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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시선ㆍ27
아버지의 낫
인쇄 | 2020. 3. 1.
발행 | 2020. 3. 5.
지은이 | 심동석
펴낸이 | 정연휘|
펴낸곳 | 도서출판 해가
245-943 강원도 삼척시 오십천로 301-30. 101-1503
전화 033-573-4613 ․ 010-3341-3327
e-mail: haika@hanmail.net
출판등록 | 제99-10-3호 1999. 7. 7.
인쇄처 | 문왕사 033-648-3670
ISBN 978-89-93138-46-7 (03800)
값 10,000원
ⓒ2021 심동석
저자와의 협의에 의해 인지를 생략합니다.
잘못된 책은 바꾸어 드립니다.
날마다 좋은날 되십시오.
시인의 말
먼 길
돌고 돌아왔다
유년의 꿈이
은전처럼 반짝이는
산마을로
첫 걸음마 하듯
시집을 낸다
오래 꿈꾸던 길
이제
멈출 수 없을 것 같다
2021년 2월 1일
미로산방에서
심 동 석
차례
시인의 말 | 11
제1부ㆍ한낮의 잠
아버지의 낫 | 18
한낮의 잠 | 19
공범자 | 20
지게 | 21
다디단 춤 | 23
홍시 | 24
셈법 | 25
고등어 | 26
말씀 | 27
눈물 | 28
항아리를 닦는 손 | 29
고무신 두 켤레 달빛에 젖고 | 30
잡풀 | 31
발목으로 집 지키기 | 32
울음풍선 | 34
매혹의 향기 | 36
단디이 바아라 | 37
제2부ㆍ민들레꽃
담쟁이 | 42
민들레꽃 | 43
무지개 바위 달빛 젖을 때 | 44
꽃다지 핀다 | 45
보봉호 연가 | 46
사랑한다는 말은 | 48
홍도 | 49
그 여자의 춤 | 50
고깔 속의 해 | 51
분실 | 52
웃음꽃 | 53
종소리 | 54
맨손으로 황어 잡기 | 55
검객ㆍ1 | 56
적병산은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 57
뼈 속의 새 | 59
편지 | 60
제3부ㆍ소묘 속의 비
삼복에 내리는 눈 | 62
나는 보았네 | 63
향기의 꿈 | 64
환치 | 65
소묘 속의 비 | 66
못대가리들 | 67
뻐꾸기 | 68
통화와 약속 | 69
탈을 세다 | 70
모란 | 71
멈추지 않는 노래 | 72
별 | 73
4월의 폭설 | 74
귀뚜라미 연가 | 75
용서 | 76
혼돈 | 77
대관령 | 78
제4부ㆍ죄와 벌
갱문 | 80
화석 | 81
죄와 벌 | 83
끗발 죽이기 | 84
승리자 | 85
새 | 86
혈서 | 87
흑산도는 빨간 고깔모자를 썼다 | 88
창 | 89
혀를 잃다 | 90
폭설 | 91
비문 | 93
꽃다운 끈이라 말하고 싶다 | 94
산길 | 95
하루 | 96
부여의 춤 | 97
복사꽃 | 98
제5부ㆍ대낮
대낮 | 100
까치들이 날아 온 곳 | 101
배 한 척 | 102
섬 | 103
낙뢰 | 104
삼세번의 꿈 | 105
성형중인 여자 | 106
불새 | 107
단단한 소리 | 108
바다 한 조각 | 109
팔자 | 110
붉은 꽃 | 111
궁남지의 노래 | 112
맵고 푸른 춤 | 114
평강공주와 온달 | 115
진묘수 웃음 | 119
메아리 | 120
작품론 | 조관선⋅122
作品의 基底에 내재된 詩의 根源들
― 심동석 시집 아버지의 낫
제1부 한낮의 잠
아버지의 낫
밭머리에서 칡을 캐다가 낫 하나 찾았다
자루는 흙 속의 길로 숨었고
잠들었던 물음표의 머리는
아직 낫이 필요하냐고 묻고 있었다
무디어진 낫을 가만히 만지자
햇살의 이마가 눈부신 듯
녹슨 조각들이
아버지의 굳은 땀처럼 뚝뚝 떨어진다
낫, 낫은 칼이 아니고 창은 더욱 아니다
봄 가을 논밭을 지켜온
온돌 같은 손이요 흰 옷의 노래다
낫, 아버지의 꿈이 묻어있는 낫
보릿고개의 시퍼런 허기
이 땅의 철 띠마저 벨 수 있다고
고개를 꼿꼿이 세우는
아버지의 낫
한낮의 잠
산비탈 콩밭머리의
지게 짐 그늘
앉은 채 꾸벅이는 아버지의 잠
넘어질 듯
넘어질듯
함께 졸고 있는 박달나무지게
깨울 수도
지워지지도 않는
지게와 아버지의 곤한 잠
이제는
가슴속에서만 졸고 있는
지게와 아버지의 깊은 잠
공범자共犯者
황새 한 마리
어둠이 내리는 강물에 서 있다
늘씬한 다리에 가슴을 연 듯
여울은 쉬, 쉬 낮은 목소리다
구름에 숨었던 상현달이 실눈을 뜨자
황새의 부리에 번뜩이는
물고기의 은빛 외마디
놀란 달은 황급히 숨어버린다
공범, 공범자는
밤마다 황새에게 어깨를 준 떡갈나무
구름에 숨은 달
대대로 강뚝을 넘어온 기침 소리뿐
살해의 현장에는
반딧불이들만
암호처럼
푸른 부호를 은밀히 날리고 있다
지게
장터에서 알루미늄 지게를 사 왔습니다
어깨에 묻은 나무지게의
아릿한 냄새 때문일까요
어제 이사 온 이웃처럼 낯설었지요
숨었던 달이 풍선처럼 부푸는 저녁
나뭇가리의 지게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물래 방앗간을 돌아들고 있습니다
오십천 모래밭에서 고무신 접어 운전하던 아이는
지게 짐의 그림자에 매달려
집으로 뛰어가곤 했지요
얼굴에 복사꽃 툭툭 멍울지던 봄
아버지는 박달나무 지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먼 길 가려면
어깨를 단단하게 해야 한다며
어깨가 멍들고 다리가 떨리던 시간이었지요
연휴 마지막 날 길을 나서는 큰 아이를 보고
급히 어깨를 만졌습니다
지게는 아직 내 어깨를 누르는데
새 지게를 단단히 멘 아이는
고샅길을 뚜벅뚜벅 걸어 나가고 있었습니다
늘 아버지를 기다렸던 길
지게를 진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
햇살처럼 반짝이는 그 길로
다디단 춤
― 丈母喪에서
한 사람 춤추고 있다
마을길이 끝나고 언덕을 오르는 꽃상여 앞에서
서낭당 회나무의 한숨 같은 저 춤사위는 번갯불의 예순 해를 함께 바라본 아내에게 올리는 불의 노래 여름날을 다 울지 못 한 매미의 날개 짓이다 노제路祭의 꽃상여 앞에서 학이 된 저 춤은 처음 본 빛에 놀란 아이의 몸짓이며 고인돌에 새겨진 상형문자의 울음 조각이다 허공으로 솟아오르는 상여꾼들의 노래를 온몸으로 잡으려는 저 춤은 봄비에 눕는 꽃잎의 노래 이별의 문장을 다듬다가 한 점 마침표에 잠못 드는 이의 몸짓이다
꽃상여 앞에서 한 사람 춤추고 있다
다디달게 실성할 박꽃 같은 춤을……
홍시
초동初冬하늘아래
나는
옷 다 벗었다
아직은 붉은 몸
말랑말랑한 생각으로
가득 한 나
서리 발 같은 칼바람이
나무와 나의 절취 선을
영수증처럼 자르고있다
누가
나의 손을 잡아
여왕처럼 데려가 다오
셈 법
이천 도자기 촌 어느 상가 쪽빛 찻잔과 마주치는 순간 가슴 천칭天秤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모양과 빛깔을 보니 찻잔이 가볍고 값을 생각하니 아내의 웃음이 무겁다
찻잔과 웃음이 시소를 타는데
잔 하나 38,000원
너무 무거워 잔을 놓고 말았다
아내가 삼척 맹방리 유채꽃 축제에서 10,000원에 샀다며 흙 강아지 두 마리를 탁자 위에 놓는다 1,000원에 사도 될 것 같은 내 생각을 지우듯 아내를 따라온 유채꽃 웃음이 저녁내 집안 가득 노랗게 넘실거린다
내 저울이 고장 난 탓인가?
찻잔의 쪽빛 하늘 한 조각이면 서너 달은
아내의 웃음이
나비처럼 집안을 훨훨 날아다닐 터인데……
몇 번이나 생각의 무게를 확인해 봐도 저울의 눈금을 잘못 읽었다 아내의 웃음 길이와 소중한 이들과 함께 한 꽃 시간의 무게를 뺄셈하지 않았다
고등어
좌판에서 꿈꾸는 작은 배
짙푸른 바다를 그리는 눈동자에
두고 온 수평선이 그네를 탄다
등허리에 화인 찍힌 물결무늬는
한 생애로 출렁이는 파도소리다
머리가 잘리고
꼬리가 잘리고
둥근 밥상에 오를 바다의 냄새다
툭 툭 툭……
떨이에도 팔지 못한 배를
할머니 손이 허물고 있다
지는 해의 꼬리도 잘라내고 있다
오일 장 좌판에 누운 작은 배들
용골龍骨이 조각조각 난 채로
노래하고 있다
대양을 항해하는 끝없는 노래를……
말 씀
경운기를 강냉이 밭에 눕혀버린
뒷집 할아버지
경운기가 부서지고 강냉이 밭이 망가져도
팔순 몸 멀쩡한 건 조상님 덕이라고
허허허~
강냉이 속 알같이 웃으신다
쟁 골, 성묘省墓에서 음복주 드시고
할머니 찾아 나선 고추 밭머리
돌부리에 넘어져
고추빛 피 이마에 흐르는데
이만한 것 다 그만한 것 다
조상님 덕이라고
허허허~
감자 꽃 웃음
들길 건너 메아리로 돌아온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청동 빛 말씀들이 산을 내려오고 있다
눈물
일곱 달 송아지가
봉고 트럭을 타고 간 저녁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뒷집 외양간의 양철 지붕에서
온 동네
휘감던 불길에
골목길은 하얗게 질려 누웠고
앞산도 그렁그렁 울고 말았다
엿새 날 새벽 비에
누웠던 강물소리 일어나고
베개를 뒤척이던 발자국 소리들
돌담을 넘어왔다
외양간엔 목이 다 닳은
어미 소 눈물이 재가 되고 있었다
재가 굳어
검은 못이 되고 있었다
항아리를 닦는 손
항아리를 닦는다
백년의 바람을 마신 된장 빛 항아리
아내의 손이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
손길 따라 푸른 이야기가 돋아난다
실타래로 감겨있던 시간들이 풀리고
할미꽃 아래 숨은 할머니의 자장가
부엉이 울음 밤도 불러내고 있다
내 손이 약손이다
내 손이 약손이야
등잔불 아래 횟배를 쓰다듬던
할머니의 손도 항아리를 닦는다
항아리에 가라앉은 묵은 말씀도
울타리의 내력도……
두 손이 하나 되어 항아리를 닦는다
뒤란의 닭벼슬 꽃1)이 붉은 알을 낳는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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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닭벼슬 꽃 : 접시꽃의 방언
고무신 두 켤레 달빛에 젖고
― 둔덕 집 아지 할머니 옛 얘기 중에서
마당과 부엌에 일은 넘치는데 놀아달라 조르는 신랑을 디딜방앗간 초가지붕 위에 올려놓았다 신랑은 박넝쿨 사이에서 잠이 들었다
“자-가 우타 올라갔나?” 재 넘어 콩 밭에서 어스름을 이고 온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다그쳤다 사립문 앞에서 며느리는 얼굴만 붉히는데 꾸지람 소리에 잠이 깬 신랑이 “어망이요 내가 올려 달라 했사요, 다르 볼라고요”
시집살이 삼 년 친정 우물같이 시리고 아름 감나무 같은 말에 며느리는 신랑을 다급히 안아주었다 어깨 넘어 지붕 위로 떠오르는 달 신랑은 푸르고 숨찬 달을 보았다
“니는 오늘부터 에미 방으로 들지 말거라!”
