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생사망
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신라인 인신매매를 근절하기 위해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어 해적을 소탕했다.
838년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밀려난 우징과 함께 839년 민애왕을 죽이고 우징을 왕으로 추대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 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 삼각 무역을 했다.
시대를 앞서 간 선구자
신라의 무장 장보고는 일명 ‘해상왕’이라고 불린다. 평민 출신이었으나 인신매매를 일삼던 해적을 소탕하며 일약 별처럼 떠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바다의 왕이라는 별명답게 해상 교통로를 장악하며 무역 사절로도 활약했다.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로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에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평민 출신이라고도 하며 노비 출신이라는 설도 있다. 골품이 뚜렷한 신라에서 출세에 한계를 느껴 어린 시절 당나라의 쉬저우(徐州)로 건너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가 본명을 버리고 ‘장보고’라는 이름을 택한 이유도 당나라에서 가장 흔한 성씨이던 장씨(張氏)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
적산 법화원의 장보고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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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당나라 동해안에는 신라인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다. 양쯔(揚子) 강 하류부터 산둥 성에 걸쳐 살던 신라인은 아라비아와 페르시아 상인들과 교역이 잦았다. 신라와 일본을 오가며 국제 무역을 하던 이들도 있었다. 장보고는 이를 통해 해상 무역에 눈을 뜨게 된 것 같다. 하지만 해적은 그곳에서도 골칫거리였다. 중앙의 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바닷가에서 해적들은 신라 해안까지 침투해 백성들을 잡아다 당나라에 노비로 팔기 일쑤였다. 노비로 잡혀 온 신라인의 삶은 처참했다. 장보고는 이에 분노하여 무령군(武寧軍)의 소장직을 사직하고 신라로 귀국한다.
신라로 돌아온 장보고는 828년(흥덕왕 3) 왕에게 해적을 소탕할 것을 주청했다. 이를 위해서는 남해 해상 교통의 요지인 완도에 해군기지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당나라로 가는 황해 무역로를 확보하고 해적을 근절하자는 것이었다. 왕의 승인을 받은 장보고는 민군(民軍) 1만 명을 확보하고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했다. 흥덕왕이 장보고에게 내린 ‘청해진 대사(淸海鎭大使)’라는 벼슬은 당시 관직 체계에는 없던 별도의 직함이다. 장보고는 완도에 성책을 쌓아 전략 거점으로 삼았고, 수병을 훈련시켜 해적을 소탕하는 데 앞장섰다.
청해진
지금의 장도에 남아 있는 청해진의 본영. 청해진을 중심으로 외국과의 삼각 무역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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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을 소탕한 장보고는 해로를 통해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중계 무역을 시작했다. 신라인은 구리거울, 모직물, 향료를 내다 팔고 비단과 면을 들여갔다. 동남아시아와 서남아시아의 향신료도 중계 무역을 통해 신라의 귀족들 사이로 퍼져 나갔다. 장보고는 이 밖에도 가죽, 문방구를 함께 취급했다.
장보고의 무역은 외교를 겸하는 특징이 있었다. 그는 일본과 당에 각각 무역 사절인 회역사와 견당매물사를 파견했을 정도로 일반 상인과는 달리 독자적인 세력임을 과시했다. 해상을 장악한 장보고의 위세는 일본의 한 지방관이 “승려 엔닌(圓仁)과 귀국하려고 하니 길을 봐 달라.”라는 서신을 보내기도 했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장보고가 당시 해상로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다.
군대와 선박을 보유한 장보고는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 그의 관심은 자연스럽게 정치로 옮겨 갔다. 836년(흥덕왕 11)은 장보고의 인생에 전환점이 된 시기이다. 왕위 계승 전쟁에서 패배한 김우징(金祐徵, 훗날 신무왕)이 청해진으로 피신한 것이다. 당시 김우징은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려 했다가 패하고 쫓기는 신세였다. 왕권은 흥덕왕을 폐위시킨 희강왕이 잡았다. 하지만 2년 뒤 다시 왕위 쟁탈전이 일어나 이번에는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했다. 그러나 이도 얼마 가지 못했다. 839년(민애왕 2) 4월 장보고의 지원을 받은 김우징이 대군을 이끌고 경주로 쳐들어가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된 것이다. 장보고는 신무왕이 즉위하자마자 공로를 인정받아 감의군사에 올랐고, 뒤를 이은 문성왕 대에는 진해장군으로 임명되었다.
장보고의 견당 무역선 복원 모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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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는 중앙 귀족들도 두려워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에 따라 귀족들과의 대립도 격화되었다. 무엇보다 장보고가 문성왕의 두 번째 왕비로 자신의 딸을 천거하면서 갈등이 부각되었다. 군신들은 드러내 놓고 반대했다. 결국 문성왕은 한때 장보고의 부하였던 염장(閻長)을 시켜 장보고를 암살하도록 했다. 장보고 사후 851년(문성왕 13) 청해진의 주민들이 벽골군(碧骨郡, 지금의 김제)으로 강제 이주되면서 청해진은 완전히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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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윤재운
고려대 사학과와 동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한국사연구실, BK21한국학 교육연구단 국제화팀에서 연구원을 지냈으며, 민족문화연구원 한국사연구소에서 고대사에 ..펼쳐보기
장희흥
동국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졸업(문학박사), 현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교수. 조선 시대사, 정치사에 관심이 많으며 연구 논문으로 <조선시대 정치권력과 환관>, <소통과 교류의 땅 ..펼쳐보기
출처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 | 윤재운 | 청아출판사
한국 고대사부터 현대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사를 움직인 100인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고 있다. 정치와 경제, 문화와 예술 영역의 인물이 두루 다루어지도록 구성했다.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