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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13.10.14 03:11
[덴마크 공모전 '타임 투 디자인' 1등 在獨 디자이너 이상혁]
- 수상작 '유용한 실업자'
공사할 땐 꼭 필요해도 끝나면 해체되고 마는 '비계'… 半실업 내 신세 같아 공감
유명 디자인상을 탔느니, 전시에서 호평받았다느니, 해외에서 활동하는 한국 젊은 디자이너들의 활약상이 종종 들려온다. 그런데 이들이 막상 현지에서 뿌리내리기란 쉽지 않다. 제 나라 디자이너도 많은데, 굳이 경력 짧고 언어 장벽 있는 이방인 디자이너를 우대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씨앗만 뿌린 채 반(半)실업 상태로 고사(枯死)하는 디자이너가 많다.
이 불안한 상황을 되레 디자인 영감(靈感)으로 반전시켜 유럽 디자인계를 주목시킨 한국 젊은이가 있다. 지난 8월 덴마크의 디자인 공모전 '타임 투 디자인(TIME TO DESIGN)'에서 1등을 차지한 재독(在獨) 디자이너 이상혁(30·사진)씨다. '타임 투 디자인'은 2008년 덴마크 국립아트워크숍(SVK)이 "악수(handshake)와 평가(check)만 하는 상업적 디자인상"에 반기를 들고 만든 대안적 디자인상이다. 올해는 전 세계 40여개국 디자이너가 참여했다.
"디자인의 진정성에 한 발짝 더 가까이 가자"는 취지에 가장 부합되는 작품으로 평가된 이씨의 작품은 '유용한 실업자(Useful Jobless)'라는 이름의 선반. 가구에 '실업자'라 이름 붙인 것도 특이한데, '실업자'에 '유용하다'는 모순적 수식까지 더했다.
실은 디자이너의 자화상이다. 이씨는 네덜란드에서 유학한 뒤 2012년 독일 베를린으로 건너가 작업을 시작했다. 지난해 유럽 양대 가구 박람회인 '쾰른 국제 가구 박람회'가 실시한 'D³ 콘테스트'에서 2등을 차지해 국제 무대에 이름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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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혁씨가 공사장 비계 모양으로 만든 선반 '유용한 실업자'. 위 사진은 독일 공사장에 설치된 비계. /이상혁 제공
"유명한 상도 타고 언론에도 소개가 꽤 됐는데 막상 현실은 만만치 않았어요. 소득이 거의 없으니 사실상 실업자였죠. 대학 마치면 사회에 '유용한 이'가 될 줄 알았는데…." 어느 황량한 겨울날, 의기소침한 그는 베를린 거리를 걸었다. 그날 따라 공사판의 비계(높은 곳에서 일할 수 있도록 설치하는 가설물)가 자꾸만 눈에 박혔다.
"비계는 건물 지을 때 꼭 필요하지만, 공사 끝나면 해체돼 다른 공사판으로 전전해요. 노마드(유목민)처럼 이 나라 저 나라 돌아다니면서 불안정하게 작업하는 제 운명을 보는 것 같았어요." 비계 같은 자신의 신세를 자조적인 감상(感傷)으로 허비하지만은 않았다. "문득 구조를 봤어요. 설치하고 분리할 수 있고, 조인트(이음) 부분이 견고하더군요." 비계 구조를 가구에 적용키로 했다.
'유용한 아이디어'로 바꾸기 위해 발품을 팔았다. 베를린 시내 공사판 100여군데를 누볐다. 그렇게 해서 동그란 나무 봉을 황동 나사로 조여 만든 '유용한 실업자'가 탄생했다.
"암울한 현실에서 이런 작품이 탄생했어요. 한탄하고만 있었으면 더 나빠졌겠죠." 무용(無用)해 보일 법한 삶을 스스로 유용(有用)하게 개척한 디자이너는, 이 작품이 또래의 청년 실업자들에게 "작은 위안"이 되길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