문을 닫는 목소리 늦 가을 서리빛이었다
그날 밤 건너 방 섬돌 위 고무신 두 켤래 달빛에 젖고 안방 문이 가만가만 열릴 때마다 달빛 묻은 박꽃 웃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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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척 방언 (우타 ‑ 어떻게, 어망 ‑ 엄마, 다르 ‑ 달)
잡풀
콩밭을 맨다
쇠비름, 괭이밥, 여뀌, 개망초……
콩밭에서는
수수, 참깨도 잡풀이듯
들깨 밭에선
콩도 밭벼도 잡풀일 뿐이다
땡볕에서 콩밭을 매며 들었다
서걱서걱 목쉰 듯
들려주던 호미의 말
길 아닌 길에 서면
사람도 부처꽃도 잡풀이라는
그 말
발목으로 집 지키기
발목이 아프다
띠에 묶여 집 보는 아이
새벽부터 식구들이 조밭 매러 간 빈집
연기에 그을린 까만 벽
서까래 틈으로 햇빛이 은비처럼 새는 봉당封堂1)
달그랑 달그랑
쥐들이 실강3)의 양은그릇 넘는 소리에
뾰쪽뾰쪽 귀를 세우다가
마른버짐 피는 맨몸에 파리를 쫓다가
뒷문으로 몰래 도망가는
바람을 잡으려 허공을 쥐어도 보고
놋양푼의 물감자밥
또, 건져 먹고
띠에 묶인 발목이 정지2) 문턱에 막혀
그렁그렁 눈이 젖은 박새 소리 듣다가
부엌마루 서늘해지는 해 질 녘
허공 다리 건너는 기차 바퀴소리
가시랑, 가시랑
부지깽이 든 부뚜막 귀신에 쫓기다가
얼굴 없이 뒷걸음치는 엄마
지는 노을 속에 엄마를 만나다가……
발목이 아프다
내 허리를 키워온 밭이랑의 발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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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부엌의 맨흙바닥
3) 시렁의 방언
울음풍선
남북으로 나뉜 도로변
고라니가족들 모여와 울음 풍선을 날린다
칼바람에 싸락눈 날리는 아침
자동차 전용도로 도경에서 미로 사이에
고라니 한 마리 쌓인 눈을 붉게 물들인다
아직 다 거두지 못 한
가쁜 숨결을 몰아쉬며
열린 동공은 이동통로를 찿는 듯
도로중앙의 분리대를 향한 채
몇 번이나 기회를 엿보다가
눈 내리는 지난밤
산 아래 가족과 살던 도로 건너려다
자동차에 부딪쳤나?
감지 못 한 동공에
가족들의 목소리가 들리는지
쫑긋 두 귀를 세웠다가
가쁜 숨결을 몰아쉬며 감은 눈은
철망 넘어 갈대밭을 향하고 있다
그날부터
남북으로가 그어놓은 고속국도변에는
중앙분리대를 넘지 못 한 고라니들
몰려와 울고있다
오늘도
국도변에서 부모형제를 부르는 고라니들
어둠을 찢으며 울음풍선을 날리고 있다
매혹의 향기
안개가 수상하네 봄 바다를 숨겨버린 저놈 능파대, 와우산을 기웃대며 회색 탈을 쓴 저놈이 천 길 벼랑 철쭉꽃 향기마저 감추었네
검은 머리 쓰다듬 듯 꽃비 오는 밤 수로부인 소리 없이 용궁으로 간 것은 누군가 바닷길을 몰래 연 것이 분명해 어둠 속 해룡의 눈도 더욱 푸르게 한 게야
사람들아! 제 몸 붉어진 저놈이 바다를 품는 날은 해가사 터엔 가지 마오 연인과는 더욱 가지 마시오 저놈의 주술에 사내는 붉은 절벽을 오르고 여인은 스스로 거북등을 타버려 다시 돌아오지 못하리……
그래도 가실 분들일랑 사랑의 여의주1)로 철쭉꽃 벼랑 용궁 가는 길 물어보고 가시오 햇빛 좋은 날 시루메 마을에 가서 거북등 굽는 법 배우고 가시오
파도가 수상하네 안개와 내통한 채 은밀히 속살거리는 파도, 진주 빛 거북눈을 부르네 임해정2)에 묻어나는 천년의 연가를 불러내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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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증산마을 해가사 터에 세워진 조형물로 사랑을 기원하는 기념비
2) 臨海亭, 삼국유사 수로부인 전에서 해가라는 설화를 토대로 증산동(시루뫼) 해변에 조성된 정자
단디이 바아라
1. 끼다 가타
여인은 산을 올랐다
수도修道하던 남편에게 사리舍利가 나왔다고
스님은 함函을 건네고
산처럼 돌아앉아 목탁을 두드렸다
단디이 바라 그믐 다알 가아타
단디이 바아라 그믐다릴 끼이다
가타 끼다 끼이다 가아타……
어둠이 내리는 하산 길
여인의 가슴에는 검은 빗물이 가득했다
2. 스님들
산길 내려간 목탁소리는
계모임, 동창회, 관광버스에도 실려 갔다는데
어디서 숨겨 왔는지
유채꽃 몰래 키우던 아내가
큰 처형에게 노란꽃가루를 날리자
마른논 봇물 밀리듯 수화기를 넘쳐오는
“단디이바라단디이바라
단디이 불러라, 단디이 웃겨라!”
큰스님의 법문에 꽃대 꺽인 작은 스님은
단딘이 단딩이 창을 잠그고, 봄내
노란 꽃잎을 토하곤 했다
단디이 바아라 단디이바라 단디이 봐라……
3. 느릅나무, 조팝나무
꽃가루 때문에 아내는 뛰어가곤 했다 그때마다 조팝나무처럼 가볍다며 나는 성황당 오백 년 느릅나무였는데 작은방 문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목이 깔깔해진 것은 봄꽃들 시 세워 앞산을 오를 때였다
아내가 이웃 간 저녁 나는 작은방에서 꽃가루를 토하기 시작했다 지붕 위 저녁 하늘을 수놓던 찌르라기 떼의 점묘처럼 꽃가루를 날리고 또 날려 보냈다 놀란 소나무가 달을 급히 밀어 올릴 때 문 앞의 긴 그림자를 보지 못한 채
보름, 보름달 때문이라 했지만 느릅나무 된 그림자는 조팝나무 잎을 천천히 내게 던지고 있었다 어깨 넘어 달의 시퍼런 웃음 때문에 다시 보으‑름 보‑으름 달이라고 마른 새끼줄처럼 혀를 꼬았다
단디이 바아라 단디이 바라
단디이 봐!
4. 내 안에 살고 있는 놈
머리에서 자갈 구르는 소리가 났다. 과음, 과식, 과속, 횡단보도의 신호등도 단디이 단딩이 하라는 그놈 때문에
저녁 반찬이 풋고추뿐이라고 놈이 또 목젖을 보이기 시작했다 당뇨, 고지혈도 없는데 까끌거리는 수수며 율무 밥을 먹어야 하냐고 상다리를 발로 밀기까지 했다
나는 소주 몇 잔에 신이 되어 말했다.
“너는 마약 같은 놈이며 이성을 흔드는 악마요 악성바이러스”라고 놈은 울먹이며 고개 숙인 채 뒷문으로 나가버렸다
단디이바라 단디이바아라 단디이바아라!
이팝 꽃 피던 저녁이었다 티브이에서 북한이 쏘아 올린 미사일, 불법선거, 세탁기로 돈 빨래하는 법을 쏟아내고 있는데 아아! 낮 익은 탄식소리가 창문으로 들렸다 급히 놈을 불렀지만 찾을 수 없었다
오늘도 뚝길을 서성인다 닷새 끊은 소주병 같은 그놈 때문에……
연락 바랍니다 놈의 이름은
단디이바라 단딘이바아라 또는 단디이 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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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디: 단단하다
끼다: 그럴 것이다(삼척 방언)
제2부 민들레꽃
담쟁이
아득한 벼랑
생채기진 가슴으로
헤매어도
끝내
찾지 못하는
마음자리 하나
차가운 암벽 어디
그 어디에
꽃다운 말씀은 숨어 있는가?
시월
가슴 홍역 꽃
또, 도지고 있다
민들레꽃
12월 중순 무렵 하소1) 부근 빈 밭에
민들레 꽃 한 송이
한 치 못되는 작은 몸, 어디
그 어디에
황금빛 염료를 숨겨왔는지?
칼바람 속에서도 피워낸
노란 꽃 한 송이
생의 봄은 늘 우리의 가슴에 숨어있어
스스로 꽃피워야 한다는 듯
초동 하늘 향해
머리 꼿꼿이 세우고 있는
한 송이 민들레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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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1리 오십천 하소下沼
무지개 바위 달빛 젖을 때
아따가?1)
게따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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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잠시 후에(삼척 방언)
꽃다지 핀다
꽃다지 핀다
수구재 황토 길에
때 묻은 광목 자루 멘 군복 입은 아저씨 따라
언덕길 내려오던
그 아이
버짐 먹은 빡빡머리 때문인지
바지에 덧댄 천 조각을 보았는지
까~륵 까~륵
노란 웃음 날리며 지나치던
그 아이
절름이는 아저씨 따라가다
또, 돌아보며
꽃 손 흔들던 아이
그 아이……
꽃다지 핀다
단발머리 그 아이
보봉호 연가
― 중국 장가게 寶峰湖
가야겠네
가슴으로 아지랑이 타는 한낮
치렁치렁 물소리 온몸에 흘러
보봉호로 가야겠네
봄눈 녹아 제 가슴 부풀리는 물길 따라
노 저어
노 저어 쉰 모롱이
복사꽃 실눈 뜨는 토막土幕의 뜰 앞에서
무심히 흐르는 길손인 양
삼세번 손뼉을 치면
귀 밝고 눈 맑은 토가족土家族 여인
맨발로 문 열고 노래 부르리
호수의 기암을 날아오른 노래가
무지개다리 놓을 때
기린처럼 목이 길어진 나는 답가를 부르리
온몸에 물든 복사꽃잎 토하듯
한 곡
두 곡
세 곡……
노래에 취한 여인
발자국 없이 무릉으로 숨어들어
꽃신 같은 달로 뜨면 나는 두꺼비 되리
보름달에 눈 감는 보봉호의 두꺼비 봉이 되리
가야겠네
산에 들에 들꽃 타는 봄날
자근자근 혈맥에 흐르는 뱃길을 따라
다시 보봉호로 가야겠네
사랑한다는 말은
사랑한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날개 달린 새
입술을 떠나는 순간 날아가 버립니다
매처럼 날렵한 날개 때문인가요
우리는 새끼손가락을 자물쇠처럼 걸고
엄지를 맞대어 화인火印을 남깁니다
펄펄 끓는 그 말을 손바닥으로 복사하고
쿵쿵 울리는 가슴을 맞대어
심장의 고동마저 묶으려 합니다
사랑한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은 날개 달린 새
퍼뜩이는 새의 날개를 복사하고
묶을 것이 아니라
훨훨 날려 보내야 합니다
얼음벽으로 굳어가는 서로의 가슴으로 날아가
인고忍苦의 날개를 펴고, 쉼 없이
쉼 없이 사랑의 불을 지펴야 합니다
사랑한다
그대를 사랑한다는 말, 그 말은
홍도紅島
누가 숨겨놓았나
서남쪽 바다 한 곳
푸른 파도소리 베고 누운 여인
고량주에 취한 듯
어질어질
그대 품에 안긴 금빛 한나절
끓어오르는
고열을 감추고 떠나온 뒤
떠나온 뒤에야
자근자근 멀미하며
금강석처럼
닦고 또 닦는다
푸른 거울 속의
꽃 시간
그대의 붉은 몸
그 여자의 춤
바람이 주름을 부풀리는 천막 아래
춤추는 여자
오가던 발걸음들이 호떡 값을 물으면
가쁜 춤 내려놓으며
동그란 우물 하나 볼에 그려놓는
그 여자
아버버, 아아아버버……
금이 간 그녀의 말들이
입술과 손가락에서 나비처럼 날아오른다
퍼즐 같은 말을 맞추던 사람들은
그녀의 춤과 말을 흰 봉지에 담아
교차로와 골목으로 사라진다
얼음바람이 천막을 흔들어도
하루의 뒷덜미를
어금니로 꽉 물고 있는 그 여자
온몸으로 춤추고 있다
그녀의 춤과 어둠을 떨이하고 싶은
소한의 저녁
흰 꽃송이들이 함께 춤추기 시작한다
아버버버, 아아아버버버......
고깔 속의 해
뽕나무 잎으로 고깔을 만들었다
쥐똥나무 잔가지로
울퉁불퉁 꿰맨 자리가
지나온 길 같다
그 길을 함께 걸어오며
숯이 되었을 가슴 같은
오디 한 줌
고깔에 담아
아내에게
가만히 건네주었다
초록 고깔 속에
또 하나의 아침 해가 숨어있었나
아내의 얼굴이
은빛 여울로 빛나고 있다
분실紛失
내일은 출근해야 한다고
사위와 딸아이가
어둠이 내리는 마당을 돌아나간다
강아지 같은 손자
태랑이 앞세우고
어디쯤 갔을까?
무더운 새벽
가슴엔 찬바람 소리
얘들,
얘들이 뭘 놓고 갔나?
마당에
목 백일홍 향기
그대로인데……
웃음꽃
봄 아침
은빛 햇살 쏟아지는 창가
아내는 눈을 감는다
찻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싼 채
아내의 얼굴에
반짝이는 햇살의 날개들을
커튼으로 가만히 쓸어내리자
늘어가는 주름도 지워버리는
웃음꽃
눈이 부시다
종소리
종소리 울린다
산비알
참깨 밭에
봄여름
뭉그러진 호미
닳고 닳은 무릎으로 만든 종소리
종소리 울린다
첨탑도 종각도 아닌
깨밭 머리 할머니의 둥근 하늘에
수천,
수만 송이
하얀 종소리 울린다
맨손으로 황어黃魚잡기
잠시, 모난 숨결을 다듬던 아내는
병아리처럼 종알대는
여울 속으로 걸어간다
참새를 앞에 둔 새매의 발처럼
물의 건반을 두드린다
날선 손가락을 따라
튕겨 오르는 투명한 구슬의 음계들
물가에 앉은 나는
반짝이는 노래의 올들을
해묵은 기억의 물레에 천천히 감고 있는데
아, 아, 앗!
