祭酒)-귀리(鬼吏)·간령(姦令)-귀졸(鬼卒) 등의 등급을 갖고 있다. 장로가 사군이었고, 입도(入道)한 사람을 귀졸, 그 입도한 깊이의 정도에 따라 점차 높은 칭호가 주어지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강조되는 직이 좨주였다. 좨주의 임무 가운데 하나가 ‘노자오천문’(老子五千文)의 강습이다.
오두미도의 교법은 질병을 치유하는 법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사람은 천신(天神)의 지배 아래 있고, 길흉화복은 천신의 상벌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과오를 빌면서 복을 구하는(謝過祈福) 면이나 부수주술(符水呪術)에 의한 치병(治病) 등 그 교법은 기본적으로 태평도와 비슷하다.
즉, 성신(誠信)하며 일절 속임이 없는 생활을 영위하도록 가르치고, 병자가 있으면 ‘정실’(靜室)에 들어가 범한 죄과를 참회·고백하여 죄를 회개하고 신에게 용서를 구한다. 이때 병자의 성명과 죄과를 갚겠다는 의지를 밝힌 문구를 써넣은 서약서(手書) 3통을 ‘삼관수서’(三官手書)라 하는데, 이것을 천(天)·지(地)·인(人) 3관(官:神)에게 바치면서 다시는 죄를 짓지 않겠다는 것을 목숨을 걸고 서약하는 형식이다.
오두미도에서는 무료 숙박음식시설인 ‘의사’(義舍)를 도로를 따라 곳곳에 설치하여 쌀이나 고기 등 식료를 두고 여행자에게 제공했다. 좨주가 관리하는 이 기관의 설치는 불교에서의 복덕사(福德舍)나 의식(義食)처럼 종교적 보시의 구현이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지만, 도교 신도 가운데 파산한 빈곤유민이 많았던 것과 연관된 것이라 생각된다. 이것은 유민이 본적지로 귀환할 때 무료로 숙식을 제공하던 한대의 정전(亭傳)과 그 기능이 유사하다.
오두미도의 지방 교구를 통괄하는 조직을 치(治)라 하였는데, 치는 일반적으로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도교 유적들이 대개 산 위에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전국에 24치가 있었다. 당시 자료에는 오두미도를 귀도(鬼道)·요도(妖道)·무도(巫道) 등으로 부르고, 그 신도를 미적(米賊) 혹은 요적(妖賊)이라 한 점에서 이 역시 태평도와 마찬가지로 반왕조적, 민중적 성격의 종교단체로 취급되었음은 물론이다.
태평도와 오두미도라는 두 교단을 구성하는 신도의 핵심부분은 유랑농민이거나 그에 가까운 파산한 궁핍농민이었다. 아다시피 시조 광무제 자신이 남양(南陽)의 호족 출신으로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정권을 획득했기 때문에 후한 왕조는 다분히 ‘호족연합정권’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후한 중기 이후 황제가 단명하는 등의 이유로 정치가 본궤도를 벗어나자 외척과 환관이 번갈아 정권을 장악하여 외척·환관의 발호시대를 연출했다. 이런 기강해이를 틈타 지방 호족세력이 발호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격화된 이민족의 침입 등이 일종의 상승작용을 일으켜 농촌 붕괴는 심각한 양상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 결국 후한 말기에 이르러 지방 실력자의 할거시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사천 지역을 근거지로 태평도를 계승한 오두미도
이 와중에 농촌의 계층분화는 ‘폭력적’이라고 할 정도로 급격하게 진행되었다. 민중들은 고향을 등지고 타향으로 유랑하거나 몸을 팔아 노비가 되는 등 궁극적인 의지처인 가족조차 이별해야만 했던 자도 적지 않았다. 사서에 ‘유민’ 혹은 ‘요적’의 활동 기사가 빈번하게 등장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연유한 것이다. 종족이나 향촌 등 기존의 질서로부터 물질적, 정신적 비호나 협력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에 몰린 사람들은 심한 고독과 절망감을 맛보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개인으로서의 구원과 마음의 평정을 전제로 하는 신앙이 요망된 것은 당연하다.
이와 같은 현실의 고뇌와 소망을 통찰하고 그것을 자기의 고뇌로 체험하여 그것을 통해 얻은 구원을 시대 속에서 실현하려는 인사가 나타난 것이다. 그들이 바로 장각이며 장로였다. 물론 그들이 인생에 대한 깊은 통찰이나 인간성 파악에 투철한 식견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할 고매한 이상을 내건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들이 어느 정도 독자적인 종교적 실천과 이론을 정비하여 민중들에게 방향과 조직을 제공하자 갑자기 많은 신도가 모여들었고 커다란 교단이 형성된 것이다.
