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 관찰
구조1
이스라엘史(족보, 1:1-9:34) 사울왕의 계보와 죽음(9:35-44) : 사 울 통일왕국1(10:1-29:30) : 다 윗
구조2 Ⅰ. 족보이야기(1:1-9:44) 아담에서 야곱까지(1:1-54) 야곱에서 포로기까지(2:1-3:24) 야곱의 열 두 아들들(4:1-8:40) 포로귀환 이후(9:1-34) 사 울(9:35-44) Ⅱ. 다윗이야기(10:1-29:30) 다윗이 왕이 되다(10:1-12:40)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다(13:1-16:43) 승리와 실패의 이중주(17:1-21:30) 성전건축을 준비하다(22:1-27:34) 죽음으로 가는 길(28:1-29:30)
다윗 왕국사(王國史) “네가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가 되리라.”(11:2b)
아담에서 아브라함과 다윗까지의 역사가 흐른다. 물론 이를 포로기에 회고하는 형식으로 말이다(5:25-26, 9:1-2). 여기에는 역대기 기자의 신학적 의도가 있음에 틀림없다. 그는 무엇을 이야기 하고자 했을까. 참으로 장구한 세월을 족보로 간단하게 정리해 버리고서(1-9장), 그리고 먼저 다윗을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 우뚝 세워놓는 목적은 무엇일까.
다윗이 보통 B.C. 1010년 쯤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남왕국이 B.C. 586에 바벨론에 포로가 되어 나라가 멸망을 하고, 그리고 역대하 36장에 기록된 [고레스 칙령](22-23, 스1:1-4)으로 볼 때 아마도 주전(主前) 5C 중엽에 포로 귀환을 전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상으로 한 메시지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아담에서부터 포로귀환을 전후한 때까지 줄잡아 3,500여 년의 역사를 통해 역대기 기자가 말하고자 한 메시지는 결국 무엇이었을까. 이것이 역대상 앞에 서서 던지는 질문이다. 역대기는 이 질문에 대해 성실한 대답을 해 줄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실 대답 앞에 묵상의 창을 연다.
Ⅰ. 족보이야기(1:1-9:44)
아담에서 이스라엘까지(1:1-54) 이스라엘의 자손들(2:1-9:44) A 이스라엘의 12 아들들(2:1-2) B 유다의 자손들(2:3-4:23) C 시므온과 요단 동편 지파(4:24-5:26) D 레위(6:1-81) C' 요단 서편 지파(7:1-40) B' 베냐민의 자손들(8:1-40) A' 出포로기의 이스라엘의 아들들(9:1-34)
이스라엘 역사의 서론, 어떻게 쓸 것인가? 죄록(罪錄)으로 물든 인간의 역사를 하나님은 변치 않는 애록(愛錄)으로 바꾸어 가신다. 그 사이사이에 빛나는 신앙의 거장들로 서 있는 사람들 때문이 아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당신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들로 인해 이 역사의 호흡을 끊으셨다면 저들의 언행(言行)은 피어나지도 못하고 이슬처럼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족보)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비록 죄를 심어 그 열매를 거두는 것으로 밖에 주어진 삶의 끈을 붙들 수 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역사였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심판의 땅(밭)에도 생명과 은혜의 씨앗을 심으사 당신의 영광을 거두시는 그야말로 오래 참는 인고의 역사를 품고 오셨다.
포로기라고 다를 바 없다. 이것이 포로기를 살아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깨달아야 할 하나님의 메시지다. 포로기라는 심판은 더 나은 관계와 삶으로 나아가는 일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였다. 그렇다면 이것 역시 또 다른 이름의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 이것이 심판의 언덕을 밟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취해야 할 마땅한 자세다.
굵직한 삶을 살았던 족보의 사람들은 바로 이 비밀을 알았다. 심판의 거센 파도 속에서도 결코 낙심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서 있는 자리를 하나님으로 다시 채워갔다. 이것이 죄악과 심판의 땅에 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꽃이자 열매다. 저들이라고 엉망진창으로 소일했던 사람들과 다른 환경이 아니었다.
모두가 다 아담에서 포로기 사이를 살았다. 그런데 누구는 이 쓰라린 고통의 세월 안에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치열하게 승부하며 살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난과 시련이라는 파도에 그만 자신을 송두리째 맡겨버리고서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 인생으로 살았다. 놀라운 것은 모두가 다 동일한 환경과 여건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족보에 복된 이름으로 자신(가문)을 올렸느냐 그렇지 못했느냐는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이다. 결코 핑계할 수 없다.
1. 아담에서 이스라엘까지(1:1-54)
1.1. 아담에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까지(1-23)
1.2. 셈에서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들까지(24-54) 셈의 자손들(24-27) 아브라함의 자손들(28-37) 이삭(34a) 에서(34b-37) 세일의 아들들(38-42) 에돔의 통치자들(43-54)
2. 이스라엘의 자손들1 : ①유다(2:1-4:23)
A 이스라엘과 유다의 아들들(2:1-8) B 헤스론에서 다윗까지(2:9-17) C 갈렙과 여라므엘의 자손들(2:18-55, 4:1-7) B' 다윗의 자손들(3:1-24) A' 기타 유다지파 자손들(4:8-23)
2.1. 이스라엘과 유다의 아들들(2:1-8) 이스라엘의 12 아들은 “에서의 아들들(1:35-37)과 세일과 에돔에 관한 관련된 정보(1:38-54)를 확장하여 다루는 것 때문에 분리되었던, 1:34과 연결된다. 이스라엘의 아들들에게서, 저자는 그의 관심의 주된 항목에 도달하는데, 그것이 2-9장의 나머지 족보 자료와 이 작품 나머지 전체를 차지한다.”
