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순 쌍봉사 ◼️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松廣寺)의 말사이다.
☆일주문 현판 쌍봉 '사자문'은 무슨 뜻일까?☆
구산선문 중 사자산문의 근본도량 철감선사 징효대사와 관련이 있다는 뜻
☆사방벽엔 금강역사 벽화☆
☆생령좌☆
☆안쪽에서 보면 천왕문이 해탈문☆
신라 경문왕 때 철감선사(澈鑒禪師)가 중국에서 귀국하여 산수의 수려함을 보고 창건하였다. 철감선사의 법력과 덕망이 널리 퍼지자 왕이 궁중으로 불러 스승으로 삼았다고 하며, 창건주 철감선사의 도호(道號)가 쌍봉이었으므로 사찰명을 쌍봉사라 하였다고 한다.
847년(문성왕 9)에 귀국한 철감선사는 이 절에서 선문9산의 하나인 사자산문(獅子山門)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이곳에서 그의 종풍(宗風)을 이어받은 징효(澄曉)가 영월의 흥녕사(興寧寺)에서 사자산문을 개산(開山)하게 되었다.
창건 이후 퇴락한 절을 1081년(문종 35)에 혜소국사(慧昭國師)가 창건 당시의 모습대로 중건하였고, 공민왕 때 전라도관찰사 김방(金倣)의 시주로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절의 땅을 면세해 주었으며,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1628년(인조 6)에 중건하였고, 1667년(현종 8)과 1724년(경종 4)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문화재로는 국보 제57호인 철감선사탑과 보물 제170호인 철감선사탑비가 있고, 보물 제163호였던 대웅전이 있었다.
철감선사탑은 우리나라 석조 부도 중 가장 기묘하고 아름다운 우수한 작품이라고 하며, 868년(경문왕 8)경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철감선사탑비는 신라 말 작품으로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龜趺)와 이수(螭首)만 남아 있으나, 그 조각의 우아함은 당대의 명작이다.
대웅전은 1962년 해체공사 때 3층 중도리에서 1690년(숙종 16)의 두번째 중건에 이어 1724년에 세번째 중건된 사실이 기록되어 있는 상량문이 나왔다. 그리고 최근까지 대웅전으로 사용되었던 3층각은 원래 대웅전 건물이 아닌 탑이었다고 전한다.
총 높이 12m의 정방형 3층 건물인 이 대웅전은 상륜부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3층목탑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유일한 건물이었으나, 1984년 4월 초에 촛불로 인한 실화로 소진되었다.
이 밖에도 이 절에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인 극락전과 명부전·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있다.
☆ 목탑형식의 3층 대웅전☆
(보물 제163호)
쌍봉사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리산문(桐里山門)의 개산조 혜철(慧徹)이 839년(문성왕 1)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후 쌍봉사에서 여름을 보냈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839년 이전에 쌍봉사가 창건되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855년에는 철감(澈鑒)선사가 이곳에서 선문을 개설하여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자산문의 기초를 마련하고 개산조가 되는데 이때 쌍봉사의 사세가 확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중기에는 혜조국사가 쌍봉사를 재건한 사실이 『쌍봉사사적비』에 기록되어 있다. 쌍봉사는 정유재란 때 대웅전을 포함한 대부분의 불사가 소실되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1628년(인조 6)에 중건되었고,
1690년, 1724년에 중창이 있었다.
1963년 1월 21일 보물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그러나 대웅전은 1984년에 신도의 부주의로 전소되어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었고, 1986년에 복원되었다.
쌍봉사 대웅전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정사각형 평면의 3층 전각으로 건물의 구조와 형태는 목조 탑파(塔婆)의 형식을 하고 있습니다.
기단은 지대석, 면석, 갑석으로 이루어졌으나 그다지 높지 않으며, 전체적 조형이 일반적인 석탑과 유사한 비례와 체감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2층과 3층의 옥신은 매우 낮게 되어 있으며, 3층 지붕은 사모지붕의 형태이다.
이전에는 팔작지붕이었으나
1962년에 해체 수리하면서 사모지붕이었음이 밝혀졌다. 1986년에 복원하면서 사모지붕으로 복원하고 그 위에 보주를 설치하였다.
공포는 다포식 구조로 1층은 내외 3출목, 2, 3층은 외2출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목탑의 구조는 평면이 정사각형이며, 평면 중심에 심주(心柱)가 있다. 심주는 구조적 역할 뿐만 아니라 심초석에 사리를 봉안함으로써 탑의 상징적 중심이다.
쌍봉사 대웅전의 심주는 공중에 떠 있다.
따라서 1층은 내부 바닥에 마루를 깔고 불단을 마련하여 화순쌍봉사대웅전목조삼존불상(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을 모시고 불전의 역할을 수행한다.
