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을 통해 당시 팔레스타인 땅의 관활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으 로 하여금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1917년) 을 하게 함으로써 전 세계에 흩어졌던 건국의 꿈을 가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알 리야(이민) 물결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밸푸어 선언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셨다.
밸푸어선언: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 인을 지원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동의한다고 발표한 선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영국 외상 벨푸어가 당시 불리했던 전쟁에 유태인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영국 시온주의 연맹 회장에게 보낸 편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는 데 동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벨푸어 선언은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가 되었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초가 되었다.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은 영국 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이 담긴 문서로,
밸푸어 선언이라는 명칭은 1917년 당시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문서에 서명한 데서 기원한다.
1917년과 1926년 2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1917년 11월 2일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밸푸어가 이끄는 영국 외무성이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낸다.
밸푸어의 서명이 되어 있다. 본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신이다. 하지만 이미 밸푸어 선언 이전인 1915년 10월에 헨리 맥마흔이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영국의 모순된 행동으로 결국 전 후 유대인세력과 아랍세력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선언은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영국계 유대인 지도자인 라이어널 월터 로스차일드(제2대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루어졌다.
밸푸어 선언은 런던의 시오니즘 지도자인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의 끈질긴 노력이 낳은 결실이었지만, 팔레스타인을 유대민족의 모국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했던 시온주의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선언은 특히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 선언은 시온주의자들 사이에 열광적인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세계 시오니즘 기구의 목적은 달성된 듯했다. 영국정부는 이 선언이 특히 미국계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 쪽으로 돌려놓으리라고 기대했고, 영국을 지지하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 이웃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로 접근하는 통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밸푸어 선언은 주요연합국의 지지를 받았고 1922년 7월 24일에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포함되었다. 1939년 5월 영국 정부는 정책을 바꾸어, 추가로 이주할 유대인의 수를 7만 5,000명으로 제한하고 1944년에 이주를 끝낼 것을 제안하는 백서를 발표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을 회유한다고 비난하면서 이 새로운 정책에 반대했다.
1926년 선언 -두 번째 밸푸어 선언은 1926년 선언이며 대영 제국이 완전한 자치국임을 선언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맥마흔 선언이란?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 선언
영국의 맥마흔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선언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이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과의 서신을 통해 발표한 선언으로, 전쟁 종료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은 영국이 오토만 제국과 대항하기 위해 중동 국가를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국은 1971년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
이처럼 영국의 모순된 정책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동지역에서의아랍인과 유대인 간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영국은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변화됨에 따라 군자금의 부족과 미국의 대 독일 참전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정부는 세계적인 금융인이며 유대계 영국인인 시오니스트 총회장 로스차일드 경에게,
유대인들로 부터 군자금의 지원과 미국의 참전여론을 조성해 주는 대가로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약속할 것을 제안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미국의 은행과 금융시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문사나 방송국 같은 매스컴도 상당 수 보유하고 있어 영국정부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뿐만 아 니라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후세인- 맥마흔 협정이 영국정부의 제안을 받아 드리는 촉진제가 되었다. 영국은 제1차 대전에 말려들면서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통로를 오스만 제국(1281-1922)으로 부터 보호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맥마흔으로 하여금 메카의 영주인 칼리프 후세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 쟁에 아랍인들이 참전해 준다면 전후 아랍왕국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들을 위 한 국가건설을 약속한다는 협약을 밸푸어 선언 2년 전인 1915년에 한바 있어, 유대인들로서 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건설에 대한 영국정부의 공식적인 약속이 절실히 필요 했다. 결국 영국은 국가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인과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이중으로 약속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밸푸어 선언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 해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건국의 꿈을 안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알리야(이민) 하는 구체적인 행보를 시작하게 하였다.
밸푸어 선언 이전 팔레스타인 땅에는 수만 명에 불과했던 유대인들이 종전이후 수십만 명으로 그 수가 증가 하였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는 돈을 가지고 팔레스 타인인의 소유의 땅을 사서 농토로 개간하고, 산업시설을 일으켜 그들의 삶의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하자 현지 아랍인들과의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아랍인들이 영국정부에 유대인의 이민을 거부하는 강력한 항의를 제기함으로 인해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금지시키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아랍인들의 압박이 가해지게 되자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30만 유대 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하가나(유대인의 비밀 지하군대)를 조직하여 유대 인의 생존을 지키는 일에 집중 하면서 건국 작업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1차 세 계대전이 끝난 지 20년이 지나도록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지 못 하였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오던 유대인들의 알리야 물결도 소멸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멈추지 않고 계셨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되었고, 독일의 히틀러는 호로코스트를 감행하여 600만 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참혹한 일을 저질렀다. 당시 유럽거주 유대인의 수가 900만으로 추산되었으니까 유럽 전체 유대인의 3분의 2가 학살되는 세기적인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지구상에 어느 한 나라도 유대인의 인권유린에 대해 항의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가 없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보호를 위한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1940년 하가나의 장교들로 구성된 모사드 (Mossad Aliyah Beth:이민로 B 기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을 비밀리에 이민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여 국민 만들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50만에 이르렀다.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이주가 허용됨에 따라 모사드의 비밀활동은 멈추지 않고 전쟁무기 밀수입하는 활동으로 그 기능을 바꾸어 건국시 아랍인들과의 전쟁에 대비해 서 유대인들을 무장시키는 일을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건국의지를 불태우면 서 철저하게 전쟁준비를 하는 한편 벤구리온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유엔을 통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승인받기 위한 외교교섭을 전개하였다.
반대로 아랍측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국가건설을 할 수 없도록 아랍세계의 모 든 힘을 결집하여 방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대인을 지지하는 나라는 석유공급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54%, 아랍인에게 46% 그리고 예루살렘 지역은 국제 관활 구역으로 할 것을 찬성 33,반대 13, 기권 10표로 결정 하였다. 이로서 유대인 들은 건국 요건인 영토, 국민, 주권이 확보된 것이었다. 유엔결의가 있은 다음해인 1948년 5 월 14일 유대인들은 그들의 국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 함으로서 1900년 동안 멸망하여 지도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던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표면상으로는 중동지역의 한 민족의 국가건설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기독교인의 눈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건국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이며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위 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느낄 수 있다.
"무화가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 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이러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에 이른 줄 알라 (막13:28-29)"
세계제1차대전
이는 시대적으로 슬라브족의 중심인 로마노프왕실과 독일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함스부르크왕실과 영국프랑스 스페인등 브르봉왕조가 지역패권과 식민지 영토확장등에 혈안이 되어 있고 프러시아(프로이센)를 주축으로 대독일제국을 건설한 빌헤름2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때 1914. 6.28일Austro-Hungarian Emperor Franz Josef (오스트리아-항거리안 황제 프란츠 조셉) 황태자 부처( 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전 유고 현재세르비아)에 군대 열병식참가하는길에 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의해 권총으로 암살된 계기로 1차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암살사건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였고 이 이전부터 각국이 연대하여 블록을 형성하여 전쟁할 이유를 찾지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만에 선전포고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전 유럽이 3일만에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결과
끝내 독일을 중심으로한 함스브르그왕조가 멸망하고 독일은 유사이래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독일은 이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해댈능력이 없어 결국은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된 경우 입니다.
1차세계대전은 중세왕조들이 그들의 블록을 형성하여 몰락하는 왕조를 재 건설하는의미와 식민지 수탈정책에서 다른나라와 뒤질세라 각축장이 벌어졌고 이 왕조블록은 새로운 물결이 엄습해오는과학 기술등 산업혁명의 가속화와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전쟁이란 옛날 방식을 채택하여 유럽세계 발전에 100년이상 후퇴시키고 그 세계적 주도권을 미국에게 내놓은것이 되었습니다
1차대전이후에 세계 경제공황이 일어남니다
미국은 테임즈강 유역 개발공사등 국책사업등 일명 뉴딜정책으로 경제공황위기를 벗어나려했고
식민지가 많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와 자국을 하나로 묶는 블록경재체제를 통해서 위기를 타계하려했습니다 ((순 식민지만 피해를 보는 나쁜 정책입니다))
그리고 소련은 사회주의...
그러나 식민지수가 적었던 일본과 1차대전 패전이후 모든 식민지를 잃었던 독일 그리고이탈리아는
군국주의와 나치즘,파스즘같은 사상으로 국민들을 무장 자국민의 불만을 해외의 다른국가로 몰아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상으로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몬거죠
간단히 말해서 '이대로가면 굶어죽는다 우리가 이런 고통을 얻는건 영국이 우리의 식민지를 뺏아서 이렇다 그러니깐 나가 싸워 식민지를 얻자 강국이되자' 이런식이였고...