2.2. 헤스론에서 다윗까지(2:9-17) 헤스론 - 람(여라므엘/람/글루배[갈렙]) - 암미나답 - 나손 - 살마 - 보아스 오벳 - 이새 - 다윗(엘리압/아비나답/시므아/느다넬/랏대/오셈/다윗)
2.3. 갈렙과 여라므엘의 자손들(2:18-55, 4:1-7) 갈렙의 자손들(2:18-24, 42-55, 4:1-7) 여라므엘의 자손들(2:25-41) 갈렙(글루배, 9,18,42)은 첫 아내 아수아가 죽은 후에 에브랏(에브라다, 19,50)과 결혼하여 훌(19)과 아스훌(19)을 낳았고, 이들의 자손이 각각 훌(2:50-55, 4:1-4)을 통해, 그리고 아스훌(4:5-7)을 통해 각각 이어지고 있다.
2.4. 다윗의 자손들(3:1-24) 다윗의 아들들(1-9) 헤브론에서 낳은 자(1-4) - 압논/다니엘/압살롬/아도니야/스바댜/이드르암 예루살렘에서 낳은 아들들(5-9) - 시므아/소밥/나단/솔로몬/입할... 솔로몬의 자손들(10-16) 르호보암 - 아비야 - 아사 - 여호사밧 - 요람 - 아하시야 - 요아스 아마샤 - 아사랴(웃시야) - 요담 - 아하스 - 히스기야 - 므낫세 - 아몬 요시야 - 요하난/여호야김/시드기야/살룸(여호와 아스) 여호야김 - 여고냐 - 스알디엘 여고냐의 자손들(17-24) - 포로 후기 시대 스알디엘/말기람/브다야/세닛실/여가먀/호사마/므다뱌 브다야 - 스룹바벨/시므이 스룹바벨 - 므술람/하나냐/슬로밋/하수바/오헬/베레갸/하사댜/유사헤셋 하나냐 - 블라댜/여사야/르바야-오르난-아바댜-스가냐의 아들들 스가냐 - 스마야 - 핫두스/이갈/바리야/느아랴/사밧 느아랴 - 에료에내/히스기야/아스리감 에료에내 - 호다위야/엘리아십/블라야/악굽/요하난/들라야/아나니
2.5. 기타 유다지파 자손들(4:8-23) 그 밖의 유다 자손들(8-16) 에스라의 아들들(17-20) 시몬의 아들들(20) 셀라의 자손들(21-23) 유다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메시야의 족보가 앞서 소개되었다(2:3-17). 그렇다면 이어지는 또 하나의 족보(4:1-23)는 유다지파의 주류(主流)가 아니다. 물론 앞부분(4:1-7, 2:50)은 갈렙 족속의 족보다. 같은 유다의 후손이지만 ‘야곱의 축복’(예언, 기도, 창49:8-12)과 ‘모세의 축복’(신33:7)과는 거리를 두고 이어지는 그리 주목 받지 못한 변방(邊方)의 사람들의 족보다. 바로 이 안에 야베스가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3. 이스라엘의 자손들2(4:24-5:26)
3.1. ②시므온의 자손들(4:24-43) 시므온 족속이 후에 유다 지파에 흡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 자손들처럼 번성하지 못하였다는 점을 들어 저들과 비교하고 있음이 흥미롭다(27, 수15:21, 19:1-9 참조). 아마도 ‘온 이스라엘’(All Israel)에 대한 역대기 기자의 일관된 신학 때문인 듯하다.
3.2. 요단 동편 지파들 : ③르우벤, ④갓, ⑤므낫세 반(5:1-26) 요단 동편 지파들이 소개된다. 르우벤의 후손(1-10), 갓의 후손(11-17), 므낫세 반 지파 자손들(23-24)이 그들인데 이들의 [가나안생활](18-24)이 간략하게 요약되고, 이어 [포로생활](25-26)이 하나의 결론으로 기술된다.
가나안 정복이 끝나고 두 지파 반은 여호수아의 지시를 따라 모세가 약속한 땅에 들어간다(수22:1-9). 그리고 그들은 승승장구(乘勝長驅)한다. 이는 저희가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음”(20b) 때문이다. 하지만 저들은 범죄하고 만다(25). 그리고 그 결과 나라를 잃고 B.C. 722년 앗수르의 포로가 되어 흩어진다(26). 이는 다 하나님의 언약을 버린 불순종의 결과다(레26:14-39, 신28:15-68). 약속의 땅에도 저주의 꽃은 피는가? 무엇이 이스라엘의 축복을 가져오게 하고, 동시에 또 무엇이 이스라엘의 멸망(단절)을 낳게 하는가. 이것이 出포로기 이후 세대(9:1- )가 주목해야 할 메시지의 핵심이다.
4. 이스라엘의 자손들3 : ⑥레위(6:1-81)
레위 지파에 대한 모세의 예언과 그 성취가 눈부시다(창49:5-7). 신실하신 하나님에 비해 이스라엘은 지금 이 모든 은혜를 다 잃어버리고서 포로기를 살고 있다(5:26b). 이것 역시 하나님의 말씀의 성취다(레26:14-39, 신28:15-68). 하나님의 약속은 긍정적으로만이 아닌 부정적으로도 성취된다. 또한 하나님은 죄(罪)의 문제는 결코 적당하게 어물쩍 넘어가지 않으신다.
4.1. 대제사장의 계보(1-15) 레위 - 그핫 - 아므람 - 아론(아론/모세/미리암) 엘르아살(나답/아비후/엘르아살/이다말) - 비느하스 사독(다윗, 삼하8:17) - 아사랴(솔로몬, 10) - 여호사닥(14-15) 야곱의 아들 레위에게는 게르손, 그핫, 므라리 세 아들이 있다. 그 중에 그핫의 자손이 대제사장을 맡았다(1-15). 뿐만 아니라 레위 지파의 계보를 이처럼 비교적 자세하게 소개한 것은 다른 여러 형제들에 비해 레위 지파의 위상이 얼마나 컸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레위의 아들 중 그핫에게서 대제사장 아론의 후손이, 그리고 모세가, 또한 사무엘이 등장하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그야말로 대단한 가문(家門)이다.
