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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2016): 베르그송 부분
이정우, 길, 2016년 04월 30일 pp.272-447,(464쪽)
벩송의 현존론은 고대형이상학의 존재론이 상식에 기반하여 깊이 들어가는 사유에서 부딪힌 아페이론이 일으키는 난문제를 해결하고 한다. 고대철학에서 변화하고 방황하는 아페이론이 학문의 대상은 아니지만, 아페이론을 무시 또는 배제하고서는 현존의 현상들을 설명하지 못하는 난제이라는 것을 안다. 벩송은 자유 문제의 진화(1904-1905)강의록에서 이런 난제가 고대와 르네상스 이후 그리고 현대에까지 문제거리로 남아 있는 이유를 해명하고자 한다. 한마디로 “영혼”의 실재성을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영혼 안에 내재하는 선험적 능력으로서 기억을 해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기억이론의 역사(1903-1904)강의록에서 기억에 대한 논의는 생물학과 의학이 발달하고, 그리고 유전학이 도래해서야 영혼학(심리학)이 성립한다고 보았다. 그 영혼에 대해 원자론적이고 관념연합적인 기능으로 보는 측면으로 이원성을 보았기에, 재현(표상, 현상)되는 한 부분이 빠져있어서 해명이 불가능하였다고 본다. 벩송은 고대의 상응론이, 근세의 이원론, 평행론, 예정 조화론으로 이어졌고, 급기야 칸트에서는 둘 사이를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손을 들고서 형이상학의 불가능성으로 갔다고 본다. 이에 대해 벩송은 기억 총체의 능력(la faculté) 또는 뒤나미스가 중요하다고 보고, 그 능력(권능)이 지속하며, 개체화되기 이전에 이미 온자연이그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 능력이 자발성이다. 권능이 상호침투하는 능력으로 개체에게 내재하면, 그 개체는 그 권능을 신체와 더불어 실현하려고 한다. 신체의 저항에 대해 영혼이 타협안을 만들면서 현존하게 되는데, 이 현존이 개별 생명체의 삶이다. 온삶은 개체의 삶에 이어져 있다. 부분으로서 개체는 전체의 권능을 지니고 있음에도 물질과 결합에서 한계(경계, 페라스)를 갖는 것이며, 신체이미지로 등장한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프랑스 초기 심리(영혼)학에 이르기까지, 이 과거의 총체, 즉 기억총체의 실재성을 해결하지 못하였다. 고대에서는 영혼을 신화에 의존하여 저세상에서 데려왔고, 종교는 신의 품에서 얻어오는 것이었다 – 이를 니힐리즘의 극복이라고 하기도 한다. 르네상스에서는 하늘에서 벗어나 지상으로 내려놓았으나 발생과 생성을 설명할 수 없었기에, 근세 철학에서는 또 다시 고대의 틀인 상응론에 비추어, 이원성, 평행론, 조화론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새로운 방법론으로서 영혼을 탐구하는 길, 벩송이 말하는 “따라야 할 방법”은 무엇인가. 그는 우선 시론(DI, 1889)에서는고대로부터 근대의 신칸트학파에 이르기까지 운동을 공간화 방식으로 다룬다고 비판한다. 이런 형상론 철학, 원자론적이고 관념연합론으로 의식 즉 영혼을 다루는 귀결은 결국에 불합리 또 부조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영혼은 정지에서 정지로 사이의 운동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며 지속하는 덩어리라 한다. 그 지속의 이해는 심층(깊이)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한다.
따라서 물질과 기억(MM, 1896)“깊이”가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된다. 벩송은 영혼의 깊이에서 일어나는 상태들에 대해 “재인식”을 물음으로써, 표상에 대한 재현의 인식과는 다른 의식 활동이 있음을 탐구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추억들의 의식 단면(평면)과는 다른 의식 총체로서 기억을 구해낸다. 기억은 추억들의 집합으로서 대상화 또는 의식 사태를 표상하는 하는 것과 달리, 벩송은 기억을 의식의 능력 또는 생명의 권능과 같은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의미에서 의식의 총체적 상태로서 기억은 실재성이며 작동하고 있는 권능과 같은 것으로 본다. 이로부터 이런 움직이고 지속하는 상태의 인식은 지성이 아니라, 직관이라는 능력으로 보았다.
이런 능력이 개인에게만 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 종 전체에 내재하는 것을 실증적으로 탐구해 들어간 것이 창조적 진화(EC, 1907)이다. 과거의 기억은 생명전체에 내재되어 있다. 이런 경험적 실재성은 기억이론에서처럼 현존하고 있다고 한다. 존재론이 아니라 “현존론”이다. 그렇다면, 고대 이래로 존재론에서 존재는 기호화일 뿐이고 말로서 하는 기표일 뿐이다. 벩송 식으로 말하면 그 존재든 존재자들(이데아들)은 상징(symbole)에 지나지 않는다. 이로써 벩송은 고대철학에 비추어서 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강의록에서 상징으로 다루는 철학이 흩어진 다양한 사물들을 분류하고 그리고 비슷한 것을 모아서 일반화하고 추상화하는 것으로, 이는 로고스(logos)의 역할이라 한다. 이에 비해 누스(nous)는 이들을 요소들 또는 개별자들로서 경계를 지워서 다시 전체를 구성하는 방식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에서 어떻게 분할 또는 분화되어 나왔는지를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즉 의식은 지속의 분열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고 한다.
벩송은 MM에서 못다한 설명을 「형이상학 입문(1903)」에서 직관을 통한 경험적 총체성의 파악이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이 형이상학은 형상형이상학의 형상론과 다르다는 의미에서 질료론(아페이론론)이라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질료론은 실재적 내용상으로는 영혼에 대한 해명이다. 왜냐하면 벩송에서 온영혼은 흐름이며 흐름의 분절화가 개체 또는 인격이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인격성에는 현존으로 지속하고 있으며, 존재와 존재자라는 추상화의 상징들과과 전혀 다른 실재성이다.
이런 점을 철학사적으로 파악해 보면, 고대철학이래로 개별학문이 형상 형이상학을 기준으로 또는 표본으로 제반 실증과학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고대에는 인간의 오관(cinq sens)을 통한 상식으로 그 경험을 설명하는 데 지나지 않았다. 갈릴레이 이래로 물리학이 라브와지에 이래로 화학이 그리고 19세기에 와서야 생물학과 의학이 성립함으로써, 의식 상태들에 대해 경험적인 실증으로 논의를 하게 되었다. 이와 더불어 물질의 내부로 파악은 엔트로피 역행과 자기장과 같은 장이론의 덕분으로 영혼 즉 의식은 유동적인 장과 같은 것으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이런 과정은 철학사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경험적 학문이 하나하나 무너지는 과정과 같은 길이었다. 벩송은 철학이 운동으로부터 설명했어야 하는데, 정지로부터 설명하는 방식이 있어왔다는 점에서, “전도된” 사유방식이라 한다. 들뢰즈는 “전복”이라는 용어를 쓸 것이다. 철학사를 뒤바꾸어 놓은 사유 방식과 탐구 방식에서 나온 새로운 형(形)이상학을 영(靈)이상학이라 부르고자 한다. 사실 이러한 관점을 박홍규에게서 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그리고 우리 글로 쓰여져 있어서 곰곰이 읽으면, 페라스(형상)의 철학과 아페이론(질료) 철학의 대결로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유심론과 유물론, 합리론과 경험론, 관념론과 실재론 대결이라는 대결 또는 투쟁의 관계는 철학의 시대적 과정에서 일부의 견해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페라스와 아페이론만큼이나 존재와 현존, 다수의 일자와 다양체로서 일자라는 개념화 작업이 현실에서 그리고 사회와 문화에서도 응용될 수 있다. 벩송의 작업을 이어나간 들뢰즈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개념이 이중성 또는 다의성을 지녔음을 밝히면서, 인격(영혼)이 현존으로서 “다양체”로서 단위임을 잘 해명한다. 이런 관점으로부터 그는 가타리를 만나 사회와 문화의 영역으로 확장하여 전개하였다. (55N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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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벩송의 사유를 설명하면서 이분법적으로 용어들을 구분하여 설명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설명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벩송의 진솔한 의도를 이해하는 데 착오를 낳는다. 공간과 시간, 동일성과 이질성, 정지와 운동, 이데아들과 무 등은 분석적이고 기표화된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이며, 실재성에 근거하여 흐름을 이해하지 못하게 한다. 왜냐하면 벩송은 분명하게 공간적 사고는 기호화-일반화-추상화-상징으로 향하는 논리적인 사고이며, 흐름-생성-발산-수렴으로 이어지는 직관적이고 상호침투적인 사유 사이에는 마치 자석의 북극의 방향과 남극의 방향만큼이나 차히가 있다. 그럼에도 동일성에서 설명하는 이유는 도구 사용에서 거푸집과 모형들을 다루는 데 익숙하여 지성을 통하여 논리를 다룰 수 있는 방식으로 인류가 진화해 왔다는 것이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과 유클리드 기하학이 비슷한 시기에 정립되어 학문적 기반으로 자리 잡았을 때부터 제반 학문들이 정초되기 시작한다. 이 시기에도 여전히 동일성 또는 논리적 사고로서 해결하지 못하여 생긴 난문제는 영혼이었고 다른 하나는 원주의 직선으로 환원이 안 되는 시기였다. 이런 아포리아를 해결하려는 노력은 죽 있어왔지만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한꺼번에 해결되었다기보다, 과정에서 이런 저런 추론과 실증을 제기하였지만, 고대의 상식위에 선 동일성의 원리가 근세의 양식 위에서도 통용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 자체라는 논법이 즉 지성의 도구적 입장이 끈질기게 유지되어 왔던 것은 전체가 하나라는 것과 부동이 원리라는 것을 깨뜨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체가 열리는 것은 무한이 열려야 했으며, 생명 내부에서 부동으로부터 설명이 아니라, 기원(아르케, 레종)에서부터 지속-흐름의 설명으로 가능해져야만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유가 등장하기 까지 결정론적 사고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왔다. 그 노력에는 무(또는 허무주의) 또는 라는 삶에서 등장하는 문제거기가 개입해 있었기 때문이다.
