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로비 사건
옷로비 사건은 1999년, 당시 외화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던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가 남편의 구명을 위해 고위층 인사의 부인들에게 고가의 옷로비를 한 사건을 말한다. 이 사건의 조사를 위해 대한민국사상 처음으로 특별검사제도가 도입됐다. 최병모 변호사가 옷로비사건을 조사하기 위한 특별검사로 임명되었다.
옷로비 사건이 최초로 공개된 것은 1999년 5월 24일 외화 밀반출 혐의를 받고 있는 신동아그룹 최순영회장의 아내 이형자가 김태정 검찰총장의 아내 연정희에게 고급 옷을 선물했다는 기사가 나오면서 촉발되었다. 결국 그 사실을 언론에 밝힌 인물이 이형자라는 사실이 알려지고, 이형자는 이 경위서에서 당시 검찰총장 부인 등이 고가의 옷을 사면서 자신에게 옷 값을 대신 지불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이를 거부했다고 폭로했다. 언론 보도가 있은 사흘 후인 1999년 5월 28일 연정희가 이형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하였다. 결국 1999년 6월 2일 검찰은 수사를 발표하게 되었다.
배정숙은 옷값 대납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자기만 죄인으로 몰아붙였다고 억울함을 주장했다. 옷값을 놓고 이형자와 다투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삼자 대면을 요구했다. 라스포사 종업원이 호피코트를 연정희의 트렁크에 넣는 장면을 봤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배정숙은 검찰이 자신을 속죄양으로 만들었다며 강한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의 호피무늬 코트가 로비와 연관된 것에 대해서는 일부 시인하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여야 의원들이 새롭게 얻어낸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배씨의 주장에 대해 검찰은 위증이라고 하였다. 정일순의 호프무늬 코트가 로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옷이 배달된 시점은 작년 12월 26일이었는데 그보다 닷새 전에 이미 이형자가 옷값을 못 내겠다고 라스포사 사장에게 통보했다는 게 그 근거였다. 그러나 배정숙은 검찰의 발표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연정희와 라스포 사에서 옷을 입어본 시점은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검찰은 지난 1월 5일이라고 밝혔지만 배정숙은 1월 7일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정숙의 증언을 종합하면, 연정희가 코트를 보관했던 기간은 당초 알려진 열흘이 아니라 19일까지 늘어난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배정숙이 옷 로비 사건의 주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청문회에서도 계속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검찰은 또 작년 12월 18일 배정숙이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와 옷값 대납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배정숙이 이같은 기초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배 씨의 증언 내용에 신빙성이 더욱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둘째날[편집]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아내 연정희는 옷 로비를 유도한 적도 없고, 로비를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호피무늬 밍크코트를 입어 본 날짜는 지난해 12월 19일이었다고, 당초의 주장을 번복했지만 코트가 트렁크에 실려온 날은 1주일 뒤인 26일이었다면서 검찰에서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코트가 실려온 것을 뒤늦게 알고 올해 1월 5일 돌려줬다는 해명도 되풀이했다. 조사 때마다 진술이 달라진 점에 대해서 날짜를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정희는 결백을 주장할 때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연정희는 또 검소하고 조심하는 생활을 해왔다고 항변하다가 물의를 일으킨 것 자체가 문제 아니냐는 추궁에 깊이 반성한다면서 흐느꼈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배정숙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여야 의원들은 누구 말이 맞는지, 이걸 확인할 만한 어떠한 증거나 정황도 내놓지 못했다. 배정숙은 라스포 사에서 연정희과 옷을 입어본 시점이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었다고 어제 증언했다. 그러나 연정희는 19일에는 옷을 한 벌도 사지 않았고, 26일에 옷이 배달됐다고 거듭 밝혔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배정숙은 지난 1월 7일이라고 했지만 연정희는 1월 5일이 맞다며 증거도 있다고 반박했다. 최순영 신동아 회장 수사에 대한 언급도 배 씨와 정반대였다. 배정숙은 구속 가능성을 직접 이야기 했다고 했지만, 연정희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고 했다.
