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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Helter Skelter
사람은 누구나 한번 죽는다.(人固有一死)
어떤 죽음은 태산보다 무겁고(或重于泰山)
어떤 죽음은 깃털보다 가볍다.(或輕于鴻毛)
이는 죽음을 사용하는 방향이 다르기 때문이다.(用之所趨異也)
- 사마천, 「보임안서」 中
1987년 8월 6일, 제13차 공산당대회를 1주일 남짓 앞둔 어느 날이었습니다. 화궈펑 국가주석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치국 회의에서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동향(즉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의 CEPO 가입에 관한 안건들)을 논의하고 난 뒤, 예정에 없이 후종밍 합동참모위원회 의장(총참모장)을 자신의 집무실로 호출했습니다. 본래 화궈펑을 연금하고 대권을 쥐려 했던 후종밍은 만약의 상황을 대비해 베이징 군구의 특작대를 시내 곳곳에 전진배치한 상태에서 그와의 회담에 응했죠. 그러나 그곳에서 들은 이야기는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화궈펑은 후종밍을 진지하게 차기 국가주석 적임자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었죠. 주석이 생각하기에 중국은 미증유의 급박한 세계정세 하에서 중대한 전환점을 맞고 있고, 이에 적절히 대처하기 위해서는 외치 면에서 강한 추진력을 가진 국가지도자가 필요하다는 계산에서였습니다. 대신 내치의 경우 균형을 잡아줄 수 있는 유능한 테크노크라트를 임명하는 조건이었는데, 후종밍은 그런 지점들에 별로 개의치 않는 듯 했습니다.
이 대화는 주석 집무실을 직접 경호하던 국가보안위원회 산하 국가경위실 요원들의 귀에 들어갔고, 심지어 후종밍이 베이징 군구의 특작병력을 이동시켰다는 정보와 합쳐져 이상한 방향으로 시너지를 내게 되었습니다. 물론 정보당국의 총책임자인 류메이란 위원장의 경우 보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있었겠지만, 다른 이들은 마치 후종밍이 군대를 움직여 화궈펑을 협박해 최고지도자 자리를 얻어낸 것처럼 알게 된 것입니다. 당대회를 앞두고 당내에 불안한 기류가 감돌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습니다. 국가보안위원회가 이런 기류를 감지하고서도 방치했는지, 아니면 애초에 신경조차 쓰지 않았는 지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덩샤오핑, 천윈 등의 정계 원로들과 녜룽전 등 군 원로들이 이른바 '신 지도부'로 낙점된 이들을 비토하려는 마음을 굳히는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사실은 명백했죠.
8월 14일 오전 11시 정각 제13차 당대회의 개막과 함께, 국가보안위원회 주석(위원장) 류메이란은 덩샤오핑, 천윈, 양상쿤, 녜룽전, 리쑤거(제2포병부대 사령원), 장아이핑, 샤오징광, 류화칭 등의 인물들에게 "후종밍 총참모장에 의한 정변사태가 발생했다"며 국보위 관리 하의 안전가옥으로 대피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을 알아챈 후종밍은 11시 05분 베이징군구 사령원 쉬스위안 상장, 선양군구 사령원 양젠 상장에게 "즉시 베이징 시로 진군할 것"을 명령했죠. 인민대회당을 포위하려는 국가헌병대(구 무장공안) 병력이 15분 간의 총격전 끝에 국가경위실 병력에게 저지당하는 동안, 국보위의 끄나풀들이 이끄는 신원미상의 병력들은 총성을 듣고 여타 당원들처럼 급히 대피하던 왕팡 공안부장의 신변을 확보하고 CCTV 방송국을 점거했습니다. 물론, 그간 흩뿌려 놓은 국보위의 프락치들에게 명령을 활성화해 각지의 항명과 불복종을 유발하는 조치 역시 이루어졌습니다.