송곳 같은 외침이 강을 가로지른다
팽팽하게 부풀던 무지개 바위 메아리가
오십천 가쁜 숨결 위에
토막토막 잘려나간 뒤
아내는 펄떡이는 황어 한 마리
왕관처럼 높이 들고
온몸을 은빛 햇살로 칠하고 있다
검객ㆍ1
강냉이 송이를 비틀자
투툭, 숨 줄 놓으며
출렁이는 이파리들
순간
손목에 솟아나는
붉은 피
급히 놈을 바라보자
어느새
검을 숨겨버렸나
강냉이 잎들만
시퍼렇게
나를 겨누고 있다
적병산은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억년의 바람소리
오십천의 꼬리긴 노래도
허리 속에 켜켜이 쌓아놓은 산
적병산赤柄山은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돌아드는 봄가을
꽃다운 기억의 시침을
면사무소가 보이는 간이역에
칡넝쿨 같은 치렁 사랑으로 묶어놓고
도계,영주,서울
도경, 묵호, 강릉 가는 기차를 기다린다
꽃잎처럼 기적소리 날리며
역무원 없는 플랫 홈에 기차가 서면
보퉁이 이고지고
언덕을 내려오던 사람들
영부 형, 쾡이칠 영감님 가계를 지나던
푸른 발자국들을 적병산은 기다린다
미로역에서
흰 머리채의 연기 뿜어 올리며
떠나간 기차를 기다린다
두물머리 마주치는
물속에 서서
붉은자루로 익어가는 산
적병산은 오늘도
미로역1)을 출발하는 완행열차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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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未老驛, 삼척시 미로면 소재
뼈 속의 새
― 삼척 대보름 축제장에서
남미의 원주민들이
케냐1)의 심장에서 새들을 불러내고 있다
늦겨울 칼바람에도
숯불의 날개를 펄럭이는 새
안데스의 시린 창공을 치솟던 푸른 새들을……
호흡이 가빠질수록
활줄처럼 팽팽해지는 몸 울음,
등에 돋은 날개깃이 허공을 날아오를 듯 출렁인다
새처럼 푸른 날개로
하늘을 오르고 싶은 것인가
태양신을 향한 잉카의 주술 소리가
내 그림자 따라와 누운 밤
휴전선을 넘고 몽고의 초원을 지나
혹한의 베링 해를 건너는 새
록키와 안데스 산맥을 유유히 넘어가는 새들
내 뼈 속에 숨어있던 새들이
피리소리를 내며
밤 새 날아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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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페루의 인디오들이 사용하는 소형 피리
편지
“우체부 아저씨!
편지함 속에 박새가 집을 짓고 있으니 우편물은 함 위로 올려주시오!” 창고 기둥에 연필로 꾹꾹 눌러 쓴 할아버지 마음이 편지함을 지키고 있었다 가슴이 붉어진 박새는 쉬지 않고 흙과 마른풀을 물어왔다 스무날이 지났을까 편지함에서 실비 오듯 노래가 흐르기 시작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우체부 아저씨 고양이를 막아준 워리에게 보내는 노래, 박새 가족이 온몸으로 쓰는 감사의 노래였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편지함 앞에서 두 손 잡은 채 귀 기울이고 워리도 어둠 속에서 흰 꼬리 흔들어 늦도록 답장을 쓰고 있었다
제3부 소묘素描 속의 비
삼복三伏에 내리는 눈
숯불로 타오르는 삼복의 인사동거리
인사아트 갤러리 풍경화 속에서
흰 눈이 내리고 있다
펄 펄 펄……
눈보라 속에서도 땔감 나무 이고
산길 내려오는 구불 한 오솔길에
할머니의 머리 어깨에도
어린 아이 주먹만 한
함박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다
펄 펄 펄……
인사동을 걸어 나오는
내 머리위로
숯불과 흰 눈이 함께 따라오고 있었다
나는 보았네
물은
낮은 곳
낮은 곳으로만 흐른다고 알았는데
나는 보았네
누군가를 위해
솥 안에서 끓어오르는 물
펄 펄 펄……
누군가의
저녁밥이 되기 위해
앉은뱅이가 되는 물을
나는
나는 보았네
향기의 꿈
1996년 오슬로의 어느 로터리
땅을 불쑥 뚫고 나온 장미 한 송이를 쥔 손
검푸른 청동 조각의 향기에 오래 두통을 앓다가
기억의 갈피에 묻어버렸다
2011년 7월 오슬로의 시민들이 손에, 손에 장미꽃을 들고 시청 광장을 물들였다 테러1)에 사망한 이들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은 무능했던 경찰, 정부에게 분노의 돌 대신 장미꽃을 전했다 사람들은 오슬로의 가슴에 톨레랑스2)가 피었다고 했지만 시민들은 조국의 평화 국민 화합의 다짐으로 희생자를 위로했다
2016년 9월 꿈을 꾸었다
노란 리본과 천막이 사라진 광화문 거리에서
이 땅, 들쑥 향으로 가득한 화합의 꿈
가슴 짓누르던 가위 풀리는 새벽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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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Breivik 사건: (2011.7.22)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77명이 사망한 테러사건
2) Torlerance, 자기와 다른 종교, 종파, 신앙을 가진 사람 대한 관용과 용서
환치換齒
구름마저 암벽의 허리에서 주저앉는
유리잔도 건너
장가계 천문산을 올랐다
천문사 향내로 온몸 씻은 뒤
하늘 문 앞에 섰지만
천왕께서는
“아직, 세상의 때가 남아 천국은 어렵다” 하여
나는 인간 세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산을 내려온 뒤로
무릎에서 서늘한 바람 소리가 나고
앞니 두 개가 새 집 달라고 삐딱하니 선 채
잇몸을 찌르며 투정을 한다
나도 모르게
뒤란의 새싹처럼
새 이가 뾰족이 고개를 들고 있는지?
소묘素描 속의 비
소녀의 검은 눈에서
붉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다
때 묻은 손등으로
움켜쥔 빵 조각에
그녀가
겹겹이 쌓인 액자 속의 어둠을
발자국 소리 없이 걸어 나오는 저물녘
기억 속의 찬비가 내린다
원당리 지나 마평리 외나무다리 또, 건너
작으락, 작으락
겨울비 내리는 오십천 하교下校 길
허기진 발자국에 고이던 빗소리……
소녀의 어깨 넘어 울렁이는 여백에
점심시간 친구들 도시락의
밥알 같은 비
흰 비가 떨어지고 있다
못대가리들
못은 없다고 외과의는 단호히 말했다 있다고 해도 이미 몸속 깊이 박혔으니 내과로 가라 한다 엑스레이와 초음파 검사를 했다 그것 보라는 듯 내과의는 껄껄 웃으며 안정제 몇 알 처방할 테니 집으로 돌아가라 한다
“열이 있긴 한데?” 이마에 땀을 닦아주던 아내는 물음표를 남기고 방을 나간다 음주로 차를 버리고 간 어느 연예인 국민의 이름으로 거래를 했다는 낮 익은 얼굴들이 화면으로 흘러나오고 제 아이를 발로 눌러버리는 엄마 돈 때문에 제 아비의 목을 조른 남매
순간 가슴 위로 삐쭉이 고개 드는 못
못대가리들…… “외과 외과로!”
나는 못대가리를 잡은 채 소리만 질렀다
아내의 목소리가 꿈결에서 망치처럼 내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여보 정신 차려! 이 땅의 외과는 만원滿員이야, 만원
뻐꾸기
너의 전화를 받는다
지금쯤은 풋보리 바심하던 마당
꾹-죽, 꾹-죽, 보리개떡
뻐꾸기 노래 수구재를 넘겠지
몇 잔 소주인가
천둥지기 논처럼 붉게 금이 간 너의 목소리
외나무다리 건너듯 어질거리고
설익은 산복숭아처럼 새콤하다
감꽃 함께 줍던 너의 전화를 받는다
박달나무지게, 누렁이 고삐 놓고
재 넘어 기차를 탄 아이들, 이 밤
뻐꾸기 노래 듣는지……
유년의 시간이 기울도록 전화를 받는다
봄 깊은 무쇠솥 풀뿌리 익는 냄새
절름대던 옛 봄은 돌아갈 줄 모른다
꾹-죽, 꾹‑죽, 보리개떡……
통화와 약속
쪽방 노인이 병원차에 실려 갔다는
친구의 말이 조기弔旗처럼 펄럭였다
지하철 계단에서 노숙자 한 명이
들것에 실려 가는 것을 봤다고
출근은 하고픈데 중앙공원이라고
4월의 선거 차량에서
“믿어 봐요! 믿어봐!”
노래와 율동이 숨 가쁘고
“걱정 마요 여러분 약속은 금金입니다!”
“믿어줘요, 바람에 갈고닦은 제 말을”
말들이 검은 천 조각처럼 펄럭였다
얼음 조각 같은 친구의 말과
차량 위의 약속들이
폭설처럼 쏟아지는 오후
내 가슴은
콘크리트 벽처럼 천천히 금이 가고 있었다
탈을 세다
누가 오든 말든
돌부처로 누워있는 콩달이1), 내가
뜰로 나서면 전사가 된다
근무 중 이상 없다는 듯
무쇠 공처럼 뛰어오르며 시퍼런 살기를 뿌린다
고양이, 참새 오가는 사람들에게도
이놈이 수상하다
아내에게 “녀석이 탈을 쓴 것 같다” 하니
“저도 잘 보이려고 하는데 그냥 두라” 고한다
그 말
뾰쪽한 바늘 같은 그 말에
각시탈, 양반탈, 백정탈, 할미탈……
내게도 숨어있을 탈
탈을 세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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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아지 이름
모란
누가 노래하고 있나
단단히 감긴 실들을 물레질하고 있나
방앗간 집 둘째 딸은 밤마다 보리밭으로 간다고 했다 깜부기대로 몰래 피리를 불면 달빛에 취한 이삭들이 푸른 춤을 쏟아낸다고 했다 모자에 작대기 세 개면 계급이 뭐냐며 아이처럼 얼굴을 붉히며 묻기도 했다 꼴 베던 낫 놓고 혼자 깔깔대다가 검지를 하늘로 세워 쉬쉬, 너도 언젠가는 피리를 불게 될 거라며 복사꽃 한숨을 토했다 무장공비를 잡는다며 뒷산에 참호를 팠던 군인들이 떠나고 베개를 업은 채 맨발로 뒷산을 오르던 열아홉 누나는 무서리 내리는 밭 언덕 가래나무에 매달려 말이 없었다 아랫배를 단단히 묶은 광목천을 보인 채
누가 노래하고 있나
밤 늦도록 모란꽃잎을 하얗게 토하고 있나
멈추지 않는 노래
누가 노래하고 있다
후쿠오카의 하가다 타워에 올라
가만히 눈감아 귀 기울이면, 파도에
실려 오는 푸른 목소리 허공을 맴돌고 있다
소금물인가, 독약인가?
알 수 없는 약물에 취해서도
끝내 노래를 멈추지 못한 곳은 어디인가
이 땅, 어느 곳인가?
한글, 순 한글을 노래 한 죄로
남의 땅 차가운 창살에 갇혀
별이 된 시인 윤동주
아직도 흰 옷의 이마에
화인으로 찍힌 노래
노래들을
꼿꼿이 허리 세운 파도가 낭송하고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1)을 노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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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윤동주 시인의 시집 제목
별
안개 비 오는 밤
개똥벌레가
호박꽃 속으로 숨어들었다
눈먼
하늘과 땅 사이
푸르른 꽃불 하나
발걸음 소리마저 감춘
작은 우주가
어둠 속에 빛나고 있다
눈뜨지 않으면
잠 깨어 눈뜨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별
4월의 폭설
가로수와 벽보에서
부풀어 오르는 말
말들이
검은 새 떼처럼 날아오른다
국민을 위해
국민을 으한
오직, 민을 우으한 ~
거리와 골목으로
쌓이는 말
말씀들 위로 눈 내린다
원근을 잊어버린
눈먼
풍경화처럼
검은 눈 내린다
귀뚜라미 연가
밤새워 노래해도 간다
밤의 보자기에 꽁꽁 묶어도 간다
두꺼비만 한 자물쇠를 채워도
푸른 날은
가고야 말지
너의 노래로 산과 들이 젖어도
움직이는 별자리
벽시계의 가쁜 걸음을 묶을 수는 없지
눈부신 아침 해에
숲에 매달린 은빛 구슬들의 몸짓
바람의 붉은 숨결에도
차가운 작별의 노래가 숨어 있어
저길 봐!
산과 들에 쏟아지는 햇살
네 노래에 취한 꽃나무들이
색색으로 각혈하는 노래
붉은 음계의 고별 노래를……
용서
누가
누가 다녀갔나?
한나절
밭 비운 사이
토마토 통통한 뺨마다
봉숭아 꽃물
빨갛게 물들였나
누가
누가 몰래 다녀갔나?
내
이놈을……
혼돈混沌
콩이가 달을 향해 짓고 있다
네발 버티며 짖고 있다
어젯밤 서쪽 언덕이
달을 살해하는 걸 보았다고
달을 삼킨 언덕의 뾰족한 이마를
두 눈으로 보았다고
저, 달의 붉은 웃음
어제의 모습 그대로인가?