또 군수공장을 돌리면서 실업률을 낮추고, 청년들을 징용해가 또 실업률을 줄이고
이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이 일어난것이죠
처음에는 독일의 우세한 전력으로 유럽을 석권해 나갔습니다
폴란드 발트삼국 베네룩스 3국 프랑스 등을 차례로 집어삼키면서 전유럽의 85%를독일과 추축군세력이 점령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마지막남은 저항국가 영국을 향해 폭격을 가하려했으나...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패배합으로써 폭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영국을 천천히 아사시키려 합니다
근데 좀처럼 영국이 항복할 기미를 안보이자히틀러는 생각합니다 '저 영국놈들이 뭘 믿고 버티는거지..'
그러다 히틀러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을 믿고 영국이 저러는거다영국은 소련이 참전하기를 기다리는거다 라는 커다란 오판을합니다
당시영국은 소련이아니라 미국을 믿고있었습니다
결국 히틀러의 오판으로 독일군의 소련을 침공...
레닌그라드까지 함락시키고 모스크바까지 쳐들어갔으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그후로 계속 밀립니다
그러다 히틀러의 마지막 발악벌지전투가 벌어지나 처음 우세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차를 가동시킬 연료부족과 히틀러의 오판으로 패배그 후로 이렇다할 반격 없이 연합군에 깨지다가
결국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사실상 2차대전의 종지부를 찍힙니다
결국 44년 8월 독일은 항복합니다
일본도 역시 독일과 같은이유로 참전합니다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자원확보를 위해 중국을 칩니다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그러나 자원확보를 위해 중국을 쳤으나 전쟁의 양상이 끝없는 소모전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일본은 여기에 들어가는 군비를 충당하기위해 자원을 위해
전선을 확대시킵니다 필리핀등 동남아시아쪽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소비되는 자원을 어느정도 감당은했어도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인적자원이 부촉해집니다즉 전선은 확대되었는데 전선으로 차출시킬 병력이 부족해진겁니다
결국 이러한 병력과 군비확보를위해 인도차이나반도쪽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그러나 충당되는 병력보단 소비되는 병력이 많아 전선만확대되었지...
상황이 나아지는것은 확대되었을 초기 아주 잠깐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전선이 확대되자인도차이나반도와 필리핀에있던 프랑스 영국 미국군과 전투가 일어났고당시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던 중이라 다들 일본에게 패한상태
그래서 미국은 별력을 유럽에 집중시키위해 일본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킵니다
결국 일본은 이에 빡쳐서 미친짓을 감행합니다
바로 진주만 습격
진주만 습격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이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진주만기습작전을 제안합니다
결국 이 진주만 습격의 성공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태평양전쟁때일본국 연합함대 사령관이 됩니다
그는 나중에 부건빌섬에서 수송기로 이동중 미국 전투기들에 의해 격추전사합니다
진주만이후로 일본은 ABCD포위 작전
A는 아메리카 B는 브리튼 즉 영국 C는 차이나 중국 D는 네덜란드
4개국의 포위작전으로 전쟁이 본격화됩니다
그리고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일본은 진주만이후 전 전선에 거쳐 연전연패를 거듭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졍적인 패배를하고 이오지마전투 이오전투말라야 전역등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
결국 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2발의 원폭을 맞고 45년 8월 15일 항복합니다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산모의 진통 이였다면, 이스라엘의 건국을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홀로코스트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흩으셨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다시 돌아와 나라를 세울 것을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아니, 유대인들은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에 집착하며 생존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 보다 더 번성하게 하 실 것이며,(신30:5)"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건국을 말하게 하셨다.
179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나라를 세우자는 제안을 한 바 있고, 같은 시대에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1797-1801 재임)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37-1901 재위)도 같은 주장을 한바 있다.
유대인들 스스로 건국의지를 공식 적으로 드러낸 것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였다. 이 총회를 주도했던 데오도르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출생 유대인으로서 시오니즘을 반대했던 신문기자였다. 그런 그가 1894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쉬 대위 간첩사건의 재판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간첩혐의가 전혀 없는 드레퓌쉬 대위를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종신형에 처해지는 것에 충격을 받고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면서 2년간 칩거하면서 "유대인의 국가(The Jewish State, 1896)라는 책을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을 위한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알리는 한편, 1897년 시온주의 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시온주의 운동이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주의 정치운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시온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신앙의 표현이다. 따라서 비기독교인의 시온주의와 기독교인의 시온주의는 그 개념이 다르며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적인 시온주의를 분별 할 수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바젤에서 개최된 시온주의 운동 주체는 반 기독교적인 정서를 가진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정치운동에 근거를 두고 건국활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건국 이후 지금까지도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 신앙적인 유대인의 행태까지도 선으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멈추지 않으셨다. 비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이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건국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시온주의 총회에서 데오도르 헤르츨 은 '앞으로 50년 후에는 유대인의 나라가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 되었으니까 데오도르 헤르츨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 나 이 예언의 성취과정에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하고 계셨음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1894년- 2년간 칩거=1896년
1948-1897년=51년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을 통해 당시 팔레스타인 땅의 관활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으 로 하여금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1917년) 을 하게 함으로써 전 세계에 흩어졌던 건국의 꿈을 가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알 리야(이민) 물결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밸푸어 선언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셨다.
맥마흔 선언: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과 샤리프 후세인 간의 서한(書翰)을 발표한 것으로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 선언
밸푸어선언: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 인을 지원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동의한다고 발표한 선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영국 외상 벨푸어가 당시 불리했던 전쟁에 유태인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영국 시온주의 연맹 회장에게 보낸 편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는 데 동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벨푸어 선언은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가 되었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초가 되었다.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은 영국 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이 담긴 문서로, 밸푸어 선언이라는 명칭은 1917년 당시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문서에 서명한 데서 기원한다. 1917년과 1926년 2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1917년 11월 2일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밸푸어가 이끄는 영국 외무성이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낸다.
밸푸어의 서명이 되어 있다. 본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신이다. 하지만 이미 밸푸어 선언 이전인 1915년 10월에 헨리 맥마흔이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영국의 모순된 행동으로 결국 전 후 유대인세력과 아랍세력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선언은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영국계 유대인 지도자인 라이어널 월터 로스차일드(제2대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루어졌다.
밸푸어 선언은 런던의 시오니즘 지도자인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의 끈질긴 노력이 낳은 결실이었지만, 팔레스타인을 유대민족의 모국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했던 시온주의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선언은 특히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 선언은 시온주의자들 사이에 열광적인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세계 시오니즘 기구의 목적은 달성된 듯했다. 영국정부는 이 선언이 특히 미국계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 쪽으로 돌려놓으리라고 기대했고, 영국을 지지하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 이웃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로 접근하는 통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밸푸어 선언은 주요연합국의 지지를 받았고 1922년 7월 24일에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포함되었다. 1939년 5월 영국 정부는 정책을 바꾸어, 추가로 이주할 유대인의 수를 7만 5,000명으로 제한하고 1944년에 이주를 끝낼 것을 제안하는 백서를 발표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을 회유한다고 비난하면서 이 새로운 정책에 반대했다.
1926년 선언[편집]
두 번째 밸푸어 선언은 1926년 선언이며 대영 제국이 완전한 자치국임을 선언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맥마흔 선언이란?
영국의 맥마흔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선언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이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과의 서신을 통해 발표한 선언으로, 전쟁 종료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은 영국이 오토만 제국과 대항하기 위해 중동 국가를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국은 1971년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이처럼 영국의 모순된 정책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동지역에서의아랍인과 유대인 간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영국은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변화됨에 따라 군자금의 부족과 미국의 대 독일 참전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정부는 세계적인 금융인이며 유대계 영국인인 시오니스트 총회장 로스차일드 경에게,
유대인들로 부터 군자금의 지원과 미국의 참전여론을 조성해 주는 대가로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약속할 것을 제안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미국의 은행과 금융시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문사나 방송국 같은 매스컴도 상당 수 보유하고 있어 영국정부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뿐만 아 니라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후세인- 맥마흔 협정이 영국정부의 제안을 받아 드리는 촉진제가 되었다. 영국은 제1차 대전에 말려들면서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통로를 오스만 제국(1281-1922)으로 부터 보호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맥마흔으로 하여금 메카의 영주인 칼리프 후세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 쟁에 아랍인들이 참전해 준다면 전후 아랍왕국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들을 위 한 국가건설을 약속한다는 협약을 밸푸어 선언 2년 전인 1915년에 한바 있어, 유대인들로서 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건설에 대한 영국정부의 공식적인 약속이 절실히 필요 했다. 결국 영국은 국가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인과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이중으로 약속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밸푸어 선언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 해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건국의 꿈을 안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알리야(이민) 하는 구체적인 행보를 시작하게 하였다.
