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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Review]
교회의 위치
4.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된 교회 (나)
이현래 목사님 주일 말씀 2014. 5. 18.
[계시록 21:9~16]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가로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으매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 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 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 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13 동편에 세 문, 북편에 세 문, 남편에 세 문, 서편에 세 문이니 14 그 성에 성곽은 열 두 기초석이 있고 그 위에 어린 양의 십 이 사도의 열 두 이름이 있더라 15 내게 말하는 자가 그 성과 그 문들과 성곽을 척량하려고 금 갈대를 가졌더라 16 그 성은 네모가 반듯하여 장광이 같은지라 그 갈대로 그 성을 척량하니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요 장과 광과 고가 같더라 17 그 성곽을 척량하매 일백 사십 사 규빗이니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 18 그 성곽은 벽옥으로 쌓였고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 같더라”
나. 거룩한 성의 완성
1) 인류의 소망
헬라인들은 현상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요 불완전한 복사품에 불과하고 완전한 실재는 따로 있다고 생각함으로써 그 완전한 세계를 대망하고 있고, 유대인들은 거룩한 성의 부흥과 재건을 소망하고 있다. (사54:11,12,60:10~20,학2:9,겔48:35참).
거룩한 성의 완성!!!
인류는 어디에 사나 다 마찬가지로 어떤 완성된 세계를 꿈꾸고 있고 상상하고 있고 소망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태평성대를 기다리고 있다. 이 태평성대는 항상 현명한 군주, 성군(군자사상) 이런 분들이 나와서 백성을 잘 통치해서 이루어지는 나라라고 믿고 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항상 태평성대를 위해서 성군이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요순시대는 그 사람들의 대표적인 이상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문왕 무왕 등등해서 유명한 왕들이 있는데 이런 왕들이 그들의 이상이다. 이런 왕이 나와야 한다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다. 중국의 정치지도자들은 이런 이상 속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참 중요하다. 모택동이 중국을 통일할 때 꼭 공산주의 사상이 좋아서만 아니었다. 모택동의 인품 때문에 중국이 통일된 것이다. 중국은 땅이 크기 때문에 어떤 사람도 무력을 사용해서 단독으로 전국토를 통일할 수 없다. 덕이 없으면 백성이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군왕은 덕을 갖추어서 백성이 따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사상이고 또한 동양사상이기도 하다.
월남의 호치민이 이끄는 월맹이 미국이라는 초강대국을 이겼다. 그것도 공산주의 때문이 아니었고 호치민의 인품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이 동양사상의 핵심은 군자(君子)다. 성군 이것이 성경적으로 말하면 메시야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임금이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통치자들은 이런 이상 안에 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고 또 그런 사람이라야 집권할 수 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나라가 중국이다.
이런 세계를 서양세계의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서양은 그런 인물 중심이 아니고 시스템 중심이기 때문에 어떤 위대한 인물이 나와서 태평성대를 만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사람들은 성경에 메시야 사상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은 이해하기 대단히 곤란하다. 중국 사람들은 메시아사상을 성군으로 해석해 준다면 이해하기 쉽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면에 헬라인들(서양 사람들)은 현상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세계 안에는 완전한 진리가 있는데 그 진리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현상계는 이데아의 복사품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완전한 실제는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불완전하다는 사상이 여기에서 나왔다. 인간은 이데아의 복제품인데 인간이 완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완전한 실제가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 완전한 실제! 이것이 중국사람 같으면 군자(君子)라고 해서 인격적인 것이 되는데, 서양 사람들은 인격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진리 정의 이런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니까 생각이 많이 다르다. 이렇게 정의와 진리로 다스려지는 세계가 올 것이다, 그런 세계가 와야 한다고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우리나라도 원래는 동양 쪽이다. 그런데 서양 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진리와 정의로 통치되는 나라를 갈망하고 있다. 그러다보니까 싸움과 분쟁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에서 대통령해서 잘한다는 소리를 듣기는 진짜 어렵다.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이 아니면 정말 어려울 것 같다. 왜냐하면 자꾸 진리를 생각하기 때문이다. 영원한 진리 완전한 것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들은 인물을 대망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완전한 세계를 대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중국 사람들하고 비슷한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 거룩한 성의 부흥!! 다윗이 건설했던 나라, 그것의 부흥을 기다리고 있다. 이 나라가 재건되기를 바라고 있는데, 중국 사람들이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다윗시대를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거룩한 성의 부흥과 재건을 소망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이라 할 수 있고 여기에서 메시야 사상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 다윗과 같은 왕을 기다리는 것이 메시야 사상이다.
중국 사람들의 성군사상과 비슷한데 다만 중국 사람들은 그 성군을 하늘이 내려 준다고 하지만 그 하늘이라는 개념이 유대인들처럼 구체적으로 인격적인 것이 아니고 좀 추상적이고 막연한 그런 개념이다. 중국 사람들은 왕을 천자(天子)라고 한다. 그 사람들도 하늘을 생각하지만 비인격적인 하늘이다.
유대인들의 특색은 전능하신 여호와가 이런 사람을 보낸다는 것이다. 이것이 중국인들과 다른 점이다. 전능하신 여호와는 반드시 자기가 약속한 백성에게 그 약속을 실현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유대인들은 신앙적인 백성이 된 것이다.
(유대회당의 기도: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사랑을 가지고 들어가서 당신이 약속한대로 그곳에서 살게 하소서, 그 도성을 우리의 날에 급히 재건하고 다윗의 보좌를 거기 속히 세우소서, 오, 주여, 예루살렘의 건축자 당신을 찬송합니다)
유대인들의 회당에 들어가면 이런 기도(祈禱)를 한다고 한다. ‘당신의 도성 예루살렘으로 사랑을 가지고 들어가서 당신이 약속한대로 그곳에서 살게 하소서, 그 도성을 우리의 날에 급히 재건하고 다윗의 보좌를 거기 속히 세우소서, 오, 주여, 예루살렘의 건축자 당신을 찬송합니다.’이런 시를 읊고 기도를 올린다고 한다. 그러니까 이 기도를 통해서 그들의 소원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실 때 “하늘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했는데, 지금도 유대인들은 거룩한 성이 재건되기를 기도하고 있다. 현실적으로도 그들은 통곡의 벽이라는 곳에 가서 벽을 치면서 통곡을 하면서 이 기도를 한다. 언젠가는 다윗성이 회복되어서 다윗왕국과 같은 나라가 재건되고 그 나라가 세계를 지배하는 영광스런 나라가 될 것이라고 소망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사43:18) 하였고,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후 5:17) 하였으며, 요한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하였다. 처음과 나중이라는 말은 기원이요 원천(arche)이며, 목표요 완성(telos)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사야는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사43:18)한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망해가고 있고 새 것을 볼 수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이사야는 하나님을 상대로 해서 어떤 계시를 보고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라”(사43:18)는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새일”이라는 말이 앞에서 말한대로 다윗왕의 시대를 회복할 것이라는 그런 뜻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다”(고후 5:17) 이것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때 당시의 암울했던 시대에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새것이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과 다른 것은 구약은 어떤 시대를 기다리고 있는데 신약에 와서는 어떤 인격을 기다리고 있다. 새것, 새로운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이것을 요한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시작과 끝이라”(계22:13) 이런 말을 마지막에 하게 된다. 여기에서 “처음”이라는 말은 근본이고 원천이라는 말이고, “나중”이라는 말은 목표이고 완성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원천과 완성이라는 뜻이다. “나는 원천이기도 하고 완성이기도 하다.”는 말인데 이 말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룬다는 말이다. 시작하신 이가 이것을 완성하신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우주가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생겼다면 하나님께서 완성하신다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집을 짓는 것을 보면 ‘아~ 저 집은 완성되겠구나!’이렇게 생각한다. 왜냐하면 집 주인이 목표를 가지고 짓고 있는 것이니까 완성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 동네에 가면 여러 채의 집을 짓고 있다. 기초를 놓고 집을 짓기 시작하는데 얼마 있지 않아서 집을 다 짓는다. 그러니까 건축자, 집주인은 처음이고 나중인 것이다. 그 사람이 시작도 했고 마치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주와 인생을 창조하신 분은 처음이고 나중이시다. 내 인생도 나를 시작하신 이가 있다면 나를 완성하실 이도 있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우연히 굴러다니다가 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무조건 잘 돼보자고 달리는 사람과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사람과는 다르다.
