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잃어버린 백제를 찾아서
 
 
 
카페 게시글
우리고대사를찾아 스크랩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반론 [2]
차돌 추천 0 조회 29 09.04.08 17:4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수맥 (2009-03-31 17:10:16, Hit : 65, Vote : 1
 http://blog.naver.com/nero1003/70040590938 혹은 http://blog.daum.net/nero1003/?_top_blogtop=go2myblog
 【앵무새 죽이기】 환단고기에 나오는 우리나라 영토에 대한 이야기 첫번째...반론 [2]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놓치고 마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마지막 간빙기인 기원전 10000년 말엽부터 기온이 조금씩 상승하다가 기원전 8200년경에 들어가면서는 급상승하는 조짐이 보여 지고 있었다.  이어 6000경에 이르면 빙하가 매우 빠르게 녹고 우량(雨量)이 한층 증가하여 타림분지와 타클라마간 사막조차 호수화 되어 간다.   민족이동의 계기가 형성되어가는 것이다.  

       참고로 기온과 강수량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부족한 지역은 사냥이나 유목이동은 할 수 있어도 농경정착은 할 수 없다.   두 가지가 풍부한 지방만이 영농토착이 이루어질 여건이 갖추어진다는 이야기이다(년 강수량 500mm 이상의 남만주-인도 서부 아래쪽 지역은 대표적인 농경정착지대로 세계 인구의 절반이 모여 산다).


현재의 아시아 기후 지도를 보면 10월의 연중 평균기온이 섭씨 영하 1.1° 를 유지하는 선은 연해주 해안에서 바이칼호와 알타이 산맥 북쪽을 지나 핀란드 북부를 비롯해 티베트 고원지대이다(4월의 평균기온 분포도도 같다).   즉 이곳은 10월~4월까지 빙점이하로 사람이 살기 부적합하다.   하지만 연해주 해안-한반도 북부-동북 만주-바이칼 호-알타이 산맥 남부-발트 해안은 침엽수나 낙엽수가 섞인 산림이 연속되며 또한 연 강수량 500mm이하로 초원지대가 펼쳐져 물고기와 짐승 무리를 따라 이동하거나 유목하여 중석기*구석기 유물이 풍부하게 산재한다(The Oxford Atras  1961  Precipiation & Temperature).

       북몽고 화림和林(캐라코람) 부근-서만주-북경*연안延安은 대목초지대이다.   따라서 고비사막을 넘기 힘든 중석기에는 동몽고-만주-중국 북동부 후룬놀*챠라이놀 이 이동로였으며 그 통로를 우리 민족은 활용하였다(石璟如  중국역사지리  1954  13p).

주목할 것은 기원전 6-7000년부터 이들 지역의 기온은 년 평균 2.5~5° 가량 높아 3천 년 전까지 이어졌다는 점이다.   이를 웅변적으로 증명하는 기록이 매머드와 같은 동물이 사라지는 대신 사슴*노루 등과 같은 들짐승이 풍부해졌으며 商왕조시까지 황하에 코끼리가 살만큼 기후가 따뜻하였으니 남부 시베리아 지역이야 두말할 까닭도 없다.  무슨 생각으로 이런 기후변화추세를 외면하면서 우리 민족의 정착지를 북부 시베리아로 몰아붙이는가?    어떤 의도가 없다면 이런 해괴한 말을 거론하지 못한다.   마지막 참고로 <최몽룡, 이헌종, 강인욱>의 공동저서인 '시베리아 고고학'의 한 절을 원문(P 131~132) 그대로 게재한다.  


       후기 구석기(1만3천년전)시대의 석기문화는 세형돌날문화의 등장과 전개과정을 밟으며 기술집약적인 양태를 창출하였다.  이 발전의 양상은 동북아시아에서 개발된 석기제작법으로서 형태는 다른 지역과 유사한 측면도 있으나 석기문화의 등장으로 부터 소멸까지 전 과정을 볼 때 북아시아의 후기 구석기문화는 이미 여러 학자들이 지적한 바와 같이 독특한 지역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동부 몽고, 극동지역, 동북 시베리아, 중국 동북부지방 일부지역과 한반도 및 일본은 하나의 큰 문화공동체로 평가될 만큼 지역 간 상호 비교가 가능한 석기문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앵무새]가 덧붙여 제시한  [환국시대 영토] 라는 지도는 조금 과장되어 있기는 하다.   수작까지는 아니더라도 아마 <수밀이국>이 민족 이동의 시원지에서 여러 방향으로 갈라져 나갈 때 서남쪽으로 밀려들어가 정착한 상황을 이야기하려는 의도로 받아들이는 게 좋을 듯하다.   그래서 수메르에 대해서는 아래 글로 대신한다.


       <수메르>가 强國으로서 정복국가를 건설한 이유가운데 하나는 유목기마의 이점이 컸다고 보인다.   왜냐하면 말은 가축 가운데 가장 길들이기가 어려워 기원전 4000~3000년 시기에야 비로소 중앙아시아와 그 북쪽지방에서 처음 가축화시켜 사육하게 되었던 때문이다.   집짐승의 무리를 몰고 주민 전체가 말과 수레로 이동하는 가운데 극도로 훈련된 군사집단을 이루었으며 그러다가 침입하면 농경지역의 부족들에게는 엄청난 재앙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남긴 글 가운데 스스로를 가리켜 “곧고 검은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는 점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다.

[Tip]  시베리아 어원에 대한 오해

어떤 이들은 <시베리아>의 어원이 <시비르 칸>의 이름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이는 그 지역의 오랜 역사과정을 전혀 모르는 소치이다.   사실 시베리아는 오랜 기간 동안 예네츠인*네네츠인*훈족과 같은 유목민의 땅이었다.   따라서 언금한 <시비르의 칸>은 현대의 토볼스크 근처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630년 아바르족의 가한이었던 <쿠브라트>가 널리 알려져 있다.   13세기 몽고의 침략이후 <시비르 한국>이 그 무렵에서야 세워졌다.   16세기에 이르러 코사크를 앞세운 러시아의 침공이 계속되어 이 시기에 만가제야, 타라, 예니세이스크, 토볼스크와 같은 도시들이 형성되었다.   마침내 17세기 중엽 러시아는 시베리아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시베리아라는 지역명은 그 이전에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이어간다.   이때 반고라는 사람도 길을 떠나고자 청한 뒤 삼위산 납립동굴에 가서 임금이 되었다.   반고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중국 한족의 신화 속 시조이다.   이유립이 이야기한 삼위산이란 감숙성에 있는 것이라, 저 서쪽 끝에 중국인을 배치해 놓은 셈이다.   그러나 그가 말한 태백산은 여전히 백두산이니 이유립은 역시 한반도를 기초로 한 세계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태백산이 백두산인 것은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도 누누이 설명한 바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비정한 묘향산은 천지가 없으니 불가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고 있는 것이다(물론 산 정상에 연못이 있고 없고는 단군신화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환웅이 세운 배달국의 영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나온다.   환웅이 신지씨에게 글자를 만들게 했는데 그 글자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주장하면서 남해 낭하리*경박호*선춘령*오소리를 들고 있는데 이 모든 곳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다.   즉 이유립은 그 이상의 영역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먼저 [반고]에 대한 어설프고 단견적인 주장에 대해서 말한다.   그가 말한 견해의 논거는 <삼오역기三五曆記-오吳 서정徐整 찬讚)와 예문유취(藝文類聚-구양순歐陽詢 찬) 제1권*오운역년기(五運歷年記-明의 동사장董斯張이 저술한 광박물지廣博物志 권9에 인용한 淸 마숙馬? 찬 역사繹史 권1*술이기(述異記-남제 조충지祖沖之 찬) 上 등에 나오는 천지개벽 시 처음 나타난 <盤古신화>인 듯하다..   하지만 이와 똑 같은 인물이 우리 쪽 기록에도 나타나서 문제이다.    <삼성기 하>에는 <盤固>라는 실제 인물로 등장하여 <때에 길을 나누어 살기를 청하매 이를 허락하여 십간십이지十干十二支의 神將들을 이끌고 공공共工*유소有巢*유묘有苗*유수有燧와 함께 삼위산三危山의 라림동굴拉林洞窟에 이르러 군주가 되니 이를 제견諸犬이라 하고 그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더욱 현실적이고 자세한 행적이 나와 신빙성이 있다.   [앵무새]는 중국인들이 저들 땅을 지배한 주나 진 그리고 그 나라들의 북쪽에서 줄기차게 괴롭히거나 나라까지 뒤집은 치욕을 감추기 위해 동이와 삼그런 생각이 드는 근거로 다음 몇 가지가 있다.  

     1) 앞서 말한 대로 환인이 정착한 흑수-백산에서 下視한 백산흑수지역이니 섬서성 太伯山(해발 4017)부근 아니면 삼위산에서 현 백두산까지의 광역을 살핀 것으로 추정되어야 하며 [환단고기]의 기록에서도 환인시절 말기에 안파견이 <반고>를 三危山(감숙성 돈황현)으로 庶子府를 맡았던 <환웅>에게는 태백산으로 가도록 명한 것으로 보아도 그렇다.
     2) 반고가 자립한 三危지역은 [환단고기]에서 제견(諸犬)이라 하였는데 중국 史書들은 西戎 혹은 犬戎*융적戎狄이라 표현한다.   하지만 한결같은 우리 민족의 별칭들이다.

