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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明>十七年庚子,正月,上如<孟>后陵‧<奧犍>墓,觸寒不豫而還,<陜父>憂之,上曰“凡為人主者,東戦西鬪身被数十創,而猶屹然不屈,些少寒痛何足慮哉.”遂强疾而起. <類利>太子得神釼斷片於柱下,而與<屋智>‧<勾鄒>‧<都祖>等發<柵城>,<禮>氏亦隨之.時,<帶素>‧<觧百>欲留<禮>氏母子,而<蛙>王命放去.<帶素>累違<蛙>王意,遂如其意者,一以梪恩於<類利>,而二欲乱爭嗣之致也. 上如<羊花宮>.上夀后之旧晬也.上親嚼鹿脯而哺食之.上慕先皇爱<羊花>之情,而綢繆之密至於此矣. <召>皇后錄公卿妻女及民間女,已經聖幸者九十七人,作鵞結後改「琳府」,賜年穀‧歲衣‧時饌.上知之益賢<召>后,曰“賢哉.吾妻也.能至於此乎.”
<동명>17년경자{BCE21}, 정월, 상께서 <맹孟>후릉과 <오곤奧犍>의 무덤엘 가셨다가 한기寒氣가 들고 위중하여져서 돌아오셨기에, <협보>가 걱정하였더니, 상께서 이르시길 “사람들의 임금이 된 모든 이들은 동쪽에서 전쟁하고 서쪽에서 전투하다가 몸에 수십 곳의 상처를 입고도 오히려 위엄 있게 우뚝 서서 꺾이지 않고 꿋꿋해야 할 것이거늘 사소한 한통寒痛을 어찌 걱정한단 말이오!”라 하시면서 환후를 거스르시며 일어나셨다. <유리>태자가 부러진 신검神劍 조각을 기둥 아래에서 찾아서, <옥지屋智>・<구추勾鄒>・<도조都祖> 등과 함께 <책성柵城{東夫余都城}>을 떠났더니, <예禮>씨 또한 이들을 따라나섰다. 이 시절, <대소帶素>와 <해백觧百>은 <예>씨 모자母子를 눌러있게 하려고 하였었으나, <금와金蛙>왕이 명을 내려서 풀어주어 떠나게 한 것이었다. <대소>는 여러 차례 <금와>왕의 뜻을 거역하였었으나, 마침내 <금와>왕의 뜻과 같았던 것은, 그 하나는 <유리>에게 하찮은 은혜梪恩를 베푸는 것이었고, 그 둘째로는 어지러운 후사後嗣다툼에 휘말리게 하고자 함이었다. 상께서 <양화궁羊花宮>으로 가셨다. 상께서 후의 예순 번째 생일에 술을 따르며 장수하시길 빌었음이었다. 상께서 친히 사슴포를 씹어서 먹여주어 먹게 하셨더니, 상께서는 선황先皇{慕漱帝}께서 <양화>를 사랑하시던 정을 뒤따르시며 세밀히 챙기시는 그윽함이 여기까지 이르심이었다. <소>황후가 공경公卿들의 딸들과 민간民間의 딸들을 적어보았다. 이미 상께 승은을 입은 이들 97인으로 ‘아결鵞結'을 만들었고, 이후에 고쳐서 「림부林府」로 되었는데, 년곡{매년 먹을 곡식}과 해마다 입을 옷가지들 및 절기별 음식을 하사하였더니, 상께서는 <소>후가 더욱 현명해졌음을 아시고는 “현명한 내 처이십니다. 이런 일을 하기까지 되다니!”라고 이르셨다.
三月,上與<召>皇后‧<蓼>公主如<獸林>溫宮.時,二后皆有娠故也.上慰留七日,而進熊蹯‧駝峰‧鵞皮‧鼋卵,撫愛周密. <桓柏>‧<羊臣>等,擊<東安平>拔之,虜其世豪二十家移于「西都」.牛‧羊‧馬‧豕‧豆‧粱‧段匹無数,置<安平州>「刺使」及「太守」.「太守」以武将,「刺使」以宗戚功臣子弟中年高知事者為之.先是,<鄭道[東]>,年十七為「長岺州刺使」,為土民所忽故,有是命. 以<萱>公主為<屛>太子妃,賜宴宮中.<仲室>氏‧<張>氏‧<鄭>氏等親族加爵授職.
3월, 상께서 <소>황후 및 <삼화蔘花{蘋花妹, 芻牟異腹姊}>공주와 더불어 <수림獸林>온궁으로 가셨다. 이때, 두 후 모두가 임신한 때문이었더니, 상께서 위로하시면서 이레를 머무셨고, 곰발바닥, 낙타 혹, 거위껍질 및 자라 알을 먹이면서 위로하고 아껴줌에 빈틈이 없으셨다. <환백桓柏>과 <양신羊臣> 등이 <동안평東安平{安平國의 東쪽으로 卒本・桓那・黃龍・沸流・勾茶・荇人・涉羅・盖馬・卑离・紫蒙・安平 등 以外의 地域일 것. 或 현금山西省 冀城・王屋山間 安峪? 洹河邊安陽?}>을 쳐서 빼앗고, 대대代代로 호족豪族이었던 스무 집안을 「서도西都」로 옮겼더니, 소・양・말・돼지・콩・기장 및 비단 필들이 무수하였다. <안평주安平州{安平+東安平?}>에 「자사刺使」와 「태수太守」를 두셨다. 「태수」는 무장武將이었으며, 「자사」는 종척과 공신들의 자제로 나이가 많고 정사政事를 아는 이로 하셨다. 이에 앞서서, <정도동鄭道東(道宋은 封南蘇州刺使也)>을 나이 열일곱에 <장령주長岺州>의 「자사」로 삼았더니, 토착土着백성들에게 홀대忽待를 당하였었기에, 이렇게 명하신 것이었다. <훤萱>공주를 <병屛>태자비로 삼고, 궁중에서 연회를 열어주셨다. <중실仲室>씨와 <장張>씨 및 <정鄭>씨 등의 친족들에게 작위를 얹어주고 직무를 주셨다.