계수나무 아래
토끼의 방아 소리 이백의 달 노래도
비행기의 굉음에 묻혀버렸는데
콩이1)가 달을 쏘고 있다
시퍼렇게 날 선 물음표를 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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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테리어 종류의 혼종 강아지
대관령
양고기를 굽고 노래하며 취하는 동안
몰래 붓을 든 어둠이 대관령의
이마를 오디 빛으로 칠하고 있었다
목장을 내려올 때부터
음매~에 음매~에
손과 혓바닥 온몸에도 파랗게 돋는 울음들
성난 뿔로 우리를 치어 받기라도 할 듯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오다가
대관령 옛길 부근에서 숨어버렸다
가던 길을 멈추고
어린 술래처럼 귀 기울이자
억년의 바람 소리
수만 발자국 안은 대관령이
아흔아홉 구비 산 그림자, 길 잃은
양 한 마리 울음마저 가만히 품어주고 있었다
제4부 죄와 벌
갱문坑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네
언덕의 무덤 하나
개울 건너 갱문에는
무성한 소문처럼 잡초들 일어서고 있네
진달래 타오르듯 지번을 이루던 사람들은 하나 둘 언덕을 내려갔다 저물녘 갱문을 돌아나온 사내들의 젓가락 장단의 춤 노래 사택의 회색 스레이트 지붕 아래 키우던 작은 꿈도 계곡을 돌아나갔다 아비를 만난다고 막장으로 간 아들은 갱문으로 돌아오지 못했고 백일 된 아이 옆에 휴대폰을 두고 간 며느리는 젊은 사내를 따라 밤차를 탔다 선탄장選炭場에서 괴탄塊炭을 골라내며 빈 사택을 지키던 노란 무 잎 같은 여인은 마른기침 검게 토하며 갱문이 보이는 언덕에 바위로 남겠다고 했다
아직, 기다리고 있네
바람도 엿보지 않는 검은 하늘 아래
무덤 하나
갱문을 향해 단단한 기다림을 키우네
화석化石
그는 닷새 만에 갱구로 돌아왔다
마스크 자국이 일그러진 낮달처럼 찍히고
검게 부어오른 얼굴로
작업복에서 아직 막장의 열기가
마지막 숨결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
동료들의 탄식과 웅성대는 울타리를
맨발로 달려온 아내의 울음이 허물기 시작하자
하늘만을 고집하던 그의 이마가
아내의 무릎으로 천천히 돌아누웠다
가슴에 참아온 말을 조심스레 건네듯
아직도 출구를 찾는
살점이 떨어져 나간 손을 펴자
가쁘게 몰아쉰 호흡처럼 꼬리 잘린
메모지 한 장
여보잘사라딸아이는 간호사
작은 놈 – 으, ㄴ........
구급차가 눈물과 웅성거림을 거두어가고
갱구를 떠나지 못하는 바람이
밤새 신음하고 있었다
탄부들의 가슴으로 걸어간 편지는
화석
검은 화석이 되었다고
죄와 벌
산업전사라며 팔뚝에 힘주어
불을 캐던 때가 있었고
불을 가져온 죄로
간 대신 폐를 내어준 사람들이 있다
정선, 태백, 도계의 낡은 사택에 누워
빈 손바닥으로 가슴을 말리는 사람들
장성, 동해병원에서
가쁜 숨 몰아쉬는 이들이 있다
천 길 지하에서 불을 가져온 건
죄도 아니라는 날들이 있었고
죄를 갚는다며, 갱도坑道에
폐를 묻어버린 젊은이들이 있었다
하루가 돌아눕는 0시 마른기침 토하며
불을 캐는 사람들
천형天刑 보다 무서운 건 아이들
청무같이 자라야 할 아이들이라며
아직, 불을 캐는 사람들이 있다
끗발 죽이기
삼팔 따라지를 광땡으로 알고 땅문서마저 던져버리고 홀씨처럼 날아온 그 승갱昇坑1)의 사다리 길을 오르며 갱목의 흰 곰팡이처럼 자라나는 끗발 때문에 어깨에 멘 동발2)이 하늘에 자꾸 부딪친다고 하던 그는
천 길 지하 갱도에 기대앉으면 갱도를 따라 흐르는 물소리가 고향 가는 기차 소리, 저녁상에 둘러앉은 식구들의 둥근 목소리로 들린다며 두 귀를 움켜잡던 그
차표 없는 사람 기차 태워주고 맨몸으로 온 사람 보증 서주고 외상으로 살던 그는 지난달 출수로 숨진 이 씨 어제 붕락崩落으로 숨진 최 씨도 고향으로 함께 가자했다며 영안실 화목火木 난로 옆에서 새벽을 밝히던 그는
수 십 년만이라는 폭우가 동해안을 할퀴고 간 가을 칡넝쿨처럼 자라던 끗발을 자르고 말았다 보름 만에 빈손으로 돌아온 그는 독신자 합숙 출입문에 끗발의 목을 주나3)로 단단히 매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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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raise, 하부에서 상부로 오르는 경사진 갱도
2) 지주용 나무
3) 나무 등을 운반하기 위한 끈
승리자
― 괌 남쪽 해안 둘레 길에서
물소를 탄 그는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검은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하, 하-앗!
가족들의 탄성이
차창 밖으로 은빛 새떼처럼 날아오르자
그의 웃음도 허공으로 솟아오른다
탄성과 웃음이 손을 잡는다 꿈같이 지나간 시간의 길 위에 우리 이마 맞대고 웃은 적 있다고 산맥과 대양으로 헤어질 때의 몸 냄새를 기억하고 있다고 웃음과 웃음이 둥근 고리처럼 손을 잡는다 허공에서 꽃다발로 빙글빙글 돈다
지는 해의 고삐를 꽉 잡은 그는
물소를 탄 채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었다
V자의 손가락 노을에 적시며
새
그녀는 새가 되었다
새장 속에서
빛바랜 시간의 깃털을 쪼고 있는 새
수많은 탄성의 화살
카메라의 빛도 삼키는 불 가슴을 가진 새
수 세기의 바람 강을 건너도
눈썹은 자라지 않고
풀리지 않는 마법의 미소만 짓고 있다
단 한 번 가출1) 한 죄로
외출은 금지되었고
보이지 않는 흰 울음소리를
찢어진 깃발처럼 흔들고 있는 새
루브르 박물관의 철망 속에서
종달새의 날개를 몰래 키우는
모나리자
그녀는 날개 묶인 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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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11년 모나리자 도난사건
혈서血書
숲을 흔드는
매미들의 외침은
깃발처럼 타오르는 불의 문장이다
그들의 연서가
짝짓기라, 마침표를 찍는 것은
사전의 덫에 걸린 날개 없는 말의 변주일 뿐
사람의 길이
구애로만 걸어가는 것이 아니듯
푸른 한지의 흘림체에는 여백이 많다
보라!
삼복의 허공을 울리는 붉은 혈서들……
그들은 피울음을 쓰고 있다
누구의 길도
길 아닌 길은 없다고
흑산도는 빨간 고깔모자를 썼다
여객선을 쫓아온 노을이 흑산항을 물들이는 저녁
흑산도 아가씨 노래비에서 걸어 나오는
조각조각 서러운 세월, 사리마을1) 복성재
성당의 십자가에 서걱대는 바람
검은 바다 바라보다 “사약 실은 배인가?”
가슴 조이며 적어 내렸을 자산어보2)
꽃뱀같이 똬리 튼 노을이 스르르 풀릴 때
민박집에 누워 퍼즐처럼 맞춰보는
하루의 여정
소낙비 쏟아지는 뱃머리에 어구를 챙기는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 외침이
허공에 새겨놓는 고된 하루의 멍 자국……
흑산도는
밤새 잠 못 들고 꽃 멀미로 흔들리고 있다
빨간 고깔모자를 쓴 채
--------------------
1) 沙里마을, 전남 신안군 흑산면 사리
2) 玆山漁譜, 손암 정약전(1758~1816)이 유배생활 중 집필
창槍
에펠탑, 베르사유 궁전
루브르 박물관은
코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화가의 거리
쾰른 성당의 잔다르크, 루이 9세의 기마상도
뾰쪽한 코다
콩고드 광장도
하늘을 찌르는 민주의 코로 만들어졌지만
광장의 룩소르 오벨리스크1)는
역사를 꿰뚫는 거대한 바늘이다
바늘,
뾰족한 바늘이 아니라면
클레오파트라의 코다
센강 심장에 깊이 꽂힌 이집트의 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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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obelisk, 이집트의 룩소로 신전에 있던 쌍둥이 오벨리스크 중 하나
혀를 잃다
거울 속의 혀가 보이지 않는다
입을 더 크게 벌려도
목젖 깊숙이 숨어버리는 혀
두 손으로
위아래 턱을 힘껏 당겨본다
혀다
낯선 웃음소리만 새어 나오는 혀
나를 결박한 불면의 그림자가
새벽 창에 흔들린다
펜으로
놈의 목을 조이고 또 조여도
유령처럼 킬킬거린다
원고지에 있어야 할
혀
나의 혀가 보이지 않는다
폭설
아흐레 동안 제 키를 아홉 자 부풀리고 또 뒤꿈치 드는 눈꽃들 티브이는 전선으로 제 혀를 묶었고 버스는 길을 잃었다고 매운바람에 기별을 전한다 언덕이 더욱 둥글어지고 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두타산頭陀山이 신음하는 소리를 안고 천천히 골짜기를 돌아 나오는 애저녁이 눈 속에 묻힌 창문을 기웃거리자 솜사탕 모자를 눌러 쓴 언덕의 집들이 하나 둘 주황색 불빛을 풀어놓고 있다
불빛의 올 하나를 팽팽하게 잡고 눈길을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인적 끊긴 역 마당에 서성이는 너를 아직도 떠나지 못한 목쉰 기차의 기적이 눈 속에 새파랗게 떨고 있는데……
푸른 너를 찾으려면 지나간 빛의 속도를 앞질러야 한다 네게로 가는 나의 숨찬 발걸음에 온몸이 까맣게 타버리면 너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가슴으로 꽁꽁 묶어줄 수 있을까?