‘우리는 하나님께로 와서 하나님께로 간다. 분명히 나는 그냥 이 땅에 와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 의해서 내가 와 있으니까 하나님의 목적을 나를 통해 완성하신다.’는 이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어떤 경우에도 그렇다. 어떤 경우에도 그 생각을 가져야 한다. 가령 현실이 좀 안 좋든지, 내가 좀 잘못하든지, 이런데 휘말려 들어가면 안 되고 건축자의 생각 속에 우리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집을 짓는 데도 어떤 때는 비가 와서 못하기도 하고 공사가 잘못되어서 다시하기도 하고 이렇지 않은가? 그러나 그것이 우연히 된 것이라면 비바람이 불면 허물어지고 말아 버린다. 그런데 건축자가 있어서, 목표를 가지고 있는 분이 있어서하기 때문에 허물어져도 다시 짓고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다시 짓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도 주관자가 있기 때문에 우리가 때로는 넘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허물어지기는 해도 우리를 다시 재건하신다. 그렇지 않은가? 주인이 없는 사람은 그렇게 생각할 수 없다. 한 번 재수 없으면 그만이지 누가 재건해 주겠는가? 그러나 주인이 있는 사람은 항상 이 믿음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BC 700년경부터 망하기 시작해서 BC 500년경에는 다 망하고 만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최소한 500년간을 빈 기간이었다. 이를 보고 중간시대라고 말하는 데 이 시대에 그 사람들은 ‘어떻게 나라를 세울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에게 역사하셔서 그 나라를 오게 할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한 편에서는 독립운동도 하고 해서 사람도 죽고 많은 사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로마에 의해서 완전하게 초토화되게 되는 데 그냥 초토화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해서 독립운동을 하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항쟁을 하기 때문에 강대국이 가만히 두겠는가? 안 둔다. 우리도 3.1운동을 벌였다가 사람이 얼마나 죽었는가? 그런 식이다.
무력을 가진 사람 앞에서 죽는 것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힘이 없는 자의 용기는 허무한 것이다, 공허한 것이다. 젊은이들은 힘은 없으면서 용기는 있다. 그래서 알고 보면 공허한 것이다. 자기가 그것을 실천할 수 없다. 실행할 수가 없단 말이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갈등이 많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었고 반대로 ‘우리가 나가 싸우자.’ 이래서 독립군을 만들기도 해서 대들면 강대국이 가만히 놓아두겠는가? 그래서 무수하게 그런 일을 반복하다가 마지막에 로마에서 도저히 안 되겠으니까 타이터스라는 장군이 들어와서 완전히 초토화시켜서 돌 위에 돌 하나도 첩 놓이지 않게 성전을 훼파시키는 그런 사건이 있게 되었다. 그리고 유태인들을 모여 있지 못하도록 사방으로 흩어버렸다. 그래서 2000년 동안 디아스포라라고 해서 흩어진 유태인으로 전 세계를 유랑하고 다닌 것이다. 유랑하고 다니다 보니까 욕도 얻어먹고 덜 좋다고 한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태인이라고 하면 유랑하는 유태인들이다. 섹스피어의 작품에 나오는 유태인들은 전부다 그렇게 유랑하는 유태인들이다. 베니스의 상인이니, 샤일록이니 이런 사람들이 전부 다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주 잔인한 사람들, 돈밖에 모르는 사람들, 이렇게 주목받던 사람들이 바로 흩어진 유태인들이다. 그러니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으며 독일에서는 히틀러에 의해서 600만이나 학살당했다.
이런 시간이 지나면서도 그들은 여호와께서 자기들을 기어코 회복할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다가 결국 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다시 그 땅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이고 나중이다. 우리의 하나님은 처음이고 나중이신 분이다. 우리가 알파요 오메가다 이런 말을 많이 하는 데 성경에도 그렇게 말을 할 때가 있다. 이것은 참 중요한 일이다. 어린 아이들도 부모를 볼 때 알파요 오메가로 보이면 안정이 된다. 그런데 아이들이 부모를 불신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 어떤 아이가 ‘우리 아버지가 나를 끝까지 책임을 질까?’ 이런 의심이 생기면 그때 방황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우리 아버지는 끝까지 나를 책임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아이들은 안정이 되는 것이다. 사랑을 주는 것은 그것 때문에 주는 것이다. 그냥 좋으라고 주는 게 아니고 신뢰를 주기 위해서, 아이들이 부모를 신뢰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랑을 받으면 신뢰를 가지게 된다. 그래서 아이들은 건전하게 자라게 된다. 사랑을 받은 아이들은 건전하게 자라고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응어리를 가지고 자라기 때문에 큰 다음에도 사회생활이 그렇게 매끄럽지 못하고 윤활하지 못하게 돌아가서 여러 가지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그 목표요 완성은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창17:7,삼하7:14등 참)는 것으로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게 주신 최고의 약속인 것이다. 이 약속의 성취를 요한은 새 예루살렘으로 묘사하였다. 그러므로 이 성의 소망을 얻은 자는 인류 최고의 소망을 얻은 것이다.
그 목표의 완성은 무엇인가?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것이 목표다. 간단하지만 이것은 가장 중요한 말이다.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나님이 처음과 나중이신 데 처음과 나중의 역사는 길다. 많은 것이 있고 많은 일들이 지나가는 데 그 역사를 살펴보고 있으면 ‘이게 될까 말까?’ 이런 상태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는 이것이 유일한 목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을 말한다. 하나님과의 완전한 교통, 그것이 뭐가 중요한가? 이것은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게 최고의 약속이다. 생각해 보라. 흙으로 지어 놓고 아무 약속도 없다면 그 흙은 멸망이다. 밭을 갈아 놓고 아무 약속도 없다면 그 흙은 멸망인 것이다. 밭을 갈 때 농부는 약속이 있다. 무슨 씨를 뿌린다는 약속을 가지고 밭을 가는 것이지 그냥 밭을 가는 어리석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어 놓으시고 아무 목적이 없었더라면 그냥 흙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 거기에다 약속을 주었다.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것은 신성한 약속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참된 교통 안으로, 완전하게 교통이 되는 세계로 인도하겠다는 이보다 더 큰 약속은 없기 때문이다.
