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평이씨 호우공파 관덕문중(명룡후손)
23세 명룡 할아버지 묘역 토지는 생부 운복 할아버님 쪽으로 이전 되었다함
운태 할아버지 손이없어서 양자옴
위쪽묘지는 생부 운복할아버님
(자라등 초포리1-4)
함평이씨 이명룡
본관은 함평이며 호는계일헌 함평군 나산면 초포리 출신으로1759년 영조39년 기묘식년시에 과거 급제하여 주요관직은 정랑 정자를 지넸으며자는 성서 호는 계일헌 이며 부친은 운태이고 친부는 운복 이며 외조부는 남원인 윤상훈이며 장인은 도강인 김중형이다.
오늘날 그분의 계일헌일기가 전해져 있다.
초포사에 위패가 모셔져 있다.
이명룡이 1759년(영조 35)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 관직을 역임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문인 가문의 길을 열었다. 특히 기주관으로서 궁궐에 있을 때 7서를 강론하라는 임금의 명을 받고 강론한 결과 임금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바 있다. 장수하시어 회혼례(결혼한 지 60년)를 치렀고, 80세에 당상관인 통정대부 품계를 받은 후, 82세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평균 연령으로 볼 때 거의 두 사람 몫을 산 셈이다.
그는 크게 두 가지의 의미 있는 자료를 남겼다. 첫째, 일기이다. 과거 급제 때부터 1764년까지의 생활 일기가 남아 있다. 그 일기에는 그의 사소한 일상사뿐만 아니라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는 것도 들어 있다. 앞부분이 훼손되어 그 표제를 알 수 없으므로, 그의 호를 따서 '계일헌일기'라고 명명하여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99년에 탈초하여 간행한 바 있다. 둘째, 편지이다. 그는 중앙관직을 역임하다가, 나주에 있던 청암역(靑巖驛) 찰방(察訪)을 거쳤다. 그때 받았던 편지가 100여 통 남아 있는데, 교통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 이 일기와 편지는 현재 이명룡의 후손 이호성 님이 소장하고 있다. 이들 자료들이 알기 쉽게 번역되고 세상에 널리 배포되어 지역사 연구에 기여했으면 한다.
이명룡의 손자인 삼회재(三悔齋) 이돈현(李敦賢, 1761~1810), 휴와(休窩) 이돈하(李敦夏, 1770~1834) 등 두 형제가 한 방에서 같이 공부하여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돈현은 초명이 돈덕(敦德)이어서 사서에는 이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고, 유고(遺稿)가 집에 소장되어 있다고 한다. 이돈하는 형님이 급제한 지 9년 만에 급제하여 가문의 명성을 드높였다. 아무튼 세 조손이 문과에 연이어 합격하였으니, 가문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문중에서는 세 조상을 기리기 위해서 마을 입구에 '戒逸軒三悔齋休窩三祖孫遺蹟碑'라는 비석을 1996년에, 그리고 '戒逸軒 三悔齋 休窩 三祖孫 遺蹟碑 要約文'이라는 표석을 2000년에 각각 건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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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 한국사료총서 導哉日記 戒逸軒日記 雜記 戒逸軒日記 戒逸軒日記 外 解題
戒逸軒日記 外 解題
戒逸軒日記 外 解題
Ⅰ
한국사료총서 제42집은 朝鮮 肅宗~英祖朝의 인물인 李濬(1686, 숙종12~1740, 영조16)과 肅宗~正祖朝의 인물인 戒逸軒李命龍(1708, 숙종34~1789, 정조13)의 일기를 1책으로 묶어 편찬·간행하였다.
이준의 일기는 1책으로 앞 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일기의 표제를 알 수 없다. 따라서 그의 號를 일기제목으로 삼고자 하였으나 또한 알려진 바의 호가 없어서 부득이 그의 字를 내세워 편의상 『導哉日記』라 하였다. 또한 이명룡의 일기는 2책으로서 1책은 앞 부분이 훼손되어 그 표제를 알 수 없다. 따라서 그의 호를 빌려 『戒逸軒日記』라 하였고, 또 다른 1책은 표제가 『雜記』로 되어 있어서 그대로 사용하였다.
Ⅱ
『도재일기』의 필자 이준과 『계일헌일기』·『잡기』의 필자 이명룡은 본관이 咸平이다. 함평은 본래 百濟의 屈乃多岐縣으로서 高麗朝에 굴내현과 다기현으로 분할되어 각각 함평과 牟平이 되었다가 朝鮮朝에 다시 두 현이 합쳐지면서 함평이 되었다. 이들 咸平李氏는 고려조에 神武衛 大將軍을 지낸 彦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함평을 중심으로 세거하여 왔다.
이준과 이명룡은 각각 彦의 21세·23세손으로 이 둘은 再從祖孫間이면서 또한 함평에서 출생하여 조정과 초야에서 생활하였다.
