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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유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사람은 누구나 사유한다. 사유는 전체를 뜻하기도 한다. 사유보다 작은 존재 가치들을 은유라고 한다. 예를 들어 축구, 농구, 애구, 배구, 핸드볼 등은 은유에 속하고, 이것들을 모두 하나의 단어인 ‘스포츠’라고 말할 수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사유라는 것이다.
내가 사유하기 때문에 나는 존재한다.
존재하는 것들이 모두 사유한다고 볼 수 없다.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근대 철학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위대한 철학자였으며 다방면에 박식한 식견을 자랑했지만 역사학에 관해서는 시종일관 평가 절하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데카르트의 반역사적 경향은 이탈리아의 비코나 베이컨을 필두로 한 영국 경험론의 단초가 되었다는 것이 콜링우드의 생각이었다.
근대 철학이 주로 다룬 문제는 인식의 문제였다. 데카르트는 인식과정에서 지각을 통해 얻는 정보의 가치를 의심했다. 그의 인식방법의 핵심인 ‘懷疑’는 지각을 통해 얻어지는 정보에 대해서 그가 어떠한 가치를 부여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데카르트는 지각 또는 경험은 모두 이성의 관점에서 회의되어야 하고 회의된 후 의심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남는 명제들이야 말로 진리이며 인식이란 지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의심하고 회의하여 참인 명제들을 가려내는 일련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데카르트의 자신의 인식론에 기초하여 참된 인식을 다루는 학문을 수학, 물리학, 형이상학이라고 규정하고 이 분야에 자신의 철학적 탐구를 집중했다.
데카르트의 인식론에 의하면 역사학이란 참된 인식에 도달하기 위한 학문이 아니었다. 이는 베이컨의 생각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생각이었다. 베이컨의 경우 경험을 인식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으며 역사학이란 기억을 다루는 학문이라 하여 높이 평가했다.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에는 데카르트가 역사에 관해 언급한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을 읽어보면 데카르트가 역사에 관해서 나름대로 충분한 고려를 거친 후 역사학을 참된 인식의 분야에서 제외시켰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데카르트가 볼 때 역사학이란 외국여행을 통해 다른 나라에 관한 식견을 넓히는 것과 같은 것이었다. 외국여행을 하는 데 전혀 이유가 없는 것은 아니다. 외국여행을 통해 우리는 다른 나라의 풍속에 관해 개방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외국여행을 통해 발견한 외국의 풍속을 그대로 자기나라에 적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풍속이 발전한 토양 자체가 다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는 동일한 역사는 절대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다. 동일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역사적 인식의 목적에 관한 기존관념을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다. 전통적으로 역사가들은 역사학의 목적에 관해서 공리주의적(실용주의적) 관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역사를 통해 현실사회 개혁의 방법과 방향을 확정할 수 있고 나아가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생각은 당시의 일반적 관념이었다. 그런데 동일한 역사는 반복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역사적 인식에 관한 공리주의적 입장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콜링우드는 데카르트의 입장은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칭찬한다. 그러나 데카르트의 역사관이 선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데카르트는 역사학에 무관심했으므로 당대의 역사가들이 이미 공리주의적 관점을 벗어나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는 점도 아울러 지적한다. 이미 당대의 역사가들은 역사를 현재의 시각에서 현재의 사고방식이 출현할 수 있게 한 연원으로서의 의미를 부여하고 시작했고 역사는 과거를 통한 현재의 인식이며 미래는 현재를 살고 있는 인간의 새로운 창조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데카르트가 역사를 평가절하 한 또 하나의 이유는 역사적 인식의 재료가 되는 역사가의 역사 저술이 실제 발생한 역사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었다. 역사가는 역사적 사건을 기록하는 매 순간 취사선택을 하여 역사저술에는 역사가가 원하여 취사선택된 부분적 사실들로 가득 차 있으며 때로는 역사가의 허풍이 발생하지도 않은 사실을 발생한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는 것이다.