‘황건(黃巾)의 난’은 도교의 일파인 태평도가 주축이 되어 일으킨 것이지만 당시 민중들이 후한 제국에 절망했었다는 것은 그들이 내세운 구호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창천은 이미 죽고 황천이 들어설 것이다’(蒼天已死 黃天當立). 그들의 궁극적인 투쟁 목표는 후한 왕조가 통치하던 ‘창천’의 시대에서 ‘황천’이라는 새로운 세계로 전환하자는 데 있었다. 황건의 난은 단순한 정치운동이라기보다 오히려 평화롭고 질서 있는 신(神)의 나라를 지상에 세우려고 한 종교운동이었다.
다만 태평도가 성립한 지역은 지리적으로 후한 정부에 근접한 지역이었고, 또 호족세력이 비교적 우세한 지방이었기 때문에 양자가 결합한 힘에 의해 탄압되었다. 그리하여 태평도는 그 탄압에 의해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러나 태평도가 지향한 이념은 오두미도의 교법으로 계승되었다. 오두미도가 태평도와는 다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있을 것이지만, 그 근거지로 사천 지역을 택한 것이 중요한 요인이었다고 생각된다. 한중과 파촉은 후한 정부에 절망하여 유랑하여 들어온 파산 농민이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민중적 역량과 천혜의 지형이 종교왕국의 탄생에 기여했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종교왕국을 건립하여 통치한 장로의 활동시기는 대략 후한 헌제(獻帝:190∼220 재임)의 치세에 해당한다. 장로의 어머니가 익주목(益州牧) 유언(劉焉)과 특수한(내연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먼저 그의 부하로 임용되었다. 유언은 사천분지에서의 할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중원과의 사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장로에게 한중을 공략하도록 했던 것이다. 유언이 죽자 장로는 한중을 차지하였고 천연의 요새라고 할 만한 지형 덕택에 전란중에도 자립하여 20여년간 종교정권을 유지하게 되었다.
장로 치하의 오두미도 정권에서는 교단 조직이 그대로 행정기구였다. 좨주는 동시에 말단 행정관이었다. 종교왕국이기 때문에 행형(行刑)도 종교적으로 행해졌다. 법을 범한 자는 세번 과오를 뉘우친 후 다시 도를 믿을 기회가 주어졌다. 이 과정을 통괄하는 자가 좨주였다. 문제는 이런 종교적 통치를 당시 인민들이 매우 편하게 여기고 즐거워했다는 점이었다.
신도로서 종교적 교화를 받은 민중이 간소한 행정기구와 비권력주의적 지배에 호감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두미도왕국은 이처럼 정치와 종교가 불가분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었다. 정권을 수립하고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으로 종교를 이용하는 당시 일반적인 왕조와는 질이 달랐다.
이 종교왕국은 세속적인 왕조권력에 의해 압살되어 그리 오래 존속되지는 못하였다. 211년 조조는 유비의 촉을 점령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한중에 원정군을 파견했고 몇번의 실패 끝에 215년 관중을 평정하고 한중을 함락시켰다. 이런 정황에서 교주 장로도 조조의 제후(諸侯)가 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여 크게 저항하지 않았다. 장로는 그후 제후로서 높은 명예를 부여받았지만, 오두미도는 원래 독립된 종교정권이라는 형태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그 정치적 독립성을 상실한 이상 종교로서도 큰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없었다.
도교가 최초로 어용화·관방화(官方化)의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장로가 조조에게 귀속한 후 오두미도 간부나 신도들은 중원지역으로 이주되고, 한중은 촉을 수중에 넣은 유비와 조조의 쟁탈전 중심에 서게 되었다. 천사인 장씨의 통제력도 크게 손상되었다. 4세기에 들면서 북방민족의 점령으로 중원지역이 혼란에 빠지자 진(晉)나라는 강남으로 옮겨가 정권을 재건하지만 천사로서의 권위가 땅에 떨어진 장씨의 통제력은 완전히 이완되어 통일적 교단으로서의 모습은 완전히 상실되었다.
이 사이에 오두미도(당시 天師道라 불림)는 좨주들의 자립적 경영에 의해 민중들 사이에 영향력을 얻었고, 귀족화한 장씨의 영향력에 의해 상층귀족 사이에도 신도가 생기게 되었다. 서도가 왕희지(王羲之) 집안이 대대로 오두미도를 믿었고, 동진말 오두미도에 의거해 대규모 반란을 일으킨 손은(孫恩)·노순(盧循)도 귀족 출신이었다.
