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쇠락의 자본주의
-로렌 골드너
지난 14개월 동안의 ‘신용위기’ 사건이 던져준 충격 탓에 (나 자신을 포함하여) 많은 사람들은 생산과 재생산 영역에 도사리고 있는 ‘더 깊은’ 위기의 원천들을 종종 무시하는 경향을 나타냈다. 주류 매체를 보면 신용위기에 대한 분석이 이제는 지극히 평범해져 버린 정도다. 하지만 우리는 맑스주의자로서 이제껏 ‘순수한’ 신용위기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재생산 과정 안에 더 깊은 차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헤겔이 새로운 이념을 도입한 세 가지 단계를 상기해보자. 1) 완전 침묵과 무관심, 2) 엄청난 적대심과 자포자기, 3) “그것은 우리가 늘 믿었던 거야.”
매체가 2)에서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일 년 반 동안 1)과 3)을 오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2)는 ‘회의론자들’을 다루던 지난 30년 동안 생산성이 전혀 없는 기분전환용이었다. ‘자유시장경제’ 같은 그럴듯한 말들이 지배하던 몇 십 년이 지나자 갑자기 ‘자본주의’라는 단어가 일반인들의 입에 다시 나타났다. 버락 오바마가 월스트리트의 대대적인 기업 구제조처를 지지한다고 하자 ‘사회주의자’라고 공격받고 있다. 사실은 ‘이윤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라는 낡은 자본주의의 후렴구일 뿐인데 말이다.
신용이 경색되고 자금줄이 말라가면서 돈을 빌리는 데 어려움을 겪는 ‘비투자 기업’에 매체의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GM, 포드, 제너럴 일렉트릭 같은 ‘비투자’ 기업들이 금융상의 노력으로 점점 더 이전보다 훨씬 큰 이득을 창출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하게 보자.
1970년대 이후 자본주의 하에서 금융과 금융시장이 점점 더 부각되고 모든 수준에서 공식적인 자본주의적인 통계들이 이데올로기적으로 심각하게 왜곡을 일삼는 가운데 ‘실제’ 경제 상황에 대한 진지한 정보를 얻기가 더 어렵다. (미국 생산을 지탱하던 이전의 대들보들이 재정적으로 한 바퀴 돈 것이 예시하듯이) 도처에 허구적인 차원이 꽤나 많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몇 가지 논쟁을 일으키기 위해 사건들에 대한 나의 해석을 던져버리고 싶다.
1. 쇠락이 점증해가는 자본주의
신용과 금융의 상황 전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해보자. (이하에 나오는 지표들 상당 부분은 2005년 것이다. 현재 진행 중인 디플레이션으로 그 중 많은 지표들이 매일 변경되고 있다.)
미국 경제에서 부채는 33조 달러가 넘는다(연방, 주, 기업, 개인의 총 부채). 이것은 미국 GDP의 세 배나 되는 돈이다. (국제적인 헤지펀드와 파생금융상품에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연방정부, 주정부, 지역 수준을 포함해 각급 국가는 미국 GDP의 40%를 소비한다. 대외 순 채무는 대략 5조 달러나 된다(외국인 지분인 13조 달러에서 미 해외 자산 8조 달러를 뺀 액수LG-2008). 그리고 그 액수가 연간 7천억-8천억 달러씩 증가하는 사태가 아주 최근까지 계속되었다(그러다가 마침내 달러화가 폭락하고 소비도 격감한 데에다가 미국 내의 자산 가격이 저렴해지자 이것을 나꿔채려고 자본 흐름이 역류하여 들어오면서 기존의 무역 적자는 물론 국제 수지 전반이 개선된 것이다). 미 정부의 부채 중 외국인 지분이 차지하는 비율이 증가하고 있는데 아시아의 주요 중앙은행들(일본, 중국, 한국, 대만)이 2008년 통계로 4조 달러를 차지하고 있다. (벌써 한참 옛날 이야기 같이 느껴지게 되었지만, 최근에 페니 매와 프레디 맥에 대한 구제 조처는 무엇보다도 패니와 프레디의 부채 중 중국이 가지고 있는 5천억 달러를 염두에 둔 것이었다.) 연준은행의 경기 부양(reflationary) 조치들이 이루어졌지만 이 때문에 연방정부는 또 빚을 걸머지게 되었다. 덕 놀랜드(Doug Noland)의 ‘금융중재자본주의’(financial arbitrage capitalism)라는 개념이 옳다면, 은행이란 예금을 받아 그것에 기초하여 대부를 해주는 기관이라든가 연준은행 체제를 조종하여 신용 총량을 늘이거나 줄이는 (외면상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 같은 핵심 개념들이 이제 완전히 사라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은행들이 ‘부외거래’로 ‘증권유동화 금융’에 의해 ‘가상’ 신용을 점점 더 많이 창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지난 4년 동안 모기지의 리플레이션을 지탱했고 엄청난 주택버블을 야기했으며 주택 가격 붕괴를 일으킨, 정부와 연결된 기관들(프레디 맥, 페니 매)도 고려에 넣어야 한다. 이러한 메커니즘 전체는 다음 세 가지에 기초하고 있다. 1) 미국 내의 물가 상승률이 낮을 것. 그렇지 않다면 외국의 대부자들이 두려워서 떠나갈 테니까. 2) 미국의 ‘소비자들’이 기꺼이 더 많이 쓰고 스스로 더 많은 빚더미 속으로 들어가는 상황(몇 년 전 할부상환금액은 수입의 11% 정도였지만 지금은 14%를 차지한다). 3) 미국의 국제 수지 적자에 대해 계속해서 재차 돈을 빌려주려는 외국인들의 의지와 능력.
또 다른 차원 얘기를 해보자. 미국과 다른 많은 ‘진전된’ 경제(주로 쇠퇴하며 진전한)에서 비생산적인 노동과 비생산적인 소비의 양이 얼마나 될까? 맑스는 국가 부채를 허구적인(fictitious) 것으로 규정한다. 그는 수입을 위해 행한 노동(자본을 위한 노동에 반대되는 것으로서)을 비생산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많은 맑스주의자들은 국가의 재원을 위해 행한 군사비 지출이, 개별 자본가들에게 이윤을 창출시켜 준다고 해도, 비생산적인 노동이라는 사실에 동의할 것이다. 필자는 그 패러다임을 국가 재원, 그리고/혹은 국가 부채라는 허구적인 자본이 지배할 수 있는 재화와 서비스라는 관점으로 확장시킬 수 있다고 본다. 잉여가치 구체적으로 말해서 생산수단(제1부문) 혹은 소비수단(제2부문)은 생산적으로 소비되려면 더 확장된 재생산에서의 C나 V로서 재투입되어야만 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미국 경제에서는 막대한 양의 비생산적 소비가 발생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어마어마한 양의 비생산적인 소비를 파악하게 해주는 맑스의 도구를 지적함으로써, 필자는 정확하게 무엇이 비생산적인 노동을 구성하는지에 관한 신학적인 논쟁은 피하려고 한다.
잉여생산물의 일정 부분이 자본으로 변형되어야 축적이 이루어진다. 하지만 기적을 빼놓는다면, 오로지 노동과정에서 사용될 품목들 (즉 생산수단)과 노동자의 부양에 적합한 물품들 (즉 생계수단) 이외에 어떤 것도 자본으로 전화시킬 수 없다…한 마디로 말해서,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화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잉여 생산물―그것이 누가 가져가는 가치인가는 차치하고―이 이미 새롭게 증가된 양의 자본의 물질적 구성물들을 담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Capital,vol.1,1973,726-727)
다시 말해, 무인폭격기, 탱크, 경찰의 폭동 진압용 장비, 요트, 롤스로이스, 미식가들이 찾는 식당과 루이뷔통 가방은 개별 자본가에게 충분히 이윤을 창출시켜줄 수 있다. 하지만 아주 쓸모가 많은 상품을 위한 생산수단(맑스가 제1부문이라고 부른)과 소비수단(즉 냉장고 만드는 기계) 혹은 그러한 상품들의 생산(제2부문: 간단하게 말해 보자: 빵)과 달리, 이러한 것들은 확장된 재생산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의 순환에서 떨어져 나옴으로써 ‘자본이 되지 못한다.’ 다시 말해 그 이상의 생산수단으로도 노동력을 재생산하기 위한 소비수단으로도 생산적으로 소비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한 상품들은 오늘날 (이데올로기적으로 극구 찬양되고 있는) ‘서비스 경제’에 존재하는 막대한 비생산적 노동자 집단 안에서 자본가계급과, 그 계급의 ‘하인들’―시민, 기업관료 등―의 비생산적인 소비를 구성한다.
