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생 때까지 딱히 나갈 사람 없어 나갔던 과학 상상화 대회를 준비하려고 매년 참고작품을 수십개는 봤던 것 같다.
참고작품이니 어련히 잘들 그렸을까. 그러나 그 미술적 기교에는 감탄했어도 내용 자체는 정말이지 와닿지가 않았다.
과학 상상화를 그렸다면서 숨이 턱턱 막히도록 건물이 가득 들어차고 하늘에까지 미래의 자동차가 날아다녔다.
시골에서만 살아서 그런지 나는 본능적으로 그림들에서 나무를 찾았다. 있긴했다. 정말 있기만 했다.
못된 생각에 그림만 잘 배우고 과학상상화 공식대로 척척 그려내서 상이나 받아내는 걸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과학상상화? 과학이 지금보다도 더 발달한 미래에는 저렇게 풍경이 삭막해지는건가?
그런 미래라면 반겨줄 마음이 없었다. 반항이라도 하듯 나는 푸르디 푸른 미래의 도시를 그렸다.
그리고 당당하게 작품설명에 썼다.
"정말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미래라면 지금처럼 커다란 쇳덩이들을 요구하지 않을것이다."라고.
도시의승리의 저자인 에드워드 글레이져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지 않으면서 경험적인 것부터 구체적인 수치까지 제시하며 설득하고 있다.
이런 서술방식 자체는 읽는 입장에서 편안할 뿐더러 나같이 지식이 얕은 사람이 현학적인 논리와 말투에 질려 반감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내용에 반감을 가져도 무리없이 끝까지 잘 읽었다.
경제적인 측면은 물론 도시 쪽이 수치만 보아도 우월하다. 요즘 이슈가 되는 월가만 떼어놓고 생각해보아도 도농 차이는 분명하다. 미국 거대 농업지역이 벌어들이는 수입도 만만치 않은 것을 고려하고도 말이다.
교복 입고 옆에 끼고 다니던 사회 교과서에도 도시 집중 이후의 인구 이동의 흐름은 U, 즉 다시 농촌으로 돌아간다. 산업화 시대에 농업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은 적고 사람들은 희망을 품고 도시로 몰려들었다. 그것이 흐름이었고, 일어났고, 그에 따른 문제도 발생했지만 문제라는 것은 어느 시대의 어느 흐름에서도 발생하는 것이다. 그를 탓해 도시를 비하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도시의 효용성도 분명한 것이었고 도시에 집중 투자해 총량도 늘었다. 에드워드도 언급했듯 흐름은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도시 집중화도 흐름이었고 아직 현재진행형이며 에드워드는 미래에도 이러한 것을 권장할 뿐이다. 그리고 그는 굉장히 설득력이 있다.
다만 내가 하고픈 말은 모든 것이 집적된 도시가 정말 장기적인 안목으로도 이상향이 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의 의식수준이 높아져서 '삼인성호'가 무색해지면 농기구를 놓고 도시로 몰리는 현상이 다시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사람들은 더이상 어떤 것이 수입이 높다더라라는 개개인의 의견들만으로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자신의 능력과 접근하기 쉬운 정보들을 토대로 미래를 결정한다. 그것이 도시를 벗어난다면 기꺼이 그는 도시를 벗어날 것이다. 기회가 도시 안에서만 풍족하다는 것은 불과 몇십년에 불과한 도시의 승리에 대한 과신이다. 이미 산업화를 넘어서 정보화시대가 심화되고 있는 현재에서도 더 많은 삶의 방식과 수입원들을 창출할 수 있는 사람들의 잠재력을 발견할 수 있다.
무엇보다 도시를 벗어나서도 수입을 올릴 수 있다면 도시 집적으로 인한 문제점들과 공존하는 것보다 도시를 벗어나서 불편한 것을 감내하는 쪽이 효용이 클 때 사람들은 도시를 떠날 것이다. 단적인 예로, 'free'로 시작하는 어느 협약은 어쩌면 미국의 농사 종사자들을 아주 행복하게 해줄지 모르겠다. 전문가들에겐 극적인 상황까지도 아닌 '농업 생산물이 무기화가 될 때'면 행복한 정도를 넘어서 도시로 사람들이 몰렸듯 사람들이 다시 시골로 돌아올 큰 유인이 될 것이다.
수중도시를 그려도 땅위를 그려도 심지어 지구 밖에도 내 과학상상화에는 초록색이 빠질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 그림은 다른 복잡한 참고작품들에 비해 황량하기까지 했다. 빽빽한 마천루보다는 널찍하고 밝은 공간이 많았고, 내 그림실력만 허락했다면 사람들이 한가로운 오후를 즐기는 장면을 그리고도 싶었다.
발전하고 성장한 도시는 모든 것이 집중된 공간이라면 나는 아무래도 지구에서 비율이 작다는 땅떵어리를 그렇게도 사용못하는 사람들이 똑똑해보이질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