이 약속의 성취를 요한은 새 예루살렘의 성취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이 내용을 새 예루살렘의 완성으로 묘사한다. 왜냐하면 새 예루살렘이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소망이니까 그날이 오면 그 때가 오면 모든 것이 다 완성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다. 그래서 요한은 새 예루살렘으로 하나님 목표의 완성을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금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것이라고 하게 되면 상을 모두 금으로 짓는다. 옛날에는 졸업할 때 상으로 노트를 주고 그랬다. 그런데 요즘에는 노트 같은 것은 줘야 아이들이 안 받는다. 집에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어떤 학교에서는 아주 큼직한 상을 주든지 아니면 돈으로 주든지 이렇다. 어른 같으면 ‘상품보다는 돈으로 주는 것이 낫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게 최고의 약속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연합한다.’ 이것이 최고의 약속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 보면 결국 무엇이 제일 안타까운 문제가 되는가 하면 하나님과 내가 왜 연합이 안 되는가? 이것이 궁극적인 문제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마지막에 가 보면 ‘왜 나와 내가 믿는 하나님과는 거리가 있는가, 왜 이것이 합해지지 않는가?’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혼을 해 보면 안다. 처음에는 서로 얼굴만 봐도 좋았고 직장에만 가도 좋았다. 좋았는데 점점 살아갈수록 뭔가 한 가지가 부족하단 말이다. 교통이 안 되면 부족한 것이다. 알고 보면 점점 교통을 찾고 있다. ‘저 사람은 내 속을 몰라.’ 이러면 틈이 생긴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다 주는 남편이라고 해도 속을 몰라주는 남편과 살기는 어렵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까 궁극적으로 사람은 한 마음으로 연합하는 것을 소원하고 있다. 그래서 돈을 좀 못 벌더라도 마음을 확실히 알아주면 살겠는데 돈도 잘 벌어다 주고 다 잘해주는 데 마음을 몰라준단 말이다. 이러면 갈등이 생기는 게 아니겠는가?
사람은 궁극적으로 어떤 연합체를 갈망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는 말은 최고의 약속이다. 결혼식장에서 신부가 신랑을 보고 하는 말이 ‘나는 죽어도 당신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죽은 후에도 사랑할 것입니다.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당신하고 결혼할 것입니다.’ 이러면 최고의 약속이 될 것이다. 사람이 잘 못 지켜서 그렇지만 그 이상의 약속은 없지 않겠는가?
새 예루살렘이라는 말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고 그것을 하나의 사회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새 예루살렘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스위트 홈이라고 하면 홈이 무엇인가? 스위트 홈이라고 하면 교통이 잘 되는 그런 집이 아니겠는가? 그러면 그것은 초가삼간일 수도 있고 궁궐일 수도 있지만 대부분 시나 이런 곳에 나오는 것을 보면 초가삼간에서 그런 일이 많이 생긴다고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대궐을 원한다. 이러니 갈등이다.
그러므로 이 성의 소망을 얻은 자는 인류 최고의 소망을 얻은 자다.
겉으로 볼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성의 재건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 내용이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는 그 내용을 다윗 성으로 묘사한다면 그것이 최고의 소망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하는 이것의 내용이 우리가 바라는 교회가 되고 우리가 바라는 새 예루살렘이 된다면 그것이 최고의 소망이다. 다른 세계는 생각할 필요가 전혀 없다.
자기 집이 좋으면 남의 집이 좋은지 안 좋은지 생각할 필요가 없다. 자기가 행복하면 남이 잘못하는 것이 별로 문제가 안 된다. 왜 그런가 하면 내가 행복하니까. 주먹을 들고 나오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뭔가 불만이 있어서 그렇다. 얼핏 하면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밤낮 구별하지 않고 촛불하나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물론 정의감에 그렇게 하겠지만 너무 행복한 사람들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 조금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런 것에 관심을 가진다. 이렇게 말하면 문제가 생긴다. 가끔 그렇다는 말이다.
2) 하나님의 성
거룩한 성의 하강에 대한 소식은 일곱 천사 중에 하나가 전해 왔는데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준(계17:1~) 후에 “이리 오라. 내가 어린양의 신부를 네게 보이리라”(계21:9) 하였다. 여기 어린양의 신부가 곧 인류의 최종 소망으로서 헬라인이 생각한 완전한 실재이며, 유대인의 소망인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성이다. 하나님의 성을 신비롭게 생각하면 안 된다. 새 예루살렘성은 신비로운 성이 아니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아들이 되리라.” 그것을 새 예루살렘성 또는 다윗성 또는 하나님의 성이라고 하는 것이다.
장난감 하나로도 행복한 아이가 있다. 타고 다니지도 못하는 차이지만 너무 너무 행복해 한다. 잠자면서도 끌어안고 잔다. 그러면 어린아이에게는 그것이 새예루살렘이다.
거룩한 성이 내려온다는 소식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전해왔다. 요한계시록이 재미있게 만들어졌다. 일곱 인이 있는 데 일곱 인 안에 일곱 나팔이 들어있다. 일곱 나팔의 마지막 나팔 안에 일곱 대접이 들어있다. 이런 겹겹이 들어있는 방식으로 되어있다. 오늘 읽은 것은 일곱 대접을 가진 천사 중의 마지막 천사를 이야기한다. 이 천사가 17장에서는 큰 성 바벨론이 멸망했다는 것을 통지했다. 그리고 “이리 오라, 내가 어린 양의 신부를 보이리라.”고 말하고 있다. 같은 천사가 한 쪽에서는 바벨론의 멸망을 보여주고 있고 한 쪽에서는 어린 양의 신부를 말하고 있다. 멸망을 전하는 것도 천사고 축복을 전하는 것도 천사다. 천사는 하나님의 나팔이니까 자기 뜻이 없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는 것뿐이다. 한 입으로 축복도 하고 한 입으로 저주를 하는 것이 천사다. 어린양의 신부는 인류의 최종 소망으로 헬라인들이 생각하는 완전한 실제, 완전한 진리가 이루어지는 세계일 것이고 유대인의 소망으로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이 된다. 중국인들의 말로 하면 태평성대가 된다. 지금 우리의 말로 표현하면 교회라고 표현하든지 새 예루살렘이라고 표현하든지 뭐라고 표현하든지 내용은 바로 이것이다. “나는 네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내 아들들이 되리라.”
가) 하늘에서 내려옴
하늘에서 내려오더라고 했다. 에덴에서 시작해서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된 이 도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땅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고 한 것은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고 하였다. 처음은 어디에서 시작되었는가? 하늘에서 시작되었다. 마찬가지로 마지막도 하늘에서 마쳐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서 내려온 다는 말은 우리 인간이 만들어 놓은 바벨론과 다르다는 말이다. 바벨론은 자기 이름을 높이고 강해지려고 온갖 힘을 모아서 된 것이다. 새예루살렘은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인간들의 힘으로 달려가는 세계가 아니고 하늘에서 시작하고 하늘에서 완성된 세계다. 다른 세계다.
