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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離相寂滅分 대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번뇌가 사라짐
그 때 수보리가 이 경전을 설하심을 듣고 뜻을 깊이 이해하여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희유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설하신 이와 같이 심오한 경전은 제가 예로부터 얻은바 혜안으로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다시 이런 사람이 이 경을 듣고 신심이 천정해지면 (세계의 참모습인) 실상이 드러나므로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한 공덕 성취함을 알 수 있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실상이란 (분별할)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실상이라고 설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지금이와 같은 경전을 듣고 신해수지하기는 어렵지 않습니다. 만약 미래 후오백세에 어떤 중생이 이 경을 듣고 신해수지한다면 이 사람은 제일 희유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에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아상이 (실재하는) 상이 아니며 인상 중생상 수자상도 (실재하는) 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상에서 집착을 떠난 이를 부처님이라 부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다. 그러한다. 다시 어떤 이가 이경을 듣고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면 매우 희유한 사람임을 알아야한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여래가 설한 제일바라밀은 (함이 있는) 제일바라밀 아님을 제일바라밀이라 말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인욕바라밀도 여래는 (함이 있는) 인욕바라밀 아님을 설하여 인욕바라밀이라 말한 것이다. 왜냐하면 수보리야!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신체를 낱낱이 베일 적에 나는 그 때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지난날 사지가 마디마디 잘릴 적에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있었다면 성내고 원망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수보리야! 또 과거 오백생동안 인욕 선인이었던 일을 생각하니 그때에도 아상 인상 중생상 수자상이 없었다."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은 모든 대상에서 집착을 떠나 보리심을 내어야한다. 형색에 집착 없이 마음을 내고 성 향 미 촉 법에 집착없이 마음을 내며 어떤 것에도 집착없는 마음을 내어냐한다. 만약 마음에 집착이 있으면 즉시 잘못된 머묾이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대상에 집착없는 마음으로 보시하라고 부처는 설하였다. 수보리야! 보살은 일체중생의 이익을 위하여 이와 같이 보시해야한다. 여래는 모든 대상은 (실제) 대상이 아니라고 말하며 또 모든 중생도 (실제) 중생이 아니라고 설한다. 수보리야! 여래는 진실을 말하는 이고, 사실을 말하는 이며, 거짓이 아닌 말을 하는 이다. 수보리야! 여래가 얻은 이 법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수보리야! 보살이 대상에 집착하는 마음을 보시하면 마치 사람이 어둠 속에서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것과 같고, 대상에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 보시하면 마치 눈이 있는 사람이 햇빛이 밝게 비치면 온갖 형색을 보는 것과 같다. 수보리야! 미래세에 어떤 선남자선여인이 이 경을 수지 독송한다면 여래는 부처의 지혜로서 이 사람을 다 알고 다 본다. 모두가 한량없고 가없는 공덕을 성취할 것이다."
(모든 법은 인연으로 생겨나기 때문에 있어도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 성품이 공합니다. 그렇지만 인연따라 나타났기 때문에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세계의 실상을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중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있다, 없다"를 떠나 모든 집착이 사라진 이가 실상의 이치를 깨달은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2016-04-10 포항 보경사
●연혁 및 연기설화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평왕조‘에 원광 담육과 함께 기록
7년(서기 585) 가을 7월, 고승 지명이 불법을 배우고자 진나라에 들어갔다.
24년(서기 602) 9월, 고승 지명이 입조사 상군을 따라 돌아왔다. 임금이 지명의 계행을 존경하여 대덕으로 삼았다.
▶보경사 창건 설화
중국에서 돌아온 지명스님이 왕에게 아뢰었다. “동해안 명산에서 명당을 찾아 제가 중국에서 유학할 때 전해받은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절을 세우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고 이웃 나라의 침략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할 것입니다.” 왕은 이 말에 따라 지명법사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명당을 찾아 동해안을 거슬러 오르다가 해아현(청하면)에 이르러 산정에 오색구름이 덮여 있는 산을 보게 되었다. 상서로운 조짐이라 여기고 산 밑에 이르니 과연 찾기를 고대하던 명당이 펼쳐졌으나 큰 못이 있었다. 마침내 못을 메워 지명스님의 팔면보경을 묻고 그 위에 금당을 세워 절을 이룩한 뒤 보배 거울을 묻었다. 하여 절 이름을 보경사라 하였다. 때는 진평왕 25년(603)이었다.
▶보경사 금당탑기(1588)
후한 영평 10년(67) 인도의 승려 마등과 법란 두 사람이 불경과 불상을 백마에 싣고 중국으로 와 처음 불교를 전했다. 이때 그들은 십이면원경과 팔면원경을 함께 지니고 왔는데 십이면원경은 낙양성 서쪽 옹문 밖에 묻고 거기에 절을 세워 백마가 불상과 불경과 거울을 싣고 온 것을 기념하여 절 이름을 ‘백마사’라 했으며, 팔면원경은 두 스님이 제자에게 맡기며 “동쪽 조선땅의 해 돋는 곳, 종남산 아래 백 척 깊은 못이 있으니 이곳은 동국의 명당이다. 못을 메우고 거울을 묻은 뒤 법당을 세우면 천추만세에 무너지지 않을 곳이니라”라는 유언과 함께 뒷날을 기약했다. 이 거울이 지명스님의 손에 전해져 보경사의 터를 닦을 때 못 속에 묻은 바로 그 팔면보경이며, 지명스님은 인도에서 중국까지의 먼 길을 불상과 불경을 나른 공덕으로 사람으로 환생한 백마의 후신이다.
