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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인천 定名(정명) 600년
2013년 올해는 仁川(인천)이라는 이름이 역사에 등장한 지 600년 되는 해이다. 이른바 定名(정명) 600주년이다.
인천은 1413년, 조선 태종 13년 전국의 행정기구를 새롭게 정비할 때 생긴 이름이다. 그 직전까지는 仁州(인주)라 불렸다.
그때 행정기구 정비시 고을 이름 가운데 州(주)자를 띤 것은 모두 山이나 川으로 고쳤으니 仁州(인주)가 仁川(인천)이 된것이다.
仁州(인주)는 '어진 고을'이라는 뜻이다. 이곳 인주 이씨 집안에서 고려 인종의 어머니 순덕왕후를 비롯해 모두 7대에 걸쳐서 12명의 왕비기 나왔기때문에 조정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그 전에는 慶源郡(경원군)이라 불렸는데, '경사의 근원'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왕비들의 고향이기에 붙은 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인종 임금이 태어난 곳이어서 붙은 이름이라는 해석도 있다.
국어학적으로는 '바닷가(물가)에 있는 큰 마을'이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라 해석하기도 한다.
'고려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인주는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미추홀이라고도 함)현으로 신라 경덕왕이 이름을 邵城(소성)이라 고쳐 栗津郡(율진군)의 領縣(영현)으로 삼았고, 현종 9년에 樹州(수주) 任內(임내)에 소속하였다가 숙종때에 이르러 皇妃(황비) 인예태우 이씨의 內鄕(내향)이므로 올려 경원군으로 삼았다. 인종때 황비 순덕왕후 이씨의 내향이므로 지금 이름으로 고쳐 知州事(지주사)로 삼았으며 공양왕 2년에 올려 慶源府(경원부)로 삼았다."
이런 기록들을 살펴볼 때 인천은 미추홀(매소홀) → 소성 → 경원군 → 인주 → 경원부 → 인주 → 인천의 단계를 거친 이름이다.
[조선일보 2013. 3. 28일 E1면 기사 참조]
ㅇ 인천 開港(개항) 130주년
2013년 올해는 또한 1883년, 仁川(인천)이 開港(개항)한지 130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開港(개항)이란 대외관계에서 鎖國攘夷(쇄국양이)의 폐쇄적인 자세를 취했던 조선이 중국주관의 세계질서를 벗어나 서구사회에까지 문호를 넓힘으로써 國交(국교)·통상관계를 확대시킨 것을 가리키는데 인천개항(1833년)은 부산(1876년)과 원산(1881년)에 이어서 우리나라에서 세 번째다.
역사적 배경
19세기 중엽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고 있었던 서구자본주의 열강은 아직 미개척지로 남아 있던 동아시아에 대한 침략을 감행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켜 중국에 불평등조약을 강요했으며, 미국도 1854년에 페리가 이끄는 黑船(흑선:서양배)의 무력시위로 일본을 위협하여 불평등조약을 맺었다. 러시아도 제2차 아편전쟁의 혼란을 틈타 1857년과 1858년에 걸쳐 중국으로부터 흑룡강과 연해주를 얻어냈다.
