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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가 왜 조선인가 : 중원을 찾아서, 몽골과 돌궐은 어디에 2 (金山의 위치를 중심으로)
78장 어떻게 대카안이 나얀에 대해 원정을 나갔는가
[그는 나얀과 카이두의 영지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모든 관문에 지체없이 수비대를 배치하고, 그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그들이 모르도록 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즉시 캄발룩(Cambaluc)시 주위 열흘 거리까지에 있는 사람들을 신속하게 모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는 거의 36만 명의 기병과 10만 명의 보병을 소집했다. 〔중략〕 그가 소집한 26만명은 그으 매꾼들과 그의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사계절 220~221pp (3편 대카안의 수도)>
캄발룩(Cambaluc) : F(cabaluc, ganbalu, canbalu, garobalu), R(cambalu), Z(cambaluc, canbaluc). Qanbaliq, 즉 투르크어로 ‘칸의 도시’를 뜻하며 쿠빌라이 시대에 상도와 함께 원조의 수도였던 대도(오늘의 북경)를 지칭한다. 가장 정확한 표기인 cambaluc은 Z본에만 보이고, F ․ R본에는 cambalu, canbalu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마르코폴로는 캄발룩을 투르크어로 칸의 도시라고 하고 있다. 역자의 주석으로 보면 元朝(원조)의 수도였던 大都와 上都(오늘의 북경)라고 되어있다.
캄발룩(Cambaluc)이 칸의 도시라면 이는 곧 皇都 (京都/京師) 를 뜻한다. 물론 마르코가 상도를 Ciandu 라고 부르긴 하지만 대도와 상도를 캄발룩으로 불렀다는 점에 대해 역자 또한 의아해 하고 있다. 왜 그랬을까? 도대체 이 투르크와 투르크어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에 관한 것은 다음 회에 다시 논하기로 하고 오늘의 주제인 돌궐의 金山으로 돌아가 보자.
돌궐은 일반적으로 알파베트로는 Turk, Turkey ,Turqie 으로 한자로는 突厥, 突騎施로 표기한다.
1) 돌궐의 선계는 平涼 지금의 平凉郡의 雜胡이며, 匈奴의 별종으로 성은 阿史那氏이다. 後魏의 太武帝가 沮渠氏를 멸하자, 沮渠茂虔이 姑臟을 도읍으로 삼고 北涼이라 칭하였으나 魏에게 망했다. 아사나는 (그 부락) 5백가를 데리고 蠕蠕(柔然)로 달아나서 대대로 金山에 살았는데, 그 산의 생김새가 마치 투구와 같으므로, 사람들이 兜鍪(투구)를 돌궐이라고 부르고 그 이름으로 삼게 되었다. 혹 또 말하길 그 先國은 西海에 있었는데, 이웃나라가 (돌궐을) 멸망시키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다 죽여 버렸다. 그 중에 10살짜리 아이만이 살아남았는데 너무 어리자 죽이지는 않고, 발과 팔을 잘라 큰 늪에 버렸다. 어떤 암 이리가 매일 고기를 물고와 그 아이가 있는 곳에다 놓았는데 그 아이가 그것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 후에 이리와 통하여 임신을 시키게 되었다. 西海의 東으로 달아나서 그 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산은 고창의 서북에 있고, 동굴이 있는데, 이리가 그 굴에 들어가는 도중에, 평평하고 아름다운 초원 230여리를 때마침 얻게 되었다. 나중에 늑대가 사내 열을 낳았는데, 아들들이 장성하여 부인을 얻고 임신을 하게 되었고, 나중에 각각 하나의 성을 가지게 되었고, 阿史那는 곧 그중의 하나이다.
