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릿하게 오던 겨울이 인제야 속도를 내기 시작하나 보다.서릿발이 내려 땅이 숭숭 올라오면 보리밭을 밟아주던 그 시절의 추위는 요즘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추우면 난방온도만 올리면 해결되는 현실에 살고 있으니 뚜렷한 계절감각도 잊고 살아가는지 모르겠다, 당연히 밖에서 일하시는 분들과 난방도 넣을 수 없는 형편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당연히 따뜻한 겨울을 선호한다.
그러나 지구의 온난화로 계속 바뀌어 가는 지구에 직면한 문제는 또 얼마나 심각한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숲 속의 나무들과 우리 화단의 한쪽을 지키고 있는 작은 나무들의 겨울눈은 따뜻한 겨울을 절대 좋아하지 않는다. 춘화 현상을 겪지 않은 자연은 자연 본래의 모습으로 유지되기가 힘들어진다.
가족 카톡에 매일 손녀의 유치원 등원 사진이 올라오는데 오늘은 얼굴이 밝지 못하다. 코가 빡빡한 것이 감기 기운이 있는 것 같아서 그런 것 같다는 설명이 달려있다. 우리 가족들은 매일 아침 이 사진 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장가도 안 간 아들도 조카의 사진 보는 재미로 아침이 기다려진다고 한다. 요즘 나도 바빠 한참 동안 딸내미 집을 가보지 못했다
눈발이 날리고 있고, 일기예보는 올해 중 가장 추운 날이 될 것이라는 멘트를 수없이 날린다.오늘 내가 퇴근 후 가겠다고 문자를 보냈더니 딸이 오지 말라고 한다. 오늘은 유치원 하원 후에 태권도 갔다가 다시 미술학원을 가야 하니 늦게 온다고 한다. 끝나면 7시 반이 넘는다고 한다.
문자를 읽고 순간적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아진다. 이 어린것한테 뭐하는 짓인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퇴근시간 때문에 데리러 가는 것을 못 맞춰서 그러냐고 물었더니 태권도 끝나면 퇴근시간에 맞추는데 하도 미술학원만 보내달라고 졸라서 맨 날 같이 다니는 친구와 함께 보냈다고 한다. 둘이는 그야말로 단짝이다. 그렇게 같이 붙어 다니는데 한 번도 싸우는 걸 보질 못했다.
속이 너무 빨리 들어 애늙은이라는 별명이 붙어있는 6살짜리 외손녀이다.
퇴근해서 걸어가는데 하얀 눈발이 날린다.저번 초설 때에도 메말라가는 마른 잎들에게 살짝 인사만 하고 가버렸다 그날도 맛보기식으로 살짝 얼굴만 보여주더니 지금도 그런다. 아이가 감기가 걸렸는데 학원에 간다는 사실에만 몰두되어 딸아이가 괘씸해지기까지 했다. 아이가 어릴 때 아무것도 안 시키고 방임하는 듯해서 내가 재촉했더니 부부가 쌍으로 절대 학원에도 안 보내고 자기가 하고 싶다는 것만 시키겠다고 했었다. 내가 무안할 정도로, 그러더니 벌써 저녁달을 보면서까지 학원에 간다는 사실에 너무 충격이었다. 지하철 타고 가는 내내 눈송이와 함께 피어오르는 하얀 기억들이 모아져 눈송이에 붙는다.
딸아이가 태어나던 그해 어쩜 그리도 추웠는지. 새벽에 진통이 오는 것 같아 병원에 가려는데 밖은 눈으로 온통 쌓여있고 길은 어제 온 눈으로 미끄럽고, 걸을 수도 없을 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짐을 챙기는데 한 살 터울 큰애는 자기가 먼저 일어나서 따라가려고 야단을 치고 있다. 아직 기저귀도 못 때고 우유를 먹는 아이였다. 아침 일요일이었는데 곁에 돌봐줄 사람도 없어 큰애 챙기고, 보따리 챙겨 집 앞까지 나가 택시 타려고 기다리는데 왜 그리 택시도 안 오던지 그날이 생각났다. 아이를 쉽게도 났는데, 미역국이 나오자 배고팠던 큰애가 미역국을 먼저 먹기 시작하자 한바탕 웃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그렇게 엄마 미역국을 뺏어먹더니 자라면서도 어린 오빠는 동생이 맘 편하게 우유도 못 먹게 뺏어먹곤 했다. 먹을 것도 뺏기고 자라면서도 오빠라고 하면 지금까지도 끔찍한 동생이다. 지하철 안에서 내내 머릿속에 그 아이들 어렸을 적 모습들이 생각이나 기분이 조금은 풀려 딸내미 집에 도착했다.