어제 저녁에 잭슨빌에 있는 케이티 문에게서 반가운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자기는 지금까지 말씀을 들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있었다고 했다. 사람은 같은 사람인데 한 사람을 놓고 두 사람을 이야기 하냐는 것이다. 이것이 풀리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이 얼굴이 다른 것도 모양이 다른 것도 아닌데 말씀할 때 항상 두 사람을 이야기하더라는 것이다. 자기가 본 사람은 다 같은 한 사람인데 왜 두 사람을 이야기 할까라는 생각을 했다. 강영미 자매가 투병 중에 있는 데 그 자매는 7년 동안 케이티 문 자매 밑에서 일했다. 그 자매를 보면 모든 것이 반듯하고 예의가 바르다. 누가 봐도 예쁘고 얌전한 사람이다. 그런데 케이티 자매는 그 자매를 보면서 “왜 간증을 항상 교과서적으로 할 까?”라고 생각했다. 그 자매 자신이 안 보인다는 말이다. 절대 누구에게 나쁜 말도 안하고 자기 밑에 있을 때도 고분고분한 자매였는데 도저히 그 사람을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 자매 간증을 들으면서 “옛날에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구나. 전혀 다른 사람이구나. 그래서 두 사람을 이야기 했구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전화가 왔다. 두 사람이 알아질 때 세계가 구별된다. 사람은 다 똑같은데 왜 아담과 그리스도라고 하는가? 이유가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것과 땅에서 올라간 바벨론은 다르다.
에덴에서 시작해서 새 예루살렘으로 완성된 이 도성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헬라인의 관념으로는 이데아가 현실적으로 완성된 것이며, 유대인의 신앙으로는 거룩한 성이 부흥되고 재건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체가 되었음과도 같은 것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 자신의 모든 갈망과 인간에게 주신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태초에 말씀이 계셨는데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하셨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 육체에 이를 때 그 육체는 타락한 육체를 말한다. 육체가 되어 왔는데 어제까지는 분명히 그 육체였는데 은혜와 실제가 충만하더라는 것이다. 은혜는 우리가 누리는 하나님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누릴 때 우리는 은혜롭다고 느껴진다.
그 도성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더라는 말은 어떻게 하나님이 육체 안에 오셨는가와 같은 문제이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다는 말과 같다. 말씀이 육체가 되니까 육체는 그 육체인데 사람이 바뀌어졌다. 이것은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나이다와 같은 기도이다.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어쩌면 나에게도 우리에게도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말이다. 하나님 자신의 모든 갈망과 인간에게 주신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갈망하신다. 영이시기 때문에 육체를 가진 인간을 필요로 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갈망이다. 그래서 그 속에 많은 약속을 주었다. 아담에게도 주었고 노아에게도 주었고 아브라함에게도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약속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 많은 약속을 우리는 낱낱이 알지도 못하는 데 다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통합적으로 말하면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는 내 아들이 되리라.”는 말 안에 다 들어있다는 말이다.
집을 나왔던 탕자가 집 밖에서 온갖 고생을 다했다. 쥐엄 열매를 먹고 돼지우리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모든 문제가 사라져 버렸다. 돼지 똥 치우던 문제 등 모든 문제가 사라졌다. 돼지막에서 일하게 되면 아무리 깨끗이 닦아도 냄새가 난다. 담배 피우는 사람 옆에 있다 보면 냄새가 난다. 옛날에 다방에 가면 담배 연기가 자욱하다. 거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다 담배피우는 사람 같이 되어버린다. 그런데 하물며 돼지 막에서 돼지 똥이나 치우고 있으면 냄새가 안 날수 없고 아무리 씻어도 안 되는데 아버지 집에 오니까 다 없어져 버렸다. 일괄 다 해결되어 버렸다. 이것 하나 해결되고 저것 하나 해결된 것이 아니고 일괄 다 해결됐다.
이번에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니까 일이 많다. 주문도 많고 해결해야 될 일도 많다. 왜냐하면 생각해보니까 총체적인 문제이다. 어디 한군데만 고치면 되는 문제가 아니다. 전체로 인삼녹용을 다려 먹어서 보를 해야 되는 문제이지 어디 기침 좀 낫고 가려운 데만 고치고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러니까 인간 문제는 끝이 없다. 그런데 이 끝없는 문제의 원천이 어디 있느냐면 우리는 하나님을 잃었다는 말이다. 그것이 문제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이 문제인지 모른다. 그러니까 이것을 고쳐 달라, 저것을 고쳐달라고 유가족들이 모여서 주문이 굉장히 많다. 대통령 힘으로 그것을 다 해낼는지 모르겠다. 하여간 하겠다고 약속은 다 한다. 또 그 자리에서 약속을 하지 않을 수도 없다. 약속을 하지 않으면 돌 던질 것이니 어찌할 수 없다. 얼마나 잘해놓으면 이것이 잘됐다고 할는지 그것도 의문이다. 그러니까 총체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는 앞으로 또 이런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
그런데 이 새 예루살렘은 총체적인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것이다. 그 총체적인 문제의 해결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다. 아주 간단한 것 같지만 이것이 근원이다.
나) 하나님의 영광(빛) 이 비침
이 빛(phoster)은 일반적인 빛(phose)이 아니다. 그것은 하늘의 빛으로서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빛이다. 하나님과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인격의 빛이다. 물질적인 빛이 아니고 있다가 사라지는 빛이 아니다. 존재와 그 존재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빛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했고, “~그들 중에 빛들로 나타내며”(빌2:15)라고 한 그 빛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는 성이다. 이 빛은 일반적인 빛과는 다른 그런 빛이다. 하늘의 빛이기 때문에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빛이다. 우리가 창세기 1장을 읽어봐도 빛이 두 번 나온다. 첫 번째 1장 3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다.” 고 한다. 그리고 1장 16절에 “하나님이 두 큰 광명을 만드사 큰 광명으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하셨는데 그것도 빛이다. 빛이 둘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첫 번째 빛이다. 해와 달이 필요 없는 빛, 아직 해와 달이 나오지 않았을 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빛이 있으라 하셨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에게는 해와 달이 있기 전에 있는 빛이 있다. 우리가 사물을 보고 있는 것은 해와 달의 빛을 통해서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있는 것은 해와 달의 빛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해와 달의 빛이 아닌 다른 빛으로 보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빛이 두 가지이다.
하나님과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인격의 빛이라고 이렇게 말 할 수 있다. 이것은 어떤 인격적인 빛이다. 인격적인 관계 안에서 비춰지는 빛이다. 물질적인 빛이 아니고 있다가 사라지는 빛이 아니다. 존재와 그 존재의 활동에서 나타나는 빛이니까 어떤 존재를 통해서는 빛이 더 나타나고 어떤 존재를 통해서는 빛이 좀 덜 나타난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5:14)”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등불이겠는가. 우리가 세상에 나가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했다. 그래서 빛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참 많다. 빛과 소금이 되라고 했다고 기독교인들이 빛과 소금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데 애쓴다고 빛이 나오겠는가. 빛이라는 것은 그 존재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존재가 밝으면 빛이 나오는 것이고 존재가 어두우면 빛이 나오지 않는 것이지 좋은 일 하는 것을 가지고 빛을 비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것도 좋은 일이지만 그것으로 빛이 되겠는가. 사람의 마음을 비추는 빛은 다른 빛이다.