밸푸어 선언 이전 팔레스타인 땅에는 수만 명에 불과했던 유대인들이 종전이후 수십만 명으로 그 수가 증가 하였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는 돈을 가지고 팔레스 타인인의 소유의 땅을 사서 농토로 개간하고, 산업시설을 일으켜 그들의 삶의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하자 현지 아랍인들과의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아랍인들이 영국정부에 유대인의 이민을 거부하는 강력한 항의를 제기함으로 인해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금지시키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아랍인들의 압박이 가해지게 되자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30만 유대 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하가나(유대인의 비밀 지하군대)를 조직하여 유대 인의 생존을 지키는 일에 집중 하면서 건국 작업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1차 세 계대전이 끝난 지 20년이 지나도록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지 못 하였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오던 유대인들의 알리야 물결도 소멸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멈추지 않고 계셨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되었고, 독일의 히틀러는 호로코스트를 감행하여 600만 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참혹한 일을 저질렀다. 당시 유럽거주 유대인의 수가 900만으로 추산되었으니까 유럽 전체 유대인의 3분의 2가 학살되는 세기적인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지구상에 어느 한 나라도 유대인의 인권유린에 대해 항의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가 없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보호를 위한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1940년 하가나의 장교들로 구성된 모사드 (Mossad Aliyah Beth:이민로 B 기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을 비밀리에 이민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여 국민 만들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50만에 이르렀다.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이주가 허용됨에 따라 모사드의 비밀활동은 멈추지 않고 전쟁무기 밀수입하는 활동으로 그 기능을 바꾸어 건국시 아랍인들과의 전쟁에 대비해 서 유대인들을 무장시키는 일을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건국의지를 불태우면 서 철저하게 전쟁준비를 하는 한편 벤구리온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유엔을 통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승인받기 위한 외교교섭을 전개하였다.
반대로 아랍측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국가건설을 할 수 없도록 아랍세계의 모 든 힘을 결집하여 방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대인을 지지하는 나라는 석유공급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54%, 아랍인에게 46% 그리고 예루살렘 지역은 국제 관활 구역으로 할 것을 찬성 33,반대 13, 기권 10표로 결정 하였다. 이로서 유대인 들은 건국 요건인 영토, 국민, 주권이 확보된 것이었다. 유엔결의가 있은 다음해인 1948년 5 월 14일 유대인들은 그들의 국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 함으로서 1900년 동안 멸망하여 지도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던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표면상으로는 중동지역의 한 민족의 국가건설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기독교인의 눈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건국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이며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위 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느낄 수 있다.
"무화가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 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이러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에 이른 줄 알라 (막13:28-29)"
무려 세계 대표 종교 중 3개의 성지이지요.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예루살렘 시 내에도 각 종교의 대표적 유적지가 있습니다.
-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교회(크리스트교), 오마르 사원(이슬람교)
그렇기 때문에 종교분쟁의 핵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도 바로 종교전쟁에서 시작합니다.
이 지역의 역사로 따지면 대략 기원전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이 때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정착해서 국가를 세우니 바로 저 유명한 다윗왕의 유대왕국입니다.
King David Playing the Zither - Oil on canvas, 135 x 198 cm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에 잦은 외침으로 결국 멸망당하고
기원전 1세기를 전후로 해서는 로마의 속령이 됩니다.
박해받던 그들이 2차에 걸쳐 로마에 저항하지만, 로마제국은 반란에 대해 엄격하지요.
신전은 소실되고 유대지역은 황폐해졌으며 유대인들은 살길을 찾아 이 지역을 떠나 세계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이산)라고 합니다.
그러나 637년 이슬람교로 단결된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차지합니다.
16~20세기 초반까지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 지역을 차지합니다.
다시 말해 이슬람 교도들의 지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위세를 떨치던 투르크제국은 결국 영국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영국의 속국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세 종교의 종교적 중심지로 성장하는 어지러운 역사를 갖게 되어버린 것입니다.이렇게 19세기까지를 간략히 넘어가고 나서.
다시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기 이전에 디아스포라 이후 흩어져버린 유대인들을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로 흩어져 나가면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게 됩니다.
유대인 격리지구 게토에 대한 것은 모두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상당히 찰진 민족입니다.
고등교육과 철저한 실리정신의 민족성을 바탕으로 모두가 기피하는 한가지 종목에 투자하였으니
바로 고리대금업 입니다.
대출도 전화 한통으로 쉽고 빠르게를 외치며 쏴쏴거리던 그들은
현재 세계적인 금융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명실상부 세계를 움직이는 숨은 손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블루오션 전략이 아니겠습니까!
뉴욕 맨하튼의 월스트리트입니다. 유대인 자본이 장악했지요.이러한 자금을 바탕으로 그들이 추진한 것이 바로 성경에서 약속한 땅. 시온으로 돌아가자! 하는 시오니즘 운동입니다.
시온이 어디냐?짐작하시는 대로 팔레스타인이었던 것입니다.
자. 다시 세계로 돌아옵니다.
연이어 설명할 것은 바로 지금의 이-팔 분쟁의 핵심적인 마찰요소인벨푸어 선언과 맥마흔 선언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에 영국의 외무장관 어서벨푸어는미국내 유대인들을 끌어들여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독립국가를 인정하는 벨푸어 선언을 합니다.
허나 영국은 이미 독일 편에 있던 터키 내의 이슬람 세력의 반란을 종용하면서
아랍인들에게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곳에 독립국가 인정 선언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맥마흔 선언입니다.
2차 대전 이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정책에 힘입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대인들로 인해
2차대전이 끝날무렵 이 지역의 유대인 이주자 비율은 31%에 달했으며유대인이 소유한 땅은 팔레스타인의 5.67%가 되었답니다.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동정여론도 일어나 1947년 UN에서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 48%와 유대지구 52%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가결하고이스라엘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시오니즘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은오직 유대인들의 나라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이외의 민족을 배척했는데 특히 아랍민족을 배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독립을 선포하고 곧바로 주변 아랍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니 바로
모세 다얀 장군(가운데). 아랍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이끌어 낸 분입니다.
1차 중동 전쟁입니다.이 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면서 팔레스타인. 아니 중동의 패권은 이스라엘이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 중심의 새로운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팔레스타인인 90만명이 주변 국으로 흩어져 난민 생활을 하니 이렇게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
세계 제2차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이 전쟁은 두 개의 중심이 있어, 첫째, 유럽에서는 영·독전쟁, 독소전쟁, 둘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단계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전사자는 2,500만 명)는 약 6천만 명이 넘는데,
그 또한, 전 세계의 5대륙 6대양 모든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세계대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정말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이었죠.
전쟁을 일으켰던 나치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통해, 약 천만 명이 넘는 유대인과 소수 민족들을 처형했고, 미국은 일본 본토에 두 차례나 ‘원자폭탄’을 투하했죠.
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으로, 역사가들은 다양한 가설을 내놓고 있는데요. 거대자본이 독일을 부추겨 고의로 일으킨 전쟁이라는 음모론적인 시각에서부터 히틀러의 야욕에 의한 전쟁이라는 추측까지.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은 승전국들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는데요. 이 조약은 독일인 입장에선 거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은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주길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이 기다렸던 그 구세주는 불행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였죠연합국이 과도한 배상금을 독일에게 물렸기 때문이죠.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국제 사회에서 거의 회복할 수 없독일은 아무런 빛과 희망도 없는 나라로 전락해 버린 것이죠.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공황은 독일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독일은 점점 나락으로 빠지게 됩니다.는 타격을 입음과 동시에,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933년, 나치당 당수였던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로 임명되면서 권력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가, 가장 암울한 국가의 'No.1'이 된 것이죠.
현직 독일 대통령이 서거한 1934년에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하는 법을 개정하며 스스로 '총통'에 오릅니다.
각종 2차 세계대전 영화에서 '하일! 히틀러(Heil Hitler)'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이 말은, 모든 독일인들이 총통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무서운 단어이죠. 히틀러가 총통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독일인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이었어요.