불멸의 욕망과 허무의 극복이란 과제가 감성적으로 있어왔다. 이런 감성에서 오는 문제거리는 지성 또는 논리적 추론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교가 무에서 창조라고 간단하게 해결한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삶의 터전은 무에서 시작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새로이 무에서 창조된 터전에서 새롭게 사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무와 죽음은 삶의 터전에서 이기적 탐욕과 무모한 지식으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일부의 어리석음에서 오는 것이다. 이러한 탐진치를 벗어나는 지혜(직관)는 지성과는 다른 길이라는 것은 이미 소크라테스에서부터 나온 문제제기였다. 분열적 의식에서 진솔한 방식은, 추상의 극한에서 명령과 위협으로부터 이익을 확대하는 것이 아니라, 일치와 공감에 의한 협약과 계약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 노력이 필수적이며, 이런 노력 위에서 인류는 자치, 자율,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몇 가지 조심해야 할 용어가 있다. 저자는 지성을 지능으로 축소시켜 번역하였다. 이 지성이란 용어는 벩송에게 있어서 고대를 다룰 때, 플로티누스의 누스와 로고스를 합한 용어와 같다. 벩송은 누스와 같은 의미로 쓸 때는 대문자로 온지성(Intelligence)에 가깝고, 소문자로 지성(intelligence)에 가깝다. 지성을 축소시킨 이유는, 내가 보기에, 이성을 지능보다 높은 인식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벩송의 저작들에서 레종(raison)은 이유 또는 기원에 가깝고, 선생님께서 자연의 원질(arche 아르케)을 이유 또는 원인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있는데, 아르케와 레종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 레종이 충족이유율에서 뿐만 아니라, 칸트의 작품을 reinen Vernunft(Raison pure)에서도 작품의 설명과 의미상으로 순수이유 또는 순수 근원으로 읽어도 될 때가 많다. 또한 프랑스어에서 레종이 일리가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 것도 고대그리스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레종이 이성으로 인식 상으로 오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의미로 여긴 것은 일본을 통해 들어온 번역상에서 오는 것으로 보인다.
게다가 벩송에서 정신(l’esprit)와 물질(la matière)에 관해서도 문장 상으로 읽어야 한다. 영혼과 신체의 대구(對句)로서 정신과 물질이라고 하지만, 지성의 방향이 물질이라고 할 때, 물질은 공간적 지위, 또는 터전 위에 있는 경우에 현존하는 물체로 보아야한다. 그럼에도 물질도 영혼과 마찬가지로 아페이론과 같은 성격으로 기원적 의미에서는 흐르는 실재성이다. 두 실재성의 이중성에서 생성에 관한한 서로 연관있으며, 특히 「형이상학 입문」에서 두 실재성은 흐름이며, 흐름인 한에서 서로 상호침투하는 경향성을 지닌다. 이런 형이상학적 개념작업은 지성이든 이데아든 둘 다 먼저 있는 것(전제된 것)이 아니라, 흐름으로서 먼저 있고, 그리고 둘이 이중화의 경향성 속에서 갈라진다. 하나는 상향으로 하나는 하향하는 경향 또는 방향을 갖는다(EC 3장).
의식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문맥 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추억들도 기억도 의식이다. 의식의 내부 또는 의식 상태에서 그 위상들로서 경계를 그어서 규정할 수 있다면, 추억들의 평면들과 기억의 총체(고깔)가 있고 이들은 각각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 그럼에도 과거라는 의미에서 현실화되기 이전까지는 무의식(Inconscience, inconscient)이다. 의식 상태의 내재성으로서 아직 드러나지 않은 상태들이 삶에서는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끊임없이 움직이는 역동적 작동(l’acte)을 한다. 이런 작동을 “작동하는 권능(puissance d’agir)”라고 하는데, 충력이든 역동성(뒤나미스)라고 표현하든 작동하는 과정 중에 있는 것의 일부가 현재에서 이미지로 현전하는 것이다.
여기서 기억만큼이나 무의식도 실재성이라고 한다. 이 실재성은 현실성에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현재에 닿아있는 것이다. 이 닿아있다는 접촉에 대해 선생님은 아페이론과 이데아를 접촉하게 하는 제3자로 취급할 수 있다는 설명을 한다. 우리가 보기에 문제제기는 제3자인데, 인간은 현존 상으로 제3자로서 태어난다. 즉 극한의 이데아도 아니고, 극한의 질료도 아니다. 그 현존이 기억과 유전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분열 이전에 하나의 (덩어리로서) 단위이며, 이 단위를 이어가는 노력이 삶의 과정이다. 과정의 드라마, 인류에게 가장 흥미로운 사건이 아니겠는가? 태어난다는 것이 온사건(Evénement)이며, 살아가면서 관계맺음에서 여러 사건들(les événements)을 만들면서 드라마를 연출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억의 총체는 온사건이며, 추억들은 사건들(벩송의 표현의 의식의 사실들 faits)이다. 이런 사실들의 과정을 숙고하여 미래에 예참하는 지혜를 찾는 것이 현존재들의 노력일 것이다. (55NMI)
여기서 한 가지 보태야 할 나름대로의 상상이 있다. 선생님은 플라톤에서 벩송으로 연결하는 고리를 어디서 찾았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운동과 정지를 동시에 놓고 나가는 플라톤을 깊이 파고 들면 정지의 철학사와 운동의 철학사를 찾을 수 있다. 그런 두 갈래의 길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벩송을 각각 놓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이어가는 길이 바로 상층철학사가 이어온 것인데 비해, 표면 밑으로 흐르는 심층 철학사를 2천5백년을 뛰어 넘어 벩송에서 찾았다는 것이 여전히 나의 관심사이다. 물론 선생님의 강의에서 페라스와 아페이론은 두 원(또는 두 사각형)으로 그리고, 그 접점(접선)에 대한 “제3자”에 대한 설명을 여러 번 했는 데서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저자가 설명하듯이 플라톤의 “존재론”에 대한 해설로서 벩송가 창조적 진화(EC)4장에서 설명한 간추린 철학사와 맞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자연”에 답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남긴 벩송에 관한 논문은 한편이 뿐이지만, 그 논문은 매우 중요하다. “자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였다. 이런 제시를 철학사의 연구자들에게서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리고 이런 “자연”에 대해 더 깊이 설명한 것이, 나로서는, 벩송의 저작 속에 특히 EC 3장에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을 젊은 시절에 주제로 삼아 석사논문을 쓰면서 테이프를 전사하기도 했고, 이 내용 깊이을 아무것도 모르는 가운데 줄이고 줄여서 축약하여 논문을 제출했는데 통과하지 못할 뻔 했었다. 박홍규의 형이상학의 세계(2015)에 제출하기 전에, 이 3장의 주제부분을 한철연에 제출했는데 두 번이나 퇴짜를 받았다. 그 논문을 쓸 때 전집 5를 검토했는데, 이상하게도 나의 논문 부분의 내용은 빠져 있었다. 편집진에게 물어보니 테이프와 나의 전사 노트를 받은 기억이 있는데, 그 내용이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는 답변만을 들었다.