우리는 금융을 그 기원에서부터 생산영역에 확고하게 연결시킴으로써 가공자본에 대한 맑스의 분석을 무수한 통화론자들, 하이에크주의자들, ‘은행이 세계를 지배한다’는 음모이론들이나 현학적인 케인즈 좌파 하이만 민스키(Hyman Minsky)―이들은 모두 가공자본을 고립시켜서 생각한다―들의 분석과 조심스럽게 구별해야 한다. 이는 고정 자본 “f”에 대한 과대평가가 점증하는 것에 그 기원이 있는데, 이는 자본주의적 사회적 관계의 타율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시간이 갈수록 더욱 증가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서, “기술적 감가”(technodepreciation)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자본가에게 자본이란 무엇보다도 예상된 현금흐름의 ‘자본화된 가치’를 뜻한다. 생산성의 진전으로 인한 가격 저하의 효과는 그 자본화의 가치를 계속 잠식하지만 이것이 목전에 아주 명백하게 드러나는 것은 요즘과 같은 디플레이션적인 붕괴의 공황에서 뿐이다. 자본주의의 사이클 과정에서 중앙은행은 이 허구적인 버블의 폭발을 늦추는 조치를 취하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밑바탕에 있는 가격의 하향 추세 앞에서는 무능을 드러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게 되면 1970년대와 80년대에 수많은 맑스주의자들이 힘자랑을 펼쳤던 바 있는 “가격-가치” “전형 문제”는 전적으로 학구적인 것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이 점에서는 더 이상의 증거가 필요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긴 시간에 걸쳐서 보게 되면 개별 자본의 시장 가격에 직접적으로 조응하는 것이 그것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비용이 아니라 그 자본화―이러한 자본화의 환경은 일반적인 이윤율로 주어진다―된 가치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적 지권 신용―이윤, 이자, 지대로 이루어지는 부를 놓고 발행된 여러 증서들―은 어디에선가 충분한 양의 잉여가치가 주입되어 그 가치를 지탱해주기만 한다면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 “가치”와 아무런 직접적 관계가 없는 채 유통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잉여가치는 그저 생산에서 노동자들의 직접적인 착취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원시적인 축적(다른 생산양식에 의해 재생산된 노동력의 통합)이나 혹은 철저한 약탈(looting) 즉 자연, 기존의 노동력과 자본플랜트의 비-생산을 포함하는 ‘공짜의’ 투입물들로부터도 나올 수 있다. 이것은 행렬 연산에 의존하는 식으로는 풀 수 없는 경험적인 문제들이다.
2007년 이후 ‘신용위기’는 사실 최근 수십년 동안 오랜 과정에 걸쳐 일어난 자본주의의 생산과 재생산의 사이클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 문제를 짚어보자.
2. 자본은 그 위기를 해결하고자 역 주행한다
먼저 지난 3, 40년 동안 사회경제적으로 얼마나 거대한 ‘퇴보’가 있었는지 간략하게 역사를 살펴보자.
이 위기는 2차대전 이후의 재건 붐이 끝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재건 붐을 알린 신호탄은 미국, 일본, 독일에서 있었던 1965-66년의 약한 불경기였고 그 전인 1958년에 시작한 ‘달러 위기’였다. 물론 오늘날의 상황과 비교하면, 그 당시 위기는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인다.
1968년 3월 브레튼우즈 체제는 거의 완전히 실패로 끝났고 패닉을 방지하고자 세계증시는 며칠 동안 문을 닫았다.
진짜 기업유동성 위기가 터져 나온 것은 미국에서 1969-70년의 일이었다. 펜 중앙철도의 파산으로 위기가 눈으로 확인되었다(더욱이 이 사건은 ‘자본화’에 의해 자본주의적인 가치평가의 관계와 실제적인 토대가 되는 자산 가치를 훌륭하게 보여주는 예다). 1970년 기업 부채는 2차대전 이후 수준으로 올라갔고 ‘실질’ 생산에서의 투자는 이미 1957-58년의 심각한 경기침체 이후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었고 베트남전쟁을 위한 군비생산으로 지탱되고 있었다.
그때 1969-70년 경기침체로 들어가면서 관심의 한복판에 있던 것이 기업유동성이었다.
필자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1960년대 후반 이전 시대의 상승 확장이 종말을 고했음을 알리는 신호가 나타난 이래로 세계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연료 없이 주행(走行)”해 왔다는 것이다. 그 “성장”의 주된 “동력”은 신용 피라밋이 나날이 증대하여 마침내 전대미문의 가공할 만한 규모로 불어났던 것이었고, 여기에 필요한 자금은 모든 종류의 사회적 퇴보를 나날이 증대시킨 것 즉 세계적 규모에서 사회적 재생산을 수축 혹은 아예 중단시켜 버리는 것으로 조달되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몇 년 전 UN의 연구에 따르면 1968년이 ‘진전된 자본주의’ 세계에서 세계 2차대전 이후의 소득분배에 전환점이 나타난 때라는 점이다. 1945년부터 1968년까지 미국의 인구 중 가장 잘 사는 사람이 1/5이었고 가장 가난한 사람이 1/5이었다. 1968년 이후 양대 계층 사이의 간극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오늘날에는 1929년보다 훨씬 더 간격이 벌어져 있다. 극단적이지는 않지만 대부분의 다른 진전된 자본주의 경제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향이 발견된다.
한 시대의 종말을 나타내는 또 다른 근본적인 지표는 노동자계급 가계의 지불수표(봉급)가 1960년대에 사라지기 시작하고 그 후로 점점 더 가속화하기 시작했다는 단 한 가지 ‘사실’로 요약된다. 한 걸음만 걸어보면 사회적 재생산의 위기가 위기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약 1960년 경 일주일에 40시간이면 4인 기준의 수백만 가구를 재생산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80시간 혹은 그 이상(종종 훨씬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이 필요하다.
브레튼우즈 체제(‘금-달러’ 본위제)는 1971-1973년에 붕괴했고 즉각적인 ‘달러 본위제’로 대체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의 부채는 공공연하게 세계금융위기의 닻이 되었고 오늘날까지 그 문제는 지속되고 있다.
뒤에서 보게 되겠지만, 이것은 맑스가 ‘세계화폐’라고 부른 것의 수준에서 생산과 재생산 시스템 안 깊숙이 작동하고 있는 가치의 위기를 표현한 것이다.
1972-73년의 주된 리플레이션(통화재팽창)은 인플레이션의 가속화를 불러일으켰고 세계 2차대전 이후 (그때까지) 가장 심각한 1974-75년 세계적인 경기침체가 뒤따랐다. 1970년대 중반부터의 경기후퇴에서 시작한 리플레이션으로 인해 1978-80년에 인플레이션이 갑자기 분출했고 그 뒤를 이어 연준 의장이자 화폐통화론자인 파울 볼커(Paul Volcker)가 등장했고 대처-레이건의 ‘신자유주의’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케인스주의의 마지막 케인스 리플레이션(1975-79)으로서 1970년대 후반 대처-레이건의 승리 이전에 악성 인플레이션, 캘리포니아 선언 13, 미국의 크라이슬러 구제금융, 카터의 예산 삭감, 영국의 ‘불만의 겨울’ 같은 사태로 나타난 것이다. 1979-80년 이후 자본주의는 말하자면 군비증강과 부자를 위한 세금 삭감과 더불어 ‘군사적 케인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변해갔다.
우리가 1970년대 중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일련의 세계적인 위기들 속에서 미 헤게모니가 분명하게 손실을 입었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세계적인 위기들이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노동자 폭동, 인도차이나에서 군사적 패배, 아프리카 뿔(아프리카 북동부 소말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돌출부)에서 ‘친소’ 정권들의 출현, 남아프리카의 폭동, 예전에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앙골라-모잠비크-기니아 비소)에 친소정권들의 출현, 유럽(프랑스-이탈리아-스페인)에서 ‘유로공산주의’라는 형태로 나타난 겉으로만 좌파 지향적인 운동을 가리킨다. 1970년대 후반 니카라과와 이란혁명에서도 불길이 더 일어났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공격전환으로 미 헤게모니의 이러한 손실이 무화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대차대조표’는 그 인력 비용을 이해하기 위해 다루어져야 한다. 사회민주주의와 스탈린주의는 노동자 폭동을 부르주아 민주주의로 변형시킴으로써 스페인과 포르투갈에서 자기들의 작업 지분을 챙겼다. 하지만 많은 곳에서는 길고 피를 요구하는 반동들이 일어났다. 1973-1976년 사이에 서던 콘(칠레-우루과이-아르헨티나, 그리고 1964년 이후의 브라질)에 군사독재 정권이 들어섰다. 유엔에서 ‘새로운 국제적 경제질서’를 통해 식량, 연료와 부채 탕감을 요구하는 ‘그룹 77’에 속하는 개발도상국가들의 광범위한 도전이 제거되었다. 아프리카와 인도차이나에서 여러 가지 ‘민족해방운동’이 굴욕을 치렀고 침체에 빠졌으며 빠르게 (베트남에서처럼) ‘시장사회주의’로 빠져 들어갔다. 이란에서 물라가 승리를 거두고 좌파를 싹쓸이했으며 1981-89년 이란-이라크 전쟁에 수백만 명을 파병시켰다. 수니파, 시아파, 여러 다른 종류의 기독교도들과 그들의 국제적인 지원세력들(시리아, 이란, 이스라엘, 미국) 사이의 15년에 걸친 내전으로 레바논이 파멸되었다. 사우디의 돈과 선전이 중국 서부의 위구르에서부터 모로코에 이르는 이슬람운동에 불을 질렀다. 미국이 지원하는 아프가니스탄의 폭동이 좌파민족주의자들 정권과 소련군을 극복했고 결국 탈레반에 권력을 넘겨주었다. 미국의 자금 지원을 받는 군사적인 지배가 니카라과 혁명을 지도했다. 반소 미-중 동맹이 국제적으로 결속을 다졌다. 레이건, 대처, 미테랑, 등소평이 모두 시장의 우월성에 동의를 표시했다. ‘민족해방’ 운동이 붕괴하던 시점에 IMF는 100개의 개발도상국들에게 ‘구조조정프로그램’을 강제했다. 1989-91년에 소비에트 블럭이 해체되었다. 미군이 1990-91년 걸프전에서 수십만 명의 이라크인들을 죽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 전세계적으로 40개의 전쟁이 진행되었다. 남부 아프리카에서만 6개국 전쟁으로 4백만 명이 죽었는데 이 수치는 1945년 이후 어느 다른 전쟁에서 죽은 숫자보다 많은 것이었다(1945년 이후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민족해방운동’이 남긴 빈 자리로 겉으로 보기엔 이데올로기가 없는 듯하고, 콩고, 리베리아, 시에라 레온 같은 지역에서 약탈, 강탈, 살상 이상의 목적이 없는 듯한 네 명의 묵시록적인 마부들이 발을 들여 놓았다. 아프리카민족회의(ANC)가 남부 아프리카에서 권력을 잡고 재빠르게 워싱턴 컨센서스에 결합했다. 1990-95년과 1999년의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민족과 인종 문제로 인한 살육의 피를 보게 되었고 미국은 무능한 유럽연합에 치욕을 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북한에서 김정일의 ‘은둔의 왕국’이 최후까지 버티는 ‘노동자들의 상태’로 기근을 목격했다. 제3세계에서 6백만 명의 어린아이들이 순수하게 경제적인 이유들로 인해 매년 질병과 상황(즉 깨끗한 물 부족) 때문에 죽어나가고 있다.