그것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고 있던 독일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죠. 즉, 모든 독일인들이 '악과 울분'으로 똘똘 뭉쳐 초토화된 독일을 재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영화 <다운폴>에서, 히틀러의 오른팔인 괴벨스는 독일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항복'하라는 부하의 말에 이렇게 답합니다."난 독일 국민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아. 그들은 스스로 운명을 선택했고, 지금 그 벌을 받고 있을 뿐이야"
즉, 나치는 독일인들이 스스로 자신들(나치)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아무리 위험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 책임도 국민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찌 되었던 총통이 된 히틀러가 가장 먼저 행동에 옮긴 것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빼앗긴 옛 독일의 영토(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를 합병하는 것이었어요.
그는 집권한지 5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조약을 어기고 이 두 나라를 합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939년에는 '폴란드'를 침공하죠.
그런데 당시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어요. 즉, 상호 방위조약(동맹국이 공격받으면 참전해야 한다는 조약)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했고
그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죠. 후일, 2차 세계대전 시리즈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와 영국의 독일에 대한 대처는 굉장히 무능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시기에서도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고 달랬죠.
하지만, 이러한 처사는 히틀러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죠. 왜냐하면, 히틀러의 '진짜' 목적은 3개국 합병이 아니라 '유럽 정복'이었으니까요.
지금까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보았는데요. 미국은 1941년 마지막 무렵에야 이 전쟁에 참전합니다.
미국이 고립주의 노선을 채택한 진짜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수많은 군수 물품을 각국에게 수출하면서 엄청난 떼돈을 벌었습니다. 한 마디로 '겁나게 남는 장사'를 한 것이죠.
그런데 대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있을 찰나에 또 '다른 나라들끼리의 전쟁'이 일어난 겁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이었죠. 아마, 미국 정부는 입이 귀에 걸렸을 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상 유례가 없는 인력을 동원하여 '군수 공장'을 풀가동합니다. 그 당시의 미국의 군수 물품 생산량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지는데요.
결과적으로, 미국은 단독으로 전 세계 군수 물품 생산량의 41%를 생산해 내는 저력을 보여주죠. 말 그대로 미국이란 국가 자체가 마치 하나의 '군수 공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에 있던 모든 공장들의 40%를 군수 생산 공장으로 전환합니다. 세세하게 살펴보면, 전쟁이 벌어진 약 5년의 기간 동안
전투기 324,750대 (미국은 4년 동안 18,431기의 폭격기를 생산했는데, 이는 1시간에 1대 씩 생산하는 꼴)
탱크 88,000여 대. 이는 독일의 타이거 전차가 1대 생산되는 기간에 미국의 M4 셔먼 전차는 37대가 생산되는 꼴이었어요.
군함 7,600척 등을 생산해 냈습니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Operation CWAL(생산 스피드 업)'을 누르고 계속 군수 물품만 찍어낸 것으로 비유할 수 있죠.
이러한 경이적인 생산 스피드를 보여준 미국 군수 산업의 원동력은 바로 '노동력'이었습니다. 대공황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미국에는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죠.
그런데, 1943년이 되자 미국에는 거의 모든 국민이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바로 군수 공장으로 말이죠. 그래도 노동력이 부족하면, 그때는 '여성'들을 동원했습니다.
바로 '리벳공 로지'라 불리는 미국의 여성들인데요. 이들은 군수 공장에서 24시간 동안 교대로 일을 하며 비행기, 탱크, 무기, 탄약 등을 생산했습니다.
규모가 현재 우리나라 인구(약 5천만 명)보다도 많습니다.
세계제1차대전
이는 시대적으로 슬라브족의 중심인 로마노프왕실과 독일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함스부르크왕실과 영국프랑스 스페인등 브르봉왕조가 지역패권과 식민지 영토확장등에 혈안이 되어 있고 프러시아(프로이센)를 주축으로 대독일제국을 건설한 빌헤름2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때 1914. 6.28일Austro-Hungarian Emperor Franz Josef (오스트리아-항거리안 황제 프란츠 조셉) 황태자 부처( 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전 유고 현재세르비아)에 군대 열병식참가하는길에 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의해 권총으로 암살된 계기로 1차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암살사건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였고 이 이전부터 각국이 연대하여 블록을 형성하여 전쟁할 이유를 찾지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만에 선전포고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전 유럽이 3일만에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결과
끝내 독일을 중심으로한 함스브르그왕조가 멸망하고 독일은 유사이래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독일은 이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해댈능력이 없어 결국은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된 경우 입니다.
1차세계대전은 중세왕조들이 그들의 블록을 형성하여 몰락하는 왕조를 재 건설하는의미와 식민지 수탈정책에서 다른나라와 뒤질세라 각축장이 벌어졌고 이 왕조블록은 새로운 물결이 엄습해오는과학 기술등 산업혁명의 가속화와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전쟁이란 옛날 방식을 채택하여 유럽세계 발전에 100년이상 후퇴시키고 그 세계적 주도권을 미국에게 내놓은것이 되었습니다
1차대전이후에 세계 경제공황이 일어남니다
미국은 테임즈강 유역 개발공사등 국책사업등 일명 뉴딜정책으로 경제공황위기를 벗어나려했고
식민지가 많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와 자국을 하나로 묶는 블록경재체제를 통해서 위기를 타계하려했습니다 ((순 식민지만 피해를 보는 나쁜 정책입니다))
그리고 소련은 사회주의...
그러나 식민지수가 적었던 일본과 1차대전 패전이후 모든 식민지를 잃었던 독일 그리고이탈리아는
군국주의와 나치즘,파스즘같은 사상으로 국민들을 무장 자국민의 불만을 해외의 다른국가로 몰아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상으로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몬거죠
간단히 말해서 '이대로가면 굶어죽는다 우리가 이런 고통을 얻는건 영국이 우리의 식민지를 뺏아서 이렇다 그러니깐 나가 싸워 식민지를 얻자 강국이되자' 이런식이였고...
또 군수공장을 돌리면서 실업률을 낮추고, 청년들을 징용해가 또 실업률을 줄이고
이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이 일어난것이죠
처음에는 독일의 우세한 전력으로 유럽을 석권해 나갔습니다
폴란드 발트삼국 베네룩스 3국 프랑스 등을 차례로 집어삼키면서 전유럽의 85%를독일과 추축군세력이 점령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마지막남은 저항국가 영국을 향해 폭격을 가하려했으나...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패배합으로써 폭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영국을 천천히 아사시키려 합니다
근데 좀처럼 영국이 항복할 기미를 안보이자히틀러는 생각합니다 '저 영국놈들이 뭘 믿고 버티는거지..'
그러다 히틀러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을 믿고 영국이 저러는거다영국은 소련이 참전하기를 기다리는거다 라는 커다란 오판을합니다
당시영국은 소련이아니라 미국을 믿고있었습니다
결국 히틀러의 오판으로 독일군의 소련을 침공...
레닌그라드까지 함락시키고 모스크바까지 쳐들어갔으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그후로 계속 밀립니다
그러다 히틀러의 마지막 발악벌지전투가 벌어지나 처음 우세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차를 가동시킬 연료부족과 히틀러의 오판으로 패배그 후로 이렇다할 반격 없이 연합군에 깨지다가
결국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사실상 2차대전의 종지부를 찍힙니다
결국 44년 8월 독일은 항복합니다
일본도 역시 독일과 같은이유로 참전합니다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자원확보를 위해 중국을 칩니다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그러나 자원확보를 위해 중국을 쳤으나 전쟁의 양상이 끝없는 소모전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일본은 여기에 들어가는 군비를 충당하기위해 자원을 위해
전선을 확대시킵니다 필리핀등 동남아시아쪽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소비되는 자원을 어느정도 감당은했어도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인적자원이 부촉해집니다즉 전선은 확대되었는데 전선으로 차출시킬 병력이 부족해진겁니다
결국 이러한 병력과 군비확보를위해 인도차이나반도쪽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그러나 충당되는 병력보단 소비되는 병력이 많아 전선만확대되었지...
