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려지기(黔驢之技)
선가(禪家)의 애송하는 「심우송(尋牛訟)」이 하도 좋아서 호(號)를 짓되 우산(牛山)이라 하였다. 이 호는 꽤 오랫동안 행세를 하여서 지금도 거리에서 “우산!” 하고 부르는 사람이 있어 돌아다 보면 옛날 친구라 반가이 만나는 수가 많다.
아호(雅號)란 것은 이름 대신 부르는 것이어서 이것저것 여러 개를 가질 필요도 없거니와 더구나 현대에 사는 우리로서는 서화(書畵)나 하는 사람 외에는 구태여 가져야만 행세한다는 법도 없다.
호를 자주 간다든지 괜히 여러 가지를 쓴다든지 하는 사람은 중심이 약한 사람이란 평들도 있고 그보다도 우선 남 보기에 턱없이 요란스럽게 보일 것도 같아서, 추사(秋史) 같은 분이 여러 가지 운치스런 호를 쓴 것을 볼 때는 나도 좋은 호를 몇 개쯤 더 가져 보았으면 하다가도, 에라 그만두어라 백(百) 모로 뜯어보아도 소란 놈이 오직 좋으냐 싶어서 우산(牛山) 하나만으로 버티고 말려 하였다.
그랬던 것이 한때 이 국토 안에 이상도 하고 야릇도 한 전고(前古)에 못 듣던 괴소동이 일어났다. 욕설 많기로 유명한 이 조선 땅에서도 ‘변성명(變姓名)을 할 녀석’하면 목숨을 내걸고 싸우려 드는, 욕설 중에도 해괴망측한 욕설이, 가자(假字) 아닌 진자(眞字)로 창씨(創氏)란 간판을 걸고 우리 겨레를 습격해왔다.
내가 창씨한 사람의 열에 끼이지 아니했다는 것쯤 그다지 자랑스러울 것도 못 되지만, 한번은 어떤 입버릇 험한 친구가 “우시야마 요시오(牛山善夫)” 하고 일본말로 웃으며 부른다. “에끼! 망할 친구”하고 곧 배앝아버렸으나 두고두고 불유쾌해 견딜 수 없다.
선부(善夫)라는 것은 내 자(字)다. 고향이 선산(善山)임으로 해서 선부(善夫)라 한 것이요, 또 한시에 ‘농어를 낚을 뿐 이름을 낚지 않네(只釣鱸漁不釣名 지조로어불조명)’ 라는 대문을 ‘농어를 낚지 않고 이름만을 낚는구나(不釣鱸漁只釣名 불조로어지조명)’ 하고 보면 한층 격이 높은 셈으로, 불선부(不善夫)라, 혹은 악부(惡夫)라 하기보다 차라리 선부(善夫)라 하여 그 뜻을 반전시키는 것이 그럴 듯하여 필명으로 한두 번 쓴 것인데, 이 친구가 호와 자를 맞붙이고 보니 그대로 일본명이 되는지라 ‘옳다 됐구나’하고 놀려 댄 것이다.
그 길로 나는 호를 갈기로 작정했고 그 뒤로 지은 호는 마침내 한두 개가 아니었다. 매화를 사랑하여 매정(梅丁)이라고도 하고, 감나무 집에 살아서 노시산인(老柿山人)이라고도 했다. 또 평생 남의 흉내나 겨우 내다가 죽어버릴 인간이라 근원(近猿)이라고도 했더니 같은 동물에 같은 글자이면서도 밉고 고운 놈이 있는지 아호에다 원(猿, 원숭이) 자만은 붙이기가 딱 싫어서 원(園, 동산) 자로 고치고 말았다.
실은 청말(淸末)에 나와 꼭 같은 김근원(金近園)이란 사람의 호를 보고 무슨 인연으론지 근(近) 자 한 자가 두고두고 못 잊혀서 그 아랫자를 다른 자로 고르다 못해 종내 원(猿) 자가 되었다가 급기야엔 원(園)으로 돌아가고 만 것이다.
요즈음 희떠운 친구들이 “자네의 근원(近園)이란 호는단원(檀園)이나 오원(吾園)에 가깝다는 뜻인가?” 하고 조롱하는 친구가 있으나 내 취미가 진실로 그렇게까지 저급이 아닌 것만은 명백히 해 둔다.
사람의 성질이란 한 번 빗나가기만 하면 소지(素志)를 잊어버리기 쉬운 이상한 일면이 있는 것이라. 그래서 이 타락하기 쉬운 일면의 성질 때문에 흔히 소지를 굽힌 인사들이 처음에는 자기 일신의 호신책에서 출발하여 나중에는 조상을 팔아먹고 민족과 국가를 팔아먹게까지 되는지도 모르나, 호를 한 개만 가지리라하고 고집하던 내가 나도 모르는 동안 요놈은 요러해서 좋고 저놈은 저러해 좋아서 꽤 여러 개 호를 가지게 되었다. 위에 말한 몇 가지 외에도 벽루(碧樓)라 석우동인(石隅洞人)이라 혹은 득월루주인(得月樓主人)이라 혹은 심화애설지려(尋花愛雪之慮)라 또 혹은 식연자자실주인(食硯煮字室主人)이라 하는 등 아마 이 밖에도 좋아라고 한두 번 쓰고는 잊어버린 호가 몇 개나 되는지도 모른다.