화궈펑 주석과 자오쯔양 총리가 핵전쟁 시 전쟁 지휘를 위해 건설된 지하벙커로 대피하고 나자, 수석부총리 천윈에게 군 통수권이 주어졌습니다. 천윈은 류메이란과 잠시 대화를 나누더니 "통수권의 행사를 위안차이나 부총리에게 대리한다"는 짧은 선언을 발표했습니다. 11시 56분, CCTV로 향한 위안차이나, 샤오나이, 류메이란, 그리고 천윈은 자신들을 "중화인민공화국 정통정부의 대리인"이라 지칭하며 후종밍의 "반란군"을 불신임할 것을 호소했습니다. 방송이 종료된 지 불과 15분 뒤인 12시 18분 후진핑 공군소령이 이끄는 전폭기 편대가 방송국 일대를 폭격해 건물을 잿더미로 만들었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아찔한 순간이었죠. 후종밍은 CCTV의 방송 송출에 대항해 각 성 정부와 각 군구 사령부에 "핵탄두와 미사일 사일로를 장악했으며 총 5발을 즉시 투발 가능하다"는 사실과 함께 "정당하게 후계로 선출된 국가주석의 권한을 부정한다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보게 해주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송신이 완료된 즉시 베이징으로 연결되는 모든 전기와 전신을 차단해버렸습니다. 물론 단파 라디오 등 전파를 사용하는 제한적 통신은 가능했지만, 사실상 베이징에서는 그 밖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통제 및 연락이 차단된 꼴이었습니다.
13시 45분, 뒤늦게 진입한 베이징군구의 본병력과 선양군구의 특수부대병력이 베이징 시내에 입성했습니다. 국가경위실 하의 199경위중대, 198경위중대, 202경위중대가 최대한 진입을 지연하려 했지만 기갑전력 및 항공전력까지 동원한 후종밍의 군대를 막을 방법은 전무했죠. 류메이란과 위안차이나, 샤오나이, 그리고 그들이 확보한 인사들을 포함한 "정통정부"는 안전가옥에 철저하게 은거하며 때를 기다렸습니다. 그들에게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각 성 정부가 베이징과의 연락두절이라는 초유의 사태에 나름 '이성적으로' 대처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각 지방끼리는 연락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들은 "무장한 반군세력에게만" 실탄을 사용한다는 최소한의 방침에 합의했고, CCTV에서 정통정부가 선동한 일반 인민들에게까지 무차별 살상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8월 14일 하루동안 지방 군구에서의 항명이 대규모로 발생해 각 성 정부들과 란저우, 지난, 광저우, 난징 군구가 정통정부의 편에 서기로 했다는 점은 상당히 고무적이었습니다.
다음날인 8월 15일 새벽 1시, 야음을 틈타 안전가옥에 있던 인사들은 탈출을 감행했습니다. 국가발전개혁평의회 소속 인사들과 톈진으로 따로 대피한 샤오나이가 그곳 방송국을 통해 재차 항전을 독려하는 동안 이들은 몇 그룹으로 나누어 피난민으로 위장해 타이위안으로 대피하는 데 성공했고, 베이징 군구 병력이 허난성 일대를 점령하는 동안 8월 18일 오후 5시 경 타이위안에 도착했습니다. 샤오나이 역시 톈진에서 배편으로 상하이를 거쳐 18일 오후 10시 경 철도로 타이위안에 도착했죠. 이틀동안 끊겨있던 정통정부 명의의 '선동방송'이 시안시에서 재송출되자, 화가 머리 끝까지 난 후종밍은 병력을 총동원해 남진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군 통수권 행사를 일임받은 위안차이나 역시 통일된 명령체계 없이 흩어져 있던 봉기군을 결집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군"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8월 19일 오후 2시 14분, 시안에서 흘러나온 방송은 전황을 다시 한번 뒤바꾸었습니다. 류메이란이 직접 마이크를 잡고 "1969년의 참상을 반복하지 말 것", "부패하고 부정한 지도자에게 속아 인생을 잃는 일을 반복하지 말 것" 등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는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며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전직 홍위병들과 학생운동세력, 그리고 지식인들의 머뭇거림을 끝내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들은 더 이상 속고 살고 싶지 않았던 것이죠. 물론 후대의 연구자들은 "마오쩌둥에게 속나, 류메이란에게 속나 다를 게 있느냐"며 비판적 태도를 보이기도 하지만, 지금은 중요하지 않은 문제였습니다. 베이징, 충칭, 청두, 쿤밍, 선양, 톈진, 하얼빈 등 후종밍의 반군이 장악한 대도시에서 평화시위가 벌어지자 일선의 사병 및 장교들은 어쩔 줄을 몰랐습니다. 후종밍에게 있어서도 "내전에서 승기를 잡기도 전에" 자신이 점거한 영역의 양민을 대량학살하는 것은 전혀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죠.
아주 가늘게나마 이어지던 후종밍의 인내심을 끝장낸 사건은 오후 10시 56분에 벌어졌습니다. 제자인 톈무친 합동참모위원회 정치공작부 주임과 함께 후종밍의 사령부에 있던 톰페티 라마가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산스크리트어로 라싸의 티베트 자치구 정부 연락담당자에게 "봉기"를 주문한 것입니다. 그가 "저 독재자를 당장 체포해!"라고 말했으나, 톈무친은 오히려 거부하고 톰페티를 구속했죠. 물론 이후에 밝혀진 바로는 스승 톰페티와 제자 톈무친이 사전에 연출한 장면이었다고 하지만, 이 사건은 안 그래도 어수선하던 후종밍 사령부의 분위기를 극한까지 떨어뜨려 놓는 일이었습니다.