▶ 한서 흉노전 사고 왈  적적본견종야 赤狄本犬種也(후한서 동이열전에서 우리 민족이라 기록한 견이(?夷)의 일종이라는 말이다)
▶ 삼국지 동이전 서문  공자 曰 순임금(BC 2000년 대)부터 周나라 때까지 이夷의 강역은 “東쪽으로 肅愼이 있는 바닷가까지 西로는 西戎이 있는 유사流沙까지이다”
▶ 사기 夏本紀 제2道 九州條  弱水至於合黎 餘波入干流沙 道黑水至干三危入于南海 약수지어합려 여파입우유사 도흑수지우삼위입우남해

※ <부사년>은 周나라에서 商族을 戎族으로 혼용하는 사기 秦本紀(융상필극 戎商必克)를 들어 같은 동방족으로 인정하며 西戎을 <삼국지>나 <후한서> 동이전 서문이라 할 수 있는 부분에 기록하였다.   사기 집해도 戎狄으로 기록하는데다가 <안사고>의 곤융?戎=곤이昆夷의 기록으로 보듯 사기 권 110 흉노열전의 <戎狄도 ?夷의 종족이다>나 중국통사(45p)의 <부락성도 견융과 같은 기원을 갖는 족이 狄이다>라는 걸 보라.

     3) 환웅(桓雄)과 같은 무렵에 떠난 반고(盤固)는 물을 다스린 씨족인 공공계(工共系-하백河伯)와 민족의 시원 무렵 나타나는 유소계(有巢系-戎계) 그리고 우리 민족 특징인 머리상투를 튼 유묘계(有苗系-苗族)나 수인씨로 알려진 유수계(有燧系-夷계)를 모두 어우른 부족들을 거느렸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들 부족의 어른을 나타내는 우리 말 <한>을 일컬은 <10干>과 씨족장을 나타낸 <치>를 쓴 <12支>를 이끌고 감숙성 돈황현 남쪽에 있는 삼위산(三危山) 다른 이름으로는 한발간산(太白山)으로 나아갔다
     4) 라림동굴(拉林洞屈)을 거주지로 정하였는데 이는 우리말 벌골(벌판의 고을)로 <라拉-나那와 내奈와 같은 땅을 의미>+<林-수풀로서 불*벌>+<洞窟-굴로 구루*고루*골>의 合字이다.
     5) 나라를 세우니 이를 <제견(諸?)>이라 하고 그를 불러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 했다.   제견(諸?)은 <해를 우러르는 모든 씨들의 나라>라는 말이다 말했듯이 화하인들은 우리 민족들을 낮추려고 <해라는 말인 개-지금도 날이 개다 라는 표현이 남아있다>를 즐겨 <개 견犬)으로 비틀었다.

※ <삼성기 하편>에선 이를 두고 정확하게 <반고(盤固)는 제견(諸?)이라 한다>라고 적었는데 <산해경 대황북경>에서는 다시 <西北海 밖 감숙성의 흑하(黑河)인 흑수(黑水)북쪽에 날개 달린 사람이 있으니 이름 하여 묘민(苗民)이라 한다>라고 하여 그들이 상투쟁이이며 날개 달렸다고 표현한 조이계(鳥夷系) 우리 민족임을 알려주고 있다.

     5) 화하인(華夏人)들의 신화를 보면 <반고>를 일컬어 한결같이 <그는 날마다 커서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큰사람(巨人)이 되었다.   그래서 땅위에 우뚝 서서 하늘을 받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아울러 그무렵 桓國 사람들은 그들에게 자주 <큰 어른(大人)>이나 <큰 사람(巨人)>으로 불려지고 있었다.   그같은 정황에서 서쪽으로 나아가 변방을 떠맡은 한 기둥이 되어 하늘인 환국(桓國)을 지켰으므로 그렇게 입에 올려지면서 내려오다가 저들의 신화로 자리매김된 것이다.
     6) 마지막으로 <사기 하본기>에 <삼위(三危)를 평정한 삼묘(三苗)는 매우 안정을 이루었다.   그들은 적석(積石)에서 배로 용문서하(龍門西河)에 이르러 위예(渭汭)에서 만났으며 곤유(昆兪-난주)와 석지(析支-적석)와 거수(渠搜-삭주)에서 서융(西戎)으로서 매우 안정되었다.   그리고 그 안정을 바탕으로 황하 상류의 서경산西傾山에서부터 <환시래 桓是來>하여 배로 면수(沔水)를 건너 위수(渭水 周와 秦이 발흥한 화하문명의 발상지인 기산岐山이 있음)를 따라 황하에 난입했다>라고 하여 이들의 삼위산-감숙성-황하 상류-하서주랑河西走廊이 아닌 그 남쪽 계곡 황수湟水를 따라 동진-오르도스 북부인 거수-용문서하(섬서성 韓城)에 이르는 대규모의 종족이동로를 밝혀주고 있다.


여기에서 주목할 부분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그들도 스스로 말한 <환시래 桓是來-사기 권2 하본기 본문 西傾山桓是來 浮于潛 踰于沔 入于渭 亂于河  서경산환시래 부우잠 로우면 입우위 난우하>로서 <환족이 배로 면수를 건너 위수를 따라 이무렵 처음 황하로 난입했다>는 말이다.   다음으로 <회우위예 會于渭汭>란 기록인데 “위예에서 만났다”라는 이야기로서 이는 황하 본류를 따라 하류한 일파와 황하 지류인 위수를 따라 동진한 또 다른 갈래가 두 하수가 만나는 <위예> 다시 말해 현재 황하 중류 지점인 <동관潼關>에서 다시 만났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는 나중에 더욱 깊이 연구해야 할 문제이다.

아무튼 [앵무새]는 중국인들이 저들 땅을 지배한 周나 秦의 出自를 포용하고 나라의 북쪽에서 줄기차게 괴롭히거나 王朝의 기반까지 위협해 온 치욕을 감추기 위해 東夷와 삼위산을 근거로 삼은 西夷를 일부러 갈라 <반고>를 시조로 한 華夏系로 보는 견해를 맹신하는 모양인데 나는 찬동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사람이 자랑스럽게 말한 <이유립이 이야기한 삼위산이란 감숙성에 있는 것이라, 저 서쪽 끝에 중국인을 배치해 놓은 셈이다>라는 본의야 말로 반고를 존경하여 마지않는 漢族으로 보았으니 이유립이 삼위산을 거론한 게 어처구니없다던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말인지는 모르겠으나 다음의 글에서 보면 일면 그런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가 말한 태백산은 여전히 백두산이니 이유립은 역시 한   반도를 기초로 한 세계관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태백산    이 백두산인 것은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도 누누이 설명한   바이다.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비정한 묘향산은 천지가 없으니     불가하다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떠들고 있는 것이다(물론 산 정상   에 연못이 있고 없고는 단군신화와는 아무 관련도 없다)】  


그는 여기에서 이유립의 <사관정리를 위한 접근방법>에서 언급한 <아바지(안파견安巴堅-天父)께옵서 밑으로 삼위와 태백(오늘의 백두산)을 살펴보시고......환웅님께옵서 무리 3천명을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밑으로 내려오시니 이를 神市라 이르니 이가 환웅천왕이 되시는 것입니다>를 보고 옳다구나! 하며 반도사관이라 억측을 하는 모양이다.   왜 이렇게 이해를 못하는지...이 구절은 두 단락으로 나누어져 있는 것이다.   말했듯이 안파견이 하시(下視三危太白)한 일과 뒷부분의 환웅집단이 이동한 사실(白山黑水之間)을 분명히 구분하여 설명해 주었으니 다음의 같은 기고문에서 <이유립>이 어떤 뜻으로 <태백산>을 말했는지 눈여겨보기 바란다.   당부하고 싶은 말은 그저 눈에 확 들어온다고 읽다말고 그냥 덮거나 전후 문맥을 전부 보고 올바른 인식을 담아주기 바라는 노파심에서이다.   그래도 잘 모르겠으면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앞서 첫머리에 쓴 <이유립-신채호*정인보*안재홍의 세계관> 부분을 다시 한번 정독해주기 바란다.

“한마디로 말해서 支那 민족사는 그 기원이 사실상 우리 ?겨레(桓族)가 동서 두 갈래로 나뉘어서 서로간의 대결에서 한번 東으로 하고(아승我勝) 한번 西로 하는(피진彼進) 주도권 쟁패전이 연속되는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1)......?카올 해에서 큰 이민운동이 일어나......더 앞으로 나아가 삼위산으로 일단 모였다가 다시 갈려진 겨레는 황하*회수의 물길을 따라 산서*산동*하남*강소*절강 등지로 옮아가 지나사에서 말하는 동이족이 됩니다.



