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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이서 03 진리와 사랑안에서 행함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 부녀여 내가 이제 네게 구하노니 서로 사랑하자 이는 새 계명같이 네게 쓰는 것이 아니요 오직 처음부터 우리가 가진 것이라 또 사랑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 계명을 좇아 행하는 것이요 계명은 이것이니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바와 같이 그 가운데서 행하라 하심이라. [요한2서 4~6]
오늘 말씀은 진리와 사랑안에서 행하자는 말씀이다 지난 시간에는 진리와 사랑안에 있는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어떠한가를 보았으니 오늘은 그 안에서 행하는 문제를 말씀하겠다.
아버지께 받은 계명데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니하는 말은 아버지는 진리안에서 행하라했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진리는 인격을 말한다 사물의 이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에 관한 신성한 실제를 진리라고 한다.
은혜와 진리는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앙아 온것이다 동양사람이나 철학에서 말하는 그 진리가 아니라 아들의 인격안에 있는 실제를 진리라고 하는 것이다. 요한의 보수하는 사역안의 근본이고 중점이다.
이것은 바울로 인해 세워진 교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문제가 생겼다 그 분제들은 마치 그물을 사용하다 보면 짖어지는 것 같은 현상이었다 그래서 요한은 이것을 보수하는 사역을 맡은 것이다. 이 보수하는 사역의 기본이고 중심된 것이 진리의 문제였다.
어디서 빗나갔는가를 알아야 고칠수 있다. 오늘날 교회도 조금 생각하고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교회가 잘못 되었다고 한다. 젊은 세대의 신학생 목회자들은 그래서 개혁을 해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어디서 빗나갔는지를 모르니 고칠수 없다 구멍난 자리를 알아야 고치는데 몰라서 못 고친다.
그래서 표면적인 것으로 제도를 바꾸어 본다든지 예배형식을 바꾸어 본다든지 선교 활동을 바꾸어보는 이런것만 하고있다. 요한은 교회가 어디서 빗나갔는가를 알았다 진리에서 빗나갔다 다시말해 그리스도 인격에서 빗나갔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문제도 이것이다.
진리에서 빗나갔다하면 교리에서 빗나간줄로 생각한다 그래서 진리에 바로선다는 말을 하는데 이것은 교리에 바로선다는 말이지 그리스도의 인격에 바로선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의 문제는 교리의 문제가 아니고 아들의 인격에 관한 문제이다.
이문제가 기본이고 중심인데 여기서 빗나갔으니 다른것을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 사실 다른것은 잘하고 못하고 인격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예배 방식을 어떻게하고 교회 봉사를 어떻게하고 어떤 방식으로 모임을 갔는가 이런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니까 아무상관 없는것만 고치고 있어 고쳐질리가 없는 것이다.
요한은 분명하게 교회가 변질되고 이탈되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인격의 실제가 없어 그런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았기 때문에 요한의 보수사역의 중심이고 기본은 진리라는 문제이다.
아들의 인격이 중심이고 핵심이다 우리가 부름을 받은것은 이 아들의 인격안이다 죄사함이 아니고 구원이 아니다 아들의 인격 안으로 부름을 받은것이 교회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인격안으로 소집된 것이 교회다.
그런데 어떤곳은 구원 때문에, 어떤곳은 죄사함 때문에, 어떤곳은 선을 행함 때문에, 모임의 기본 중심을 보면 별의 별것이 다있는데 모두 다 빗나간 것이다 아들의 인격 안으로 부름 받은것이 교회인데 그것은 어디로 가고 없고 다른것이 문제가 되어 그것 때문에 교회가 생기고 그것 때문에 교회가 되고 교회가 흥왕하기도 하는데 이런것이 교회의 기본이고 중심이 된 자체가 교회가 이미 변질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교회들이 흥왕하여 옛날 미국이 그랬듯이 지금은 한국의 교회들이 세계 각처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이 교회의 기본이고 중심으로 생각하는데 그리스도의 인격이 기본이고 중심이다 이것을 전파하지 못하면 다른 어떤것을 전파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다른것을 전파하는 것은 종교이다 요즘 불교도 맹열하게 기독교와 흡사한 방법으로 선교활동을 하고있다. 그리고 한강에다 거북이도 살려주고 고아원도 세우고 양로원도 세우고 좋은 일도 아주 많이하고있다. 그러나 그런것이 교회의 기본이고 중심이 아니다.