四月,上與皇后親臨「鸞庭」,閱州郡貢士三百七十人.孝友廉德之士,仙‧儒秀才,医薬‧卜筮‧農工藝術之人,各授其職.自今年為始,經三年,遞擧補用.
<長岺州>老人<鴌孫>自来請謁,上接見于私殿,老人曰“自古聖王之治,以養老為重.臣年八十未,聞陛下敬老之宴故,自来求之.”上大喜曰“朕果失矣.叟之責我宜矣.”乃行敬老之宴,年七十以上,各於其州,賜酒肉衣杖.
4월, 상께서 황후들과 더불어 친히 「란정鸞庭{西都 鸞臺의 뜰}」으로 왕림하시어 주州군郡들에서 뽑아 올린 선비들 370인을 살피시어, 효성孝誠과 우애友愛가 있고 검소儉素한 덕德을 갖춘 선비들과 선도仙道 및 유학儒學의 수재秀才들과 의약醫藥・복서卜筮・농공農工에 재주와 기술이 있는 이들 각각에게 직무를 주셨다. 금년부터 시작하여 3년마다 번갈아 천거하여서 보충・등용키로 하셨다.
<장령주長岺州>의 노인 <궉손鴌孫>이 스스로 찾아와 배알하길 청하기에, 상께서 사사로이 쓰시는 전각에서 접견하셨더니, 노인이 아뢰길 “옛 부터 훌륭한 임금들의 치세엔 노인 부양을 중히 여겼었습니다. 신의 나이 여든이오나, 폐하의 경로연敬老宴을 아직 들어보지 못하였기에, 스스로 찾아와서 열어 주시길 청합니다.”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크게 웃으시면서 이르시길 “짐이 과연 놓쳤음이오. 노인께서 나를 책하심이 마땅합니다.”라고 하시고는 경로연회를 여셨다. 나이 70이상인 이들이 각자의 주州에서 술과 고기 및 옷과 지팡이를 하사받았다.
五月,「玄菟太守」‧「南口大将軍」<漢素>薨,年五十二.上慟哀之曰“折我右臂矣.”以「太輔」禮葬之,納<素>妻<大房暖>於後宮為夫人,賜翟服如后禮.<暖>辞曰“妾已四十,皃亦醜劣不足以配聖人,請與兒輩送余年于亡夫墓側.”上曰“吾見卿如<素>.豈徒為色哉.<素>之子女則我之子女也.宜皆携入宮中可也.”<暖>辞之,不得,携其子女七人而入宮.上賜其子女姓<觧>氏.<暖>以貞潔自守未有外夫,治家有道,世稱賢妻之範.累因其夫之命而薦枕於上,至於生子而未肯奔放.至是入宮,乃知天命而事上以夫,而縱其情.上大惑之.其母聞而喜,其父聞而怒曰“列女不更二夫,雖万乘何可屈乎.非吾女也.”乃上書言“天子不奪匹婦之節.”上爲之謝,曰“吾與<素>約為一身久矣.舅何多言邪.”仍謂<暖>曰“如汝父者,真吾舅也.”遂賜金銀帛段於<暖>之父母.其父不受,其母受之,上幷皆賜其母.尋以<良>為右輔‧御史大夫,追封<漢素>為<燕王>.
5월, 「현도태수玄菟太守」・「남구대장군南口大將軍」<한소漢素>가 나이 쉰둘{BCE72년생}에 죽었더니{☞玄菟는 南口와 隣接地境!}, 상께서 애통해 하시면서 “내 오른 팔이 잘려나갔음이오.”라 하셨다. 「태보」의 예법으로 장사하시고, <한소>의 처 <대방난大房暖>을 후궁으로 거두어 부인을 삼고 후의 예법처럼 적복을 하사하셨더니, <대방난>이 고사하며 아뢰길 “첩은 이미 나이가 마흔{BCE60년생}이고, 용모 또한 추하고 못생겨서 성인을 짝하기에 부족합니다. 청하옵건대 제 아이들과 더불어서 죽은 지아비의 무덤 곁에서 여생을 보냈으면 하옵니다.”라 하매, 상께서 이르시길 “나는 경을 <한소>처럼 여기고 있소. 어찌 색사色事 때문이겠소. <한소>의 자녀들은 곧 내 자녀들이오. 의당 모두를 데리고 궁중으로 들어와야 할 것이오.”라 하시니, <대방난>이 사양하다가 어쩌지 못하고 아들 딸 일곱을 데리고 입궁하였고, 상께서는 그 자녀들에게 <해觧>씨 성을 하사하셨다. <대방난>은 정결하게 자신을 지켜서 바깥지아비{情夫}가 없었으며, 가내家內를 도리로써 다스렸더니, 세상 사람들이 현처賢妻의 모범模範이라 칭송하였다. 누차 지아비의 명으로 인하여 상의 잠자리를 모시어 아들을 낳고서도 분방奔放하지 않았으며, 지금에 이르러 입궁하더니 천명天命임을 깨닫고 상을 지아비로 섬기면서 그간의 정을 풀어놓았더니, 상께서는 크게 혹惑하셨다. 그녀 어미는 이를 듣고 기뻐하였으나, 그녀 아비는 이를 듣고 노하여 말하길 “열녀烈女는 두 지아비를 겪지 아니하거늘, 만승천자萬乘天子라 할지라도, 어찌 꺾였단 말이냐? 내 딸이 아니로다!”라 하고는, 글을 올려 진언하길 “천자는 필부匹婦의 절개를 빼앗지 않습니다.”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 그리 하신 것을 사과하시고 말씀하시길 “나와 <한소>는 한 몸인지 오래였었소. 장인丈人께서는 어찌 말씀이 많으시오?”라 하셨으며, <대방난>에게 말씀하시길 “그대의 아비 같은 이가 진정한 내 장인이시오.”라 이르시고는, 금・은과 비단을 <대방난>의 부모에게 하사하셨더니, 그 아비는 받지 아니하고 그 어미는 받아서, 모두를 합쳐서 그 어미에게 하사하셨다. 거듭하여 <대방량大房良>을 「우보」・「어사대부御司大夫」로 삼으시고, <한소>를 <연왕燕王>으로 추봉追封하셨다.{☞이전 昭王 燕의 위치가 玄菟・南口 지경 정도라는 의미 아니겠는가?}
八月,行聖母大祭于<南岺>. 以<大房彦>為「玄菟太守」‧「南口将軍」,<大房暉>為「河城将軍」.<大房>氏自此昌盛而為<于>太后之先祖. <類利>太子自<曷思>至<松江>,寄于<加菽>公邸,而観望情勢.<貫貝>夫人迎入于其家而密謀立儲之事.時,<召>皇后專寵已久,政事多决於其手,百官之任免黜陟亦多出於其意,<卒本>人之居官者甚多.<黃龍>‧<沸流>之人多怨之,與<荇>‧<卑>‧<盖>‧<勾>等新附之囯,皆擁<類利>太子而欲新其政.<貫貝>與<召>皇后爭寵被黜,而欲伸其寃亦引<類利>.<順奴>之民多被<類利>之恩救,且以宗戚之鄕隐有背<卒>之勢亦敀於<類利>.而<召>后未之覺<禮>后與<貫貝>同年同月之生結為姉妹,<類利>與<松義>為兄弟,以<奧春>為謀主. 以<漢素>妻<仇春(一作曼)>為<漢悉>妻,<桓曼>為<鄭道東>妻,妾<五卿>等皆為<悉>妾.<悉>,<大房>之出,時年二十四,襲封「河濱侯」,為上之假子.<道東>,<張>妃出,時年十九,亦上之假子也,頗有寵而資勢. 上聞<婁洽>生子,遣使於<紫蒙>,賜<洽>翟衣‧黍酒及兒衣.