▶고려 고종 1년(1214)에는 원진국사가 승방 4동과 정문 등을 중수하였으며 범종·법고 등도 완비하였다.
▶원진국사비
원진국사는 상주 사람으로 성은 신 자는 영회 법명은 승형이다. 유학을 가업으로 하는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세 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 밑에서 자라났다. 13세 때 문경의 봉암사로 출가하여 불문에 들었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에서 구족계를 받으면서 본격적인 수행의 길로 들어섰다. 1197년 광명사 선불장에서 베풀어진 선과에서 상상품으로 합격하였다. 그뒤 조계산 수선사로 보조스님을 찾아 그 문하에서 수학하여 법을 이었으며, 이자현이 벼슬을 버리고 은거 수행했던 청평산 문수원(청평사)을 찾아 그가 '문수원기'에서 주장한 “'능엄경'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견해에 공감하여 이후 '능엄경'을 수행의 지침으로 삼았다. 우리나라 선종에서 '능엄경'을 숭상하게 된 연유는 여기서 비롯된다. 1215년 대선사의 지위에 오른 뒤 왕명에 의하여 보경사의 주지로 부임하여 만년을 보냈다. 1221년 7월 팔공산 염불사(염불암)로 옮겨 머물다 8월에 이곳에서 입적했다. 문도들이 다비를 마친 뒤 유골을 수습하여 보경사에 탑을 세웠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고종은 국사로 추증하고 원진이라 시호를 내렸다.
▶1792년 보경사에 주석하던 회관스님이 쓴 '보경사사적기'
내가 예로부터 전해오는 말을 들으니 스님이 어느 날 저녁 예불을 드리고 났을 때 낙타만한 호랑이가 눈앞에 나타났다 한다. 스님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내가 너에게 아직 다 갚지 못한 빚이 있는 게로구나. 내 어찌 한번 죽어 주린 네 욕구 채워주기를 두려워하랴. 다만 너는 내 고기로 배를 불린 뒤 남은 뼛조각을 한갓진 곳에 남겨두라”고 말하니 호랑이는 그 말대로 절 뒤의 산자락에 유골을 버리고 갔으며, 나중에 탑을 세울 때 이로 말미암아 그곳에 탑을 세웠다고 한다. 비문의 기록에 의하건대 스님은 팔공산 염불암에서 입적했다 한다. 그러나 그곳에는 탑이나 비가 없고 오직 이곳에만 있으니 전하는 말이 옳은 것인가, 아니면 이공로가 지은 비문에 (이 내용이) 빠진 것인가? 탑이 뒷산 자락에 있고 비가 절의 뜨락에 서 있으니 이로써 살피건대 오히려 공로의 비문에 아름다운 일화 하나를 빠뜨린 것이다.
봄빛이 흐드러진 보경사 입구
일주문의 사자는 천왕문, 적광전의 신방목을 연상케한다.
해탈문, 언제는 불이문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솔숲에 드러나는 보경사
천왕문-오층석탑-적광전-대웅전으로 이어지는 전각
천왕문은 보기 드물게 팔작지붕이고 몸체에 비해 처마가 짧다. 신방목 사자상은 적광전 것과 같은데 많이 닳고 닳아 토끼인지 강아지인지 순하디 순하게 보인다. 사천왕상에는 비파를 들고 있는 천왕이 없다.
오층석탑
금당탑기에 “탑을 세운 이는 각인스님으로 문원스님과 의논하여 ‘절이 있으니 탑이 없을 수 없다’ 하여 장인을 부르고 재물을 모아 청석으로 오층탑을 만들어 대전 앞에 세웠다.” 현존하는 탑이 청석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 점으로 미루어 짐작한다면 혹 성덕왕대에 청석으로 쌓은 탑이 그뒤 언젠가 무너지자 통일신라 후기나 고려 초기 어느 때 지금의 모습으로 중창한 것은 아닌지 추측. 1층 몸돌 앞뒤에 두 짝의 문을 바탕무늬로 하여 그 한가운데 연봉자물쇠 하나와 동그란 문고리 두 개를 도드라지게 아로새겼다. 자물쇠와 문고리, 특히 뒷면의 그것은 너무도 생생하고 또록또록하여 사실적이다. 호암미술관과 직지사성보박물관의 통일신라시대의 자물쇠(보물 제771호)와 석탑에 새겨진 자물쇠를 비교해보면 양자의 놀라운 유사성과 조각의 사실성에 놀라게 된다. 기단의 많은 석재와 4층 몸돌, 5층의 몸돌과 지붕돌 등이 1976년 보수할 때 교체되었다. 상륜부에는 노반과 복발만 남아 있다.