- 통전 권197 변방13 북적4 돌궐 상
[突厥之先,平涼今平涼郡雜胡也,蓋匈奴之別種,姓阿史那氏。後魏太武滅沮渠氏,沮渠茂虔都姑臧,謂之北涼,為魏所滅。阿史那以五百家奔蠕蠕,代居金山,狀如兜鍪,俗呼兜鍪為「突厥」,因以為號。或雲,其先國於西海之上,為鄰國所滅,男女無少長,盡殺之。有一兒,年且十歲,以其小不忍殺之,乃刖足斷臂,棄於大澤中。有牝狼每銜肉至於兒處所,此兒因食之,得以不死。其後遂與狼交,狼有孕焉。負於西海之東,止於山上。其山在高昌西北,有洞穴,狼入其中,遇得平壤茂草,地方二百餘裏。後狼生十男,長大外託妻孕,其後各為一姓,阿史那即其一也。]
- 通典卷第一百九十七 邊防十三 北狄四 突厥上
2) 돌궐의 선조는 平凉의 雜胡이며 성은 阿史那 氏이다. 후에 魏 太武帝가 沮渠氏를 멸하자, 阿史那는 5백가를 데리고 茹茹로 도망가서, 대대로 金山에 살면서 철을 만드는 일을 했다. 金山의 생김새가 마치 투구(兜鍪)와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투구를 돌궐이라 부르니 하고, 그 것을 국호로 하였다. 혹 전하기를, 그 조상의 나라는 西海에 있었는데, 이웃나라가 그들을 멸망을 당하고, 남녀노소 할 것 다 죽임을 당하였는데. 오직 한 아이가 살아남아, 발과 팔이 잘려 큰 늪에 버려졌다. 그 때 한 마리 암 이리(牝狼)가 매일 고기를 물어다 그곳으로 가져왔는데, 그것을 먹고 목숨을 부지하게 되었다. 그가 나중에 결국 이리와 교하여 새끼를 잉태하게 되었으나, 이웃나라 왕이 다시 사람을 시켜 그 아이를 죽이고, 이리는 그 옆에 있었는데, 사자가 죽이려하였을 때, 신의 도움을 받아, 홀연히 海東의 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 산은 高唱의 서북에 있으며, 아래에 동굴이 있는데, 그 이리가 그곳에 들어가려 할 때에 우연히 넓은 초원을 보고 그 곳을 얻게 되었는데, 땅이 230여리였다. 나중에 이리가 사내 열을 낳았는데, 그 중 한 성이 阿史那 氏이고, 가장 지혜와 덕이 있으므로 군장이 되어서는 군막의 안에 이리머리 깃발을 세우고 제사를 지냈는데, 뿌리를 잊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 수서 권 84 열전 49 북적 돌궐
[突厥之先,平涼雜胡也,姓阿史那氏。後魏太武滅沮渠氏,阿史那以五百家奔茹茹,世居金山,工於鐵作。金山狀如兜鍪,俗呼兜鍪為「突厥」,因以為號。或云,其先國於西海之上,為鄰國所滅,男女無少長盡殺之。至一兒,不忍殺,刖足斷臂,棄於大澤中。有一牝狼,每啣肉至其所,此兒因食之,得以不死。其後遂與狼交,狼有孕焉。彼鄰國者,復令人殺此兒,而狼在其側。使者將殺之,其狼若為神所憑,歘然至於海東,止於山上。其山在高昌西北,下有洞穴,狼入其中,遇得平壤茂草,地方二百餘里。其後狼生十男,其一姓阿史那氏,最賢,遂為君長,故牙門建狼頭纛,示不忘本也。〔隋書 卷八十四 列傳第四十九 北狄 突厥〕
1)
⑴[돌궐의 선계는 平涼 지금의 平凉郡의 雜胡이며, 匈奴의 별종으로 성은 阿史那氏이다. 後魏의 太武帝가 沮渠氏를 멸하자, 沮渠茂虔이 고장(姑臟)을 수도로 삼고 北涼이라 칭하였으나 魏에게 망했다. 아사나는 5백가를 데리고 蠕蠕(柔然)로 달아나서 대대로 金山에 살았는데, 그 산의 생김새가 마치 투구와 같아서, 세속에서 투구를 돌궐이라 부르므로, 그 이름을 취해 부르게 되었다.
⑵[돌궐의 선조는 평량의 雜胡이며 성은 阿史那 氏이다. 후에 魏 太武帝가 沮渠氏를 멸하자, 阿史那는 5백가를 데리고 茹茹로 도망가서, 대대로 金山에 살면서 철을 만드는 일을 했다. 金山의 생김새가 마치 투구(兜鍪)와 같았기 때문에 사람들이 투구를 돌궐이라 불렀는데 , 그것으로 국호 삼았다.