상황이 나아지는것은 확대되었을 초기 아주 잠깐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전선이 확대되자인도차이나반도와 필리핀에있던 프랑스 영국 미국군과 전투가 일어났고당시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던 중이라 다들 일본에게 패한상태
그래서 미국은 별력을 유럽에 집중시키위해 일본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킵니다
결국 일본은 이에 빡쳐서 미친짓을 감행합니다
바로 진주만 습격
진주만 습격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이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진주만기습작전을 제안합니다
결국 이 진주만 습격의 성공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태평양전쟁때일본국 연합함대 사령관이 됩니다
그는 나중에 부건빌섬에서 수송기로 이동중 미국 전투기들에 의해 격추전사합니다
진주만이후로 일본은 ABCD포위 작전
A는 아메리카 B는 브리튼 즉 영국 C는 차이나 중국 D는 네덜란드
4개국의 포위작전으로 전쟁이 본격화됩니다
그리고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일본은 진주만이후 전 전선에 거쳐 연전연패를 거듭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졍적인 패배를하고 이오지마전투 이오전투말라야 전역등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
결국 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2발의 원폭을 맞고 45년 8월 15일 항복합니다
홀로코스트가 이스라엘의 건국을 위한 산모의 진통 이였다면, 이스라엘의 건국을 계획하고 계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홀로코스트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당사자인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흩으셨던 팔레스타인 땅으로 다시 돌아와 나라를 세울 것을 예언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잃어버린 채 정처 없이 떠돌고 있었다. 아니, 유대인들은 그들이 처해있는 환경에 집착하며 생존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네 조상들이 차지한 땅으로 돌아오게 하사 네게 다시 그것을 차지하게 하실 것이며 여호와께서 또 네게 선을 행하사 너를 네 조상들 보다 더 번성하게 하 실 것이며,(신30:5)"
이러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방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 건국을 말하게 하셨다.
1799년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을 위한 나라를 세우자는 제안을 한 바 있고, 같은 시대에 미국의 제2대 대통령인 존 애덤스(1797-1801 재임)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1837-1901 재위)도 같은 주장을 한바 있다.
유대인들 스스로 건국의지를 공식 적으로 드러낸 것은 1897년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제1차 시온주의 총회에서 였다. 이 총회를 주도했던 데오도르 헤르츨은 오스트리아 출생 유대인으로서 시오니즘을 반대했던 신문기자였다. 그런 그가 1894년 프랑스에서 발생한 드레퓌쉬 대위 간첩사건의 재판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간첩혐의가 전혀 없는 드레퓌쉬 대위를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종신형에 처해지는 것에 충격을 받고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으면서 2년간 칩거하면서 "유대인의 국가(The Jewish State, 1896)라는 책을 저술하여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을 위한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알리는 한편, 1897년 시온주의 총회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시온주의 운동이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민족주의 정치운동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시온주의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신앙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신앙의 표현이다. 따라서 비기독교인의 시온주의와 기독교인의 시온주의는 그 개념이 다르며 기독교인은 비기독교적인 시온주의를 분별 할 수 있어야 한다. 불행하게도 바젤에서 개최된 시온주의 운동 주체는 반 기독교적인 정서를 가진 유대인들이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라 민족주의 정치운동에 근거를 두고 건국활동을 시작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건국 이후 지금까지도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비 신앙적인 유대인의 행태까지도 선으로 들어 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멈추지 않으셨다. 비기독교 시온주의자들이 복음은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건국시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국가의 기초를 세움으로써 복음을 받아 드릴 수 있는 통로를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스위스 바젤에서 개최된 시온주의 총회에서 데오도르 헤르츨 은 '앞으로 50년 후에는 유대인의 나라가 팔레스타인 땅에 건설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는데, 1948년 5월 이스라엘이 건국 되었으니까 데오도르 헤르츨의 예언이 성취된 것이다. 그러 나 이 예언의 성취과정에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일하고 계셨음을 역사가 보여주고 있다.
1894년- 2년간 칩거=1896년
1948-1897년=51년
제1차 세계대전(1914.7.28.-1918.11.11)을 통해 당시 팔레스타인 땅의 관활권을 가지고 있던 영국으 로 하여금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1917년) 을 하게 함으로써 전 세계에 흩어졌던 건국의 꿈을 가진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 땅으로 알 리야(이민) 물결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밸푸어 선언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계셨다.
맥마흔 선언:1915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 고등판무관 맥마흔과 샤리프 후세인 간의 서한(書翰)을 발표한 것으로 아랍인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지한 선언
밸푸어선언:1917년 11월 2일 영국 외무장관 밸푸어가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유대 인을 지원하기 위해 팔레스타인에 유대 인을 위한 민족국가를 수립하는 데 동의한다고 발표한 선언이다
제1차 세계대전 말기인 1917년 영국 외상 벨푸어가 당시 불리했던 전쟁에 유태인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 영국 시온주의 연맹 회장에게 보낸 편지로, 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국가를 건설하는 데 동의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벨푸어 선언은 이스라엘 건국의 토대가 되었고, 오늘날 팔레스타인 분쟁의 시초가 되었다.
밸푸어 선언(Balfour Declaration)은 영국 정부의 외교정책 방향이 담긴 문서로, 밸푸어 선언이라는 명칭은 1917년 당시 외무장관 아서 밸푸어가 문서에 서명한 데서 기원한다. 1917년과 1926년 2번에 걸쳐 이루어졌다.
1917년 11월 2일 당시 외무장관이었던 밸푸어가 이끄는 영국 외무성이 당시 유대인을 대표하는 월터 로스차일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공식적으로 보낸다.
밸푸어의 서명이 되어 있다. 본문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다음과 같다.
...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을 세우고, 그 일을 성취하는 데 대하여, 팔레스타인에 거하는 비 유대인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 또는 타국에 거하는 유대인의 정치적인 상태에 대해 아무런 편견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이는 사실상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서 민족적 고향을 건설하겠다는 것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신이다. 하지만 이미 밸푸어 선언 이전인 1915년 10월에 헨리 맥마흔이 후세인-맥마흔 서한을 통해 전후 아랍인의 독립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지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런 영국의 모순된 행동으로 결국 전 후 유대인세력과 아랍세력의 분쟁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
이 선언은 영국 외무장관인 아서 제임스 밸푸어가 영국계 유대인 지도자인 라이어널 월터 로스차일드(제2대 로스차일드 남작)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루어졌다.
밸푸어 선언은 런던의 시오니즘 지도자인 카임 바이츠만과 나훔 소콜로프의 끈질긴 노력이 낳은 결실이었지만, 팔레스타인을 유대민족의 모국으로 재구성할 것을 요구했던 시온주의자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다.
이 선언은 특히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권과 종교적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어떠한 행동도 해서는 안 된다"고 못박았다. 그러나 이 선언은 시온주의자들 사이에 열광적인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세계 시오니즘 기구의 목적은 달성된 듯했다. 영국정부는 이 선언이 특히 미국계 유대인의 여론을 연합국 쪽으로 돌려놓으리라고 기대했고, 영국을 지지하는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정착하면 이웃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로 접근하는 통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밸푸어 선언은 주요연합국의 지지를 받았고 1922년 7월 24일에 국제연맹의 승인을 받은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안에 포함되었다. 1939년 5월 영국 정부는 정책을 바꾸어, 추가로 이주할 유대인의 수를 7만 5,000명으로 제한하고 1944년에 이주를 끝낼 것을 제안하는 백서를 발표했다.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이 이 지역에 거주하는 아랍인을 회유한다고 비난하면서 이 새로운 정책에 반대했다.
1926년 선언[편집]
두 번째 밸푸어 선언은 1926년 선언이며 대영 제국이 완전한 자치국임을 선언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맥마흔 선언이란?
영국의 맥마흔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선언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이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과의 서신을 통해 발표한 선언으로, 전쟁 종료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은 영국이 오토만 제국과 대항하기 위해 중동 국가를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국은 1971년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이처럼 영국의 모순된 정책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동지역에서의아랍인과 유대인 간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영국은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변화됨에 따라 군자금의 부족과 미국의 대 독일 참전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정부는 세계적인 금융인이며 유대계 영국인인 시오니스트 총회장 로스차일드 경에게,
유대인들로 부터 군자금의 지원과 미국의 참전여론을 조성해 주는 대가로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약속할 것을 제안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미국의 은행과 금융시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문사나 방송국 같은 매스컴도 상당 수 보유하고 있어 영국정부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뿐만 아 니라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후세인- 맥마흔 협정이 영국정부의 제안을 받아 드리는 촉진제가 되었다. 영국은 제1차 대전에 말려들면서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통로를 오스만 제국(1281-1922)으로 부터 보호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맥마흔으로 하여금 메카의 영주인 칼리프 후세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 쟁에 아랍인들이 참전해 준다면 전후 아랍왕국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들을 위 한 국가건설을 약속한다는 협약을 밸푸어 선언 2년 전인 1915년에 한바 있어, 유대인들로서 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건설에 대한 영국정부의 공식적인 약속이 절실히 필요 했다. 결국 영국은 국가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인과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이중으로 약속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밸푸어 선언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 해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건국의 꿈을 안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알리야(이민) 하는 구체적인 행보를 시작하게 하였다.