천장은 우물천장이다. 그러나 2, 3층은 통층(通層)으로 되어 그 중심에 심주가 있다. 각 층 지붕의 추녀들은 모두 뒷뿌리가 상층 기둥에 관통되어 심주에 연결되어 있다. 심주는 출목 밖의 하중을 받는 추녀의 지렛대 역할에 의해 지탱되어 진다.
쌍봉사 대웅전은 목조탑파 형식의 3층 불전입니다.
평면과 구조가 목조탑의 형식을 따르면서 중앙의 심주가 공중에 떠있는 방식을 취하여 내부에 불단을 조성하고 불상을 봉안함으로써 불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쌍봉사 대웅전은 1984년에 소실된 후 1986년에 원형대로 복원한 건물이다. 비록 문화재에서 해제되었지만 이 건물은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목조 탑파의 형식의 희귀한 건물로 목조 탑파 양식 연구에 있어 중요한 건축입니다.
또한 내부는 불상을 모시고 불전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어, 17세기 목탑의 내부공간의 활용과 그에 따른 구조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조선중기의 쌍봉사 대웅전은 1984년 화재로 소실되어 현재는 전하지 않습니다.
☆대웅전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
(유형문화재 제 251호)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51호. 쌍봉사 대웅전에 봉안되어 있는 목조 석가여래좌상 및 가섭존자상과 아난존자상이다.
이 불상과 동시에 제작된 쌍봉사 극락전 아미타여래좌상의 대좌 밑바닥에 쓰인 「발원문」에 “……강희(康熙) 33년 미타전에 미타(彌陀)와 좌우 관음(觀音)·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을, 삼층보전에 석가(釋迦)와 아난(阿難)·가섭존자(迦葉尊者)를 봉안하였다. … 금어질 색난(色蘭), 모현(慕賢), 득우(得牛)…”라 적혀 있어 1694년(숙종 20)에 색난, 모현, 득우 등이 불상을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삼존불상이 봉안되어 있는 삼층목탑형인 대웅전은 1690년에 중수되었음이 해체 보수 때 상량문을 통하여 밝혀졌으나, 이 전각은 198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다행히 법당 내부의 불상은 화재를 피해 1986년 새로 복원된 대웅전 내에 다시 봉안 되었습니다.
석가여래좌상은 신체에 비하여 약간 얼굴이 크고, 어깨를 당당히 펴고 고개를 앞으로 숙여 구부정한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소라 모양의 나발(螺髮)이 촘촘하고, 경계가 구분되지 않는 육계가 솟아 있으며, 이마 위에 반원형의 중앙계주(中央髻珠)와 머리 정수리에 원통형의 낮은 정상계주(頂上髻珠)가 있다. 둥근 얼굴에 가늘고 길게 뜬 눈, 원통형의 코, 미소를 머금은 입 등이, 그리고 목에 삼도(三道)가 표현되었습니다.
대의자락이 오른쪽 어깨에 걸쳐 반달 모양으로 접힌 후, 팔꿈치와 배를 지나 대의자락 일부가 왼쪽 어깨로 넘어가고, 반대쪽 대의자락은 어깨에서 수직으로 내려와 반대쪽 대의자락과 U자형으로 겹쳐져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펼쳐져 있습니다.
특히 앉은 왼쪽 허벅지 밑으로 길게 늘어진 연봉오리형 대의 끝처리는 주목되는 점이다. 대의 안쪽에 입은 승각기는 상단이 5개의 앙련형(仰蓮形)으로 표현되었습니다.
수인은 오른손은 촉지인(觸地印)을, 왼손은 다리 위에 가지런히 놓은 채 손바닥을 펴고, 중지와 약지를 손바닥 쪽으로 구부린 형태를 취하고 있구요. 이와 같은 수인은 1684년(숙종 10) 색난(色難) 비구가 제작한 강진 옥련사 목조여래좌상에서도 볼 수 있는데, 팔목에 ‘釋迦(석가)’라는 명문이 적혀 있어 조선 후기 석가여래의 수인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한편, 가섭존자상은 두 손을 가슴에 모아 깍지를 낀 자세로 장삼과 가사를 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장삼과 가사에는 새로이 개채(改彩)되어 고풍스러운 멋이 사라졌고, 가사는 붉은색에 검정으로 선을 그려 대조를 이루는 마름모 모양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양 어깨를 덮은 장삼은 손목에서 긴 타원형을 그리는 소매와 왼쪽 어깨에서 대각선으로 걸친 장삼이 무릎까지 내려가 있습니다.
다리 사이로 늘어진 긴 옷단의 표현이 특이한 점이다. 아난존자상은 얼굴 형태, 손의 자세, 의습 표현에서 가섭존자상과 동일하지만, 얼굴은 동안(童顔)이고 머리 정수리 부분이 튀어나오지 않았습니다.