여러분이 순모임을 하면서 경험을 하실 것이다. 어느 날 어느 빛이 왔더니 00자매처럼 안보이던 것이 보였다. 사람은 한 사람 뿐인 줄 알았더니 두 사람이 보이더라. 이것이 빛이다. “그들 중에 빛들로 나타내며(빌2:15)” 이것은 창세기 1장 3절에 있는 그 빛이다.
하나님의 성에는 하나님의 빛이 있고,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성에는 그에 따른 빛이 있다. 이 빛은 영광이다. 아담은 이 빛을 잃었고 바벨론은 이 빛이 없는 어둠의 성이다. 그래서 갈 바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이 성에는 시들지 않고 쇠하지 않는 빛이 있다. 영원한 영광의 빛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성에는 또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빛이 있다. 빛이 다 다르다. ‘하나님의 빛’이라고 하면 잘 모르니까 추상적이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빛이라고 하면 우리 안에도 그런 빛이 있다. 또 형제들 안에도 그런 빛이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게 되면 거기에 빛이 있다.
두 사람이 사이가 좋으면 얼굴빛이 달라진다. 사이가 좋으면 얼굴빛이 다르다. 그 빛이다. 그런 빛이다. 얼굴빛이 검고 시커멓다는 것은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인격의 빛이다. 그래서 만남에 따라서 빛이 달라질 수가 있다. 빛이 밝아지고 촉수가 더해진다. 서로 만나서 기분이 너무너무 좋으면 촉수가 갑자기 30촉에서 50촉으로 올라간다. 발전소에서 발전이 되어서 전기가 팍 공급이 된다. 너무 공급이 되어 터져버리면 곤란하다. 그러니까 인격의 빛이다. 이 빛이 영광이다. 영광이라는 것이 이 빛이다.
만일 내가 대통령에 출마를 했는데 온 국민의 100%의 지지를 받았다며 내 얼굴이 빛이 날 것이다. 그 빛은 영광이다. 너무 너무 영광스럽게 보일 것이다. 100%로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찍었다면 영광이다. 우리나라에서 100% 지지를 받은 사람은 이승만 박사뿐이다.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될 때 100% 추대가 되었던 사람이다. 그것은 그분의 영광이다. 평생 독립 운동을 했던 그분의 일생을 집약하는 그런 빛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인격의 빛이고 하나님과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빛이라고 할 수가 있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그때 이것은 영광의 빛이 된다. 아담은 이 빛을 잃었고 바벨론은 이 빛이 없는 어둠의 성이다. 그러니까 어두우니까 어디로 갈 바를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눈을 뻔히 뜨고 있고 세계지도를 다 가지고 있고 항로는 다 가지고 있는데 인생이 어디로 갈지는 모르고 있다. 이 빛이 없다는 것은 그 빛이 없다는 것이다.
바다를 항해하는 배도 수로를 잘못 틀면 세월호처럼 사고가 나는 것이다. 바다에 가면 물길이 여러 가지이다. 돌기도 하고 옆으로 가기도 하고 여러 가지인데 그 지도에 있는 데로 잘 보고 가야한다. 그런데 그것을 이번에 무시를 하고 잘못 돌리니까 배가 넘어가 버린 것이다. 지도는 다 가지고 있고 나침반이 발명이 되면서 세계 역사는 완전히 바뀌었다. 나침반이 없을 때는 바다로 멀리 갈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침반이 생기면서 콜럼버스 같은 사람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니까 나침반 때문에 세계가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그런데 인생은 어디로 가는지 아직도 모른다. 참 이상하다. 이 빛이 없다. 인생이 어디로 가는가? 성경에 밖에는 어디로 간다는 말이 없다. 좋으나 나쁘나 성경 밖에는 그 말이 없다. 성경에 밖에는 인생이 어디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말해 놓은 데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는 참 행운아들이다. 별로 공부도 못해놓고 책은 제일 좋은 책을 하나 얻어가지고 보니까 모든 해답이 다 있는 책이다. 쓸 데 없는 책을 수천 권을 읽으면 뭐하겠는가.
시험을 잘 못 보는 사람을 보면 책을 안 봐서 못 보는 것이 아니다. 책을 너무 많이 봐서 헷갈려서 못 보는 것이다. 볼 책만 봐야 하는데 이 사람이 이 책이 좋다하면 이것을 봐야 하고 저 사람이 저것이 좋다고 하면 저것을 봐야하고 그러니까 70만 명의 수험생이 있으면 참고서를 하나 써놓으면 70만 권이 팔린다. 불안하니까 보든지 안 보든지 사야 한다. 하여간 남이 본 것을 안보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은 책을 시험을 치고 나면 박스에 가득 담아서 버린다. 알고 보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다. 한 개를 봐도 확실하게 봐버리면 될 것인데 불안하니까 이것도 보고 저것도 보고 머리는 안돌아간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보여주는 책은 성경뿐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빛이다. 이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고 했다. 물은 가까이서 보면 맑고 멀리서 보면 푸르다. 벽옥은 푸른색이며 수정은 맑은 색이다. 하나님의 성은 멀리서 보면 푸르러 끝이 없고 가까이서 보면 티가 없이 맑은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으로 이루어지는 이 성에는 시들지 않고 쇠하지 않는 빛이 있다. 영원한 영광의 빛이 있다. 다른 것은 여기서 못 찾을지라도 이것만은 확실히 찾을 수가 있다. 인생이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찾을 수가 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다른 것을 찾으려고 하면 헛일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바로 그것이 빛이 된다.
이 빛은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같이 맑더라고 했다. 물은 가까이서 보면 맑고 멀리서 보면 푸르다. 바다는 푸른데 가서 손에 떠보면 맑다. 푸른색이 절대로 없다. 그런데 푸르게 보인다. 그러니까 벽옥은 푸른색이다. “벽(碧)”이라는 글자가 물결이 푸른 그 색이다. 그러니까 물결 색인 벽옥은 푸른데 수정같이 맑더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가까이서보면 수정이고 멀리서 보면 벽옥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은 멀리서 보면 푸르러서 끝이 없다. 끝이 없는 것은 다 푸르게 보인다. 하늘도 그래서 푸르게 보이고 바다도 끝이 없이 보이기 때문에 푸르게 보인다. 그런데 가까이서보면 맑은 색이다. 맑은데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멀리서 보면 푸르러서 끝이 없기 때문에 영원하다고 한다. 하늘은 영원하다. 영원한 색깔을 표현할 때는 푸른색으로 표현한다. 가까이서 보면 티가 없이 맑은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티가 있을 수가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아무런 티가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갈라져 있다 보니 여기에 도덕도 개입하고 율법도 개입하고 모든 것이 다 개입한다. 그러다 보니 도덕으로 보면 이것이 걸림이 되고 율법으로 보면 저것이 걸림이 되고 무엇으로 보면 무엇이 걸림이 되고 다 걸림이 되는 것이다. 안경이 다 달라서 안경에 따라서 다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는 완전할 수가 도저히 없다. 왜냐하면 진짜 빛은 없고 다른 것으로 모두 측량을 하고 있는데 언제 이것이 완전하다고 하겠는가?