8월, 성모큰제사를 <남령南岺>에서 지냈다. <대방언大房彦>을 「현도태수」・「남구장군」으로, <대방휘大房暉>를 「하성장군河城將軍」으로 삼았더니, <대방大房>씨는 이로부터 창성昌盛하였고, <우于>태후의 선조先祖가 된다. <유리類利>태자가 <갈사曷思>땅{多勿郡?}에서 <송강松江>땅으로 다다라서 <가숙加菽>공{前任曷思侯・松江王} 저택에 의탁하고 정세를 관망하였더니, <관패貫貝>부인{召西奴姊,松讓妻.松義母}이 자기 집으로 맞아들여 후사後嗣로 세우기를 밀모密謀하였다. 이때, <소召>황후가 성총聖寵을 독차지하여 많은 정사政事가 그녀의 손안에서 결정되었고, 백관百官을 임면任免하거나 내치거나 승차함 역시 그녀의 의중에서 나옴이 많았더니, <졸본>국사람들로 관직에 있는 이들이 심히 많았다. <황룡>국과 <비류>국의 많은 사람들은 이를 원망하였고 <행인>・<비리>・<개마>・<구다>국 등 최근에 귀부歸附한 나라들 모두와 함께 <유리>태자를 옹위擁衛하며 정사政事를 새롭게 하고자하였다. <관패>는 <소>후와 성총을 다투다가 쫓겨났었더니, 원통함을 펼쳐보려고 <유리>를 끌어당겼고, <순노>국의 백성들도 <유리>의 은혜로운 도움을 받은 것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종척宗戚들의 고향이었더니 은근히 <졸본>세력을 배척하는 기세氣勢가 있어서 <유리>에게로 돌아섰었다. 허나 <소>후는 <예禮>후가 <관패貫貝>와 같은 해 같은 달에 태어났기에 자매姉妹가 되기로 한 것과 <유리>가 <송의松義>와 형제를 맺고 <오춘奧春>을 모주謀主로 삼은 것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한소>의 처들이었던 <구춘仇春(한 곳에는 仇曼으로 되었음)>을 <한실漢悉>의 처로 <환만桓曼>을 <정도동鄭道東>의 처로 삼아주시고, 첩들이었던 <오경五卿> 등은 모두 <한실>의 첩으로 삼아주셨다. <한실>은 <대방난大房暖>소생으로 이때 나이 스물넷이었으며, 「하빈후河濱侯」를 습봉襲封하고 상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정도동>은 <장張>비 소생으로 이때 나이 열아홉이었으며, 역시 상의 양자로 꽤나 총애를 받았고 재력財力도 있었다. 상께서는 <자몽紫蒙>의 <루흡婁洽>이 아들을 낳았음을 들으셨더니, 사신을 <자몽>으로 보내시어 <루흡>에게 적의와 기장 술 및 아이 옷을 하사하셨다.
九月,<召>皇后生<歓>公主.
閏九月,朔,<蓼花>公主生<鵞>太子. 以<烏伊>女<鴹>氏為<蘋>太子妃,賜<羊>氏‧<烏>氏宴. <烏孫>王<烏就屠>死,子<無离大>為其弟<日貮>所所殺,<無离大>之子<安日>求救於<漢>,<漢>逐<日貮>而立<安日>.<安日>追<日貮>於<康居>而刺殺之.上,聞之,召諸皇子而戒之,曰“兄弟相爭,亡國之道也.爾等戒之.序長而立賢,何爭之有.幼者宜屈於長,而愚者宜尊賢而讓位而已.如<烏孫>者借<漢>之力而兄弟相殘,無道之甚也.” 「太輔」․「松江王」<觧德>薨,年六十,葬以王禮.<漱帝>之苐三子也.有儉閑之德,居位不矝好問於人,常以仙學不進為憂而逝.以<大房良>為「太輔」,<乙耕>「左輔」,<武骨>「右輔」,<奧命>「淸河侯」,賜奴婢莊園.
9월, <소召>황후가 <환歡>공주를 낳았다.
