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기운이 만연한 2004년 3월 14일 한국풍수지리 연구소에서 아홉 번째로 예정된 풍수지리답사는 산자수명(山紫水明)하고, 인심이 순후(淳厚)하여 살기 좋기로 소문난 청풍명월의 고장인 충청도 땅, 보령과 홍성지역 일대로 기획되었다.
황사 현상인양 운무가 짙게 깔린 경부고속도로를 질주하던 답사버스가 천안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우측 길가에 정차하자 우리를 기다리던 충청지역일대의 회원들이 반가운 미소를 보내며, 차량으로 오른다. 그런데 오늘따라 만원이다. 그야말로 맞춤식 만석(滿席)이 되어버린 것이다.
구수한 말씨와 함께 인정이 철철 넘치는 서산선생의 안내에 따라 천안외곽도로를 달리던 답사버스는 온양을 지나서, 눈부시게 발전한 아산시 신창면을 통과하여, 1시간을 더 넘게 달려와 보령땅 주교면의 토정선생 묘소 앞 주차장으로 진입, 긴 여정의 하품을 토해낸다.
차량에서 내려 묘역을 쳐다보니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 답사 팀들이 토정선생 묘소를 중앙으로 빙 둘러서서 답사에 열중이다.
《즐거운 점심 식사》.........................《김좌진 장군 음택지로 출발》
오후 일정으로 보령시 청소면에 자리잡은 김좌진 장군의 음택 답사를 마치고, 바로 지척에 있는 김극성 선생의 음택을 답사하기 위해 1차선의 한적한 농로로 진입한다. 약 5분 정도를 더 들어가 농가와 함께, 동리 밭 사이로 산뜻하게 단장한 재실이 나타난다. 재실 못 미쳐 농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돌계단 위로 조성된 원형 봉분을 향해서 오른다.
김극성(金克成)선생은 1474년(성종 5년)에 진사 김맹권(金孟權)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 중종(中宗)때에 우의정을 지낸 문신이다. 자(字)는 성지(成之)이고, 호는 청라(靑蘿). 또는 우정(憂亭)이며, 본관은 광산(光山)이다. 시호는 충정공(忠貞公)에 봉해졌으며, 연산군(燕山君) 4년(1489) 별시문과(別試文課)에 장원급제하여 처음 전적(典籍, 성균관의 정육품)으로 벼슬길을 시작하였다, 얼마 후 서장관(書狀官, 사신을 호종하던 삼사의 하나로 행대어사를 겸함)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 북평사(北評事, 함경도 병영에 있던 정육품 문관)가 되었다.
그 뒤 사간원 헌납으로 있을 때다. 연산군이 심순문을 죽이라는 어명이 떨어지자 죽기를 무릅쓰고 그를 변호하다가 도리어 죽음을 모면한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하여, 분의정국공신(奮義靖國功臣) 4등에 녹훈(錄勳)되어 광성부원군에 봉해졌고,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임명된다. 이듬해 부모를 봉양코자 스스로 외직(外職)을 청하여 사천군수(泗川郡守)로 나갔다가 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걸쳐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된다. 그 후로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관찰사(觀察使) 공조참판 대사헌 예조판서 등을 두루 역임한 후 우참찬, 이조판서와 평안도 관찰사를 거쳐 찬성(贊成)이 되었다가 당시의 세도가인 김안로(金安老)에게 모함을 받아 정광필(鄭光弼)과 함께 전라북도 흥덕(興德)으로 유배되어 7년 간 귀양살이를 한다.
1537년(중종32) 김안로가 사사(賜死)되고, 다시 벼슬길에 올라 우의정(右議政)에 이른다. 그는 벼슬길에 있으면서 사람이 사는 양심의 해방에 대하여 허심탄회한 논의를 즐긴 문신으로, 세상이 아무리 어려울 때도 고고(孤高)한 자세로 풍파를 넘기기도 하였다. 67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왕이 크게 슬퍼하여 사흘동안이나 조회를 철폐하고, 조의와 부의 등 넉넉한 예(禮)를 다한다.