교회의 기본과 중심은 진리이다 진리는 아들의 인격이다 아들의 인격안에서 행한다 함을 들으니 기쁘다는 말이다. 올바른 교리를 믿으니 기쁘고 교리에서 빗나가지 않으니 기쁘다는 말이 아니고 아들의 인격안에서 행한다하니 기쁘다는 말이다.
어디가서 보니 바로선 장로교회가 있던데 인격에 바로선다는 뜻이 아니고 장로교의 교리에 똑바로 선다는 말이다 어디는 믿음에 교회 사랑의 교회 여러 이름들이 많지만 아들의 인격이 아닌것은 다 허상이다.
이 아들의 인격이 우리의 믿음이어야한다 천당에 간다 구원을 받는다 죄사함을 받는다는 믿음을 갖는것도 다 좋지만 하나님이 원하는 근본적인 것은 아들의 인격이 우리의 믿음이 될 뿐 아니라 우리의 믿음 자체가 되야한다.
이것만이 내 인생이고 내 운명이다 이것만이 인류의 운명이고 이것만이 인류에 제시되어야 할 영원한 진리다는 믿음이 되야한다. 내가 예수를 잘 믿는다는 자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믿음이 되야한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믿음이어야한다.
인격 안에서 행한다는 말이 바로 그분이 우리의 믿음이 된다는 말이다. 그러고나면 우리에게 생활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행함이다 그 인격 그 진실을 내 믿음으로 알고 있으면 그 믿음을 살아내게 된다 사람은 자기 믿음을 살아내는 법이다.
가령 돈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돈을 살아내고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으면 능력을 살아내는 것이다. 특별히 기독교안에서 일하는 많은 사람은 자기 믿음을 살아내고 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 그 인격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기본문제이고 중심문제이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묻는 사람이 있는데 어떻게 사는게 아니고 무엇이 내 믿음이 되었느냐가 문제다 그리스도가 내 믿음이 되었으면 우리는 그 믿음을 저절로 살아내는 것이다.
자녀중에 아버지께 받은 계명데로 진리 안에서 행하는 자를 보니 기쁘다했는데 아버지는 진리 안에서 행하라는 계명을 주었는데 이것은 아들을 영화롭게 할려는 것이다 요한복음 5장 23절에 보면 아버지께서 아무 심판을 하지 않고 아들에게 맞기셨으니 이는 모든 사람으로 아버지를 공경하는것 같이 아들을 공경하려하심이라 했는데 이것은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는 진리 안에서 행해야 아들이 영화롭게 된다는 말이다.
진리 안에서 진리를 믿음으로 가지고 살아낼 때 아들이 영화롭게되니 진리는 곧 아들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한 진실을 살아내면 십자가에 못박힌 진실이신 그분이 영화롭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살아내는것은 세상하고는 정 반대의 것이다.
겉으로 보기는 한 공간안에 있지만 그리스도를 살아내고 세상을 살아내는것은 정 반대의 것이다. 세상은 자기안에 있는 무엇인가 잘되어 자랑할만한 것을 살아내는 것이다 실력이 있으면 실력을 살아내고 제주가 있으면 제주를 살아내고 돈이 있으면 돈을 살아내 무언가 자기가 성취한 것을 살아낸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것을 들어보면 자기가 무엇을 성취했다, 성취할수 있는 사람이다, 무엇을 성취하고 있다, 전부 자기가 만들어 낸 어떤것을 선전하고 그 맛에 산다 그러나 교회는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운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그러니 정 반대다 세상이 볼때는 실패한 운명을 살아내는 것이다.
버린 쓰레기를 가지고 그것을 귀하게 선전하고 다니는 것이니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세상이 버린것 아담이 버린것 이것을 건축자의 버린돌이라 표현했다 우리가 다 싫어서 버린것이 집 모퉁이의 요긴한 돌로 있으니 우리 눈에 기이한 일이다는 것이다. 우리가 찬송하고 즐거워하는것은 그것이 기이해서 하는 것이다.