윤9월, 초하루에 <삼화蔘花>공주가 <아鵞>태자를 낳았다. <오이>의 딸 <양鴹>씨를 <빈蘋>태자비로 삼으시고, <양羊>씨와 <오烏>씨들에게 연회를 베푸셨다. <오손烏孫>왕{昆莫,昆彌} <오취도烏就屠>가 죽었다. 아들 <무리대無离大>가 그의 동생 <일이日貮>에게 죽임을 당하여, <무리대>의 아들 <안일安日>이 <한漢>에 도움을 청하였더니, <한>이 <일이>를 쫓아내고 <안일>을 보위에 세웠으며, <안일>은 <일이>를 추격하여 <강거康居{遠西域}>에서 척살하였다. 상께서 이를 들으셨더니, 여러 황자들을 불러 놓고 이르시길 “형제들이 서로 다투면 나라가 망하게 된다. 너희들은 이를 경계하여야 할 것이다. 순서대로 맏이를 세우거나 현명한 이를 세우면, 어찌 다툼이 생기겠느냐. 나이가 적은 이는 의당 나이 많은 이에게 굽히고, 미련한 이는 마땅히 현명한 이를 받들면서 자리를 양보해야 하는 것이다. <오손>임금과 같은 이는 <한漢>의 힘을 빌려 형제들을 죽였으니, 무도함이 심하였던 것이다.”라 하셨다. 「태보」・「송강왕松江王」<해덕觧德>이 죽었다. 나이 육십{BCE80년생}이었고, 왕의 예법으로 장사하였다. <모수제>의 셋째 아들로, 검소하고 부산하지 않은 덕이 있어서, 왕 자리에 있으면서도 다른 이들에게 묻기를 즐기지 않았으며, 항상 선학仙學에{또는, 仙과 學問에}진전이 없음을 걱정하다가 서거하였다. <대방량>을 「태보」로, <을경>을 「좌보」로, <무골>을 「우보」로, <오명>을 「청하후靑河侯」로 삼으시고, 노비와 장원을 하사하셨다.
十月,上幸<南口>閱武而醉通<大房彦>之妻<張>氏,乃<張>皇后之妹也,旣醒而自愧,問於<彦>曰“朕何如人邪.”<彦>曰“陛下,多情多淚之好色君子,無可無不可之大英雄大聖人也.”上大笑曰“果如汝言,則可以自慰.其過,千世之後,豈無公論哉.朕所以惧也.”<彦>曰“臣之妾,陛下之妾也.誰敢論乎.”上笑曰“汝真吾婭,然似非汝父之子也.”<彦>類其母而能媎嫵,無渠父强硬之風故,云. 授三輔以下公卿大夫紅錦魚袋‧紫綬‧黃盖,列王加檀車香輿,改後宮秩次翟服佩勝. 置公服所‧金銀所‧螺匠所‧紡績所於<召>皇后宮之右,以皇后宮「使者」掌其職事.
10월, 상께서 <남구>로 거둥하시어 무예를 사열하시고는, 취醉하시어서 <대방언>의 처 <장張>씨와 상통하셨다. <장張>황후의 여동생이었더니, 술에서 깨어나시자 스스로 부끄러워하시며 <대방언>에게 “짐이 어떤 사람처럼 보이는고?”라 물으셨더니, <대방언>이 “폐하께서는 다정하시고 눈물도 많으신 호색군자好色君子이시며, 그리 하시라고 할 수도 없고 그리 하지 마시라고 할 수도 없으신 큰 영웅이시자 큰 성인聖人이십니다.”라고 아뢰었고, 이에 상께서는 크게 웃으시며 이르시길 “과연 그대의 말 같다면야 자위하여도 되겠으나, 천년이 지난 후에라도 그 잘못을 어찌 재론再論하지 않겠소! 짐이 한 짓이 부끄럽소이다.” 라 하셨더니, <대방언>이 아뢰길 “신의 첩은 폐하의 첩이었었습니다. 누가 감히 공론公論하겠습니까?”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그대는 진정眞正한 나의 동서同壻로고. 그러고 보니 그대는 아비의 아들이 아닌 것 같소.”라 하셨다. <대방언>은 그의 어미를 닮아서 능히 아부할 줄로 알았으며, 그 아비의 강경한 기풍은 없었음이었더니, 그래서 그리 말하셨던 것이었다. 3보三輔 이하 공경대부公卿大夫들에게 홍색비단 어패주머니와 자색 인끈 및 누런 천막집을 나눠주시고, 열왕列王 들에게는 단거향여檀車香輿를 얹어주셨으며, 후궁後宮들의 질품秩品과 차서次序를 바꾸고 적복 및 패물과 머리장식도 그리 하셨다. 공복소公服所{공복제작소}・금은소金銀所{금은세공소}・라장소螺匠所{자개세공소} 및 방적소紡績所{실 잣는 곳}를 <소>황후의 궁 우측{서쪽}에 두어서, <소>황후궁의 「사자」들이 그 직책들과 일들을 관장하게 하셨다.
上如「主農大加」<桓福>之苐,夀<柘>公而會<羊蘋>,仍謂<桓福>曰“沙漠地方,牧畜而已.我國,地廣而土沃,力農可也.農藝之士,擢其優者,特授五品之職而列于「大夫」.桑麻之士,尤為加賞可也.”<桓福>,以<柘>公之子,肖其母<孟>后.以美皃,上愛之如<陜父>,年未三十而致卿位.<孟>后崩,益加爱護,委以農政,命鑄錢而平穀価.其妻<羊蘋>,<羊吉>之女,而<蘋>主之出也.自未嫁時受上之寵幸,及長賜<桓福>為妻.其妹<桓英>,<于仁>妻,亦被上寵.<于仁>妹<于>氏,<桓福>之初妻,亦被上寵為<葱>太子乳母.以故,<福>恃上寵,其勢炎大熾,車馬莊園窮奢極侈,出於宗戚大家.上不禁之,初年之政漸潰,識者患之.