3. ‘워싱턴 컨센서스’ 30년의 결산표
30년간의 ‘워싱턴 컨센서스’는 국가주의 발전 정권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었지만 현재 2007-2008년의 ‘빅 원’ 때문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으며, 겉보기에는 욕을 먹는 국가들이 계속해서 간섭해야 했던 ‘금융 사태들’과 뒤섞여 있었다.
1979-82: 연준 의장인 볼커의 조치로 인해 이자율이 20%로 올랐고 결국 1970년대의 하이퍼 인플레이션 이후 절대 이자율을 도입하여 1980-82년에 심각한 경기침체가 야기되었다. 군비증강으로 인한 레이건 정부의 막대한 적자를 일본에서 빌려온 돈으로 메웠다. 또한 이 시기에는 ‘정크 본드’(junk bond: junk=액면가격보다 싸게 팔 위험이 높은 증권)와 ‘레버릿지(차입금으로 투기하게 하는 것) 매점’(leveraged buyout=LBO식 기업매수)이 전면에 나섰던 때이기도 했다. 정부의 특혜 물결이 미국의 노동 시장을 휩쓸고 지나가 이윤이 많은 기업들조차도 만료되지 않은 계약들을 다시 협상할 수밖에 없었다.
1982: 제3세계 주요 국가들의 부채 위기. 브라질과 멕시코가 파산 위기에 처함. 손실을 입은 미 은행들의 사실상 국유화. 멕시코인들의 일상적인 생활수준이 50% 하락하여 그 결과 내핍 생활 강제당함.
1984: 미국이 공식적으로 1차대전 이후 처음으로 세계의 가장 큰 채권국에서 세계에서 제일 큰 채무국으로 변했다. ‘세금과 소비’ 정책으로 ‘적자’에 대해 수년 동안 이야기하던 신자유주의자들과 신보수주의자들이 갑자기 간결하게 ‘적자는 문제될 것이 없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1985: 플라자합의로 인해 일본은 엔을 50% 재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그 전에 일본이 소유하고 있던 달러의 가치가 50% 하락했다는 의미다.
1986: 런던 금융시장이 탈규제 ‘빅뱅’ 시작하여 세계 시장에서 활동을 확산시켰다.
1987: 거대한 ‘금융사태’인 세계증권시장 폭락. 새로운 연준 의장 그린스펀이 유동성을 급격하게 완화시키고 각종 증권 가격을 점차적으로 회복시켜 1990-91년 경기침체로 빠져들어감.
1989-1991: 미국의 저축과 론의 감소로 국가부채가 1,500억 달러 더 추가됨. 1990년 공식적으로 경기침체 시작. 주택 가격이 평균 20% 수직 폭락. 이전 시기의 ‘정크본드’ 영웅들 사라짐.
1990: 일본 증시 38,000에서 12,000으로 폭락. 악성 은행 론과 부동산 투자가 일본을 십 년 이상의 디플레이션 상태로 몰아넣음.
1994: 멕시코 ‘데킬라 위기’. 미 정부가 멕시코 미국 채권 지분 구제금융으로 500억 달러 사용. 오렌지 주(캘리포니아)가 채권 시장 손실로 파산.
1997-98: 아시아 위기가 한국, 홍콩, 인도네시아, 대만을 건드려 폭락. IMF가 한국에 570억 달러 구제금융 조건으로 가혹한 긴축재정 요구. 거대한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소요가 이 나라들에서 수백만 명에게 피해를 입힘.
1998: 러시아 파산. 그 결과 헤지펀드 롱텀 캐피탈 매니지먼트 제거됨. 러시아, 은행들에 대한 130억 달러 구제금융 요구.
2000: 닷 컴 버블. 나스닥 60% 손실, 이후 회복 불가능.
2001: 9/11 이후 주요 증시 더 폭락. 2002-2003 ‘약세시장’ 확산. 엔론 파산. 이로 인해 다시 이중장부 신용사기에 의한 위기 심화. 2003년 world.com 파산.
2002: 다우존스 산업 평균이 약세지속 시장에서 7300 포인트 하락. 연준 의장 그린스펀이 이자율을 1%로 낮춤. 2000-2001년 경기침체에 이어 세계 2차대전 이후 최대의 무기력한 회복세를 보임. 다우지수 회복, 2007년 가을까지 14000 이상으로 상승.
2003: 대량의 신용 완화로 인해 자산인플레(증권, 부동산) 가속화. 무엇보다도 미국과 유럽(스페인, 영국, 아일랜드)에서 주택 버블.
2000-2003년 약세시장과 2000-2001년 경기침체,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실업의 회복’에서 나타난 것이 ‘서브-프라임’ 현상이었다.
4. 역사에서 가장 거대한 폰지 도식의 이론적인 기초
지난 20년 동안 자본주의 금융은 ‘증권유동화 금융’을 발견했다. 이것은 몇 가지 ‘밑바탕에 깔려 있는’ 소득 흐름에서 현금 흐름을 취해 그것을 팔 수 있는 형태로 포장하고 ‘자본화된’ 가치로 파는 것이다. 이전의 패키지 상품은 다시 패키지 상품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무한한 ‘건축’이 가능하고 궁극적으로 원래의 현금 흐름에 기반하여 ‘조정’할 수 있다. 불안정한 서브프라임 모기지는 미국에서 종종 최고등급이라는(‘AAA’-평가) 액면 유형들 안에 은폐된 채 세계금융시스템 안에 증식하는 에이즈 바이러스처럼 일반화되었다. ‘증권유동화 금융’ 덕분에 자본주의는 ‘혁명적인’ 혁신으로 일컬어지는 훨씬 더 투명한 도구들로부터 고전적인 ‘폰지 도식’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밑으로 ‘레버릿지’(자본 혹은 현금으로 지불받게끔 발행된 총 액면가 비율)는 불합리한 수준에 도달하여 액면가가 조금만 낮아져도 빠르게 파산이 일어났다.
금융영역 ‘밑에서’ 일어나는 그 외의 모든 것―2000년 이전 ‘닷 컴’ 붐에서 그 이후의 주택 붐으로의 변동―은 구매력을 ‘미국 소비자’의 손에 맡기려고 했던 연준의 시도의 결과였다. 생산과 재생산의 더 심각한 위기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는 자본주의적인 전문가 눈에는, 빚더미에 점점 올라앉는 ‘미국 소비자’가 미국 경제에서 부채의존도(기업의, 정부의, 개인의)가 증가일로에 있는 맥락에서도―2007년까지 해외에서 빌려온 론(하루에 30억 달러씩)으로 보조금을 지급받았다―수십년 동안 세계경제의 ‘기관차’로 여겨졌다. ‘미국 소비자’의 구매력에 보조금을 지급함으로써 전세계의 허구적인 구조물이 유지되는 일이 급박해졌고 디플레이션으로 인해 생산영역이 더 심각하게 축소되어 생길 파열을 방지하는 일이 급박해졌다.
예를 들어보자. 중국 은행의 10조-20조 달러는 중국 노동자들을 착취함으로써 생산된 중국의 실제 상품과 교환된 녹색의 작은 서류조각들과, 그/그녀가 그 물건들을 살 수 있게끔 ‘미 소비자’에게 재-대여해준 서류 조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돈은 특히 미국의 정책 입안자들이 소신대로 행동하고 중국이 자국 통화를 보유분 가치의 절반으로 자른 후 4렌민비(renminbi)=1$의 수준으로 재평가할 경우 결코 돌려받을 수 없는 돈이다. 1971년에 브레튼우즈 체제를 닉슨이 해체함으로써 자기들의 달러 지분이 삭감된 것을 본 일본은 중국에게 두세 마디 말해줄 수 있다(그리고 중국은 그 위험을 매우 잘 알고 있고 그 얘기를 공개적으로 해왔다).
