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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영선생문집(濯纓先生文集)
제3권(卷之 三)
기(記)
9. 조현당기(釣賢堂記)
참고 : 탁영연보
辛亥寒暄來訪約觀伽倻山
<1490년 4월> 신해일(29일) : 한훤(寒喧)이 내방하여 가야산 관광을 약속하다.
寒暄金大猷號名宏弼隱居好學與先生爲道義交居於玄風聞先生之還來訪因約遊伽倻
한훤당(寒喧堂)은 김대유(金大猷)의 호이고 이름은 굉필(宏弼)인데, 은거하면서 학문을 즐겨했다. 선생과는 도의(道義)의 교유(交遊)를 하는 사이인데, 현풍(玄風)에 살면서 선생이 귀향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내방하여 가야산 유람을 약속한 것이다.
丙子如冶城偕寒暄遊伽倻因留講學于釣賢堂
<1490년 5월> 병자일(25일) : 한훤과 함께 야성(冶城)에 가서 가야산을 유람하고 조현당(釣賢堂)에 머물면서 강학하다.
方太和宋懼甫李浩源安時叔河應期亦來遊遂與共住講春秋有講說將下山老僧螺和尙隱於浮屠者也作堂記以掲之{記見文集三卷}
방태화, 송구보, 이호원, 안시숙, 하응기 등도 와서 같이 놀았다. 그리고 함께 머물면서 춘추에 대한 강을 했으며 나중에 하산하여 부도(浮屠)에 은거 중인 노승 라화상(螺和尙)의 강설도 있었다. 선생은 당기(堂記)를 지어 게시하였다. (문집 3권 참조)
余自髫齔 性癖林泉 壯遊嶺南 常念崔文昌至自唐 失意羅季 其所探佳山好水 不一其所 而其終也乃伽倻山 則斯山也必有奇勝絶倫 而仙逸者留焉
나는 어릴 때부터(머리를 올리고 이빨을 간 때부터) 지나치리만큼 산천(林泉)을 좋아하였지만, 장년이 되어서야 영남 지역을 유람할 수 있었다. 신라 말기의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실의에 빠져 산 좋고 물 좋은 곳을 찾아다닌 곳이 한두 곳이 아니었지만 그가 죽은 곳이 가야산이었던 것을 보면, 이 산에는 필시 비할 데 없는 절경이 있어서 저러한 신선(仙逸)같은 분이 머물렀을 것이라고 늘 생각해왔다.
文昌百歲之後 亦必有高人道士 棲遲偃仰於其中 而或泯其名焉 欲一遊而問其人 蓋世網繫人 役役塵埃 辜負所願者 已綿歲月
최 문창이 떠난 뒤에도 어쩌면 지금까지 고인(高人)과 도사(道士)가 그 산중에 은거하며 혹 그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한번 유람 가서 그런 사람을 물어보려 하였으나 세상일이 사람을 얽매니, 풍진 속에서 허덕이다가 소원을 저버리고 세월만 보냈다.
今年春 金大猷自冶城訪我於鰲山 約觀伽倻 居數月 理兩屐 尋大猷策笻 而俱李秀才洄 從橋渡武陵洞入紅流 過致遠臺 抵海印寺
금년(1490년) 봄에 김대유(金大猷)[1]가 야성(冶城)[2]에서 오산(청도의 옛 지명)으로 나를 찾아와서 가야산 관광을 약속하였다. 몇 달이 지난 뒤 행장을 갖추고 대유를 찾아 길을 나섰다. 수재(秀才) 이회(李洄)와 함께 다리를 따라 무릉동(武陵洞)을 건너서 홍류동(紅流洞)에 들어가고, 치원대(致遠臺)를 지나서 해인사(海印寺)에 도착하였다.
[1]김대유(金大猷); 김굉필(金宏弼, 1454년~1504년)은 조선 전기의 문인, 교육자, 성리학자로 호(號)는 한훤당(寒暄堂)·사옹(蓑翁), 또는 한훤(寒暄)이며 자는 대유(大猷),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로 김일손, 김전, 남곤, 정여창 등과 동문이었다.