적광전(보물 1868) 2015년 보물지정.
조선 숙종 3년(1677)에 중창한 것으로 추정되는 적광전은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신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지붕 건물이다. 맞배지붕이면서 측면 공포가 있다. 기둥을 받치는 부재인 초석과 기둥 하부를 가로로 연결하는 부재를 받치는 부위인 고막이 등은 전형적인 통일신라기 건축 기법을 보여주고 있어, 신라 시대 기초 위에 중창했을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통일신라기 건축 기법이다. 그래서 지명스님이 절을 처음 세울 때 세웠다는 금당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까 추측한다. 적광전 앞의 오층석탑을 흔히 ‘금당탑’이라 부르는 사실과도 맞아떨어진다. 고막이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은 곳은 모두 옥돌로 다듬어져 비취빛으로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있다. 비취빛이 은은한 옥돌로 사방을 떠받친 금당은 창건설화의 연못을 떠올리게한다.
보경사에는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사자상이 있다. 적광전에 전면 중심칸에 두 마리의 늠름한(?) 사자상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문기둥 밑에 놓이는 부재인 신방목에 조각돼 있는데 국내에서는 그 유례가 드물다. 신방목은 보통 둥글게 만들고 태극문양을 새기기 때문이다.
적광전에서 대웅전에 오르는 길목에 있는 반송
400년된 탱자마무. 예전엔 천왕문 동쪽으로 가까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건물이 지어져 건물 뒤편에 있다. 마침 탱자꽃이 피어 장독대와 어우러진다.
보경사대웅전오층석탑
대웅전 부처님과 적광전의 불보살상은 인상과 자태가 굉장히 원만하다. 조선시대 불상 특유의 상호를 취하고 계시지만 미소를 띄고 있는 입가와 눈매에서는 영락없이 경상도 사람 특유의 표정이다.
대웅전 뒤에 있는 비사리구시(보온밥통)를 보면 보경사에 많은 스님들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 뒤 계단 위에는 5채의 전각이 조로록 세워져 있다. 다른 가람에서는 만나기 힘든 구조이다. 왼쪽부터 팔상전과 산령각, 원진각, 영산전, 명부전이 자리해 있고 명부전 앞에 보경사를 중수한 원진국사비(보물 제 252호)가 비각 안에 모셔져 있다.
원진각에는 고려시대에 보경사를 중창했던 원진국사상과 진영이 있고 보경사에서 법석을 열고 후학을 이끌었던 15분 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다.
원진국사비(보물252)
용두화한 거북이 목을 앞으로 뽑아 세우고 눈을 치켜 떠 위세를 부리지만 당당해 보이지는 않는다. 거북 등에는 ‘王’자를 새겨 국사에 대한 예우를 나타내고 있다. 청석을 깎아 만든 비는 이수가 없는 형식으로 비신 윗부분 양 끝을 귀접이형이다. 비머리에는 ‘원진국사비명'이라고 가로로 쓴 해서체의 제액을 음각했고, 비신의 둘레로는 섬세한 당초무늬가 띠처럼 돌려져 있다. 비신의 둘레를 당초무늬로 장식하는 기법이나 그 윗부분을 귀접이하는 형식 등은 고려 중기 이후부터 나타나는 양식의 하나이다. 비문은 당대의 문신 이공로가 짓고 글씨는 충렬왕 때 원나라 군대와 함께 일본 정벌에 나섰던 무장 김방경의 아버지로 글씨에 능했던 김효인이 썼다. 원진국사 입적 3년 뒤인 1224년에 세워졌다.
서운암. 깔끔하게 새로 지어 왠지 서먹하다. 문이 잠긴 산신각이나 독성각도 그렇고... 입구의 다리도 오래되면 정이 들라나...
서운암 부도밭.
돌로만 둘렀던 돌담이 없어지고 새 흙돌담이 둘러졌다. 왠지 생경스럽다. 줄이나 간격에 얽매이지 않고 되는 대로 흩어져 있는 11점의 부도, 3점의 비석은 마냥 천연덕스럽다. 원진국사 부도의 영향인지 몸돌이 길쭉길쭉하다. 조선 후기 부도들이지만 이들이 지어내는 분위기는 편안하고 여유롭다. 잘 살펴보면 불탑의 부재들이 부도와 비석의 받침돌이나 몸돌로 재활용 된 것을 찾을 수 있다.
보경사를 나오는 길목의 느티가 수고했다고 안녕히 가시라고 배웅해주는 것 같다.
●못 봐서 서운한 보경사괘불탱
이 것 말고도 원진국사부도탑과 서운암동종을 보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다시 찾아 봐야겠습니다.
●심심한 사람은 읽어보라고 창건설화와 원진국사비명 전문을 옮겨봅니다.
