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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읽기(2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4절,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5절,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6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엡2:5-6, 새번역).
들어가며
오늘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대우하고 계시는지를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앞(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드러낸 인간의 모습은 그렇게 사랑을 받을 만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에 대해 구로사키 선생이 조심스럽게 설명한 것을 보자.
“인간이란 한쪽 면만 보면 아름다운 점이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고금동서의 많은 인류가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욕구을 따라 살아왔다. 결국 이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못하였고, 사탄의 종이 된 모습이었다. 그리하여 인간이 가진 선하고 아름다운 부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로 떨어지는 처지가 되었다. 아담 이래 사람은 태어난 본능 그대로의 모습이다. 이를 스스로 깨닫기까지 우리는 진정으로 자신을 안다고 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절망적이었던 우리의 모습을 알려준 후 ‘그러나!(ὁ δὲ, But)’를 외치며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지난 번 공부에서 살펴보았다. NIV가 번역한 대로, 우리를 향한 위대한 사랑(great love for us)이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우리 인간의 본질이 죄인데 반해, 하나님은 본질상 은혜가 풍성한 분(God, who is rich in mercy)이다. 참으로 하나님은 사랑 부자이신 것 같다. 나는 이 부분을 공부하는 동안, 교회문 앞에 걸린,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를 다시 보게 되었다. 너무나 많이 듣고 보아서 감흥이 사라진 그 문장이 참 진리임을 마음속으로 새삼 깨달았다.
2. 본문 살피기
1)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5절,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허물로 죽은 우리, 범죄로 죽은 우리를 원어로 보면,
우리 죽은 죄로
이다. 허물과 범죄는 같은 뜻이다. 허물은 죄가 아니라, 실수나 잘못처럼 가볍게 받아들일 수도 있겠으나 분명히 죄를 뜻하는 말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이 ‘살리셨다, 받았다’라고 굳이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음을 주의하자. 이는 앞으로 될 일이 아니라, 이미 얻은 일이기 때문이다. 살리심이 이미 일어난 완성된 사건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5절 말미에 ‘너희가 구원받은 것은 은혜로 인해서다’라고 덧붙여 말한다. 이 문장은 번역서마다 괄호 안에 넣거나(개역성경), ―을 넣거나(NIV, 일본어 성경들), 컴마(헬라어성경)로 구별하여, 앞의 내용을 보충하여 강조하는 문장임을 표기하고 있다. 죄로 죽은 우리를 예수와 함께 살리셨는데, 그 살리심(구원)은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에베소서의 저자인 바울 사도는 진노의 자식들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려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자비의 베푸심, 즉 하나님의 크나큰 사랑을 꼭 토로 달고 싶었던 모양이다.
요한복음 15장의 비유처럼,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역사적 사건이 성령을 통해 내 속에서 실제적인 변화로 나타난다. 객관적이었던 사실이 주관적 사건이 되는 것이다.
살리심이란 무엇일까? 물론 다음 문장에 나오는 구원 받음이라 하겠다. 구원 받음은 구체적으로 중생, 거듭남이다. ‘너희가 살리심을 받았다’라는 건 하나님께서 다시 살게 하여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새로운 생명을 주셨고, 영광스럽게도 다시 살리셨으니,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게 되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이러하다.” 이것은 비밀이다.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으니 설명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된 이상, 이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이런 비밀을 내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 비밀을 깨달은 자의 노래가 바로 ‘나 같은 죄인 살리신, Amazing grace’이다. 특히 영어 가사 1절에 바로 오늘의 본문 이야기가 잘 표현되어 있으니 같이 읽어 보자.
|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 놀라운 은혜,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 은혜가 나 같은 불쌍한 사람을 구했다! 나 한때 잃은 자였지만, 지금은 찾은 자이다. 보지 못했던 자였지만 지금은 보네. |
나는 전에 잃은 자, 즉 잃어버린 양 같은 존재였었는데, 지금은 발견된 자(I am found)가 되어 예수님 품 안에 안겨 있다. 그리하여 예전에는 눈이 가려져 볼 수 없었지만, 지금은 신비한 하나님의 은혜를 볼 수 있다는 내용이다. 한글 가사도 좋고, 영어 가사도 매우 좋다. 작사가가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나를 살리셨다는 체험이 있어 이렇게 진솔한 고백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2) 함께 살리시고 함께 앉히심
6절,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하늘에 함께 앉게 하셨습니다(새번역).
개역성경은,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셨다고 한다. 살리심을 일으키심으로 번역하였다. 원어 ‘에게이로, ᾐγείρω’는 일어난다는 동사인데, 문맥상 의미적으로 살린다는 말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하늘에 앉게 하셨다고 하였는데, 살린다, 앉힌다는 두 말에 접두어 순(συν)을 붙여 함께 살린다(συνήγειρε), 함께 앉힌다(συνεκάθισεν)는 각각 한 개의 단어로 나타내었다. 이는 독특한 표현이나, 예수라는 포도나무에 붙은 가지인 우리가 나무와 함께 운명을 같이 한다는 의미라는 점에서, 단어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하여 살리심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무덤에서 나와 자유롭게 행보한다. 즉 영적 무덤에서 탈출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무덤에서 나오신 것처럼, 신자도 죄의 무덤을 벗어난다. 우리가 더 이상 무덤 가운데 있지 않다는 사실은 우리가 더 이상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지 않다는 적극적인 증거다. 사도 바울은 이 점을 로마서 4장에서 이미 확증하여 말하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범죄함을 인하여 내어줌이 되었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다.