같은 유명한 화가지만 정판교(鄭板橋)나 팔대산인(八大山人) 같은 이는 호가 많지 않은 관계로 당대에 성명(盛名)이 천하에 떨쳤고, 석도제(釋道濟) 같은 이는 하도 행호(行號)가 많아서 당시에 그를 아는 인사가 변변치 못하였다 하니, 혹은 공리적으로 생각하여 헛된 이름이라도 필요한 사람이라면 모르거니와, 장자(莊子)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명자(名者)는 실지빈(實之賓)’이라, 빈(賓)을 위하여 실(實)을 희생시킬 연유가 어디 있나뇨.
호를 짓는 장난도 일종 풍류라 내 하는 짓이 종시 풍류로 끝막고 말 바에야 구구하게 남이 내 이름 알고 모름에 개의할 바 있으랴.
한데 근간에 썩 좋은 호 하나를 또 얻었다. 가로대, ‘검려(黔驢)’라.
어느 선배 한 분이 내 인상이 험하다 하여 꼭 검려라고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검주(黔州)라는 땅에는 나귀가 없었다.
장난꾼 한 녀석이 나귀 한 마리를 끌어다 산밑에 매어 두었다.
호랑이란 놈이 하루는 내려와 보니까 생전 듣도 보도 못하던 이상한 동물이 떡 버티고 섰는데 ‘방연대물야(龐然大物也)’라, 거무뭉틀한 놈이 커다란 눈깔을 껌벅거리며 섰는 꼴이 어마어마하게 무섭게 보였던지 이건 아마 산신령님인가보다 하였지.
나귀란 놈이 소리를 냅다 지르는데 호랑이란 놈이 깜짝 놀라 걸음아 날 살려라 하고 도망을 갔것다.
그러나 그 후 매일 듣고 나니 그까진 소리쯤 무서울 것 없다. 한번은 바짝 덤벼들어 나귀를 못살게 굴었더니 나귀란 놈이 귀찮아서 뒷발로 냅다 걷어찼다. 호랑이가 보니까 기껏했자 나귀의 재주란 그뿐인 모양이라 그만 와락 달려들어 물어 뜯고 발길로 차고 하여 죽여버렸다.
유종원(柳宗元)의 글 가운데 나오는 이야기다.
아마 나란 사람이 처음 대할 때 인상이 험하고 사귀기 어렵고 심사도 고약한 듯하다가 실상 알고 보면 하잘것없는 못난이요 바본데 공연히 속았구나. 나와 만나고 사귀고 하는 사람은 누구나 이렇게 생각되나보다.
그래서 나를 검려라고 이 분은 말한 것이었으나 나는 이 검주의 나귀에서 더 절실하게 나를 풍자하는 일면을 느낀다.
그 놈은 어리석지 아니하냐. 자기의 우졸(愚拙)함을 감추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냐. 좀 영리하여 장졸(藏拙)하는 지혜쯤 가졌어야
험한 세파를 헤치고 살아갈 수 있지 않으냐. 어쩌면 그렇게도 야단스런 차림새를 하고 어쩌면 그렇게도 시원찮은 발길질을 눈치도 없이 쉽사리 하여 금시에 남의 놀림감이 된단 말이냐. 고양이처럼 영리하든지 양처럼 선량하든지 사슴처럼 날래든지 그렇지 않으면 공작새처럼 화려나 하든지 그도저도 못 되는 허울 좋은 나귀!
게다가 또 못생긴 값에 재주까지 부리느라고 논다는 꼴이 남의 수치(羞恥)만 사는 짐승!
오호(嗚呼)라! 나도 이 나귀처럼 못생긴 인간인가! 나도 이 나귀처럼 못생긴 재주밖에 못 부리는가.
김용준(金瑢俊, 1904~1967)
호는 근원(近園), 선부(善夫), 우산(牛山), 노시산방주인(老枾山房主人).
1904년 경북 선산(善山)에서 태어났다. 1920년 경성중앙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23년 고려미술원(高麗美術院)에서 이마동(李馬銅), 구본웅(具本雄), 길진섭(吉鎭燮),
김주경(金周經) 등과 미술 수업을 받았다.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동십자각(東十字閣)〉이 입선되었다.
1926년 동경미술학교 서양화과에 입학앴다. 유학생들의 모임인 백치사(百痴社)를
조직하기도 했으며, 소설가 이태준(李泰俊)을 만나게 된다.
1931년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다. 1946년 서울대학교 예술대학 동양화과 교수를
역임하고, 1948년 동국대학교 교수로 임용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같은 해 월북해 평양미술대학 교수가 된 이후
조선미술가동맹 조선화분과위원장, 과학원 고고학연구소 연구원 등으로
활동하다가 1967년 작고했다.
그림으로 〈수향 산방 전경〉(1947) 〈매화〉(1948) 〈춤〉(1958)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 『근원수필』(1948) 『조선미술대요』(1949) 『고구려 고분벽화 연구』(1958)
『조선화 기법』(1959) 『조선미술사』(1967) 『단원 김홍도』(1967) 등이 있다.
[출처] 近園隨筆, 청색종이,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