상께서 「주농대가」<환복桓福>의 집으로 가셔서 <자柘>공의 장수長壽를 축하하셨으며, <양빈羊蘋>을 만나보시고서 <환복>에게 말하여 이르시길 “사막砂漠은 땅이 탐탁지 않아서 목축牧畜이나 할 뿐이지만, 내 나라는 땅이 넓고 흙이 비옥하여서 부지런히 농경農耕함이 좋으니{☞高勾麗가 深山幽谷에서 都邑하였다는 기록은 造作된 虛構!!}, 농경에 재주가 있는 선비들 중에서 우수한 이들을 발탁하여 특별히 5품의 직무를 주어 「대부大夫」 반열班列에 세우고, 뽕과 삼{大麻}에 재주가 있는 선비들에겐 더 얹어서 상賞을 줌이 좋을 것이야.”라고 하셨다. <환복>은 <자>공의 아들로 그 어미 <맹>후를 빼어 닮아서 미모였기에, 상께서 <협보>처럼 아껴주셨더니, 나이 서른 이전에 경卿의 지위에 이르렀다. <맹>후가 죽자, 더욱 아끼고 감싸주며 농정農政을 그에게 맡기신 것이었으며, 명하시어 엽전葉錢을 주조하고 곡물의 가격도 매기게 하셨다. 그의 처 <양빈>은 <양길>의 딸로 <빈화蘋花{蔘花姊, 芻牟異腹姊}>공주소생인데, 출가 이전 시절부터 상의 총애와 승은을 입었으며, 장성하여선 하사되어 <환복>의 처가 되었다. 그의 여동생 <환영桓英>은 <우인于仁>의 처로 역시 상의 승은을 입었으며, <우인>의 여동생 <우于>씨는 <환복>의 첫 처로 역시 상의 승은을 입었으며 <총葱>태자의 유모가 되었었다. 이런 까닭에 <환복>은 상의 총애를 믿고 그 권세의 불꽃이 크게 일어서, 거마車馬와 장원莊園의 사치奢侈가 극에 달하여, 종척宗戚들의 큰 집들 중에서도 돌출하였는데도, 상께서 그를 말리지 않으셨더니, 초년의 정사政事가 점차 무너져 내렸고, 식자識者들이 그러함을 걱정하였다.
<東明>十八年辛丑,正月五日,「琳宮」<張>皇后崩,春秋三十六.上哀痛之如失左右手,葬儀山陵一如<萱>皇后禮,葬于<中川之原>,名曰<玉陵>,以玉為欄故也.后父<士傑>,<漢>人也,来自<邯鄲>居<黃竜囯>,三世以宝玉為商.母,<中川>人<棟白>之女也.穠麗雅娟,揣人意且有媎術‧腆道,深入上肺.以功臣之妻,竟登臺極,生皇子<屛>‧<帳>女<幌>‧<帨>.其父<士傑>生后而卒,<士傑>之弟<殷>娶后母<棟>氏而育后,<殷>以善歌為「宮中樂大夫」,以后故封「中川侯」‧食祿二千石.<棟>氏亦被上寵而生<菌>公主.后妹<大房彦>妻<張紈>,<鄭福>妻<張緋>,后弟<張索人>妻<漢>人<公孫>氏亦皆被上寵.時,人曰<張>‧<殷>為「善舞大夫」,盖笑陛澤也.
<동명>18년신축{BCE20}, 정월 5일, 「림궁琳宮{非龍骨出身의 貴한 女人들의 居處 또는 그 宮人}」<장張>황후가 춘추 서른여섯에 죽자{BCE55년생}, 상께서는 양 손을 잃으신 듯이 애통해 하셨으며, 장의葬儀와 산릉山陵의 일을 <훤화>황후의 예법과 하나같게 하여서 <중천원中川原>에 장사하고 <옥릉玉陵>이라 하셨다. 옥玉으로 난간欄干을 둘렀기 때문이었다. 후의 아비 <사걸士傑>은 <한漢>인으로 <한단邯鄲>에서 찾아와서 <황룡국黃龍國>에서 살면서, 3대{황룡국의 3임금치세}를 진귀珍貴한 옥행상玉行商을 하였다. 그 어미는 <중천>땅 사람 <동백棟白>의 딸이다. 활짝 핀 꽃처럼 곱고 우아하고 늘씬하였으며 남들의 의중을 헤아릴 뿐만 아니라 교태부리는 재주와 다양한 방법이 있어서, 상의 마음 깊은 곳에 들더니, 공신功臣의 처로 필경엔 루대婁臺의 끝까지 올라서 황자 <병屛>과 <장帳>을 낳고 황녀 <황幌>과 <세帨>를 낳았다. 그의 아비 <사걸>은 후가 태어나자마자 죽으매, <사걸>의 동생 <사은士殷>이 후의 어미 <동棟>씨를 취하고 후를 양육하였다. <사은>은 노래를 잘하여 「궁중악대부宮中樂大夫」가 되었고, 후后로 인해 「중천후中川侯」와 식읍食邑 2천석을 봉 받았다. <동>씨 또한 상의 승은을 입어 <균菌>공주를 낳았고, 후의 여동생들인 <대방언>의 처 <장환張紈> 및 <정복>의 처 <장비張緋>와 후의 남동생 <장삭인張索人>의 처 <한漢>인 <공손公孫>씨 역시 상의 승은을 입었다. 이 시절, 남들이 <장張>과 <은殷>을 「선무대부善舞大夫{춤을 잘하는 대부, 여기서는 희롱하길 잘 하는 대부}」라 불렀던 것은, 대략 임금의 은덕을 비웃었음이었다.
二月,<禾英>后生<秥>公主.上,以其向衰之年,命加療養于溫泉.
三月,<大房>夫人生<孝房>太子.去年生上女而又生太子.上爱其善産,陞「夫人」為「琳宮」皇后,賜<大房良>夫妻衣酒美肉.<良>曰“臣有何功當此御饌,請斬臣女以謝天下万民.”上曰“卿女貞潔自守,朕以强力奪其志也.渠何罪乎,乃朕好色之過也,請受椘韃於吾舅.”<良>曰“古者,聖君亦有三后五妃九嬪之禮.今,陛下後宮不多,其於廣嗣之道,當择有德之貞女.年可二八者,封冊可也.何取功臣之未亡褪物乎.”上曰“一以報其餘功於其妻,而生吾子女則與<素>子女同胞之親,世為瓜葛藩屛,不亦好乎.”自是,<大房>皇后之寵漸高.然,<召>后不敢妬.
2월, <화영禾英>후가 <점秥>공주를 낳았더니, 상께서는 <화영>후가 노쇠해가는 나이라 하여, 온천에서 가료하며 요양하라 명하셨다.