분노한 후종밍 합동참모위원장, 아니, "중화인민공화국 군사혁명정부 주석"은 닝보 동쪽 80km 지점에 핵미사일 투발을 명령했습니다. 모든 이들이 귀를 의심했지만, 권총까지 꺼내들며 명령 이행을 재촉하는 후종밍의 지시를 거부할 수는 없었죠. 동중국해의 모 지점에서 핵탄두가 폭발하는 상황에 이르자 미국, 소련은 물론이고 한국, 대만, 동남아 국가들까지 경계태세를 최고단계까지 격상하며 유사사태에 매우 진지하게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지난까지 남하해 연락이 복구된 군사혁명정부 사령부에서는 즉시 각 성 정부와 지방군구에 재차 통첩을 전했습니다. 불복종 시 핵 폭격을 정말로 감행한다는 것이었죠. 이 초유의 사태는 정통정부에 충성하는 병력들을 상당히 동요시켰습니다. 이후 출간된 위안차이나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철도로 각지를 돌아다니며 "왜 후종밍이 핵무기를 정말로 쏠 수 없는 지"를 직접 설득해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상황이 여기까지 이르자 외국 정부들 역시 정통정부를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군사혁명정부를 지지하는 이들은 북한, 그리고 놀랍게도 중국의 혼란을 가속시키길 원하는 '미국' 뿐이었죠. 류메이란과 샤오나이가 모스크바에 연락해 로마노프 서기장과 연락, 소련의 간접적인 지지와 동구권 국가들의 지지를 얻어낸 것이 결정적이었습니다. 상황이 점점 후종밍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변의 시작으로부터 약 10일이 지난 8월 24일 오후 2시 허베이성 정부 및 베이징 행정청이 군사혁명정부를 불신임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고 베이징 시민들이 병력들을 몰아내면서 짧은 내전은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그 전인 22일부터 23일까지 중부지역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정통정부 군대가 승기를 잡은 결과물이었죠. 이어 24일 오후 5시에는 랴오닝성 정부마저 후종밍을 규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결국 후종밍과 그의 가솔들, 그리고 측근들은 소련 지도부의 마지막 안배로 8월 25일 새벽 3시 경 카모프 헬기를 탄 채 하바롭스크로 망명했습니다. 물론 잔존한 군사혁명정부 측 병력들의 무장을 해제하고 국가운영을 다시 정상궤도로 돌려놓는 데는 조금 더 오랜 기간이 걸리겠지만, 내전이 '일단' 끝난 것은 명확했습니다.
'중국의 가장 긴 일주일'은 그렇게 끝났습니다.
21. The New Order
"혁명을 길러내는 것은 사상과 동기이지만, 혁명가를 길러내는 것은 지혜이다. 이론과 학식이 뛰어난 이는 책을 몇 줄 더 읽을 수 있겠지만, 주위의 상황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과단하게 행동하는 혁명가는 그 책에 직접 이름을 남기게 될 것이다. 제군들은 오늘, 이 자리에서 역사가 될 것이다."
- 표트르 페트로비치 체호프, 1953년 몬카다 병영 습격을 앞두고.
"이상을 추종하는 것은 언제나 비용을 수반한다. 때로, 또는 대부분의 상황에서, 그 비용이란 자신이 혐오하던 인간군상들의 방법론을 사용하게 되는 경우를 일컫는다."
- 에마뉘엘 골드스타인, 「바르셀로나의 유대인」 中.
내전의 수습작업이 한창이던 10월, 국가보안위원회 주석 류메이란은 베이징 군구 병력과의 전투 이후 생존한 국가경위실 소속 병력들을 수습해 재편성했습니다. 화궈펑 국가주석, 자오쯔양 국무원 총리의 집무실은 '테러행위를 우려해' 경위실 병력의 24시간 '밀착경호'를 받았고, 이는 샤오나이 국가발전개혁평의회 의장과 위안차이나 국무원 부총리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죠. 그 뒤 곧바로 메이란은 자신의 정치적 스승 천윈을 찾아가 국가원수직에 오를 것을 '제안'했습니다. 물론, 단 한마디의 명령만으로 나머지 간부들은 모조리 체포당할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천윈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더 이상 당원동지들을 해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동의했습니다. 다만 후종밍의 군사혁명정부에 동조했던 장쩌민, 리펑 등 태자당의 정치인들, 뤄칭창, 류화칭 등 후종밍을 도왔던 정보부 또는 군 원로들, 그리고 모두에게 신임을 잃어 보호해줄 사람이 없던 덩샤오핑 등 노장파 정치인들은 체포 후 하방당했습니다. 그들이 언제 다시 빛을 볼 수 있을 지는 국보위의 자비심에 달려 있는 것이었죠.