그다음(아래 글 참조)에 이어지는 글도 참 우습다.   한번 길을 잘못 들면 일이 어떻게 걷잡을 수 없게 되며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지를 적나라하게 보는 듯하다.   그대로 다시 옮겨보겠다.   아무튼 이 사람이 예로 든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나오는 낭하리*경박호*선춘령 등의 유적이 수천년을 내려 온 우리 민족의 역사과정에서 오직 [부일사대모화관]에 젖은 편협한 시각 때문에 거기에만 세운 줄로만 착각하던가 아니면 그게 우리 강역의 한계에서 전부다 발견된 유적인양 단정 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스스로가 그런 사관에 빠져 그 유물이 전부인 듯 견강부회하는 느낌이 짙기 때문이다.   이유립은 처음부터 백두산-만주-삼위산에 이르는 우리 고대 강역을 언급했으며 유물이 남아있지 않거나 아직 그곳에서만 발견되었다는 걸 안타까이 여기는 가운데 영역의 경계가 아닌 <글자의 유적>이나마 발견된 걸 다행스럽게 여길 뿐이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앞뒤 잘라먹고 필요한 부분만 자르는 또 이상한 병이 도져 분명히 한탄한 <그런데 후세에는 연대가 까맣게 흘러서 태고문자는 다 사라져서 존재치 않는다> 라는 구절이 보이기 때문이다.


       【환웅이 세운 배달국의 영토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에 나온다.   환웅이 신지씨에게 글자를 만들게 했는데 그 글자의 유적이 남아있다고 주장하면서 남해 낭하리*경박호*선춘령*오소리를 들고 있는데 이 모든 곳이 한반도와 만주 일대다.  즉 이유립은 그 이상의 영역을 생각해내지 못한 것이다】


[Tip]  환국의 강역을 감숙성에서 태백산으로 보는 다른 견해들

양성지(梁誠之)  
우리나라는 요수 이동의 만리국가(萬里國家)로서 단군이래로  자치를 유지해 온 독립국가(실록實錄  세조3년 12월 올린 便宜 12事) -반도로부터 1만리 떨어진 지점의 요수 위치를 비정할 때 감숙성 옆 산서성 지역이 된다(이곳에 지금도 요遼란 지명과 현재의 요동보다 더 즐비하게 요수와 요양은 물론 요양수와 요주와 요현이 있다)

※ 전*후한때 낙양-반도 평양까지 거리가 중국 문헌들을 가지고 연구한 산미행구(山尾幸久)의 논문에 의하면 5천리이다(김성호金聖昊  1982  석사학위 논문)

이승휴
단군조선의 강역은 옛 신라*고구려*남북옥저*부여*예맥족(이 무렵 하북-산서-감숙성에 넓게 퍼져 있었음)까지 다 포함된다(제왕운기)

일연
하시삼위태백下視三危太白  태백산에서 만주를 지나 삼위산까지 -삼국유사

이종익李種益*최창규崔昌圭
삼위는 산서성 삼위산 그리고 태백은 “한밝”으로 만주 동쪽의 백두산이나 장백산이다(한국정신문화연구원*서울대학교)

삼국지 동이전 서문  
공자 曰 순임금(BC 2000년 대)부터 周나라 때까지 이夷의 강역은 “東쪽으로 肅愼이 있는 바닷가까지 西로는 西戎이 있는 유사流沙(감숙지역)까지이다”

관자管子 권23 경중갑편輕重甲篇  
齊 桓公과 우리 민족의 공격을 방지하기 위한 방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남쪽의 오월吳越 운운...발조선發朝鮮이 不朝하니...文皮등 대가를 주는 조건으로 회유함이...호랑이 가죽마다 그를 채울 만큼의 황금을 보내야 8천리 강역의 발조선이...”라는 기록(소진은 燕*齊*趙가 각 2천리라고 하였다)

※사마상여의 기록에도 제나라와 숙신은 8천리 떨어진 게 아니라 바로 접했으며 관자 규도(管子 揆度)에도 이웃 국가로서 <海內>의 조선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이승휴나 일연은 예로부터 자명한 <삼위산>을 반도내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지만 결국 태백산은 묘향산으로 비정하는 우(愚)를 범했다.   그렇다고 우리 민족의 강역이 반도만이 아니라는 인식의 흐름은 변하지 않는다.   하여튼 그는 이제 치우(蚩尤)문제까지 건드리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우선 들어보기나 하자.


        ◀ 환웅이 도읍을 정한 곳을 신시라고 한다.   이 신시가 어딘지는 알 수 없으나(대략 이유립은 하얼빈 정도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이곳이 청구와 낙랑(이 세계관에서 낙랑은 요서 지방에 있다)보다는 동쪽에 비정되어있다.   그것은 환단고기 태백일사 신시본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복희가 신시로부터 나와서 우사의 직을 한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받고 후에 청구,낙랑을 지나서 드디어 진陳으로 옮아가니 수인*유소와 더불어 이름을 서토에 드날렸다...(중략)...지금 산서 제수에 복희 족속들의 옛집이 남아있는데 임*숙*수구*수유 등의 나라가 모두 둘러있었다 한다>   위 글을 보면 우선 진陳나라가 나온다.   하남성 개봉부에 있었던 나라다.   그리고 복희의 영향이 미친 지역이라 산서성이 나와 있다.   뒤에 나온 나라들도 다 그 근방에 비정되는 나라들이다.   즉 산서까지도 한족의 영토였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읽어보자.   <복희의 능이 지금 산동성 어대현 부산鳧山의 남쪽에 있다.   신농이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다>   복희의 능이 산동성에 있다는 말은 본문에 나온 것이고 신농이 일어난 열산은 호북성에 있는 것이라니 이 땅들 역사 한족의 것임을 이유립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앵무새]가 언급한 [치우*황제 전역 蚩尤*黃帝 戰役]을 분석하기 전에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 있다.   그래서 뒷부분을 먼저 인용했다.   최초로 중국 대륙에 진입한 민족들이 하나는 바이칼을 기원으로 감숙과 만주 북동부를 통해 다른 한줄기는 타림분지에서 황하 줄기를 타고 동쪽으로 이동하는 흐름(지금까지의 통설을 따른다)을 보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륙의 형세가 서고동저西高東底*서악동야西岳東野의 지형으로 수량이 풍부하고 기온이 따뜻한 자연환경을 이루어 장기정착에 최적의 생활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를 잘 말해주는 기록들이 보인다.

       일찍이 수렵과 채집밖에 위험한 일이 없었는데 세월이 흐르자 세상의 인심이 변했다  중토는 서쪽 땅의 보고가 되었고 기름진 땅이 천리에 뻗치었으며 기후도 아주 좋아 우리 환국에서도 그 지역에 침을 흘리고 다투어 찾아갔다   이에 西土 내에 살던 토착민들도 질세라 모여들기 시작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서방 서장족(西藏族)은 1단계로 북쪽 천산 산맥과 남쪽 곤륜산맥 사이에 있는 타림분지로 들어가 한(漢)족의 세력기반이 된다.   하지만 타림분지의 기후변화(홍적통 제2빙하기)로 인해 인류의 이동이 시작되었는데 「산해경 山海經」의 기록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지금의 신강성에 속하는 곤륜산의 타림분지에 서방 서장족의 토착세력으로 알려지고 있는 원시미개 족속들인 서왕모족*석왕모족*서연모족의 3대 모계 종족들의 대 이동이 이루어졌다(서량지徐亮之  중국사전사화  210p) -이들은 bc 40c경에 東進도중 제4빙하의 해빙기에 궤멸적으로 익사한 후 살아남은 西王母*西燕母*石王母의 후손이 황하*양자강의 상류를 타고 다시 동쪽으로 난입한다.


※내몽골지역은 중부 만주지역까지 깊숙하게 뻗어있으며 남쪽으로는 북경과 가깝다.  동쪽은 요동반도와 지척이며 4000-3000년 경 말을 길들인 유목족으로서는 고비사막을 서로 우회하여 드넓게 펼쳐진 화북평원을 가로질러 쉽게 황하유역까지 도달할 수 있다.   이는 후세까지 변하지 않았는데 오르도스 지역의 황하 만곡부를 따라 남진하는 흉노족의 침략루트와 만리장성의 험만 넘으면 그대로 진입했던 요*금*원*청의 진격로를 보면 알게 된다.   이들 지역은 산출물이 풍부하고 말을 타고 수시로 이동이 가능한 평야가 펼쳐져 있던 중원과 수원과 해산물이 풍부한 황하*양자강 하류와 동부해안지방에 눈독을 들였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BC 5000년 이후 무렵에는 상황이 서서히 달라지는 걸 알 수 있다.  이 시기를 분석한 중국학자들과 Richard Jones 의 학설을 <윤내현>이 간결하게 정리하여 설명해주고 있다.  


       그동안 알맞은 기후조건으로 부족 사회의 인구는 급격히 증가하여 황하 유역에만 100만명 이상이 거주하고 있어 주로 中流에 집중하고 있어 중류의 지류 지역에 있던 부락 수는 다른 지대와 비슷할 정도였다.   이로 말미암아 인구폭발을 가져는 가운데 차츰 기온이 하강하면서 생활유지에 타격을 받게 되었다.   당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치열한 약탈전쟁을 유발하면서 이미 진출해 있던 하북 지역의 방어와 침략을 위한 명분이 용이해지는 가운데 세력 강화를 위해 부락을 이끌 지도자의 필요성이 절실해졌다.  