밤새 쌓이는 눈이 재를 넘는 소문처럼 부풀고 너와 나의 거리가 푸른 강물 소리로 풀리는 새벽 네 발자국 속에
숨은 말들이 폭설이 쌓인 언덕으로 걸어 나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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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영동지역 폭설
비문碑文1)
바람이 불어온다 비문 깊숙이 묻어둔 어제의 말들이 무성영화의 필름처럼 흔들리며 걸어 나온다 바람만이 자유로운 터에 숨어든 사람들은 꿈을 꾸었다 하루 또, 하루 지는 해를 예감하며 새 아침의 열쇠를 다듬었다 하루에도 천리를 날아가는 점괘의 날개를 비밀스레 삼키며 어제의 바람이 오늘의 바람이 아니듯 다시 해는 뜨고 용들은 세세손손 푸르게 하늘을 날아올랐다 해는 뜨고 지고 밤마다 달 먹는 해는 뜨고 지고 삼천리 호령하던 해동의 용들은 하나 둘 비문 속으로 누웠다 바람이 불어 간다 말없이 터를 지켜온 돌담 아래 민들레꽃 다시 봄을 피우고 비문의 하루를 엿보던 발자국 소리 내를 따라 흐르고 해를 쫓아 빈터를 지나는 꼬리긴 바람만이 비문에 비친 또 하나의 해를 엿보았는지 은밀히 주술을 날리며 허공으로 불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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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태조 이성계의 5대 조인 양무공의 아들 이안사가 살던 집터에 고종황제가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 친히 쓴 비(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소재)
꽃다운 끈이라 말하고 싶다
모송1)은 허리 굽혀 내려다 보고 아름 소나무들 그루터기는 둥치만 남아 능선의 모송을 쳐다 본다 이들의 눈빛이 만나는 허공의 한 점을 그리움이 마주치는 포구, 혀를 아리게 빠져나가는 안녕이라는 말이 떠나는 정거장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나는 끈이라 말하고 싶다 그루터기에 앉아 가만히 귀 기울이자 광화문, 숭례문 대들보로 떠난 소나무들이 캄캄한 창고에 묶여 있다고 모송이 울고 있다 준경묘 부근의 금강송들도 바람이 지날 때마다 산을 쩌렁쩌렁 울리며 울고 있다 길고 긴 끈 때문이다 해 질 녘 나무와 산새들 하산을 서두르는 나의 긴 그림자도 산길에 묶여 있다 태초의 하늘이 번쩍 눈뜰 때 아무도 몰래 묶인 끈 꽃다운 끈이라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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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母松, 준경묘 (태조 이성계의 5대조 묘) 부근 금강 송들의 모 송
산길
백우금관1)의 전설이 묻혀 있는 가파른 산길을 오른다 숨결이 턱 밑까지 차오르는 것도 잠시 길이 먼저 허리를 펴고 누워버린다 점점 순해지는 길을 따르다가 참나무 아래서 마주친 진달래는 몰래 능선의 혈을 짚던 중인가 붉은 얼굴로 쳐다 본다 덩달아 온몸이 불덩이 된 나는 더는 걷지 못하고 앉은뱅이 풀처럼 주저앉았다 미인송 그늘에서 바라본 준경묘는 붉은 금강송이 겹겹으로 병사처럼 호위하고 있다 터의 기운 탓인가 산길을 오르며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노래를 들었다 오백 년을 돌아 나오는 솔바람의 노래를 “산 아래 일들은 모두 바람,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바람”이라 하는데 나는 무슨 말로 바람의 노래를 색칠할 것인가 백 마리 소로 제를 올리고 금으로 관을 감싸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는 이 길 배낭에 물 한 병 작업모 쓴 채 준경묘의 전설과 바람의 말들을 표절하며 산길을 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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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白牛金冠, 준경묘濬慶墓 터가 발복發福하려면 개토제開土祭에 소백百마리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금으로 관을 싸서 장사를 지내야 한다는 설화說話
하루
― 역사의 종시終始
준경묘1) 소나무 숲에 매미들이 역사서를 읽네
그날, 압록강에서 말발굽 소리 시작되었고
만월대는 아침을 홰 올리는 깃발 가득했다 하네
바람에 입술이 닳은 공양왕 묘지는 귀마저 막은 채 궁터2)와 마방馬房3)만 바라보고 있네 삼부자와 말 무덤이 궁금했는지 파도소리가 자꾸 뒤꿈치를 들며 언덕을 넘어오고 갈참나무 숲에서 날개 검은 새들이 소금기 젖은 고려의 말들을 울컥울컥 토하네 나는 왕이 되기 싫다 나는 왕이 되기 싫다고…… 새로운 아침에 목이 조인 듯 백일홍 꽃 붉은 피 쏟는 저물녘 고려의 오백 년 그림자가 고돌산 살해 재4) 넘어 뒷걸음치고 있네
매미들만 가쁘게 사서를 토론하네, 정의와 불의
혁명과 반란, 역사의 온라인망은 수리 중이지만
아침은 반복된다 하네 길고 짧은 하루가 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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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태조 이성계 오대조 양무 공의 묘
2)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 소재 공양왕이 거주하던 터
3) 말을 메어놓던 곳
4) 근덕면 궁촌리 공양이 목 졸려 살해된 재
부여1)의 춤
― 강남스타일
숲이 수런거린다 올 해는 흔들려야 한다며 몸살에 들뜬 사람들은 말을 탄 채 하루를 건너고 이제 숲이 떠나야 할 차례 늦게 도착한 바람이 고삐를 당기자 나무들이 말을 타기 시작한다 가지를 떠난 잎들이 가을 내 앓던 붉은말言들을 허공에 쏟아놓는다 수수밭에 쉬고 있던 놀란 허수아비가 외팔을 높이 들어 숨 가쁜 바람을 채찍질 한다 하늘로 매달리는 팽팽한 말울음 제 몸짓에 취한 말들이 뛰어오르고 아리수2) 넘어 송화강3)을 건넌다 햇살 푸른 부여의 들에 말 달리는 흰옷들의 간 큰 함성 천지가 흰 말굽으로 갇힌다 2012년 늦가을 말들이 빌보드를 점령했다는 전갈로 숨차고 흰 능선 흰 들길엔 부여의 바람소리 가득하다고 숲이 수런수런 일어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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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扶餘, 중국 길림성 북부와 내몽고자치구 동부 및 흑룡강 성으로 북부여가 이주 한 곳
2) 阿利水, 한강의 옛 이름
3) 松花江,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길림성 및 흑룡강 성을 흐르는 강
복사꽃
어브
어브 가~와1)
진홍빛 목소리 날리며
버스는 떠나는데
정류장 허공을 물들이는
붉은 꽃 이파리들
다~ㅁ 에
다음 장場에 또, 오 웨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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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빨리 가시오
2) 오시오 라는 뜻의 삼척 방언
제5부 대낮
대낮
38국도
자동차들이 칼날 같은 외침을 잠시 멈춘다
콘크리트 기둥 아래 묻힌
넙적 바위가 일어나 앉는다
바위를 돌아가는 여울에 은어,
쉬리 떼 반짝인다
황새, 원앙, 청둥오리 헤엄친다
숨었던 외나무다리가 여울을 가로지르며
등허리를 꼿꼿이 세운다
바위 위에서 물속으로 뛰어드는
아이들 푸른 외침
아낙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
앞산을 쿵쿵 울린다
38국도
자동차들 외침이 바위를 다시 묻어버리고 있다
난청이 되어가는 사람들이 두 눈 뜬
시퍼런 대낮
까치들이 날아 온 곳
초등학교 1학년 교실을 훔쳐보았나?
가~가~ 겨겨겨
가~아~ 가가겨
까치들 문답소리, 언덕 위의
오동나무 교실에서 지붕으로 떨어진다
가만히 귀기울여보니
어,어! 저놈의 까치들
점점 더 어눌한 말들을 늘어놓는데
유세장을 돌아서왔나
오일장마당을 돌아서왔나
마을이 온통 횡설수설 까치소리로 뒤덮였다
저놈의 까치들…… 저놈들이 수상하다
까치 떼 울음소리에
저녁하늘이 온통 붉어지는걸 보니
큰골 머루 밭에 들렸다 온 것이 분명하다
배 한 척
수백 명이 타고 가던 배 한 척
남해 바다 맹골수도에 침몰하였다
몰래 배의 심장을 누르며 빨리빨리
바다만 건너면 된다던 이들은
기울어가는 배보다 더 빨리 제 혀를 묶었다
거리의 꾼들은 네 탓이라는 배에 올라
제 울대의 높이와 길이만 재단한다
여의호의 선원들과 선주는
물구나무를 선 체 휴식 중이라
이 땅의 일기예보나
잡풀의 탄식은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정말, 이상이 없는가?
칠천만이 타고 가는 배
배 한 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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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4월 세월 호
섬
2014년 10월 26일 어느 일간지
대학생 두 명이
섬 기둥에 검은 페인트로 새겨놓은 외침
나
니들 시러!
가끔
뉴스를 보고 듣다가 외치는
섬 하나
격렬비열도1)
격렬비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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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激烈卑劣島
낙뢰落雷
누가 어둠을 베고 간다
바람의 손아귀에 머리채 잡힌
나무들이 잎사귀를 토한다, 강아지의
뾰쪽한 외침은 마루 아래 숨어버렸다
별들이 조각난 듯 쏟아지는 비
호!
누가 경전의 한 페이지를 해독하였나
번뜩이는 문장들이
검은 허공에 흰 새떼로 날아오르고
성난 불의 눈이 어둠을 자른다
잘린 어둠의 상처에서 걸어 나온 불면이
밤늦도록 숙면을 가르치는 밤
또다시
근육질 어깨의 산들이 외마디를 지르고
천공天空을 가린 검은 천막이
새파랗게 찢어지고 있다
삼세번의 꿈
꿈꾼다
평창에 이어 올림픽 성화가 다시 타오르는 꿈을
또 한 번 성화가 들과 산을 골골이 비춘다면 사람들 일어나리 우람한 함성으로 허리 꽉 조인 철 띠를 녹여버리리 남북이 얼싸안은 아라리 칡넝쿨같이 엉킨 아라리 아라리에 북춤, 탈춤, 곱사춤, 깨끼춤, 개다리 막춤도 추리 하얗게 명줄 놓아도 덩실덩실 날아오르리 서울, 평창에 이어 삼세번의 성화가 이 땅을 밝힌다면 아직도 우리의 혈맥에 흐르는 햇빛 눈부신 북부여의 산과 들 제 키를 부풀리며 찰진 강물소리로 일어서리 독도와 대마도, 율도국의 바다도 으쓱으쓱 제 흰 어깨 흔들며 다가오리 삼세번의 올림픽 성화가 백두산의 이마에 불꽃으로 타오른다면 웅녀의 기다림처럼 아흐! 마늘냄새 쑥 냄새 젖은 가슴들 일어서리 타고르의 깊고 매운 눈으로 바라본 불 동방의 등불 높이 들어 노래하리 새로이 시작될 반만년을 노래하리
꿈을 꾼다 이 땅에 삼세번
삼세번의 성화가 억년의 등불로 타오르는 꿈을
성형 중인 여자
곱슬머리 커트는 기본이고요
수입한 머리카락 이식은
이른 봄 동백꽃 필 때가 그만입니다
여신처럼 눈은 푸르게
둥근 턱은 와인 잔의 곡선처럼 그렸어요
굴삭기가 지나간 허리에는
콘크리트 크림으로 마사지도 하고요
여신이 잠든 신전으로
은밀히 남도 사투리로 쫑알대는
갈매기와 파도소리도 불러들이죠
바닷길에 흰 고동소리 숨 가쁘고
가슴에 발자국 소리 높아가도
또 수술대에 누워야 한답니다
허공에 매어놓을 사람들의 은빛 탄성을 위해서죠
외출하는 여인들이 눈 화장하듯
서쪽 바다가 붉게 물드는 저녁
외도外島1), 외도는 보톡스를 주사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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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남 거제시 소재
불새
우리는 춤을 추었지 우주의 먼지로 떠돌 때나 성운星雲의 시기에도 불춤을 추었지 뜨거운 춤사위로 별들이 탄생될 때 소행성과 운석을 타고 우리는 운명처럼 지구라는 별로 왔어
시생대 원생대의 경계쯤에서 나는 날개를 잃어 직립을 얻었고 너는 땅속으로 가 날개를 잘라 지판地板의 암반 아래 숨겼지 잘린 날개들이 퍼득일 때마다 산이 흔들리고 땅이 뒤집히고 도시가 바다에 잠기기도 하지
우리의 가슴이 뜨거운 건 잘려버린 불의 날개 때문이지만 우주에서 태양계로 이어진 불의 유전자가 혈관에 흐르기 때문이야
오늘도 등허리의 날개가 자랄 때마다 너는 땅속을 번개처럼 뛰어다니고 나는 땅 위에서 미지의 별로 날아가고 싶은 날개를 키우지 우리는 우주로 날아가고 싶은 새 쉼 없이 날개가 자라도 날 수 없는 새 불새라고 부르고 싶다
단단한 소리
내 가슴에 소리 하나 자란다
말랑하지만 벗겨지지 않고
망치로 때려도
알맹이를 꺼낼 수 없는 소리 하나
소식 없이 몰래 혈관을 유영하는 놈
오른손에 붉은 붓
왼손엔 흔들리는 낡은 달빛
목쉰 소쩍새 울음도 쥐고 있지
가끔 심장을 가야금처럼 타고
슬슬 잠의 뿌리를 흔들다가
싱긋 웃고 돌아가 버리는 놈
발걸음이 보이지 않아 잡을 수도 없다
달그랑 달그랑
내 가슴에 소리 하나 자란다
새앙쥐 발걸음에도 놀라지 않는
놋그릇처럼 단단한 소리 하나 자란다
바다 한 조각
삼척 바닷가 다 돌아도 내 발자국 따라와 출렁일 바다는 없고 파도마저 숨어버려 무심코 찾아간 클라치1), 소나무가 녹색 커튼처럼 흔들리는 창 너머로 몰래 입 맞추던 바다와 구름이 나와 마주치자 수평선으로 급히 숨어버린다 어디가 바다고 구름인지 몸살 하는 한낮이 붉게 달아오르고 모래밭까지 밀려오는 달콤한 냄새에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빙긋이 웃어버리자 잠시 생각에 젖어 고열에 떨던 바다가 창 너머로 전하는 푸른 잉크의 글씨들 “아무 말 마, 내 몸 한 조각 줄게!” 바다가 흰 이빨을 보이며 다시 출렁거리자 목젖까지 보이며 껄껄대던 나는 검지를 창살처럼 세워 무겁게 입술을 눌렀다
바람난 바다
봄 바다가 주는 짙푸른 문장들을 메모지에 받아 적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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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척시 후진바닷가 카페 클라치
팔자
얼래 빗으로 청 보리밭 빗어놓고
숨 가쁘게 산 넘어간 소낙비
초록머리 반질거리는
보리밭의 허공
팔팔팔
팔자를 쓰는 흰나비들
쓰다가 지워지면 다시 쓰는 팔자
8 8 8,
온몸으로 세우고 있다
가만히 눈감아 속삭여 보면
혀끝에서 끓어오르고
가슴에서 쿵쿵거리는 팔자
우레 소리 가득한 보리밭의 한낮
팔팔팔
8 8 8……
한 팔자가 명주실처럼 풀리고 있다
붉은 꽃
우체국 지날 때
깊고 시린 눈동자가 발걸음을 묶는다
내 몸에 흐르는 피의 빛깔
살 냄새를 기억하는 듯
온몸 쓸며 지나는 그
이마에는
시간의 잔물결이 짙게 고여 있다
걸어가며, 천천히 걸어가며
돌아보다 마주친 눈빛
가슴으로 쿵쿵 북소리 울리고
잠겼던 그리움의 빗장이 덜컹덜컹대는데
굽은 등의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천천히 길모퉁이를 돌아서 간다
발자국만 남은 길 위에 꽃이 핀다
봄, 가을 가슴에 홀로 피던
한 송이 붉은 꽃
궁남지1)의 노래
용은 노래를 불렀다
“나는 이 땅에서 가장 푸른 검을 가진 자
해와 달이 짜는 금 은빛 실타래
바람의 허리도 벨 수 있다 못가의 여인은
어둠이 오기 전 나를 맞으라”
천둥 같은 괴성에 못은 뱀의 푸른 혀처럼 흔들렸다
문을 굳게 잠근 여인은 향기마저 숨겨버렸다
용의 노래는
밤마다 금이 간 징소리처럼 못으로 쏟아졌다
스님은 붉게 엉킨 실타래 푸는 법을 말했다
“용이시여!