기도원에 갔을 때도 호피무늬 코트를 입지 않고 걸쳤을 뿐이라며 배씨의 증언과 차이를 보였다. 이에 대해 연정희는, 배정숙에 대해 괘씸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진실을 알고 싶어서 마지못해 병원에 갔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의 증언에 공통점은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다고 진실을 주장한 점이 유일했다.
셋째날[편집]옷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국회청문회는 이 날 핵심증인 4명을 나란히 앉혀놓고 대질신문까지 했지만 쳇바퀴 돌듯 서로 엇갈리는 증언만 반복됐다. 옷값을 대신 내라는 요구가 있었느냐는 부분에서는 이형자는 있었다고 증언했지만 배정숙은 없다고 하였다. 최순영 회장의 구속 사실을 연정희가 흘렸다는 대목에서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공방이 오고 갔다. 특히, 배정숙이 라스포사에 장관 부인들을 데려올 테니 좋은 옷을 준비하라고 했다는 부분도 역시 정일순은 있었다, 배정숙은 없었다고 못박았다. 정일순이 자신에게 전화해 옷값을 요구했다고 이형자가 주장하자 정일순은 거짓말이라고 외쳤다. 정일순은 그러면서, 이형자 자매가 최 회장 수사에 대한 보복으로 검찰총장 아내가 모함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문제의 호피코트가 배달된 시점에 대해서는 연정희와 정일순의 증언이 일치했다. 사흘간에 걸친 청문회 끝에 한꺼번에 불려 나온 네 명의 여자는 얼굴을 마주한 채 서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할 뿐이었다.
결국 알아낸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 뿐이라는 우스갯 소리도 낳았다.
▶사건 관련자 명단
이형자 -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구속 직전의 남편을 위해 연정희에게 거액의 옷 상납을 시도한 혐의.
연정희 - 김태정 법무부장관의 아내. 1380만 원짜리 호피무늬 반코트를 공짜로 얻으려는 혐의.
배정숙 -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아내. 이형자에게 옷 값 대납을 요구하는 등 로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혐의.
김태정 - 전 검찰총장. 옷로비 의혹 당시 법무부장관. 배우자가 옷로비 사건에 연루되어 취임 15일 만에 사임.
최순영 - 신동아그룹의 회장. 옷로비 사건의 계기가 된 외화밀반출 사건의 당사자.
정일순 - 라스포사 사장. 상류층의 허영심을 적절히 이용하는 놀라운 상술 구사.
김봉남 (앙드레 김) - 연정희와 배정숙에게 옷을 판 인물.
김대중대통령의 생애(1924.1.6-2009.8.18)
5·16군사정변(1961) 이후 약 30년간 역대 군사정권하에서 납치·테러·사형선고·투옥(6년)·망명(10년)·가택연금 등의 온갖 고초를 겪었으나 군사정권에 끝까지 맞서 민주화운동을 강력히 전개함으로써 대중적인 카리스마를 얻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의 인권투사로 널리 알려졌다. '인동초'(忍冬草)·'한국의 넬슨 만델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4차례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자신의 지론인 남북화해 정책을 꾸준히 펼쳐 대외적 명성을 높였다. 한국과 동아시아의 민주화와 인권, 남북화해 정책의 공로로 노벨 평화상(2000)을 수상했다.