4.2. 레위 지파의 계보(음악가, 16-48) 게르손(17,20-21) - 야핫 - 베레갸 - 아삽(39-43, 헤만의 우편) 그핫(18,22-28) - 엘가나 - 사무엘 - 요엘 - 헤만(찬송하는 자, 31-38) 므라리(19,29-30) - 무시 - 기시 - 에단(44-47, 헤만의 좌편) 다른 레위인 형제들(48)
4.3. 아론의 자손들(제사장, 49-53) 엘르아살 - 비느하스 - 아비수아 - 북기 - 웃시 - 스라히야 므라욧 - 아마랴 - 아히둡 - 사독 - 아히마아스 대제사장의 족보(6:1-15)와 다른 점은, 나답과 아비후(민3:4)가 빠졌고, 또 아히마아스에서 중단됨으로써 아사랴에서부터 여호사닥까지의 계보가 역시 생략되어 있다.
4.4. 레위 지파의 거주지(48성읍, 54-81, 민35:6-7, 수21:1-41) 그핫(54-61,66-70) 아론과 갈렙 - 13성 그 밖의 남은 자손 - 10성 게르손(62,71-76) - 13성 므라리(63,77-81) - 12성 레위 지파는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분배받지 못하고 각 지파의 성읍들을 분배받았다(민18:1-32, 35:1-8, 수21:1-42).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 전 지역에 골고루 퍼져 있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레위인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준다.
5. 이스라엘의 자손들4(7:1-8:40)
번성하는 야곱의 아들(후손)들의 족보가 이어진다. 이스라엘은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번성해 갔다. 아브라함과의 언약의 성취인 셈이다. 한편 각 지파들의 번성을 군사력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2,4,5,7,9,11,40). 하지만 이처럼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저들은 퇴락의 길을 걸었고, 마침내 멸망하고 만다. 역대상 기자는 ‘포로기’(5:26)를 살아가면서 지난 과거의 역사를 이처럼 추억하고 있는 이유는 뭘까. 하나님의 모든 것이 없어지고 무력(無力)해졌을 때 저희를 구원하신다. 알 듯 모를 듯 한 것이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생각을 해 본다.
5.1. 요단 서편 6지파(7:1-40) 잇사갈의 아들들(1-5) - 돌라/부아/아숩/시므론 베냐민의 아들들(6-12) - 벨라/베겔/여디아엘 납달리의 아들들(13) - 야시엘/구니/예셀/살룸 므낫세의 아들들(14-19) - 아스리엘/마길/슬로브핫 에브라임의 아들(20-29) 수델라 - 베렛 - 다핫 - 엘르아다 - 다핫 - 사밧 - 수델라 브리아 - 레셉(라바/레셉) - 델라 - 다한 - 라단 - 암미훗 엘리사마 - 눈 - 여호수아 아셀의 아들들(30-40) - 임나/이스와/이스위
5.2. ‘단’ & ‘스불론’ 지파가 없다. “단은 이스라엘의 한 지파같이 그 백성을 심판하리로다.”(창49:16)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창49:13) 단 지파가 몰락(멸문, 단절)의 길에 들어선 이유는 사사기 18장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들은 분배 받은 땅을 정복하는 일에 실패(1)한 것도 모자라, 미가의 집에 가득한 우상과 “모세의 손자 게르손의 아들 요나단과 그 자손”(30)을 가짜 제사장을 세워 실로를 정면으로 배반(거역)한다. 이것은 레위의 아들 그핫에게 맡겨진 제사장의 직무를 마음대로 찬탈한 것이자(6:1-15), 하나님의 성소인 실로를 우습게 여긴 가증한 죄악이다(수22:1-34, 왕상12:25-33 참고).
5.3. 기타 베냐민의 자손들(8:1-40) 게바에 거한 베냐민과 에훗의 아들들(1-7) 베냐민 - 벨라/아스벨/아하라/노하/라바 벨라 - 앗달/게라/아비훗/아비수아/나아만/아호아/게라/스부반/후람 여디아엘 - 빌한 - 여우스/베냐민/에훗/그나아나/세단/다시스/아하사할 에훗(6, 7:10)* - 나아만/아히야/게라/웃사/아히훗 모압, 오노, 롯에 거한 사하라임의 아들들(8-12) 아얄론, 가드, 예루살렘에 거한 베냐민 사람들(13-28) 기브온에 거한 베냐민 사람들, 사울의 족보(29-40) 넬 - 기스 - 사울 - 요나단/말기수아/아비나답/에스바알(33)** 요나단 - 므립바알(34)*** - 미가 - 비돈/멜렉/다레아/아하스 아하스 - 여호앗다 - 알레멧/아스마웻/시므리 시므리 - 모사 - 비느아 - 라바 - 엘르아사 - 아셀 아셀 - 아스리감/보그루/이스마엘/스아랴/오바댜/하난 (참조 - *삿3:15 / **삼하4:7-8 / ***삼상20:15, 삼하9:6) 베냐민 지파에 대한 족보가 두 번 기록되어 있다(7:6-12). 앞서 유다 지파가 그랬다(2:3-55, 4:1-23). 두 지파는 왕(王)을 배출한 명가(名家)이다(2:15, 4:33). 그리고 두 왕가(王家)의 계보가 다시 이어지고 있는 것 역시 흥미롭다(3:1-9, 9:35-44). 한편 베냐민 지파는 다윗왕가(남왕국 유다)에 끝까지 속함으로써 유다 지파와 한 길을 걸었다. 이렇듯 역대기 기자는 그 초점을 다윗가에 맞추고서, 바로 이 창(窓)을 통해 이스라엘을 바라보고 있고 또 바라보게 한다.