돌궐이 북위의 태무제에 멸망을 당하여 蠕蠕으로 도망가 산 곧이 金山(알타이)라고 하며 그 산 모양이 투구처럼 생겨서 돌궐이라 했다고 한다. 따라서 Turk 는 Helmet 투르크=兜鍪=金이다. 또한 金山에 살면서 제련의 직책을 맞았으므로 쇠(金)과 매우 연관성이 있을 것이다. (서양사람의 姓중에 대장장이를 뜻하는 (Smith)도 같은 기원을 가지지 않을 까 하는 개인적인 의문이 있다.)
2)
⑴ 혹 또 말하길 그의 선국은 西海에 있었는데, 〔중략〕 서해의 동쪽으로 달아나서 그 산에 머무르게 되었다
⑵ 혹 전하기를, 그 조상의 나라는 西海에 있었는데 〔중략〕사자가 죽이려하였을 때, 이리가 신의 도움을 받은 듯이( 귀신같은 능력을 발휘하여) 홀연 海東의 산으로 가 머무르게 되었다.
두 사료에서는 공통적으로 돌궐의 선대나라가 서해에 있었다고 하고 있으며. 그 조상나라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돌궐은 흉노의 별종이라 하였으므로, 흉노의 한 부락 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그 지리적 위치는 西海라고 하였고, ⑴⑵의 사료에서 보면 쫓겨나 옮겨간 곳이 西海 동쪽의 산이며, ⑵의 수서에서는 아예 海東이라고 하고 있다. 그렇다면 금산은 海東(西海의 東)에 있는 투구를 닮은 산이 된다.
198장 여기서 그는 대투르키아(Great Turquie)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대투르키아에는 카이두(Caidu)라는 이름의 왕이 있는데 그는 대카안의 손자이다. 그가 대카안의 친형제인 차가타이(Ciagatai)아들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수많은 도시와 촌락을 지배하는 정말로 강력한 군주이다. 그는 타타르이고 그의 백성들도 타타르이며 모두 뛰어난 전사들이다. 그들 모두는 전쟁에 단련된 사람들로서 그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카이두는 대카안과 한 번도 화평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큰 전쟁을 계속했다. 여러분은 이 대투르키아가 앞서 설명한 쿠르모스로부터 서북쪽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대투르키아는 지온(Gion)강 너머에 있고 북쪽으로 대카안이 있는 곳 까지 계속되고 있다.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김호동 역주 ,사계절 7편 대초원 198장, 513pp>
전회에 다루었듯이 쿠르모스는 현 이란 남방의 호르무즈(27°15 N, 55°37 ′E)로 아무다리야의 서남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투르키아가 그 서북에 있다고 하였기 때문에, 돌궐의 금산은 현 이란서북방의 카프카스와 아나톨리아 지방에 있는 투구처럼 생긴 산을 찾으면 된다. 이러한 특징을 가진 산은 아라랏트 산(Mount Ararat) 로서
※아라라트(Ararat) 산 : 터키 동쪽, 이란 서북쪽, 아르메니아 서남쪽에 걸쳐 있는 산으로 높이는 큰 봉우리가 5,185m, 작은 봉우리가 3,896m이다. 터키어로는 아리다기 산, 그 지역어로는 아으르산이라고 한다. 화산암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경에 노아의 방주가 얹힌 산으로 유명하다. 1829년부터 서구인들은 방주 화석을 찾아 이 산에 올랐고, 증거물도 제시했지만 아직 공인된 예는 없다. 지금은 아라라트 산 맞은 편 방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배 형체의 지형을 노아의 방주 화석일 수도 있다 치고, 가끔 관광객들이 사진 촬영을 하러 온다. 하지만 "이슬람 세계에서는 경전 <꾸르안>에 바탕을 두어 노아의 방주가 안착한 곳은 아라라트 산이 아니라 티그리스 강의 발원지인 주디산이라 믿고 있다" (정수일, 실크로드 문명기행, 2006, 한겨레신문사). 아라라트 산은 이렇게 노아의 방주와 관련하여서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아르메니아인들에게는 (마치 한민족에게 백두산이 그러하듯) 정신의 고향으로서 큰 의미를 갖는다. 아르메니아인으로 캐나다 영화감독인 아톰 에고얀이 2003년 부산영화제 때 공개한 영화 <Ararat>는 1차대전 당시 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인 학살 사건을 영화 속 영화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http://ask.nate.com/knote/view.html?num=207244