성장기와 정치 입문
1924년 전라남도 목포에서 뱃길로 150리 떨어진 신안군 하의도에서 태어난 김대중은 1943년 목포공립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에 취직했다. 8·15해방으로 일본인들이 떠나자 이 회사의 관리인으로 선임되었으며 〈목포일보〉 사장(1948~50)을 지냈다. 6·25전쟁의 와중에서는 해상방위대 전라남도지구 부대장(1950), 한국해운조합연합회 이사(1951), 흥국해운·대양조선공업 사장(1951)을 역임했다. 1954년 자유당 독재정권에 맞서기 위해 제4대 민의원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한 데 이어 2차례 더 낙선했으며, 1961년 5월 14일 4번째로 도전한 제5대 민의원 보궐선거(강원도 인제)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이틀 후 5·16군사정변이 일어나 국회가 강제해산되는 바람에 의원등록조차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그 후 6·7·8대 국회의원에 연속 당선되었으며 민주당 대변인(1960), 통합야당 민중당 대변인(1965), 민중당 정책위원회 의장(1966), 신민당 대변인(1967)을 지내며 정치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고난의 행로
마침내 3선개헌 다음해인 1970년 9월 김대중은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공식지명되었다. '40대 기수론'을 주창한 김영삼·김대중·이철승 의원이 함께 출마해 3파전으로 진행된 이 전당대회에서 소수파인 그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에 밀려 2위에 그쳤으나 2차 투표에서 유진산 총재의 김영삼 지지에 반발한 이철승이 지지표를 몰아줌으로써 대통령 후보로 선출될 수 있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선거에서 김대중은 향토예비군 폐지, 노동자·자본가 공동위원회 구성, 비정치적 남북교류, 한반도 평화를 위한 4대국 안전보장안 등을 선거공약으로 내걸고 박정희 대통령의 안보논리와 경제성장론을 정면에서 공격했다. 선거과정에서 김대중은 과감한 공약과 호소력 있는 연설로 유권자들의 선풍적인 지지를 이끌어냈으나 박정희 후보에게 95만 표 차이로 패배했다. 당시 공공연하게 벌어진 선거부정을 빗대어 "김대중은 선거에서 이기고 투표에서 졌다"는 말이 회자되었다.
1972년 지병을 치료하기 위해 일본에 체류 중이던 김대중은 10월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하고 해외에서 반유신운동을 펼쳤다. 1973년 미국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한민통)를 결성한 데 이어 일본에서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 결성을 추진 중이던 1973년 8월 8일 그가 일본 도쿄[東京] 팔레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 만에 서울로 압송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김대중 납치사건'은 국내외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한국 정부는 관련 사실을 전면 부인하다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 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해 대일관계가 심각한 교착상태에 빠져들자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 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등 서기관 김동운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 중 언행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陳謝訪日) 등에 합의했다. 이로써 이 사건은 86일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되었다. 1974년 12월 가택연금 중이던 김대중은 재야단체인 민주회복국민회의에 참여해 재야활동을 시작했다. 1976년 3·1절 기념미사에서 윤보선·함석헌·문익환·김승훈 등 재야인사들과 함께 민주주의, 경제입국 구상 재검토, 민족통일 등을 주장하는 '3·1민주구국선언'(일명 명동사건)을 발표해 대통령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그는 이듬해 3월 징역 5년, 자격정지 5년을 확정받아 진주교도소에 수감되었다. 유신정권은 그의 투옥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이 고조되자 1978년 12월 그를 형집행정지로 석방해 가택연금시켰다. 그러나 그는 1979년 3월 1일 '민주주의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을 결성해 윤보선·함석헌 등과 함께 공동의장을 맡으며 재야활동을 계속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인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살해되면서 유신체제가 붕괴되자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 사면복권된 그는 1980년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 등과 함께 정치활동의 전면에 나섰다. 그러나 12·12사태(1979)로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의 도발에 대한 우려는 5월 17일 자정의 비상계엄 전국확대조치를 통해 현실화했다. 이때 그는 26명의 정치인들과 함께 체포, 수감되었다. 정부군의 학살행위에 대항해 시민군이 무력으로 맞선 5·18광주민주화운동 시기를 감옥에서 보낸 그는 9월 계엄사령부 군법회의에서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사형선고를 받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이에 대해 미국·일본·독일·프랑스를 중심으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대거 그의 구명운동을 벌이자 군사정권은 그의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한 데 이어 1982년 12월 미국 망명을 허용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전격적으로 귀국했다.