[2]야성(冶城) ; 지금의 합천군 야로면 구정동(陜川郡冶爐面九汀洞) 부근으로 전해진다.
時祖法師 方新寺宇 問文昌讀書堂 則莫知其所 祖法師遇之厚 而呼邪喧鬧 不可少留 轉而行數里 山益峻而洞壑益盤 嘗於搢紳間 聞有明名長老者 鑿池築室於山巓而自老焉 明解吟詩 喜吹螺 佔畢公每稱螺和尙
그 때 조법사(祖法師)가 마침 절집을 새로 짓고 있어서, 최 문창이 글을 읽던 서당을 물었으나 그곳을 알지 못하였다. 조법사는 우리를 후하게 대접하면서도 집 짓는 데 일꾼들을 불러 시키느라 분주해서 잠시도 머무를 수가 없었다. 돌아서 몇 리를 올라가자, 산은 더욱 높고 계곡은 더욱 굽었다. 일찍이 관료들 사이에서 들으니, 명(明)이라는 이름을 가진 장로(長老)가 산꼭대기에다 못을 파고 집을 지어 살며 늙어 간다고 하였는데, 명(明)은 시를 잘 읊고 소라 불기를 좋아하여 점필공(佔畢公)이 매번 나 화상(螺和尙)이라고 불렀다.
是日縈回石逕 望見嵐翠中 梵舍隱暎 促步而上 舍下有池 榜曰得劒池 池中有小嶼 雜植松菊梅竹九節菖蒲 池面荷葉田田亂 池有略彴 偶人引小舠 長帆垂綸 隨風出沒於略彴之下 繞舍蘿生緣壁莖之萼者 恰恰鑽入窓罅 余於是 植杖顧眄 俄一老僧 自其舍出
이날 돌길을 돌고 돌아 바라보니 푸른 산 기운 가운데 절집이 보일락 말락 하기에 걸음을 재촉하여 올라갔다. 집 아래에 못이 있고 득검지(得劒池)라는 푯말이 붙어 이었다. 못 가운데 작은 섬이 있는데 송(松), 국(菊), 매(梅), 죽(竹), 구절초, 창포(菖蒲)가 섞여서 자라고 있고, 물 위에는 연잎이 나풀나풀 어지럽고, 못에는 외나무다리가 놓여있었다. 두 사람이 작은 배를 끌고 있는데, 돛을 펴고 낚싯줄을 드리우고 바람을 따라 외나무다리 밑을 드나들었다. 집을 둘러싼 담쟁이 넝쿨이 살아서 벽을 타고 올라온 줄기가 창틈으로 뻗어 들었다. 내가 지팡이를 세운 채 둘러보고 있는데 이윽고 한 노승(老僧)이 그 집에서 나왔다.
余率爾問螺和尙者安在 僧瞪目不答 徑引余入 而左扁曰蘿月軒 右扁曰釣賢堂 壁掛尺一古劒 乃老螺初鑿池時 所得於泉中者 土蝕千年 甚異物也 坐倚軒窓 遙遙數百里之外 頭流積翠 擧眼斯得 此又一奇
내가 선뜻 나 화상이 어디 있느냐고 묻자, 노승은 멀뚱멀뚱 쳐다보며 대답은 하지 않고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왼쪽 현판에는 나월헌(蘿月軒)이라 써있고, 오른쪽 현판에는 조현당(釣賢堂)이라 써있다. 벽에는 한 자쯤 되는 옛 칼(古劍)이 걸려 있는데, 이는 늙은 나 화상이 처음 못을 팔 때 못 가운데서 얻은 것으로 천년동안 흙 속에 묻혀있던 매우 특이한 물건이었다. 창가에 기대어 앉아 눈을 들어 저 멀리 수백 리 밖 두류산(頭流山;지리산)의 푸른빛을 볼 수 있으니 이 또한 기이한 광경이었다.