세상은 당연히 자랑 할만한 것을 자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자랑 할만한 것이 아닌것 전혀 자랑할수 없는것을 자랑하고 있다 이렇게 전혀 자랑할수 없는것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야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십자가에 달린 아들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돌을 잘 선전해서 돌값이 금값이 되면 돌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이처럼 사도들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를 이사람은 장차 올것이고 장차 왕이 될것이고 기름부음 받은 그리스도고 이사람은 우주적인 신랑이 될것이고 심판은 이사람에게 맏겨질것이며 세상은 망할것이고 이사람은 완전하게 승리할 것이다고 선전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세상이 볼때는 어이없는 일이다 오늘날 교회들이 이것을 안다면 지금처럼 헛일을 하지 않을 것인데 이 기본적이고 중심이 되는 일을 버리고 우리교회는 사람이 얼마가 모인다 우리는 어떤 선교사업를 하고 있다 우리는 선한 사업을 하고있다는 등 이런것을 자랑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자랑할수 없으니 그런것을 자랑한다 그런데 세상은 그 말에 입이 벌어진다 만일 우리가 오만명쯤 모이면 바로선 장로교회에 가서 말하면 입이 벌어질 것이다 아무리 바로서도 오만명 앞에서는 안된다. 이런것은 세상에 내놔도 환영하는데 이런것만 하고 있다.
그러나 세상도 버리고 모든 종교가 버린 그것을 살려내는것이 복음이다. 왜 하필 좋은것 다 두고 그것을 살려내는것이 복음인가하면 우리 인생이 이것을 살려 낼수만 있으면 무엇이라도 다 살려 낼수 있다 이 부정을 긍정으로 바꿀수만 있으면 모든것을 긍정으로 바꿀수 있다.
십자가는 절대적 부정이다 세상에서 보면 절대적 실패다 그렇게 의롭고 그렇게 선하고 그렇게 완전하고 그렇게 순종했지만 십자가에 못박으니 죽더라 그런데 이것은 변할수 없는 사실이다 사람이 잘못해서 벌을 받는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당연히 상을 받아야하고 영광을 받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 이보다 더한 절망이 인간에 있을수 없다.
내가 죽더라도 내가 행한 일이 인정이되면 기꺼이 죽는 사람은 많다 의사 열사 충신이 그런 사람들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인정되지 않고 죽고 말았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그러니 십자가는 절대적 부정이다.
나는 이러고 저러니 불행하다 한것은 거기에 비교할수 없다 그런것들은 파헤쳐보면 다 그렇게 될수 밖에 없게 한 자기의 어떠함도 있다. 100% 자기 이유가 없는 경우는 없다 그러나 예수의 십자가는 100% 억울한 자리다 그래서 이 자리를 살려낸다면 어떤것도 살려 낼수 있다 이것은 명상해서 깨달은 문제가 아니고 실제적인 문제다. 그래서 복음이다.
우리 인간이 가지고 있는 어떤 문제라도 이 안에 들어오면 해결되지 않을 문제는 없고 긍정으로 바꾸어 지지 않을 문제는 없다. 그래서 복음이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세계에서 살고 있다 내가 눈을 뜨자마자 산도 있었고 공기도 있었고 햇빛도 있었다 싫다고 바꿀수도 없고 좋다고 더 가져 올수도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라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만드는것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내가 바꿀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할수 없는 어떤것이 이미 있다 이것을 보고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는 것이다.
내 인생도 육신적으로 보면 아버지 어머니가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피조물이라고 하는것은 아버지 어머니도 남자인 나를 여자로 바꿀수가 없기 때문이다 요즘에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다 그렇게해도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이처럼 우리가 바꿀수 없이 나에게 주어진 세계에 와 있다.
내 의사와 상관없이 나는 하나님 창조의 세계에 던저져 있는 존재다 그러니까 내가 던저져 있는 이 존재로서 창조된 세계를 어떻게 소화하느냐 이것이 문제다 잘소화되어 영양분으로 흡수되면 축복이 되는 것이고 소화가 안되고 부정이되면 저주가 된다 축복과 저주가 다로 있는것이 아니고 소화하면 양식이 되고 안되면 저주가 되는 것이다. 이미 바꿀수 없이 주어진 것을 복으로 해석하고 저주로 해석하는 문제인 것이다.