그의 비문(碑文)을 보면, 연산군과 심순문(沈順門)에 대하여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연산군이 심순문의 죄가 없음에도 그를 죽이고자 여러 신하에게 그 뜻을 피력하자, 아무도 감히 어떤 말을 못한다. 그러자 공께서 대사간(大司諫)인 성세순(成世純)을 향해 "벼슬이 간장(諫長)이면서 죄 없는 사람이 죽어 가는데도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은, 비록 몸을 보전하기 위하여 그렇다고 하지만, 직분을 저 버리는 일은 어찌 하시렵니까?" 하니 좌우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반드시 심순문과 함께 죽는다 해도 득(得)되는 것이 없지 않소" 라고 말한다. 그러자 공께서 성세순을 향해, "죽고 사는 것은 큰 문제이기 때문에, 제각각 자기 뜻에 따라 처신한다지만, 오늘 제일 먼저 죽을 사람은 반드시 우리 두 사람이니 어찌 다른 사람들까지 화가 미칠 수 있게 하리오!" 라고 말한 뒤, 심순문의 원통함에 대하여 왕에게 아뢰니, 연산군이 비록 들어주지 안 했지만, 벌도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용맥을 살피고자 회원들과 함께 봉분 위 입수룡을 따라서 한참을 위로 오른다. 현무봉에서 출맥한 입수룡이 펑퍼짐하게 넓게 퍼진 양룡(陽龍)으로 내려와 봉분에서 조금 떨어진 위쪽에서 80∼90。로 몸통을 크게 꺾어 행룡하여 봉분을 지었다. 즉, 선생의 묘소와 부인의 묘가 정혈처(定穴處)를 벗어나, 용맥과 함께 따라온 물이 하합(下合)되는 바깥쪽으로 자리를 잡다보니 수기(水氣)를 잔뜩 머금은 봉분이 부실하고 이끼 층이 두터워 자꾸만 흙덩이가 아래로 쏠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회원들과 수맥봉으로 측정해보니 선생과 부인의 봉분 뒤에서 많은 양의 물이 감지된다.
정혈(定穴)이란 침구(鍼灸)와도 비유된다. 스스로 일정한 위치를 점해 터럭 끝만큼의 차이를 보여도 안 된다. 옛말에 용을 살피는 것은 쉬워도 혈을 정한다는 것은 어렵다고 하였다. 손가락 하나 차이로 만중산이 막히는 것과 같아, 혈의 상하(上下)를 정할 때, 일척(一尺)만 높아도 용(龍)이 상하게 되고, 일척만 지나쳐 버려도 혈을 벗어나는 것이 되어, 혈을 정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어렵다는 것이다.
이곳은 작년 4월경에 처음 답사를 했던 곳으로 에피소드와 함께 기억이 새롭다. 작년 답사 때다. 간산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할아버지 한 분이 묘소로 올라오신다. 목례를 드리자 어디서 왔느냐는 물음과 함께, 본인을 소개하신다. 본인은 김극성 선생의 7대 손으로 현재는 선생의 묘를 관리하신단다. 마침 그때 운동복차림에 모자를 쓴 예봉스님과 함께 있었는데, 이곳에다 선생의 묘소를 점한 내력을 들려주신다. 그런데, 얘깃거리의 반 이상을 스님에 대한 욕을 할애하는데, 옆에 있던 예봉스님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어찌나 웃음이 나오는지 속으로 배꼽을 잡는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이렇다. 선생이 돌아가셨는데, 마땅한 자리를 잡지 못해 근 4개월 동안이나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선생의 묘 자리를 점지할 스님을 모셔 왔다고 한다. 그런데, 상당한 시일이 지났는데도 마땅한 터를 정하지 못하자, 문중 사람들이 스님을 몽둥이로 위협도 하고, 두 손을 묶어 독 속에 가두기도 하는 등 명당을 빨리 찾으라고 강요를 했다고 한다. 그러자 비위가 상할 대로 상한 스님이 속으로 비웃으며, 새의 날개가 부러진 비학절우(飛鶴切羽)의 땅을 명당이라 하고는 출 행랑을 치듯 떠나버렸다고 한다. 스님이 잡아준 터에 장례를 치른 얼마 뒤, 선생의 생질이 되는 토정(이지함)이 이곳에 들렸는데, 이곳 묘소를 보고 "이것도 묏자리냐" 고 개탄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그러한 영향 때문인지, 후손들의 발복이 매우 한미(寒微)하였다고 한다.