[Mount Ararat 39°42.113′N 44°17.899′E (Turkish: Ağrı Dağı, Armenian: Արարատ, Greek: Αραράτ, Hebrew: אררט, Kurdish: Agirî, Persian: آرارات)
Türkçe: Ağrı Dağı (Selçuklular döneminde; Eğri Dağ, resmi adıyla Büyük Ağrı Dağı), Türkiye'nin en yüksek dağıdır http://commons.wikimedia.org/wiki/Mount_Ararat?uselang=ko. ]
이 산은 노아의 방주가 있다는 곳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 이름을 보면 ,
Türkçe: Ağrı Dağı (Selçuklular döneminde; Eğri Dağ, resmi adıyla Büyük Ağrı Dağı),
아기다리 산, 아흐르 산으, 에그리 산 (Eğri Dag)̆ 영어의 Egg로, 알산, 알타이(Altay)이자, 곧 金山임을 알 수 있다.
아라라트산 사진과 주변지도
따라서 돌궐이 아라랏트/알타이/金山/으로 옮겨와 살았으므로 그들의 조상이 살았다는 西海는 이 산의 서쪽에 있는 지중해이며, 이들이 지중해의 연안에 살다가 이스탄불을 거쳐 터키의 동부지방으로 옮겨왔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지역의 서쪽과 서북에는,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헝가리가 있는 발칸반도가 있으며, 특히 불가르 , 훈족의 후예라 자처하는 Magyar/ Mazar 헝가리와 불가리아 있다.
20장 소 아르메니아에 대해 이야기 한다.
소 아르메니아 왕국의 경계는 다음과 같다. 남쪽으로는 사라센 사람들이 차지하고 있는 약속의 땅이고 북쪽으로는 카라마니(Caramani)라고 불리기도 하는 투르코맨(Turcomain)이라는 이름의 족속이 있고, 동쪽과 동북쪽으로는 투르키아(Turqie) - 위의 책, 101pp
소 아르메니아는 아나톨리아 중부지역을 가리키는데, 폴로는 그 북쪽지방에 ‘카라마니, 동쪽과 동북으로도 투르키아가 있다’ 라고 하였다. 카라마니(Caramani)는 코마니아(Comaia)로 카프카스 북쪽에 있었던 투르크계 유목부족이었으며, 동쪽과 동북쪽에도 투르키아(Turqie)가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그렇다면 돌궐/돌굴/투르크는 지중해의 서쪽, 특히 서북쪽인 발칸반도, 카프카스를 중심으로 그 남북지방, 이란 서북방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한 유목부족을 통칭해서 부르는 명칭이며, 또한 이들은 여진이 세운 金/글안의 遼, 몽골의 元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곳에서 활동하였다.
1) 24장 카타이(Catai)
주 35) F(cata,catai) R(cataio,cattayo, ouchach, ouchacha) Z(alcathai, alochayray) 몽골시대에 키타이(Kitai)는 금조 치하에 있던 북중국 지방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말은 원래 契丹을 옮긴 말로서, 遼 가 북중국을 지배할 때에 그 지역에 대한 명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 위의 책 110pp의 주석
2) 3장 우카카(Oucaca)
그들은 거기서 여장을 챙겨 베르카가 있는 곳을 떠나 서방(the Sunsetting)의 군주의 영역 끝에 있던 우카카(Oucaca)라는 이름의 도시로 갔다. 그리고 우카카에서 출발하여 티그리(Tigri)강을 건넜고 열이레 거리의 사막을 갖고 가축을 기르며 생활하는 타타르 사람들만 보았을 뿐이었다.