각설하고 3장의 자연의 제일성 또는 통일성이라 불리는 부분, 즉 그 “자연”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나도 전집을 여러 번 읽고 나서야 벩송의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이며, 이를 통해서 도덕과 종교의 두원천(MR, 1932)에서 정태적과 동태적이라는 개념, 역사를 조망하는 4장의 제목이 기계론과 신비론으로 되어 있는 것도 이해하게 되었다. 기계론-지성, 신비론-직관 이지만, 다른 한편 신체와 영혼의 두 열망이 세계사를 이끌어 온 것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들뢰즈가 말하는 노모스와 노마드의 이중적 양태가 세계사를 이끌어 왔다고 해도 될 것이다.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서 자연에는 두 가지 질서가 있다. 하나는 하강하는 질서이고 다른 하나는 상승하는 질서이다. - 최근에 출판된 꼴레쥬 드 프랑스에서 벩송의 강의록을 읽고서야 알았지만 이런 개념작업은 플로티노스에서 왔다. - 이 두 질서를 벩송은 당시의 열역학과 전자기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강의록에서 그는 이런 문제거리에 대해 고대와 근세에서 실증적으로 풀 수 없는 시대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자연은 두 질서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 하강하는 쪽을 물질로 상승하는 쪽을 생명으로 놓았는데, 인간의 현존으로 보아 신체와 영혼이라 해도 좋다. 그런 질서가 겹치는 “현존”에서 현존재들이 등장하는 것이다. 어느 물(질)체나 생(명)체나 이런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벩송은 이런 두 질서에서 한 질서를 주장하고 다른 질서를 무화하는 것이 착각이라 한다. - 내가 생각하기에는 니힐리즘을 이런 측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 이런 관점은 존재와 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현존만 있고, 그리고 현존에는 두 질서가 있다. 여기 쯤에서 플라톤과 벩송의 차이점을 아마도 선생님은 보았을 것이라 여긴다(사라진 테이프에서는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석사논문을 다시 일어보았으나, 너무나 변질된 글이라 나의 우둔한 머리로는 찾을 수 없었다). 선생님은 여러 곳에서 데미우르고스(현존자)의 작업을 우주론이 아니라 우주발생론이라고 한다. 페라스의 이데아들을 아페이론에 심으려는 과정은 정태적 관점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은 생성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주 발생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벩송의 경우로 넘어가면, 두 운동의 만나는 점은 공시태적 설명에서 여러 점일 수 있고, 그 점들은 현존태들을 설명하면 우주론이 될 수 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이런 현존태가 생기기까지의 과정을 벩송은 데미우르고스의 조작적 형성과 달리, - 종교의 창조설도 아니고 우화의 이야기도 아닌 - 실증적으로 설명하면서 자연의 “자기에 의한 자기의 창조”의 생성을 보여주기 때문에(실증할 수 잇는 이유는 생명체의 유전이다) 우주 발생론으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두 우주발생론은 전혀 다른 양태이지만 선생님은 발생론으로 설명하였고 그렇게 해서 플라톤에서 벩송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뒤나미스와 자발성을 연결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자연은 아르케이며 이유이며 근원이라고 하기도 하였는데, 이 아르케를 원질이라기보다 이유와 기원으로 설명한 것도, 아마도, 두 사상가의 연결 고리로 여겼을 것으로 보인다. 이유와 기원으로 읽으면, 여러 번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레종(raison)은 인식의 능력으로 이성이 아니라 이유 또는 이치로 읽어야 한다 것에도 닿아있다. 순수이성비판이 아니라 순수 이유에 대한 탐색과 논의에서, 지성의 비판이 아니라 직관의 교감과 공감으로 다루어야 하는 할 것이다.
이유에 대한 탐색으로 세 가지는 자아, 세계, 이상인데, 이러한 세 가지는 벩송 세 가지 원인에 대한 설명에서도 일치하며, 또한 언어에 대해서 세가기 실사(명사, 형용사, 동사)에서도 일치한다. 이 세 가지가 운동하고 변화하고 변형하는 토대가 흐름 즉 지속이라는 것이다. 이로서 선분의 비유의 네 가지 분열을 설명할 수 있는 위상을 만들 수 있다. 네가지 분열을 동서양을 막론하고 있다. 불교의 염처경에서도, 주역의 4상에서도 있다는 것이다. 이런 점을 보면 인류는 다양체의 분열에 대해 고민해왔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정태적 차이와 동태적 차이를 들뢰즈는 19세기 초의 프랑스 생물학의 등장에서 빌려온 용어, 차이(différentiation)와 차히(différenciation)를 t/c를 등장시켰다. 동서양에서 초기의 비슷한 시기에 서로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런 차이와 차히의 물음, 동일성과 정체성물음이 제기되었다. 선생님은 플라톤의 철학과 철학사에서 실마리를 찾았다는 점이며, 들뢰즈는 단위의 다양체임을 철학사에서 보았다는 것이 더욱 흥미롭지 않는가? (54NNA, 6:17, O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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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2016): 베르그송 부분 272-447
4부 베르그송의 존재론 273
8장 서구 존재론사로부터의 탈주- [고대철학에서 스콜라철학까지 전복(顚覆)사],
“사물들의 생성[le cours des choses]을 앞에 놓고서,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유와 언어가 취하는 태도를 오류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사물들의 생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이 말에는 베르그송이 전통 존재론에 던지는 시각이 압축되어 있다. 베르그송의 이 생각을 다음 두 가지 명제로 구체화 할 수 있다. (276)
1. 존재[l’existence]만이 존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인의 주관을 투영해(‘부정’[absence]의 논리에 입각하여) 무를 만들어 낸다. 나아가 사람들은, 대개 행동의 필요에 의해,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무를 실재에 투영해 세계를 본다.
2. 존재[현존]=실재는 차이생성– 운동하는 연속성 또는 연속적 운동 – 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여기에 무를 개입시켜 불연속적 존재들을 만들어내며, 그 불연속적 존재들을 이어붙임으로써 본래의 차이생성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276)
“[형상]형이상학이 해결할 수 없는 아주 가장 아픈 곳을 찌른 것이지. (…) 에이도스는 전부 분류해주지만, 최종적으로는 분류해서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가는 데 연결시켜주는 것이 운동이야. 다시 현실의 세계로 돌아가려면 운동이 연결시켜주는데, 운동이란 것은 어떤 것이냐면 개념화할 수 없고, 딱딱 끊어서 생각할 수 없고, 우리가 실제 거기서 살고 참여(engagement)[participation]하고 뭐하고 하는 속에서만주어지더라는 거거든. (…) 단순히 분리해서(separate) 에이도스 분석만 하는 것은 형이상학의 절반이지, 종점은 아니야. 다시 현실로 돌아와서 연결시켜줘야지. (V, ‘창조적 진화’강독 18(1982), 424) (278)
사람들은 “어째서 무가 아니라 무엇인가 존재[현존]하는가?”라고 묻는다. 무는 설명할 필요 없이 전제되는 것이지만, 존재[현존]은 그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듯이. (279)
§1 고전적 존재론의 극복274
베르그송의 이상의 논의에 대해 소은은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만일 무(無)가 인간의 주관이 객관세계에 투영하는 무엇이라면, 이번에는 무의 실재성이 아니라 그 주관성을 설명해주어야 한다. ‘무’와 ‘부정’은 인간의 주체성에서 어떻게 발생하는 것일까? 소은은 ‘자발성’과 ‘분열’을 언급하면서(V, ‘창조적 진화’강독 18(1982), 440) 문제만을 제기하고 있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본다. (282)
이 무는 시간의 종합을 통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주체에게 그 무에 대한 욕망을 가져온다. 또는 인간의 본성인 욕망은 이 무를 지향하게 된다.베르그송은 무를 논했지만, 이를 시간의 종합에 연결하지 못했다. 들뢰즈는 시간의 종합을 논했지만 이를 무에 연결하지 못했다. 우리는 무와 시간의 종합을 연결함으로써 베르그송과 들뢰즈 사이의 빈 곳을 메울 수 있고, 결과적으로 소은의 물에 답할 수 있다. (283) [이런 견해는 원자론적이고 관념연합적 관점이며, 또한 죽음을 요소로서 생각하는 프로이트와 연관 속에서 사고하는 것이리라. 벩송에게 무 또는 죽음이란 항을 설정하지 않으며, 종합이라기보다 총체는 어제-이제-아제의 연관이 지속하고 있다고하여 존속이라 하지 영원을 말하지 않는다. 영원을 말하면 종교 또는 추상화의 논리에 빠진다.]
