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에 넘어온 불교사상은 크게 교종과 선종으로 나누어 볼 수가 있는데 먼저 교종은 교리와 경전을 중심으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종파이고 선종은 참선을 통한 수행이 강조되어 부처가 된다는 종파이다.
결국 부처가 되어야 한다는 사상의 목적은 같으나 그 수행방법과 과정에 있어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깨달음에 있어서 같은 부처가 됨을 지향함에도 불구하고 각각 강조하는 것이 달라 폐해가 있었지만 지눌은 이런 교종과 선종을 통일하였다.
지눌의 사상에서 강조한 바로는 돈오점수인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공적영지를 알아야 한다.
공적영지란 인간의 마음은 본래 고요한 것으로 번뇌가 발생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마음이란 밝게 깨어있어 앎의 근본인 신령스러운 앎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마음이론을 수행의 목표로 두고 자기 자신과 외부로부터 오는 억압과 번뇌를 번뇌가 아님을 제대로 깨우치고 벗어나 다스려야 된다는 것이다.
즉 번뇌가 공함을 돈오해야 그 다음 수행의 단계인 점수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눌의 입장에서 돈오가 없는 수행은 목표 없는 수행으로 자신의 깨달음의 척도를 분간할 수 없다 할 것이다.
혜능의 돈오돈수와 지눌의 돈오점수는 홀연히, 단번에 내 마음이 부처임을 깨닫는 깨달음의 방식은 공통되지만 수행의 방법에 있어서 다시 차이점을 보인다.
단번에 깨달아 단번에 수행한다는 돈오돈수는 깨달음과 수행을 구분하지 않고 깨닫는 것 그 자체를 수행이라고 본다,
반대로 점수는 단번에 깨달은 뒤 점진적인 수행을 통해 완성해나가야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식을 함과 있어서 동시에 실천이 되는 자성정혜가 이상적이겠지만 실제로 현재 우리는 깨달음에 비례하여 그 마음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많다.
지눌은 이러한 괴리의 원인을 과거부터 계속해서 해온 습성에 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사람이 지니고 있는 습관들은 그동안 현대사회를 살아오면서 쌓아온 산물이기에 나 또한 이를 한번에 제거 하지 어렵다고 생각한다.
지눌도 궁극적으로 자성정혜를 발현해야 하지만 일반적인 평범한 사람이 하기는 어렵다고 한다.
그래서 이에 대한 차선책으로 제시해준 점진적으로 꾸준한 공부로서 수행 방법이 오늘날 상대적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큰 현대인들이 삶의 회복에 있어서 좀 더 현실적이고 실천 가능한 수행이라고 여겨져 지눌의 돈오점수가 현대적으로 더 알맞다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