未幾 大猷繼至 僧問大猷 始知余之姓名 抵掌進曰 老僧住此 足不出山扁 而耳熟君久矣 相親一笑 余戲曰 余效程先生之訪董五經 爾不知我 不及董遠矣
얼마 후에 대유(大猷)가 이어서 이르자, 스님이 대우에게 물어 비로소 내 성명을 알고 합장하며 다가와 말하기를 “노승이 이곳에 살면서 산문을 나가지는 않았으나 당신을 익히 들어온 지가 오래되었습니다.” 하면서 서로 쳐다보고 웃었다. 내가 농담으로 말하기를 “나는 송나라 정자(程子) 선생이 동오경(董五經)을 방문한 것을 본받고자 했는데[1], 그대가 나를 알아보지 못하니 <그대는> 동오경보다 한참 못 미치네.”하였다.
[1]余效程先生之訪董五經 ; 이 글은 二程全書卷之三十九, 外書第十二, 傳聞雜記편에 실려있는 것으로서, 숭산 앞에 동오경이라는 이름난 은자가 살았는데, 이천(程頤)이 그의 명성을 듣고 그를 만나보고자 갔으나 만나지 못하고 돌아오는 도중에 한 노인이 다과를 짊어지고 돌아가는 것을 보았는데, 노인이 이천을 알아보고 “당신은 정선생이 아닙니까?”하고 “선생이 나를 방문하고자 하는 소문이 아주 크게 나서 특별히 성내에 들어가 약간의 다과를 준비하고 장차 당신을 기다렸습니다.” 하였다는 내용이다. 즉 한번도 만나 본적은 없지만 명성을 듣고 그 사람인 줄 알아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因周覽壁上 有四佳徐相國居正 波澄金先生孟性 高陽兪先生好仁 新昌表先生沿沫 嵩善金君宗裕所題詩板 皆當世之賢 善鳴國家之盛 而振大雅高風者也 其中吾佔畢公詩筒往復於螺者居多 尤可喜也
벽 위를 둘러보니 사가(四佳) 서거정(徐居正) 정승과 파징(波澄) 김맹성(金孟性)선생과 고양(高陽) 유호인(兪好仁) 선생과 신창(新昌) 표연말(表沿沫) 선생과 숭선(崇善) 김종유(金宗裕) 군이 지은 시판(詩板)이 걸려있는데, 모두 당대의 어진 이들로 국가의 성대함을 잘 묘사함으로써 큰 선비의 풍격을 진작시킨 분들이었다. 그중에 우리 점필공(佔畢公)이 나 화상과 주고받은 시가 가장 많아 더욱 기뻤다.
翌日 方太和 宋懼甫 李浩源來 又翌日 安時叔 河應期來 吾告大猷曰 不復探其奇勝者 而僦住月餘矣 活水方塘 有源不竭 物來鏡面 姸媸輒形 月小半輪 風微少女 杜宇一聲 山川皆寂 雨後白雲 無心出峀 翛然悠然 螺其有得於斯乎
그 다음날, 방태화(方太和), 송구보(宋懼甫), 이호원(李浩源)이 오고 또 그 다음날에는 안시숙(安時叔), 하응기(河應期)가 왔다. 내가 대유에게 말하기를 “다시 이 좋은 경치를 찾아올 수 없을 것이니, 온 김에 방을 세내어 한 달쯤 머물기로 하세.”하였다. 네모난 못에 활수(活水)는 근원(根源)이 있어 마르지 않고, 사물이 수면(水面)에 다가오면 곱거나 미운 형태가 그대로 비친다. 달은 작아져 반달이 되었고 바람은 가녀린 소녀와 같았다. 두견새 우는 소리에 온 산천이 적막하며, 비 온 뒤라 흰 구름이 무심히 산굴에서 솟는 등, 조용하고 한가로우니 나 화상은 이 때문에 여기에 사는가 싶었다.