또 하나 소은은 플라톤의 경우 이데아들이 필레보스에 대한 논의에서 언급했듯이 “mia idea”[하나의 이데아(동일성)]로서 독립-자존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나, 베르그송의 경우 하나의 실존[현존]에는 전 “우주가 관여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베르그송에게서 ‘명제’가 어떻게 성립하는가를 묻고 있다. (283)
하지만 베르그송에서 동일성은 오로지 차이생성을 따라가면서 성립하며 ‘동일성과 차이의 차이’의 논리에 따라 자기 차이화 한다. 자기차이성(difference avec soi)은 생명의 기본 논리로 파악된다. 전자[스콜라, 헤겔]의 경우 동일성의 테두리 내에서 차이생성이 이루어지지만, 후자의 경우 차이생성이 이루어질 때 동일성[정체성]은 그 뒤를 따라가면서 차이들을 수습한다. 그리고 그런 수습이 실패할 경우 생명은 끊어진다. 이는 곧 충족이유와 우발성[accident]의 문제와 연관된다. (291) [저자의 용어: 자기차이성]
“정적으로 보면 우연이라는 것은 하나의 예외자이죠. 99퍼센트가 그런데 하나가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반대의 이론이 나옵니다. 나머지 1퍼센트가 문제가 아니라, 99퍼센트가 모두 변치(變値)[변수, 변항]뿐인데, different[차이] 뿐인데, 다른 것은 그 이면에 비슷한 것이 있어서, 그 비슷한 것을 주워 모은 것이라는 이론이 나옵니다.(II, 고별강연(1984), 40) (291)
- 베르그송에게 생명이란 편안하게 주어진 불멸의 영혼을 가지고서 살 수가 없는, 살기 위해 끝없이 투쟁[노력]해야 하는 존재이다. 이 투쟁을 위한 두 가지 조건으로 소은 ‘조절기능’과 ‘기억’을 든다. (292)
중요 국면들에서 그 다음 단계는 가능할 수도 있었고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가능하기 때문에 현실화된 것이 아니라 가능성 그 자체가 시간 속에서 태어난다. 바로 진화과정이 이를 잘 보여주지 않는가. 베르그송은 말한다. “시간이란 망설임 자체이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 시간이란 모든 것이 단번에 주어질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294)
§2 근대적 결정론의 극복299
[벩송은 강의록 자유문제의 진화(1904-1905)에서 고대인들이 고대의 아낭케(필연) 또는 개체의 소멸에 대해 극복하는 방편으로 선 이데아와 사유의 사유를 제시했다고 하더라도 현존에서 문제의 해결을 하지 못했다고 본다. 상층의 완전함이 현존에서도 내재하는 방식으로 풀어가는 경향이, 자유의 실현에서는 둘 사이의 대등론(상응론)으로 정리될 수 있다. 이 상응론은 인격의 자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르네상스 이후 인격 또는 자아가 등장했는데도 ‘필연성’의 개념을 을 벗어나지 못하여 결정론에 머물면서 자유의 실현은 이원론의 한쪽에서 의지적 노력의 부분으로 해명하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벩송은 자연 또는 생명의 자발성과 뒤나미스는 하나의 덩어리(다양체)이며, 스스로에 의한 자기 창조성이 있다고 하면서 자유의 실현은 생성, 진화, 창조에 있다고 한다. (55NMJ)]
§3 플라톤에서 베르그송으로312
[선생님은 벩송의 플로티노스 강의록을 참조하지 못한 시대에 살았다. 그럼에도 플라톤에서 베르그송으로 연결점이 소크라테스의 물음 ‘뭣’이 “영혼”과 연관 있음을 강의록 곳곳에서 제시하였다. 벩송의 강의록이 나오기 전까지는 출판된 작품에서 플로티노스의 언급이 있다고 하더라도 플로티노스의 영향이 어디까지 인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1999년 출판된 「플로티노스」강의록, “고대철학”에서 영혼론 강의록, 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을 읽으면, 벩송이 얼마나 플로티노스를 깊이 이해했고, 그의 관점이 플로티노스에게서 온 것인지를 이해하게 된다. 게다가 이런 관점에서 지속에서 다룬 의식 상태와 기억의 해명이 “영혼”의 문제 해결을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고대 형이상학이 영혼과 신체의 상응성(동등성)의 인정으로 읽힐 수 있고, 이런 상응성은 르네상스 이래로 이원론, 평행론, 예정 조화론, 그리고 계몽기 생리의학의 발달에서 부대현상론에까지 근저에 마치 가설체계처럼 자리잡고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심리(영혼)의 실재성에 대한 전도된 사고가 서양철학사를 착각에 빠지게 했다는 것이다. 바로 세워서 영혼의 실재성을 밝히고, 원자론적 입장에 속하는 영혼의 기능적인 설명보다 자연(질료)의 입자에서 영혼의 능력(권능, 뒤나미스)를 밝히고자 하였다. 이로서 뒤나미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잠재성이 아니라, 능동성이며 자발성이며, 자시창조성이 된다. 영혼의 자기 창조성은 EC에서 자연의 창조성으로서 인간의 본성(nature humaine)의 용어처럼 인격은 자연에서 온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네오스콜라주의를 또한 주지주의를 – 그는 당시 주지주의란 용어를 쓰지를 않았고 윌리엄 제임스가 쓴 용어 - 비판하는 주장이기도 한다. 암묵적으로 카톨릭은 벩송을 배제하려고 했다. 그는 파리대학에 교수지원을 두 번이나 했지만, 흄이 인성론을 쓰고 대학에서 퇴짜를 맞듯이, 낙방했다. 이 뿐만이 아니라 스피노자가 카톨릭으로 개종한 제자의 편지에서 악마취급을 받듯이, 벩송에게도 그의 강의를 들었던 자가 카톨릭으로 개종하고 신랄한 비판서를 쓰고 미국에서 교수를 거쳐서 전후에는 로마교황청 프랑스 대사로 간다는 것이다. (55NMJ)]
9장 생명의 약동333
§1. ‘생명’개념의 접근 334
인식 이론을 동반하지 않는 생명 이론은 오성[지능]이 그것의 성격에 입각해 만들어내는 개념들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생명이론은 인식 이론이 결정적이라고 생각하는 선재[선전제]하는 틀들로 사실들을 가둘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생명이론은 실증과학에서는 필수적이라고 해야 할 간명한 기호체계를 얻을 수 있겠지만, 결국 생명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비전은 얻디 못한다. 반대로 지능[지성]을 생명의 일반적인 진화에 입각해 바꾸어나가지 못하는 인식론은 인식의 틀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도 또 우리가 그것들을 어떻게 확장하고 어떻게 극복해 나아갈 수 있을지도 가르쳐주지 못한다. 인식이론과 생명이론은 서로 단단히 결합되어야 하며, 상대방을 밀어 올려주는 상생의 관계를 맺어야 한다. (EC ix) [“형이상학 입문”(1903) 이래로 벩송은 강도 높게, 실증과학과 형이상학이 나란히 가야 한다고 한다. 형이상학이 앞서면 선전재 미해결의 오류를 범하고, 과학이 앞서면 선천적으로 지성 또는 인식이 물질(또한 영혼)보다 먼저 성립했다는 악순환에 빠진다. 지성은 생명활동의 발달(진화)에 따라 지성이 발달하며, 물질계도 지구상에서 생태계의 변화처럼 변화의 과정을 겪고 있다. 이 상호 영향 관계는 자연상태의 변화만큼이나 생명체에도 인식체계(물질계든 영혼계든)에도 변화를 겪고 있다는 것이 21세기의 논의 과제일 것이다.]