바로 이런 열망에 부응하여 BC 3500년경 桓國에서의 움직임이 빨라졌는데 이미 정착단계를 벗어난 황하유역에 대한 새로운 정치체계의 정립이 진전하게 된 것이다.   [태호복희씨太昊僕羲氏]의 등장이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을 [환단고기]가 가장 명확하고 인과적으로 일목요연하게 풀어주고 있다(앵무새의 예시를 그대로 사용한다).  

     1) 세계(世系)   태우의(太虞儀) 환웅의 막내를 태호(太?)라 하니 또는 복희씨(伏羲氏)라 한다.
     2) 출자(出自)   환웅국 삼사(桓雄國 三師 가운데 하나인 雨師의 집안을 세습하고...
     3) 출발한 나라와 지역   桓雄의 신시(神市)에서...
     4) 경유한 桓國의 영역   청구(靑邱)와 낙랑(樂浪)을 거쳐...
     5) 업적   수인씨燧因氏와 유소씨有巢氏(족단族團의 근본은 이미 우리 민족으로 밝혀진 반고盤固의 행적에서 분명해졌다) 나란히 그 이름을 서방에 빛내었다.
     6) 받은 작위(爵位)   서쪽 변방에 봉토(封土)를 받더니 직(職)에 있으면서 정성을 다 하였다.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燧人)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

기존 세력권의 남하를 위해 잠식적인 진출이 순리적이었음은 <복희씨>가 원주토착농경민들보다 우월한 무력(350m의 최대사거리와 200m에 달하는 유효사거리를 가진 활 등)과 문화적 기반으로 저항을 별로 받지 않고 정착단계에 들어섰음은 <무기를 쓰지 않고서도 한 지역을 감화시켜 마침내 수인(燧人)에 대신하여 지역 밖에까지 명령을 내렸다>라는 구절로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인들은 강하고 건장한 체구를 가지고 있어 일본이나 중국인보다 훨씬 세력적이며 용감한 정신을 가지고 있다 - Siebold  한국문화사대계 200p

           같은 시기 하남성과 섬서성의 채도문화인 앙소문화(仰韶文化)의 사회발전 단계는 요령지역 문화보다 수백년 뒤진 것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이 대륙으로 무난하게 진출하면서 지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윤내현>
  

따라서 宋末 증선지(曾先之)의 십팔사략(十八史略)으로 보면 <복희>가 도읍으로 정한 기주(箕州)땅 진(陳  하남성 陳州)은 하남성 회양현(淮陽縣)부근 陳倉(太昊의 땅이며 순舜 자손이 입국立國하였고-舜의 姓 위씨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인데 이 무렵부터 황하를 넘어 그 지역에 진출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는 우리 민족이 뒤이어 회淮*사泗지역으로 깊숙하게 진입하게 될 발판을 陳에 만든 것이다.   다음은 <복희>가 우리 민족임을 밝히는 자료들이다.

        1) 문헌적으로 宋人 이방(李昉)이 편찬해 중국 재래 백과사서(百科辭書) 중 백미(白眉)로 평가되고 있는 태평어람(太平御覽) 권 78 제왕세기(帝王世紀) <태호복희씨 조>에 <帝出於震未有所因 故在位東方 제출어진말유소인 고재위동방-복희씨는 震國의 출신이되 아직 취한바 없으므로 그 벼슬이 동방에 있다>란 기록이 있는데 여기서 진(震)은 <역易> 설괘(說卦)를 보면 “...震은 東方也”로 나와 있으므로 동쪽지역이다.   또한 <동방>은 이미 말한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 “東方曰夷”라고 명백히 해주었으니 出自가 어디였겠는가?
         2) 고고학적으로 옛 문헌을 보면 중국역사상 처음으로 “그물을 얽어 새와 짐승*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쳤다”   하남성 출신이라면 그렇지 못하며 우리 민족은 유물인 암사동유적(BC 5000-3500)에서 석제어망추(石製漁網錘)가 발견된 것처럼 어망으로 잡았다.
        3) 역사적 관념으로 중국 고적(古籍)에서 그를 중국인이라고 다룬 기록이 없으며 다만 당나라 때 사마정이 사기의 부록(보사기補史記)으로만 붙여서 적어 놓았다.   그리고 姓이 풍씨(風氏)라 함은 <후한서 동이열전 서문>에 기록된 동이의 9겨레 가운데 하나인 風夷에 속한 까닭이었다(안호상  동이문화의 창조자  105-114p)

※ 서문청(徐文淸-淸 때 죽서기년을 보전補箋)의 <太昊太古河圖代姓紀伏犧氏 燧人子也因風而生故風姓 태호태고하도대성기복희씨 수인자야인풍이생고풍성>란 기록을 보라.

        4)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출신인 부사년(傅斯年)은 <夷夏東西說>에서 “태호복희가 동이족이라는 건 고대로부터 공인되어 온 것이다”라고 확정지었다.

[환단고기]는 이어 신농씨(神農氏)의 기록을 여러 곳에 남겨놓고 있다.   과연 그가 다스린 영역도 漢族의 강토였는지 판단해보려면 모두 다 나열해 볼 필요가 있다.

        1) 뒤에 갈고曷古환웅이 나셔서 염제신농(炎帝神農)의 나라와 땅의 경계를 정했다.  <삼성기전 하편>
        2)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列水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소전은 소호少?와 함께 모두 고시씨高矢氏의 방계이다...신농의 나라와 구역의 경계를 획정하여 공상 동쪽이 우리에게 속했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3) ...웅씨)熊氏가 갈라져 나간 자에 소전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 말기에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농은 수많은 약초들을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烈山)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교역하게 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편리하게 하였다. <태백일사 삼한관경 본기>

신농(神農)이 [태호복희씨] 통치 말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다시 우리 민족의 방계(傍系)로서 영역을 물려받아 다스린 일은 여러 가지 정황증거로서 표출되고 있다.   바로 복희 치세 후반에 앞서 말한 대로 동진한 여러 부족들의 난입과 쟁투로 황하유역이 시끄러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 문헌에 의하면 복희 사후 여동생으로 알려진 여와(女?)가 올랐다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風氏 姓의 체제가 유지되는 걸 엿볼 수 있으니 世系의 흔들림이 감지된다.
        2) 신농의 世系가 복희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강수(姜水)는 기수(岐水)라고도 하며 섬서성 기산(岐山)현 서쪽에 있는 江인데 파자(破字)하면 <羊+女>이며 어머니의 姓과 같고 또 그 역시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있다.   바로 양족(羊族)인 유목족이며 후대에 융(戎)이라고 표현된 반고(磐固)부족과의 만남이 짙은 느낌이다.

※ 참고로 앞서 내가 깊이 연구해야할 과제라고 말한 西戎의 <환시래桓是來와 회우위예 會于渭汭>라는 해석을 다시 보아주기 바란다.   그들의 南下東進路 上에 신농의 出自인 열산이 있고 강수가 있으며 아비라고 말한 소전이 야릇하게 안부련(安夫連) 말기에 명을 받고 그쪽 방면인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고 한다.(열산烈山은 여러 이름(여산?山*려산麗山*역산歷山*수산隨山*중산重山)들이 많으며 호북성 수현(隨縣) 북쪽에 있다.   염제(炎帝)를 가리키는 대명사로도 쓰인다)

        3) 原出自의 기록에서 구태여 소전과 연결시키며 소호少?와 함께 모두 고시씨高矢氏의 방계이다 라고 강조하면서 후일 도읍으로 삼게 된 복희씨 때 들어가 우리의 先住民을 어우른 산동성 곡부曲阜로 장가들어 勢를 얻는 것이다.
        4) 그가 옮긴 <곡부>는 나중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핵심 거주지역이며 문헌에도 <炎帝神農氏的本族也 便是禹貢的島夷?夷來夷  염제신농씨적본족야 편시우공적도이우이래이>에서 출신족인 島夷가 우리 민족임을 <사기 하본기 禹行條 正義 및 집해>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와 정현의 말(鄭玄曰)에 나타나 있다.   또한 ?夷의 原出도 <사기>에 요서로 기록되었다.  <서량지徐亮之  동아문화의 창조자  126p>.

[덧글]

"염제신농씨는 강씨 성이라. 어머니는 임사(任○)라 하였는바 유교(有○)씨의 여식(女息) 등(登)으로 소전(少典)의 비(妃)가 되었다.   화양(華陽)에 유(遊)할 새 神龍의 머리가 있어 이에 감응해 염제를 낳았더니 몸은 사람인데 머리는 소로 오랫동안 강수(姜水)에 머물러 살았다"  <제왕세기 帝王世紀>
"소전(少典)의 비(妃)는 안등(安登)이니 화양(華陽)에 유(遊)할 새 神龍의 머리가 있어 상양(常羊)에 감응하여 신자(神子)를 낳았으며 인면용안(人面龍顔)으로 밭가는 것을 좋아했으니 곧 신농(神農)이다"  <춘추원명포春秋元命苞>

특히 이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

<일주서逸周書 고덕편考德篇>의 "작도야근부 위뢰사누 作陶冶斤釜 爲??? 도자기를 굽고 솥을 만들며 쟁기와 보습 등을...“와「태평어람 太平御覽」에 "신농이 밭 갈고 도자기를 만들었다 神農耕而作陶" 그리고 「광운 廣韻」의 "신농이 와기를 만들었다(神農作瓦器)"나 「물원 物原」에서 "신농이 옹기를 만들었다(神農作甕)"이라 했다는 기록으로서 <복희>로부터 <신농>에 이르기까지 우리 민족의 [회도문화]를 변함없이 받아들인 후예들임을 보여주는 증좌이다.