집권과정
김대중의 귀국은 국민들에게 일대 사건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결과는 그가 김영삼과 함께 급조한 신한민주당이 제12대 총선에서 어용야당이던 민주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데서 잘 나타났다. 그는 이에 힘입어 대통령 직선제 개헌투쟁을 본격적으로 전개했다. 1987년 6월민주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뒤덮자 군사정권은 대통령 직선제 수용과 그의 사면복권을 뼈대로 한 이른바 6·29선언으로 후퇴했다. 비로소 사면복권된 그는 김영삼이 총재로 있던 제1야당인 통일민주당의 상임고문 자격으로 정치활동을 재개했다. 그러나 1987년 12월로 예정된 제13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의 후보단일화에 실패하자 독자 출마로 방향을 돌려 11월 평화민주당을 창당해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그러나 집권당인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 통일민주당의 김영삼 후보와 3파전으로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 후보가 승리할 가능성은 당초부터 없었다. 대통령선거에 패한 후 야당분열에 대한 국민적 비난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거세지자 그는 평화민주당 총재직을 일시 사퇴했다. 하지만 그에게 다시 기회가 왔다. 이듬해(1988) 4월에 실시된 제13대 총선에서 평화민주당이 통일민주당을 제치고 제1야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그는 다시 평화민주당 총재로 정치의 전면에 나섰다. 1990년 민주정의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은 정국을 송두리째 흔들어놓았다. 자신의 강력한 지지기반인 호남 고립화 전략으로 요약되는 이 사태는 그에게 새로운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3당 합당으로 출범한 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약칭 민자당)에 대항하기 위해 1991년 4월 재야인사 중심의 신민주연합당준비위원회(약칭 신민연)와 통합해 신민주연합당(약칭 신민당)을 창당하고 9월에는 김영삼의 3당 합당에 반대해 소수야당으로 전락한 민주당과 합당했다.
1992년 12월 18일 그는 제14대 대통령선거에 다시 출마해 국민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러나 호남지역의 압도적인 지지와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에서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그는 민주자유당의 김영삼 후보에게 190만여 표차로 패배했다. 그는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고 의원직과 민주당 대표최고위원직을 사퇴함과 동시에 전격적으로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이는 그의 지지자들에게나 반대자들에게나 충격적이고도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그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해 연구활동을 하다 6개월 만에 귀국했으며, 1994년 1월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이후 아태평화재단으로 명칭 변경)을 창립해 이사장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그는 1995년 6·27지방선거 과정에서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했고 7월에는 정계은퇴를 번복한다는 내용의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해 이를 기정사실화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다시 빗발치는 비난을 받았으나 이를 애써 무시하며9월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다. 1996년 4월 11일에 실시된 제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가 제1야당의 지위를 굳히자 그는 오직 제15대 대통령선거를 향해 질주했으며, 1997년 11월 충청지역의 맹주로 자처하던 자유민주연합의 김종필 총재와 대통령 후보 단일화에 성공해 두 당의 단일후보로 대통령선거에 나섰다. 1997년 12월 18일 실시된 제15대 대통령선거에서 그는 여권후보의 분열과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를 등에 업고 여당인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를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평가
김대중의 당선은 건국 50년 만의 첫 여야 정권교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1998년 2월 25일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자유민주연합과 공동정부를 구성한 그는 '국민의 정부'를 표방하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병행발전'을 국정지표로 삼았다. 그는 대통령 선거운동과정에서 공언한 '준비된 대통령'답게 과감한 경제개혁에 착수해 지난 정권으로부터 물려받은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하는 한편, 기존의 완강한 대북 흡수통일론을 배격하고 이른바 '햇볕정책'으로 불리는 대북 포용정책을 꾸준히 견지함으로써 얼어붙은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했다. 그는 2000년 3월 베를린자유대학교에서 행한 연설에서 한반도 냉전구조 해체와 항구적 평화, 남북간 화해와 협력에 관한 '베를린 선언'을 발표한 데 이어, 2000년 6월 13~15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해 분단 사상 55년 만에 첫 남북정상회담을 갖고 역사적인 6·15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냈다. 그는 또한 한국 최초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서 국위를 선양했다.