3월, <대방大房>부인이 <효방孝房>태자를 낳았다. 지난해에 상의 딸을 낳았는데, 또 상의 아들을 낳은 것이었다. 상께서는 아이를 잘 낳음을 어여삐 여기시어 부인을 「림궁琳宮」황후로 승차시키시고 <대방량大房良> 내외에게는 옷과 술 및 맛있는 고기를 하사하셨다. 이에 <대방량>이 “신이 무슨 공이 있어서 이 어찬御饌을 받겠사옵니까? 청컨대 신의 딸을 참하시어 천하의 만민들에게 사죄하시옵소서.”라 아뢰었더니, 상께서는 “경의 딸은 정결하여 자신을 지켰으나, 짐이 완력腕力으로 그녀의 뜻을 빼앗은 것인데, 그녀가 무슨 죄가 있겠소? 짐이 호색한 탓이오. 청하건대, 내 장인께서 회초리를 때리시면 맞을 것입니다.”라 하셨다. <대방량>이 아뢰길 “옛날의 성군聖君들께서도 3후・5비・9빈의 예법을 따르셨습니다. 지금 폐하께서는 후궁들이 많지는 않으십니다. 광사지계廣嗣之計{子息을 많이 두어 後嗣를 튼튼히 하는 計策}를 위하심이라면, 응당 덕성德性이 있는 숫처녀들을 택하십시오. 16살이 좋을 것이며, 책봉冊封하심이 좋을 것이옵니다. 어찌 공신功臣의 미망인未亡人인 퇴물退物이십니까?”라 하였더니, 상께서는 “한 가지는 그{공신}의 남은 공을 그의 처에게 보답하기 위함이며, 나의 아들과 딸을 낳으면 곧 <한소>의 자녀들과 같은 배에서 태어난 지친이어 세세世世토록 참외와 칡넝쿨이 되어서{친척이 되어서} 울타리를 감싸줄 것이니, 그 또한 좋지 않겠소?”라 하셨다. 이 일이 있은 후로 <대방>황후를 총애하심이 차츰 더하여졌어도 <소召>후는 감히 투기하지 않았다.
五月,神馬<巨婁>無故瘦死,上不楽久之,有無何之症且有頻夢. 定「公卿」三妻五妾,「大夫」二妻三妾,士一妻二妾,吏一妻一妾,庻人一妻一夫,賤者一妻二夫之制.「大夫」之妻為「公卿」之妾者,士妻為「大夫」之妾者,吏妻為士妾者,不在定数之內,故不能受其年穀.「公卿」之正妻願得上子者,自願當夕.大夫之正妻願得其上典之子,亦如之.士‧吏‧庶人亦皆如其例.兄亡而妻嫂者,守其家産而傳于兄子.弟亡而妻娣者,守其家産而傳于弟子.叔亡而妻嬸者,守其家産而傳于叔子.侄亡而妻姪者,守其家産而傳于其侄子.如無子者,以其子為其前夫之子而傳之.若有窃其産而逐其子者抵罪.父死而妻妾少者,長子娶之.母死而其夫少者,其女嫁之.
5월, 신마神馬<거루巨婁>가 까닭 없이 여위어서 죽었더니, 상께서 오래도록 편안해하지 않으시더니만 까닭을 몰라서 고칠 수 없는 증세가 생기셨고 게다가 꿈을 꾸시는 일까지 빈번하여 지셨다. 제도制度로서 정하시길; 「공경公卿」은 3처 5첩, 「대부大夫」는 2처 3첩, 선비士{선사, 무사, 경적사, 문사, 의사, 약사 등}는 1처 2첩, 아전衙前{또는, 지방의 관리}은 1처 1첩, 서인庶人{서민, 일반 백성}은 1처 1부, 천민賤民은 1처 2부로 하였다. 「대부」의 처가 「공경」의 첩이 되고, 선비의 처가 「대부」의 첩이 되고, 아전의 처가 선비의 첩이 되어서, 정해진 수를 넘을 경우엔, 그로 인하여 그 넘는 수에 해당하는 년곡年穀{祿穀}은 받을 수 없다. 「공경」의 정처가 상의 아들을 가지기를 원하면 자원하여 밤일을 감당하고, 「대부」의 정처가 자기보다 상전上典의 아들을 갖고 싶어도 역시 그리하고, 선비・아전・서인에 있어서도 역시 모두 그러하다. 형兄이 죽어서 형수兄嫂를 처로 들인 이는 형의 가산家産을 지켜서 형의 아들에게 물려주며, 동생弟이 죽어서 제수弟嫂를 처로 들인 이는 동생의 가산을 지켜서 동생의 아들에게 물려주며, 숙부叔가 죽어서 숙모嬸를 처로 들인 이는 숙부의 가산을 지켜서 숙부의 아들에게 물려주며, 조카侄가 죽어서 조카며느리姪를 처로 들인 자는 조카의 가산을 지켜서 조카의 아들에게 물려준다. 아들이 없을 경우엔 자신의 아들을 먼저번 지아비의 자식으로 삼아서 물려준다. 죽은 이의 가산을 절취하거나 죽은 이의 아들을 내쫓는 자는 죄를 주어 다스린다. 아비父가 죽고 그 처첩들의 나이가 젊으면 장자長子가 처로 들이며, 어미母가 죽고 그 지아비夫가 젊으면 딸女이 출가한다.
六月,<禾>皇后崩,春秋三十三.上痛哀之,葬于<中川之原>,以「瓊后」<禾英>夫人為苐三天后. <胡>王<莫車>死,弟<且糜胥>立,遣使来献土物. 「太輔」‧「御史大夫」<大房良>請選「公卿」女年二八者,納後宮,而退四十以上有夫女在後宮者還其本夫.上難之,問於<木>公,<木>公曰“不可.昔,<周><穆王>年三十娶<西王母>年八十餘,盖老陰宜於少陽故,<穆王>居位六十年而無疾病.陛下始陽以来,多涉老厚腆陰故所以益旺也.如嗜少艾則損耗多矣.安能廣嗣乎.”上然之,欲罷其議.時,<烏伊>‧<摩離>等女,皆欲入後宮而爭之.上不得已選功臣十八人納後宮.皆二八貞女也,上勞於此群,精力大損,況染而不能自己,時人目<大房>曰伐聖之良臣.
七月,<類利>太子與<禮>后移于<奧春>家.時,<類利>太子與<貫貝>情好,有妬婢密告于<召>后,<召>后使人搜<類利>.<貫貝>聞之,密送于<奧春>家.