이제 여러분들은 [앵무새]의 글을 보면서 지금부터 언급할 마지막 문장인 <우선 진陳나라가 나온다.   하남성 개봉부에 있었던 나라다.   그리고 복희의 영향이 미친 지역이라 산서성이 나와 있다...즉 산서까지도 한족의 영토였다고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복희의 능이 산동성에 있다는 말은 본문에 나온 것이고 신농이 일어난 열산은 호북성에 있는 것이라니 이 땅들 역사 한족의 것임을 이유립이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라는 이야기가 얼마나 허망하고 기본적인 자료 분석이나 사료의 연구 없이 기만과 편견만으로 가득 찬 억지라는 게 극명하게 드러났을 것이다.   거두절미하고 [치우*황제 전역]의 배경에 된 정황을 알게 되었으니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 다음 삼성기 하편의 구절을 보자.   <치우천왕은 염농이 쇠퇴한 것을 보고 드디어 웅대한 뜻을 세워......(중략)......이것이 이유립이 생각한 환단고기의 세계인 것이다▶


먼저 이 사람이 주장하는 핵심을 짚어보기로 하자.   그래야만 나도 더 이상 손가락이 아프도록 글을 고생할 까닭이 없고 이것저것 얼토당토않은 일에까지 머리를 썩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되지도 않는 말을 귀 기울여 들어가며 일일이 반박하기에도 지쳤다.

     1) 저 <삭도>를 임승국은 산동성 임치현 동남쪽이라 비정했고 단학회 측은 산서성의 황하 줄기 중 하나로 비정했다.   그 앞에 나오는 치우가 서쪽에서 천병을 일으켰다는 구절이 의아한데 원문이 <누기천병어서累起天兵於西>라고 되어있다.   임승국은 해석이 되지 않자 여러 차례 서쪽으로 천병을 일으켰다라고 저 편한 대로 해석해버렸다.   애초에 이유립이 낸 오타거나 치우가 제하(중원)를 둘러 싼 강대한 세력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2) <회와 대 사이를 차지했다>는 대목이다.  회와 대 사이란 아래 지도에 붉은 빗금을 친 부분을 가리킨다.   즉 이 지역을 치우천왕이 점령했다는 말이다.   점령했다는 말은 그 전에는 이 땅이 한족의 땅이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즉 치우천왕 이전 배달국의 영토에는 이 땅이 들어있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우선 이 당시의 전역(戰役)을 일으킨 원인과 치우(蚩尤)의 진격로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래야만이 보다 정확한 시각과 객관적인 안목으로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戰役의 배경은 여러 史書들을 훑어보면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낼 수 있다.

1) 환국(桓國)의 부권사회父權社會-아비 씨 내림)정착과 지나 후국(支那 侯國)의 모계사회(母系社會-어미내림 씨)와의 갈등

수세기에 걸친 부권사회 발달과 모권사회를 유지하려는 세력의 대립이 커가는 가운데 지나족(支那族)의 시조로 일컬어지고 있는 동방족의 후예 [황제 헌원]이 서방족의 모권사회 속에 데릴사위의 형태로 흡수되어 들어간다(지나에서 오래도록 유지되었던 모계사회 풍습은 낙빈기의 저서를 읽어보면 대강의 추세를 읽어낼 수 있다).   <사기>에 의해서 중화족의 시조로 자리매김 된 황제는 강수(姜水)의 감병(監兵) 책임자였던 동방족 소전(少典)을 아버지로 둔 이복형제라고 알려졌는데 소전이 유와씨(有?氏)로부터 여자를 얻어 태어난 인물로 서방족인 서릉지방의 누조(?祖)에게 장가를 들어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서방 서장족(西藏族)의 입장을 대변하는 모권사회제(母權社會制) 아래의 출가외인이 되었다.


        누조(?祖-우리말 별명 바람할미*뽕할미*삼신할미 - 씨 이름 표시 -)는 원래 우리말로서 <뉘조=누에조=누어조>에서 차음(借音)한 것이다.   잠신(蠶神)으로 모셔지는 인물로 一說은 신농의 차비(次妃)에게서 난 딸로서 서릉지방의 군장의 딸이라거나 산동성 곡부의 신농국(당시 최대의 양잠국養蠶國)에서 이미 주력산업으로 성장한 누에를 치고 양잠을 총괄한 여걸이라고도 한다(누?는 밭田에서 실?를 만드는 여자女를 뜻함)

※ 史記에 황제(黃帝)가 소전(少典)의 아들이라 한 것은 당시의 혼인습속이 모계형(母系型)으로서 子가 <사위>를 뜻하는 아들임을 모르고 착각한 것으로 사실은 소전의 아들이 신농(神農)이고 황제는 신농계 사위(아들로 표현)이다.

2) 당시 주요 생활근거지이며 핵심지역인 황하유역과 회淮*대岱 지방을 대상으로 한 쟁패전의 양상

모든 원인이 유망(兪網)의 황하유역에 대한 안정적 지배라는 쓸데없는 야망으로 군비를 확충하여 인근의 부족을 모아 空桑(하남성 진창현陳倉縣-진유陳留라고도 하며 하남성 개봉시開封市 동남에 있음) 주변의 小國들을 강압적으로 억누르면서 벌어진 일이었다.   이런 실정(失政)으로 말미암아 민심을 잃어 다른 부족의 반발을 일으키며 통치력을 잃게 되고 각지에서 君長들이 들고 일어서자(복희계인 靑帝*공공계인 白帝*갈천계인 黑帝*中央系인 黃帝-공손 헌원의 황제와 同名) 유망은 다시 空桑을 버리고 북쪽 직예성(하북성) 탁록(?鹿)으로 옮긴다.   이 무렵 대륙에 들어와 퍼져 살던 동이계 부족들을 여(黎)와 묘(苗)라 했는데 9부족이 이름을 날렸으므로 이를 구려(九黎)라 칭하였다.   결국 치우(蚩尤)는 이 전쟁의 승리로 회淮*대岱 지역에 先住하였던 동방계 군장들의 완전한 환웅국(桓雄國)으로의 관경화(管境化)와 직접적인 통치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淮*岱지방은 西土에서 가장 기름진 평야지대로 회수(淮水)는 하남성 남쪽의 동백산(桐白山)에서 발원해 동으로 안휘성 북을 지나 강소성으로 나아가 대운하에 합류하고 대산(岱山)은 오악(五嶽)중에 동악(東嶽)인 산동성 태안현(泰安縣) 북쪽에 있는 태산泰山(태산太山)으로 周나라 때 서언왕(徐偃王)의 터가 이곳이며 중국 대륙 동방에서 제일의 요충지이다.  

3) 서방 서장족(西藏族) 한(漢)족이 모체(母體)였던 동방 동이족(東夷族) 환국(桓國-한韓)에서의 완전 독립  

하남성 웅이산(熊耳山)에서 기반을 닦고 일어난 <황제>는 원래부터 동이계 국가인 유웅국 소전(有熊國 小典)부족의 아들이라 알려진 바 그가 내세운 동서양부족연맹의 최초로 가담한 동이족은 산동반도를 세력기반으로 했던 소호씨(小昊氏)였는데 황제의 아비인 계곤(啓昆)이 웅(雄)땅으로 갔다는 것과 황제의 號가 유웅(有雄)씨라는 것은 웅계(雄系)로 기록되어 있는 소전씨(少典氏)와 연결되어 있음을 은유한다.   이를 [환단고기]가 명확하게 적시하고 있다.

        한웅이 처음 나라를 열었을 때 웅족(熊族)을 후(侯)로 봉해 유웅국(有熊國)이 되었으며 임금의 이름을 소전(少典)이라 했으니 곧 신시(神市)의 후군(侯君)이다.   호(號)를 세습하여 소전씨에 이르러 유교씨(有嬌氏)의 여자를 취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큰 아들인 신농(神農)이 여와(女?)의 뒤를 이어 西土의 임금(君)이 되었고 신농과 한 어미에게서 태어난 동생은 유웅국의 임금 자리를 받아 세습하여 소전씨가 되니 성이 공손(公孫)으로 되었다가 그 후손에 이르러 헌원(軒轅)으로 姓을 바꾸고 희씨(姬氏)가 되었다.   神農의 후손인 유망(楡罔) 때에 이르러 칭하기를 황제(黃帝)라고 했으며 漢族의 시조가 되었다  <李固善 心堂全書>

        이를 증명하는 기록이 「史記 5제본기」의 '황제는 소전의 아들(黃帝者 少典之子)이라는 대목과 동 기록에서 '황보익이 말하되 황제는 수구에서 태어나서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였으며 헌원에서 거주했다'라는 대목이다.   그리고 「제계사기」에서는 '황제는 백민(白民)으로 태어나서 스스로 동이에 속했다(自屬東夷)'는 대목이 나온다(黃帝生於白民...自屬東夷 - 楚史).   사마천의 「사기 5제본기』에 3황 5제시대가 5백년인데 황제는 100여 년 재위했으며 유웅국(有熊國) 소전(少典)의 아들로 소전은 인명이 아니라 (환웅국의) "제후국 이름"이라 하였다.