현실 속에 존재하는 30년 동안의 ‘워싱턴 컨센서스’를 아주 간략하게 요약했지만 이것은 사태의 겉만 다룬 것이다. 우리가 현실 안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20세기 첫 10년에 시작한 과정인, 지구적인 생산양식으로서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쇠퇴에서 가장 최근에 일어난 변화다.
5. 생산양식의 쇠퇴
‘쇠퇴란 무슨 뜻인가?
1914년 세계 1차대전 전후로 자본주의는 역사에서 세계적인 규모로 진전하는 생산양식을 중단한 지점에 도달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는 19세기 초부터 1914년까지 자본주의가 존재했던 첫 세기에 생산력이 끊임없이 발전했고 생산적인 노동자계급이 완전히 자본주의적인 영역들에서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시기에 자본주의는 그런 식의 발전이 더 이상 평화롭게 진화하는 방식으로 일어날 수 없는 단계에 도달했다. (이런 식으로 자본주의를 시기별로 나눈다고 해서 아프리카 노예, 약탈과 신세계의 인구 유출의 세기를 포함하여 자본주의의 역사적인 죄악을 간과하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미국과 독일이 경합을 벌이고 주요 자본주의 권력인 영국을 지나쳤을 때 생산적인 노동자계급은 세계적인 규모로 성장하고 있었고 자본주의적인 인구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세계 1차대전부터 1970년대까지 미국과 독일이 했던 방식대로 진전된 자본주의 권력으로 발전한 나라는 하나도 없었다. 1970년대 그리고 특히 1980년대부터 한국과 대만이 1세계로 진화해 들어갔지만 이것은 미국이 중국과 북한의 요구와 겨루기 위한 전시용으로 허용한 특별한 경우였다(1970년대까지 북한은 남한보다 훨씬 더 발전해 있었다). 그 후 홍콩, 싱가폴, 그 후 중국과 베트남이 한국과 대만의 모델을 따랐다. 하지만 이것은 미국과 유럽의 스태그플레이션, 동유럽,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동의 비산유국, 검은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에서 공공연하게 진행된 퇴보를 벌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1914년 이전 시기와 다르게 아시아의 호랑이들이 등극한 것은 세계적인 규모의 비확장이 아니었다. 한 편에 성장이 있었다면 다른 한 편에는 몰락이 있었던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아 우리는 1914-1945년의 시기를 끊임없는 위기, 전쟁, 반동, 파괴 등으로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가 대부분을 상실한 시기로 볼 수 있다. 일본이, 1920년대의 ‘합리화운동’(늘 역사적으로 8-10%의 높은 실업율과 연결된. 이것이 핵심이다)으로, 그리고 1930년대의 불경기(예를 들어 미국의 자동차산업)에 미국과 독일이 했듯이, 중국으로의 팽창과 몇몇 기술혁신 덕분에 분명하게 예외적으로 성장한 경우도 있다. 라틴아메리카는 1929년과 1945년 사이에 고관세 벽 뒤에 ‘수입대체’ 포퓰리즘을 세웠다. 우리는 집단화로 천만 명 이상의 농민들을 죽인 스탈린주의의 강제적인 소련의 산업화, 이로 인해 소비에트 시기에 남은 사람들에게마저도 러시아 농업을 불구로 만든 사실, 공장의 생산능률 촉진을 소비에트 비밀경찰의 감시 하에 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2천만 명이 죽은 1차대전과 8천만 명이 죽은 2차대전은 차치하더라도 시기의 ‘순수하게 경제적인’ 성격은 세계 전체적으로 위기, 침체와 퇴보가 막대하게 우세해짐으로써 상쇄된 성장의 지역적인 분출이었다. 일어났던 그러한 지역적인 성장은 세계 2차대전 이후 전반적인 축적의 파고 안에서 진정으로 효과를 나타내기 위해 세계의 재편을 기다려야 했다.
전후 붐으로 일컬어지는 1945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의 시기는 1914-1945년 위기라는 초창기 시기로부터 재건되는 시기로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1914년 이전에 존재했던 것을 재건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시, 사회적으로 필요한 재생산 노동시간이 새롭고, 더 높은 가치 기준에서 자본주의적인 교환의 ‘계산단위’(numeraire), 공통분모로서 정리될 때까지 지속할 수 있는 확장을 의미한다. 이러한 정리를 가장 중요하게 사회적으로 표현한 것이 1965년부터 1977년경까지 미국과 유럽에서 일어난 노동자 반란이었다.
실제로 전후 붐은 1960년대 중반에 끝났지만 1970년대의 악성 인플레이션을 유발한 신용 팽창 때문에 1970년대까지 지속되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1960년대 중반 일본, 유럽, 미국에서는 중대한 경기 침체가 있었다. 미국과 다른 주요 자본주의 국가들은 신용으로 자기들의 경제를 통화 팽창시켰고 붐을 1970년대 초까지 끌고 갔다. 그러나 그러한 역동성은 끝이 났다.
1970년대 초반 이후 세계적인 규모로 시스템은 역동적인 균형을 회복하려고 애썼지만 항구적인 위기 상태에 들어갔다. 자본주의의 위기는 생산의 무모한 투자, 비고용, 낡은 자본의 파괴와 이윤변동률로 새로운 팽창을 위한 조건 창출을 뜻한다. 결코 끝나지 않았던 느린 운동의 위기가 197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이제는 1929년의 모델에 따라 완벽한 위기 속으로 가속화해 들어가고 있다. 맑스의 자본은, 위기의 본질을 묘사한다. 경쟁적이지 못한 낡은 경쟁 자본을 제거하고 허구적인 자본, 그리고 신용의 몫을 제거하며 가격과 임금을 강제로 낮춤으로써 새로운 팽창국면이 자본가들로 하여금 투자하게 만드는 이윤율에 따라 시작될 수 있다. 이것이 위기의 메커니즘이다.
이러한 분석의 틀을 적절하게 갖추고, 묘사 이상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분명하게 기술하려고 하면서 맑스의 용어를 사용해야 한다.
시스템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맑스가 말한 가치법칙에 의해 조절된다. 가치법칙이란, 보편적이고 평균적인, 모든 상품들을 재생산하는 비용―자본주의 시스템 안에서 매매되는 모든 것―이 오늘날 상품을 재생산하는 데 요구되는,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시간에 의해 설정되는 일반적인 기준에 의해서 결정된다. 모든 상품들의 가치를 정하는 이러한 가치기준의 궁극적인 토대는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인 시간과 당대의 기술을 사용할 수 있는 산 노동이다. 자본은 산 노동을 착취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한 자동화와 로봇공학의 한계에서 나타난 것처럼 이윤을 생산해내지 못한다.
한 사이클에서 다음 사이클에 이르는 동안 자본주의는 생산성을 발전시키고 상품들을 더 싸게 만들어낸다. 자본주의는 기술을 더 싸게 만들고 임금(자본주의적인 노동력의 가격)을 더 싸게 만든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자본주의는 더 싼 임금에 대해 보상할 수 있다. 왜냐하면, 노동자계급의 소비재도 더 싸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스템 전체 안에서 불변자변,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총비용은 생산성 증가 때문에 훨씬 더 작아진다.
오늘날의 모든 생산수단의 가치(C, 혹은 불변자본)에 상대적인 총임금(V, 혹은 가변자본)이 하락하는 이러한 과정을 가리켜서 C/V관계에서 표현된 상승하는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라고 불렀다. 자본가의 이윤은 산 노동(V)의 착취에서만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맑스는 산 노동이 가동시키는 자본의 양(C)에 상대적으로 이윤율이 일반적으로 하락하는 경향이 있다고 보았다.
V가 하락하지만 노동자 임금을 구성하는 물질적 내용이 개선되어 그것이 상쇄되는 예를 몇 개 들 때가 되었다. 19세기에 가장 중요한 자본주의 국가들이었던 미국, 영국, 프랑스와 독일 노동자들은 임금의 절반을 먹는 데에 사용했다. 그리하여 세계적으로 농업혁명이 일어났다. 캐나다, 아르헨티나, 러시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전히 소규모 농업과 내륙 운송수단을 사용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주로 유럽)에 곡물가격의 디플레이션과 위기를 만들어 내면서 곡물을 아주 싸게 생산하고 운송하는 가장 근대적인 경작과 수송방법들을 사용했다. 그리하여 1차대전까지 노동자계급들은 먹는 데에 돈을 덜 쓰고 있었고 더 많은 임금들을 다른 소비재에 사용하게 되었다.