▶창건설화
지명법사는 진평왕 7년 7월에 중국에서 불교를 수학하기 위해 진나라로 가는 사신들과 동행하여 불법 수학 의 길에 올랐다. 10년이라는 구도의 세월이 흘러갔다. 이 동안 중국의 정세는 바뀌었고 수나라의 문제는 진나라를 쳐서 진을 멸망시킨 뒤였다. 지명법사는 자신이 10년 동안 갈고 닦으며 전심 전력을 다하여 수학하여 온 것을 유명한 도인이나 법사, 선지식을 친견하여 문답하며 견문도 넓히고 자신의 수행을 인가받기 위하여 양자강을 건너 북으로 북으로 명승 고찰과 선지식 순방길에 올랐다. 지명법사는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전해졌을 때 중국 최초의 창건 사찰인 하남성 낙양 백마사를 순방의 처음 목표지로 하여 도착하게 된 것이다. 백마사는 지명법사가 그곳에 도착할 당시에 5백년이라는 세월이 흐른 중국 최초의 창건 고찰로서 가람이 웅장하게 장업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색이 창연하여 순례자들은 어느 누구나 경이를 표하는 사찰이다. 이 고찰에 도착한 지명법사는 대웅전에 봉안된 부처님은 인도에서 가습마등과 법란 두 스님이 중국으로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모셔온 석가모니 불상이다. 이 석가모니 불상을 친견하여 예배드리기 위해 불상을 우러러보자 자신도 모르게 눈에서 눈물이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신도 모르는 어떤 감회에서 오는 뜨거운 눈물이었다. 지명법사는 왜 눈물이 비오 듯 하며 서러움이 북받쳐 오는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참배가 끝난 후 80이 넘은 주지 노승을 친견하고 해동 계림국에서 불법을 구하기 위하여 중국에 유학왔다가 사찰 순례와 선지식을 친견하러 순방 길에 올라 처음으로 백마사를 순례하게 되었음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주지 노승은 아무런 대답도 없이 눈을 감고만 있었다. 한참 후에 조용히 눈을 뜬 후 시종을 물리치고 나서, "아! 이제 기다리고 기다리던 백마총의 임자가 왔구나!" 하면서 그 자리에서 일어섰다. "스님은 나를 따라 오느라!" 하시며 어디를 인도하는지 백마사를 나서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불교가 처음으로 중국에 전해 졌을 때 가습마등과 법란 두 스님이 석가모니 불상 한 분과 불경을, 12면경과 8면경을 백마에 싣고서 불법을 전하기 위하여 중국으로 왔는데 백마는 중국에 도착하여 죽었기 때문에 그 공덕을 찬양하기 위해 백마사라 사명을 정하고 그 백마를 묻고서 그 무덤을 백마총이라고 불렀는데 지금 그 곳으로 가는 중이다." 백마사에서 한 5리쯤 가서 곱게 단장되어 있는 무덤하나를 발견하였다. "저것이 이야기 한 백마총이다." 지명법사는 백마총에 삼배를 올리고 백마총 기적비의 비문을 읽었다. "서천 중인도에서 태어난 이 백마는 속세의 인연으로 말의 몸을 받았으나 체구가 건장하며 근력이 나라연같고 지혜가 뛰어났다. 이 백마가 석가모니 불상과 불경을 등에 싣고 험악한 산과 계곡의 10만리 길을 거쳐 이 진단국에 도착하여 목숨을 마쳤다. 그러나 부처님과 인연을 맺지 못한 한인에게 인연을 맺게 하고 교화하게 한 이 공덕으로 이제는 축생의 몸을 받지 않고 세세생생에 태어나는 곳마다 정토에 태어나고 항상 이목이 청수하고 총명하며 신체가 단정하여 또한 동진출가하여 3장의 교의를 통달하고 불법의 대도를 깨우쳐 대법사, 선지식이 되어 불법을 널리 선포하고 수 없는 중생을 교화, 제도하는 보살도를 닦아 마침내 최정각을 이룰지니 이 인연 공덕과 원력으로 세세생생의 대 복전이 될 지어다. 아! 거룩하고 성스러운 공덕이여! 이 얼마나 거룩하고 장엄한 원력인가! 그 빛은 진단국과 해동에 빛이 될지니라! 비문 읽기를 마친 지명법사는 주지 노승이 말하지 않아도 법사 자신이 전생에 이 백마로 태어나 전법한 공덕으로 해동의 승려로 태어나 이제 그 전법의 인연이 닿아 이곳에서 다시 만난 인연을 깨닫고 무한한 감회에 젖어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때에 주지 노승은 주장자를 세 번 치면서 외쳤다. "오늘 백마총의 임자인 지명스님이 여기 왔으니 호법신령과 호법신장은 그 법보를 주인에게 돌려주도록 하라." 노승의 외침이 끝난 후 백마총 바로 옆의 땅이 갈라지면서 석함이 솟아올랐다. “지명스님! 저 석함을 열어보아라!" 돌 석함이 종이장처럼 가볍게 열렸다. 석함 뚜껑 뒷면에 뚜렷한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내 일찍이 백마의 몸으로 태어나 마등, 법란의 두 도인을 모시고 불상과 불경 그리고 12면경과 8면경을 운반한 공덕으로 다시 몸을 얻어 백마사에 마등, 법란 두 도인의 제자가 되는 인연을 얻었다. 그때에 마등, 법란 두 도인이 나 일조에게 이르기를, '동국 조선 해뜨는 곳 중남산 아래 백척 깊은 못이 있으니 그곳이 동국 명당이다. 그곳을 메워 이 8면경을 묻고 법당을 창건하면 만세천추에 불법은 멸하지 않을 것이니 너는 그곳에 태어나 이 인연을 짓도록 하여라."