제13차 당대회는 1988년 1월 17일에야 재개될 수 있었습니다. 내전 뒷처리 및 재건이 끝나는 1990년까지만 임시 주석직을 맡겠다는 천윈의 선언과 함께 상하이에서 개막된 이 당대회에서는 첫번째로 인사에 관한 안건이 다루어졌습니다. 거의 만장일치로, 다음과 같은 인선이 이루어졌죠.
국가주석 - 천윈
당 총서기 겸 정협주석 - 주룽지
전인대주석 - 후야오방
국무원 총리 - 샤오나이
국무원 수석부총리 겸 외교부장 - 위안차이나
합참위 위원장 - 톈무친
국무원 부총리 - 차오스
국가발전개혁평의회 의장 - 우방궈
국가보안위원회 위원장 - 류메이란
국방부장 - 후치리
당 서기국장 - 쩡칭훙
빠르게 공석들을 채운 뒤 이어진 안건은 소수민족의 자치에 관한 안건이었습니다. 복권되어 전인대 주석에까지 임명된 후야오방이 밭은기침을 하면서도 꿋꿋하게 각 성정부의 자치안을 주장했고, 톈무친은 이를 그대로 받아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전면적인 자치권"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물론 류메이란의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그녀의 입장에서 통화체계, 사법, 교육 면에서의 자치를 허용한다는 것은 신장 자치구에서 메이란이 직접 고생하며 잡았던 이슬람 극단주의와 샤리아법을 다시 배양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었죠. 팽팽하게 대립하던 두 사람을 보고 천윈은 깊은 한숨을 쉬더니, 발언했습니다.
"지치지도 않소? 외교, 국방, 통화는 중앙 관할, 그리고 교육과 사법은 준자치로 하시오!"
천윈의 방침에 따라 주룽지 총서기는 중재안을 내놓았습니다. 사법의 경우 최고헌법재판원을 설치해 자치구에서 제정한 법률 또는 조례의 위헌성을 상시로 심사하게 하고, 자치구법원의 제2심 판결에 대해 중앙의 최고인민검찰원이 즉시항고할 수 있게 하는 등 일정한 제약이 따랐고, 교육의 경우에는 국무원 교육부의 핵심방침을 어기지 않는 선에서 자율이 허용되었습니다. 물론 소수민족의 언어는 자유롭게 가르칠 수 있었죠. 톈무친은 금방이라도 다시 내전을 일으키려는 듯 우거지상을 쓰며 얼굴을 붉혀댔지만, 합의안의 내용을 보고는 의외로 흔쾌히 찬성의 뜻을 전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재건비용의 확충에 대한 안건을 진행하던 도중,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지린성 연변자치구를 재확보하던 제22집단군 소속 병력들이 은신처에 숨어있던 김평일을 발견한 것입니다. 동시에, 해외정보국이 품고 있던 의문도 단숨에 해결되었죠. 김평일을 후계로 세우고 안정되는 줄 알았던 북한은 김일성의 마지막 발악에 직면했던 것입니다. 김일성, 김영주, 김경숙 등의 소위 '백두혈통'들과 오진우, 오극렬 등의 고위장성들은 김평일이 중국에 지나치게 의존하며 국가의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몹시 불편해했고, 중국이 내전에 빠져 주변 신경을 쓰지 못하는 동안 김평일을 가택연금해버린 것입니다. 문제는, 그 연금당했다던 김평일이 누군가의 협조를 받아 탈출했다는 점이었죠.