세계대전 이후에 일어난 붐은 생산성 증가로 임금 총액을 낮아진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식량과 기본적 생필품 가격이 훨씬 더 싸졌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TV, 차, 집, 그들이 살 수 없었거나 1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없었던 것들을 살 수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가치법칙이 생산을 값싸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나 노동자들을 포함하여 생활수준이 어느 지점까지 상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1914, 1945년을 자본주의가 19세기의 고전적인 위기 속에서 했던 것과 똑같은 일을 하려고 했던 시기, 즉 새로운 팽창 국면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토대를 발견하려고 했던 시기로 봐야 한다. 그것은 낡은 방식으로 발생할 수 없었고 불경기 2년 동안 붕괴, 그리고 새로운 팽창으로만 일어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당시 자본주의 시스템의 지배를 받는 세계에서 노동의 총생산성은 너무 높아 자본주의 형태로 억류될 수 없었다. 붕괴, 디플레이션, 불경기 회복과 붐(앞에서 말한 것처럼 노후한 기술의 파괴, 통화 축소된 가격으로 더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는 것―그 후에 돈벌이가 될 수 있는―을 포함하고 대량실업을 연장한) 사이클에 의해 예전에 일어났던 것이 훨씬 더 거대한 양의 기술과 노동하는 사람들의 실제적인 물리적 파괴를 요구했다. 제도적이고 지리정치학적인 요소들도 연결되어 있었다. 대영제국은 더 이상 제1 자본주의 국가로 남을 수 없었다. 물론 대영제국은 정중하게 자리를 비켜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은 영국을 밀어내려고 했고 미국은 그들 모두를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예전에 말한 것처럼 세계적인 규모로 자본주의적 축적의 새로운 조건들을 창출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앞서 언급한 자본의 유기적 구성은 여기서도 타당한 개념이다. 세계적 수준에서 시스템의 쇠퇴는 자본투자의 거대한 축적(C)이 그 이상의 발전에 장애가 된다는 ‘사실’(생산성이 너무 높아 자본주의적인 형태로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는 또 다른 얼굴)에서 표현된다. 그 이상의 기술 혁신에 의해 C가 엄청나게 값싸질 경우 기존의 투자된 자본의 가치가 지나치게 파괴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자본의 가치를 보존할 필요로 인하여 자본주의를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켰던 그 역동성 자체가 브레이크가 걸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위기는 두 개의 측면을 갖는다. C/V의 비율이 상승함에 따라 이윤율은 체제적 차원에서 축소당하며, 이것이 실제 혁신에 제동을 걸게 된다. 이는 또한 V 즉 노동력 재생산 비용이 줄어들어서 상품 교환의 공통분모가 될 수 없는 지점까지 저하한다는 사실의 표현이기도 하다. 위기는 생산적 기술의 결핍도 아니고 노동력 자체의 결핍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투자를 위해 적절한 이윤율을 요구하는 시스템 안에서 그것들의 잠재력이 제한되는 것이다. 시스템의 무정부주의적인 성격은 파괴와 퇴보, 1914-1945년 사이 그리고 1973년 이후 사회적으로 경험한 후진운동을 통해 적절한 이윤율을 다시 수립할 수 있을 뿐이다. 경제적이고 정치적인 권력을 자본가로부터 빼앗아 오는 혁명은 기존 기술과 노동력에 대한 가치법칙의 요구들을 즉각적으로 종식시킬 수 있고 비로소 자본주의적인 형태로부터 벗어난 실제 부의 더 거대한 창출로 빠르게 이행할 수 있게 하며 완벽하게 다른 종류의 생산적인 활동과 부로 진화해나갈 수 있게 한다.
실제 인간의 발전에 자본주의가 장애가 되는 분명한 예는 1920년대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적인 축적에 아주 중요했던 자동차 기름 경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기적으로 생산되는, 연료 효율이 훨씬 더 높은 많은 자동차 엔진들의 특허권은 다시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던 메이저 석유 생산자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이와 비슷하지만 자동차와 석유 생산자들은 막히는 도로에서 버린 수십조의 시간, 통근시간과 막대한 기름 소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철도시스템을 못쓰게 놔두면서도 미국인들이 여전히 차를 이용하도록 하기 위해, 진지한 공공 수송 프로그램에 저항하는 로비를 성공적으로 해왔다. (하나의 예일 뿐이지만 로스앤젤레스에서 1914년 이전에 존재했던 훌륭한 공공수송 시스템은 오늘날 존재하는 교외의 통근의 악몽을 만들어낸 자동차 산업의 압력으로 인해 파괴되었다.)
따라서 현재의 위기가 ‘지나친 기술발전’의 결과라고 보는 관습적인(맬더스적인) 관점(많은 환경운동이 제기한)은 위기에 상당히 큰 공헌을 해온 많은 기술들을 개발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사실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완벽하게 은폐하는 것이다.
1914-1945년과 유사한 과정이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미국이 더 이상 시스템의 헤게모니 역할을 할 수 없는 거대한 퇴보 속에서 1970년대 초반 이후 계속 발생해 왔다. 미국은 더 이상 이 역할을 할 수 없다. 누구도 어느 나라도 그것을 대체할 수 없다. 새로운 팽창 국면이 일어날 수 있게 할 세계시스템의 재편 투쟁이 존재하고 있다. 필자는 1914-1945년 때처럼 이것이 평화롭게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어떻게 일어날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고 일어날 수 있다는 확신도 갖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위기의 뿌리가 매우 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늘날 세계적인 규모의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세계의 다른 지역들, 동아시아(일본, 한국, 중국, 대만), 러시아, 인도, 유럽은 모두 현재의 세계시스템에 만족하고 있지 못하고 있고, 그것을 재조직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누구도 개별적으로 미국의 권력을 타도할 만큼 강하지 못하고 미국은 능숙하게 그 국가들이 강력한 블록을 형성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이것이 1914년부터 노쇠해지기 시작한 영국 헤게모니에 의해 창출된 ‘the.logjam’과 유사한, 현재 지속하는 위기의 세계지리정치학적인 맥락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문제의 한 수준일 뿐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더 깊은 수준은 1914년 때처럼 확장된 세계 붐이 있을 수 없고,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틀 안에 있을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적인 가치 법칙은 더 이상 1914년 이전에 했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세계의 생산력을 확장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6. 자본은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인간의 발전을 폐기시킨다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 이후 자본주의의 결산표를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자. 라틴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 같은 나라에서는 대량 빈곤과 탈산업화가 일어났다. 브라질 같은 몇몇 나라에서 이것은 약 20-30%의 인구가 거의 모든 경제 분야에서 주변화되는 것을 의미했다. 검은아프리카는 더 심했다. 소위 말하는 실패한 많은 국가들에서는 실제 투자가 모조리 사라졌다. 동유럽과 러시아는 소위 말하는 충격 요법을 15년 동안 했고 수백만 명의 노인들이 죽어 나가는 가운데 사적 자본주의로 이행했다. 새로운 인플레이션으로 그들이 받던 연금이 휴지조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전에 소비에트에 속해 있던 중앙아시아 국가들에서는 상황이 1991년 이전의 생활수준의 30%로 주저앉았다. 석유가 나지 않는 중동 국가들의 경우 체계적이지는 않았지만 유사한 인구들의 주변화가 일어났다. 석유 수입이 있는 나라에서는 발전이 매우 왜곡되어 진행됐다. 필자가 전에 언급한 경제적 발전이 이루어지는 아시아의 호랑이들, 중국에서―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인도와 중국을 묶어서―15억의 농민들이 이 과정으로부터 빠져나갔다. 필자는 그 자본주의가 그 많은 사람들을 과정 안으로 끌어당기는 방법을 알지 못한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대규모 고용이 연장된 시기가 있었다. 미국의 탈산업화, 영국의 탈산업화. 미국 인구의 1%가 감옥에 있다. 이것이 1970년대 초반 이후 자본주의의 대차대조표다.
이러한 현상에서 우리는 자본주의가 계속 생산성을 발전시키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생산성을 사회를 위한 실제적인 이득으로 옮겨놓을 수 없다.
다시 말해, 자본주의는 더 짧은 작업 시간을 갖기 위해 생산 능력을 창출했고 사회는 세계적 규모에서 훨씬 더 짧은 주 작업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자본주의는 자본이 되기 위해 산 노동과 산 노동의 착취를 필요로 한다. (확실히 1970년대 초반 이후 ‘수축된’ 사회적 생산은 현재의 총생산성을 어느 정도 훼손시켰다―그것이 자본주의의 목적이다―그러나 세계적인 규모로 자본주의로부터 빠져나오는 급속한 이행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생산력은 여전히 존재한다.)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 노동자계급 운동의 주요 슬로건의 하나는 ‘하루 8시간, 주당 40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1960년대까지 자본주의는 사실 주 작업을 단축시키고 있었다. 고전적인 노동자 운동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수입 평등을 더 크게 하려는 경향처럼 이러한 경향은 역전되었고, 북미와 미국에서는 주 작업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 생산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자본이 생존하고 자본으로서 이윤을 내기 위해 산 노동을 착취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생산성의 이득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능력이 없다는 것에는 아무런 예시가 필요없다. 적절한 축적율과 이윤율을 재수립하기 위해 생산성을 파괴해야 할 필요가 생겨난다.
이것은 맑스가 자본론 3권 중반에서 이야기한 것이다. 그는 뭐라고 말했는가? 자본이 스스로에게 장애가 된다고 말했다.
어떤 지점을 지나면 자본은 경쟁을 통해 창출한 생산성의 이득을 사회적으로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이윤의 사유화, 비용의 사회화를 통해 사는 것이 자본이다.