성경 말씀을 하나님 말씀이라 하고 이말씀을 들어야 우리가 축복이 된다하는 것은 성경은 처음부터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시작을 한다 그리고는 이것에 대한 해석이 있다 그래 이 말씀을 잘 들으면 해석력이 생긴다 이것은 내 인생에 대한 해석력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알고보면 창세기 1장 1절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한 다음에는 내 인생을 해석할 말씀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를 잘 해석하면 축복이 되고 잘못 해석이되면 저주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과 저주를 따로 둔것이 아니다 이미 모든것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석하라고 말씀은 주어진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주어진 우리의 운명이다 우리는 이것을 바꿀수 없다 예수의 문제가 아니고 이젠 내 문제다 바울이 내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했다 자기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 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것이다.
저것은 저주를 받은 것이고 끝이고 비참한 것으로 해석이 되어질 것이냐 아니면 이것은 진실이고 이것만 영원한 것이다고 해석될것이냐는 말이다 진실이고 영원한 것이라고 해석이 되면 아들이 영광을 받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면 동시에 우리가 영광을 받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살아도 내가 산것이 아니요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것을 무엇으로 어떻게 소화하느냐에 따라서 저주와 축복으로 갈라진다 해석에 따라서 아들을 영화롭게도하고 저주 하기도 하게된다 우리는 그것을 살려내지 못하면 아들이 실패한 것으로 만들어 아들을 저주하는 것이된다. 예수를 저주하려 해서 저주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기를 원한다 그래야 아들이 영광을 받기 때문이다 예수가 아들이라는 신성한 사실을 인식하고 살아야한다 십자가가 나의 운명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내야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유일한 아들이다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 부터 나온 사람이고 그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이다는 인식안에서 사는 삶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삶이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저희 말을 들으라하더라 이 인식이다 결국은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인데 이사람을 보고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다 너희는 저에 말을 들으라는 것을 인식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가장 가치있고 가장 영광스럽고 가장 귀중한 분이 이분이구나하는 인식속에 사는 것이니까 나는 내 안에 주신 이인격을 가장 귀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진리 안에서 행하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이다.
다른 자리에서는 그분과 따로이지만 그 자리에서는 하나이다 이 하나를 살아내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 사람을 살아내는 것이다 2000년 전에는 예수고 지금은 우리이다 이 생활이 진리 안에서 사는 생활이다 그러니 당연히 기쁠수 밖에 없다. 너희 자녀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데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보니 내가 심히 기쁘다.
사도요한은 자기가 그렇게 사는 사람인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심히 기쁘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들을 때 기쁨이 충만해 진다. 우리가 쓸때없는 이야기를 들으면 기뻐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살아내는 이야기를 들을 때 기뻐한다 그것은 곧 나를 살아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을 잘 표현을 못하는데 누군가 그것을 잘 표현해주니 기뿐것이다 소원이 없다 원이 없다는 말이 그래서 나오는 것이다. 내 인생을 살려낼 길이 없고 풀어내지를 못하는데 누군가가 풀어주니 여한이 없다하는 것이다.
무덤에 간 모든 사람이 한을 가지고 가는 것은 이세상을 사는동안 자기 인생이 무엇이지도 모르고 해석이 안되서이다 왜 이렇게 살다 이렇게 가야하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누가 자기 인생을 완전하게 해석해 주니 죽었지만 한이 없는 죽음이 되어 귀신이 안될것이다 한이 맺혀 죽으면 귀신이 된다한다. 그러니 자기 인생이 여한이 없도록 해석이 되야한다.
나는 이것을 위해 태어나고 이것 때문에 인생이 있구나하고 해석이 되야한다 귀신은 밝은데서는 못살고 어둡고 칙칙한데만 산다 한 밎힌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한이 없으면 귀신도 없다.
예수의 십자가 진실안에 보화가 있는 줄 아는것이 인간에게 영원한 것이다. 세상에서 자랑하는 것은 모두 만든것이고 만든것은 다 없어질 것이다. 그리고 만든것은 아무리 자랑해도 자기 업적일뿐 자기 존재가 아니다 그렇기에 자기가 무엇을 했다 자랑하는 것이지 자신을 자랑할수 없다. 무언가 평생해서 내 세워 놓았지만 자신은 해석이 안되니 한이 맺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진살안에 오면 해 놓으면 좋지만 해 놓은 것은 없을 지라도 내 자신이 해석이 된다 왜 태어났으며 왜 죽는지 거기 아니면 해석할 데가 없다 진리 안에 행한다 하니 심히 기쁘다 우리가 진리 안에서 행하면 하나님이 심히 기뻐하실 뿐 아니라 온 교회가 심히 기뻐하고 기뻐한다.