§2. 기계론과 목적론339
생명에 대한 베르그송의 규정은 다음과 같다: 생명이란 그것이 생겨난 이래 발산하는 진화-선들 사이에 퍼져 있는 유일하고 동일한 약동의 연속이다.(la vie, depuis se origines, est la continuation d’un seul et même elan qui s’est partagé entre des lignes d’évolution divergence; EC 53) (341)
그리고 진화에 대해 베르그송이 그리고 있는 전체적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일련의 부가들 – 이는 그만큼의 창조들이기도 하다 – 에 의해 무엇인가 커져왔고, 무엇인가가 전개되어 왔다(Quelque chose a grandi, Quelque chose s’est développé par une série d’additions qui ont été autant de créations, 앞 문장에 이어서 EC 53). (341)
§3. 진화론의 진화: 눈의 예347
베르그송은 논의의 구도를 다음과 같이 잡는다. 우선 눈의 진화를 1) 우발적이고 내적인 변이들의 누적을 통해 설명하는 입장, 2) 외적인 영향 – 본질적으로는 빛의 영향 – 에 입각해 설명하는 입장, 3) 획득형질의 유전을 통해 설명하는 입장을 대별해 다룬다. 이 세 입장의 한계를 각각 다룬 후, 그 세 입장의 한계를 넘어서면서 동시에 세 입장을 포용할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한다. (348-349)
결론적으로 베르그송에서 진화에서 방향성과 유사성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핵심적인 요인[동인]은 순수 우발적 변이도, 순수외적인 영향도, 의식적인 노력도 아니다. 그것은 생명체에 내재해 있는 전개체적-무의식적 경향성이다. 베르그송은 이것을 생명의 약동(l‘elan vital)이라고 표현한다. (362)
§4. 생명의 약동362
“긴 우회로를 거쳐서 우리는 이렇게 우리가 출발했던 생각으로, 즉 배(胚)들 사이에서 연결선의 역할을 하는 성체들을 매개로 해서 한 세대의 배들에서 다음 세대의 배들로 옮겨가는 생명의 시원적 약동이라는 생각으로 되돌아 왔다. 이 도약은, 서로 나누어 가지고서 진화의 선들 위에서 보존하면서, 변이들의 심층적 원인이며, 적어도 규칙적으로 전이되고 서로 첨가되어 새로운 종을 창조하는 변이들의 심층적 원이다. 일반적으로 종들이 공통의 시조(그루터기, une souche commune)에서 분화하기 시작했을 때, 종들은 자신들의 진화를 진행함에 따라서 자신들의 분화를 강화한다(accentuer). 그럼에도 공통의 약동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이는 경우에, 변이들은 정해진 지점들 위에서는 동일하게 진화할 수 있고 심지어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가 선택했던 바로 그 예를, 연체동물과 척추동물에서 눈의 형성의 예를 보다 정확한 방식으로 제기하는 것이다. 그래야함 ”시원적 약동“이라는 생각이 보다 명료해 질 수 있을 것이다. (EC 88-89) (363) [이 중요한 문장은 찬찬히 음미해야 할 것이다.]
소은은 베르그송의 생명철학을 ‘하나’의 사유로서 파악하며(‘원초적 약동’이 이것이다). 이를 플라톤의 ‘여럿’의 사유와 대비한다.
“생명현상의 ‘기능(fonction)’이란 것은 근본에서 언제든지 하나고, 그 하나 속에서, 하나에 의해서 나오고, 하나가 하나 속에서 형성되는데, 기계론이니 목적론이 하는 것은 전부 부분의 집합이니까, 무슨 애기냐면 그 내용이 각각 다른, 내포(implication)가 다른 부분이라는 것이지. 플라톤의 이데아론은 다원론이야. 문제는 거기에 있어, 일률적인 다(多)의 세계야. 요컨대 다원론이고, 하나라는 것은 데미우르고스에게만 있어. 데미우르고스는 하나이고 이데아는 언제든지 다원적인 세계란 걸 알아둬야 돼. 그러니까 그 다원론적 요소(element)를 아무리 모아도 어떻게 하나의 기능이 나오느냐, 이 문제야. 문제는 거기에 있어.(V, 「베르그송 강독3(1981)」, 30. 인용자 강조)” (368)
“근원적 비약/원초적 약동(elan originel)” 개념, 또는 “충동/충력(impulsion)”개념은 이런 비-표상적 비약을 함축하거니와, 이는 또한 생명의 근원이 외부에서 어떤 작인(agent, poioun)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부에 주어져 있음을 뜻하기도 한다. “동일한 근원으로부터(d’une même origine)”, ‘동일한 공통성(une communauté d’origine)’등은 바로 이 내부성을 함축하는 표현들이다. 베르그송에 있어서 생명은 이렇게 외부적 작인[조작, 작업]에 의해 다자의 조립이 아니라 내부적 약동에 의한 일자의 실현으로서 이해된다. (369-370)
“제작자[데미우르고스]가 방황하는 원인(planômenê aitia) 속으로 들어가려면 자기가 먼저 방황하는(planômenê) 것이 돼야 해. 자기가 타자화되어야 해. (…) 들어가지 않으면 항상 떨어져 있어. 기능의 대상과 기능은 항상 떨어져 있기 때문에 기능이 되지 않아. 일차 그 속으로 들어가야 되니까 기능이 자기 자신의 바깥으로 나간다는 것은 항상자기자신이 소외된다는 얘기야. 그러니까 거꾸로 소외되지 않는 측면이 항상 나와야 해. 그걸 뭐라고 말하느냐면 과거의 현재에서의 보존, 그게 기억이야. (…) 기억은 항상 끊어지면 성립하지 않아. 항상 우리의 본래적인 생명현상은 기억으로서만 있어. 속으로 들어가는 것. 요전 ‘monter(올라가다)’라 했어. 맨 처음에. ‘Descente(하강)’하고 ‘monter’야. 기억으로 가는 것은 ‘monter’, 밑으로 소외 소외되는 것은 ‘descente’. (V, 「베르그송 강독3 (1981)」, 35.) (370)
생명이란 “엔트로피의 비탈길을 거슬러 올라가려는 [전개체적-무의식적] 노력”이외의 것이 아니다. 이 경향/힘이 바로 ‘생명약동’이고, ‘근원적/시원적 약동’은 이 경향의 원초적 양상이다. (371)
§5. 본능, 지능. 직관372
[생명의 의식의 분열 또는 분화에서, 벩송은 생명체의 인식방식을 본능과 지성으로 구분하여 보았다. 절족류와 포유류 사이의 경계를 그었다. 인간은 지성의 극한에서 새로운 장래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직관이 나온다. 이 직관은 지성의 한계에서 도약하는 직관이라기보다, 지금까지 사용하지 않았던 본능의 인식을 지성보다 확장적으로 또는 시간적으로 무매개적으로 강도있게 하는 인식이 직관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직관은 한편으로 직관의 한계를 넘어 확장을, 다른 한편 소외된(은폐된) 본능의 너울을 벗겨 현실에 무매개적 접촉과 응용(적용)하는 능력이다. 즉 직관은 지성의 대척점에 있는 것이라기보다, 본능과 지성의 역할을 총괄적으로 새롭게 하는 것인데 내재성-현실성-전망성을 포괄하는 인식능력으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55NNA)]
10장 생명이란 무엇인가: 진화의 의의383
[벩송에서 생명의 활동성은 에너지의 축적과 폭발이다. 그리고 생명체로서는 터전에서 자기 보존으로서 자동조절과 자기 역량을 창조(발명)에 있다. 창조는 무에서 유로 단번에 이루어지는 창조가 아니라, 오랜 시간과 노력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데, 이런 결과가 생성되는 과정의 힘의 흐름이 뒤나미스이다. 고대의 잠재태로서 뒤나미스, 근세의 정역학의 대비로서 동역학의 뒤나미스와 달리 생명의 지속과 권능에 의한 자기 존속(정체성)을 이어가는 능동적 힘이자, 창조적 권능이다. 이런 권능에 의해 각 생명체는 자기 터전에 맞게 자율적인 생성을 이루어 간다. 이런 생명 활동성의 과정은 사실들로서 남아있다. 이 사실들의 선들은 단선(單線)으로 이어지는 기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방식과는 달리, 회오리처럼 나선형으로 확장되면서 같은 층위에서 보아 단속적(간헐적)이고 폭발적(솟아오름)으로 현상에 드러난다. 생명활동을 토대의 평면 위에서 보아 선들에서 벗어나 다른 길을 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내재적 지속은 연속적이며, 그 벗어난 길은 노력에 의해 표면의 저항을 뚫고 나온 분출선이다(jaillir, jaillissement). 이런 의미에서 삶에서 새로운 생성, 발명, 창안, 창조는 생명의 힘, 즉 생명의 약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55NMJ)]