이러한 일이 1914년부터 1945년 사이에 한 번 일어났고 1960년대 후반-1970년대 초반 사이에 더 확산된 형태로 다시 일어났다. GDP가 약 10배가 증가했던 1973년 이후 미국 이야기를 잠시 해보자. 미국의 1973년 이후 위기의 사회적 재생산 차원에는 많은 측면들이 있는데, 앞에서 밝힌 대로 1960년경 수백만 명의 노동자계급 가계가 사용한 1인 월급수표가 소멸된 것보다 더 첨예하게 드러나는 특징은 없다. 1960년의 대부분의 1인 월급수표가 ‘백인들’이 벌어들인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해서 끔찍한 임금인하 때문에 노동자계급 가정을 유지하는 데 두 세 개 이상의 월급수표가 필요한 오늘날 사태의 본질을 바꾸어서는 안 된다. ‘노동력의 여성화’의 중요성을 잠시라도 부정하지 않는다면, 1960년 이후 수백만 명의 여성들이 부득불 미국 작업장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고스란히 남는다. 개인 수준에서도 평균 주당 노동시간은 1970년 약 39시간에서 현재 43시간으로 늘어났다. 1973년 미국의 최소 임금은 시간 당 3.25달러였는데 1973년 수준의 구매력을 회복하자면 18달러까지는 올라가야 한다. 1965-1973년 실질임금은 동결되었고 그 후 적어도 인구 80퍼센트의 입장에서는 실질임금이 떨어졌다. 고등교육의 비용은 통제 상태를 벗어났고 점점 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 돌아가지 않았다(이것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고등교육을 지배하는 퇴보를 간과하는 것이다). 미국은 통상 고등교육 학생들의 비교 시험에서 ‘선진적인 자본주의 20개 국가’ 중에서 20위를 차지한다. 1978년 포퓰리즘적인 ‘세금 반란’의 영향으로 캘리포니아의 공립학교들은 30년 만에 미국에서 최상위에서 최하위로 추락했다. 미국인의 수명은 42세이고…이것은 요르단에 필적하는 것이다. 어느 정도 발전한 많은 나라들의 경우 미국보다 유아 사망률이 더 낮다. 거대한 제약회사와 보험회사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건강 비용으로 GDP의 15퍼센트가 나가는데 이것은 더 나은 (보편적) 시스템을 갖춘 다른 많은 OECD 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수치다. 미국인 중 4천만 명이 건강보험이 없다. 1%는 감옥에 있고 35년 전부터 지수가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물가인하정책은 이 수치가 보여주듯이 노동력의 재생산에서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물질적 재생산 영역에서도 일어났다. 미국의 인프라를 재건하는 데 드는 추산 비용은 낮게 잡아도 16조 달러다. 사회적 퇴보로서 이것이 사회적으로 무슨 의미를 갖는지 파악하자면 카트리나로 폐허가 된 뉴올리언스를 상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자본주의적인 통계는 (앞에서 규정한 대로) ‘생산투자’를 별도로 생각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가장 최소한의 수준에서도 생산성(자본주의적인 용어로)은 그 후 결코 없었고 1990년대 클린턴 시절의 절반의 회복 시기에도 그랬다. 1945-1973년의 연평균 3퍼센트를 회복했을 뿐이다.
1945-1973년처럼 새로운 붐이 있을 수 있을까? 있을 수 있다. 그러나 1945-1973년 붐이 엄청난 양의 사람들을 배척했던 것처럼 또 다른 붐이 있을 수 있지만 1945-1973년의 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을 주변화시킬 것이다. 이것이 ‘쇠퇴’의 의미다. 자본은 인간의 사회적인 능력을 더 확장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7. 프로그램: 자본주의로부터 빠져나오는 이행의 형태와 내용
이제는 프로그램 문제로 돌아가자
미래를 내다보는 프로그램은, 위기가 깊어질수록 증식하게 될, 자본주의를 지지하는 좌파(오바마[Obama], 네이더[Nader])가 제안한 프로그램들을 포함한 반동적 프로그램들의 가치를 성공적으로 절하하고 극복하려고 한다면 상당히 중요한 것이다. 자본주의 시스템에 진정으로 도전하는 프로그램과 “빨갛게 칠함”으로써 그것을 단순히 재편하려고 하는 프로그램을 구별하는 것은 중요하다.
미국에서, 그리고 유럽에서는 어느 정도로, 그리고 동아시아에서는 점점 더, 시스템의 쇠퇴로 말미암아 노동자와 일반인들이 노동계급혁명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점점 더 어렵게 만드는 경제의 왜곡이 생겨나고 있다.
그래서 예를 들어 영국을 제외하고 가장 쇠퇴한 나라인 미국에서는 노동력의 약 15%만이 생산에 관여하고 있다.(그렇다고 해서 다른 임금 노동자들이 혁명에 대한 즉각적인 관심을 가진 프롤레타리아가 아니라는 뜻은 결코 아니다).
물론, 미국은 세계경제에서 기생경제이다.
미국은 세계의 다른 나라들 예를 들어 동아시아,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으로부터 국제적인 금융시스템을 통해서 부를 끌어온다.
그리하여 이것 때문에 미국은 탈산업화되고 소위 말하는 서비스경제를 갖게 된다.
그러나 그러한 서비스 경제는 계속해서 달러기준을 받아들이고 미국의 피라미드처럼 증가하는 부채에 재정을 공급하는 세계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기본적으로 세계의 나머지 나라가 생산을 하고 미국은 소비를 한다. 미국이 소비할 수 있는 것은 세계의 나머지 국가들이 미국에게 엄청난 양의 돈을 빌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은 두 가지 방식으로 움직인다. 세계 나머지 나라들이 중국처럼 분명히 역동적인 경제발전을 하기 때문에 그 나라들은 미국시장이 계속 팽창하기를 원한다. 미국은 이러한 기생적인 역할을 할 수 있고 소비재를 얻을 수 있으며 작은 녹색 서류뭉치 이외에는 교환에서 어떠한 것도 생산할 필요가 없게 된다.
따라서 당신이 미국과 같은 실제로 쇠퇴한 경제에서 노동계급 혁명을 위한 프로그램을 제시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지 의아해 한다. 미국이 아직도 주요 산업국가였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는 노동자평의회와 소비에트를 창출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 것인지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쉬웠다. 우리가 공장을 접수하고 붉은 깃발을 내거는 것, 그것이 혁명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대부분의 공장들이 문을 닫았고, 공장에서 늘 일했던 사람들이 피자를 배달하고 맥도널드 가게에서 일하며, (최근까지는) 부동산시장에서 주택을 팔면서 일하고 있다.
따라서 물론 세계적인 규모에서는 여전히 미국, 영국, 그리고 서유럽과 같은 나라들을 제외하고는 공산주의로 이행할 수 있는 생산이 존재한다. 필자가 생각하건대, 아마도 어느 정도까지는 일본과 한국에서 일상적인 자본주의적 생산 형태들을 제치고 실제적인 노동계급 혁명이 경제를 가지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제시하는 것이 특별히 필요하다.
우리는 은행, 보험회사, 실제 부동산 회사에서 노동자평의회와 소비에트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또 다른 불필요하거나 사회적으로 즉각적으로 해로운(예컨대 무기생산) 경제 영역들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러한 활동들을 폐지하고자 한다.
우리는 그러한 불필요하거나 해로운 경제 영역들의 덫에 걸린 모든 노동력과 모든 노동자들을 얻어서 그들이 노동시간을 훨씬 더 단축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 부 전체를 고갈시키는 이러한 장애물들 없이 높은 생산성과 높은 물질적인 생활수준을 전반적으로 수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
미국 자동차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1973년에 미국의 산업지역인 북동 지역에는 75만 명의 자동차 노동자들이 있었다.
지난 35년 동안 그 노동력은 상당한 폭으로 감소했고 그 결과 오늘날 예를 들어서 UAW에서는 자동차 노동자들이 50만 명밖에 남지 않았고 곧 그 숫자도 훨씬 더 작아질 것이다.
현재 포드자동차는 심각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고 GM도 심각한 경제적 곤란을 겪고 있어서 그들은 남아있는 나머지 노동자들과 함께 가장 가능한 해결방안을 가지고 협상을 하려고 하고 있다.
지금, GM과 크라이슬러를 합병할 가능성도 있다.
동시에 미국, 특히 남부에는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자동차공장이 여전히 많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들 대부분은 외국―일본, 한국, 독일, 프랑스―이 소유하고 있는 자동차공장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장들은 필자가 아는 한도에서 노동자계급 투쟁의 전통이 없고 공장 내부에 노동자의 전투성이 아주 희박한, 아주 고립되고 세심하게 선별된 조그만 마을에 세워져 있다.
혁명적 관점에서 그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그것은 40년 전만 해도 예전처럼 자동차 생산을 계속한다는 생각이 혁명적인 프로그램의 일부분이 아니었다는 것을 뜻한다.