하는 법연을 받았다. 이제 나의 인연이 다 함을 알고 해동 계림국에 호법성왕이 출험할 때에 인간의 몸을 받아 해동의 사문이 되어 이곳 백마총에 와서 이 8면경을 취해 해동으로 돌아가 대 불사를 일으켜 세세생생 불법이 흥하여 정토를 이루고자 함이다." 이 기록의 주인인 스님은 지명스님이 중국에 도착한 해의 4백 5십 년 전의 백마사 주지 노승이다. 그때 백마사 주지 노승인 일조 스님이 전생의 지명스님이었고, 또 그것을 취하러 중국에 와서 백마사에 도착한 지명스님은 전생의 일을 깨닫게 되어 두 눈에는 눈물만이 앞을 가릴 뿐이었다. 그 석함 속에는 지명스님의 마음을 알고나 있는지 8면경의 빛을 더욱 발하고 있었다. 주지 노승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자! 이 물건의 임자를 이제까지 백마사에서 기다리고 있었단다. 오늘에야 임자를 만났으니 할 일을 다 마친 것 같구나! 자! 이 8면경을 잘 호지하라!" 지명스님이 8면경을 받아 지니자 석함이 저절로 땅속으로 사라졌다. 주지 노승은 이 8면경은 보배의 거울이니 8면보경이라고 말하며, 8면보경이 지닌 뜻을 설명했다. 그리고 주지 노승은 "이 큰 뜻을 지닌 8면보경을 소중히 보호하여 본국에 돌아가 국토를 정법으로 정토를 이루고 만민을 제도, 교화하는 대불사를 일으키도록 하여라!" 백마사로 돌아온 주지 노승은 절의 승려들과 모든 대중을 모아놓고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이젠! ... 나는 이 생에서 할 일을 다하고 인연따라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이 몸을 버려야 할 때가 왔구나! 사부대중들은 의심나거나, 의혹된 것을 질문하라!" 모든 대중은 갑자기 주지 노승의 말에 숙연해지면서 어쩔 줄을 몰라 당황하였다. "현재의 과를 잘 관찰해 보면 과거의 전생을 알 수가 있고 현재의 인을 잘 관찰하면 미래를 알 수 있느니라!" 는 말을 마치고 입적하셨다. 모든 사부대중은 부모님을 잃은 것과 같이 통곡하며 슬퍼하였다. 지명 스님은 주지 노승의 49제를 지내면서 찬미하는 염불과 예불을 하였다. 49제를 마친 지명법사는 백마사에서 제공하여 주는 말을 타지 않고 걸어서 도착하여 장안의 모든 선지식을 순방하면서 문답을 하였다. 중국의 고승 대덕스님들은 지명법사의 지혜와 법력에다 탄복하고 칭찬하지 않는 스님이 없었다. 지명법사는 이제 순례가 끝났으니 중국에는 더 머무를 필요가 없음을 느끼고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대불사를 일으켜야 되겠다는 일념 밖에 없었다. 문황제에게 귀국의 뜻을 표하여 허락을 얻은 후 고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고국에 돌아오니 왕과 대신들이 8면보경을 친견하기를 원하자 지명법사는 그 8면보경을 부처님의 불단 위에 안치한 후 향을 사르고 삼배를 올린 후 8면보경을 싼 보자기를 풀자 투명한 8면보경이 빛을 발하면서 나타났다. 왕을 보경을 보자 3배를 올리고 자세히 친견하고 난 후에 지명법사는 "8면보경은 소승의 전법의 전생 인연이지만 대왕님의 인연이기도 합니다. 호국성황이 탄강하시어야 이 국토에 전해질수가 있기에 대왕님의 호법 인연인 것으로 인한 것이옵니다." "그럼! 내일부터라도 동해안에 있는 해맞이 고을로 출발하여 모든 백성들이 동참하는 대불사를 성취시키도록 합시다." "대왕님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렇게 하여 왕은 시신들 수 십 명을 대동하고 지명법사와 함께 영일을 향하여 행차하여 영일 해안에 이르자 하늘은 끝없이 높고 밝은 만경창해는 더욱 푸르고 넓었다. 왕이 해안에서 어디를 금당으로 정하였으면 좋겠느냐의 질문에 지명법사는 하늘을 쳐다보며 보살의 형태를 한 구름을 가리키면서, "저 구름을 따라서 가면 틀림없이 명당자리를 찾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일행은 보살모양을 한 5색 구름이 인도하는 방향으로 북으로 수 10리를 동해안을 거슬러 올라갔다. 산을 끼고 맑게 흐르는 계곡을 마치 신선이 사는 곳으로 여겨졌다. 이산의 이름은 내연산이었고 계곡 주위에 병풍처럼 둘러쳐서 있는 산의 전경은 너무나 아름답고 그윽하여 그 장엄스러움은 말로써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 계곡 사이에 평원처럼 고요하면서 넓은 연못이 있었다. 일행은 자신도 모르게 그곳에 멈추었다. 그 누구도 이런 절경을 이제까지 본 일이 없었기 때문이며 자신들도 모르게 우리가 찾는 금당자리가 여기로구나 하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지명법사는 왕에서, "바로 이곳이 8면보경의 법보를 모시고 금당을 모실 대 성역이옵니다." 라고 말씀드리자 왕의 일행은 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연못을 메우고 그 중앙에 8면보경을 봉안하였다. 이와 같이 8면보경을 봉안하여 금당을 창건하여 세워진 절이라 하여 보경사라고 하였다.