        <유웅국>이 환웅국의 제후국으로 추정할 수 있는 근본은 사마천의 史記에서 보듯이 중국역사는 황제 헌원에서 시작하고 있는 게 틀림이 없어 결코 중화족의 제후국이 될 수 없으며 당시의 종주국이었던 환웅국의 제후국이 될 뿐이다.   「산해경 山海經」에 3황5제 모두(常先八代帝於此取之) 숙신(朝鮮)에서 배출되었다고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아 [환웅국]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大荒地中 有山名曰不咸 有肅愼之國 在北白民有樹(이를 樹人物指稱으로 해석)名曰雄 常先八代帝於此取之)

※《상서대전(尙書大傳)》에서는 3皇을 수인(燧人)*복희(伏羲)*신농(神農) 《사기(史記)》에서는 5帝를 황제(黃帝)*전욱*제곡*당요(唐堯)*우순으로   말한다


그가 야망을 품은 원인은 두 가지로서 하나는 유망(楡罔)의 실정(무도하고 정사를 과격하게 단속하며 급하게 몰아세웠다)으로 군장들의 발호가 일어났고 둘은 <뉘조-누조>의 부족을 얻어 잠상(蠶桑)을 장악하면서 재정적 기반을 풍부히 하고 위세품(威勢品)을 독차지하게 된 것이다   특히 <뉘조부족>은 누에 기르기를 독점하다시피 하고 있었는데 그즈음 잠상의 핵심인 <누에>는 인류의 두 가지 기본바탕(먹는 것과 입는 것) 중 하나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준 이로운 벌레로서 우리말로 <하늘 벌레 천충天?>이라 불렸다(인류의 문화적 진보를 크게 앞당긴 대 발견을 불-토기-농경-양잠으로 꼽는다)

동방족과 서방족은 북경 근처 회래현 지역의 판천(板泉: 상곡上谷 -북경 배후 장성지대 -북경서북 장가구 부근 회래현懷來縣 지방)에서 황제 헌원과 염제 신농이 벌인 치열한 싸움이(그 중에서 탁록?鹿싸움이 유명) 발단이 되었으며 이 싸움에서 황제가 승세를 잡자 환국(桓國)은 그동안의 지나 대륙에 대한 주도권이 흔들릴지도 모른다는 압박이 크게 작용한다.   왜냐하면 이때 대륙은 세 갈래로 대치한 형국이었는데 북방에는 대요(大撓)가 동쪽엔 창힐(倉?)이 서편에는 헌원(軒轅)이 있어 서로가 싸워서 승리를 얻고자 했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여 이들이 어떻게 움직이느냐? 에 따라 판도가 크게 기울어지는 정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蚩尤는 전격적으로 움직여 재빨리 승기를 굳힘으로서 황제가 이들과 세력을 합치는 걸 차단함으로서 흔들리는 지배권을 회복하려고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전략은 주효하여 헌원이 싸울 때마다 불리해 <대요>에 의지하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창힐>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였다고 기록된 것이다.   이를 들어 두 부족이 모두 桓國에 속해 있을 때 대요는 간지의 술(干支의 術)을 배워갔고 창힐은 부도의 문(符圖의 文-부호와 그림으로 된 글자)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은유하였다.


이런 역사적 배경과 당시 정세의 흐름을 머리에 담고 하나하나 살펴 나가보자.   첫 번째로 <삭도>를 꼬투리로 삼아 물고 늘어지는데 한번 <치우>의 전역에 대한 진격로를 분석하여 이 문제를 풀어보자.

원래 황토고원인 산서성(山西省) 일대에서 神農과 黃帝의 선조가 이웃해 살았다는 기록도 나타나니 아무튼 판천(板泉)에서 楡罔과 3차에 걸쳐 싸운 후 수세에 몰려 굴복해 [염황군炎黃軍]이란 연합집단을 구성하였다.   이렇게 손을 잡을 수 있던 이유는 처음 이웃했던 인연 때문인 듯 보여 진다.   한동안은 부족 간에 내부 패권 쟁탈전으로 두 선조가 황하 중류 지역에서 세력을 얻어 강력한 집단으로 성장했고 그 후 황하 중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하북성 북부에서 일전을 벌인 후 연합한 것이다.   이에 불복한 신농계의 일부가  최후로 싸워서 많은 부족을 잃은 곳은 복우산(伏牛山-하남성 숭현嵩縣 서남)이라 명했는데 이 때 살아남은 우양계 신농부족들이 후일을 기약하기로 하고 서쪽으로 나아가 반고(盤固)때에 같이 내려와 정착했던 유소(有巢)씨와 수인(燧因)씨가 연합한 후예였던 유수(有遂)씨가 있는 지역에서 정착해 강(羌)씨족이 된다.

        염소와 소의 뿔을 보고 나무를 깎아 몽둥이에 붙여 사용하니 이를 과(戈)라 했고 후에 융족(戎族-웅雄*웅熊의 전음)의 祖가 되었으며 대대로 熊族과 혼인관계를 유지했다.   이로서 주(周)의 시조인 후직(后稷)의 모(母)였던 강원(姜嫄)과 고공단보(古公亶父)의 처(妻)인 강녀(姜女)를 비롯해 무왕(武王)의 妻였던 읍강(邑姜)이 그 부족에서 나왔다.

판천(阪泉) 싸움에서 승리한 황제군(黃帝軍)은 여세를 몰아 지나(支那)의 지배권을 차지하려고 하남성 중동부의 연(?)*산동성 태산 이남의 대(岱)*안휘성과 강소성 일대의 회(淮)의 유망(楡罔)에게 불복했던 군장들을 포섭하여 세를 불린 후 북경(北京) 서북부 천진(天津) 지방의 탁록(?鹿-북경부근 천진지방)까지 진격하였다.   만주에서 들어가려면 거쳐야 하는 진입로 상에 있어 지형상으로도 환군(桓軍)의 진격에 대한 맥을 끊고 숨통을 막을만한 전략요충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때 支那의 상황을 전해 듣고 대노하여 징벌을 결심한 환족(桓族)의 天王 <치우-자오지>의 전격적인 北京 북부로의 진격(백하白河부근 동남에 있는 여수의 남쪽인 색도索度=색두索頭를 거쳐 진군) 및 매복에 걸려 첫 전투(산서성 해현전海縣戰)에서 궤멸적인 타격을 입고 공상(空桑)으로 일시후퇴 후 웅거하였으니 이후부터 본격적인 황제-우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황제는 처음 보는 군대의 강력함과 청동무기와 투구 등 갑주의 위력(동두철액銅頭鐵額)등 각종 신무기에 놀라 정체조차 알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여 도망을 한 후 사람을 풀어 내력을 알아내기에 고심하였다.

판천(阪泉)은 상곡(上谷)으로 하북성 서북부 탁록(?鹿)근처의 상간하(桑干河)-양하(洋河)로 이루어진 하곡(河谷)으로 북경(北京) 배후의 서북 지방에 있던 장성지대(長城地帶)인 장가구(張家口) 지방이다.   치우는 이곳으로 신속히 들어가 주진(主陣)을 펼치면서 갑자기 서쪽에서 나타난 것이다(지금도 탁록에는 황제성*치우새(寨-산채)*치우泉*치우분(墳)*치우혈염(血染)산과 북경 북부 연경(延慶)현의 상*하 판천촌이 있어 그 무렵의 형세를 파악케 해준다)

다시 말해 [치우]는 북평(北平) 서북 내몽고로부터 흐르는 동양하(東洋河)*남양하(南洋河)가 선화(宣化)의 북쪽에서 합쳐 선화(宣化)를 지난 후 동남으로 상간하(桑干河)에 들어감을 일찌감치 파악하고(이를 구뇨九?의 강을 거슬러 오르다라는 기록으로 표현했다) 색도(발해만 서쪽의 백하 부근)로부터 군사를 전진시켜 강을 이용해 산서 陽高-선화와 혹 그 서북쪽에서 은밀히 내려와 공상부근에 근거지를 잡은 황제의 진격보다 먼저 도착해 신속하게 진용을 갖추고 산서 해현지역에서 급습하여 적의 허를 찌르고 있다(육지로 이동할 경우의 시간단축을 위해 강을 거스른 전략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치우가 양수(洋水)에서 나오다    이는 북쪽 양수(洋水)부근에서 남하했음을 의미한다.