그것을 당당하게 살려내는 것을 보면 정말 기쁘다 그러니 잘 들어야한다 확실하게 듣고 당당하게 서야 된다 어영구영 들으면 나가서 헤메게 된다 그러면 얼마나 속상한 일이겠는가 나는 속상하는게 그런 일 밖에 없다 이것을 내놓으면 어떤환경 어떤 사람을 만나도 당당하다. 어떤 환경 어떤 사람은 다 만들어 놓은 허구다 이것만 진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하자 했다 이것은 사랑안에서 행하자는 뜻인데 아버지는 아들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진리 안에서 행하라하고 하시고 아들은 자기 자신을 표현함으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 아들을, 그 진실을 살아내면 그것이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그분의 표현이다 진실과 운명을 표현하면 사랑이 된다.
진실은 존재라면 사랑은 표현이다 사랑하지 못하고 하나되지 못하는 것은 소유와 공로와 업적 때문이다 내가 만든것 네가 만든것 이것들 때문이다 내가 만들고 네가 만든것이 아닌 하나님이 주신 그 진실안에 오면 다 하나가 된다. 하나가 되자 맹세하고 약속하고 다짐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한 운명안에 있으므로 서로 사랑하게 되고 서로 하나가 된다.
그러니까 내 소유 내 공로 내 업적이 아무것도 아닌줄 알고 내려놓으면 누구던지 하나가 될수 있다 나는 이만큼 아는데 너는 그도 모르냐 나는 이렇게 선한데 너는 그렇게 악하냐 이런것 때문에 하나가 안된다 가인과 아벨이 싸운것은 업적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제사를 드렸는데 너는 왜 그렇게 드렸냐 왜 내 제사는 안 받아지지 않는데 넌 받아지냐 이런 것이다.
자기의 소산물을 가지고 왔다하고 되있다 그러니 자기 업적이고 공로고 소유이다 그것을 내놓고 부딪힌 것이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그런것을 내 놓으면 다른 사람의 그것과 부딪혀 기분이 나쁘던가 자존심이 상하던가한다 기분이 나쁘다는 것들이 다 그런것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에 운명만을 표현함으로 사랑했다 그분도 자신의 업적을 내 놓으면 우리를 사랑할수 없다.
게셋마네 동산에서 예수는 피땀을 흘리면 기도하고 한 쪽에서는 자고 있었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만나면 어쩌겠는가 업적대 업적으로 만나면 틀림없이 저주다 이런 판국에 네가 잘수가 있는가 이 판국이 어떤 판국인데 네가 잠을 자다니 이런 배은 망덕이 어디 있나 어디가지 따라 가겠다던 놈이 잠시 기도하자는데 자다니 말을 하자면 한이 없다 업적과 공로들이 만나면 싸우게 된다.
예수님이 심문을 받을때 베드로는 살짝 엿보고 있다가 나는 모르겠다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네가 이럴수 있냐 짐승만도 못한 놈이다하면 다시는 못 만난다 그러나 에수님은 다시 찾아갔다 당신의 공로나 업적을 가지고 찾아간 것이 아니고 당신의 존재를 가지고 찾아갔다.
우리도 우리의 업적이나 공로나 소유를 가지고는 다른 사람 앞에 갈수없다 가지고 가면 그 사람을 노엽게 만들어 버리고 자신도 분통이 터질수 밖에 없지만 이것을 내려놓고 가야만 만나진다 진실과 그 운명 안에서 만나 질때만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자신의 운명을 표현 함으로서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내 운명을 표현한다면 나타 낸다면 서로 사랑할 것이다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
이것은 새롭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처음부터라는 말은 원천적이다고 번역이 되기도하는데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것이 원천적이고 근원적인 것으로 우리는 거기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가 부름받은 근원이 거기다 사랑이라는 원천에서 우리를 불러 낸 것이다.