▶원진국사 비명
고려국 보경사주지 대선사 증시원진국사 비명 병서
통의대부 추밀원 우부승선 시국자감 대사성 사자금어대 신 이공로가 왕명을 받들어 짓고, 장사랑 대관서승 겸 보문각 교감 김효인은 교칙에 의하여 쓰다.
대저 일심이란 만법의 총체이므로 육도 만행이 이를 말미암아 생겨나지 않음이 없다. 그러나 성품에는 영리하고 아둔한 차이가 있으며, 혼미하고 깨달음이 같지 않으므로, 마치 때 묻은 헌옷 속에 보배를 달고 있으나, 알지 못함과 같으며, 혹자는 탁한 물 밑에 빠뜨린 보주를 찾으려 하나, 찾지 못하니, 이 이치를 미매한 자는 마치 땅속에 묻혀 있는 보물을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결락) 이와 같이 부처님께서 미혹한 중생을 불쌍히 여기시고, 세상에 출현하시어 삼승과 12분교를 설하였으며, 혹은 비니로 신·구·의를 섭호하는 율장을 세웠고, 혹은 선나로 진리의 세계를 증입하는 문을 제시하되, 대개 중생의 기근이 그 깊고 옅음이 같지 않음을 보여 주셨다.
이에 대하여 후대의 학자들이 각기 저마다 종취를 세우므로서 서로의 주장이 대립하고 모순되어 (결락) 깊이 공과 유에 국집하여 자신이 병들었음은 알지 못하고, 다른 종파에게 사병에 빠졌다고 비방하면서, 도도하게 자기의 주장은 모두가 옳다고 역설하는 실정이다. 그러나 공과 유를 양망하고, 선과 교를 쌍홍하여,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이는 오직 우리 원진국사 밖에 없지 않는가! 스님의 휘는 승형이요, 자는 영회이며, 속성은 신씨, 상락의 산양출신이다. 선대는 대대로 유가였다.아버지의 이름은 통한이니, 이 (결락) 내급사)로 있다가 금성군수로 부임하여 재임 중에 순직하였고,어머니도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그리하여 스님은 3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 광한에 의해서 국양되었다. 총명하고 영특하여 해포로부터 전혀 희완하는 일이 없었으며, 7살 때 운문사 연실선사를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모든 언행과 거지가 모두 다른 아이들과 달랐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희세의 신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13살 적에 경상북도 문경군 가은면 원북리 희양산 봉암사 동순스님을 은사로 하여 스님이 되었다. 다음 해 전라북도 김제군 금산사 계단에서 비구계를 받았다.
이로부터 청정하고 엄격하게 계주를 지켜 법기를 크게 키웠다. 그리하여 동순스님이 매우 애중히 여겼다. 그러나 스님은 명교를 좋아하지 아니하고, 교종을 벗어나 뜻을 고상한 데 두어 운종과 학태처럼 초연 자약하여, (결락) 깊은 숲속에서 정진하려 하였으나, 늙은 동순스님을 두고 훌쩍 떠날 수가 없었다. 정사년봄 해마다 연례적으로 개최하는 보제사 담선법회에 참석하고 있는 중, 순공이 입적하였다는 부고를 받고,장례식에 떠나기 전 시어사인 숙부를 찾아가서 여쭙되, 인생은 마치 아침 이슬과 같고, 부귀는 또한 뜬 구름과 같아서, 저는 세상 살이가 마치 밀을 씹는 것과 같나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 스님께서 입적하였으므로 곧 떠나서 나의 초지를 성취하리라 하고는, 석장을 짚고 곧바로 떠났다. 이때 명종 임금이 조회 때 신하들로부터 스님의 도행이 고매하다는 보고를 듣고, 유사에게 조칙을 내려 스님의 도행을 초록하였으니, 이는 상례를 벗어난 조치인 것이다.
