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창세기 8장 6절-12절
∙제목:비둘기 같은 성도가 되자!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기 시작하자 하나님 께서는 사람을 지으셨음을 한탄하시고 세상을 물로써 심판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베푸사 당대의 의인이었던 노아에게 방주를 지어 물심판으로부터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설계도대로 약 120년간을 방주를 짓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설계된 이 방주는 굉장히 이상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모양새입니까?
첫째로,방주에는 조종석이 없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배는 조종석이 있습니다. 조종석이 없으면 어떠한 배라도 자신이 의도하는 대로 나아갈 수가 없을 것입니다.
둘째로,방주에는 노와 방향키가 없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 이러한 배를 타라고 한다면 아무도 두려워하며 타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방주는 앞뒤의 구분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그 시대의 노아였다면 배를 만들고 난 다음 틀림없이 “내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설계대로 제대로 방주를 만든 것일까? 라는 의문을 가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양으로 만들라고 하심은 이 모든 것들이 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즉, 방향키나 노가 없어도, 그리고 심지어 조종석이 없어도 하나님께서 직접 그 배의 노와 방향키가 되어주시며 또한 조종사가 되어 인도하여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노아는 방주를 통하여 물심판으로부터 구원을 받았으나 속으로는 걱정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과연 언제쯤 땅을 밟을 수 있을 것인지, 언제까지 방주에서 생활해야 하는지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그러던 중 물이 점점 감하여져서 노아는 방주로부터 나와도 되는 것인지의 여부를 알고자 두 마리의 짐승을 사용하게 되는데 첫째는 까마귀요 둘째는 비둘기입니다. 여기서 까마귀와 비둘기는 오늘날 교회 안에서 볼 수 있는 두 종류 모습의 성도들을 뜻합니다. 까마귀 같은 성도는 어떤 성도입니까? 창세기 8장 7절을 보면 ‘까마귀를 내어 놓으매 까마귀가 물이 땅에서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방주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까마귀가 아직 지면에 물이 마르지 않았는데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마르기까지 날아 왕래하였다는 것을 성도들에 비유하자면 즉 아직 세상것에 미련을 못버리고 무언가를 갈구하고 얻고자 방황하고 헤매는 심령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도들은 교회에 나오기는 해도 교회 깊은 곳까지는 들어오려고 하지 않으며 또한 교회에서나 그 누군가가 손길을 내밀면 피하여 멀리 달아나 버리는 사람들입니다. 봉사, 교제, 신앙생활 그 무엇 하나도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내어놓고 나아오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비둘기 같은 성도는 어떠한 성도를 의미합니까? 창세기 8장 8-9절을 보면 ‘그가 또 비둘기를 내어 놓아 지면에 물이 감한 여부를 알고자 하매 온 지면에 물이 있으므로 비둘기가 접족할 곳을 찾지 못하고 방주로 돌아와 그에게로 오는지라 그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이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비둘기는 악하고 더러워진 세상과 타협하지 아니하며 또한 그 속에서 자기가 있을 곳을 찾지 아니하며 하나님 안에 거하는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노아는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을 의미하고 있으므로 본문에 노아가 손을 내밀어 방주 속 자기에게로 받아 들인다는 것은 곧 성도를 받아들이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모두 자신의 모습을 한 번 살펴봅시다. 과연 나는 까마귀 같은 성도입니까, 아니면 비둘기 같은 성도입니까? 무언가 세상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떠도는 불안정한 인생입니까, 아니면 세상을 등지고 오직 하나님한테서만 만족을 느끼며 그 품안에 거하는 복된 인생입니까?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참 만족과 평안이 있습니다.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든 복됨들이 그 분 안에서만 있습니다. 진실로 사랑제일교회의 모든 성도 여러분들께서는 까마귀 같은 성도분들이 한분도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오직 모두 다 비둘기 같은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