나에게 안경이 2개가 있다. 전에 쓰던 안경은 처음엔 잘 보여서 썼는데 컴퓨터를 보니 눈이 아팠다. 그래서 어디 안경점에 가서 얘기를 했더니 눈이 안 아프도록 해주겠다며 안경을 하나 해줘서 그것으로 컴퓨터를 보니 눈이 아프지 않았다. 그러나 그 안경으로 책을 보려면 또 어질어질했다. 그래서 얘기를 했더니 또 안경을 하나 만들어 줬는데 그것으로 책을 보니 안 어지러웠다. 그런데 이 안경으로 컴퓨터를 보면 또 안 되는 것이었다. 둘 다 놔두고 컴퓨터 볼 때는 이놈을 써야 되고 책 볼 때는 저 놈을 써야 했다.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눈이 안 아프기에 그것이 더 나았다.
그러니까 안경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는 것도 마찬가지다. 안경에 따라 다르기에 티를 볼 때 객관적으로 이것은 티다 아니다 할 수가 없다. 선글라스는 검은색 선글라스를 쓰면 검게 보이고 푸른 선글라스를 쓰면 푸르게 보이는 것이 안경 유리에 따라 다르다. 인간은 안경을 안 쓰고 있는 것 같지만 다 쓰고 있다. 입장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역사를 해석하는데 보면 다 다르다. 역사는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사실에 대해서 연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사실을 연구해 봤자 재미가 없다. 해석하는데 재미가 있는 것이지 사실을 알아봤자 재미가 없는 것이다. 해방 이후의 근세사를 젊은이들에게 말하려고 하면 아예 관심도 없고 들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 놓은 것만 좋아하다. 이러니까 역사학자들은 그것을 교묘하게 해석한다. 이렇게 해석하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해석하면 저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해석한 것을 보고 사실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이다. 고려 입장에서 삼국을 해석하고 조선 입장에서 고려를 해석한 것이 역사책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순전할 것 같지만 순전하지 않다. 어디에 티가 있냐 없냐를 생각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빛이고 그 빛 안에는 티가 없는 것이다. 빛이 밝으면 티가 없어지고 다 하얗게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쪽에서 보면 이런 티가 있고 저쪽에서 보면 저런 티가 있는 것이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면 이쪽에서 보거나 저쪽에서 볼 필요가 없어져버린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티가 없이 맑고 끝이 없이 푸르다. 무엇이 이것을 부인하며 누가 이것을 막으리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롬8:34~39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티가 없이 맑고 끝이 없이 푸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곳에 누가 무슨 사족을 붙이겠는가? 그것이 하나님 목표의 완성인데 거기에다 이러니저러니 할 필요가 없을뿐더러 해도 소용이 없다. 이미 다 지나가버렸고 다 완성이 된 것이니까 티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맑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이 화해를 했는데 거기다 대놓고 전에 무엇을 잘못 했니, 이러니저러니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안 되니까 그런 것이지 지금 완전하게 화해가 되었다면 전에 네가 뭐라고 말했고 내가 뭐라고 말했고,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지금 안 되니까 하는 소리다.
티 없이 맑고 푸른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할 때 밖에는 불가능하다. 세상의 어떤 기준으로 봐도 티가 없는 것은 없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모든 기준은 어떤 기준으로 봐도 티가 있다. 이 기준으로 봐서 티가 없으면 저 기준으로 보면 티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끝이 없는 것이다. 무엇이 이것을 부인하며 누가 이것을 막을 것인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다 누가 그것을 아니라고 트집을 잡을 것이고 누가 사족을 붙일 것인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바울은 그렇게 담대하게 말한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상대해서 얘기를 하다가 8장으로 넘어가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정죄함이 없나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겠냐? 그가 사랑 하신다는데 무슨 할 말이 있냐? 그가 우리를 위하신다는데 누가 말을 하겠느냐는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 하신다는데, 그럼 끝인데 그가 우리를 위하신다는데, 거기에다 무엇을 붙이냐는 것이다. 율법 몇 조에 어떻고 율법 몇 조에 어떻고 그 따위 소리를 하겠냐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이것이 최종 완성이다
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음
성곽은 적을 방어하는 것이다. 에덴은 성곽이 없었다. 아직 전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많은 전쟁을 치르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 성이다. 성곽이 있는 곳은 문으로만 출입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크고 높은 성곽이 있다. 성곽은 적을 방어하는 것이다. 에덴에는 성곽이 없었다. 그래서 뱀이 들어왔다. 아직 전쟁이 없었기 때문에 성곽이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은 많은 전쟁을 치르고 최후의 승리를 거둔 성이다. 그래서 성곽이 있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하면 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이다. 아무데나 들어오라는 것이 아니라 문으로만 들어오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은 문으로 들어가야 하는 곳이다. 아무데나 널려 있는 곳이 아니라 문으로만 들어오는 곳이다. 왜냐하면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다. 우리 생각으로는 문으로만 들어가는 것이 참 불편할 것 같지만 문으로만 들어가야 그것이 참으로 안전한 것이다.
이 문은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문이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는 실제적인 문이 없었고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성막의 법에 따라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이었고 실제는 아직 오지 않았던 것이다. 그 문은 실제적으로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이 문은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성으로 들어가는 문,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문이다. 그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했다. 그래서 문이 되는 것이다.
구약시대를 보면 지성소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 된다. 그것을 건물로 묘사해 놓은 것이 성전, 지성소다. 들어가는 과정을 보면 제단에서 제물을 잡아서 피를 받아 가지고 그것을 가지고 성소를 지나서 지성소로 들어간다. 들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을 만나러 간다. 법궤가 있는 곳은 하나님이 현존하는 곳이고, 임재 하는 곳이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거기 가서 대제사장이 그 피를 법궤 위에 뿌리고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곳이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하나님을 만나는 길을 구약에 정해져 있다. 대제사장이 1년에 딱 한번 만난다. 이렇게 정해져 있다. 이 길 이외에 다른 길로는 만날 수 없었다. 요즘에는 산에 가서 만났다는 사람, 기도원에 가서 만났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많다. 이 말은 문이 없다는 말이다. 문이 없이 들어갔다 왔으니까 어디를 들어갔다 왔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들어오는 문을 정해 놓았다.
새 예루살렘은 들어가는 문이 있다. 길이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성도 문이 있다. 길이 있다. 이 문이 바로 그리스도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난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지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것이지 내가 기도해서 만나지는 것은 무엇을 만난 다고 하는 지 잘 모르겠다. 자대로 만나고 오겠지만 하여간 성경에는 없는 일이다. 하나님을 만나는 길은 유일하게 그리스도다.
그리스도 이전에는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러 들어가는 실제적인 문이 없었다. 단지 지성소로 들어가는 길은 성막의 법에 따라야 했던 법적인 길이었지 실제적인 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법적인 길은 어디에 와서 완성되는가? 예수님에게 와서 완성 됐다. 십자가에 와서 완성 됐다.