§1. 베르그송 사유의 성격383
[사물(물질이든 영혼이든) 그 안에서 위치해서 직관으로 공감으로 사유하는 것이다. 이런 방식을 적용할 수 있는 터전은 세 곳이다. 개인의 인격성, 자연의 생명성, 공동체의 종교성에서 이다. 이 세 가지 방식을 들여다보면 칸트가 물리학을 기반으로 포기한 형(形)이상학에 대한 대척점에 있으며, 생물학과 심리학을 토대로 영(靈)이상학이 성립할 것이다. 이 셋 위상은 동일성(l’identité)의 철학에서 정체성(l’identité)의 철학으로 전환을 의미
§2. 생명과 물질의 투쟁393
“신경계통은 왕조라 했지? 국가와 같다고 했잖아, 통치한다고. 또 신경계통은 뭐라 그랬나면 중앙전신전화국이라고 했지? 중앙전신국, 다시 말하면 이 A 하나, 정신이 말하자면 거기에 해당하는 신체적 기구란 말이야. 그러니까 지금 바깥으로 나가도 항상 자기 반성적으로 나가지, 직선적으로 나가지 않아. 자기 반성하면서 나가. 그러니까 기억이 있으면 말이야, 직관된 것이 기억에서는 보존된대. (…) 지능 내부도 전부 기억입니다. 기억 속에서는 두 가지 이상의 것이 보존이 돼. 두 가지 이상이 보존이 되면 거기서 동시성이 나오고 거기서 공간이 생겨. 그래서 시론에서 동시성은 공간으로 간다고 해. 그런데 반성(réfléchir)에 의해서 시간이 반성되면 공간이 나온다는 얘기야. 시간이 반성이 돼. 시간은 현재 뿐이고 과거는 지나가버렸어. 과거의 내용을 반성해서 객관화(objectiver)하고 동시에 여기다[지성에] 놓고 나가면 거기서 동시성(simultanéité)이 나와, (…) 끌어들여와. 속으로 끌어 들여오는 것은 반성에 의해서야. (…) 지성이 반성하면 그 속에 있은 질은 다 빠져버리고 행위의 지속성이 반사(réflexe)되어 나와. 그러면 표상화된 지속, 공간화된 지속이 나와. 이걸 기억 속으로 놓고 나가면 순수 공간이 돼. 그러니까 베르그송에서 순수 공간은 기능에 내재해(inné).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기능에 내재해. 그런데 그것이 자각이 되지 않더라도 나갈 때는 그 느낌(sentiment)을 암묵적(implicite)으로 갖고 있다는 거야. 내재돼 있는데 그것이 실지로 언제 나타나느냐? 그것은 물질을 거쳐서 더 외부의 타자성을 자꾸 쪼개고 또 쪼개고 또 쪼개고, 극한치로 가려고 할 적에 나온다는 얘기지. 운동성(mobilité)을 극한치로 발견할 때. (V, 창조적 진화 강독 7(1982), 120-121) (404-405)
§3. 서구적 합리주의의 끝에서410
[벩송의 공간화된 사고는 지성이 물질의 체계에 과도하게 개입하여 유용성을 확보하는 쪽이었다. 이런 인식의 근거는 악순환이라 한다. 윌리엄 제임스는 벩송의 EC를 읽고 주지주의에 대한 비판서라고 했다. 벩송은 주지주의란 표현을 쓰기보다 스콜라주의(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네오-스콜라주의로 이행하는 19세기 후반의 철학계를 비판한 것이다. 이런 걱정은 마지막 문장(EC 369)에 있다. (55NMJ)]
§4. ‘생명’이란 무엇인가423
[벩송은 처음부터 생명이라기보다 삶의 문제에서 출발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삶에서 일차적으로 부딪히는 문제, 다시 말하면 영혼과 신체의 문제였을 것인데, 영혼의 자율서, 자발성, 자유를 구하기 위해서, 실재성의 근거로 “기억”을 제시하고, 마침 1901년에 새로운 유전법칙의 발견에 따라, 기억의 내용의 사실들의 선들을 따라가는 ‘생명’의 길들을 추적하면서, 생명의 도약을 착안해 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신체보다 깊은 물질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질도 흐름이며 실재성이다. 그런데 물체는 하강하는 경향이 있고 이에 적응하는 지성이 있으며, 의식-기억-생명의 흐름을 파악하는 직관이 있다는 이론을 제기한다(형이상학 입문, 1903). 이제 지성과 직관이라는 두 경향성에서 하강과 상승을 설명하면서 “생명”의 개념작업은 생성, 성장, 확장, 창조의 역량으로 자리잡게 된다. 벩송은 EC에서 “먼저 살아야 한다”라고 하고, “변화의 지각”(1911), PM, 152에서 “철학하기에 앞서서 살아야만 한다”라고 하다가, “입문 2”(1922)에서 프리뭄 비베레(Primum vivere, 사는 것이 먼저다)(PM, 54)라 한다.(55NMJ)]
“물질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여기서 물질성은 해체되는데 그 해체라는 것이 어디서부터 시작하느냐? (…) 그러면 순간적인 자발성이 끝나는 순간, 그 다음에 물질만 있느냐면 그런 것이 아니라, 무생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사고니 지성이니 이미지니 신체도 전부 다 거기서 연장성, 연속성을 지니고 성립하거든. 거기서 동일성을 갖는 것이 지속이야. 연속성에서 자기 동일성을 갖는 것이 지속이란 말이야. 그러며 지속의 이면은 무엇이냐면 해체되는 것이고 거기서는 물질성이 성립해야 할 것이 아니냐는 문제가 생겨. 그러면 물질성은 무생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생명 현상의 어느 이면들에서도 생기는 것이 아니냐고 인정해야지? (…) 그렇지 않으면 기능이 어떻게 연장이 되느냐는 문제가 생겨. 그리고 또 거꾸로는 물질에는 말이야. 해체(défait)만 되는 것이 아니라, 물질 자신에도 이루어지는(se fait)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해서 우리 유기체가 그것에 결합할 수 있느냐는 문제 생겨. (…) [물질의] 연속성은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봐야 돼. 하나는 그것의 자발성과 동일성[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측면이 있고 하나는 해체되는 측면이 있어. 왜냐? 무-한정적인 것은 왜 무-한정적이냐 하면 해체되는 측면도 받아들일 수 있고 반대로 이루어지는 [조성되는] 것을 받아들일 수도 있기 때문이야. 방황하는 원인도 그냥 방황한다는 의미는 아니야. 설득을 당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또는 설득당하지 않을 수도 있고, 그 양자를 왔다 갔다 해. 그러니까 그것은 설득을 받을 수도 있어. (…) 우연, 가능성이라는 게 항상 한 방향으로만 가면 가능성이라는 하지 않아. 반대되는(contrary) 것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 항상 들어 있어. 지금 만약 물질의 세계, 무생물의 세계는 맨 해체만 있고 이루어짐[조성]은 없냐? 그렇지 않으면 물질의 세계에도 이루어짐이 있느냐? 있다면 그것은 우리 생명현상의 힘과 연계가 돼야 할 텐데, 그것이 어떤 관계에 있느냐의 문제야. .. 물리적 과정은 엔트로피야. 엔트로피와 반대로 가는 것은 요전에 말한 이루어짐(se faisait)이고, 위로 올라가는 기능[능력]이라야 돼. 그럼 이것이 물질에도 있어야 할 것 아냐. (V, 창조적 진화 강독 13(1982), 291-293) [EC 246] (432-433)
§5. ‘진화’의 의미434
“공간에서는 운동이 없고, 운동은 사물을 연결시키는데, 공간에서는 운동이 없으니까 연결이 풀어지고 그 속에 들어있는 내용이 전부 풀어져 나오는 것이야. 공간에서 이루어져. 이것을 분석이라고 하지. 분석되어서 나와. 그러면 물질 속에 들어있는 내용은 질(quality), 성격(caracter)[특성]이야. 성격이 이렇게 딱딱 떨어져 나와. 그것이 지금 공간에서 떨어져 나오는데, 거기에 부딪힌다는 말이야. 언어는 공간화되어 있고 공간 속에서 부딪히기 때문에 감정이 분열되어서 나온다. 생명도 마찬가지다. 쉽게 말하면 기능을 받아들이는 타자가 공간적인 측면이 있어서 거기에 질이 있고 그 질 때문에 분열되어 나온다는 얘기야. (V, 창조적 진화 강독 15(1982), 357) (437) - [개체화(l‘individuation)의 문제(EC, 259)에서]