산천을 울리는 목소리
푸른 검도 고란정에 던져버리시고
우물에 비친 용안에 웃음이 떠오르면
그 웃음 가슴에 담아
여인이 사는 못에 넘치도록 채우시라”
용은 노래를 불렀다
“연꽃 속으로 숨어버린 이여
내 타는 마음 그대 곁에 묶어두어도, 그대를
상처 낸 목소리와 오만의 화살은 돌려주시오
그것을 숨길 곳은 내 가슴뿐이니”
하루, 이틀, 석 달 열흘
못 위로 걸어 나온 여인은 노래를 불렀다
“푸른 검마저 내려놓은 분이시여
이제 그대의 노래에 귀가 열리고
심장은 연꽃처럼 물듭니다
두려움에 묶인 손이 그대에게 가는 길을 더듬고
고개를 돌려도 발걸음이 그대를 따라가옵니다”
사비 궁 남쪽 못가에서 용과 여인은 노래를 불렀다
이 땅에 뿌리내릴 절창絶唱2)의 시원始原인 줄 모른 채
달 없는 밤에도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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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宮南池, 사적 제135호, 백제 무왕 35년 사비궁 남쪽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인공연못
2) 법왕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 홀로 살던 중 낳은 아들인 서동武王이 신라 선화공주善花公主와 혼인을 위해 노래한 서동요薯童謠를 뜻함
맵고 푸른 춤
― 부여 낙화암
꽃잎들이 피어나고 있네
아픈 듯 뒤척이는 백마강을 토닥이며
허리 꼿꼿한 암벽으로 솟아오르고 있네
고란사 목탁소리 벼랑길을 내고
그 길 따라 꽃잎들 돌아오네
춤추며 돌아오고 있네
송이송이 삼천 송이
낙화암 허공에 눈물 꽃 피는 소리뿐이네
바람에 닳은 꽃잎들이
귀에서 귀로 살아오고
입술에서 입술로 떨어지네
사서史書에서 자박자박 걸어와
부여의 정정한 하늘 꽃 죽으로 타 오르네
낙화암으로
꽃 이파리들 살아오고 있네
억년을 피어날 춤 휘몰아치고 있었네
평강공주와 온달
1. 빛
평강공주平岡公主가 운다
귀 닳도록 하신 말씀
말씀이 다르다고 운다
노한 왕의 일갈은
울음마저 조각조각 내었다
공주의 가슴 깊이 아무도 벨 수 없는
한 줄기 푸른빛이 자라기 시작했다
울금빛 달이 빛나는 날 공주는 길을 떠났다
2. 초가草家
뉘, 거 뉘시오?
아궁이에 어둠을 빨갛게 태우던
눈먼 노파는 흙벽을 적시는
하늘의 향기에 말을 잇지 못했다
나무와 달을 지고
마당으로 들어선 젊은 나무꾼은
“그대는 분명 요괴妖怪라” 소리쳤지만
공주가 가슴에서 꺼내는
조각난 울음에 온몸이 젖고 말았다
호기심 많은 달빛이
초가의 섬돌 위를 기웃거리자
감나무가 푸른 어깨로 달빛을 가려주었고
소쩍새는 밤늦도록 바자울을 지켰다
3. 혼례婚禮
공주가 문장과 검의 기운을 불어넣자
온달의 눈과 이마는 빛나기 시작했다
병들어 파리했던 말은
사냥터의 언덕을 바람같이 달렸고
시위를 떠난 활은 무사들의 탄성을 꿰뚫었다
왕은 다시 말했다
“온달, 온달이라!
그대가 정녕 바보 온달이라?”
두 사람의 혼례는
왕과 공주의 상처 난 길을 곱게 여몄다
4. 오랑캐꽃
요동遼東 들은
후주後周의 깃발과 말발굽 소리뿐……
“누가 저들의 함성을 누르고
우리의 백성과 땅을 되찾을 것인가!”
왕의 탄식이 허리를 내려오기 전
적진을 바람같이 달려가는 장수가 있었다
함성으로 가득하던 벌은 단기單騎의
말발굽 소리뿐
햇살마저 하얗게 침묵했다
고요 뒤의 천둥을 예감하듯
그의 말이 뛰어오르고 창끝이 번뜩이자
후제의 군은 낙엽처럼 쓰러져갔다
우우우…… 고구려군의 함성이
요동벌에 불꽃처럼 타올랐다
그날 요동벌에 오랑캐꽃이 피어났고
온달은 고구려의 우람한 성벽이 되었다
5. 밀명密命
아차산성峨嵯山城에서
온달의 검劍은 빛을 잃었고
관棺은 움직이지 않았다
“이제 돌아갑시다, 산마을의 초가로”
공주의 붉은 눈물이 관棺을 적시자
한 생애의 그림자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달빛 좋은 밤
아차산성 소쩍새가 평강공주와 온달의 이야기를
남한강 물 위에 하얗게 쏟아 놓지만
더 이상의 기밀은 전하지 않는다고 한다
고구려의 새들은
누대累代로 밀명을 지켜온 터라……
진묘수1) 웃음
공주 국립박물관 출입문을 향해
투박한 돌덩이 하나 웃고 있다
몸통만 보면 토종 돼지와
개의 혼종 같은데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백두산을 걸어 나온 어린 곰이다
캄캄한 무덤 속에서 무령왕을 지킨
진묘수
도굴의 괭이를 무디게 한건
잠들지 않는 눈, 온돌 같은 웃음이다
쉽게 휘어지거나 부서지지 않는
웃음을 향해 슬며시 물어보았다
이 땅의
철 띠와 지기地氣를
천오백 년 어둠을 건너온 진묘수가 웃고 있다
다시, 시작되는 반만년은
내가 지킨다고
햇살처럼 짙푸르게 웃고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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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鎭墓獸, 공주 국립박물관 소장 국보 162호
메아리
누가
앞산을 빨래 방망이로 두드리고 있나
쿵, 쿵, 쿵
물레방아에 감기는 치렁 달빛
늦도록 바라보고 있나
누가
수구재를 내려오고 있나
자박, 자박, 자박
달빛에 젖은 외나무다리
건너오고 있나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가마소1) 돌아가는
오십천 물소리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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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마솥 소沼 삼척시 미로면 상거노1리
심동석 시인의 작품론
작품의 기저에 내재된 시의 근원들
조 관 선 소설가·시인
늦깎이로 지방의 문학판에 합류한 심동석 시인의 첫인상은 실례되는 표현이지만 내게 한마디로 순둥이 그 자체였다. 동향이라지만 그때까지 일면식도 없었던 시인에게서 뜬금없는 친근감이 나타났던 까닭은 첫인상에서 뿜어진 사람 좋음의 표정 때문이었을 터. 때문이었는지 심동석 시인의 시적 근원을 잠시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아버지의 낫”을 처음 만났던 때 였으리라. 아버지의 낫은 코발트 빛 바다 한가운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햇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윤슬 같은 작은 섬광이었고 독자의 뇌리에 각인될 나름대로의 이미지론적 개체였다. 그리고 뒤이어 조우하게 되는 시인의 시편들 또한 문학 이력이 아닌 연륜의 이력으로 내게 다가왔지만 오래지 않아 연륜과 시력의 무게를 동시에 담아낼 것이라는 기대감이 컷었다고 회억되는 바, 작금 그 기대가 고스란히 표현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면 필자의 오만일까?
경동광업소 소장, 경동건설 사장 등, 소위 누림의 자리에서 마지막 직장생활을 영위하다가 정년이라는 고리에 걸려 퇴임 후 향리의 두타문학회에 회원으로 입회하여 종종 시편들을 발표함에 일천한 시의 이력에 비해 작품에 내재된 시의 무게감과 부피의 남다름을 느낄 수 있었기에 관심이 많았었다. 필자는 심동석 시인의 시편의 이력보다 시의 무게감에 매료되어 등단을 권유한 적이 있었는 바, 시인은 한마디로 손사래를 치며 겸양을 나타냈다. 시인의 일천한 문학판의 이력이 이유였다. 그러나 심동석 시인이 옹기쟁이의 자세가 아닌 도공의 자세로 시를 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었기에 등단을 늦출 이유가 존재하지 않다 판단하고 등단을 채근한 바, 등단작품을 준비중에 있다며 추후에 말씀 드릴 터이니 그 때 도와주시라는 말을 듣고 내심 기뻤었다. 그리고 약속처럼 오래지 않아서 심동석 시인의 등단의뢰작품들을 만나게 되었다. 필자의 기대 대로 “아버지의 낫”을 포함한 여러 시편들이 필자의 눈길 끌기에 부족함이 없음을 확신하고 문학세계 발행인 성춘복 선생님께 등단을 부탁드리고자 송고를 타진했던 것이다. 더하여서 보람됨은 성춘복 선생님께서 심동석 시인의 원고들을 받아보시고 “좋은 시인을 소개해줘서 고맙다.”는 전화인사를 주시던 날이 회억된다. 작품을 보는 안목의 동질성에 기인한 찬사였으리라.
“아버지의 낫”은 그렇게 내게 다가왔고 아버지의 낫으로 인해 필자는 부친의 유택을 한 번 더 찾아 뵙게 했던 것이다. 내 아버지의 유택에서야 낫은 물론 그 어떤 물건들이 출토될 리 만무였지만 필자에게도 아버지를 회억하는 편도성 향수의 남다름이 존재했던 것이다.
심동석 시인은 지금도 시간이 허락할 때면 집 부근의 밭을 텃밭처럼 가꾸고 있음을 알고 있다. 좁지 않은 면적의 밭을 가꾸면서 시인은 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유품 같은 쟁기들이 종종 얼굴을 내밀 것이라 기대하는 것은 아닌지 나에게 의문을 남긴다.
밭머리에서 칡을 캐다가 낫을 하나 찾았다
자루는 흙 속의 길로 숨었고
잠들었던 물음표의 머리는
아직 낫이 필요하냐고 묻고 있다.
― 『아버지의 낫』 1연 전부
심동석 시인은 “아버지의 낫”을 시집의 얼굴인 표제작으로 선정하고 있다. 시인이 아버지의 낫에 얼마나의 애정을 담고 있는지를 직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정황이다.
시인은 밭에서 칡을 캐다가 흙 속에서 나온 낫을 줏은 것이라 아니라 찾았다는 표현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보여준다. 줏었다로 설정된 관계가 아닌 찾았다는 관계! 칡이 있는 밭이라면 집 부근에 있는 텃밭이 아니라 모르긴 해도 집에서 한참을 떨어진 위치에 자리한 산 인근의 밭이리라. 시인이 오랜 세월 저쪽에서 마치 아버지로부터 낫을 잃은 얘기를 들었던 것처럼, 아버지가 어찌어찌 일을 하시다가 순식간에 낫을 잃고 잃은 낫에 대한 애정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던 때를 상기한 듯, 아버지의 잃은 낫을 흙 속에서 발견했을 때의 모습을 유추하게 하는 작품을 읽으며 심동석 시인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던 서정적 자아를 빨리 발견한 것에 나역시 반가움을 감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디어진 낫을 가만히 만지자
햇살의 이마가 눈부신 듯
녹슨 조각들이
아버지의 굳은 땀처럼 뚝뚝 떨어진다
― 『아버지의 낫』 2연 전부
땅 속에 묻혀 낫의 철분이 산화되어 부식되기까지의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 마치 영화나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 느낌을 자아내는 시각성이 이 시의 맛이다. 누구에게나 아버지는 흔들림 없는 성城이었겠지만 시인이 밭에 묻혀 있던 낫을 발견함은 곧 아버지와의 조우였으리라. 아버지의 굳은 땀처럼 뚝뚝 떨어진다는 표현 속에서 시인의 부자관계를 유추할 수 있음은 물론 필자는 심동석 시인의 시적 표현 속에서 그 부친의 산화된 찐득찐득한 땀방울을 상상하는 것이다.
보릿고개의 시퍼런 허기
이 땅의 철 띠마저 벨 수 있다고
고개를 꼿꼿이 세우는
아버지의 낫
― 『아버지의 낫』 종연 전부
이미 산화된, 그리하여 하등 쓸모없는, 쟁기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낫을 발견했을 때의 소회를 작품으로 승화한 화자로서의 낫이 『아버지의 낫』이라는 명제를 달고 필자에게 등단추천 작품으로 간택되었을 때, 심동석 시인이 추천작품으로 수락했던 건 산화된 낫에 내재된 아버지의 고단했던 일생이 환기되었기 때문은 아니었을지…….
― 생략
니는 오늘부터 에미 방으로 들지 말거라!
문을 닫는 목소리 늦가을 서리빛이었다
그날 밤 건너 방 섬돌 위 고무신 두 켤레 달빛에 젖고 안방
문이 가만가만 열릴 때마다 달빛 묻은 박꽃 웃음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 『고무신 두 켤레 달빛에 젖고』 일부
민며느리로 출가한 젊은 아낙의 시집살이를 해학적으로 풀어담았으나 그 시절을 겪어본 사람들에게는 원망의 순간순간이 내재됐을 것이리라. 그러나 나이 어린 신랑이어도 어여쁜 아내가 있는 향기로운 방을 어이 생각에 담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린 남편은 부모들이 잠든 틈을 기다려 아내가 있는 방으로 건너 갈밖에……. 누구이든 신혼시절을 회억하게 하는 작품 끝자락에 미소를 담아본다.
심동석 시인의 시적 근원을 대변하라면 아마도 아버지가 아닐는지? 또 한 편의 작품을 이루고 있는 『지게』 또한 아버지와의 일화에 기인한 역사가 재편된 것이라 생각해 본다.