6. 예루살렘의 거주자들(9:1-44)
북왕국 이스라엘(5:25-26)에 이어 남왕국 유다(1)까지 멸망하고 만다. 역대기는 이렇듯 포로기라는 앵글을 통해 이스라엘의 역사를 다시 조망하는 방식을 취한다. 찬란했던 다윗왕조의 역사(대상10:13-대하36:21)는 멸망으로 그 끝을 고한다. 아브라함과 다윗으로 이어지는 역사의 종점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있었다. 즉, 율법과 성전, 제사장과 선지자와 왕 등 하나님을 통해 모든 것을 다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범죄하였고, 그 결과 나라의 문을 닫게 된다(1, 5:25-26).
영광스러운 열왕의 역사가 포로기로 끝장이 나버렸다. 북왕국 이스라엘도 그렇고(5:25-26), 남왕국 유다도 마찬가지다(9: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왕국의 역사를 이처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처럼 범죄(犯罪)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나님은 다시 저희를 회복시키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둘(포로와 귀환)을 낳았고, 그 사이에 또 무엇이 들어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이스라엘이 놓치지 않고 붙들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
바로 이 자리에서 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한다. 잠시 밝히는 듯하다가 추락한 사울왕가의 역사(9:35-10:14)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이 늘 기억해야 할 하나님의 경고의 나팔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놓고 볼 때 저들 역시 사울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저들로 하여금 다시 고토(故土)로 돌아오도록 은혜를 베푸신다(2). 이스라엘은 죄를 통해 역사(족보)를 단절하게 만들지만 하나님은 은혜를 통해 족보(역사)를 연속되게 하신다. 이것이 9장을 비추는 빛이다.
6.1. 出포로기 사람들(1-34)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들(1-2) 12지파(1-9) 제사장(10-13) 여다야/여호야립/야긴 아사랴/아다야/마아새 레위인(14-34) 므라리 자손 : 유사와 재판관(14-16) 그핫 자손 : 성전 문지기(17-27, 6:22) 성전 기구 관리(28-32) : 추가적 직무들 찬송하는 자(33-34) B.C. 586년 남왕국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멸망을 한다(1,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이로써 일단 이스라엘은 문을 닫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하나님은 저들을 다시 돌아오게 하신다(2_“그 본성으로 돌아와서 그 기업에 거한 자는”, 3_“예루살렘에 거한 자는”).
본문은 이때 돌아온 자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9:1-2, 대하36:22-23). 여기까지가 역대기가 말하고자 하는 연대(年代)다. 그러니까 아담에서부터 통일왕국(사울-다윗-솔로몬, 대상1:1-대하9:31)을 지나, 분열왕국으로(대하10:1-36:10), 그리고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5:25-26)과 남왕국 유다의 멸망(1, 대하36:11-21)까지가 역대기가 그리고자 한 역사다.
무엇이 한 나라의 흥망성쇠(興亡盛衰)의 이유인가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저들을 다시 용서하시고 나라를 회복케 하심을 역대기 독자들로 하여금 깨닫게 되기를 기대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다윗과 솔로몬과 남왕국 유다의 역사, 그리고 파란만장(波瀾萬丈)했던 포로기를 살다가 귀환한 후손(대하36:22-23 → 대상9:1-34), 그러니까 살아있는 자들(9장의 사람들)이 이미 죽은 자들의 역사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역대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다시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고자 한다(대상9:35-대하36:21).
특별히 레위인들(14-34)의 귀환은 예루살렘 성전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하다. 유사와 재판관들(14-16)을 시작으로 성전 문지기들(17-27, 6:22), 성전 기구 관리들(28-32), 찬송하는 자들(33-34)을 중심으로 이제 다시 예루살렘 성전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회복이라고 할 수 있는 영적(靈的) 회복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역대기 기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다.
6.2. 사울가의 족보(9:35-44, 8:29-40) 기브온, 예루살렘에 거한 베냐민 지파(35-38) 사울의 족보(39-40) 여이엘 - 압돈/술/기스/바알/넬/나답/그돌/아히오/스가랴/미글롯 넬 - 기스 - 사울 - 요나단/말기수아/아비나답/에스바알(삼하4:7-8) 요나단 - 므립바알(삼상20:15, 삼하9:6) - 미가 사울의 일생은 사무엘상 9-15장에, 그리고 다윗의 이야기 안에 28장까지 등장한다. 그는 기스가 아들이요 준수한 소년이었다(9:1). 사무엘이 그를 찾아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9:20)라 부를 때 “나는 이스라엘 지파의 가장 작은 지파 베냐민 사람이 아니오며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9:21)라고 고백한다.
이처럼 겸손한 그의 머리에 기름이 부어지지만(10:1), 불과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년에”(13:1) 망령된 제사를 드리게 되고, 하나님의 눈에서 멀어지고 만다(13:13-14). 준수한 소년에서 겸손한 왕으로 시작했으나 그는 2년 만에 추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아말렉의 모든 소유를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음에도 “사울과 백성이 …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15:9)였고, 급기야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고 만다(15:11a).
Ⅱ. 다윗이야기(10:1-29:30)
A 다윗이야기(11:1-12:40) B 다윗과 언약궤1(13:1-14) A' 다윗왕국사(14:1-17) B' 다윗과 언약궤2(15:1-16:40)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긍정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다룬다. 다윗은 준비하고 솔로몬은 시종일관(始終一貫) 성전과 관련되어 등장한다. 다윗(10-21장)과 솔로몬(역대하 1-9장)이 통일왕조를 다루면서 그 사이에 연결고리(22-29장)로서 부자(父子)가 만나는 중요한 접촉점이 바로 성전이다. 여기에 제사장과 레위인을 언급하는 것 역시 자연스럽다. 다윗은 성전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으로, 그리고 솔로몬으로 하여금 성전을 건축하게 하는 일에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살았다. 이렇듯 역대상은 성전을 이스라엘 무대의 중앙에 우뚝 세운다.