박: ... 그렇게 많이 개별화(s’individuer)하고 이렇게 분화됐다(dissocier)는 것은 극복을 해서 살아남을 가능성을 그만치 많이 만들어 놓았다, 장애물의 극복을 많이 해 놓았다는 소리야. 알아들었지? 오늘 이것이 제일 중요해. 생명의 개체화문제를 논할 때는 대단히 중요해. 지금 사회에서 기술의 분화 같은 것이 꼭 들어 맞지. 윤구병: 선생님, 생의 비약의 두 가지 경향이 ‘unité multiple(다수적 단일성)’하고 ‘multiplicité une(하나인 다수성)’인데, 이것을 하나의 기능으로서의 디나미스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서 개체화되려는 경향은 디나미스에서 불연속적인 측면이고, 또 결합하려는 경향은 연속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고. 박: 합해진 것, 하나, 단일성(unité)으로, 근원적 비약으로 가려는 것. 윤: 예, 하나로 일관되게 가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개별화하려는 것이고. 그렇게 되면 도대체 기능 중에 두 가지 서로 다른 기능이 있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물질 자체가 어떤 에이도스적인 측면이 있어서 각각 다른 영향을 줘서 생명을 개나 소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디나미스 자체에 개로 나뉘려는 요소도 있고, 소로 나뉘려는 요소도 있다는 얘기거든요.박: 그렇지, 그러니까 디나미스란 말이야. 요전에도 나왔어, 두 개로 볼 수 있어. 왜 나누어졌냐? 하나는 물질의 다양성 때문에 나누어진 것이요. 하나는 디나미스 속에 여러 가지로 나누어질 수 있는 능력[영혼(자연)의 권능]을 지니고 있었다. 왜냐하면 왜 이런 만 있고 나머지는 없었느냐? 만약 디나미스를 중심으로 보면 망각되었다고 할 것 아냐? ... 물질하고의 관계를 논해야 되니까. 그래, 그러니까 디나미승. 디나미스는 그 속에 여러 가지 기능이 나올 수 있는 잠재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디나미스라 그래. 두 가지로 봐야돼. 윤: 이 이야기를 하면 나중에 물질의 저항이 없어져 버리면 개와 소와 사람이 전부 하나가 된다는 이야기가 되어 버리거든요. (V, 창조적 진화 강독 15(1982), 366-367) (437) - [“다수적 단일성”과 “하나인 다수성”(EC, 258)은 매우 중요하다. 수학에서 다양체라기보다, 생명에서 다양체의 개념작업(la conception)이다.]
그러나 인류는 지능을 끝없이 발달시키는 과정에서 본능을 상실해버렸다.그리고 초-인은 커녕 생존자체가 위태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다.그렇다고 지능[지성]을 포기할 수는 없고 포기할 필요도 없다. ... 우리의 인격과 자유, 인간이라는 존재의 의미와 기원, 그리고 운명을 가꾸어나갈 수 있는 것은 인간이 생명전체와 화합하는 길이다. 이 길은 지능[지성]을 통해서 시작되고, 본능의 회복을 통해서 도약해, 직관을 통해 완성될 수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편협한 지능이 아니라 포용적인 지성인 것이다. 이런 포용적인 지성이야말로 철학적 지성,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유’일 것이다. (447, 본문 마지막 문단) - [지성에 대한 직관의 포괄적 인식능력(인식기능포함)을 설명하지 않아서 지성을 이성처럼 사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
[우리는 선생님의 벩송 전체에 관한 강의 자료를 갖고 있지 못하다. 벩송의 출판된 전 저작이 8권인데 연대 순으로 읽으면 일이관지의 사유의 흐름을 발견하게 된다. 크게 보아 심층자아(DI, MM), 표면자아(EC), 확장자아(MR)로서 세 단계로 자신의 견해를 발전 또는 확장하여갔다. 이는 영혼의 자기 발달의 관점과 유사하다. 그런데 그 세 단계가 신기하게도 서양 형이상학사와 과학사의 발달과 깊은 연관이 있다. 이는 벩송의 행운이며, 시대사적 사명을 담당할 만하였다. 심층자아로서 공간화된 서구 사상을 고대로부터 신칸트학파까지를 비판하였고, 표면자아로서 종교의 무에서 유의 창조를 뒤엎는 진화의 사상을 생물학적 진화과정을 탐색하였고, 그리고 인류의 도덕과 공동체의 제도와 문화(종교)의 발달이 표면적 실증으로서가 아니라 과거에 내재하는 의식의 흐름을 따라 인류가 어떤 열망을 지니고 살아왔는지 그리고 어떤 공동체를 만들려고 노력하면서 살아가는지를 밝힌다.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벩송의 주요작품을 세 번 이상 강의해 보았다고 한다. 그는 가장 중요한 작품을 DI라고 하고, 이를 통해서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나도 동의하는데, DI는 철학사가 왜 공간화의 길을 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들뢰즈가 MM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을 때, 처음에는 이해가 안 되었지만, 서양 또는 프랑스에서 삼위일체의 위격과 영혼에 대한 전도된 방식의 이해를 전복시켜 놓았기 때문이다. 이 강조는 우리가 나중에 읽을 수 밖에 없었던 꼴레주 드 프랑스 강의록 시간관념의 역사(1902-1903)와 기억이론의 역사(1903-1904)를 읽게 되면, 철학사가 영혼과 신체에 관한 해명의 역사처럼 읽을 수 있다. 게다가 고대의 상식, 근세의 양식은 영혼(또는 정신)의 완전성을 선전제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19세기 후반에 와서야 지성의 선전제가 착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으며, 그 착각이 공간적 사유의 지배를 가져온 것이다. 벩송은 선전제없는 사유를 온의식 즉 기억(온무의식)으로부터 풀어간다. 그러면 온의식이 개별화된 인간의 의식을 형성 또는 생성은 어떤 것인지를 탐색하면서, 표상(재현)의 인식으로서 공간화와 달리, 재인식과 지각작용으로서 지속에서 사유를 길어 올린다. 벩송은 서양철학사가 19세기 말까지 전도된 사고로서 이‘뭣’꼬의 근원 또는 이유를 탐구했다고 보고, - ‘뭣’이 영혼의 자기생성에 관한 것일 텐데, - 그는 새로운 방법으로 「형이상학 입문」에서 안에서부터 사유를 제시한다. 이 안에서부터 사유가 기억을 설명했던 방식이며, 생명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넘어간다. 생명에서 “안에서”는 진화적이며, 지층적이고 고고학적인 과거의 사실들을 선으로 연결하기보다, 연속성을 지닌 흐름(시간)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한다. 지성을 통해서 “밖에서”[외연적] 사고의 지성과 “안에서”[내재적] 사유의 직관은 어쩌면 자석의 양극과 같다. 그럼에도 자석은 하나이다. 이런 분열에서 하나로 수렴을 할 수 있는 능력이 “고등양식”이다. 인류는 고등양식을 통해서 자신의 양면성, 이중열망을 수렴할 수 있으며, 수렴의 방식이 다음측정과 같은 방식이라 한다. 유용성과 편리에 익숙해진 지성적 사고 또는 추론적 논리에서는 명령과 위협이 내포되어 있으며, 이를 사회적 연관에서 보면 전쟁의 철학이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전쟁과 정복을 통해 (경제적) 식민지를 형성하는 자본 제국이 작업(조작, poioun)하고 있다. 이에 저항하는 의식은 습관화된 의식에 저항하면서, 새로운 분출을 가로막는 제국의 권력에 저항해야 한다. 인류는 의식적으로 발산하면서 이중화를 감내하면서도, 교감과 공감을 통하여 수렴하는 과정을 행진하면서(걸으면서), 새로운 생성, 발명, 창안, 창조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본다. (55NMI)]
*결론: 소은과 우리 449
소은에게 존재론이란 과학사적으로 실증되어야 할 메타과학이라고 할 수 있다. 존재론의 데이터는 곧 과학적 탐구 결과들 전체이다. .. 각각의 시대에는 각각의 존재론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존재론사를 형성한다. (449)
존재론은 삶에 대한, 좁혀 말해 인간의 경험 전반에 대한가장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개념화로 이해되어야 하지 않을까? (449) [벩송: 프리뭄 비베레.]