번제단에 흘린 피는 십자가에서 흘린 예수의 피와 같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번제단에서 시작해서 지성소로 갔던 그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성취가 된 것이다. 그래서 그 때는 법적인 것이었지만 지금은 실제가 됐다. 법적인 것이었으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하나님이 나를 만나 줬다. 내가 하나님께 용서 받았다. 이렇게 믿고 오는 것이지 실제적으로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옛날에 구원파 사람들이 그런 것이 있었다. 한국교회가 구원에 대해서 애매하고 희미했을 때 그 사람들이 들어와서 무엇을 가르쳤는가 하면 이미 우리는 구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미 죄를 용서해 주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이미 죄를 다 사해 놨다. 이것을 믿기만 하면 된다. 이렇게 가르쳤다. 그런데 이것이 그때 당시 한국교회의 지각 변동을 일으켰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장로교인들 이였기 때문에 “천당에 갈 자신이 있느냐?”이렇게 물으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아냐 하나님이 아시지!” 이렇게 대답했다. “구원을 받았냐?” 이렇게 물으면 “그것을 내가 어떻게 아느냐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지!” 이렇게 대답했다. 그러니까 애매모호했다. 그래서 어떤 행위만을 계속 강조하다 보니까 얼마만큼 해야 내가 하나님께 맞게 되는 것인지! 얼마나 해야 하나님께 합격이 되는 것인지! 이것을 다 모르고 애매하던 때였다. 그런 상태에서 이 사람들이 와서 성경을 딱 꼬집어가지고 “봐라 하나님이 이미 용서하지 않았냐!”여기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그래서 수없는 사람이 거기로 몰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것을 보고 소위 구원파라고 그런다.
요번에 걸려있는 문제도 바로 그 문제다. 그 사람들의 교리가 잘 못 된 것이 아니다. 교리는 미국에 있는 침례교회는 다 그렇게 믿고 있다. 우리나라는 침례교회가 아니고 장로교회기 때문에 그것을 몰랐던 것뿐이지 침례교는 다 그렇게 공부하고 있다. 그 선교사는 침례교 선교사다. 한국에는 침례교도 없고 있다고 해도 존재감도 없고 이런 판에 들어왔으니까 충격이 될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단이라고 해 버리고 만 것이다. 사실은 맞는 것이다. 틀린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이론이고 법이다. 그래서 뒤로 무슨 문제가 생기는가 하면 하나님이 분명히 다 용서하고 다 사해주고 천당도 다 보장해 주었다는데 자기한테는 실제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누가 “너 천당 진짜로 갈수 있느냐?”이렇게 물으면 처음에는 간다고 했다가 두 번 세 번 계속 추궁하면 점점 대답이 약해져서 그렇게 되지 않겠는가. 확실한 자신이 없으니까 이것이 법적인 문제이다. 법적인 문제로는 완전히 해결이 안 된다.
그런데 이것이 결국 십자가에 와서 실제화 되었다. 우리는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내가 한 운명으로 알아지는 순간에, 나는 그 아담이 가지고 있던 굴레를 벗어 날 수 있다. 이것은 법적인 문제가 아니고 실재적인 문제이다. 그 분은 실재적으로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다. 이 자리가 아니고는 하나님을 만날 자리가 없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문이다. 교리적으로 아무리 알아도 그것은 소용이 없다. 그것이 실재가 안 되기 때문이다.
(1) 열두 문
이 성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세 문씩 열두 문이 있다. 광야생활에서 성막은 이와 같이 사방으로 열두 지파가 진을 치고 둘러 있었다.
열두 문이 있다고 했다. 이 성은 동서남북으로 각각 세 문씩 열두 문이 있다고 했다. 광야에서 생활할 때 성막은 이와 같이 되어 있었다. 동서남북으로 세문씩, 열두지파가 진을 치고 둘러 있었다. 이것이 건물화 된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자기의 의사와 상관없이 열두 아들들을 낳았는데 이는 훗날 성막을 둘러 진을 치기 위함이었다. 또한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를 택했는데 후에 가룟 유다가 탈락되고 바울로 대치되었던 것이다.
야곱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참 이상한 일이다. 자기 의사와 상관없이 아들 열둘을 낳았다. 출애굽기에서 자기 같으면 그 사람 성질로 보면 라헬한테만 아들 낳고 딴사람한테 아들 낳지 않을 사람이다. 다른 아내들은 사랑하지 않으니까, 근데 이상하게 라헬한테는 아들이 없고 자기가 사랑하지 않은 사람한테만 계속 아들이 나온다. 그래서 열 명이 나왔다. 지겨웠을 것이다. 마지막에 라헬이 아들을 낳아 열두 명이 된 셈이다. 야곱이 왜 그런지 몰랐을 것이다. 이것이 열두지파가 된다. 훗날 성막을 둘러칠 때 지파별로 둘러싸야 되는데 열둘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둘러싸겠는가. 딱 열두지파라야 동서남북으로 지키고 있을 거 아닌가. 유다는 육체 때문에 예수를 떠났다. 또한 예수께서는 열두 사도를 택했다. 열두 사도를 택할 때는 열두지파를 생각하고 택했을 것이다. 후에 가롯유다가 배신하고 탈락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가운데 있던 가롯유다가 배신해갔다.
베드로는 유다 대신에 맛디아를 제비 뽑아 채운다고 했으나(행1:15~26) 하나님의 뜻은 바울에게 있었다는 것이다. 유다는 육체 때문에 예수를 떠났으나 바울은 영 안에서 예수를 만났고 따른 것이다.
다른 사람을 추가로 넣자. 그래서 기도를 열심히 하고(그때 한참 성령이 충만했던 때) 제비를 뽑았다. 그래서 맛디아라는 사람이 당선되었다. ‘아, 이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열두 사람 중 한 사람이구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전혀 그것과 상관없이 바울이 그 자리를 대치했다. 열둘이라는 숫자가 우리 생각에서 나온 게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나왔다. 신기한 일이라 생각한다.
베드로는 유다대신 맛디아를 제비뽑아 세운다고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바울에게 있었다. 유다는 육체 때문에 예수를 떠났지만, 바울은 영 안에서 예수를 만났고 따른 사람이다. 열두 사도 중 딱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다른 사람은 육신 가운데 있을 때 따르던 사람인데, 근데 바울은 육신으로는 예수를 모르던 사람이다. 모르는 사람인데 예수를 아는 사람이 생겼다. 이 바울이란 사람 때문에 기독교가 생겼다. 그 정도로 이 사람은 꼭 필요한 사람이다. ‘그래서 유다가 일찍 탈락해줬구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적합한 사람을 택하여 열둘을 만드신 것이다. 열둘은 사방에서 들어오는 문으로서 교회가 만민이 들어오는 집이 될 것을 보여준다. 교회는 죽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체가 된 것 같이 만민의 연합체가 될 것이다(엡2:14참).
하나님께서는 적합한 사람을 택하여서 열둘을 만드신 것이다. 열둘은 사방에서 들어오는 문으로서 교회가 만민들이 들어오는 집이 될 것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문이 있나 할 필요가 없다. 열두 문이 있어가지고 사방에 문이 있으니까, 다만 문으로 들어오라는 말이지, 어디는 들어오고 어디는 들어오지 말라는 것은 아니다. 교회는 죽고 다신 사신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연합체가 된 것같이, 만민의 연합체가 될 것이다. 이 예루살렘 성을 보면 알 것이다.