나중에 전해들은 이야기다, 도망간 스님은 이곳에서 멀지 않은 인천 채씨(蔡氏) 문중을 찾아가 선생의 묘소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터를 점지해 주고는 훌쩍 떠났는데, 그 곳이 바로 옥녀탄금형(玉女彈琴形)으로 유명한 채극철(蔡克哲)의 묘소로 전한다. 그것은 내포(內浦, 보령, 홍성, 예산 등)의 명당자리는 주인이 따로 있었기에 선생의 음택을 점지하면서 한쪽 땅만 뱅뱅 돌면서 눈속임을 하였다고 한다.
옥녀탄금형의 주인공인 채극철은 숭정처사(崇禎處士)라 부르던 선비였는데, 명종 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사림(士林, 유림)들의 뜻이 크게 꺾이자 등과(登科)를 포기하고 낙향하여, 방문을 걸어 잠그고 벗들과 시문(時文)을 지으면서 세상을 풍미하였다고 한다.
격룡(格龍)을 한다. 을룡(乙龍) 일절입수(一節入首)하여 관대룡(冠帶龍)이 되는 묘좌유향(卯坐酉向)이다. 파구(破口)는 좌수도우(左水倒右)하는 물이 신방(辛方)으로 나간다.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신방(辛方), 소수(消水)는 목국(木局)의 자왕향(自旺向)으로 발복부귀(發福富貴)하고, 남녀 모두 흥왕(興旺)하다는 향법(向法)이다. 그리고 사대국법(四大局法)에 의한 길흉여부는 파군유거반위길(破軍流去反爲吉)이 되어 출장입상(出將入相)한다는 수법(水法)이다.
그러나 물이 아닌 용법(龍法)에 의한 향은 정음정양법(淨陰淨陽法)으로, 을룡(乙龍)은 양룡(陽龍), 유향(酉向)은 음향(陰向)이 되어, 음양불배합을 이룬다.
필자는 산(묘소)에 오르면 기(氣)를 응용하여 대화를 시도하려 한다. 7년 동안에 걸쳐 단전수련을 하다보니 자연히 몸에 밴 현상이다. 그것은 번거럽고 어지러운 세상살이의 찌꺼기를 걸러내고 본래의 나를 알고자 한 마음공부의 일환으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나만의 수련 법이다. 그러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여, 산을 오르기도 하고, 음택답사를 해보지만 아직도 완전한 지기(地氣)를 느끼지 못하고, 현상을 먼저 유추하려 하거나 수맥봉과 같은 매개체를 이용하여 모든 것을 판단하고자 함은 아직도 마음속의 부유물을 통제하지 못한 연유일 거라 본다.
평(評)이다.
정혈(定穴)을 비껴난 과맥(過脈)에 수법(水法)이 합당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단 몇 십 센티 차이로 명당(明堂)과 허당(虛堂)이 갈라지는 사실을, 산은 거짓이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순천자(順天者)는 흥(興)하고 역천자(逆天者)는 망(亡)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곳 묘역을 유심히 살펴보면 조상들의 부덕(不德)을 해소하고자 노력을 기울인 후손들의 정성어린 흔적들이 이곳 저곳에서 나타난다. 우백호의 허전함을 커버하기 위하여 수림대를 조성해 놓은 동수비보(洞藪裨補)와, 조상의 묘소를 지극 정성으로 보살피고자 아예 이곳으로 이주하여 살고 계시는 할아버지의 정성하며, 재실의 보전과 묘소의 계단설치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하게 방치된 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