밸푸어 선언 이전 팔레스타인 땅에는 수만 명에 불과했던 유대인들이 종전이후 수십만 명으로 그 수가 증가 하였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는 돈을 가지고 팔레스 타인인의 소유의 땅을 사서 농토로 개간하고, 산업시설을 일으켜 그들의 삶의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하자 현지 아랍인들과의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아랍인들이 영국정부에 유대인의 이민을 거부하는 강력한 항의를 제기함으로 인해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금지시키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아랍인들의 압박이 가해지게 되자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30만 유대 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하가나(유대인의 비밀 지하군대)를 조직하여 유대 인의 생존을 지키는 일에 집중 하면서 건국 작업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1차 세 계대전이 끝난 지 20년이 지나도록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지 못 하였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오던 유대인들의 알리야 물결도 소멸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멈추지 않고 계셨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개전되었고, 독일의 히틀러는 호로코스트를 감행하여 600만 의 유대인들을 학살하는 참혹한 일을 저질렀다. 당시 유럽거주 유대인의 수가 900만으로 추산되었으니까 유럽 전체 유대인의 3분의 2가 학살되는 세기적인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었지만 지구상에 어느 한 나라도 유대인의 인권유린에 대해 항의 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가 없는 냉엄한 국제사회의 현실을 직시하게 된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생존과 보호를 위한 국가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홀로코스트에 자극을 받은 유대인 지도자들은 1940년 하가나의 장교들로 구성된 모사드 (Mossad Aliyah Beth:이민로 B 기관)를 비밀리에 조직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을 비밀리에 이민시키는 활동을 전개하여 국민 만들기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 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는 1945년에 이르러 팔레스타인 땅에 정착한 유대인들은 50만에 이르렀다.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이주가 허용됨에 따라 모사드의 비밀활동은 멈추지 않고 전쟁무기 밀수입하는 활동으로 그 기능을 바꾸어 건국시 아랍인들과의 전쟁에 대비해 서 유대인들을 무장시키는 일을 전개해 나갔다. 이렇게 유대인들은 건국의지를 불태우면 서 철저하게 전쟁준비를 하는 한편 벤구리온을 주축으로 한 유대인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유엔을 통한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승인받기 위한 외교교섭을 전개하였다.
반대로 아랍측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이 국가건설을 할 수 없도록 아랍세계의 모 든 힘을 결집하여 방해 하였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유대인을 지지하는 나라는 석유공급에 불이익을 주겠다고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1947년 유엔은 팔레스타인 땅을 유대인에게 54%, 아랍인에게 46% 그리고 예루살렘 지역은 국제 관활 구역으로 할 것을 찬성 33,반대 13, 기권 10표로 결정 하였다. 이로서 유대인 들은 건국 요건인 영토, 국민, 주권이 확보된 것이었다. 유엔결의가 있은 다음해인 1948년 5 월 14일 유대인들은 그들의 국가 이스라엘 건국을 선언 함으로서 1900년 동안 멸망하여 지도에서 그 이름이 사라졌던 유대인의 나라 이스라엘이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이스라엘의 건국은 표면상으로는 중동지역의 한 민족의 국가건설로 보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기독교인의 눈으로 볼 때 이스라엘의 건국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예언하신 말씀의 성취이며 땅 끝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고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기위 해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임을 느낄 수 있다.
"무화가 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 아 나니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이러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에 이른 줄 알라 (막13:28-29)"
무려 세계 대표 종교 중 3개의 성지이지요. 유대교, 크리스트교, 이슬람교.
예루살렘 시 내에도 각 종교의 대표적 유적지가 있습니다.
- 통곡의 벽(유대교), 성묘교회(크리스트교), 오마르 사원(이슬람교)
그렇기 때문에 종교분쟁의 핵심지이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분쟁도 바로 종교전쟁에서 시작합니다.
이 지역의 역사로 따지면 대략 기원전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지요.
이 때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유대인들이 정착해서 국가를 세우니 바로 저 유명한 다윗왕의 유대왕국입니다.
King David Playing the Zither - Oil on canvas, 135 x 198 cm
그러나 기원전 6세기경에 잦은 외침으로 결국 멸망당하고
기원전 1세기를 전후로 해서는 로마의 속령이 됩니다.
박해받던 그들이 2차에 걸쳐 로마에 저항하지만, 로마제국은 반란에 대해 엄격하지요.
신전은 소실되고 유대지역은 황폐해졌으며 유대인들은 살길을 찾아 이 지역을 떠나 세계로 뿔뿔이 흩어집니다. 이것을 디아스포라(이산)라고 합니다.
그러나 637년 이슬람교로 단결된 아랍인들이 로마를 격파하고 이 지역을 차지합니다.
16~20세기 초반까지의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이 지역을 차지합니다.
다시 말해 이슬람 교도들의 지역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에 위세를 떨치던 투르크제국은 결국 영국에게 무릎을 꿇으면서 영국의 속국이 되어버립니다.
이렇게 어지러운 역사 속에서 팔레스타인 지역은세 종교의 종교적 중심지로 성장하는 어지러운 역사를 갖게 되어버린 것입니다.이렇게 19세기까지를 간략히 넘어가고 나서.
다시 이후의 세계를 설명하기 이전에 디아스포라 이후 흩어져버린 유대인들을 조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은 세계로 흩어져 나가면서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게 됩니다.
유대인 격리지구 게토에 대한 것은 모두가 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사실 상당히 찰진 민족입니다.
고등교육과 철저한 실리정신의 민족성을 바탕으로 모두가 기피하는 한가지 종목에 투자하였으니
바로 고리대금업 입니다.
대출도 전화 한통으로 쉽고 빠르게를 외치며 쏴쏴거리던 그들은
현재 세계적인 금융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으며 명실상부 세계를 움직이는 숨은 손으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블루오션 전략이 아니겠습니까!
뉴욕 맨하튼의 월스트리트입니다. 유대인 자본이 장악했지요.이러한 자금을 바탕으로 그들이 추진한 것이 바로 성경에서 약속한 땅. 시온으로 돌아가자! 하는 시오니즘 운동입니다.
시온이 어디냐?짐작하시는 대로 팔레스타인이었던 것입니다.
자. 다시 세계로 돌아옵니다.
연이어 설명할 것은 바로 지금의 이-팔 분쟁의 핵심적인 마찰요소인벨푸어 선언과 맥마흔 선언입니다.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7년에 영국의 외무장관 어서벨푸어는미국내 유대인들을 끌어들여 미국을 참전시키기 위해팔레스타인 지역에 유대인 독립국가를 인정하는 벨푸어 선언을 합니다.
허나 영국은 이미 독일 편에 있던 터키 내의 이슬람 세력의 반란을 종용하면서
아랍인들에게도 팔레스타인 지역을 포함한 곳에 독립국가 인정 선언을 해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이 맥마흔 선언입니다.
2차 대전 이후에 나치의 유대인 학살정책에 힘입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온 유대인들로 인해
2차대전이 끝날무렵 이 지역의 유대인 이주자 비율은 31%에 달했으며유대인이 소유한 땅은 팔레스타인의 5.67%가 되었답니다.
국제적으로 유대인들에 대한 동정여론도 일어나 1947년 UN에서 팔레스타인을 아랍지구 48%와 유대지구 52%로 분할하는 결의안을 가결하고이스라엘이 성립됩니다.
그러나 시오니즘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은오직 유대인들의 나라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 이외의 민족을 배척했는데 특히 아랍민족을 배제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948년 5월14일 이스라엘 독립을 선포하고 곧바로 주변 아랍국과의 전쟁이 벌어지니 바로
모세 다얀 장군(가운데). 아랍권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승리를 이끌어 낸 분입니다.
1차 중동 전쟁입니다.이 전쟁이 이스라엘의 승리로 돌아가게 되면서 팔레스타인. 아니 중동의 패권은 이스라엘이 장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유대인 중심의 새로운 이스라엘 건국과 동시에팔레스타인인 90만명이 주변 국으로 흩어져 난민 생활을 하니 이렇게 팔레스타인 난민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
세계 제2차대전
1939년 9월 1일 독일의 폴란드침입과 이에 대한 영국·프랑스의 대독선전에서부터, 1941년의 독일·소련 개전, 그리고 태평양전쟁의 발발을 거쳐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에 이르는 기간의 이 전쟁은 두 개의 중심이 있어, 첫째, 유럽에서는 영·독전쟁, 독소전쟁, 둘째, 동아시아와 태평양에서의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의 단계가 있다
2차 세계대전은 1939년 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이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전사자는 2,500만 명)는 약 6천만 명이 넘는데,
그 또한, 전 세계의 5대륙 6대양 모든 곳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세계대전’이라는 이름 그대로, 정말 전 세계에 걸쳐 일어난 전쟁이었죠.