석가여래좌상과 가섭존자상·아난존자상이 함께 봉안된 삼존불은 그 예가 드문 특이한 배치방식입니다. 석가여래좌상은 왼쪽 허벅지 밑으로 길게 늘어진 연봉오리형 대의 끝처리가 주목됩니다.
한편, 가섭존자상의 불의는 다리 사이로 늘어진 긴 옷단의 표현이 특이하며, 아난존자상은 얼굴이 동안이고, 머리 정수리 부분이 튀어나오지 않게 표현된 점이 특이합니다.
이 목조삼존불상은 조성연대가 정확히 밝혀져 있고, 법당 화재시에도 훼손되지 않고 무사히 보존된 불상이다. 또한 이 불상을 조각한 승려들이 17세기 중반에 전라도 각 지역 사찰의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이라는 사실이 밝혀져, 이 시기 불상 연구의 기준작이 되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호성전☆
T자형의 특이한 건물. 이런 건물은 왕실의 능묘 앞에 볼수 있고, 왕가와 관련 있는 건물로 조선 세조의 위폐를 보관하기 위한 건물 이었으나, 지금은 선종 문파를 드높이 두 선사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왼쪽 중국 선승 조주선사,
오른쪽 철감선사 진영.
☆쌍봉사 극락전 목조아미타불여래좌상☆
(유형문화재 제252호)
조선숙종 20년(1694) 조성되었으며 2001년 6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화순 쌍봉사 지장전 목조지장보살상 시왕상 외 일괄☆
(보물제1726호)
조선현종 8년(1667) 조성되었으며 2001년 6월 5일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쌍봉사 철감선사 승탑☆
(국보 제57호)
쌍봉사(雙峰寺)에 세워져 있는 철감선사의 부도이다.
철감선사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로, 28세 때 중국 당나라로 들어가 불교를 공부하였다. 문성왕 9년(847) 범일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와 풍악산에 머무르면서 도를 닦았으며, 경문왕대에 이 곳 화순지역의 아름다운 산수에 이끌려 절을 짓게 되는데, ‘쌍봉’인 그의 호를 따서 ‘쌍봉사’라 이름하였다.
경문왕 8년(868) 71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철감’이라는 시호를 내리어 탑과 비를 세우도록 하였다.
탑은 전체가 8각으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모습이며, 대부분 잘 남아 있으나 아쉽게도 꼭대기의 머리장식은 없어진 상태이다.
탑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기단(基壇)은 밑돌·가운데돌·윗돌의 세 부분으로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밑돌과 윗돌의 장식이 눈에 띄게 화려하다. 2단으로 마련된 밑돌은 마치 여덟마리의 사자가 구름위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저마다 다른 자세를 취하고 있으면서도 시선은 앞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어 흥미롭다.
윗돌 역시 2단으로 두어 아래에는 연꽃무늬를 두르고,
윗단에는 불교의 낙원에 산다는 극락조인 가릉빈가(伽陵頻迦)가 악기를 타는 모습을 도드라지게 새겨두었다.
사리가 모셔진 탑신(塔身)은 몸돌의 여덟 모서리마다 둥근 기둥모양을 새기고, 각 면마다 문짝모양, 사천왕상(四天王像), 비천상 (飛天像) 등을 아름답게 조각해 두었다.
지붕돌에는 특히 최고조에 달한 조각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되어 있어서, 낙수면에는 기왓골이 깊게 패여 있고, 각 기와의 끝에는 막새기와가 표현되어 있으며, 처마에는 서까래까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을 만든 시기는 선사가 입적한 해인 통일신라 경문왕 8년(868) 즈음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각 하나하나를 조심스럽게 다듬은 석공의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져오는 작품으로, 당시에 만들어진 부도 가운데 최대의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 쌍봉사 철감선사탑비☆
(보물 제170호)
전체높이 1.4m. 현재 비신은 없어지고 귀부와 이수만 남아 있다. 이수 앞면 가운데에 제액이 있는데 ‘雙峯山故澈鑒禪師碑銘(쌍봉산고철감선사비명) 2행, 5자씩 전서로 음각.
이 비의 주인공인 철감선사 도윤은 825년(헌덕왕 17) 당나라에 들어가 유학하고 847년(문성왕 9) 범일국사와 함께 돌아와 경문왕을 불법에 귀의하게 한 명승이다. 868년(경문왕 8) 71세로 쌍봉사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철감’, 탑명은 ‘징소(澄昭)’.
이수나 귀부의 전체적인 조형은 격렬한 조각기법으로 당대를 대표하는 우수작. 특히 귀부의 오른쪽 앞발을 살짝 들어올린 점은 형식적인 관념을 벗어난 새로운 조형이다.
☆설법전☆
☆범종각☆
YouTube에서 '◼️전남 화순의 쌍봉사◼️
부산포교사단의 108사찰순례 (불기 2566년5월14일)' 보기
https://youtu.be/emgXBBdDHJ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