1. 다윗이 왕이 되다(10:1-12:40).
1.1. 사울왕가의 추락(10:1-14)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하였음이라.”(13- ) 사울에서 다윗으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흐른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사이에는 블레셋이라는 이방의 세력이 자리한다(10:1). 블레셋은 함의 손자 가슬루힘의 후손이다(창10:14). 블레셋에는 5개의 주요 성읍(가드, 가사, 아스겔론, 아스돗, 에그론)이 있었다. 사울은 그들을 쫓아냈지만(사무엘상 14장), 그들은 계속해서 공격해 왔고(사무엘상 17-18장), 결국은 그들의 손에 죽게 된다(사무엘상 31장).
결국 사울과 그 일가는 블레셋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하나님은 블레셋을 들어 사울을 치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택하심을 받은 믿음의 사람들이 타락하여 하나님께 범죄할 때, 그리하여 전혀 회생이 불가능할 때 그루터기만 남기시고 나무를 잘라 버리신다. 이것이 사울의 가문이 기록한 마지막 모습이다.
1.2. 다윗이야기(11:1-12:40)
1.2.1. 다윗의 즉위와 예루살렘성 건축(11:1-9) 소년 목동이었을 때 다윗은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는다(삼상16:1-11).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골리앗과의 싸움, 사울의 끝없는 견제와 시기(삼상19:1-18), 결혼(삼상25:2-4), 가드왕 아기스에게로의 망명생활(삼상27:5-7) 등 생사(生死)를 오가는 그야말로 사선(死線)을 넘나드는 세월을 이겨내야 하는 인고의 시간을 말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30세의 나이에 왕으로 즉위하기까지(1-3), 그러니까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은 후 마침내 왕이 되기까지(삼상16:1-11 → 삼하2:4a)의 세월에는 깊은 메시지가 있다. 동시에 역시 중요한 것은 그가 이처럼 승리하며 살 수 있는 힘은 사무엘을 만나기 이전에 준비되었다는 점이다. 먼저 하나님은 이를 놓치지 않으시고 보셨으며, 다윗은 이를 사울과의 치열한 삶을 통해 증명해 보인 것이다. 이것이 다윗의 일생이다.
1.2.2. 다윗의 사람들1(11:10-47) 첫째 삼 인(11-19), 둘째 삼 인(20-25), 군중의 큰 용사들(26-47)이 소개된다. 다윗 곁의 용사들을 하나 둘 떠올려 본다. 하나 같이 충성스럽고 용맹스러운 용사들이다. 자신의 생명을 돌아보지 않고 주군( )인 다윗을 위해 사선(死線)을 넘는 부하들이 있다는 것은 대단한 축복이자 행운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한 둘이 아니고 이름을 다 외울 수 없을 만큼 많다니 얼마나 큰 복인가. 한편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 그것도 다윗의 측근에 이방의 용사들이 섞여있다는 것을 어찌 봐야할지 조금은 난감하다(39,46, 신23:3).
1.2.3. 다윗의 사람들2(12:1-47) 시글락의 용사들(1-22)과 헤브론의 용사들(23-40)이 소개되는데, 다윗이 사울의 핍박을 피하여 블레셋의 시글락에 은신(망명)하고 있을 때에 그를 따르던 사람(지파)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다윗이 헤브론에서 비로소 왕이 될 때에 다윗에게 나아온 12지파가 각각 소개되고 있다. 비록 사울의 동족인 베냐민 지파는 소수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생사고락을 다윗과 함께 하고 있음을 본다(2-3,16,29). 참으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을 것이다. 한편 다윗은 실로 짧지 않은 모진 세월들을 지나면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앞에 참 지도자(왕)로 준비되었다. 마침내 다윗왕조의 화려한 시작은 이렇게 막을 연다.
2.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다(13:1-16:43).
2.1. 다윗과 언약궤1(13:1-14) : 제1차 언약궤 이동 “사울 때에는 우리가 궤 앞에서 묻지 아니하였느니라.”(3b) 다윗처럼 살아도 위기는 찾아온다. 하지만 이것은 잘 해 보자고 하는 일을 통해서 온다. 그래서 복잡하고 혼란스럽다. 선왕(先王) 사울 때에는 하나님의 궤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던 만큼 다윗의 이번 결정은 여러 면에서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3-4). 하지만 무엇 때문에 메어 오고자 하다가 수레에 싣고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지금 뭔가 미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5-7). 목적(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 바르면 그것을 이루는 수단(언약궤의 이동, 민4:4-6,15-20)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해야만 한다. 이 일이 큰 위기에 봉착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2.2. 다윗왕국사(14:1-17) 번성하는 왕실(1-7)과 블레셋대첩(8-17)이 이어진다. 다윗처럼 살아도 위기는 찾아온다. 선왕(先王) 사울 때에는 하나님의 궤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었던 만큼 다윗의 이번 결정은 여러 면에서 큰 의미가 있는 일이다(3-4). 하지만 무엇 때문에 메어 오고자 하다가 수레에 싣고 오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일은 지금 뭔가 미궁으로 흐르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5-7). 목적(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것)이 바르면 그것을 이루는 수단(언약궤의 이동, 민4:4-6,15-20)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준행해야만 한다.