6월, <화禾>황후{宝得女}가 춘추 서른셋{BCE52年生}에 죽었더니, 상께서 애통해 하시며 <중천원中川原>에 장사하고 「경후瓊后」<화영禾英>부인{禾后生母}을 제3천후로 삼으셨다. <호胡{匈奴}>왕 <막거莫車{雕陶莫皋=復株絫선우}>가 죽고, 동생 <저미서且糜胥{搜諧선우}>가 보위에 오르더니 사신을 보내서 토산물을 바쳐왔다. 「태보」・「어사대부」<대방량大房良>이 청하길 “나이가 16살인 「공경公卿」들의 딸들을 선발하여 후궁後宮으로 들이시고, 나이 40을 넘은 후궁에 있는 유부녀有夫女들은 물러나게 하시어 본시의 지아비들에게 돌아가게 하소서.”라고 하였더니, 상께서는 난감難堪하시어 <목木>공에게 물으셨더니, <목>공이 아뢰길 “불가하옵니다. 예전에 <주周><목왕穆王>은 나이 서른에 나이 여든을 넘은 <서왕모西王母>와 혼인하였습니다. 대략 노음老陰{나이 든 여인}이 소양少陽{젊은 남자}에게 알맞은 까닭에, <목왕>은 보위에 60년을 있으면서 질병이 없었습니다. 폐하께서는 교접을 시작하신 이래로 다수의 나이가 들고 통통한 여인들을 거치셨던 까닭에 더욱더 왕성하셨었습니다. 나이어린 풋내기들을 즐기실 것 같으면 몸이 많이 상하실 것이오니, 어찌 능히 광사지계廣嗣之計를 이루시겠사옵니까?”하였고, 상께서도 그렇겠다고 여기시어 논의를 파하고자 하셨으나, 이때 <오이>와 <마리> 등의 딸들 모두가 후궁으로 들어가길 다투매, 상께서도 어쩔 수 없으시어 공신 열여덟을 선택하시어 후궁들을 바치게 하셨다. 모두 숫처녀들이었더니, 상께서는 이 무리들에게 힘을 들이시다가 정기와 근력이 크게 손상되셨으며, 하물며 병이 옮아서 스스로의 몸도 지탱하지 못하셨더니, 이 시절 사람들은 <대방량>을 지목하길 “성인을 무너뜨리기에 좋은 신하”라 하였더라{젊은 나이에 죽은 결정적인 사유인 듯!!}.
7월, <유리>태자가 <예>후와 더불어 <오춘>의 집으로 옮겼다. 이때, <유리>태자가 <관패>와 정분이 나서 좋아하였고, 투기하던 비첩이 <소召>후에게 고하였더니, <소>후가 부리는 사람을 보내서 <유리>를 찾아오라 하매, <관패>가 이를 알고 몰래 <오춘>의 집으로 보낸 것이었다.
八月,上射鹿於<矮山><方石之原>,<類利>與<都祖>来謁献其神釼斷片.其服色皆上旧時衣也,上左右抱之喜不自勝使<摩离>将兵万人而衛之,命居「西都」「鸞坮」迎<禮>后於<奧春>家亦同居之.上密行見之. 老人<鴌孫>等七十二人請<類利>太子為正胤,上賜酒嘉納,<召>后不悅曰“立儲之事,吾夫妻家事.老人何預.”上曰“彼為囯盡忠而已.”召后[曰]”早知如此.妾,與<斗切>,遠遁山谷而讓之.事出不意適足以見笑而已.”上曰“汝勿深慮,<類利>豈敢與汝相爭哉.吾當善処之.” <禾英>皇后崩,春秋五十五,葬于<禾>后陵側,以<漢素>妻<大房>氏為苐三天后,其父<良>極諫之曰“臣女無行.陛下,何為此事.請斬臣頭而詔後世.”上曰“卿乃忠直之臣也,何以斬之.卿女有德,吾皇后中苐一人也.卿何謙為.”乃封<良>為「囯舅太公」‧「西川侯」.<良>曰”臣女之為<素>妻,万人皆知也,奈何.”上曰“欲報<素>功而配我也.”<良>曰“封<素>為王,<素>亦分已足矣.穢女何功.”上不聽. 上以<萱>太子妃<阿爾>公主為<類利>太子妃,<溫>公主為其副妃,設宴三日.上與<禮>后‧<召>后‧<旃>后‧<大房>后受群臣慶賀于<鳳鳴殿>.
8월, 상께서 <왜산矮山{東都北隣 小山?; 茅山隣近!}><방석원方石原{돌이 지천으로 널린 구릉?}>에서 사슴사냥을 하셨더니, <유리>가 <도조都祖>와 함께 찾아와서 알현하고 그 신검神劍 부러진 조각을 바쳤다. 그의 복색服色 모두가 상의 옛 옷이었다. 상께서 이들을 좌우로 껴안으시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시더니, <마리>로 하여금 군병 만 명을 이끌고 그들을 호위하게 하셨으며, 명하시어 「서도」의 「란대鸞臺」에 머물게 하시고 <오춘>의 집에 있는 <예>후를 맞아들여서 역시 함께 머물라고 하셨다. 상께서도 몰래 찾아가시어 그들을 만나보셨다. 노인 <궉손鴌孫> 등 72인이 <유리>태자를 정윤正胤{東宮}으로 삼으시라고 청하자, 상께서 술을 하사하시고 기꺼이 받아들이셨더니, <소召>후가 기뻐하지 않으면서 말하길 “후사後嗣를 세우는 일은 우리 내외의 집안일인데, 노인이 무슨 참견이오!”라 하자, 상께서는 “저이는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하고 있을 뿐이오.”라 하셨고, 이에 <소>후가 “이럴 줄을 일찍 알았더라면, 첩은 <두절斗切>과 더불어 멀리 산곡山谷으로 가버려서 양보하였을 것입니다. 일이 불의에 닥쳤으니, 그저 웃으면서 보기 있기만 하겠습니다.”라 말하였더니, 상께서는 “그대는 심려하지 마시오. <유리>가 어찌 감히 그대와 서로 다툴 수 있겠소! 내가 의당 선처할 것이오.”라 하셨더라. <화영禾英>황후가 춘추 쉰다섯에 죽어, <화후릉禾后陵>곁에 장사하시고, <한소>의 처였던 <대방>씨를 제3황후로 삼으셨더니, 그녀의 아비 <대방량>이 극간極諫하여 아뢰길 “신의 딸은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는 어찌 이런 일을 하십니까? 청하옵건대, 신의 머리를 참하시어 후세에 알리십시오.”라 하였고, 상께서는 “경은 충직한 신하인데 어찌 참斬할 수 있을 것이며, 경의 딸은 덕망이 있기가 내 황후들 중에서 제일이오. 경은 어째서 겸양하기만 하시오.”라 이르시고 <대방량>을 「국구태공國舅太公」・「서천후西川侯」로 봉하셨더니, <대방량>은 “신의 딸이 <한소>의 처가 되었던 것을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을 터인데, 어찌 하실 것입니까?”라 하였고, 상께서는 “<한소>의 공功에 보답하고자 내 짝으로 삼은 것이오.”라 이르셨으며, <대방량>이 “<한소>를 왕으로 봉하신 것도 <한소>의 분수로는 족하옵니다. 더럽혀진 딸이 무슨 공이 있습니까?”라 하였으나, 상께선 들어주지 않으셨다. 상께서 <훤>태자비 <아이阿爾>공주를 <유리>태자비로 삼고 <온溫>공주를 부비副妃{둘째 비}로 삼아주셨다. 사흘간 연회를 베푸시며, 상께서는 <예>후・<소>후・<전>후・<대방>후와 더불어 군신들의 경사축하慶事祝賀를 <봉명전鳳鳴殿>에서 받으셨다.