주 15) F(oucaca , ouchacca,) R (ouchacha), 볼가강 우안의 사라이와 볼가라 중간쯤 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사라토프(Saratov)남방 6마일 되는 지점에 있는 Uwek이라는 마을이 그곳에 해당된다. - 위의 책 76pp~77pp
1)에서 R본의 (카타이)Catai 대한 표기인 (ouchach ,ouchacha) 를 Catai 와 동일시하고 있으며, 그 소리 값은 2)의 우카카(Oucaca)강과 아예 같다. 이곳은 역자의 주에서도 설명하고 있듯이 金朝 치하의 북중국을 가리키는 말이며, 본시 글안(契丹)을 옮긴 말로, 遼가 북중국을 을 지배할 때에 그 지역에 대한 명칭이다. 라고 한였다. 그러나 이 지방은 글안이 본시 이곳을 중심으로 활동하다, 중국조정의 내부혼란을 틈타 화하지방의 절반을 무력으로 차지하고, 기존의 중원정권을 압박하였기 때문에 붙여준 遼라는 朝代名일 따름이며, 본시 글안(契丹)은 중국의 서쪽과 서북방의 荒服밖, 즉 遼東, 遼西(유주와 병주)의 변두리 초원과 사막지역을 근거지로 삼고 살았던 것 유목부족임을 지칭하는 것이다. 또한 돌궐을 멸망시켰다는 북위의 태무제는 鮮卑로 곧 Sibir 지역이다.
따라서 키타이(Kitai)와 契丹은 본의는 같으나서로 구분해서 설명해야 하며, 전자는 광의의 개념인 Korea, Kauli 로 후자는 중국 변방의 한 유목민 제후로 리해해야 마땅하며, 金/元/淸 또한 그와 크게 다를 바 없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심장의 반을 장악하는 세력이 료금원명청인것이며, 후자의 契丹은 1)의 2)의 주석에서 보이는 우카카(Oucaca) : 〔주 15) F( oucaca , ouchacca,) R(ouchacha), 볼가강 우안의 사라이와 볼가라 중간쯤 되는 지점에 위치해 있었다. 사라토프(Saratov)남방 6마일 되는 지점에 있는 Uwek이라는 마을이 그곳에 해당된다.〕의 볼가강과 카프카스 산맥을 기준으로 한 동서남북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활동한 유목부족이다.
이 지역의 동쪽과 동남에 아랄해가 있고, 아무다리야, 시르다리야가 흐르고 있으며, 이는 소그드라고 불리는 胡商들이 건설했다는 오아시스 크레센트인 부하라, 히바, 우르겐치, 사마르칸트, 마리, 헤라트, 발흐, 바미얀등이 그에 해당한다 .
이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교통, 군사, 경제의 중심인 중앙유라시아로 현재의 강대국들이 전략적 지역으로 항상 주시하고 있는 곳이며. 고금의 정치, 경제, 력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이렇게 중요한 지역을 전쟁으로 송두리째 파괴시켜놓고 비단길(SILK ROAD)이라는 알라딘 램프를 사용하여 '동서교류문명사'라는 정체불명의 학문을 정립시켜 놓은 것이다. 결론적으로 소위 중국의 북방을 어지럽힌 유목제국, 오랑캐(胡)는 위의 상술한 지역인 소아시아와 동유럽에서 활동하였던 것이며, 시대별로 중앙아시아의 중심부를 장악하는 진퇴를 거듭하였고, 이들의 고려/조선의 력사에도 상당히 비중을 차지 하고 있기 때문에 오랑캐(胡)와 소그드 대한 재조명과 집중적인 연구가 절실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첫댓글 위 수서와 통전에서 말하는 돌궐의 선대나라와 과 沮渠氏에 세운 北凉의 위치가 다르다는 점을 보충합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저는 [샤먼제국]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마천 김부식이 허구가 아니라 우리 뇌 구조가 그렇게 인식하도록 각인되어진 것으로 봅니다. 또한 샤머니즘이라는 개념은 매우 낙후되고 저급적인 문화입니다. 그런 정신영역을 가지고 사해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 하며, 샤먼제국은 지금까지의 통설을 깨고 획기적인 발상을 시도한 것에는 분명하나, 단지 참고용일 뿐입니다. 견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