人間畏暑 消金爍石 而堂之上 披裘覺寒 不知六月 此山中之人別造化也 便有脫塵屣而永夕之意 螺嘗自作蘿月獨樂歌 皆玩世自放於物外之辭也 月夕 螺發歌 激響振巖 繼之以舞 髡頭闊袖 婆娑桂影 螺眞豪僧也 遂結方外之契
저 아래 인간 세상에는 쇠와 돌도 녹일 혹독한 더위가 두려운데 이 당(堂)에서는 갖옷을 입고도 추울 정도여서 6월인 줄을 모르겠으니, 이곳 산중의 사람들만이 느끼는 각별한 조화인 것이다. 문뜩 티끌 묻은 신발을 벗어버리고 밤을 지새울 마음이 생겼다. 나 화상은 일찍이 <나월독락가(蘿月獨樂歌)>를 지었는데, 모두 세상일을 경시하고 스스로 물욕에서 벗어나(物外) 자유롭게 사는 내용이었다. 달밤에 나 화상이 노래를 부르자 그 격렬한 소리가 바위를 진동시켰고, 이어서 춤을 추자 깎은 머리에 넓은 소맷자락이 달빛에 너울거렸다. 나 화상은 참으로 호탕한 승려였다. 나는 드디어 그와 방외(方外;속세를 떠난 곳)의 친교를 맺었다.
一日將下山 索所以留者而請記焉 余復曰 螺乎 有此池有此軒 洗耳濯足 蒙蘿把月 可以獨樂而不與世接 又贅之以釣賢 何
어느 날 하산하려 하는데, 그가 산중에 남길 기문(記文)을 나에게 청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나 화상이여, 이 못이 있고 이 집이 있어서 귀를 씻고 발을 씻을 수 있으며, 다래 넝쿨로 지붕을 덮고 달을 잡으며 홀로 즐길 수 있어서 세상과 더불어 접촉하지 않는데, 군더더기 말로 또 ‘현인을 낚겠다〔釣賢〕’고 한 것은 무슨 뜻인가?”하였다.
螺曰 所謂賢 非今之賢 乃古之賢 非紫陌馳名之賢 乃靑雲慕道之賢 遠而言之 則虎溪三笑 陶元亮與焉 元亮非晉日之賢乎 近而言之 則海印三寺 崔孤雲從焉 孤雲非羅代之賢乎 所謂賢 非今世之所謂賢者 獨樂三十年 悵世無元亮 孤雲者 則吾之樂 永獨於窮山之中 無與共之也 今日幸使諸子來住 卽吾黨之一大遇也 諸子何嗇一記名乎
나화상이 말하기를, “이른바 현인이란 지금의 현인이 아니라 곧 옛날의 현인이요, 도성 거리에 이름을 떨치려고 날뛰는 현인이 아니라 곧 청운(靑雲)의 뜻을 품고 도(道)를 사모하는 현인이오. 먼 사례를 들면 호계(虎溪)에서 세 번 웃었다는 도연명(陶淵明)이 있는데 도연명은 진(晉)나라 때의 현인이 아닌가요. 가까운 사례를 들면 해인삼사(海印三寺)에 최고운(崔孤雲)이 있는데, 고운은 신라 시대의 현인이 아닌가요. 내가 말하는 현인은 지금 세상에서 말하는 현자가 아니오. 홀로 즐긴 지 30년 동안 세상에 도연명과 최고운 같은 사람이 없음을 슬퍼하고 있으니, 나의 즐거움이란 깊은 산 속에서 영원히 홀로 즐길 뿐 함께 지낼 사람이 없었소. 오늘날 다행히 여러 선비가 다녀가게 된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영광스러운 만남이오. 그런데 그대들은 어찌 기문 하나 써 주는 것에 인색하시오?”하였다.