2.3. 다윗과 언약궤2(15:1-24) : 제2차 언약궤 이동 “전에는 너희(레위 자손)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규례대로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13, 민4:5-15, 7:9 참조) 언약궤 운반에 관한 말씀과 그 실행은 그가 이 부분에 대한 율법을 다윗은 몰랐든, 아니면 의도적이든 범하였다(민4:15 → 대상13:1-14, 삼하6:6-7). 하지만 실패 이후의 다윗의 모습은 달랐다(15:1-16:43) :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명한 대로 레위 자손이 채로 하나님의 궤를 꿰어 어깨에 메니라.”(15:15)
다윗은 자신의 죄를 정확하게 진단한다(13). 13장에서의 실수(실패)와 비교해 볼 때 15장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매우 섬세하다. 언약궤를 옮김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려는 모습과 함께, 이를 빈틈없이 준비하는 다윗의 모습을 만난다. 이와같이 말씀은 우리의 죄를 고발한다. 이처럼 말씀과의 만남을 계속해 가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실 다윗은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겨오는 것에만 몰두했지, 언약궤에 대한 하나님의 규례에 대해서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2.3.1.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성으로(15:25-16:6) 마침내 다윗성으로(15:25-29) 감사의 제사(16:1-6) 첫 번의 실패(13장)를 딛고 두번째로 다시 옮기는 일에서 성공하기까지 3개월이 시간이 지났다(13:14). 놀라운 것은 바로 이 기간을 실패를 성공으로 반전시키는 기회로 삼은 점이다. 역시 다윗스러운 대목이다. 마침내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정치와 종교)으로 도약하고 있고, 후에 성전건축으로 절정에 이른다.
2.3.2. 다윗의 노래(16:7-36) 제1악장(8-22) 제2악장(23-33) 제3악장(34-36)
2.3.3. 언약궤와 레위인(16:37-43)
3. 승리와 실패의 이중주(17:1-21:30)
성전을 중심으로 한 긍정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다룬다. 다윗은 준비하고 솔로몬은 시종일관(始終一貫) 성전과 관련되어 등장한다. 다윗(10-21장)과 솔로몬(역대하 1-9장)이 통일왕조를 다루면서 그 사이에 연결고리(22-29장)로서 부자(父子)가 만나는 중요한 접촉점이 바로 성전이다.
다윗언약의 영광스러움과 그 뒤를 이어가는 다윗의 족적(足跡)이 그려가는 쌍곡선([다윗언약, 17:1-27] → [승리, 18:1-20:8] vs. [실패, 21:1-30] → [성전건축 준비, 22-27장]), 이것이 다윗행전을 그려가는 역대기 기자의 신학적 통찰이다.
3.1. 다윗언약과 다윗의 감사기도(17:1-27) 다윗언약(1-15, 사무엘하 7장 참조) 다윗의 감사기도(16-27)
3.2. 승리행전 : 승전과 응전(18:1-20:3) 정복사(18:1-17) - ‘이후에’(1a) 응전과 승전(19:1-20:3) - ‘이후에’(19:1a) A. 응 전 : 암몬과 아람 연합군(19:1-15) B. 승 전(19:16-20:3) -아 람(19:16-19) -암 몬(20:1-3)
3.2.1. 정복사(18:1-17)
3.2.2. 응전과 승전(19:1-20:3) A. 응 전 : 암몬과 아람 연합군(19:1-15) - 다윗은 비록 암몬이지만 저들을 향해 은혜를 말한다(1-2). 여기 ‘은혜’(Hessed)는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인데, 이를 다윗이 지금 암몬에게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암몬왕 나하스의 아들 하눈은 다윗의 은혜를 그만 배은망덕(背恩忘德) 하고 만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아람과 연합군을 조직하여 이스라엘을 처들어 온다. 암몬이 이처럼 다윗의 선(善)을 악(惡)으로 바꾸어 버린 배후에는 방백들이 자리하고 있고, 암몬과 아람 연합군을 무찌른 배후에는 요압과 아비새가 자리하고 있다. 전자의 참모는 실패하고, 후자의 참모는 성공한다.
B. 승 전(19:16-20:3) - 암몬과 아람의 패망은 하나의 필연(必然)이다(19:16-20:3). 멸망할 위기를 피하기 위해 아람은 또 다른 세력을 이 전쟁에 끌어들이지만 저들 역시 실패하게 되어 있는 전쟁에 참여한 불행한 자들이 되고 만다. 또한 암몬 역시 찾아온 휴전(삼하11:2-12:25)이라는 절호의 기회를 통해서도 이 전쟁에 들어있는 보다 더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들을 깨닫는 일에 실패하고, 결국 이스라엘의 속국으로 전락하고 만다.
3.2.3. 블레셋(20:4-8) - ‘이후에’(4a) 물론 블레셋 역시 마찬가지다(20:4-8). 계속되는 전쟁은 저들의 몰락을 부채질할 뿐이었다(11:13-19, 18:1,11). 반대로 다윗왕국은 점점 강성해져 간다. 이 쌍곡선의 비밀이 역대기의 독자들이 읽어내야 할 신학적 통찰이다.
3.3. 실패담 : 심판주의보(21:1-30) 인구조사(1-6) 하나님의 심판(7-17) 사죄의 번제(18-30)
3.3.1. 다윗의 인구조사(1-15) 다윗의 인구조사는 그의 통치 40년 중 말기에 실시된다(삼하24:1-17). 아마도 그는 통치를 마감해야 할 시기가 가까워지자 자신이 이루어 놓은 왕국의 위용을 어떤 식으로든 보고 싶었던 것 같다. 결과적으로 사탄의 시험에 그만 넘어지고 만 것이다(1). 죄는 이렇게 해서 다윗의 생애를 파고든다. 이 일은 약 300일 가량이나 진행되었으나 다윗은 이를 멈추지 않았다(삼하24:8). 하나님은 그만큼의 시간을 기다리시며 기회를 주신 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나님이 구체적으로 간섭해 오시자 다윗은 회개하지만(7-8), 그러나 거기에 대한 분명한 대가를 지불해야만 했다(9-17). 죄(罪)에 따른 벌(罰)은 필연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영원한 형벌이 아니다는 점에서 일단 안심이다(9-12). 하지만 한 사람의 범죄가 용서되기 위해서는 무려 7만명이라는 희생을 치러져야 한다는 점이 소름끼치도록 무섭다(14). 다윗의 범죄와 하나님의 심판 사이에 들어있는 다윗의 고백(8,13,17)에서 그가 어떻게 이 문제를 인식하고 풀어가고 있는가를 엿본다. 역시 다윗은 다윗이다.