평일에는 사위가 지방에 있어 혼자 아이를 키우며 회사 다니느라 무척이나 힘들어 내가 가면 만사 제쳐두고 침대에 가서 누워버린다. 내가 저녁 준비하고 있는데 아이 데리러 갈 시간이라고 같이 가자고 한다. 차로 한 5분 정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난 풀이 죽어 힘들어하고 있을 줄 알았던 아이는 방방 뛰고 있었다. 같이 다니는 친구랑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깔깔거리며 앞치마까지 하고 크레용을 들고 놀고 있었다. 딸이 ‘시윤이를 보면 내가 왜 학원에 보내는지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난 아이를 쳐다보고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리고 마치 친구 아이 엄마도 도착해서 가만히 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오는 차 안에서 얼마나 조잘거리는지. 일요일 날 숲에 가서 수업했던 얘기를 한다. 유치원 친구들과 같이 다니는 모양이다. 내가 자연을 좋아하는 것을 알고 말을 하는 것이다. 숲 선생님도 할머니같이 말을 했다고 한다. 숲에 들어가면 크게 말을 하면 안 되는 것부터... 등등 참새처럼 조잘거린다.
집에 와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춤을 추고, 뛰고 노는 것을 보면서 아직도 에너지가 남아 주체를 못 한다고 한다. “안 힘들어?”했더니 “아니. 재밌어. 어떤 친구가 오늘 수영 간다고 가방 가져왔어. 나도 수영 다니려고 엄마가 알아보는 중이야” 그런다. 원래 물에서 놀기 좋아하고 수영을 좋아하기는 했다.한참을 뛰고 춤추더니 영어유치원에서 배우는 것을 유튜브로 본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그린다. “지겹지 않아?" 하니 "아니야 재밌어” 한다. 그림 그리기 좋아한 것도 사실이다. 책 보고 자자고 수없이 말해서 겨우 침대로 갔다. 책을 하나 들고 온다. ‘행복’이라고 제목이 달려있다. 할머니가 오면 항상 할머니랑 자고 엄마는 쉬도록 되어있다. 약속에 이의를 달지도 않는다. 만화 형식으로 되어있는데 글씨가 너무 작아 내가 읽어주겠다고 했다. 행복과 불행은 생각하기 나름이고 본인이 만들어갈 수 있다는 얘기 같았다. 책 읽은 후 불을 끄고 한 시간을 얘기했다. 인제 커서 어른과 얘기하는 것처럼 대화가 자연스럽다. 자기의 꿈 이야기(아마도 경찰이 될 것 같다고) 유치원 얘기, 친구 얘기, 달나라 얘기. 중력 얘기, 은하수 얘기(우주에 관심이 많다) 숲 얘기 등등을 하다 보니 11시가 넘어가서 자자고 했더니 슬그머니 잠이 든다. 딸이라서 그런지 키우기가 정말 쉬워 하나 더 낳으라고 사정해도 하나로만 만족한다고 한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빡빡이 짜인 시간 속에서 아이가 자라는 게 잘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이 엄마는 얘가 그렇게 하고도 체력이 남아 잠을 재우려면 힘들다고 한다. 억지로 보내는 것도 아니고, 가겠다고 난리를 피워 보내는데 자기도 뭐가 맞는지 잘 모르겠다고 한다. 저녁에 퇴근해서 밥 챙겨 먹이는 것도 힘들어하는 딸아이한테 집에서 데리고 아이 교육을 시키라고 말할 수도 없어 아무 말도 못 하고 말았다.
그렇게 유치원을 내년 일 년을 더 다녀야 학교에 가는데 일 년을 어떻게 보낼지 모르겠다. 일 년이라는 시간이 아이에게는 정말 많은 변화를 주는 것 같다. 할머니가 늙어 힘들다고, 탁자도 깨끗이 닦고, 설거지하겠다고 장갑을 끼고 싱크대로 오는 아이가 됐으니 많이 자란 것 같다.이 아이가 있어 나는 오늘도 추운 날이지만 추운지도 모르고 힘을 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