당대회는 나머지 안건들을 빠르게 처리한 뒤 폐회되었고, 정치국원들 및 정보-군 당국의 실무자들이 대회의실에 따로 모여 한반도(그리고 대만)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했습니다. 천윈 주석은 북한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까내렸고, 이는 류메이란과 위안차이나, 샤오나이 역시 동의하는 바였습니다. 이들은 이내 대한민국, 즉 남한의 정부와 접촉하는 안을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죠. 1989년 2월 2일, 위안차이나 수석부총리가 한국의 김영삼 대통령을 접견했을 때, 한국 측에서는 '빅 딜', 그것도 '초대형 빅 딜'을 이미 준비해놓고 있었습니다. 주한미군의 철수 따위는 이미 오키나와에서까지 미군이 철수하는 마당에 더 이상 논의주제가 될 수 없었기에, 김영삼은 "한미상호방위조약을 폐지하고 중국과 같은 내용의 조약을 맺을테니 핵무기 개발을 외교적으로 지원해 달라"는 대담한 제안을 날렸습니다. 이 제안을 타전받은 베이징은 매우 놀랐지만, 이내 냉철하게 생각해보고는 크게 나쁘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습니다. 일본의 핵개발이야 적국조항을 이용해 날릴 수 있고, 동남아의 경우에는 그럴 기술력과 경제력이 못 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기 때문이었죠. 핵 도미노의 위험이 적은 상황에서, 한국과의 밀약이 타결됐습니다.
2월 10일, 중국에서의 급변사태 발발 시부터 소집되어 있던 300만명의 예비군을 포함한 350만명의 한국군 병력이 선제 북침을 개시했습니다. 북부전구(구 선양군구)의 45만 병력 역시 압록강을 도하해 평양으로 진격하기 시작했죠. 최소 2-3개월이 소요될 것이라 생각되던 작전이었지만, 놀랍게도 상황은 13일만에 마무리되었습니다. 김일성은 상하이를 방문하는 와중에 체포, 김영주는 내심 김평일을 지지하던 친중파 장교들의 손에 체포되어 즉결 사살, 김경희는 배편을 통해 망명을 시도하다 한국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오진우와 오극렬은 한국군의 포격에 맞고 사망해 시체도 찾지 못했습니다. 결국 2월 24일 강성산을 대통령으로, 연형묵을 총리로 하는 자유조선 임시정부가 세워졌습니다. 짐바브웨로 보내졌던 김일성은 한국 안기부가 다시 데려와 군사재판 후 5월께 사형을 집행했죠. 한반도는 1991년까지의 통일준비기간을 거친 뒤 단계별 통합을 진행할 예정이었습니다.
미국이 내전에 준하는 내부혼란을 겪는 와중에, 대만 문제가 마지막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습니다.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브루나이는 더 이상 미국을 신뢰할 수 없다는 판단에 CEPO 가입을 3개월 전부터 타전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이 내전 종결 후 이 제안을 받아들이자, 대만은 그야말로 사면초가 상태에 빠졌죠. 사실상 은퇴 상태였던 톰페티는 천윈의 요청으로 샤오나이 총리 등과 함께 타이페이로 건너갔습니다. 제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타이완 섬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나 타이완 현지의 치권을 존중하며, 외교와 국방을 제외한 모든 면에서의 자치를 보장한다. 국민당 혁명위원회를 해산하고 대륙 내 국민당의 활동을 허가(물론 실제로는 인적 구성을 혁명위원회가 주도)하며, 타이완의 정식 명칭은 '타이완 특별자치구'로 한다." 장징궈 총통은 이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롄잔을 행정수상으로 한 특별자치구 정부가 수립되었고, 국민당은 40년만에 대륙에서의 활동을 인정받았습니다.
중국은 다시금 하나가 되었고, 다시는 분리되거나 찢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2. Epilogue.
"유라시아 대륙으로의 과팽창이야말로 미합중국의 자유로운 국가정신과 시장질서를 왜곡시킨 주범입니다, 친애하는 조셉 바이든 의원님. 그간 국민의 자유의지를 왜곡하고 불법감청행위를 자행해왔던 연방수사국(FBI)의 해체조치 역시 미국을 다시금 진정한 자유의 나라로 재편하는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연방준비제도이사회가 기축통화의 독점적 주조차익을 행사해 국민의 경제적 주권을 앗아가는 잘못된 관행 역시 시정되어야 할 것입니다.
(중략)
라틴아메리카의 공산주의 정권을 상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문제에 관한 질문은 더 이상 받지 않겠습니다. 연준 및 FBI의 폐지, 그리고 NATO 통합군 탈퇴에 관한 안건 역시 이미 종결된 안건입니다. 아, 아, 이보시오! 내가 대통령이오!"
- 미국 제41대 대통령 론 폴, 1990년 연두교서 발표 中.
"본인은 후종밍의 망명을 직접 주선한 바 없으며, 그는 '자력으로' 소비에트 연방의 영토에 보호를 청했습니다. 일전에 중국과의 외교적 협력과정에서 몇 차례 만난 적은 있으나 본인은 그와의 어떤 개인적이거나 공적인 연결도 전면 부정하는 바입니다."
- 그리고리 로마노프 소련 서기장, 1994년.