6선 의원을 역임한 김대중은 정치활동 외에 〈행동하는 양심으로〉, 〈대중경제론〉, 〈평화를 위하여〉, 〈민족의 내일을 생각하며〉, 〈공화국연합제〉,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 〈새로운 시작을 위하여〉, 〈나의 길 나의 사상〉, 〈후광 김대중대전집〉(전15권), 〈21세기 시민경제이야기〉 등 수많은 저서를 냈으며, 1992년 러시아 모스크바대학교 외교대학원에서 〈한국 : 민주주의의 드라마와 소망〉이라는 논문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김대중 대통령과 아키노의 운명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인해, 지난 시절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오릅니다. 김대중 대통령을 한국의 만델라라고 말하지만, 1980년대 초에는 한국의 아키노(B.S.Aquino)라는 말을 듣기도 했습니다. 만델라와 김대중은 긴 억압을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전 세계로 신장시켰다는 의미에서 상징적 닮은꼴이지만, 필리핀의 전 상원의원이었던 아키노는 보다 현실적인 의미에서 비교 조명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필리핀 야당 지도자였던 아키노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역정과 닮은 점이 많습니다. 아키노는 1977년, F.E.마르코스(Ferdinand Edralin Marcos)의 독재에 반대운동을 벌이다가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1980년 심장병 수술이라는 명목으로 미국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아키노는 미국에서도 활발하게 반 마르크스 운동에 앞장섭니다. 독재자 마르크스에게는 눈에 가시이자 정적 1호였습니다.
아키노는 망명생활을 끝내고 귀국을 결심, 1983년 8월 21일 마닐라공항에 도착 하자마자 청부살인자 롤란도 길만에게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갈만 또한 군인들에게 그 자리에서 피격됨으로써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국민들은 갈만이 단독 범행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에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벌여 나가시 시작합니다. 이 사건은 18년 마르크스 장기 집권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으로 작용합니다. 필리핀 법원은 4년 뒤에야 갈만의 살해 혐의로 16명의 군인에게 종신형을 선고하게 됩니다. 마르크스는 망명길에 오르지요.
김대중 대통령도 1980년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지만 국제사회의 압력과 국내 여론이 거세게 일자, 형집행 정지 선고를 내립니다. 1982년 김대중 대통령은 사선을 넘어 생애 두 번째의 망명길에 오르게 됩니다. 미국에서도 김대중 대통령은 한국 민주화 운동을 위해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지요. 그렇지만 김대중은 조국의 현실이 걱정되어, 1985년 2월 8일 죽음을 무릎 쓰고 귀국하게 됩니다. 미국의 민주당 인사들과 정치학자들은 필리핀의 아키노처럼 또 한 번의 전철을 밟아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 김대중 대통령 귀국 비행기에 같이 탑승하게 됩니다. 만약 아키노암살이라는 세계적인 사건이 없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오늘 갑자기 아키노의 얼굴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얼굴이 겹쳐 떠오릅니다. 아키노의 부인(코라손 아키노)은 남편의 뒤를 이어 정치가로 변신, 반 마르코스 열풍을 일으키며 일부의 군부세력과 대다수 국민들의 지지를 받아 대통령이 됩니다. 만약 아키노의 죽음이 없었고, 아무런 보호 장치 없이 김대중 대통령이 귀국길에 올라, 신군부에 의해 암살당했다면. 이희호 여사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남편의 뒤를 이어 민주투사가 되었을 것 같습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한 순간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만약 과거 역사의 경험이 없었다면, 민주주의가 얼마나 후퇴되었을까, 아니면. 독재에 맞서 더 빨리 민주화투쟁이 점화되었을 수 있었다는 가정도 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만델라를 넘어, 한국의 아키노를 넘어 한국 민주주의와 세계 인권 신장에 큰 기여를 하신 김대중 대통령 다시 한번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김대중도서관 옮긴글===
김대중 납치사건(1973.8.8)
김대중 납치사건은 일본으로 망명 중이던 김대중이 1973년 8월 8일 오후 1시경 도쿄의 호텔 그랜드팰리스 2210호실 부근에서 대한민국 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납치되어, 8월 13일에 서울의 자택 앞에서 발견된 사건입니다.