콜링우드는 데카르트의 이러한 주장 역시 선구적인 것이며 전적으로 타당하다고 칭찬한다. 만약 데카르트가 역사적 인식의 성립가능성을 인정했다면 당연히 역사적 저술에 대한 비판적 인식방법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한다. 사실 오늘날의 역사학은 주어진 사료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비판적 분석이라는 것은 역사적 사실의 실제발생과 경과를 현재의 시각에서 회의하여 역사적 저술 속에 감추어진 실제 사실을 발견하기 위한 방법론에 다름 아니다. 이러한 비판적 역사 인식은 비코에 의해 그 일부가 제시되었으나 데카르트는 역사적 인식의 성립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였기에 비판적 역사인식의 방법론을 발전시킬 여력이 없었다.
데카르트에 의해 부정된 역사적 인식의 성립가능성은 경험주의에 의해 긍정된다. 베이컨은 기억을 다루는 학문으로서 역사를 부활시킨다. 그러나 콜링우드의 견해에 따르면 기억을 다루는 학문으로서의 역사학이란 베이컨의 정의는 잘못된 것이다. 콜링우드는 기억할 수 있다면 역사가 필요하지 않게 됨을 베이컨은 간과했다고 주장한다. 역사는 기억할 수 없는 과거사실의 인식을 다루는 학문이라는 것이다. 베이컨을 비롯한 경험주의자들이 가지는 근본적 문제점은 인식에 있어서 지각작용의 역할을 지나치게 중시했다는 것이며 인식의 문제를 지각의 문제로 환원시켰다는 것이다.
칸트에 의해 이성과 경험의 통일로서의 인식개념이 정립되기 전까지 역사적 인식의 성립가능성을 긍정한 사상가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비코였다고 콜링우드는 말한다.
비코의 인식론은 전적으로 반데카르트적인 것이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으로서의 회의는 사실상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철학 등 인문학에 적용한 것이었다. 자연과학은 자연 현상의 기저에 흐르는 보편적 법칙을 발견하거나 현상 속에 숨겨진 본질을 발견하고자 한다. 데카르트는 자연현상을 인간이 지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정보로 등치시키고 보편적 법칙과 본질은 지각과 현상을 초월한 곳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보편적 법칙과 본질에 대한 인식은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의 인식과 다름없었던 것이다.
자연과학적 측면에서 본다면 본질은 몰라도 법칙이 존재한다는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한다. 그러나 과연 인간의 행위의 다른 표현인 역사적 사실조차 단지 현상이라고 치부할 수 있으며 애초에 현상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지각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코는 이렇게 말한다. 이탈리아어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은 이탈리아어에 대해 회의하지 않으며 이탈리아어가 무엇인지 의문을 품지 않는다고. 이 이야기는 콜링우드에 의해 다음과 같이 부연된다. 자연물과 달리 인간이 창조한 인공의 제도나 물건들은 인간이 그 창조의 주재자라는 점에서 인식이 가능하다. 예컨대 의자를 만든 장인은 의자의 재료가 되는 나무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해도 의자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으며 그 기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의자는 자신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적 사실이란 인간의 창조물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물론 역사는 과거 인간의 행동을 대상으로 한다.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창조한 것이 아니라 과거의 어느 인간이 창조한 것이다. 이 시간의 다리를 연결하기 위해서는 별도의 방법론이 필요하다. 비코는 현재의 우리의 인식 속에 이미 과거가 녹아있다고 생각한다. 역사가는 역사가의 생존 당시의 시각으로 역사적 사실을 추체험하는 방식으로 역사적 사료를 비판적으로 연구할 수 있으며 그 결과 현재의 제도와 사고방식의 역사적 연원을 추적해 내고 기성제도와 문명의 목적과 창조 의도를 인식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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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주의(Descartes主義)
근대 합리론의 아버지로 불리는 데카르트의 사상 및 그 계승자의 사상. 데카르트주의자들은 데카르트의 사상 중에서도 특별히 마음과 육체에 대한 문제나 신에 대한 문제를 중심으로 이론을 전개하였다. 데카르트는 프랑스에서 출생하였지만 네덜란드에도 장기간 체류하였기 때문에 프랑스뿐 아니라 네덜란드에서도 데카르트 학파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 네덜란드는 당시의 상황이 서로 달랐으므로 프랑스의 데카르트 학파와 네덜란드의 데카르트 학파 사이에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데카르트의 철학
데카르트는 감각 지식은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못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이성적인 능력에 의하여서만 명확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래서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절대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한 근거를 알아 내어 '사유의 체계'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 목적을 위하여서는 우선 우리에게 가깝고 확실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부터 일단 의심하는 방법을 취하여 궁극적으로 의심할 수 없는 진리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방법적 회의'이다.