삼국 이후 오호십육국에 이르기까지 중원지역의 도교에 관해서는 기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북위시대에 들어 돌연 장로의 술법을 닦던 숭산(嵩山)의 도사 구겸지(寇謙之·365∼448)가 대활약하여 도교는 국가종교로서 확고한 지위를 얻기에 이르렀다. 그는 이미 실권을 잃은 장씨를 대신하여 스스로 천사가 되었다. 구겸지의 교법은 오두미의 전통인 남여합기술 등 일부를 버리고 신선사상과 불교를 아울러 섭취한 데다 유교의 예법주의를 첨가한 후 정권과 밀착함으로써 도교의 왕법화(王法化)를 도모하였다.
구겸지는 제자였던 북위 최고 한인 문벌귀족인 최호(崔浩)의 교묘한 추천에 의해 태무제(太武帝)의 국사(國師)가 되고 440년에는 연호마저 태평진군(太平眞君)으로 고치게 하며, 446년에는 마침내 폐불(廢佛)조칙을 이끌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북위 군주는 완전한 도교 군주가 되고 도교는 공식적으로 국가종교가 된다. 그러나 북위에서의 도교의 영향력은 이후 미미하게 되어 갔다. 국가의 열의가 식으면 교단은 급격하게 쇠퇴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정치와 결탁한 종교의 보편적 운명이다.
도교, 사천에서 민중신앙으로 거듭나다
다시 남조로 눈을 돌려 보자. 모산파(茅山派)라 불리는 도교의 일파가 있다. 모산은 남경 동남에 있는 산 이름이지만 그곳에 본거지를 둔 도교의 일파로서 귀족적인 종파다. 진실(晉室)과 함께 남도(南渡)한 서진 재상 위서(魏舒)의 딸 위화존(魏華存:南岳夫人)과 그밖의 진인(眞人)이 구술한 “상청경”(上淸經)이 그 경전이다. 이 모산파는 오두미도의 영향을 받은 면도 있지만 독자적으로 성립된 측면이 강한 것으로, 신선술을 중시하고 불교의 영향을 받아 경전의 독송에 큰 의의를 두는 귀족도교다.
이상에서 보듯 후세 위진남북조시대의 도교는 장로의 조조에로의 귀속 이후 어용화·관방화된 오두미도에서 파생해 나간 것이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어용화·관방화와는 다른 흐름이 희미하게나마 지속되고 있었다. 215년 장로의 투항 이후 기왕의 오두미도의 조직 구성원 일부는 현실정권과 제휴 없이 민간에서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의 주축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 ‘이가도’(李家道)였다. 사실 갈홍의 “포박자”(抱朴子)에서는 이들이 금절되어야 할 사이비 교파로 백안시되었지만 노자의 성인 이씨가(李氏家:李弘·李八百·李脫·李阿 등)가 누대에 걸쳐 노자 변화사상의 체현자로 자임하며 민중신앙의 구심점으로 수세기 동안 역할을 수행했다. 특히 이홍은 남북조시대를 통하여 반란집단의 영수의 대명사로 등장하는 경우가 빈번하게 보인다. 이가도 관계 사료에서 보이는 이씨들은 촉 출신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이가도의 본모습은 4세기 초에 파촉 지역에서 자립한 저족(흷族) 출신 이웅(李雄) 등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웅 등의 성한 정권은 유민세력을 주축으로 형성된 정권으로, 4세기 중엽까지 이 지역에서 독립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웅의 선조들은 장로정권 하에서 오두미도의 영향을 받았고, 오두미도가 실현하고자 한 이상국가를 지향했던 것이다. 이웅은 오두미도의 28치 중 하나인 청성산에 머무르면서 도교국가를 구체화하고 있었다. 즉, 이가도는 장로의 투항과 그 조직의 이완 이후 어떤 정권과 제휴 없이 민간에서 활동하면서 상당한 지지기반을 얻고 있었던 도교의 별파였던 것이다.
사천이 왜 도교의 성지가 되고 사천에 가까운 한중 지역에 중국 최초의 종교왕국이 등장하여 20여년간이나 존속하게 되었고, 또 민중적인 이가도가 지향한 이상향 건설을 목표로 한 성한 정권이 사천 지역에 들어서게 되었는가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 방면에 특별히 문장을 발표해 보지 않은 필자로서도 별다른 논리를 준비하고 있지 않다.