3.3.2. 사죄의 번제(18-30) : 눈물은 은혜를 낳고 다윗은 약하지만 하나님은 강하시다. 21장은 인구조사라는 죄목(罪目)에 대한 벌로 인해 7만명의 백성이 죽어나가는 때를 배경으로 한 좀 복잡한 이야기다. 하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절묘하다 아니할 수 없다. 이런 참담한 상황에서도 여부스 사람 오르난의 타작마당에서 뭔가 절묘한 작품을 만드신다. 이스라엘의 영적 현주소를 알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28-30절에 ‘숨은그림’처럼 들어있다. 하나님은 다윗의 죄악이 꽃핀 이스라엘이라는 무대에서 당신을 예배(제사)하고 만나는, 말씀으로 임재하시는 곳, 즉 성전에 대한 새 그림을 그려 가신다.
4. 성전건축을 준비하다(22:1-27:34).
4.1. 성전건축 스타트(22:1-19) 마침내 성전건축의 팡파르가 울려 퍼진다(1). 하지만 이 일은 준비에서부터 시작된다. 다윗은 준비하고(2-5), 솔로몬은 여기에 더 많은 예비(준비)를 더하여 실행한다(14). 그러나 무엇보다 다윗은 솔로몬을 준비시키는 일에 몰두한다(6-16). 성전을 건축하는 일에는 재료가 쓰이지만, 그러나 이를 건축하는 자는 사람이고, 그래서 이방 사람에서 방백(관료)들까지 사람을(2-5,17-19), 그 중에서도 이 일을 가장 앞서 이끌어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솔로몬이다는 점을 알고 있기에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 이처럼 전체를 하나의 그림으로 볼 수 있는 다윗, 참으로 멋지고 훌륭하다 아니할 수 없다.
4.2. 레위 자손과 그 임무(23:1-32) 다윗의 준비에는 몇 가지 깊은 의미가 있다. 먼저, 다윗은 22장에서 성전건축을 위해 물적-인적 자원을 준비한다. 다윗의 치밀하고 섬세한, 그러면서 스케일 큰 모습을 본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외적인 여건(조건, 환경)을 갖추는 것으로 다 했다고 생각하는데 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았다. 드디어 그는 23장부터 ‘사람’을 준비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사람에 있다.
4.3. 제사장 메뉴엘(24:1-31) 레위인과 제사장의 관계를 레위지파의 가계도를 따라 살펴보자. 야곱의 아들 레위에게는 게르손, 그핫, 므라리 세 아들이 있다(23:6). 이들은 공히 레위인으로서 성막과 성전을 위해 일하는 지파지만, 특별히 이들 중에 그핫의 아들 중 아므람의 아들인 아론과 그 후손들이 제사장의 직무를 맡았다(23:12-13). 그리고 레위의 다른 아들들(게르손, 므라리)과 그 후손들, 동시에 그핫의 아들 중 아므람의 후손일지라도 아론계가 아닌 다른 자손들은 모두가 다 제사장을 도와 성막(성전)의 모든 일을 분담하여 수종들어야 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그리고 지금 다시 다윗이 레위지파 후손들에게 일러주고 있는 [성전메뉴엘]이다.
건강한 사역 분장과 위임이 눈에 들어온다. 제사장은 아론(1) → 엘르아살과 이다말 → 24 반차의 제사장으로, 그리고 성전을 섬기는 일 역시 레위 → 그핫 → 아므람 → 아론으로 이어지는 제사장 가문을 제외한 레위의 다른 아들들의 후손이 다 제비뽑기(7,31)를 따라 각자의 사명을 부여 받고 있다. 한 사람이, 혹은 한 아들의 후손이 다 할 수 없기에 모두가 다 레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함께 동역한다는 것이 여러모로 은혜가 된다.
4.4. 레위인 메뉴엘(25:1-26:32)
4.4.1. 찬양대(25:1-31) 다윗은 찬양의 비밀과 능력을 아는 자였다. 그의 영감 넘치는 찬양은 이미 사울왕의 악신을 쫓아낼 만큼 능력 있었다 :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이를 때에 다윗이 수금을 취하여 손으로 탄즉 사울이 상쾌하여 낫고 악신은 그에게서 떠나더라.”(삼상16:23) 그리고 십 수 년이 지난 이후 여호와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메어 옮길 때 이미 이스라엘은 상당한 찬양대의 규모를 갖추고 있었고, 백성들 역시 대단했다(15:16-24,27-28, 16:4-6,42).
그는 하나님이 찬양 받으시는 분이심을 알았고, 찬양을 통해 주님과 교제하는 법을 알았다. 아마도 그는 목동의 시절부터 지금 왕위에 있는 자신의 대부분의 시간들을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에 헌신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지은 악기로 여호와를 찬송하기 위하여 찬송하는 자를 성전에 세운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4.4.2. 문지기, 재판 및 행정(26:1-32) 성전을 중심으로 점차 외곽의 관리에 관한 레위인의 직무가 소개되고 있다. 성전 안(제사장과 찬양대)을 시작으로 점차 밖(문지기 → 창고 → 유사와 재판관 → 요단 서편과 동편)으로 레위지파의 직무가 확장되고 있다. 성전은 물론 사법과 행정까지 그야말로 이스라엘은 신정국가(神政國家)로서의 기초를 든든하게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이렇듯 레위인의 직무가 성전에만 머무르지 않는 것이 흥미롭다. 이는 저들이 모든 지파들의 땅에 골고루 흩어져 지내는 것이 단순한 거주지 이상을 의미하는 것을 뜻하며, 이는 레위지파가 이스라엘에게 있어 빛과 소금인 것을 보여주는 증거인 셈이다.