치우는 일단 지나(支那)의 패자가 되려는 황제(黃帝)의 기도를 분쇄한 후 염황군(炎黃軍)에 들어간 유망(楡罔)을 토벌해 서쪽변경을 안정시켜놓은 뒤 우리 민족의 중추지대이며 핵심강역을 보호할 생각으로 회淮*대岱사이에 머물며 갈로산(葛盧山)에 도달해 제련과 무기를 제작*정비한 후(오구장五丘杖*도극刀戟=칼과 굽은 창*태궁太弩=활 틀을 놓고 화살 돌을 쏘는 무기를 생산했다)   이어 탁록(?鹿)부근에서 전방을 방어하던 염제(炎帝)를 공격하니 다급해져 황제(黃帝)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이 다음부터는 [앵무새]가 제기한 문제의 핵심을 빗겨가니 더는 설명을 하지 않겠다.


        염제군(炎黃軍)은 합쳐서 출병하여 접전(1차전)했으나 대패한 후 공상(空桑)으로 후퇴하니 치우군은 이후 1년 간 황제에게 협력한 부근의 9제후를 공략한 다음 옹호산(雍狐山)에 9개의 야금소를 설치하여 사금*석금을 캐고 지나(支那)에서 쓰기에 적합한 무기들을 제작하거나 개량 및 수리를 했다(예과芮戈*옹호창雍狐戟 등을 제작)   <일주서 상맥>

        갈로산은 아마도 우리말로 가루쇠(철鐵)인 가루나 가로(도검刀劍)에서 파생된 지명이 아닌가도 싶다.   <산해경)>을 보면 <장백산에서 남쪽으로 380리를 가면 갈산(葛山)의 첫머리이다.   예수가 동류해 여택(余澤)에 들어가고 경산(耿山)에서 남으로 300리를 내려가면 노산(盧山)인데 역시 초목이 없고 모래*자갈이 많으며 사수(沙水)가 남으로 흘러 잠수(?水)에 들어간다 라고 적혀있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갈석(碣石)도 左갈석과 右갈석이 있음을 익히 알 것이니 기록을 보고 그 무렵의 전황과 전역(戰域)에 비추어 신중히 지명고찰을 해야 할 듯하다.

그런데 갑자기 <그 앞에 나오는 치우가 서쪽에서 천병을 일으켰다는 구절이 의아한데 원문이 <누기천병어서累起天兵於西>라고 되어있다.   임승국은 해석이 되지 않자 여러 차례 서쪽으로 천병을 일으켰다라고 저 편한 대로 해석해버렸다>라는 이야기가 왜 튀어나오는가?   자세히 전역이 돌아가는 상황조차 파악해보지도 않고  그저 저 편한 대로 해석해버리는 걸 보는 듯하여 내가 다 민망하다.   <애초에 이유립이 낸 오타거나 치우가 제하(중원)를 둘러 싼 강대한 세력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는 망발은 이제 좀 걷어치웠으면 한다.


두 번째 언급한 회淮*대岱지역은 중국대륙에서 가장 비옥하고 물산이 풍부하며 기후가 살기 좋은 지역이었던 하북 지방과 같이 이름을 드높인 지대였으므로 일찍부터 북방통로를 통하거나(하북) 동부 해안선을 따라 해로를 거치거나(회*대)하여 우리 민족의 본산이 되었음은 앞서도 익히 말하였으니 다음의 구절로 가름한다.

        중국역사가 왕동령(王桐齡)은 <중국민족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4000년 전 지금의 호북*호남*강서 등지는 이미 묘족(苗族-이들을 상투쟁이라고 하여 우리 민족의 특성으로 알려졌음은 dll 말했다)이 점령하고 있었고 중국에 한족(漢族)이 들어오게 된 후에 차츰 접촉하게 되었는데 이들 민족의 나라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였다.


이제 마지막 결론 부분이다.   그가 말한 대로 옮겨보겠다.   어이구!!!   이런!!   차마 낯이 뜨거워 다 읽지도 못하겠다.

       ◀ 자 여기서 치우 이야기가 나오면서 중요한 대목이 지나간다.   보자.  <치우는 범처럼 하삭河朔에 웅크리고 앉아서 안으로 날랜 군사들을 양성하며 밖으로 시세의 변화를 살폈다>   하삭이란 황하 이북의 거친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유립은 배달국의 영토를 중원에는 전혀 배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이후 벌어진 치우의 진군로를 살펴보아도 뻔히 알 수 있다(태백일사와 삼성기에서 치우가 점령한 영역은 좀 다르다.   태백일사쪽이 훨씬 많다)

       1. 갈로산의 쇠를 캐내 무기를 만듬(어딘지 모름.   김산호는 갈석산에 비정.   그나마 정상적인 비정이라 하겠다)
       2. 탁록 -탁군 부근
       3. 구혼 -어딘지 모름
       4. 옹호산雍狐山 -어딘지 모름(단학회에서는 섬서성에 있는 옹산雍山이라고 했으나 그곳을 찾지 못했음)
       5. 洋水 -어딘지 모름(임승국은 요동반도에 있는 대양하라고 했는데 지도는 보고 생각이라도 하고 말했는지 모르겠다)
       6. 공상空桑 -진류

       일단 모르는 지명이 많긴 하지만 탁록에서 진류로 나아갔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빨간색 선이 그 진로를 가리킨다.   단학회가 칠랄레 팔랄레 내키는 대로 찍어 놓은 지명비정을 따르면 파란색이 된다.  [치우전역도]   이 때 공손헌원이 반란을 일으켜서 치우는 다시 탁록으로 진군해서 무찔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결과 치우는 기주*연주와 회*대의 땅을 모두 차지했다고 한다.   그 땅이 대강 아래 붉게 칠한 영역이 된다.   붉은 색 위의 유주는 애초에 치우의 땅으로 분류한 듯 하다.   이 이야기는 저 붉은색 칠한 부분이 본래 한족의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걔네들 거니까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 아니겠는가?   대체 환국의 광활한 영토는 어느 틈에 다 사라지고 중국 땅에는 반고의 후예들이 저리 득세했단 말인가?   그 점에 대해서 이 훌륭한 책은 일언반구 언급하지 않는다.  이것을 해결할 수 없었던 김산호는 <대쥬신제국사>에서 환국 부분을 아예 날려버리고 시작한다.   그럼 이제 저 붉게 칠한 땅은 언제 어떤 바보짓을 해서 잃어버리게 되는가?   이유립의 흥미로운 설정은 이어지나니 차회를 기대하시라▶


여기에서 우리의 착시현상을 유도하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중국 전체 지도를 올려 한 귀퉁이만 조그맣게 붉은 칠을 해 놓은 뒤 나머지 부분과 대비시켜 우리 민족이 거주한 영역이 아주 일부분이라는 인식을 주려는 느낌이 짙다.   설마!!!   간단하게 정리해보자.   예나 지금이나 전역의 전개과정을 주시하여 조망해보면 공통점을 금방 발견하게 된다.   이기느냐?   지느냐? 의 기본 목표가 전략의 전체구도를 방향 짓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사람은 서토 내에 거의 70여개의 제후국을 거느리고 있다는 桓國의 天王이요.   다른 한 사람은 사마천이 농경민족의 祖先으로서 굳게 자리매김한 영웅으로서 그동안의 세력판도를 뒤집으려고 마음먹고 일어난 인물이다.   한마디로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사람들이라고 가정해볼 때 두 사람은 전쟁의 국면을 어떻게 생각하고 전략을 운용하였을까?   여기에서 시간을 뛰어넘어 관통하는 기본적인 맥을 잡을 수 있다.

     1) 전략 목표가 그 시대의 전쟁국면을 움직일 수 있는 가치가 있는 곳인가? -주민의 핵심거주 지대이며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지역인가?
     2) 전쟁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중요한 요충지인가?
     3) 전쟁수행의 필수요소인 거점공략인가? -물자나 산물의 차단과 독점 가능성
     4) 적의 숨통을 끊거나 재기불능을 유도할 수 있는 중핵지대인가?  

이에 덧붙여 전역 상황의 현실적 판단을 위한 전략가치의 집중이 필요하다.

     1) 전쟁지역이 주로 어디인가? -양자강 남부지역에서도 일어났는가?
     2) 전투의 핵심지역은 어디였는가?
     3) 진군로가 어디였으며 전쟁의 승패를 가름할 전략요충이 어느 방향으로 집중되었는가?
     4) 전쟁의 완료 후 어느 지방에 웅거하였으며 관경을 설정하였는가?
     5) 두 사람이 끝까지 놓치지 않으려고 한 강역은 과연 어디였는가?
     6) 그 후에도 어떤 영역을 지속적으로 장악했으며 중요시하였는가?


이러한 기준을 두고 판단해 볼때 그 무렵 두 민족이 가장 치열한 각축을 벌인 곳이 자연스럽게 부각되며 바로 그 지역이 당시 중국대륙의 핵심강역이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상징적인 징표이다.   우린 이점을 반드시 명심해야 만이 이러한 엉뚱한 결론에 이르지 않게 된다.  

※ 회수 이남지역을 두루 살펴보아도 주나라 시대까지 각축전이 거의 나타나지 않으며 춘추 말엽-전국시대에 겨우 단초가 잡힌다.   최소한의 전력으로 적의 숨통을 끊어 전역의 성공을 극대화하려는 게 전략의 기본인데 이 사람은 이를 아예 무시하고 중국대륙의 전체 지도를 떡 펼쳐놓고 두루뭉술하게 모든 걸 희석시킨다.   왜 싸우는지 알지도 아니 알 필요도 없는 미개종족들이 살고 있는 지역까지 포함하여 산술적 평균으로 시대상황을 판단하고 있는 조잡함을 만천하에 드러내고 있다.  혹시 군대를 가지 않았을까?