이 해 가을 종문의 기숙 대덕 스님들이 모두 강하게 권하므로, 광명사 선불장에 나아가서 어려운 질문에 대답하니, 마치 공허에 전하는 소리와 같으며, 유창하여 날아가는 듯한 변재는 층암절벽에서 떨어지는 물과 같아서 듣는 사람들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그리하여 선불장에 참석한 중사와 증관과 석덕들이 모두 상에서 내려 공손히 서서 경청하였으므로, 상상품 승과에 발탁되었다. 그러나 스님은 이미 명리에 대하여 전혀 마음에 개체함이 없고, 다만 두루 명산승지를 순유코자 할 뿐이었다. 드디어 조계산으로 가서 보조국사를 참방하고 법요를 물은 다음, 강원도 강릉군 오대산으로 가서 문수보살님 앞에서 예배기도를 하고 명감을 받았다. 이어 춘천 청평산으로 진락공의 유적을 답사하면서 김부철이 지은문수사기를 살펴보니, 공이 문인들에게 이르기를, 수능엄경은 심종을 증인한 것이므로, 불교의 진리를 발명함에 있어 중요한 내객이다라는 말을 보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드디어 문성암에 주석하면서 능엄경 10권을 모두 열람하고, 제상이 환망임을 통달하고, 반면 자심이 강대무변함을 알고서야 비로소 능엄의 묘지를 믿게 되었으니, 숙세부터 선근을 심음이 있어 일찍이 큰 원을 발하여 자주 자주 불법의 교리를 선양하되, 반드시 이 능엄경으로서 으뜸을 삼았으니, 능엄교법이 세상에 널리 성행하게 된 것이 스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태화 8년 무진에 왕명으로 개골산 유점사에 주지토록 하였다. 경오년 가을 당시 귀척들이 경기의 연법사에서 법회를 개설하고, 왕에게 주청하여 스님을 법사로 모시기로 하고, 편지를 보내어 고청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경사로 나아갔다. 지금의 상국인 청하공이 문하의 잠리수천 명을 데리고 나와 도성의 동쪽에 있는 곽주사로 영접하되, 기꺼이 경개로 환대하고 구의의 예를 다하였으니, 마치 돌로써 물에 던짐에 문연히 상합함과 같았다. 청하공은 이때부터 더욱 선풍을 중히 여겨 조계종의 법유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진작하는데 진력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숙연의 소감이 아니겠는가?
강종 임금이 즉위한지 3년째 되던 해에(1213) 삼중대사의 법계를 비수케 함에 스님께서는 굳게 사양하여 피하고자 하였으나, 당시 진강공이 정승인 영상으로 있었고, 희종 임금도 스님에 대한 총애가 지극하였으므로 부득이 비직을 받았다. 그리고 이 해 겨울에 임금께서 비전으로 스님을 초빙하여 선록을 점파함으로써 더욱 존경하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중사내시 대관서령 소경여를 보내어 스님이 주지하는 정사를 중수하게 하였다. 이보다 앞서 스님께서 어느 때 풍악산 보덕굴에서 지낼 때, 특이한 꿈을 꾼 적이 있는데,지금에 미치고서야 그 꿈을 징험하게 되었다. 계유년에 이르러 지금의 고종 임금께서 천조하고 선왕인 강종의 뜻을 계승하여 2년 갑술에 곽주사를 중수하여 낙성법회를 열어 선지를 크게 천양하고 선사의 법계를 비수하였다.그리고 이 해 봄에 또 고종 임금이 스님을 비전으로 초청하여 상의직장 동정 서치의 아들로써 자기 대신 삭발하여 스님이 되게 하였다. 다음 해 가을에 또 대선사의 법계를 비가하고, 조칙을 내려 동경 이내인 청하현 보경사에 주지토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평산 문수사와 설악산 한계사에 주지토록 명하였으나, 모두 고사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지금 보경사의 주지를 맡은 것은 강권에 의한 것이지, 결코 스님의 뜻은 아니었다. 운문산에 복안사란 절이 있었는데, 항적의 주장들이 연수에 모여 있던 구염의 좋지 못한 형태가 아직까지 말끔히 정돈되지 않아서, 당두와 노숙스님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생활의 길로 개도코자 하여 스님을 초청해서 특별히 법회를 열고, 육조단경을 강설하였더니, 군적들이 모두 크게 감화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흉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그 지방 일대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태평세상이 되었다.
경진년 봄에 태상왕인 강종이 넷째 아들에게 출가토록 명하여 손수 그의 머리를 깎아 주었으니, 지금의 진구사 주지 경지선사가 바로 그 분이시다. 옛날 청도군 칠엽사 총림에 있을 때, 오랫동안 날이 가물어 정천이 고갈하여 하늘을 쳐다보고 걱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스님께서 정심 재계하고 장로자각 종이선사가 설한 바, 사갈라용왕이 대해를 떠나지도 아니하고, 또한 용궁에서 나오지도 않는다는 기우법요식을 담설하여 오직 중생을 위하는 일념 자비심으로써 자비의 구름을 일으켜, 감로의 비를 내려 주십사고 하는 말을 되풀이 하면서, 정근하여 밤이 새도록 철야하였더니, 갑자기 호우가 쏟아졌다. 그리고 또 팔공산염불난야에 있을 때, 2·3명의 도반과 함게 동봉에 모여 차를 끓여 마시고 있었다. 이때에도 날이 크게 가물었다. 스님께서 이르기를 지금 비는 내리지 않고, 불볕 더위가 계속함은 재기가 덮인 까닭이니, 말라가는 못자리가 타고 있는 농작물을 어찌 그대로 보고만 있겠는가? 하고, 한 잔의 차를 바위 위에 올려 놓고 아라한님께 기도하되, 선월화상예참문으로써 예식 도중 아직 범창이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단 비가 내려 전답이 완전히 해갈되었다.