4.5. 군부, 행정, 왕실 메뉴엘(27:1-34)
4.5.1. 군부와 행정(1-24) 이제 군부와 지방행정에 대한 조직이 이어진다. 이로써 신정국가(神政國家)로서의 면모는 물론 다윗을 이어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솔로몬 시대의 화려한 출발이 준비되는 일에 일단락된다. 다윗은 여기까지다. 그는 자신의 통치 말년을 대부분 이 일들(23:1-27:34)에 집중한 것 같다. 이렇듯 다음 세대를 준비하는 일은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임을 알게 된다.
한 나라의 정치 역시 릴레이 경주에 비유될 수 있다. 아무리 첫 주자가 잘 달려도 이어 달리는 사람이 그렇지 못하면 결과는 예상 밖으로 추락하게 된다. 사울부터 시작된 왕국은 시작하자마자 휘청거렸다. 하지만 둘째 주자인 다윗은 놀라운 역전을 거듭하며 탄탄대로(坦坦大路)의 기초를 놓았다. 이를 위해 다윗은 지금 다리를 놓는 사람으로 서 있다. 그리고 곧 바턴은 솔로몬에게 넘어갈 것이다. 이 변화의 시대에 뭘 준비해야 하고, 무엇이 중요한가? 이것이 역대상이 마무리 되는 부분에서 주목해야 할 주제다.
4.5.2. 왕실(25-34) 다윗의 측근들(32-34) 요나단 - 모사와 서기관 여히엘 - 왕의 아들들의 배종(교사) 아히도벨/여호야다/아비아달 - 왕의 모사 후새 - 왕의 벗 요압 - 왕의 군대장관 다윗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 했다. 마치 톱니바퀴처럼 각각의 톱니가 튼튼할 뿐 만 아니라, 또한 제 기능과 역할에 충실함으로써 전체가 유기적으로 통합된 목표를 성취해 가는 것과 같다. 그렇다. 바로 하나님의 교회가 그러하다. 무슨 일이 맡겨지던지 그 일에 최선을 다 하는 자가 “착하고 충성된 일꾼”(마25:21,23)이다.
5. 죽음으로 가는 길(28:1-29:30)
5.1. 성전건축 메뉴엘(28:1-21) 한 사람의 생애가 마무리 되는 이야기를 읽고 있다. 지금 분위기는 마치 해가 지는 저녁노을의 아름다움과 잘 어울리는 그림이다. 다윗의 생애는 이처럼 그가 하고 싶은 바를 그대로 다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그런 다음 미련 없이 무대를 내려오고 있는 중이다. 참으로 멋진 인생 이력서다. 40년을 하루같이 살아온 것이 복되다. 하지만 자신 이후(post David)를 준비하는 것, 그것도 하나님의 성전을 위해 전 역량을 총동원하고 있음에서 하나님에 의해 세우심을 입은 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5.2. 다윗 vs. 솔로몬(29:1-30) 한 사람의 행복은 어디까지일까. 10대 양치기 소년에서 부르심을 받아 30세에 왕이 되어 40년을 이스라엘 왕으로 사역을 했다(삼상16:11-13, 삼하5:4-5). 그가 이제 인생의 마무리를 하고 있는 중이다. 한 길을 간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하나님은 다윗을 택하셔서 그를 마음껏 쓰셨고, 다윗은 이 하나님의 쓰심에 멋지게 응답하는 것으로 받은바 복(福)을 다시 하나님께 돌려드린다. 아름다운 만남이자 소중한 관계, 본받고 싶고, 그래서 부러운 마음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아마도 바울의 고백은 다윗에게도 어울릴 것 같다 :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딤후4:7)
‘온’(kol, 모든)이라는 단어가 눈에 띤다. 온 회중(1,10,20), 다하여, 다른(2), 이 모든 것(3), 모든(5), 다, 만유의(11), 만유의, 모든 자를(12), 모든 것이(14), 다름이 없이(15), 모든, 다(16), 모든(17), 이 모든 일을(19), 온 이스라엘(21,23,26), 모든, 여러(24), 무리, 보다(25), 온(30), 총 25회나 쓰이고 있다. 특별히 이것들 가운데 이것이 사람 편에서 하나님께로 향한 ‘온’을 주목한다. 지금 포로기 이후(9:1-2)의 독자들이 그 이전 사람들을 추억해야 하는 핵심은 이 부분이다.
부스러기 묵상
“저희가 그 열조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 사로잡아 … 옮긴지라 저희가 오늘날까지 거기 있으니라.”(5:25-26) “유다가 범죄함을 인하여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갔더니, 먼저 그 본성으로 돌아와서 그 기업에 거한 자는 ….”(9:1b-2)
영광스러운 열왕의 역사가 포로기로 끝장이 나버렸다. 북왕국 이스라엘도 그렇고(5:25-26), 남왕국 유다도 마찬가지다(9:1-2).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왕국의 역사를 이처럼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또 다른 하나는, 이스라엘이 이처럼 범죄(犯罪)하여 하나님의 진노하심 아래로 떨어졌는데, 하나님은 다시 저희를 회복시키신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둘(포로와 귀환)을 낳았고, 그 사이에 또 무엇이 들어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깨닫게 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이스라엘이 놓치지 않고 붙들어야 할 메시지는 무엇일까.
제사장 나라(출19:5-6)로의 회복은 다윗과 솔로몬 시대가 그랬듯이 제사장, 레위인, 성전이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포로기라는 값비싼 대가를 지불했다면 역대기의 역사를 다시 읽어가는 독자들(포로 후 세대들)은 다르게 살아야 한다. 삶은 단지 구호가 아니며, 또한 다짐하고 결심한다고 해서 그대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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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 http://www.thesermon.org/html/index0.ht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