"나는 미합중국의 제42대 대통령으로서 헌법을 준수하고 전미 산별경영인총회의 결정을 존중하며 시장질서의 유지와 사회 안녕의 수호를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합니다. 쿠바, 니카라과,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임시군정청의 정상화의 경우 참여중인 기업들의 경영사정을 고려하여 빠른 시일 내에 검토할 것을 국민 여러분께 약속드리며... 브라질에서의 대규모 실종사태에 미합중국 정부는 그 어떠한 것도 관여하지 않았음을 재확인합니다. 아울러 워싱턴, 오리건, 일리노이, 웨스트 버지니아, 미주리, 플로리다의 이상 6개 주의 대표들에게 전합니다. 연방에 복귀하십시오. 저는 테네시에서 일어났던 참상이 여러분의 고향에까지 재현되는 것을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간곡하게 부탁드리니, 서민 반란에 동참하지 말아주십시오. 신께서 미국을 보우하시길."
- 미국 제42대 대통령 빌 클린턴, 1997년 1월.
"나의 배후에는 전 세계의 인민들이 있소. 오늘도 제 부모가 집에 돌아오기만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전 세계의 아이들이 있소. 하루하루 노동의 즐거움을 맛보며 살아가는 평범한 60억 인구가 있소. 나는 당신들이 그들 중 단 한 사람이라도 해치게 둘 바에는 내 목숨으로써 전력으로 그러한 시도를 방해하려고 하오."
- 톰페티 라마 국제평화주의자연합(IPU) 총재, 2000년 7월 1일 크레믈린에서.
"빅토르 튤킨 내무장관, 드미트리 야조프 국방장관, 니나 안드레예바 모스크바 제1서기,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최고회의 부주석,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공산당 총서기, 후종밍 국가자문위원회 총서기 이하 31인의 국가비상사태위원회는 로마노프 총서기의 급작스러운 유고상태에 따른 혼란을 진압하기 위해 19일 0시 1분을 기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에 명시된 인민의 권리를 한시적으로 제한하는 바입니다. 인민 여러분들은 위원회의 지침에 따르며 생업에 종사해주시기를 바라며, 치안의 원활한 확보를 위해 '비정규적인' 병력 역시 동원될 수 있음을 미리 공고합니다."
- 모스크바, 2001년 3월 19일.
"국가보안위원회는 그 어떤 기관의 감시도 받지 않습니다. 국무위원 급 기관인 그들은 국무원 소속인 국가발전개혁평의회보다 권한이 적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국무원의 모든 부문들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본인은 국무원 총리로서 인민의 복리를 위해 노력하겠지만, 이러한 제도적 미비에 크나큰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 린시링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총리, 2005년 10월 27일.
"세계는 번영하는 유라시아와 몰락하는 아메리카라는 두 조각으로 분할되었다."
- 유발 하라리, 「두 개의 세계」 中, 2008년 저.
"1997년 7월 3일,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위안차이나 주석 동지!"
- 겐나디 주가노프 서기장, 2009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중소정상회담에서.
"저는 인류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세계인민의 우애와 단결을 여전히 믿는 사람으로서, 뉴욕 월 스트리트에서 발생한 사린가스 테러의 피해자 8,652명에게 깊은 애도를 표합니다. 사이버 공간을 기반으로 한 무정부주의를 신념으로 삼는 전세계의 해커 조직에게 전합니다. 당신들은 복수에 눈이 멀어 무고한 노인, 여성, 아이들을 수천명이나 살상했습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시길 바라겠습니다."
- 샤오나이 국가주석, 2012년 12월 월가 테러 추모연설.
"공공장소에서의 QR코드 스캔은 인민을 통제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몇 번 말씀드려야 억측을 그만두시겠습니까?"
- 류메이란 국가보안위원회 주석, 2015년 9월 9일.
"그레이트브리튼 및 북아일랜드 연합왕국은 오늘, 2016년 9월 30일 정오를 기해 해체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저의 충직한 4개의 내각은 자신이 맡은 국민들을 위해 변함없이 봉사해주시길 바라며, 새로운 '브리튼 국가연합(Commonwealth of Britain)'의 군주로서 연합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 엘리자베스 2세, 연합왕국의 해체 및 브리튼 국가연합의 출범을 기념하며.
"스페인 왕국은 오늘부로 공식적으로 유럽연합 회원국 자격을 반납했음을 선언합니다. 폴란드,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의 인민들을 위해 억지로 '동지애'를 발휘해야 했던 불공평하고도 비합리적인 처사를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될 스페인 인민 여러분에게 축하의 말씀을 전합니다. 포르투갈, 이탈리아, 그리고 몰타와 함께 창설하게 될 '지중해 협력기구(MCC)'는 중화인민공화국과의 포괄적 무역협력조약을 선제 체결할 것입니다."