전쟁을 일으켰던 나치 독일은 ‘홀로코스트’를 통해, 약 천만 명이 넘는 유대인과 소수 민족들을 처형했고, 미국은 일본 본토에 두 차례나 ‘원자폭탄’을 투하했죠.
이 전쟁이 발발한 원인으로, 역사가들은 다양한 가설을 내놓고 있는데요. 거대자본이 독일을 부추겨 고의로 일으킨 전쟁이라는 음모론적인 시각에서부터 히틀러의 야욕에 의한 전쟁이라는 추측까지.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은 승전국들과 ‘베르사유 조약’을 맺었는데요. 이 조약은 독일인 입장에선 거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어요.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 국민들은 새로운 '구세주'가 나타나주길 간절히 기도했을 겁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이 기다렸던 그 구세주는 불행하게도 '아돌프 히틀러'였죠연합국이 과도한 배상금을 독일에게 물렸기 때문이죠. 이 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국제 사회에서 거의 회복할 수 없독일은 아무런 빛과 희망도 없는 나라로 전락해 버린 것이죠. 이런 암울한 상황에서 미국의 대공황은 독일에게까지 영향을 미쳐, 독일은 점점 나락으로 빠지게 됩니다.는 타격을 입음과 동시에, 심한 모욕감을 느끼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1933년, 나치당 당수였던 히틀러는 독일의 총리로 임명되면서 권력을 얻게 됩니다.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남자가, 가장 암울한 국가의 'No.1'이 된 것이죠.
현직 독일 대통령이 서거한 1934년에 히틀러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총리가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게 하는 법을 개정하며 스스로 '총통'에 오릅니다.
각종 2차 세계대전 영화에서 '하일! 히틀러(Heil Hitler)'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을 거예요. 이 말은, 모든 독일인들이 총통에게 무조건적인 복종을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대단히 무서운 단어이죠. 히틀러가 총통이 되고 나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바로 독일인들을 '세뇌'시키는 작업이었어요.
그것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살고 있던 독일인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이었죠. 즉, 모든 독일인들이 '악과 울분'으로 똘똘 뭉쳐 초토화된 독일을 재건하자는 것이었습니다.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영화 <다운폴>에서, 히틀러의 오른팔인 괴벨스는 독일 국민들을 구하기 위해서 '항복'하라는 부하의 말에 이렇게 답합니다."난 독일 국민들에게 동정심을 느끼지 않아. 그들은 스스로 운명을 선택했고, 지금 그 벌을 받고 있을 뿐이야"
즉, 나치는 독일인들이 스스로 자신들(나치)을 믿고 따랐기 때문에, (아무리 위험에 빠졌다 하더라도) 그 책임도 국민들에게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어찌 되었던 총통이 된 히틀러가 가장 먼저 행동에 옮긴 것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빼앗긴 옛 독일의 영토(오스트리아, 체코 슬로바키아)를 합병하는 것이었어요.
그는 집권한지 5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조약을 어기고 이 두 나라를 합병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939년에는 '폴란드'를 침공하죠.
그런데 당시 폴란드는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국이었어요. 즉, 상호 방위조약(동맹국이 공격받으면 참전해야 한다는 조약)에 의해,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했고
그로 인해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죠. 후일, 2차 세계대전 시리즈에서 자세히 언급하겠지만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프랑스와 영국의 독일에 대한 대처는 굉장히 무능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은 어떻게든 전쟁을 막기 위해,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을 시기에서도 히틀러의 비위를 맞추고 달랬죠.
하지만, 이러한 처사는 히틀러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이었죠. 왜냐하면, 히틀러의 '진짜' 목적은 3개국 합병이 아니라 '유럽 정복'이었으니까요.
지금까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유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 보았는데요. 미국은 1941년 마지막 무렵에야 이 전쟁에 참전합니다.
미국이 고립주의 노선을 채택한 진짜 이유는 '돈' 때문이었습니다.
1차 세계대전에서 미국은 수많은 군수 물품을 각국에게 수출하면서 엄청난 떼돈을 벌었습니다. 한 마디로 '겁나게 남는 장사'를 한 것이죠.
그런데 대공황으로 휘청거리고 있을 찰나에 또 '다른 나라들끼리의 전쟁'이 일어난 겁니다. 바로 2차 세계대전이었죠. 아마, 미국 정부는 입이 귀에 걸렸을 지도 모릅니다.
미국은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상 유례가 없는 인력을 동원하여 '군수 공장'을 풀가동합니다. 그 당시의 미국의 군수 물품 생산량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지는데요.
결과적으로, 미국은 단독으로 전 세계 군수 물품 생산량의 41%를 생산해 내는 저력을 보여주죠. 말 그대로 미국이란 국가 자체가 마치 하나의 '군수 공장'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미국 정부는 자국 내에 있던 모든 공장들의 40%를 군수 생산 공장으로 전환합니다. 세세하게 살펴보면, 전쟁이 벌어진 약 5년의 기간 동안
전투기 324,750대 (미국은 4년 동안 18,431기의 폭격기를 생산했는데, 이는 1시간에 1대 씩 생산하는 꼴)
탱크 88,000여 대. 이는 독일의 타이거 전차가 1대 생산되는 기간에 미국의 M4 셔먼 전차는 37대가 생산되는 꼴이었어요.
군함 7,600척 등을 생산해 냈습니다. 마치, 스타크래프트에서 'Operation CWAL(생산 스피드 업)'을 누르고 계속 군수 물품만 찍어낸 것으로 비유할 수 있죠.
이러한 경이적인 생산 스피드를 보여준 미국 군수 산업의 원동력은 바로 '노동력'이었습니다. 대공황이 발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라 미국에는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죠.
그런데, 1943년이 되자 미국에는 거의 모든 국민이 일자리를 얻게 됩니다. 바로 군수 공장으로 말이죠. 그래도 노동력이 부족하면, 그때는 '여성'들을 동원했습니다.
바로 '리벳공 로지'라 불리는 미국의 여성들인데요. 이들은 군수 공장에서 24시간 동안 교대로 일을 하며 비행기, 탱크, 무기, 탄약 등을 생산했습니다.
규모가 현재 우리나라 인구(약 5천만 명)보다도 많습니다.
세계제1차대전
이는 시대적으로 슬라브족의 중심인 로마노프왕실과 독일과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함스부르크왕실과 영국프랑스 스페인등 브르봉왕조가 지역패권과 식민지 영토확장등에 혈안이 되어 있고 프러시아(프로이센)를 주축으로 대독일제국을 건설한 빌헤름2세와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유럽을 뒤흔들고 있을때 1914. 6.28일Austro-Hungarian Emperor Franz Josef (오스트리아-항거리안 황제 프란츠 조셉) 황태자 부처( Franz Ferdinand)가 세르비아(전 유고 현재세르비아)에 군대 열병식참가하는길에 Sarajevo에서 한 세르비아 청년에의해 권총으로 암살된 계기로 1차대전이 발발하였습니다
이 암살사건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였고 이 이전부터 각국이 연대하여 블록을 형성하여 전쟁할 이유를 찾지못해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 사라예보의 한발의 총성으로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1개월만에 선전포고 곧이어 독일은 러시아에게 선전포고 영국 프랑스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게 선전포고 전 유럽이 3일만에 전쟁의 도가니속으로 들어가버렸습니다
결과
끝내 독일을 중심으로한 함스브르그왕조가 멸망하고 독일은 유사이래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물게 되었습니다 결국은 독일은 이 엄청난 전쟁보상비를 해댈능력이 없어 결국은 2차세계대전으로 이어지게된 경우 입니다.