조선에도 19세기초부터 중국과 일본을 왕래·무역하던 외국상선, 異樣船(이양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식수나 식량공급을 목적으로 접근했지만 점차 통상을 요구해왔다. 1860년대를 전후하여 이양선의 출몰은 더욱 빈번해졌고, 국내에서는 천주교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봉건지배체제를 동요시켰다. 안동김씨 세도정권이 붕괴되고 대원군 집권기에 들어와 그들의 통상요구와 침략은 더욱 집요해졌다
1865년부터 3년간에 걸쳐 주교 2명과 신부 7명을 비롯해 전국의 신도 8,000여 명을 처형한 대원군의 천주교박해는 천주교전래 이래 최대의 것이었다. 이를 빌미로 프랑스가 함대를 파견함으로써 1866년 丙寅洋擾(병인양요)가 일어났지만, 대원군은 그것을 물리치고 쇄국정책을 더욱 고수했다. 같은 해 독일인 오페르트가 2번에 걸쳐 통상요구를 하다가 거절당하자 1868년 일행을 이끌고 대원군의 아버지 南延君(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려다가 실패했고, 또한 미국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교역을 거절 당하자 총과 포를 난사하는 등 횡포를 부리다가 분노한 軍民(군민)들에 의해 배가 불타고 선원 모두 죽임을 당했다. 이로 인해 1871년 辛未洋擾(신미양요)가 발생하나, 이 역시 물리쳤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무너져가는 봉건사회를 얼마간 연장시켜주었을 뿐, 근본적인 치유책은 되지 못했다.
대원군정권이 무너지자, 민씨 정권에 의해 문호가 개방되고 일본을 비롯한 구미각국과 통상이 열리게 되었다.
민씨 정권이 문호를 개방한 것은,
첫째 자기들의 권력유지를 위해 외세 특히 일본의 문호개방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대원군정권이 프랑스·미국과 2번의 전쟁을 치르고 경복궁 재건과 같은 대규모 토목공사를 강행함으로써 백성들의 심한 반발을 산 끝에 무너졌으므로, 민씨 정권은 권력 유지를 위해 우선 외세와의 분쟁을 피하고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둘째 일본의 조선에 대한 문호개방정책이 적극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대원군정권 때 명치 유신을 치르고 조선에 대해 국교재개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고 이 때문에 이른바 征韓論(정한론)까지 일어났으나, 국내사정이 다급하여 일단 무마되었다. 그러나 명치유신 과정에서 도태된 士族(사족)들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고 또 구미제국과 맺은 불평등조약을 개정하기 위한 방법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 했다.
그리하여 일본은 1875년 雲揚號事件(운요호 사건)을 도발했다. 운요호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청국의 방해를 막기 위해 조선과 청국과의 종속관계를 이유로 운요호사건의 책임을 먼저 청국에게 물었다. 유럽 여러나라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던 청국은 문제가 확대될 것을 꺼려, 민씨정권에게 일본과 조약을 맺을 것을 권유했고, 조선정부는 결국 1876년에 강화도조약 을 체결했다.
雲揚號(운요호) 사건
일본 군함 운요호가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군의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이다.
그전에 일본은 영국에서 수입한 근대식 군함인 운요호를 부산에 침투시켰다. 이에 부산훈도 玄昔運(현석운)이 부산 倭館(왜관 : 일본의 상관이 있고 일본인이 거주하는 지역)을 찾아가 군함을 침투시킨 이유를 묻자 ‘조선과의 수교 교섭이 지연되는 이유를 일본의 이사관에게 물으러 왔다’고 거짓으로 설명하고, 오히려 그를 군함에 승선시켜 함포사격 훈련을 구경시키는 등 군함의 위력을 과시하였다. 그들은 조선 해안을 탐측하고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고 구실을 대었다. 운양호는 동해안을 순항 후 다시 남해안을 거쳐 서해안을 거슬러 강화도 앞 난지도에 도착하였다. (1875. 9. 20)
운요호 함장 이노우에는 일본군 몇 명을 데리고 작은 보트를 타고 강화도 초지진으로 접근하였다. 이때 해안 경비를 서던 조선 수병은 예고도 없이 침투하는 일본군 보트에 포격을 가하였다. 이에 놀라 일본군은 모함으로 되돌아가, 함포로서 조선에 보복 포격을 가하였다. 그리고 永宗鎭(영종진 : 오늘날의 영종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과 격전을 벌여, 근대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고 무기도 다량 탈취하였으며 주민들에게 방화, 살육을 하고 퇴각하였다.
강화도조약
1876년 일본 정부에서는 全權大臣(전권대신) 일행을 조선에 파견, 운요호의 포격에 대하여 힐문함과 아울러 개항을 강요하였다.