사건발생 당시 김대중은 통일당 당수 양일동을 만나러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 갔다가, 대기하고 있던 한국 정보기관 요원 5명에게 납치, 수장(水葬) 직전 극적으로 구출되어 사건발생 129시간 만인 8월 13일 밤 10시 집으로 돌려보내졌습니다.
71년 대통령 선거 이후 박정희의 최대의 정적으로 등장한 김대중은 유신체제가 선포될 당시 지병 치료차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중 유신이 선포되자 귀국을 포기, 해외에서 반유신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하고 미국과 일본을 왕래하며 정력적으로 반체제 민주화운동을 벌이는 한편, 73년 7월 6일 재미교포들의 반정부단체인 한국민주회복통일촉진국민회의를 결성, 그 명예회장이 되었으며, 일본에서도 8월 13일 도쿄 한민통을 결성할 예정이었습니다. 김대중의 이러한 활동은 박정권의 비위를 거슬리기에 충분했고, 이 때문에 사건이 발생하자 국내외의 비난여론은 일제히 박정권에 집중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공권력 개입설을 완강히 거부하던 한국정부는 일본 경시청이 사건현장에서 범인의 지문을 채취하는 등 움직일 수 없는 증거를 포착하고 사건관련자의 출두를 한국에 요구하자, 이를 완강히 거부했습니다. 이에 따라 일본내에서는 <국권 침해>에 대한 강력한 비난여론이 대두, 한일정기각료회의 연기, 대륙붕 석유탐사를 위한 한일교섭 취소, 경제협력 중단 등 오랫동안 밀월관계를 유지해오던 한·일관계가 갑자기 교착상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후 미국의 배후 영향력 행사와 한·일간의 막후 절충을 통해 관계정상화가 시도되어
△1등서기관의 해임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동에 대한 면책
△김종필 총리의 진사방일 등에 합의,
사건발생 86일 만에 김대중사건은 정치적으로 결말지어졌습니다.
이로써 무기연기되었던 한일각료회의가 12월 22일 열리고 중단된 차관사업도 재개되었으나, 주권침해·한국중앙정보부 관련설·범인출두·김대중의 원상회복 문제 등은 사건진상과 더불어 세월 속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식(2000.12.10)
노벨 평화상( - 平和賞, 스웨덴어: Nobels fredspris, 노르웨이어: Nobels fredspris, 영어: Nobel Peace Prize)은 노벨의 유언으로 만들어진 5가지 부문 중의 하나인 노벨상이다. 국가간의 우호, 군비의 감축, 평화교섭 등에 큰 공헌이 있는 인물이나 단체에게 주어진다. 수상식은 다른 부문과 달리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국회에서 열린다. 1914년~1918년, 1939년~1943년까지는 제 1차 세계 대전과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으며 이후 1966년과 1967년에도 수상자가 없어서 시상식을 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다. 중국의 반체제 인사가 수상하는 등 정치적 시국과 역행하여 수상기준이 정해지는 경향이 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한국과 동아시아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해, 그리고 특히 북한과의 평화와 화해를 위해 노력한 업적을 기려 2000년 노벨평화상을 김대중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수여하기로 결정했다.
한국이 수십년간 전제주의의 통치하에 있을 때, 수차례의 생명에 대한 위협과 장기간의 망명생활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점차적으로 한국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1997년 그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한국은 세계의 민주국가 대열에 확고히 자리잡았다. 대통령으로서 김대중씨는 확고한 민주 정부의 수립과 한국에서의 내부적 화합 증진을 추구해 왔다.
강력한 도덕적 힘을 바탕으로 김대통령은 인권을 제한하려는 시도들에 맞서 동아시아 인권수호자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버마(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지지하고 동티모르의 인권탄압에 반대하는 그의 헌신적 노력 역시 괄목할만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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