실제의 혁명적 프로그램은 자동차 중심의 전체 사회 조직으로부터 거대한 자원이 손실되는 쇠퇴와는 다른 종류의 수송, 다른 종류의 도시들, 석유의 또 다른 사용방식들을 가리킬 수 있다. 40년 전만 해도 혁명적인 프로그램은 더 많은 자동차를 생산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산의 성격 전체를 바꾸어서 자동차에 대한 사회적 의존도가 줄어들고 대량수송과 같은 또 다른 종류의 수송방식이 차를 대체해서 도시가 다른 방식으로 조직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회적인 틀 안에서 쇠퇴하지 않은 물질적 생산이다. 그리하여 혁명적인 프로그램은 더 많은 차를 위한 노동자들의 통제, 노동자평의회, 소비에트가 아니라(다른 곳에서는 그러한 제도가 중요하겠지만) 서로 다른 종류의 작업 전체, 서로 다른 종류의 생산 전체를 위한 것이 될 것이다.
이것이 프로그램과 필자가 이 시스템의 쇠퇴로 보는 것의 연결고리에 관한 문제에 대해 답변한 모든 것이다. 그것은 쇠퇴한 자본주의의 외양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는 일종의 추상적 모델이다.
필자는 세계경제에서 가공자본을 탐구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발견적’(heuristic) 도구를 사용할 것을 제안한다. 세계의 생산을 성공적인 시계 노동계급 혁명 후에 세계 소비에트의 우월한 관점에서 세계 생산을 상상하기. 물론 이것은 성급하고 어느 정도 유토피아적인 사고이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세계 혁명이 그러한 추상을 구체적으로 만들 때까지 프로그램과 상호 작용하는 일종의 필요한 추상이다. 그것은 자본이 “실제로 무엇인가”라는 것을 분리시켜내기 위해 천 개의 외양으로부터 추상해내는 맑스의 자본론 1, 2 권과 다르지 않다. 그리고 그것은 자본론 2권의 끝 부분과 3권에서 그 추상을, 작동하는 것이 눈에 보이는 시스템에 더 가까운 일상적인 현실 속으로 집어넣는 것이다.
필자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지배적인 투쟁 방식이 기울고 오늘날 그러한 투쟁이 상대적으로 부재하는 주된 이유가 내기(stakes)의 지구화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전체의 수준에서 볼 때 의미있는 개혁주의란 것은 없다(일시적으로 승리할 수 있는 특정 지역의 방어적인 투쟁과 대조적으로). ‘개혁’이란 단어가 이제는 반동 자체의 슬로건인 이유는 거기에 있다. 맑스가 1844년에 “프랑스에서는 모든 것이 되기 위해 어떤 것이 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듯이 오늘날 어떤 것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되어야 한다.
다음 이야기들은 사회의 확장된 물질적 재생산을 위한 프로그램의 요체 이상을 제공해주지 못한다. 실제로 공산주의적인 사회의 본질이 될, ‘인간의 능력’(power)을 그 자체 목적으로 발전시키는 것’, 훨씬 더 근본적이지는 않지만 똑같이 근본적인 삶의 변형을 논의할 필요는 없다.
노동계급 혁명의 낡은 ‘상상력’은 총파업이나 대중파업, 공장 점거, 노동자 평의회 및 소비에트의 수립, 자본가계급의 정치적 전복, 그리고 직접적이고 민주적인 사회화된 생산의 경영이었다. 이러한 ‘상상력’은 러시아, 독일, 스페인, 헝가리 혁명의 경험에 바탕을 둔 것이었고 1950년대부터 미국, 영국, 프랑스의 살쾡이 파업, 1968년 프랑스 5-6월 총파업, 1969-1973년 이탈리아 노동자 반란, 1970년대 중반 ‘이행기’에 포르투갈과 스페인의 노동자 반란, 아르헨티나의 코르도바조(Cordobazo, 1969), 1973년 칠레의 친소비에트적 ‘코르도네 코뮨’(cordones-communales, 1978-1982년 브라질의 중화학공업 파업 때문에 활성화된 것) 등이 있다.
필자는 이러한 모델이 적어도 서구에서는(중국, 베트남과 달리) 당대의 현실과 연결 고리가 끊어졌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본 집중적인 기술 발전, 다운사이징과 아웃소싱이 ‘즉각적 생산과정’(?자본론? 1권의 자본주의 현실)을 총노동력 중에서 상대적으로 작은 부분(총인구는 말할 필요도 없지만)으로 축소시켰고, 남아있는 생산노동자들조차도 종종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 안에 존재하지 않을 것들(병기 등)을 만드는 데 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훨씬 더 동시대적인 작업장들은 ‘노동자 통제’에 놓이기보다는 성공적인 혁명에 의해 폐지될 것이다.
필자가 말한 것처럼 발견법적 도구는 단순하지만 유용하다.
세계적 규모에서 자본주의적 인구(임노동자와 자본가)의 일부인 생산노동자의 총 숫자는 전지구적 총 ‘산출량’이 증가해오는 동안 줄어들어 왔다. (이것은 중국과 인도의 출현에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1997년 이후 중국은 2천만 개 이상의 산업 일자리를 잃었고 인도에서 노동자들은 총 노동력의 10%에 훨씬 미치지 못하고 그나마도 압도적으로 지방에서 일한다. 어느 경우든 문제는 단순한 양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가치법칙의 의미에서 세계 총 노동력의 총 ‘가치’이다. 중국에서 훨씬 덜 버는 노동자나 인도의 하이테크 노동자들은 서구의 고임금 노동자들을 계산에서 제거한다. 그들을 세계 시장으로 통합시키는 관건은 맑스주의자들이 가변자본, 총 임금액이라고 부르는 “V”를 감축하는 것이다.)
그러한 소비에트의 첫 번째 과제는 가치 생산으로부터 나오는 글로벌한 이행기를 조직하는 것이다(맑스의 가치라는 의미에서). 세계 혁명은 아마도 V(가변자본)에 대한 C(불변 자본)의 비율,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이미 매우 높고 가치가 이미 쓸모없다는 것을 의미할 때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치의 기초는 무엇인가? 그것은 제1부문과 제2부문의 기존 생산적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사회적 비용이다. 혁명은 생산과 재생산을 가치 형태로부터 진정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지구적인 수준으로 생산력을 발전시키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그러한 이행을 촉발시키기 위해 기존 노동력과 생산수단이라는 관점에서 세계적으로 가용할 수 있는 총 자원을 기본적으로 파악하는 일이다. 오늘날 용어로 말하자면 세계 사회를 재생산하는 비용이 ‘가공자본’의 척도의 ‘토대’이다. 필자는 최소한의 ‘첫 100일 프로그램’을 제시하고자 한다.
Ⅰ. 달러 기준의 폐지, 즉 세계경제의 ‘조직된 디플레이션’(여하튼 위기는 무정부주의적으로 우리를 위해 아주 멋진 일을 하고 있다)
Ⅱ. 사회적으로 불필요하고 해로운 모든 노동의 폐지
Ⅲ. 제2부문에 의해 자유로워진 수백만 노동자들의 도움을 빈 노동일 단축
Ⅳ. 세계 인구를 받아들일 만한 세계적 생활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한 지구적 팽창
Ⅴ. 자동차/강철/석유 경제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이행기 마련, 그 경제에 의해 생산된 도시/교외/시골 스프롤(평면 확장) 제거
시안적인 몇 가지 의견
앞에서 말한 틀 안에서 더 자세한 내용을 담은 프로그램의 내용 몇 가지가 더 있다. 이 승리에 찬 세계 소비에트에게는 매우 암시적인 것이다. 그 내용들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파산 절차인 ‘11장’에 해당한다.
자본의 파괴 일부로서 가공자본을 파괴할 때(맑스가 ‘자본관계’라고 부른 사회적 ‘관계’), 우리는 사용가치의 관점에서 기존의 총 생산수단과 노동력이라는 ‘재고목록’을 만들기 위해 ‘지구적 정산 기준’이나 ‘세계 자원 정산’을 부과한다(목적은 모든 생산이 교환의 필요성을 넘어가게 해서, 사회적 ‘척도’가 가격에서도 노동시간에서도 나타나지 않고 생산된 실제 재화와 서비스의 사용가치 항목 안에 엄격하게 존재하게 하는 것이다.)