데카르트는 이 방법적 회의를 통하여 의심하고 있는(생각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수 없는 명명 백백한 진리임을 발견하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를 철학의 제1원리로 삼았다. 여기서 그는 "명석 판명하게 인식된 것은 진리이다. "라는 철학의 제2원리를 이끌어 냈다. 그러나 이러한 원리들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우리를 절대로 속이는 일이 없는 성실한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는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얻을 수 있는 관념(생득 관념) 즉 '생각하는 나'처럼 명석 판명한 관념 5가지를 제시하였는데, 자아·신·논리 법칙·수학 명제·물질의 공간성이 그것이다. 이 생득 관념설에 의하여 데카르트는 신의 존재를 증명하고자 하였는데, 생각하는 자아는 완전하지 않고 한계가 있기 때문에 완전하고 한계가 없는 어떤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하고 한계가 없는 존재는 스스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라는 것이다. 이 무한하고 전지전능한 신은 성실을 그 속성으로 갖기 때문에 데카르트가 제시한 철학의 원리들은 확실한 보증을 부여받게 되었다.
다음으로 그는 물질세계의 존재를 증명하고 정신과 물체는 서로 공통성이 없는 각각 독립된 실체라는 물심 이원론(物心二元論)을 주장하면서, 인간에게 있어서 심신이 결합된 것은 단순히 기계적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도덕적인 문제에 가서는 반대로 물(物:身)과 심(心)의 합일을 설명하고 그 합일의 결과로 생기는 인간적인 의식의 표현이 정념(情念)이며, 특히 바람직한 삶을 위해서는 헛된 욕망을 갖지 않아야 하는데, 결국 경이로부터 자존감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우리의 자유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여야 하며, 그러한 자유 의지의 완성이 영혼의 최고 목표이며 참된 행복을 얻는 길이라고 그는 주장하였다.
데카르트 학파
데카르트 학파는 위와 같은 데카르트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켰는데, 고찰의 중심으로 삼은 것은 데카르트가 해결하지 못한 채 남겨 놓은 물심 이원에 대한 심신 문제 및 신의 섭리와 인간의 자유 의지 사이의 충돌에 대한 문제이다. 대표적으로 니콜라 말브랑시와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가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시도하였다. 니콜라 말브랑시는 기회 원인론(機會原因論)을 제시하였는데, 그에 따르면 심신은 서로 의존적인 관계이며, 신만이 세계 사상(事象)의 유일한 원인이 되는 작용자이고 피조물로서의 정신이나 물체는 다만 이 신이 우리의 마음 가운데 감각이 일어나게 하는 기회인(機會因)에 지나지 않는다는 견해이다. 여기서 신은 그의 본성이 단순(單純)과 제일(齊一)이기 때문에 피조물을 지배하는 법칙도 일반적이며 이것을 특수화하여 실현하는 것은 피조물의 몫으로 남겨 두어 피조물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하려 한다. 한편,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신을 범신론적으로 변화시킴으로써 이원론을 극복하려고 하였는데, 데카르트의 기계적 물질 세계를 신 안으로 가지고 들어가 '신은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이며 곧 자연이다'라는 견해를 제시하였다.