고기잡고 있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서 고기를 많이 잡았느냐 생선을 구워 놓았으니 와서 먹으라 한것은 베드로에 있어서는 원천이다. 이 원천은 그분의 진실 안에서 운명안에서 표현된 사랑이다 그러니 새로 우리가 만들것이 아니다. 내가 새로 노력하는 문제가 아니고 우리 근원의 문제이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는 우리의 운명이다 운명이라는 말은 우리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처음부터 들은 것이지 지금 새삼스럼게 말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이다 요한 일서에서 처음부터 들은 계명이다한다 우리는 처음 부름 받을 때 거기서 부름 받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분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는 말이다.
그래서 서로 사랑하는 것은 원천적인 것이다 가인과 아벨은 이 원천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를 부르신 원천에서 빗나가면 엉뚱한 생활을 하게 된다 기독교가 번창하고 여러가지 복잡한 일을 많이 하는데 원천에서 빗나가 복잡한 일만하고 원천하고는 관계가 없다.
처음부터 부름 받기를 그리스도의 운명안에서 부름 받았으면 그것이 사랑이니까 사랑의 원천에서 부름 받았으면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데 그 원천에서 부름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하는것이 새로운 수고가 된 것이다.
구원받은데서 죄사함 받는데서 부름 받아서 사랑하는것이 힘드는 일이 된것이다. 그러나 사랑하는것은 내가 힘써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원천적인 문제이다 우리가 아담과 하와를 보면 원천 안에서는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다 아담과 하와의 관계의 원천은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다 아담의 갈비벼로 하와를 지었으니 한 생명이다 그러니 사랑하는것은 당연한 일이고 원천적인 것이다.
그러나 지식은 모든것을 분석하여 생명과 운명을 갈라내 서로 남남이 되게 만들었다 태초부터있는 생명 태초부터있는 말씀 태초부터있는 운명 이안에 사랑이 있다 이안에 아가페가 있다 지금 우리가 새로 생명을 만들고 지금 새로 말씀을 지어내고 지금 운명을 만든것이 아니다 세상이 말하는 운명과는 다른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운명은 만들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운명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팔자는 길들이기 소관이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운명은 우리가 만들고 바꿀수 없는 것인데 이안에 사랑이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서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때가 이른줄 아시고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끝가지 사랑하시니라는 말이 있다. 원천으로 갈때가 이른줄 아시고 제자들을 종말적으로, 결국 사랑하시더라는 말인데 결국 사랑할것 밖에 없다는 말이다. 사랑에서 나왔으니 갈때는 사랑밖에 남지 않더라는 말이다.
부모가 돌아가시고 나면 남는것은 부모의 사랑만 남는다 살아 계실때는 이런것 저런것 복잡해서 결국 소유와 공로와 업적 때문에 자식과 부모가 원수가 되기도 하지만 근원으로 돌아 갈때가 되면 이것이고 저것이고 다 소용없고 사랑하는것만 남게된다. 그래서 부모가 돌아가시면 불효자가 제일 많이 운다.
우리 인생에 사랑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사랑에 인색할 것이 아니라 사랑에 풍성해야된다. 우리가 한 운명안에 있고 운명 밖에 남을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운명의 결국엔 사랑밖에 할것이 없다 세상을 살려고하다보니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이지 사실 운명안에 오면 다른것은 소용없다.
진리 안에서 사랑안에서 행한다함을 들으니 내가 심히 기쁘다하는데로 주님께서 우리가 진리와 사랑안에서 행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신다면 우리도 행복하고 교회도 행복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그런 삶이 될것이다.
기도합시다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복잡한 세상 속에서 주에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살길이 하나밖에 없고 갈곳이 하나밖에 없고 남을 것이 유일하게 하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하여 주신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가졌던지 무슨 공로를 쌓았던지 어떤 업적을 이루었든지간에 우리는 한 운명안에 있고 갈수밖에 없는 한 진실안에 우리가 있다는 이 사실을 단순하게 깨닫게 된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우리 인생을 단순화 시켜주고 우리 인생을 진실하게 해 주고 그래서 우리가 결국 남은것은 사랑밖에 없고 할 것은 사랑밖에 할것이 없는 결국을 볼수있게 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종말까지를 다보고 살수있는 사람들이 되게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지혜와 게시의 영을 주셔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열어주신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