1) 제3세계를 상향 평등화하기 위해 기술 수출 프로그램 실행
2) 세계 소득의 최소한도의 발판 창출
3) 석유-자동차-강철 콤플렉스 해체, 대중 수송과 기차로 이행
4) 군대, 경찰, 국가 관료주의, 기업 관료주의, 감옥, FIRE(금융-보험-부동산), 안전수비대, 지능서비스 등 부풀어진 부문 폐지
5) V에 의해 자유로워진 노동력이 사회적으로 유용한 일을 수행하여 노동시간을 더 단축시키게 한다
6) 에너지―핵융합발전, 태양, 풍력 등―를 둘러싼 프로그램 붕괴
7) ‘더 많은 것이 더 적은’ 원리를 가능한 한 많은 것에 적용(예: 제3세계에서 위성전화가 육로 기술을 초월하고 싼 CD가 비싼 스테레오 시스템을 앞지른다 등)
8) 미국, 캐나다, 유럽의 식량자원을 사용하고 제3세계 농업을 개발하는 것이 목표인 협동에 의한 세계 농업프로그램
9) 산업생산과 농업생산의 통합, 대도시 인구 집중 해체. 이것은 교외와 시골의 폐지, 도시의 급진적인 변형을 뜻한다. 이것이 에너지 소비에 대해 갖는 함의는 매우 깊다. 도시와 시골의 모순을 공산주의 메니페스토에 진지하게 담고 프로그램을 통하여 통합 시도를 할 때이다
10) 자동화될 수 있는 있는 온갖 힘든 일은 모두 자동화
11) 노동계급이 지구적이고 지역적인 계획에 참여하도록 컴퓨터와 교육에 모두 접근할 수 있게 한다
12) 돈 걱정 없는 건강과 치료
13) 교육과 생산을 통합하여 교육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이념 자체를 다시 만들기
14) 현재 비생산적인 부문에 연결되어 있는 R+D를 생산적 이용 부문으로 이동시키기
15) 가능한 한 기본적인 무료 재화가 많도록 노동생산성을 크게 증가시켜 돈 모으기와 회계에 연관된 모든 노동자들(계산원 등)을 자유롭게 하기
16) 지구적 차원에서 작업 주(노동시간?) 단축
17) 집중화될 수 있는 것은 모두 집중화시키고(세계 자원의 사용) 탈집중화될 수 있는 것은 모두 탈집중화시킨다(노동과정을 일반적 틀 안에서 통제하기)
18) 기후를 다루는 조치들, 아주 중요한 것은 화석연료 사용으로부터 단계적으로 벗어나기
결론적으로 다시 한번 말하지만 노동계급이 바로 상당 부분을 실행에 옮길 수 있는 이러한 기본 프로그램의 유용성은 적어도 2차대전 이후 허구적 발전이 심각하게 왜곡되어 있는 외양을 뚫고 들어가 잘라버리는 데 있다. 그것은 ‘조직의 형태’(당, 계급, 평의회, 소비에트)에 대한 추상적인 논쟁을 잘라버린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우리는 금융, 보험, 부동산에서 소비에트와 노동자 평의회를 원하지 않으며 시스템이 자본주의적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많은 다른 부문들을 폐지하기를 원한다.
8. 되돌아보기: 1917-1921년 이후 세계 노동계급에게 가장 거대한 장이 열리고 있다
자본가계급의 끝모를 혼란을 표현하는 이번 위기는 반자본주의 급진 좌파에게 1차대전 이후 세계 노동자계급 반란의 패배 이후 가장 거대한 서장을 제공하고 있다. 1차대전 이후 당시는 미국이 날개를 달고 지배하기 시작하던, 영국 세계 지배의 세기였고 비틀거리고 있던 자본주의적 축적 국면이었다. 오늘날은 미국이 세계를 지배하는 시대이고 조금만 애쓰면 잡히는 ‘워싱턴 컨센서스’로 대표되는 30년 쇠락의 시기이다. 앞선 분석에서도 암시했지만 매우 중대한 사실은 날개를 달고 기다리며 미국을 계승할 어떤 권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실’ 때문에 세계 자본의 재조직과 새로운 노동계급의 가능한 ‘하늘의 폭풍’을 위한 투쟁의 장이 활짝 열린다. 1929년 이후 최대의 자본주의 위기가 1919년 이래의 최대 노동자계급 반란을 준비시켜줄 수도 있을 것이다. 1914년과 1945년 사이의 노동 계급의 연이은 패배가 새로운 아메리카 시대를 확고하게 하는 데 필요했다. 그러나 곧 다가올 시대는 자본주의의 패를 다시 섞는 유사한 전투를 보게 될 것이고 ‘도둑들의 사이가 갈라지는’ 이 새로운 상황 속에서 가능한 혁명적 돌파구가 나타날 수 있다.
2007-2008년의 ‘금융위기’가 단순히 깊은 세계 ‘경기침체’로 끝나든 공공연한 불경기로 끝나든 간에 관계없이 30년 동안의 이데올로기적인 짐은 며칠이 아니라 몇 달 사이에 배 바깥으로 던져졌다. 그와 동시에 이전 시대의 노동자계급을 통제하던 이데올로기적인 짐―사민주의, 스탈린주의, 케인스주의―이 그 전에 그것을 지탱해 주었던 폭넓은 사회조직들(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와 노동당 혹은 미국 민주주의자들, 노조 등) 안에서 엄청나게 약해졌다. 1921년까지 러시아와 독일 혁명, 12개 다른 나라에서의 대중파업과 폭동이 패배했을 때 자본주의적 국가주의는 스탈린주의, 파시즘 그리고 뉴딜 안에서 그것을 앞지르는 거대한 미래를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해결책들’은 모든 실제적 역사적 해결책들처럼 어둠 속을 더듬는 수많은 세월, 열망하는 자들 사이에서 권력을 서로 쥐려고 하는 분파적 전투들을 필요로 하였고 마침내(필자가 주장했듯이) 1945년 이후 회복의 분명한 개요를 만들어내기 위한 2차대전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들은 더 나아가 1차대전 전 수십 년 동안 발전해오고 있었던 이데올로기들과 제도들(무엇보다도 세계사회주의운동) 위에 세워졌다.
오늘날 그와 반대로 우리는 그 자신의 신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무장해제당한 채 순간적으로 케인스주의에 의지하고, 붕괴를 막기 위해 은행시스템에 몇 조 달러를 쏟아 부으며, 70년 전부터 비상조치를 통해 밀고 왔던 잊어버렸던 법칙들과 권력들의 먼지를 털어내는 서구 부르주아지의 모습을 보고 있다. 우리는 결코 이것의 종말을 본 적이 없다. 지난 10년 동안 중도 좌파의 인물들―폴 크루그먼, 조지 소로스, 제프리 삭스, 조세프 스티글리츠―이 나타나 새롭게 개혁한 자본주의의 건축가 준비를 하고 있다. 11월 중순 ‘G20’(G8을 확장시킨)은 워싱턴에서 만나 ‘새로운 브레튼우즈’ 논의를 시작할 것이다. 우리는 그 회의가 고도로 강요된 많은 무장해제만큼이나 희미하게 기억될 것이고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경제회의가 오늘날 기억되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다. 수년 이상을 끌면서 그리고 반복적으로 실패로 끝나고 만, 국제 무역에 관한 덜 중요하지만 잠재적으로 그만큼 악의에 찬 도하라운드(Doha Round)가 보여주었던 것처럼 회의석상에서 그런 문제는 결코 평화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우리는 미국이 현저할 정도로 달러의 강등을 인정하고 자국의 130조 달러에 이르는 외채를 의미있게 해결하거나 IMF와 세계은행의 통제 지분을 갖는다고 해도 자신의 제국으로서의 특권을 한 치도 조용하게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해도 좋을 것이다. 혹은 그것에 실패하더라도 미국이 하는 양보는 어떠한 것도 면피용일 것이다. 세계자본주의를 재편하는 중도좌파 후보자들에 덧붙여서 우리는 종종 온화한 좌파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프로그램을 갖고 있고 (부르주아) 민주주의의 방어라는 명분으로 폭동의 잠재력에 겁을 주는 권위주의적인 우파가 재출현할 수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미구에 국제적 대결과 계급투쟁으로 나타나게 될 회의의 실제 문제들은 아무리 작다고 해도 경제적 쇠퇴와 아시아, 무엇보다도 (무엇보다도) 경제력이 증가하는 동아시아의 힘을 반영하는 미국의 강등 문제가 될 것이다. 아시아는 1960년대에 세계 GDP의 5%를 차지하고 있었다. (‘GDP’라고 하는 기만적이고 이데올로기적 내용은 잠시 괄호 안에 넣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어쨌든 아시아의 자본가들은 그러한 변화에 대한 제도적인 인정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번과 미래의 회의에 있어서 진정한 문제는 앞에서 밝힌 프로그램의 실행을 정확하게 방해할 것이다. 의식적이든 혹은 무의식적이든 미래의 확장된 인간 재생산에 대해 노회한 가치(맑스적인 의미에서)는 진정한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 될 것이다. 노동자계급의 폭동과 국제적인 대결(1936-1939년의 스페인 혁명에서는 이 두 개가 교차되었다) 이전, 이후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난 동안 이루어진 이번, 그리고 미래의 회의는 세계 시스템을 어떻게 재편할 것인가 하는 회의가 될 것이고 새로운 선수에게 새로운 손을 나눠주고 세계 노동자계급에게 새로운 ‘노동관계’ 시스템을 강제하는 회의가 될 것이다. 시스템이 1960년대 후반 이후에 평형상태를 찾지 못한 채 (이전에 주장된 것처럼) 발작적으로 움직여왔듯이 글로벌 자본을 위한 적절한 이윤율의 기초가 되도록, 축적을 강제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될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세계자본주의적인 계급이 우리를 희생하더라도 이러한 재편과정에서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이다. 여기가 로두스다, 여기서 뛰어라! 여기에 장미가 있다. 여기서 춤을 추자. 동지들, 우리가 실패한다면 우리 생애에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서장을 역사는 우리에게 제공해 주었다. 90년 전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이렇게 말했다, “혁명은 말한다. 나는 있었다. 나는 있다. 나는 있을 것이다.” 그 미래를 만들 것인가, 파괴할 것인가는 우리의 몫이다.”
번역: 이득재 | 대구 가톨릭대, 노문학/문화이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