장터에서 알루미늄 지게를 사 왔습니다
어깨에 묻은 나무지게의
아릿한 냄새 때문일까요
어제 이사 온 이웃처럼 낯설었지요
숨었던 달이 풍선처럼 부푸는 저녁
나뭇가리의 지게에서
발자국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 생략
아버지가 몰래 방앗간을 돌아돌고 있습니다 ― 생략
아버지는 박달나무 지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 생략
늘 아버지를 기다렸던 길/지게를 진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 ― 생략
― 『지게』 일부
나무지게에 배어 있는 아릿한 냄새와 지게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누구인가? 제백사하고 시인의 아버지리라. 이처럼 시인은 작품에서 아버지를 언급하거나 종종 드러내고 있지만 반면 살펴보노라니 시인의 어머니에 대한 조우가 아주 빈약함의 연유가 궁금했다. 필자는 이 부분에서 보편성의 결여를 채우고자 주어진 시편 안에서 깊이 살펴보았지만 끝내 시인의 어머니는 등장을 하락하지 않았다. 언제일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라건대 다음 시편들에서는 시인이 어머니와의 조우도 종종 보여주시길 기대해 본다.
― 전략
부지깽이 든 부뚜막 귀신에 쫓기다가/얼굴없이 뒷걸음 치는 엄마/지는 노을 속에 엄마를 만나다가 ― 생략
― 『발목으로 집 지키기』 일부
심동석 시인이 유일하게 어머니 또는 엄마를 차용한 작품이다. 시인의 몇 살 적 엄마인지? 엄마는 조왕귀신에 놀라 겁먹은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으나 유감스럽게도 엄마의 얼굴이 없다. 관찰컨대 이 시집의 편편에서 더 이상은 시인의 어머니가 등장을 불허하고 있다. 필자는 이 부분을 보편성의 결여로 진단한다. 유수의 시집을 살펴보노라면 엄마 또는 어머니를 차용하는 시편들이 많이 보였는데 이러한 보편성의 결여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필자에게 퀘션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 전략
내일은 출근해야 한다고
사위와 딸아이가
어둠이 내리는 마당을 돌아나간다
강아지 같은 손자
태랑이 앞세우고
어디쯤 갔을까?
무더운 새벽
가슴엔 찬바람 소리
애들,
애들이 뭘 놓고 갔나?
마당에 목백일홍 향기
그대로인데……
― 『분실』 전부
우리 속담에 든 것은 몰라도 난 것은 안다고 했다. 백년 손님인 사위와 출가외인인 딸 가족이 잠시 다년간 자리를 둘러 보는 장면이 영화나 드라마나의 한 장면인 양 눈에 선하다. 금방 시인의 집을 떠난 딸 가족이 눈에 밟히는 듯 “애들이 뭘 놓고 갔나?”라는 가슴에 담긴 자식에 대한 부모의 기우가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유독 글쟁이들에게는 표현방법으로서 특이한 것이리라. 자식은 영원한 근심걱정의 대상이라 했든가? 부모의 가슴에서 자식걱정을 놓는 순간이 세상과의 이별이라고 어른들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그러나 자식의 마음은 제 자식을 사랑하고 걱정하는 것으로 도리를 다하는 것이다. 딸과 사위와 외손자가 잠시 머물다 떠난 자리를 둘러보는 시인의 심정은 딸과 사위와 외손자가 먼 길을 달려 집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도달하는 순간까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고 이해한다면 차를 달려 가는 도중에라도 거의 도착하고 있다는, 거짓으로라도 안부전화를 해 준다면 마음졸이며 기다리는 밤새움의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을…….
아득한 벼랑
생채기진 가슴으로
헤매어도
끝내 찾지 못하는
마음자리 하나
차가운 암벽 어디에
그 어디에
꽃다운 말씀은 숨어 있는가?
시월
가슴 홍역 꽃
또 도지고 있다
― 『담쟁이』 전문
시인의 시선에 잡힌 당쟁이의 생명력을 마치 모니터를 통해 보고 있는 듯하다. 제2연, “차가운 암벽 어디에/그 어디에/꽃다운 말씀은 숨어 있는가”에서는 살아 있음에 끊임없는 운동력의 수반을 거부할 수 없음과 아울러 생명력의 존재성 차원에서 담보되지 않은 희망성마저도 외면하지 못함을 노래한 것이라 추측된다. 생명체 스스로를 유지하는 힘의 원천을 종종 담쟁이를 통하여 비유하는 바, 도종환의 담쟁이와도 비교되는 작품이다.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로 시작하여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결국 그 벽을 넘는다”로 끝나는 도종환의 담쟁이는 어떠한 고난상황에서도 포기를 모르고 자라다가 종내엔 한계를 극복하는, 생명력 유지를 담보하는 것이라면 심동석의 담쟁이는 생명에 대한 존재론적 가치와 존재하는 것들의 종말론을 아름다움으로 치환한 것은 아닐지? 문학적 유명성에서라면 근접을 허용치 않는 도종환의 담쟁이를 능가하는 작품이라고 감히 언급해 본다.
마지막 연 “시월/가슴 홍역 꽃/또 도지고 있다”는 모든 초목의 엽록색 상실이 담쟁이에만 국한된 것이 아닐진데 시적 화자로서의 시월 담쟁이는 설명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내재된 것이기에 광의로는 인간의 평생을 종래적으로 아름다움이라 표현한 것은 아닌지.
― 생략
누가 숨겨놓았나
서남쪽 바다 한 곳
푸른 파도소리 배고 누운 여인
― 『홍도紅島』 일부
서해 먼 바다 한가운데 있는 섬을 숨겼다고 표현하는 시인! 더하여서 작은 무인도를 여인으로 묘사한 시적 관찰력은 심동석의 시적 자아를 위해 끊임없이 끌어올리고자 노력하는 시인으로 부를 수밖에……. 만약 그가 학과선택에서 문학을 전공했다면 과연 현재의 심동석이 어디쯤에 위치해 있을까?를 나는 상상해 본다. 살펴보면 시인은 문학판과는 거리가 상당히 먼 위치에서 세월의 많은 부분을 보냈다고 사료되지만 시인의 가슴 깊이에 내재된 시적 자양분은 부피를 가늠할 수 없는 질량을 보유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봄 아침/은빛 햇살 쏟아지는 창가/아내는 눈을 감는다//찻잔의 온기를 두 손으로 감싼 채//아내의 얼굴에/반짝이는 햇살의 날개들을/커튼으로 가만히 쓸어내리자//늘어가는 주름도 지워버리는/웃음꽃/눈이 부시다
― 『웃음꽃』 전부
항아리를 닦는다/백년의 바람을 마신 된장 빛 항아리//아내의 손이 크고 작은 동그라미를 그린다/손길 따라 푸른 이야기가 돋아난다 ― 생략
― 『항아리를 닦는 손』 일부
― 전략
어디서 숨겨 왔는지/유채꽃 몰래 키우던 아내가/큰 처형에게 노란 꽃가루를 날리자 ― 생략
― 『단디이 바아라』 일부
― 전략
그 길을 함께 걸어오며/숯이 되었을 가슴 같은 오디 한 줌//고깔에 담아/아내에게/가만히 건네 주었다//초록 고깔 속에/또 하나의 아침 해가 숨어 있었나/아내의 얼굴이/은빛 여울로 빛나고 있다
― 『고깔 속의 해』 일부
― 전략
이마에 땀을 딲아주던 아내는 물음표를 남기고 방을 나간다 ― 생략
아내의 목소리가 꿈결에서 망치처럼 내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 생략
― 『못대가리들』 일부
잠시, 모난 숨결을 다듬던 아내는/병아리처럼 종알대는/여울 속으로 들어간다 ― 생략
― 『맨손으로 황어黃魚 잡기』 일부
시인의 아내 사랑이 깊은 침묵과 함께 드러난 작품들이다. 평소 시인의 아내 사랑을 목도해온 터라 아내를 기저基底에 둔 시편들을 심심찮게 보게될 것이라 생각했던 터다. 환한 햇살 속에 여과 없이 드러난 아내의 주름살의 원인이 마치 자신에게 있다는 듯 고해성사와 같은 어떤 회한이 드러난 작품을 읽으며 평생을 동고동락하는 동지자적 입장에서 해도해도 끝나지 않는, 집안 일에 지친 아내의 노고를 한 줄의 시어로 위무하고 있는 시인의 깊은 속내들이 돋보인다. 반면 나는 언제 한 번 아내의 주름살에 마음 아려한 적이 있는지를 돌아보았다. 아마도 이러한 류의 시편들을 앞으로도 종종 만나게 될 것이란 예감이 드는 건 필자만의 생각일지…….
너의 전화를 받는다/지금쯤은 풋보리 바심하던 마당/꾹-죽, 꾹-죽 보리개떡/중략//유년의 시간이 기울도록 전화를 받는다/봄 깊은 무쇠 솥 풀뿌리 익는 냄새/절름대던 옛 봄은 돌아갈 줄 모른다/꾹-죽, 꾹-죽 보리개떡
― 『뻐꾸기』 일부
경운기를 강냉이 밭에 눕혀버린/뒷집 할아버지/경운기가 부서지고 강냉이 밭이 망가져도/팔순 몸 멀쩡한 건 조상님 덕이라고/허허허~/강냉이 속 알같이 웃으신다
― 『말씀』 일부
로컬리즘이 배경으로 깔린 작품이다. 어머님의 품 속 같은 포근함이 도사리고 있다. 시인은 보릿고개를 경험한 세대다. 아침끼니를 건너뛰며 등교하던 옛시절은 아무에게나 담겨 있는 추억담이 아니지만 시인 역시 지난 시절 다중의 범주 안에서 체험했던 일상중의 하나가 아닐는지. 자랑스러울 수 없는 빈한했던 시절의 먹거리에의 욕구가 꾹죽으로 치환된 것은 그나마 그 시절에는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부족한 식량을 늘리기 위한 방법론적 레시피인 국과 죽을 꾹죽이라 했는데 꾹죽은 국어사전에서도 찾기가 쉽지 않은, 더러는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낱말인 것이다.
시인은 오래지 않은 저쪽 시절로 돌아가 지금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보리개떡까지도 그리움의 대상에 끼워넣고 있다. 뻐꾸기 울음소리를 먹거리였던 꾹죽으로 의성화하여 추억담으로 대신하고 있음은 시인의 지난 시간들이 로컬리티에 기인한 것이리라. 꾹죽은 이름하여 잡탕죽에 다름아닌데 그것이나마 풍족했다면 보릿고개를 체험한 세대들에게는 추억이 아니리라. 그리고 보리개떡까지를 추억담으로 승화시켜 오늘날의 6~70대들에게 지난 시간들을 더듬게 하는 시인의 시적 마력이 돋보이는 것이다.
보리개떡!
필자에게는 외할머니를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하는 소중한 추억의 언어이기에 한번 더 음미하며 입맛을 다셔본다.
좌판에서 꿈꾸는 작은 배/짙푸른 바다를 그리는 눈동자에/두고 온 수평선이 그네를 탄다/등허리에 화인 찍힌 물결무늬는/한 생애로 출렁이는 파도소리다/머리가 잘리고/꼬리가 잘리고/둥근 밥상에 오를 바다의 냄새다
― 『고등어』 일부
고등어는 꽁치, 명태, 도루묵 등과 함께 서민들의 밥상에 가장 빈번하게 오를 수 있는 생선이었다. 특히 고등어는 개체가 크고 살집이 깊고 두툼하여 고등어 한 마리로도 여러 식구가 섭섭찮게 먹을 수 있는 생선이지만 우리네가 밥상에서 자주 마주치던 생선은 아니었다. 시인은 밥상에 오른 고등어 한 마리에서 지구의 ⅔를 차지하는 바다의 냄새를 끌어올리고 있다. 문학론적 확장성의 일부분이지만 심동석 시인의 새로운 이력에 서광을 담보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닷새만에 갱구로 돌아왔다
마스크 자국이 일그러진 낮달처럼 찍히고
검게 부어오른 얼굴로
작업복에서 아직 막장의 열기가
마지막 숨결처럼 하얗게 피어올랐다.
동료들은 탄식과 웅성대는 울타리를
맨발로 달려온 아내의 울음이 허물기 시작하자
하늘만을 고집하던 그의 이마가
아내의 무릎으로 천천히 돌아 누웠다
가슴에 참아온 말을 조심스럽게 건네듯
아직도 출구를 찾는
살점이 떨어저 나간 손을 펴자
가쁘게 몰아쉰 호흡처럼 꼬리 잘린
메모지 한 장
여보잘사라딸아이는 간호사
작은 놈 - 으, ㄴ……
― 『化石』일부
산업전사라며 팔둑에 힘주어/불을 캐던 때가 있었고/불을 가져온 죄로/간 대신 폐를 내어준 사람들이 있다 ― 생략
― 『죄와 벌』 일부
사회부 기자의 사건수첩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막장 밖의 기록이나 다름없는 작품을 읽으며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신의 생사를 걱정하기 앞서 자식들의 미래를 걱정하는 소리 아닌 신음이 천지간으로 퍼져나가는 문자는 살아있는 가족들의 아픔과 시인의 안타까움이 동시성을 형성하고 있지만 이 시의 창작노트는 상상에 기인한 것이 아닌 목격담의 일부라 짐작된다. 지하 막장이 붕괴돼 생사를 다투던 갱 속의 광부들을 걱정하고 염려하던 위치에서의 심동석 시인은 붕괴사고가 마치 자신의 일인 양, 자신의 책임인 양 안타까움 이상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시기가 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시간 이전부터 심동석 씨는 이미 시인으로서의 준비가 완성됐던 것이리라 생각된다. 시적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화석의 마지막 연 2행은 모든 인간이 가슴 깊이에 담고 있는 자식에 대한 숙명이리라.