함평이씨 가계도를 중심으로 이들 관계를 살펴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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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작성 연기 규격 비고
導哉日記 1717년(숙종43, 정유) 11월 27일~1731년(영조7, 신해) 2월 16일 46.7㎝×27.3㎝
戒逸軒日記 1759년(영조35, 기묘) 12월 7일~1764년(영조40, 갑신) 8월 29일 43.0㎝×25.3㎝ 추기:霜臺別曲, 霜臺房憲
雜記 1770년(영조46, 경인) 11월 18일~1775년(영조51, 을미) 정월 10일 25.0㎝×21.3㎝ 추기:갑오년(1774, 영조50) 8·9월 政事
이준은 有城의 5남인 自新의 차남으로 부인은 晉州鄭氏(문과급제 椀의 딸)이다. 한편 이명룡은 유성의 장남인 必新의 증손자로서 그의 조부 淰과 濬은 사촌간이다. 염은 運復(자 孟汝)·運泰(叔汝)·運升(仲汝)·運恒(汝久) 등 4형제를 두었다. 명룡은 본래 운승의 2남으로서 그의 仲父인 운태에게 立後되어 奎緖와 端緖를 두게 되었는데, 차남 단서는 다시 명룡의 친형인 命稷에게 입후되는 出系관계가 이루어졌다. 명룡은 1728년(영조4, 무신)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1759년(영조35, 기묘) 식년시에 文科 丙科로 급제하였다. 1763년(영조39, 계미)에 成均館 典籍을 시작으로 司憲府 監察, 兵曹佐郞, 工·兵曹 正郞, 靑巖道 察訪 등을 역임하였다.
Ⅲ
『導哉日記』는 1책(105장, 필사본, 46·7㎝×27·3㎝)으로 앞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시작 연월일을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판독이 되는 시기는 1717년(숙종43, 정유) 11월 27일~1731년(영조7, 신해) 2월 16일까지이다. 『戒逸軒日記』는 1책(88장, 필사본, 43㎝×25·3㎝)으로 또한 앞 뒤 부분이 많이 훼손되어 그 시작 연월일을 알 수 없다. 판독이 되는 시기는 1759년(영조35, 기묘) 12월 7일~1764년(영조40, 갑신) 8월 29일까지의 일기와 함께 追記로서 霜臺別曲과 霜臺房憲 등이 붙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이 책의 면면마다 官印이 찍혀져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이명룡이 중앙관직을 역임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는 듯 하나, 보다 자세한 까닭은 알 수 없다. 『雜記』는 1책(61장, 필사본, 25㎝×21·3㎝)으로 1770년(영조46, 경인) 11월18일~1775년(영조51, 을미) 정월 10일까지의 일기와 기타 추기가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간략히 표로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Ⅳ
공통적으로 일기의 전체적인 내용구성은 우선 날짜와 날씨를 쓰고 이어 祭禮, 賓客來訪 등을 기록한 뒤 그날의 주 내용을 기록하였다.
이준의 『도재일기』는 주로 그날 그날의 일상사에 대한 기록이 주축을 이루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在地士族간의 交遊關係나 당시 향촌사회의 생활 모습들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지방사회의 사회·경제적인 문제, 즉 地方官의 苛斂으로 인한 민생곤핍의 심각성이라든지, 書院·祠宇의 건립과 先賢 配享문제, 鄕試의 폐단, 農形, 당시 향촌에 만연하였던 癘疫 등 지방사회의 전반적인 時事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포함한 가족과 친인척의 근황에 대한 일상의 모습들을 많이 그리고 있다.
그러한 반면에 『계일헌일기』는 이명룡이 관직생활 중에 쓴 일기인 만큼 당시 중앙 관직자들과의 交遊활동에 대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당시 조정의 政局推移에 대한 전반적인 흐름을 유추할 수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오히려 당시 관직자들의 개인적인 면면을 더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특히 추기로 기록하고 있는 己卯榜目이나 別試·謁聖試 榜, 己卯 3월 會講試官 名單, 癸未 9월 增廣 東堂 考講 試官 名單, 乙酉(1765, 영조41) 2월 5일의 兼春秋 單子 등은 당시 자신과 관계있던 부분을 나타낸 것이며, 상대별곡이나 상대방헌은 사헌부에 관계된 별곡과 憲目으로 명룡 자신이 또한 사헌부 감찰을 역임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잡기』는 庚寅年(1770, 영조46)·辛卯年·癸巳年·甲申年·乙未年에 걸쳐 쓴 것이기는 하나 그 기록 연월일이 일관되지 못하고 빠진 부분이 너무 많다. 그러면서도 1774년(영조50, 갑신) 6월 초5일자 일기 다음에 추기해 놓은 당시 관직자들의 단자는 매우 소상하여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Ⅴ
이준과 이명룡의 일기는 朝鮮後期 肅宗 말년에서 英祖 말년까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 개인의 생활일기이다. 비록 이 기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연속적인 기록은 아니지만, 초야와 조정에서 「奉祭祀 接賓客」의 일상사를 중심으로 다양한 時事거리와 친교관계 등을 통한 당시 士族과 官人 생활의 일부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이들이 咸平이라는 향촌사회를 기반으로 하여 부단히 中央官界와의 관계를 맺고자 하는 모습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재지사족으로서의 안정적인 신분 유지와 향상을 꾀하고자 하는 전형적인 당시 사족의 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항상 科擧에 관심을 갖고 자손들로 하여금 科試에 응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어떻든 이들 일기는 사족의 일상에 비친 현실적인 삶의 모습과 이를 둘러싸고 있는 당시 사회의 사회·경제적인 모습, 나아가 풍속이나 물산, 심지어는 基底層의 전반적인 생활모습까지 유추해 볼 수 있는 자료로서 손색이 없어 보인다. 더구나 최근의 고서·고문서 등을 통한 우리 역사의 복원작업이 한창인 것과 때를 같이 하여 이러한 私撰記錄의 편찬·간행이 당시의 역사적·시대적 상황을 보완하는데 크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