우리는 존재론에 대해 보다 넓은 개념을 가져야 하며, 그런 근거 위에서 ‘서구 존재론사’가 아닌 세계 존재론사(더 넓게는 세계 철학사)를 탐구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세계 존재론사의 탐구는 바로 소운의 사유를 자양분으로 할 때에만 일정한 사유 수준을 넘어서 이루어질 수 있음 또한 분명하다. (450) [인류가 지구상에서 점진적으로 나아가 과정이 사유의 역사이다. 지금도 인간 종이 다른 종보다 우월하다는 인식하에서 탐진치에 빠져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생태계는 변하고 있다.]
소은의 사유를 이어 우리 자신의 존재론적 사유를 펼치는 것이 핵심이며, 이 사유는 베르그송-소은의 사유를 계승ㆍ극복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때 생각해볼 수 있는 21세기 존재론의 세 가지 핵심 논제가 존재하다고 본다. (450)
그 첫째는 철학에 수학을 상감해 넣는 것이다.(450) .. 21세기 존재론은 철학에 수학을 상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때 새로운 경지 - 수학적 생성 존재론–를 개척할 수 있을 것이다. (450)
[수학의 역할과 기능면에서] 하나, 해석학[분석학, 미적분을 넘어서]의 전통은 생성 존재론과 그 맥을 같이 한다. 해석학[분석학, analytique, hermeneutique가 아닐 것이다]은 생성 존재론의 개념들을 더욱 정밀하게 정련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며, 생성존재론은 해석학[분석학]의 통찰들을 보다 넓은 지평으로 가져가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451)
수학과 연관성에 있어 또 하나의 핵심은 곧 다양체론이다. 리만이 개발한 다양체(manifold)의 수학은 베르그송의 ‘질적 다양체’ 개념과 들뢰즈의 ‘잠재적 다양체’ 개념으로 이어졌다. (451) [벩손의 “다양체”는 수학에서가 아니라, 영혼(psyche)에 나왔다고 보아야 할 것이고, 기억이론의 역사(1903-1904강의록)(2018) 참조. 가타리/들뢰즈에서 스키조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앙띠 외디푸스(1972)처럼. ]]
철학에 해석학[분석학], 다양체론을 상감해서 새로운 사유를 창조해 나가는 것은 베르그송-소은 사유의 한계를 극복해 나아갈 중요한 한 갈래이다.
[둘째로] 서구 존재론사에 대한 소은의 독해는 우리에게 특히 ‘생명’을 사유하는 법을 가르쳐주었다고 생각한다. .. 소은이 ‘플라톤에서 베르그송으로’이어지는 사유의 길 위에서 독해해낸 생명존재론과 윤리학을 이어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 갈래의 사유를 결합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영미 계통의 과학 서적들이 보여주는 속류 유물론적 생명관에 대항할 수 있는 베르그송이래의 생명철학이고, 또 하나는 지난 반세기 동안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생명과학의 흡수이며, 마지막 하나는 동북아 전통 철학인 기학(氣學)이다. (452)
이런 연구들은 어떤 윤리적 함의를 띨 수 있을까? 생명/삶이 내포하는 핵심적인 윤리적 문제는 죽음과 고통이다. ..결국 죽음과 고통은 소수자들에게 집중된다. .. 소수자의 윤리학과 정치학은 우리가 소은에게서 배운 생명철학의 귀결점이 되어야 한다. (453)
21세기 존재론의 셋째문제는 사건의 철학이다. 사건의 철학은 생성존재론의 여러 형태들을 잇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단계를 열어갈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사건의 철학은 플라톤적인 본질주의와 베르그송적인 지속철학을 화해시키는 한 방법일 수 있다. (453)
그러나 베르그송은 19세기적 결종론의 비판에 주안점을 두고서 그의 사유를 전개했으며, 생성존재론을 ‘사건의 철학’으로서 전개하지는 못했다. 화이트헤드, 하이데거, 들뢰즈, 데이비드는 등 여러 철학자들이 생성 존재론을 사건의 철학으로서 전환해서 발전시켰다. (453)
수학과 연계성에서 볼 때도 해석학[분석학]에서 특이성 이론은 곧 수학적 형태의 사건 존재론이라 할 수 있으며, ‘다양체’ 개념 역시 들뢰즈/가타리의 사유에 비추었을 때 하나의 사건으로 의미를 띤다. (453-454)
사건의 철학은 자연주의에 함몰되기보다는 자연과 문화의 접면에서 사유한다는 점을 뜻한다. 베르그송의 철학은 지속과 생명의 철학이며, 전체적으로 볼 때 다분히 자연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다. 반면 사건의 철학은 우주론적 사건, 진화론적 사건 등 자연적 사건들과 역사적 사건, 사상적 사건, 예술적 사건 등 문화적 사건들을 모두 포용할 수 있다. 특히 자연과 문화의 접면에서 의미와 맞물리면서, 그리고 행위와 맞물리면서 논의를 전개할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은 사건의 철학의 두드러진 장점이다. 나는 이를 역학(易學)의 맥락에서도 강조한 바 있다. (454)
(16:20, 55NMJ) (18:19, 55OKE)
# 참조 **
소은 박홍규와 서구 존재론사(2016)(이정우, 길, 2016, 464쪽)
목차
* 서론: 박홍규의 ‘존재론’ 개념 5.
§1 존재론의 길 8
§2 헬라스 사유의 기반 17
1부 존재론의 탄생
1장 헬레스 존재론의 뿌리와 구도 33
§1 철학의 ‘탄생’ 문제 34
§2 전(前) 존재론적 뿌리들 39
§3 동일성의 의미 54
§4 충족이유율 63
§5 허무주의의 극복 69
2부 플라톤의 존재론
2장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77
§1 ‘소피스트’란 누구인가? 77
§2 덕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88
§3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대결
3장 ‘자기운동자’에서 ‘자기차생자’로 119
§1 자기운동자 = 영혼의 불멸성 122
§2 기억으로서 생명 130
4장 이성적 존재로서의 자연 [기원(이유)로서 존재인 자연]
§1 세가지 근원 138 [자연을 이성적으로 표기하기보다 일리있는 현존이다]
§2 아낭케는 무엇이 아닌가. 145
§3 아낭케란 무엇인가 1: 공간성. 152
§4 아낭케란 무엇인가 2: 방황성. 158
5장 아페이론의 문제169
§1 물질성으로서 아페이론: 티마이오스 170 [자료가 아닌 재료로서]
§2 유동성으로서 아페이론: 파르메니데스 177
§3 연속성으로서 아페이론: 필레보스 189
§4 플라톤 철학에서 아페이론의 의미 200
6장 존재, 인식, 실천 207
§1 인식과 존재 207
§2 존재와 가치 218
3부 서구 존재론사의 전개: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헤겔까지[신칸트학파]
7장 플라톤 이후의 서구 존재론사 235
§1 아리스텔레스의 ‘우시아’ 개념 235
§2 존재론의 몰락: 윤리와 종교시대 248
§3 중세존재론에서 근세 존재론으로 256
§4 근대 존재론 비판 265
4부 베르그송의 존재론 273
8장 서구 존재론사로부터의 탈주 [스콜라철학의 전복사],
§1 고전적 존재론의 극복 274
§2 근대적 결정론의 극복 299
§3 플라톤에서 베르그송으로 312
9장 생명의 약동 333
§1. ‘생명’개념의 접근 334
§2. 기계론과 목적론 339
§3. 진화론의 진화: 눈의 예 347
§4. 생명의 약동 362
§5. 본능, 지능. 직관 372
10장 생명이란 무엇인가: 진화의 의의 383
§1. 베르그송 사유의 성격 383
§2. 생명과 물질의 투쟁 393
§3. 서구적 합리주의의 끝에서 410
§4. ‘생명’이란 무엇인가 423
§5. ‘진화’의 의미 434
결론: 소은과 우리 449
소은 박홍규의 간략한 연보 455
개념 찾아보기 456
인명 찾아보기 461- P.4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