아버지의 낫에 전제된 보릿고개가 존재하던 시절, 대한민국의 천지간은 호구지책 마련에 아비규환이었다. 지금과 달리 일자리가 귀하던 시절이다 보니 건강하고 힘이 있는 젊은이들은 후일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취직이 용이한 탄광촌으로 모여들었었다. 삶을 누리던 사람들이야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추운 겨울날 온돌 아궁이에 연탄불을 피워놓고 편히 지냈지만 가난한 젊은 광부들은 지하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곳에서 석탄 채광으로 삶을 여위하다가 탄광매몰로 아름다운 생을 마감하기 일쑤였다. 이름하여 산업역군이라 불리어지던 무렵의 삶의 편편들이 시적 고뇌로 생산된 작품에서 지난한 삶의 애환을 보게 된다.
그렇듯 인간이란 부모의 위치에 다다르면 아들딸의 미래가치에 희망을 담는 법인데 담보되지 않은 희망사항을 엠뷸런스에 실려가면서까지 각혈처럼 뱉어내는 사고자인 광부를 시인은 동료 이상의 위치에서 목격하고 아파했던 것이 아닐지? 탄광지역에서 딸은 간호사, 아들을 지칭하는 듯한 작으, ㄴ……은 과연 무엇을 시키고 싶었는지? 호흡의 끝자락에 담아낸 화석 그 뒷시간의 결과론에 씁쓸함을 음미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 전략
천형天刑 보다 무서운 건 아이들/청무같이 자라야할 아이들이라며/아직, 불을 캐는 사람들이 있다
― 『죄와 벌』 일부
경동탄광 소장으로 재직하며 목도했던 일상 『죄와 벌』의 일부를 체험론적 관점에서 서술하고 있다. 탄광지역 광부들의 일상을 목도하며 지켜낸 시인은 자칭 광부시인 제1호라는 수식어를 소유한 정일남 시인과는 또다른 유형의 작품을 빚어내고 있다. 유려한 시적 이력의 정일남 시인과는 동향이며 많은 부분 동질성이 내재돼 있지만 자리했던 위치의 상이함에서 시각성의 차이를 드러냄을 볼 수 있다.
준경묘 소나무 숲에 매미들이 역사서를 읽네/그날, 압록강에서 말발굽소리 시작되었고/만월대는 아침을 홰 올리는 깃발 가득했다 하네
― 『하루』 부분
고려장군으로 요동벌 정벌을 나섰다가 여타한 악조건과 담보되지 않은 자신의 미래가치에 의문을 품은 나머지 고려조정의 뜻에 반하여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결국 조선창업의 대업을 이룬 태조 이성계의 5대 조부 양무장군을 모신 묘역에서의 하루를 시사화한 작품이다. 조선 최고의 명당이라고 소문난 양무장군 묘역은 수많은 풍수들과 지리학자들이 탐방을 오가는 명소중의 하나다. 이 지역은 금강송 자생지로서 년전, 화제로 소실된 숭례문을 복원하면서 대들보로 사용하고자 우수형질의 금강송 20 그루를 벌목하여 숭례문 복원에 사용한 역사적 사실이 있거니와 충남 보은의 정2품송과 사돈을 맺은 금강송이 군락으로 자라고 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작금 정이품송과 준경묘역 인근 금강송의 자목 수백 그루가 잘 자라서 대한민국 국토의 요소요소에 기증되어 그 위용을 뽐내고 있는 것도 시인에게는 시적 자산이 된 것이다. 부언하노라면 특이할 것도 없는, 탄광지역이라는 지역성과 심동석 시인의 오랜 직장생활 등으로 인한 한계성 탈피가 용이하지 않을 터임에도 시선의 다양성을 잃지 않음이 나타난 것이라 추후의 작품들도 기대하는 바가 크다할 것이다.
아흐레 동안 제 키를 아홉자 부풀리고 또 뒤꿈치 드는 눈꽃들 티브이는 전선으로 제 혀를 묶었고 버스는 길을 잃었다고 매운 바람에 기별을 전한다 언덕이 더욱 둥글어지고 담의 경계가 무너지고 있다
두타산頭陀山이 신음하는 소리를 안고 천천히 골짜기를 돌아 나오는 애저녁이 눈 속에 묻힌 창문을 기웃거리자 솜사탕 모자를 눌러 쓴 언덕의 집들이 하나 둘 주황색 불빛을 풀어놓고 있다
불빛의 올 하나를 팽팽하게 잡고 눈길을 가면 만날 수 있을까 인적 끊긴 역 마당에 서성이는 너를 아직도 떠나지 못한 목쉰 기차의 기적이 눈 속에 새파랗게 떨고 있는데……
푸른 너를 찾으려면 지나간 빛의 속도를 앞질러야 한다 네게로 가는 나의 숨찬 발걸음에 온몸이 까맣게 타버리면 너는 나를 알아볼 수 있을까 가슴으로 꽁꽁 묶어줄 수 있을까?
밤새 쌓이는 눈이 재를 넘는 소문처럼 부풀고 너와 나의 거리가 푸른 강물 소리로 풀리면 새벽 네 발자국 속에 숨은 말들이 폭설이 쌓인 언덕으로 걸어 나와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 『폭설』 전문
폭설은 강원도 영동지방의 기후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아흐레 동안 내린 폭설은 평지와 언덕의 경계를 지우고도 부족하여 때로는 산과 마을을 하나로 묶어놓는 마법사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러나 시인은 외부와의 통신이 두절된 극한 상황에서도 무엇인가를 찾겠다는 이미지를 드러내고 있다. 그 이미지 속에는 잃어버린 시인의 사랑도 있을 터, 또한 시인이 성장하기까지 외부로의 드나들기를 가장 많이 이용한 폐역 하나쯤 향수로 깊이 존재하는 것은 아닐지? 그리고 시의 끝장을 장식하고 있는 “……동백꽃으로 피어나고 있다”가 세상사에 대한 시인의 해피엔딩이라면 조용한 갈채를 보내고 싶다.
수백 명이 타고 가던 배 한 척
남해바다 뱅골수도에 침몰하였다
몰래 배의 심장을 누르며 빠리빨리
바다만 건너면 된다던 이들은
기울어가는 배보다 더 빨리 제 혀를 묶었다
거리의 꾼들은 네 탓이라는 배에 올라
제 울대의 높이와 길이만 재단한다
여의호의 선원들과 선주는
물구나무를 선 채 휴식중이라
이 땅의 일기예보나
잡풀의 탄식은 들을 수 없다고 한다
정말, 이상이 없는가?
칠천만이 타고 가는 배
배 한 척
― 『배 한 척』 전문
2014년 4월 15일 오후 9시, 인천항을 출발하여 밤새 제주도로 향행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다음날 오전 10시 30분, 진도 땅이 바라다 보이는 뱅골수도 해역에서 선채가 한쪽으로 기운 채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대한민국 재해역사에서 이러한 대 참사는 전무후무한 사건이었다. 세월호의 침몰원인을 구명하지 못한 채 현재까지 정치분쟁화중인 것은 안타가운 일이다. 가족을 잃은 유가족 입장이야 형언불가하겠지만 당시 국가를 이끌던 박근혜 정부는 정치적 존립기반마저 상실한 채 곧이어 이양된 진보정권과의 정쟁에서 회생력을 찾지 못함을 볼 수 있다. 보수와 진보 또는 진보와 보수 간의 진영싸움의 중심에는 지지세력으로 갈라진 국민들만 있을 뿐인데 시인은 그 이전의 사건, 즉 분단국가에서의 통일 이후까지를 걱정하고 염려함을 보여주고 있다.
삼척 바닷가 다 돌아도 내 발자국 따라와 출렁일 바다는 없고 파도마저 숨어버려 무심코 찾아간 클라치
― 생략
바람난 바다/봄 바다가 주는 짙푸른 문장들을 메모지에 받아 적으며
― 『바다 한 조각』 일부
클라치는 삼척의 예술인들 중 일부가 종종 들려서 파돗소리를 들으며 문학과 예술을 논하는 삼척해수욕장 내에 자리 잡고 있는 커피샾이다. 대개의 예술인들은 상대적으로 저렴한 커피값에 끌려 작정하고 클라치를 찾아가는데 심동석 시인은 무심코 찾아가서 서둘러 찾아온 바람난 봄바람을 시작노트에 담았다고 실토하고 있다. 이러한 것들이 옹기가 아닌, 도자기를 대하는 시인의 자세가 아닐지.
우체국 지날 때/깊고 시린 눈동자가 발걸음을 묶는다/내 몸에 흐르는 피의 빛깔/살 냄새를 기억하는 듯/온몸 쓸며 지나는 그/이마에는/시간의 잔물결이 짙게 고여 있다//걸어가며, 천천히 걸어가며/돌아보다 마주친 눈빛/가슴으로 쿵쿵 북소리 울리고/잠겼던 그리움의 빗장이 덜컹덜컹대는데/굽은 등의 그녀는 아무 일 없다는 듯/천천히 길 모퉁이를 돌아서 간다//발자국만 남은 길 위에 꽃이 핀다/봄, 가을 가슴에 홀로 피던/한 송이 붉은 꽃
― 『붉은 꽃』 전부
시인이기를 자처한 일상의 흔적들이 『바다 한 조각』을 분만하고 있다. 시인의 시작 노트를 보는 듯 하다. 시인은 상상이 아닌 목격자론적 입장에서의 시적화자를 찾아내고 있으며 나아가 우체국 정문 앞에 망부석처럼 서 있는 우체통을 일별하며 끌어올린 『붉은 꽃』은 심동석 시인의 시적 자아인 것이다.
시인은 우체국 정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붉은 색의 우체통을 일별하며 그 부근을 지나간다. 앞이든, 옆이든, 차를 타고 지나가든, 보행중이든 관계가 없다. 그 순간 시인의 시선에 잡힌 무엇이 있다. 서술에 내재된 물상은 아픈 그 무엇이다. 시의 그림자가, 실루엣이 반증하는 것은 무엇인가? 혹여 필자가 지나치며 무심코 놓친 등 굽은 여자의 희미한 실루엣은 아닌지?
한 시절 호황을 누린 붉은 편지통! 가정집의 전화기가 일상화 되고 손전화기가 개개인의 손을 차지하기 시작하자 편지라는 명사는 차츰차츰 국어사전에서 빠져나갈 궁리만 하고 있다. 먼 훗날 우체통이라는 낱말마저도 국어사전에서 빠져나가면 그 언어는 어느 곳에서 존치할지? 그야말로 박제될 시간이 목전에 와닿은 우체통은 한결같이 붉은 색이었다. 더하여서 사라지는 것이 어찌 우체통에 한정된 것일까만 마음을 담아내느라 밤새움을 마다하고 고생하며 편지를 쓰던 시절이 세삼 그리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아직도 누군가는 자신의 마음을 편지지에 담아내고자 밤을 지새고 있지는 않은지? 사랑이 전제된 마음앓이의 시절을 회억하게 하는 우체통이 붉은 꽃으로 환생한 작품은 시인이 아니라면 언급할 수 없음의 저변에 존재하는 지금은 무가치한 물상일 뿐이리라.
누가
앞산을 빨래방망이로 두드리고 있나
쿵, 쿵, 쿵
물레방아에 감기는 치렁 달빛
늦도록 바라보고 있나
누가 수구재를 내려오고 있나
자박, 자박, 자박
달빛에 젖은 외나무 다리
건너오고 있나
돌아보고
또 돌아봐도
가마소 돌아가는
오십천 물소리 뿐인데……
― 『메아리』 전부
산촌 생활의 체험을 방증하는 작품이다. 일회성 소풍객처럼 한두 번 스쳐 지난 눈길이라면 “물레방아에 감기는 달빛”이나 “달빛에 젖은 외나무다리”를 만날 수가 없다. 이러한 작품을 일컬어 로칼리즘이라 하리라. 로컬리티의 전형을 담고 있는 물레방아간은 문학인이라면 우선하여 이효석을 떠올리고 동시에 메밀꽃을 떠올릴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소재가 흔재한다지만 많은 시간 우리네는 잊고 지내는 것이 사실이다. 이 작품 속 지역이 심동석 시인의 향리인지는 알 바 없다. 다만 작품 속의 산촌이 두메산골은 아닐지언정 저기압이 심한 날이면 기차의 기적소리가 더욱 큰 울림과 긴 여운의 메아리를 던져놓고 사라지는 그런 곳은 아닌지?
서정성과 시사성을 동시에 적절히 담아놓은 “아버지의 낫”의 편편들이 아름다움으로 빚으져 한결 반가웠다.
제백사하고 등하교를 위해 십여리 길을 뛰거나 걷는 등의 지난 세월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종종 그리움으로 남아지는 지역이리라. 이렇듯 산촌에서의 유년시절을 체험한 사람들에게는 그곳이 그리움의 순위에서 대부분 앞순위를 차지할 것인 바, 작품의 기저에 내재된 심동석 시인의 詩의 근원根源들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알게 하는 시간이었기에 반가웠다. 심동석 시인의 시력을 가일층 끌어올리는 작업에 “아버지의 낫”의 상재를 거듭거듭 축하하며 시집 『아버지의 낫』 이 크다란 메아리를 울리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