十月,上與<禮>后‧<類利>謁「神隧」,會群臣議正胤.<召>后見勢不利大怒,與<仇都>‧<仇賁>等退去<牛壤>,曰“依「太伯仲雍古事」,欲讓囯於<類利>太子.”上素以無何之症,又値此難,自然添病.群臣憂之. 以<觧肫>公主為皇子<貝倫>太子妃. <屛>太子爱民間女欲為妻,不愛<萱>公主,上怒欲斬之.<大房良>諫曰“子之不行,父之責也.陛下宜自省而已,何乃作<劉徹>狂事乎.”上改容謝之,廢<屛>太子為庶人.以<萱>公主為<都祖>妻,賜一品公服. 上命群臣立旗於東西,從東者為<斗근>,從西者為<類利>,而試其多少.<斗근>進曰“序長立賢之敎,臣已聞之.今,何此擧而誤此小子耶.”乃自詣立西旗之下.群臣無敢立東者而盡敀于西旗.上,大贊<斗근>曰“賢哉<斗>也.今雖讓于兄,後必自立矣.”乃命<類利>曰“善護<斗근>,使之制南而守成,然後徐徐制坤,可也.”
10월, 상께서 <예>후 및 <유리>와 함께 「신수神隧{國東大穴,天祭터}」를 알현하고 군신들을 모이게 하시어 정윤正胤문제를 상의하셨더니, <소召>후는 세勢가 불리함을 알고는 크게 노하여 <구도仇都> 및 <구분仇賁> 등과 더불어 <우양牛壤>으로 물러나 머물면서 “「태백중옹고사太白仲雍古事{周文王의 伯父와 仲父인 太伯과 仲雍이 멀리 도망하여 보위에 뜻이 없음을 보였다는 옛 얘기}」를 좇아 나라를 <유리>에게 양보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평소 까닭을 몰라서 고칠 수 없는 병이 있으셨음에도 또 이런 난관難關에 부닥치시매 자연히 병세가 더 나빠지셨고, 군신들이 그 일을 걱정하였다. <해순觧肫>공주를 황자인 <패륜貝倫>태자의 비로 삼았다. <병屛>태자가 민간民間의 딸을 어여삐 여기어 처로 삼고자 하면서 <훤>공주를 아끼지 않았기에, 상께서 노하시어 그를 참하려 하셨더니, <대방량>이 간언하길 “아들의 행실이 바르지 않은 것은 아비의 책임이옵니다. 폐하께서는 마땅히 자성自省하셔야 하올 것인데, 어찌 <유철劉徹{西漢世宗武帝}>이의 미친 짓을 하시려 하십니까?”라 하였다. 이에 상께서는 얼굴빛을 고쳐서 용서容恕를 빌고 <병>태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만드셨으며, <훤>공주를 <도조都祖>의 처로 삼아주고 1품 공복을 하사하셨다. 상께서 군신들에게 명하시어 동쪽과 서쪽에 깃발을 세워놓고, 동쪽으로 가는 자는 <두근>을 위하는 것으로 서쪽으로 가는 자는 <유리>를 위하는 것으로 하여서 많고 적음을 가리게 하셨더니, <두근>이 앞으로 나와서 아뢰길 “평온한 시절에는 장자長子를 세우고 혼란한 시절에는 현명賢明한 이를 세운다는 가르치심을 신臣은 이미 들었습니다. 지금, 어찌 이런 일을 하셔서 이 소자를 그릇되게 하시려 하십니까?”라 아뢰고는 스스로 서쪽 깃발 밑으로 가서 섰더니, 군신들은 아무도 감히 동쪽에 서지를 못하고 모두들 서쪽 깃발로 모여들었다. 이에 상께서는 <두근>을 크게 칭찬하시며, “현명하구나, <두근>아! 지금 비록 형에게 양보하더라도, 이후 반드시 스스로 보위에 설 것이다.”라고 이르시고는, <유리>에게 명하시길 “<두근>이를 잘 감싸주어야 할 것이며, <두근>이로 하여금 남방南方{현금 河北省南部즉涉羅와 河南省・山東省方面}땅을 제압하고 지키게 한 연후에{남쪽으로 내려가서 땅을 차지하여 즉 나라를 세워서 지킬 수 있게 도와준 연후에?}, 서서히 곤방坤方{서남방,西漢}을 제압해야 할 것이다.”라 하셨다{☞현금 河南省과 山東省을 <斗근則溫祚>에게 준 然後에 合心하여 南西쪽의 漢을 制壓하라!}.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