데카르트는 정신과 물체도 실체로 보았으나, 스피노자는 오직 신만을 실체로 보았으며 정신과 물체는 그 속성이 모든 면에서 평행적이어서 비록 상호 작용하지 않더라도 상호 작용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였다. 범신론은 세계의 법칙적 필연성 자체를 신의 속성으로 보는 완전한 결정론(決定論)이므로 궁극적으로 데카르트주의의 벽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 사상은 이들을 거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의 단자론적 세계로 발전하였는데, 이것에서 데카르트주의는 완전한 종결을 맞았다. 그러나 데카르트 형이상학의 몇몇 측면은 20세기에 들어서서도 여전히 지지를 받고 있으며 그의 합리성은 현대 서구인의 의식 구조의 바탕을 형성하고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당시에 진리라고 받아들여진 것들이 얼마나 기초가 허약한지를 비판했고,확실한 기초 위에 진리와 학문의 토대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확고한 진리란 누구에게나 명증한 것이거나 적어도 누구나 올바른 방법만 사용하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데카르트는 '방법서설'의 앞부분에서 인간에게는 누구나 올바른 것을 판단할 이성이 있다는 것을 전제한 뒤 올바른 방법의 발견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주지시켰다. 자신이 발견한 방법의 원칙을 소개하기 위해 여러 학문의 원칙들을 검토한 다음 그러한 원칙은 수학에서 비롯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방법론의 원칙을 확립한 뒤 이어지는 부분에서 그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는 제1원리'로 발견하는 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원리다. 연세대학교에서 이미 출제된 이 글의 뒷부분은 데카르트의 '방법서설',그리고 19세기 소년감화원의 규칙을 수록해놓은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그리고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의 한 부분을 모아놓음으로써 서구 현대 사회를 관통하는 원리가 데카르트로부터 비롯된다는 생각을 명확히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위의 글만으로도 알 수 있듯이 이성의 규칙 혹은 방법론을 따름으로써 우리가 원하는 목표를 얻을 수 있으며,그러한 이성의 규칙 혹은 방법론이란 수학적인 또는 기계적인 절차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을 데카르트만이 보여준 것은 아니다. 그보다 약간 앞선 시대의 갈릴레이는 "자연은 수학의 언어로 쓰여진 책"이라고 보았고 당시 물리학자들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생각이었다. 기본적으로 갈릴레이나 뉴튼의 새로운 물리학이란 수학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물체의 속도나 천체의 움직임에서 수학적 관계를 찾으려 했던 이들보다 더 철저하게 멀리 나갔다. 그는 이러한 수학적 원리가 이성과 진리의 기초에 놓여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이 훈련받은 수학적(기하학적) 사고방식을 일반적인 이성의 원리, 문제 해결과 진리 발견의 원리로 제시하고 있다.
당대의 학문을 두루 섭렵한 데카르트는 새 시대를 열어갈 새로운 과학적 철학적 기초를 확립했다는 확신을 갖게 됐고,'굴절광학''기상학''기하학' 등 세 편의 과학적 논문을 출판하기로 마음먹는다. '방법서설'은 이 세 편의 논문에 대한 시론이었다.
이 글은 엄격하게 철학적이거나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전적인 내용을 많이 포함하고 있는 에세이였다. 그가 '성찰'과 같은 본격적인 철학적 저작을 통해서 보여준 학문과 이성에 대한 견해를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는데 유용하고 효과적이었다.
발췌문은 그가 생각한 기본적인 학문 방법론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다. 고전이라는 이름에서 기대할 만한 '위대한 생각'을 읽는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상식적인 내용을 지루하게 서술해 놓은 듯 보이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 시대의 진정한 고전이란 이미 우리 문화와 사회의 토대가 돼서 더 이상 낯설지 않게 느껴지는 것들이다. 데카르트를 읽어야 한다면 그것은 그가 진정으로 위대해서라기보다는 데카르트적인 생각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우리의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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