1차세계대전은 중세왕조들이 그들의 블록을 형성하여 몰락하는 왕조를 재 건설하는의미와 식민지 수탈정책에서 다른나라와 뒤질세라 각축장이 벌어졌고 이 왕조블록은 새로운 물결이 엄습해오는과학 기술등 산업혁명의 가속화와 국제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인식하지 못하여 전쟁이란 옛날 방식을 채택하여 유럽세계 발전에 100년이상 후퇴시키고 그 세계적 주도권을 미국에게 내놓은것이 되었습니다
1차대전이후에 세계 경제공황이 일어남니다
미국은 테임즈강 유역 개발공사등 국책사업등 일명 뉴딜정책으로 경제공황위기를 벗어나려했고
식민지가 많았던 영국과 프랑스는 식민지와 자국을 하나로 묶는 블록경재체제를 통해서 위기를 타계하려했습니다 ((순 식민지만 피해를 보는 나쁜 정책입니다))
그리고 소련은 사회주의...
그러나 식민지수가 적었던 일본과 1차대전 패전이후 모든 식민지를 잃었던 독일 그리고이탈리아는
군국주의와 나치즘,파스즘같은 사상으로 국민들을 무장 자국민의 불만을 해외의 다른국가로 몰아가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사상으로 국민들을 전쟁터로 내몬거죠
간단히 말해서 '이대로가면 굶어죽는다 우리가 이런 고통을 얻는건 영국이 우리의 식민지를 뺏아서 이렇다 그러니깐 나가 싸워 식민지를 얻자 강국이되자' 이런식이였고...
또 군수공장을 돌리면서 실업률을 낮추고, 청년들을 징용해가 또 실업률을 줄이고
이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2차대전이 일어난것이죠
처음에는 독일의 우세한 전력으로 유럽을 석권해 나갔습니다
폴란드 발트삼국 베네룩스 3국 프랑스 등을 차례로 집어삼키면서 전유럽의 85%를독일과 추축군세력이 점령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독일은 마지막남은 저항국가 영국을 향해 폭격을 가하려했으나...
영국과의 공중전에서 패배합으로써 폭격은 사실상 불가능해졌고영국을 천천히 아사시키려 합니다
근데 좀처럼 영국이 항복할 기미를 안보이자히틀러는 생각합니다 '저 영국놈들이 뭘 믿고 버티는거지..'
그러다 히틀러는 불가침조약을 맺은 소련을 믿고 영국이 저러는거다영국은 소련이 참전하기를 기다리는거다 라는 커다란 오판을합니다
당시영국은 소련이아니라 미국을 믿고있었습니다
결국 히틀러의 오판으로 독일군의 소련을 침공...
레닌그라드까지 함락시키고 모스크바까지 쳐들어갔으나
모스크바 전투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대패...그후로 계속 밀립니다
그러다 히틀러의 마지막 발악벌지전투가 벌어지나 처음 우세한 공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차를 가동시킬 연료부족과 히틀러의 오판으로 패배그 후로 이렇다할 반격 없이 연합군에 깨지다가
결국 1944년 노르망디상륙작전으로 사실상 2차대전의 종지부를 찍힙니다
결국 44년 8월 독일은 항복합니다
일본도 역시 독일과 같은이유로 참전합니다한국을 식민지로 만들고 자원확보를 위해 중국을 칩니다
이것이 중일전쟁입니다
그러나 자원확보를 위해 중국을 쳤으나 전쟁의 양상이 끝없는 소모전으로 들어갑니다
결국 일본은 여기에 들어가는 군비를 충당하기위해 자원을 위해
전선을 확대시킵니다 필리핀등 동남아시아쪽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에서 소비되는 자원을 어느정도 감당은했어도중일전쟁을 수행하면서 인적자원이 부촉해집니다즉 전선은 확대되었는데 전선으로 차출시킬 병력이 부족해진겁니다
결국 이러한 병력과 군비확보를위해 인도차이나반도쪽으로 전선을 확대합니다
그러나 충당되는 병력보단 소비되는 병력이 많아 전선만확대되었지...
상황이 나아지는것은 확대되었을 초기 아주 잠깐뿐이었습니다
그렇게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전선이 확대되자인도차이나반도와 필리핀에있던 프랑스 영국 미국군과 전투가 일어났고당시 유럽에서 독일과 싸우던 중이라 다들 일본에게 패한상태
그래서 미국은 별력을 유럽에 집중시키위해 일본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킵니다
결국 일본은 이에 빡쳐서 미친짓을 감행합니다
바로 진주만 습격
진주만 습격은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이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가 진주만기습작전을 제안합니다
결국 이 진주만 습격의 성공으로 야마모토 이소로쿠는 태평양전쟁때일본국 연합함대 사령관이 됩니다
그는 나중에 부건빌섬에서 수송기로 이동중 미국 전투기들에 의해 격추전사합니다
진주만이후로 일본은 ABCD포위 작전
A는 아메리카 B는 브리튼 즉 영국 C는 차이나 중국 D는 네덜란드
4개국의 포위작전으로 전쟁이 본격화됩니다
그리고 소련의 대일선전포고
일본은 진주만이후 전 전선에 거쳐 연전연패를 거듭하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결졍적인 패배를하고 이오지마전투 이오전투말라야 전역등의 전투에서 잇달아 패배
결국 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2발의 원폭을 맞고 45년 8월 15일 항복합니다
맥마흔 선언이란?
영국의 맥마흔이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약속한 선언
1차 세계대전 중인 1915년 10월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인 맥마흔이 메카의 샤리프 후세인과의 서신을 통해 발표한 선언으로, 전쟁 종료 후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아랍지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선언은 영국이 오토만 제국과 대항하기 위해 중동 국가를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영국은 1971년 미국을 전쟁에 끌어들일 목적으로 미국에서 영향력이 큰 유대인들에게
팔레스타인 거주 지역에 유대국가 건설을 약속한다는 '벨푸어 선언'을 한다.이처럼 영국의 모순된 정책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동지역에서의아랍인과 유대인 간 갈등의 시발점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말려든 영국은 전쟁의 양상이 장기전으로 변화됨에 따라 군자금의 부족과 미국의 대 독일 참전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따라서 영국정부는 세계적인 금융인이며 유대계 영국인인 시오니스트 총회장 로스차일드 경에게,
유대인들로 부터 군자금의 지원과 미국의 참전여론을 조성해 주는 대가로 종전 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을 약속할 것을 제안 하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유대인들은 미국의 은행과 금융시장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신문사나 방송국 같은 매스컴도 상당 수 보유하고 있어 영국정부의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여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 뿐만 아 니라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후세인- 맥마흔 협정이 영국정부의 제안을 받아 드리는 촉진제가 되었다. 영국은 제1차 대전에 말려들면서 영국의 중요한 식민지인 인도로 가는 통로를 오스만 제국(1281-1922)으로 부터 보호할 여력이 없었다. 따라서 당시 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 판무관 맥마흔으로 하여금 메카의 영주인 칼리프 후세인에게, 오스만 제국과의 전 쟁에 아랍인들이 참전해 준다면 전후 아랍왕국의 독립과 팔레스타인 지역에 아랍인들을 위 한 국가건설을 약속한다는 협약을 밸푸어 선언 2년 전인 1915년에 한바 있어, 유대인들로서 는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들의 국가건설에 대한 영국정부의 공식적인 약속이 절실히 필요 했다. 결국 영국은 국가적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팔레스타인 땅에 아랍인과 유대인의 나라를 세울 것을 이중으로 약속한 결과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밸푸어 선언이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국가건설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 해 동서남북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건국의 꿈을 안고 팔레스타인 땅으로 알리야(이민) 하는 구체적인 행보를 시작하게 하였다.
밸푸어 선언 이전 팔레스타인 땅에는 수만 명에 불과했던 유대인들이 종전이후 수십만 명으로 그 수가 증가 하였다. 팔레스타인 땅으로 돌아온 유대인들 중에는 돈을 가지고 팔레스 타인인의 소유의 땅을 사서 농토로 개간하고, 산업시설을 일으켜 그들의 삶의 영역을 넓혀 가기 시작하자 현지 아랍인들과의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하게 되었고, 유대인들의 확장에 위협을 느낀 아랍인들이 영국정부에 유대인의 이민을 거부하는 강력한 항의를 제기함으로 인해 영국정부는 팔레스타인 땅으로의 유대인 이민을 금지시키게 되었다.
유대인들은 이 같은 아랍인들의 압박이 가해지게 되자 팔레스타인 땅에 있는 30만 유대 인들을 보호하기 위한 수단으로 1920년 하가나(유대인의 비밀 지하군대)를 조직하여 유대 인의 생존을 지키는 일에 집중 하면서 건국 작업에는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제1차 세 계대전이 끝난 지 20년이 지나도록 유대인들은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의 나라를 세우지 못 하였을 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 땅으로 이주해 오던 유대인들의 알리야 물결도 소멸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멈추지 않고 계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