周나라에 이르기까지 양자강 이남지역은 동부 해안지대를 제외하고는 거의 불모지였다.   지대가 낮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低濕地)과 호수가 산재하였으며 침식지대를 흐르는 강줄기마저 수없이 얽혀 사람이 살기가 적당한 환경이 아니었으므로 인구가 희박하여 원시 미개민족들이 있는 변방으로 취급되었다.   춘추 전국시대 가장 남쪽에 있었던 楚나라가 겨우 이들의 일부를 정복*교화시켜 국세를 확장하여 <장왕>에 이르러 웅비한 것을 보아도 잘 알게 된다(열국지)  그 동남쪽에서 전국 후반기에 오*월이 득세한 지역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서남부지대도 그리 차이가 없었는데 巴*蜀이라하여 멸시하고 있었다.   삼국시대에도 궁벽한 오지로 취급하여 <유비>를 보낸 정황을 살펴보아도 짐작이 가능하다.

       ▶ 양자강 남방에 만족(蠻族)이 살고 있는데 미개하여 이마에 문신을 했으며 화식(火食)을 하지 않는다.
       ▶ 초국(楚國) 남쪽에 나국(裸國)이 있는데 의복을 입지 않고 사람의 고기를 먹는다.

결국 그보다 훨씬 전이었던 황제시대의 관심지역은 비옥하고 농경집산물이 많이 산출되는 황하 이북지역-산동지방-황하 이남에서 회수 아래까지의 벨트였던 화북*산서*섬서*산동성 전 지역과 하남성 동남*안휘성 중북부*강소성 서북*호북성 동부지대였다.   아울러 이 강역은 이미 BC 5000년부터 꾸준하게 진입하여 온 우리 민족이 기반을 닦고 개척한 중핵지역이기도 하였다.


        <사기 하본기> 조이피복 鳥夷皮服의 정의에 조이는 숙신이다.  동이의 중심인 숙신은 천제족이다.  肅愼氏天民 肅敬也 愼畏也  <회남자淮南子 수형훈隧刑訓>
  
        상고시대 하남성 일대를 중심으로 발전하던 중국족과 가장 일찍이 접촉한 종족이 이미 殷商시대 이전에 산동반도로부터 淮*泗유역으로 분포되었던 동이족이었다.   <후한서>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들은 중국족으로부터 동이족으로 불리어졌을 뿐아니라 종족에 있어서도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민족과 실로 공동의 한 원류에서 분파되었다고 할 것이다.  <김상기  東方史論叢  1984  423 P>

        하남성 앙소문화(BC 4800-2500  最古의 농경취락유적)는 황하 중*상류와 황토지대인 하남성*섬서성의 토착 중국인 채도문화로서 요령지역의 우리 민족 문화보다 사회발전단계가 수백년 뒤져있었다.  <윤내현>


이런 상태는 전국 시(戰國 時) 오吳*월越의 발흥과 삼국시대 오(吳)나라의 흥성(興盛)으로 겨우 벗어난다.   이로보아 황제와 치우의 전역이 벌어진 중심지역(그 이전에 신농과 황제가 격전을 벌인 지역도 같다)과 장악한 강역들이 바로 그 당시 가장 노른자위(要地요지)였음을 금방 알게 되는 것이다.    그 지역의 동이부족을 황제가 빼앗으려다가 마침내 치우에게 패전하여 다시 동이족이었던 신농(神農)이 다스리던 실지(失地)를 회복한다.   [앵무새]는 이런 점을 깊이 분석하거나 살피지 못하고 또 문제의 핵심을 놓치는 우(愚)를 범하고 있다.


참고로 [하삭河朔]은 [삭방朔方]을 의미하며 황하가 직선으로 올라가는 흐름의 상류지역을 말한다.   그래서 양수(羊水)를 타고 내려온 <치우>가 탁록전을 준비하면서 <황제>를 기다리고 있는 과정과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무슨 <하삭이란 황하 이북의 거친 땅을 가리키는 말이다.   즉 이유립은 배달국의 영토를 중원에는 전혀 배정하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라는 글로 은근슬쩍 하북성과 그 북쪽 지역까지 걸고 넘어가 이걸 이유립과 연결시켜 배달국의 영토를......운운하는 전혀 웃기지도 않는 무식함을 드러내면서 짜증만 자꾸 돋우는지 모르겠다.


이 사람이 그토록 궁금하게 생각하는 <대체 환국의 광활한 영토는 어느 틈에 다 사라지고 중국 땅에는 반고의 후예들이 저리 득세했단 말인가?>라는 어리석은 오판과 어이없는 착시현상에 대해서 이유립이나 [환단고기]라는 훌륭한 책은 가벼운 태도로 흘려 넘기며 일언반구 쓸데없는 말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럼 이제 저 [앵무새]가 떠들썩하게 붉은 칠을 한 땅들이 언제 어떤 바보짓을 추가함으로서 한낱 웃음거리가 되어버리게 되는가?   [앵무새]와 그의 그림자들의 합작으로 어떻게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개되는지 한번 궁금한 마음으로 차회(次回)를 기대해보겠다.


[마지막 Tip]  시베리아 문명에 대한 학습자료  


신체적 형질의 특징으로 볼 때 세계의 3대인종인 황색 몽골 인종(Mongloid), 백색 코카서스 인종(Coca-soid), 흑색 니그로 인종(Negroid)중에서 한민족은 몽골 인종에 속한다.   한민족은 피부 색깔뿐만 아니라 곧은 머리카락과 짧은 얼굴에 광대뼈가 나오고 눈꺼풀이 겹쳐져 있으며 둔부에 몽골 반점이 있는 등 몽골 인종의 공통된 신체적 형질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몽골 인종은 그들의 집단이동과 지역분포에 따라 서로 다른 환경에 적응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신체적 형질과 생활양식에 차이가 생겨서 고시베리아족(Paleo-Siberians)과 신시베리아족(Neo-Siberians)으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한민족은 신시베리아족에 속하며 그후 기온이 상승하여 빙하가 녹으면서 후기구석기시대 및 신석기시대 때 시베리아로부터 남쪽으로 이동했다.   터키족은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북쪽까지 몽골족은 지금의 외몽골을 거쳐 중국의 장성 및 만주 북쪽까지 그리고 한민족은 흑룡강 유역을 거쳐 중국 동북부인 만주 서남부의 랴오닝[遼寧] 지방을 지나 한반도 남부까지 이동하여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초기 농경시대에 정착생활을 시작했다.   이와 같은 한민족의 형성 및 이동 과정에서 발전된 문화는 지금까지 남아 있어 후기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청동기시대 ·철기시대의 고고학적 유물과 유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역사상 고대의 중국문헌에 나타나는 숙신(肅愼) ·조선(朝鮮)·한(韓)·예(濊)·맥(貊)·동이(東夷) 등의 여러 민족들은 우리 한민족을 가리키는 말이다.   특히 랴오닝 지방에 정착하면서 한민족은 북부의 초원지대에서 목축을 하는 한편 남부의 평야지대에서 농경을 주로 하는 가운데 농경·목축 문화를 발전시켰고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온 한민족은 자연환경의 조건에 따라 목축을 버리고 농경에만 집중하면서 독특한 철기문화를 발전시켰다.   이처럼 오늘의 중국 랴오닝 지방과 한반도에서 농경과 청동기 및 철기문화를 발전시킨 한민족이 하나의 단일 민족으로서 명실상부한 고대국가를 성립시킨 것이 바로 고조선(古朝鮮)이다.   그 이후 국가가 나누어져서 몇 개의 새로운 독립국가로 분열되었다가 다시 통합되는 역사적 과정은 매우 복잡했지만 꾸준하게 하나의 단일민족으로서 한민족의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최근 러시아와 중국이 발굴해 내는 고고학 증거들은 분명히 시베리아와 동북아시아의 선사문명이 타 지역과 구별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이 뚜렷하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점을 위해 최몽룡,이헌종, 강인욱등이 러시아 고고학자들과 공동연구로 펴낸 "시베리아 선사고고학"(도서출판 주류성)의 일독을 권한다.

빗살무늬 토기와 세형돌날 석기(Microlic Flint)의 발상지로 대표되는 이 지역의 선사문명은 인류 최초의 세계화를 촉진한 문명이다.   더욱 아이러니한 것은 세계 역사학계와 고고학계가 고민하는 시베리아-동북아 문화공동체 문제에 대해 [환단고기]는 그것이 사실이든 상상이든 대답을 이미 해왔다는 점이다.   그래서 일단 우리는 환단고기를 우리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텍스트>로 부르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환단고기가 누군가에 의해 쓰여 질 무렵에 지금과 같은 시베리아 -동북아 선사문명의 수수께끼가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환단고기와 고고학을 놓고 볼 때 환단고기의 <선 대답> 고고학의 <후 질문>이라는 기이한 상황이 빚어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