- 파블로 이글레시아스 포데모스(Podemos) 당수 및 스페인 총리, 2017년 10월 16일.
"우리, 유라시아의 두 선도국은 더 이상 아메리카에서 벌어지고 있는 문제에 대해 무지를 핑계로 방관하지 않겠음을 선언합니다. 다가오는 시대는 기후변화, 빈곤, 테러리즘, 양극화, 보건위기, 극단주의 등의 새로운 위협에 대처해야 할 시대가 될 것이며,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을 위해서는 전 세계의 단결이 필요합니다. 특히 사이버 무정부주의를 표방하는 해킹 테러집단들에 대한 공동전선을 천명하고, 라틴아메리카의 자생적 행정조직에 대한 대규모 원조가 실행될 것을 이 자리에서 선언합니다. 또한 우한시에서 발원해 유라시아 지역에서 약 570만 명을 감염시키고 아메리카 지역에서는 추정 1억 4,600만명을 감염 - 787만명 사망 - 시켜 아직도 그곳 인민들에게 고통을 주는 급성호흡기전염성증후군-19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대규모 백신 공여를 진행하겠음을 밝힙니다.
- 파벨 그루지닌 서기장과 리커창 국가주석, 2021년 7월 31일.
마치 핵무기의 화염으로 서로를 불태워버릴 듯하던 세계 정세는 안정을 찾았습니다. 물론 유라시아 대륙만의 일이었지만 말입니다. 중국은 총생산 세계 1위, 기술력지수 세계 1위, 혁신지수 세계 1위의 초강대국으로 자리잡아 2위 소련의 추격을 따돌리고 있습니다. 전국인민대표자회의, 즉 전인대의 의원들 역시 직선으로 선출하는 민주주의 국가이기도 하죠. 물론 13억 인민의 동선을 국가가 모두 파악하며 '범죄의 예방'에 요긴하게 쓰고 있긴 하지만, 자유를 얻기 위한 대가는 무거운 법이니까요. 사회신용점수제도 역시 몇 해 전부터 절찬리에 시행되어 역시 인민들의 선량한 품성을 이끌어내는 데 톡톡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몇몇 크립토-아나키스트에 경도된 테러리스트들은 다른 소리를 하긴 하지만, 자유와 방종은 엄연히 다른 것 아닐까요? 미국이 어떻게 되었는지, 그들은 정말 모르는 걸까요?
아무튼, 우리는 마오쩌둥 주석이 사망한 이후 화궈펑 주석의 집권기를 거쳐 신중국이 21세기의 패권국으로 웅비하는 과정을 지켜봤습니다. 우리는 그 누구보다 순수한 혁명의 열정을 지니고 있었고, 그 누구보다 근면하게 노력해왔습니다. 피땀어린 노력의 뒤에는 자유와 민주주의, 번영의 단맛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미래는, 그 무엇보다 밝을 것입니다!
그렇겠지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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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좀 더 하고 싶었는데 아십네요. 일단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 그런데 마지막의 "그렇겠지요?"를 볼드체로 표시하고 빨간색으로 해놓았으면 더 좋았을텐데.
반영했습니다. 임팩트있고 좋네요. ㅋㅋ
수고많이 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니 체호프랑 우스트랼로프 까메오로 또 보이네요 ㅋㅋㅋㅋㅋ 확실히 소확행보다는 뭔가 뒷맛이 애매모호한 엔딩..
역시 친위쿠데타 엔딩을 냈어야..(?)
아무래도 질서지향-혼돈지향 캐릭터가 반반씩 있다보니 한쪽이 확 쓸어버리는 전개 아니면 좀 애매모호하게 되긴 하네요. 이렇게 된 거… 차기작은 광기 일직선으로 타야겠습니다(?) 아님 내독나없처럼 민주주의뽕 일직선..?
진짜 국민생디칼리즘 공세평의회 가야하나???
그럴바엔 차라리 제3제국을...
나치도 좋죠. ㅋㅋ
저 진짜 제3제국을 하고싶은데... 안될까요?
'인종주의 옹호 캐릭터 불가' 만 조건으로 달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대공황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배경으로, 인종주의 옹호 불가 조건 달고 하면 괜찮긴 하겠네요. 마오주의까지는 괜찮은데 주체사상이랑 인종주의는…;;
예? 나치즘은 주체사상의 일ㅈ...(이미 끌려간 작성자입니다.)