(2) 열두 기초석
열두 문이 있는 성곽의 열두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했다. 성곽의 기초는 열두 사도라는 것이다.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고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 있는데 기초석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했다.
열두 기초석이 있다고 하였다. 열두 문이 있는 성곽의 열두 기초석은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 성곽의 기초는 열두 사도다. 문에는 열두 천사가 있고, 열두지파의 이름이 있는데 기초석은 열두 사도의 이름이 있다고 되어있다. 우리가 생각하면 기초석이 열두 지파 이렇게 되어야 될텐데 거꾸로 되어있다.
교회는 시간적으로 봐서는 천사들과 열두 지파로부터 시작된 것 같은데 근원적으로는 열두 사도들 위에 세워진 것이다. 이 사람들이 없었다면 이 성곽은 단지 이스라엘 나라 이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시간적으로 보면 천사들과 열두지파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또 근원적으로 보면 열두 사도를 위해 새겨진 것이다. 왜냐면 열두 사도가 없었다면 이 성곽은 단지 이스라엘나라의 성공밖에 안 된다. 근데 열두 사도가 바탕에 있기 때문에 이것은 새 예루살렘 성곽이 된다. 이것은 아까도 말씀 드린 대로 ‘나는 알파요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처음과 나중인 분이 설계했기 때문에 그 처음을 열두 사도로 설계했다는 뜻이 되고, 그 보다 더 나아가서 맨 처음을 교회로 설계했다는 말이 된다. 교회를 두고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택했다는 말이 된다.
열두지파는 교회를 통해서 완성된다. 교회가 없으면 열두지파는 완성이 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살다가 가는 사람들이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런데 교회가 왔기 때문에 12지파가 의미가 있게 된다. 우리 인생도 그렇다. 누구든지 다 역사를 갖고 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 와야 다 의미가 있어진다. 그것이 오기 전까지는 의미가 없다. 왜 그런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뜻 안에 딱 들어오면 의미가 다 생긴다. 꼭 그와 같다. 기초석에는 12사도의 이름이 있다.
이스라엘은 교회를 위해서 있었던 것이다. 벽돌로 집을 짓는다. 그러니까 벽돌이 먼저이지만 사실은 집을 위해서 벽돌이 있다. 집을 짓기 위해서 벽돌을 만든 것이지 벽돌이 먼저 만들어졌다고 해서 집보다 벽돌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니다. 집안에서 벽돌이 자기 위치가 있듯이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은 비로소 온전한 위치가 정해진 것이다. 벽돌이 그냥 굴러다니면 자기 위치가 없다. 그런데 집안에 딱 들어가면 자기 위치가 생긴다.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도 교회 안에서 비로소 위치가 생기게 된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예수 믿은 것은 어디에 와서 내 위치가 정해지나? 교회 안에서 내 위치가 정해진다. 나 혼자 잘 믿는다고 내 위치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나 혼자 잘 믿어봤자 그것은 굴러다니는 벽돌에 불과하다.
(3) 정방형 입방체
성은 네모가 반듯한데, 그 장과 광과 고가 같다고 한 것은 그 성이 정방형 입방체라는 것을 뜻한다. 이는 금 갈대로 척량한 것으로서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과 천사가 다 인정하는 정확한 치수다. 제단과 향단이 이와 같으며 법궤 역시 그 절반으로 되어 있다. 정방형 입방체는 완전하고 확고한 것이다.
성은 네모가 반듯하고 장과 광과 고가 같다. 그래서 정방형 입방체이다. 이는 금 갈대로 척량한 것인데 - 금 갈대라는 말은 잣대라는 말이다. - 사람의 척량, 곧 천사의 척량이라는 것이다. 이는 사람과 천사가 다 인정하는 정확한 숫자라는 말이다. 제단과 향단이 이와 같이 생겼고 법궤는 두 개를 붙이면 되도록 이것의 반절이다. 왜? 아직 완성이 안 되었으니까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아직 완성이 안 되었기 때문에 법궤는 반쪽이다. 번제단도 향단도 네모가 반듯하다. 그런데 법궤만 고의 반쪽이다. 직사각형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완성되는 날, 그때 그것은 정사각형이 된다. 정방형 입방체는 완전하고 확고한 것이라는 뜻이니까 요한계시록에 와서 법궤는 더 이상 반쪽일수 없는 것이다. 성 전체가 법궤라고 말하고 있다.
(4) 크고 넓음
높이는 144규빗(약80m)이지만 넓이는 12000스타디온 (1스타디온은 약 200평방미터)으로서 5,760,000평방 킬로라고 한다. 이것은 그 면적의 크기가 충분하다는 의미로서 다메섹에서 팔레스틴 전부를 덮을 수 있는 면적이 된다고 한다. 하나님의 교회의 넓이는 온 인류가 들어오기에 넉넉한 것이다.
높이는 144규빗(약80m)이고 넓이는 12000스타디온(1스타디온이 약 200평방미터)인데 5,760,000평방 킬로미터이다. 이것은 엄청나게 넓은 공간이다. 이 면적의 크기는 다메섹에서 팔레스틴 전부를 덮을 수 있는 면적이 된다고 한다. 그 때 당시로 자기들이 생각하는 세계에 대해서 최대한의 것을 표현한 것이다. 하나님의 교회의 넓이는 온 인류가 들어오기 넉넉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사람이 들어오기에 넉넉하다. 하나님 안에 어디 좁은 데가 있겠는가? 또 못 들어갈 데가 있겠는가? 문으로 들어가면 다 들어갈 수 있는데 문이 아닌 다른 데로 들어가려니 못 들어갈 뿐이다.
문으로 들어간다. 문은 곧 그리스도이시다. 그 문을 통해서 우리가 교회로 들어오게 된다. 교회에 들어와도 그 문으로 들어와야 이제 아까 말 한대로 두 사람이 보이게 되고 세계가 갈라져보이게 된다. 그 문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왔다가 할 수 있는 사람은 두 가지 다 아는 것이다. 그런데 밖에만 있는 사람은 안의 사정을 전혀 모르니까 두 가지를 모른다. 들어왔다가 나왔다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두 세계를 보고 있는 사람이니까 분명히 사람은 한 사람인데 두 사람이다. 세계는 한 세계인데 두 세계가 있다. 직장 안에 들어가면 다 같은 직원이다. 그런데 거기에 두 세계가 있다. 어디에 가든지 다 그렇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크고도 넓어서 측량할 수 없는 넓이이다.
[ 기 도 ]
은혜로우신 아버지 하나님!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회가 이처럼 아름답고 이처럼 영원하고 이처럼 완전하고 이처럼 우리의 흠모의 대상이 되는지, 주님 비록 우리가 땅위에서 오늘 교회생활을 하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 이상을 가지고, 이 새 예루살렘의 그림을 가지고 우리가 교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축복하여주시기를 원합니다. 비록 땅에 있을 지라도 하늘의 사정안에 우리가 있게 해주시고 비록 우리가 한 사람인 것 같지만 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은혜가운데서 모든 일이 다 우리에게 열려지게 되기를 원하고 이것으로 인해서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빛이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