대개 스님의 덕행으로 감응한 바가 많았으니, 이는 스님께서 전도와 수업을 의무로 여겨 내면으로는 대묘의 성기에 도달하였고, 밖으로는 무궁한 중생들의 근기에 응하였다. 법등을 끊임없이 전하고, 혹은 경을 일러주되 마치 이 병의 물을 저 병으로 옮기는 것과 같이 하나도 누락함이 없었다. 사방의 학자들이 산두처럼 숭앙할 뿐만 아니라, 둥근 달이 바다를 비추니, 바다 물결이 밝지 않음이 없고, 감로가 하늘에서 떨어지니, 만물이 윤택을 받지 않음이 없는 것과 같았다. 그의 교훈을 받은 이는 마치 적시에 내려 주는 감우를 만남과 같이 희열을 느꼈다. 스님으로부터 교화를 받은 사람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대금 정우 9년 신사 여름에 이르러 문하의 청류를 모아 놓고, 열심히 능엄경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어느날 갑자기 대중들에게 이르시되, 정법을 만나기 어려움이 마치 귀목과 같느니라. 나 또한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날이 얼마 남지 아니하였으니, 바라건대 여러 존숙스님들은 세월을 허송하지 말고 힘써 말세의 불법을 홍천하여 부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 대중들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해 6월에 이르러 미양를 보인 후, 병세가 점점 심면하고 침심하였으나, 그래도 오히려 능엄경 강연을 중지하지 아니하였다. 7월 팔공산 염불사로 이석하였다. 마지막으로 원정과 청림등 두 선로와 함께 종용히 도담을 나누었다. 8월 28일에 이르러 삭발하고, 목욕하였다. 9월 2일 시자를 불러 옷을 갈아 입고, 단정히 승상에 앉아 범패를 읊게 하였다. 이때 시자가 스님께 임종게를 청하니, 스님은 눈을 뜨고 한참동안 노려 보고 이르시기를, 이 어리석은 놈아! 내가 평생동안 한 게송을 지은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슨 게송을 지어달라는 말인가? 하시고, 승상을 세 번 내리친 다음, 곧 적요하므로, 가까이 가서 보니 이미 입적하시었다. 그러나 안색은 조금도 변하지 아니하여 온 몸이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위대하신 지라! 진리를 통달한 사람은 사 생 일체로 보아 죽음에 당하여도 언소가 자약하며, 사거와 생래의 생각이 없으니, 자증과 자오의 법력이 아니면 어찌 능히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10월 10일 문도 50여명이 영여를 모시고 팔공산 남쪽 기슭에서 화장하였다. 다음 날 영골을 수습하여 신구산으로 이장하고 탑을 세웠다. 세수는 51이요, 법랍은 37세였다. 고종 임금께서 부고를 듣고 크게 진도하시면서 국사로 추증하고, 시호를 원진이라 증정하였다. 문인들이 스님의 탑비를 세우고자 조정에 건의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신 공로에게 비문을 지으라고 하명하였으나, 신은 그 동안 문직으로써 막중한 추근의 위치에 있으면서 폐하를 욕되게 하고 있을 뿐아니라, 학식이 천박하여 도저히 비문을 지을 수 없다고 굳게 사양하였으나, 하는 수 없이 문도들이 기록한 행장 자료에 의거하여 억지로 서술하고 명하여 가로되,
위대하신 부처님 서천에 출현 그의 법 동점하여 동토에 왔다
교리의 내용따라 종파가 성립 그 많은 종파들이 천하에 유통
종파마다 종지는 비록 다르나 돌아가는 표적은 다르지 않네
선과 교가 방법은 같지 않지만 구경지인 성불엔 다르지 않다
위대하신 우리의 원진국사는 선과 교 차별없이 쌍홍하였다
청정하온 그 마음 지수와 같아 진리의 그 세계를 두루 비추다
청정한 계의 광명 추월과 같아 번잡한 중생세계 초월하였다
홍대하신 그 법력 춘천과 같아 중생을 이익함이 끝이 없도다
정정한 청풍납자 줄을 이어 찾아든 용상 대덕 문을 메우다
구수와 심전으로 겸전 하오니 조사관문 훤하게 열려졌도다
태어나고 죽음은 때가 있는 법 후사를 당부하고 서회하시니
수많은 제자들이 어쩔줄 몰라 태산이 무너지듯 넋을 잃었네
임금께 건의하여 비를 세워서 후세에 그 업적을 전하려 하여
절묘한 비문 지으라는 그 명령 외람되이 신에게 내려졌도다
할수없이 선칙은 받자왔으나 확확히 뛰는 가슴 가눌 길 없네
탁월하고 빛나는 그 이름이여 천만년 흘러가도 심금을 치리
갑신년 5월 일 사문 혜적등이 비석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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