2월에는 일본 사신 일행이 군함 2척, 운송선 3척에 약 4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강화도 甲串(갑곶)에 상륙하여 협상을 강요해왔다. 이에 조선 정부는 국제관계의 대세에 따라 수호통상의 관계를 맺기로 결정하고 申櫶(신헌)을 강화도에 파견하여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와 협상하게 한 결과, 1876년 2월 26일 ‘江華島條約(강화도조약)'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다.
강화도는 한강 어귀에 위치하여 외세가 서울(한양)에 접근하는데 가장 가까워 서울 위협을 위해 강화도를 침범하는 사례가 많았다. 운요호사건은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의도적으로 일으킨 함포외교의 한 형태이며, 이는 그들이 22년 전에 미국에 당한(배운) 것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다. 국력이 약한 결과 불법침입자에 대한 정당한 방어적 공격도 보복당하여 그 책임을 조선에 묻고 강제로 수교하였다. 이것은 일본 제국주의 대륙침략의 端草(단초)였으며 신호탄이었다
강화도 조약은 韓日修好條約(한일수호조약), 丙子修好條約(병자수호조약)이라고도 하며 이 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종래의 전통적이고 봉건적인 通文關係(통문관계)가 파괴되고, 국제법적인 토대 위에서 외교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의 강압 아래 맺어진 최초의 불평등조약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일본의 무력시위 아래 체결된 조약은 모두 12개조로 되어 있는데, 그 내용에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을 조선에 침투시키려는 의도가 반영되어 있다.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서 일본과 평등한 권리를 가진다고 규정되어 있으나, 이의 목적은 조선에서 淸(청)나라의 종주권을 배격함으로써 청나라의 간섭 없이 조선에 대한 침략을 자행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데 있다. 제5조에서 조약이 체결된 후 조선 정부는 20개월 이내에 부산과 그 외 2개 항구를 개항할 것을 규정하고, 2개 항구의 선정은 일본의 임의에 맡길 것을 주장하였다.
그 결과 원산과 인천이 각각 선정되었으며 기타 개항장 내에 租界(조계) 설정과 치외법권등을 명시한 불평등한 조약으로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와 통상을 시작하게 되고, 문호를 개방함으로써 서양의 신문명을 수입하는 반면에 열강의 침략을 받게 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ㅇ 제2의 인천 開港(개항)
인천의 개항이후 서울의 關門(관문)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를 배경으로 빠르게 성장하였다.
인천항은 서양의 근대문물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는 가장 중요한 통로였고, 그 영향으로 항구 주변 開港場(개항장)은 새로운 문물이 터를 잡고 꽃을 피우는 곳이 되었다.
1907년 당시 인천항의 무역액수는 국내 전체의 50%에 이르렀고, 광복직후 6.25전쟁 전까지 인천항을 통해 들어오는 수입품이 전국 총 수입의 85~94%에 달했다. 그러나 6.25전쟁시 인천상륙작전에 앞선 포격으로 대부분의 항만 시설이 파괴돼 항구로서의 기능을 거의 잃었다. 그뒤 1973~1978년에 인천항 1단계 개발사업이, 1981~1985년에 2단계 개발사업이 벌어지면서 인천항은 다시 국제항으로서의 기능을 되찾게 되었다.
1단계 개발 시기인 1974년에는 인천항에 국내 최초의 갑문(도크)이 만들어져 물때와 큰 관계없이 배들이 드나들수 있는 기능을 갖췄다. 2001년에는 영종도에 세계최고 수준의 인천국제공항이 문을 열었고, 2003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경제자유구역이 송도.영종.청라 등 3개 지구에 지정되었다. 이에따라 인천은 국제공항과 항만, 경제자유구역이라는 3박자를 갖춘 최초의 도시가 되었다.