보수혁명론 같은건 인종주의 없는 나치즘/주체사상이라 소련이나 중국보다 막장은 훨씬 심할걸요 ㅋㅋ 카를 슈미트를 떠올려보시면..(반유대주의자이긴 하지만)
확 쓸어버리는 전개에 대해 말이 나왔으니 소설로 쓸까 고민하던걸 결국 공개하자면, 중간에 북경지하성을 통해 탈출할때 처음에 '모두가 같이 탈출합니다'라고 바로 적지 않은 이유는 위안차이나를 제거(.......)하고 탈출할지를 고민해서 그랬습니다.
근데 그러면 아무리 그래도 너무한 것 같아서(...) 다 데리고 왔지만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파시스트든 스페인 팔랑헤든 각자 캐릭터들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목표가 있겠고, 때로는 서로 투쟁하면서 자신의 이념을 새 국가에 최대한 많이 반영하려고 하는 게 컨텐츠의 정체성이 될 것 같네요. 히틀러가 룀 숙청때리고 프랑코가 에디야 제거했던 것처럼… ㅋㅋ
근데 뭐 그런것보다도 인간이 신봉해왔던 모든 보편가치가 무너지고 각종 극단적 상상력이 판치는 전간기라는 시대 자체에 매력을 느끼기도 합니다. ㅋㅋ
+ ㅗㅜㅑ…
경위실의 목적도 지도부의 보호가 아니라 유사시 체포(.....)였고, 보안위원회의 창설도 후종밍이 안해도 제가 쿠데타(.......)일으키려는 목적이었습니다.. ㅋㅋ
미리 말씀드리자면 또 열리면 비슷한 상황에선 이번엔 쏠(...) 생각입니다!
엌ㅋㅋㅋㅋㅋㅋㅋ
흐음… 차기작이라… 사실 깽판이 재밌긴 한데 진행난이도가 펄쩍 뛴다는 점이 있죠. ㅋㅋㅋㅋㅋ
뮌헨 폭동에서 히틀러, 괴링 등 나치 수뇌부들이 총맞고 비명횡사한 세계관 정도를 생각중입니다. 아직 밑그림 정도지만… ㅋㅋ
스타팅은 대공황 직후가 될 것 같고요. ㅋㅋ
히틀러와 괴링이 죽어도.. 구사회민주당(ASPD) 소속 파울 요제프 괴벨스(...)가 나온다던지 하는게 가능하죠..
네 그래서 새로운 파시즘 사상을 DIY로 만들어서 괴벨스같은 인재(?)들을 스카웃하는..? ㅋㅋ
과연 독일내 극우를 싹 장악한 민족운동을 이길 수 있을지..?
수고하셨습니다. 마지막의 빨간 글씨... 섬찟하네요. 어후야...
분명 민주화됐다는데 공산당만 뽑힌다? 그럼 필시 뭔가 있는거죠.. ㅎㅎ
ㅎㅎㅎ... 그렇죠.
+ 류메이란 외전이 있어서 위안차이나 외전도 결국 쓰고 있는데, 참고 자료가 두개라 역시 문체가 닮을수밖에 없네요 ㅋㅋㅋ... 이럼 마이너 카피인데...
+ 저 빨간 글씨 보고 짤 하나가 생각 나더라구요. 뒤에서 누가 지켜보면서 앞에 사람이 좋은 말을 땀 흘리면서 하는...
저도 써봤는데 넣고싶은걸 다 넣다보니 약간 뇌절기가... 올려도 될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팬픽(??)은 문체 같은거 따지는거 아닙니다 ㅋㅋㅋ
ㅋㅋ 그렇긴 합니다. 근데 잘못하면 결말까지 같을 지경이라서 걱정 ㅋㅋㅋ...
팬픽은 농도랑 뇌절 신경 쓰는거 아임다. 그거는 메인이 신경 쓰는거...
비슷하면 캐릭터들의 서로 다른 운명이 강조되니 또 좋을수도..
ㅗㅜㅑ 체호프 우스트랼로프..;
내용이 확실히 스무스하게 연결되네요 ㄷㄷ 이렇게 메이란 위안차이나 엔딩이라니 ㄷㄷ...
대화로 끝내니 생각보다 비어있는 부분이 많아서 많은 생각이 드네요. 이것도 괜찮은것 같습니다. 참여는 못했지만 잘 봤습니다 ㅋㅋ 흑흑 표트르 한마디로 만족합니다 ㅜㅜ(...)
쿠바 혁명의 영웅 표트르…! 감사합니다 ㅋㅋㅋ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