다만 도교의 성립은 민간신앙에 근거한 이상 그 고유의 지방문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도교가 발생하고 또 많은 신자를 확보한 파촉과 제(齊), 즉 산동지방도 신선사상과 관련이 깊은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예컨대 제에 팔신(八神)이 있다거나(“漢書” 郊祀志 上) 발해(渤海) 중에 삼신산(三神山)이 있다는 기록(“史記” 封禪書) 등이 그것이다.
당시 폭력적인 세속정권에 ‘물신양면’에서 상처받은 민중들이 유민이 되어 찾아온 곳이 바로 한중·사천이었다. 당시 민중들의 의식은 ‘인생은 백을 채우지 못하나 항상 천년의 근심을 지고 있네’(人生不滿百 常懷千歲憂;西門行)라든지, ‘인생은 홀연히 거쳐가는 것, 수명은 금석같이 견고한 것이 아니네’(人生忽如寄 壽無金石固)(古詩 19수)라는 시에 극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한중 역시 사천과 마찬가지로 부서(富庶)지역인 동시에 유민이 많은 지역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화양국지” 한중지(漢中志)를 보면 ‘그 땅은 비옥하고 부세 공출은 대략 삼촉과 비슷하다’(厥壤玉美 賦貢所出 略?三蜀)는 기술이 있고, 또 한중 일대에 유민들이 많아 한중 1군으로는 식량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어 조정에 ‘파촉에 가서 기식(寄食巴蜀)할 수 있도록 요구’하는 기사가 보인다.
(“晉書” 李特載記) 파촉 지역의 유민도 사실 한중을 거쳐 들어간 것이라면 한중과 사천은 당시 처해진 사정이 매우 유사했다고 할 것이다. 한중의 지형을 ‘고루’(孤壘)라고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규모는 적지만 한중도 사천과 마찬가지로 외부세력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줄이고 유민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이점도 있는 지역이었다. 이곳으로 몰려든 민중들의 열망에 부응하여 일어난 종교가 바로 도교였다.
위·진 시기는 도교가 종교로 정형화, 성숙화되어 가는 동시에 관방화와 민중화라는 서로 다른 길을 걷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런 분화 과정에서 황제권과의 타협을 거부하고 민중적인 신앙으로의 길을 걷게 한 도교의 전통이 바로 사천 지역에서 발생하였던 것이다. 같은 도교라 하더라도 태평도와 오두미도, 관방화된 오두미도와 민간으로 존속해 간 이가도의 운명이 반드시 동일하지 않았던 것은 각각이 다른 배경을 갖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필자가 한중을 거쳐 사천을 찾은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도교의 발상지 청성산은 성도 북방 59㎞에 위치한 관현(灌縣) 현성 서남 15㎞에 있는 해발 1,600m의 산이다. 파란 나무들이 성벽을 이룬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나 중국의 다른 영산, 예컨대 오악(五嶽)에 비한다면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산이다. 민중의 아픔을 포용하고 그들에게 현세에서의 무한한 위안을 주던 도교의 사원이 우람해서야 되겠는가? ‘청성산은 천하에서 가장 그윽하다’(靑城天下幽)고 하지만 산의 형세가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많은 도관(道觀) 때문일 것이라 생각되었다. 지금도 전산(前山)과 후산(後山)을 합쳐 38개의 도교사원이 남아 있다.
유명한 도관은 주로 전산에 위치하고 있다. 전산의 산상에 있는 상청궁(上淸宮)에는 이노군(李老君:老子)의 상이 모셔져 있다. 청성산 전산 허리인 혼원정(混元頂) 암벽 사이에 위치한 천사동(天師洞)은 천사(天師) 장릉이 일찍이 그곳에서 강도(講道)했다고 해서 이름을 얻은 곳이다. 그 도관의 주전(主殿)인 삼황전(三皇殿:伏羲·神農·軒轅) 앞에는 장릉이 심었다는 은행나무 한그루가 아직도 서 있다. 그 옆에 천사 조상이 있는 사묘(寺廟)는 수나라 양제(煬帝) 대업 연간에 지은 것인데 연경관(延慶觀) 혹은 상도관(常道觀)이라 한다.
북경에서부터 동행한 Z교수, 그리고 C원장은 도관 하나하나를 들를 때마다 도교의 여러 신들 앞에 쭈그리고 앉아 중얼거리며 흐느낀다. Z교수도 나보다 1년 연상으로, 문혁(文革)때 깊은 상처를 받은 사람이다. 그들이 머리를 조아린 도교의 신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러나 그들이 왜 그 앞에서 그래야만 했는지는 진정 뜨거운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