인천공항은 세계 1,700여개 공항중에서 부동의 1위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인천항도 지금의 항구시설로는 부족하여 새로운 대규모 항구시설(인천신항)을 더 만드는 중이다. 인천항의 船席(선석 : 부두에 배를 대는 곳)은 2011년에 100개를 넘겼는데, 여기에 30여개의 선석을 갖춘 새 항구가 생기는 것이다. 그밖에도 크루즈 전용 부두 생길것이며, 경제자유구역은 2020년까지 3단계에 걸쳐 IT, BT, R&D 중심의 개발과 관광, 레저, 금융, 유통 및 기업과 글로벌 대학유치등에 힘을 쏟고 있다.
특히 지난해에는 UN산하 녹색기후기금(GCF)의 사무국이 인천 송도에 유치되어, 초대형 국제기구가 자리 잡았으며 내년에는 인천에서 아시안 게임이 16일동안 45개국 선수와 임원 13,000여명이 참가하여 그 이름을 날릴것이다.
ㅇ 국내 최초
인천 개항이후, 우리나라에 외국의 근대문물이 들어오는 관문이었으므로, 인천항 주변에는 '국내 최초'라는 수식어를 가진 유적들이 많이 있다. 부산과 원산에 이어 3번째로 개항한 인천이지만, 한양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었던지라 유독 최초가 많은 것이다.
인천에는 국내 하나뿐인 공식 '중국인 마을', 즉 차이나 타운이 있다.
중국식 전통대문으로 세워진 牌樓(패루)가 눈에 띠는 곳...
<차이나 타운의 牌樓(패루)....>
차이나 타운에는 국민음식 '짜장면'의 발상지로 알려진 옛 중국음식점 '共和春(공화춘)' 건물이 남아 있다.
중국 짜장면과 다른 한국 짜장면은 1905년 이곳에 국내 처음으로 문을 연 청요리(중국요리) 전문점 '산동회관'의 주인인 화교 于希光(우희광)씨가 춘장에 국수를 넣어 먹는 중국식 짜장면으로 처음 선보인것이라고 한다.
우씨는 그 뒤 1912년 중화민국의 공화국 출범을 기념해 가게 이름을 共和春(공화춘)이라 바꿨으며, 6. 25전쟁 이후 이곳에서 지금처럼 양파.고기.전분등을 넣고 볶는 한국식 짜장면을 개발했다고 한다. 공화춘은 1984년에 문을 닫았다.
하지만 짜장면과 얽힌 역사를 기리기 위해 인천시가 이 건물을 짜장면 박물관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지금은 짜장면 박물관으로 운영중인 共和春(공화춘).....>
차이나 타운을 지나 언덕길을 올라가면 1888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자유공원이 있다.
인천항 개항 이후 인천으로 모여든 서양사람들이 자신들이 살던 萬國地界(만국지계) 안에 만든것이라 만국공원이라 불리다가 1957년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여 자유공원으로 부르게 되었다.
맥아더 장군 동상 자리는 원래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독일 무역회사 '세창양행'의 사택(직원용 건물)이 있었다.
1884년 지은 이 건물은 6. 25전쟁때 함포사격으로 사라졌다.
<자유공원에 서있는 맥아더 장군 동상... 한동안 이를 철거하려는 세력과 지키려는 세력의 충돌이 있었던 곳이다.>
그밖에도 인천에는 최초의 호텔, 大佛(대불)호텔의 터가 있으며, 최초의 기상대인 인천기상대, 최초의 극장 '애관극장', 1905년 처음 태어난 '별표 사이다', 최초의 등대 팔미도 등대, 최초의 移民(이민)등.... 예상 밖으로 최초 수식어가 많은 곳이다.
다음 답사기에서는 최초의 수식어가 붙은 문화유산을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한다.
< 계 속 >
ㅇ 내나라 문화유산 답사회 : http://cafe.daum.net/sm-academy
ㅇ 사랑하는 내인생 : http://cafe.daum.net/people4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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