余歎咤久之曰 螺旣以此堂釣得君子之詩 以爲山中之華 而又欲以此堂釣余之記 螺之於文雅 篤矣 然必欲稱釣賢之實 則有能遊心千古 獨行嘉遯山林者而後 可也 其間必有不只爲陶爲崔而已
내가 한참 탄식하고 말하기를 “나 화상은 이미 이 당(堂)에다가 군자들의 시(詩)를 낚아 얻어서 산중의 빛으로 삼았는데, 또 이 당으로써 나의 기문을 낚으려 하니 나 화상은 문아(文雅;고상하고 우아함)를 추구하는 데 돈독하다 하겠다. 그러나 반드시 조현(釣賢)의 참뜻에 맞추려면 마음은 능히 천고(千古)에 놀고 행동은 홀로 산림(山林)에서 고상하게 은둔해야 가능할 것이다. 그 동안에 그런 사람이 반드시 있었을 것이나, 다만 도연명이나 최고운 같지 않았을 뿐이다.
然而方今賢路大開 巖穴無土 誰肯從吾螺於寂寞之濱哉 余恐螺之堂 畢竟虛設矣 如吾輩之文 旣讓於能詩諸君子之後 道又屈於古賢矣 爲世棄材 偸閒浪迹耳
그러나 지금 어진 이를 맞이하는 길이 크게 열렸음에도 산속에 은거한 선비가 없으니, 누가 이 적막한 곳에서 우리 나 화상을 따라 놀기를 좋아하겠는가. 나는 나 화상의 이 조현당(釣賢堂)이 필경 부질없는 집이 될까 걱정된다. 우리 같은 졸문(拙文)은 이미 시문에 능한 여러 군자의 뒤로 양보하였고, 도(道) 또한 옛 현인들에게 굽혀야 하니, 세상에서 버려진 재목이요, 그저 한가한 틈을 타서 방랑하고 있었을 뿐이다.
吾聞螺事親甚孝 少求資於當世之仁者 嫁其兄弟之孤不能嫁者七人 家其不能者三人 而能盡恩愛 是可記也
내가 듣건대, 나 화상은 어버이 섬기는 효도가 지극하였고, 젊어서는 당시(當世)의 어진이(仁者)에게 도움을 받아 형제 중 고아(孤兒)가 되어 시집가지 못한 7인을 시집보내고, 장가가지 못하는 3인에게는 장가가게 하여 은혜를 베풀었다 하니, 이는 가히 기록할 만한 일이다.
噫 螺旣出家而能篤於人倫 乃爾螺之道 有其本也 無乃惡世濁穢 有托而逃焉者耶 先是 國家聞螺名强起之 檜巖住持居一年 遽辭還山 終不以榮利自爲 螺而能如此 此先聖所以興諸夏不如之嘆也 螺乎 劒不化龍 蘿月無恙 則吾輩之來 不至一二度而止也
아, 나화상은 이미 출가한 사람이지만 인륜(人倫)에 있어서는 이와 같이 돈독하니, 나 화상의 도는 근본이 있다 하겠다. 세상의 혼탁함을 싫어해서 불교에 의탁하여 도피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전에 조정에서 나 화상의 이름을 듣고 억지로 회암사(檜巖寺) 주지(住持)로 세웠더니 1년 만에 사퇴하고 산으로 돌아와서 끝내 영리(營利)를 꾀하지 않았다. 나 화상이 정말 이와 같이 하였다면 이는 공자가 ‘오랑캐에게도 임금이 있으나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만 못하다.’[1]고 한탄한 것과 같은 것이다. 나 화상이여, 검(劒)이 용(龍)으로 화하지 않고 나월헌(蘿月軒)이 무탈한 한 우리의 방문이 한두 번에 그치지는 않을 것이다.” 하였다.
[1]諸夏不如 ; 논어의 八佾편에 나오는 ‘子曰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공자가 말하길 오랑캐 나라에도 임금은 있지만 중국에 임금이 없는 것만 못하다) 즉 중국이 춘추시대로서 통일된 나라로서의 임금은 없으나 그래도 임금이 있는 오랑캐 나라보다는 중국이 오히려 질서와 문화가 더 낫다. 라는 뜻이다.
金馹孫記
김일손이 쓰다.
出典 : 탁영선생문집(1924年刊, 2012.11.30.刊, 번역 김학곤)
補充註釋 : 金順大 , 編輯 : 2014. 10. 5. 죽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