신자는 이제 통치 체제가 바뀐 나라의 국민과 같다. 율법의 구속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자유함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음에서 일으키셨고, 하늘에 앉게 하셨다고 이미 일어난 과거형으로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우리는 아직 이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인생인데, 이미 하늘에 그리스도와 함께 앉았다는 말이 가능한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해 조명한 선생이 자세히 설명한 게 있어 인용하고자 한다.
이 부분은 재림의 때 일어나리라는 미래의 소망이 아니다. 이미 부활하신 예수 그리고 현재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 그리스도 예수와 더불어 이미 일어난 행위를 가리키고 있다. ‘일으키셨다’는 부활하다 혹은 승천하다의 뜻을 갖는다고 하니, 이땅에서 몸을 갖고 사는 우리로서는 당혹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하늘에 앉히셨다에 이르러서는 당혹을 넘어 곤혹스러워진다.
진보적인 학자들이 주장하는 ‘실현된 구원론’은 이 에베소서를 근거로 제시한다. 에베소서에는 다시 오심에 대한 언급이 없다는 점,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사도 바울의 주된 주제가 소홀하게 다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든다.
그러나 에베소서가 ‘실현된 구원론’이라는 주장은 에베소서의 기본 정신과 논리를 미처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 같다. 실은 4-6절보다 7절을 앞당겨 먼저 읽는 것이 좋은 순서일 것이다.
“7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자비하심으로써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
우리는 여기에서 함께 살리시고, 함께 일으키셨고, 또 함께 앉히셨다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는 여러 세대’라는 말에서 우리는 이미 일어난 일이면서도 앞으로 계속 진행될 시기의 연속이라 해석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실현된 구원론으로 독해하지 않도록 전후 맥락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신 하나님의 은혜는 종말 완성 때에야 그 은혜가 온전히 현시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에 곧 하늘로 올리우셨다. 사도신경의 고백처럼 우리는 예수께서 하늘로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서 앉아계심을 믿는다. 그리스도는 첫열매라고 하였으니,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고 일으키심을 받으며 하늘에 앉힌 바 된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에베소서는, 사도 바울이 죄인의 몸으로 로마에 도착한 뒤 가장 먼저 쓴 서신이라는 점을 상기해 보자. 사랑하는 에베소 형제들에게 이 변화가 이미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들의 눈이 밝아져서,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이 얼마나 큰지를 알기를 바라는 뜻이 들어있다.
에베소 신자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우리에게도 이 일은 이미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 하늘에 앉게 하셨으니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이었다. 이 세상 풍속을 따랐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하나님께는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하늘에 앉히셨다.
우리의 신분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선언하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이점을 힘주어 말한다.
“아버지께서 우리를 암흑의 권세에서 건져내셔서, 자기의 사랑하는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습니다(골 1:13).”
그리고 빌립보교회에도 이렇게 편지하였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빌 3:20).”
분명히 앞으로 일어날 일이지만, 이미 일어난 일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 가게 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지금 거기에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거기에 도착해 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실제로 체험하며 감사하고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니,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힌 바 되었다. 우리의 구속의 역사는 이미 완성되어 있다. 그 모든 것은 이루어졌다. ‘다 이루었다’ 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 길을 열어 놓으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그 길을 따라 뚜벅뚜벅 걸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맑은 물로 씻었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히 10:19-20).
3. 맺으며
세상에는 믿는다는 분들 중에서 하늘에 가보았다는 사람은 많지만, 살아서 하늘로 올리웠다거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은 없다. 많은 사이비 기독교에서 휴거, 믿는 자들이 있던 자리에서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 했던 사건들은 있었으나, 실제로 일어난 적도 없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이 더욱 특별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셨고, 일으키셨고, 하늘에 앉히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구약성서에는 살아서 하늘로 올라간 사람 둘에 대한 기록은 있다. 에녹과 엘리야이다.
1) 에녹
아담의 계보가 나오는 창세기 5장에 있다.
“에녹은 삼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아들딸을 낳았다. 에녹은 모두 365년을 살았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23절).”
2) 엘리야
엘리야와 그 제자 엘리사, 그리고 예언자 수련생 50명이 엘리야의 승천을 예감하고 요단강으로 가고 있었다. 드디어 강에 도착하자, 수련생들은 멀찍이 멈추어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엘리야가 겉옷을 벗어 말아서 강물을 치니, 물이 좌우로 갈라졌고 둘은 강을 건넜다. 그들이 이야기하면서 가고 있는데, 갑자기 불병거와 불말이 나타나서,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더니 엘리야만 회오리바람에 싣고 하늘로 올라갔다.
에녹에 대한 기록은 아주 짧아서 어떻게 하늘로 올라갔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세상에 남아있지 않았다는 문장뿐이다. 엘리야의 경우는 비교적 상세하여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는 듯 생생하다. 과연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의 마지막 순간에, 엘리야처럼 회오리바람에 싸여 하나님 나라로 가는 경험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우리는 이미 하늘에 앉아 있는지도 모른다. 땅에서 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벌써 하늘나라의 백성이다. 세상의 삶은 잠시이다. 우리가 지금 볼 수 없는 그 나라는 영원하다. 위에 것을 생각하고 땅에 것을 생각지 말라 하신 주의 말씀을 믿고 나아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