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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그송 강의록 4: 그리스철학에 관한 강의
베르그송, PUF, 2000, P. 278.
- 제1장 플로티노스에 관한 강의17-78
제1장 플로티노스에 관한 강의 17-78
제1절 플로티노스의 생애 17-24
제2절 플로티노스의 작품과 참고문헌 25-28
제3절 플로티노스의 학설, 영혼이론이 거기서 차지하는 위치. 28-35
플로티노스는 기원후 3세기에 알렉산드아에 왔다. 이 시기에는 지적 절충주의, 종교에서 이교도적이고 정신에서 그리스적인 모호한 도덕주의의 시기로서, 고전 문화에 깊이 결부되어 있고, 동방의 수입들에 대해 깊숙한 곳에서 경멸로 가득찬 시기이다. 그는 그리스 철학 전체로 조합된 힘들을 이방인들의 [사상]침공에 반대하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이끌려졌다. 그가 이 사상들이 솟아났던 근원 자체를 솟아나게 했던 것은 [그리스 철학전반에서] 이 생각들(ces idées, 사상) 그 위에서 병치에 의해서 진행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깊이 있게 파고드는(creuser) 것이다.
크리스트교와 철학의 투쟁에서 이 철학을 따라가는 것, 특히 이 철학과 많은 공통점이 있는 종교가 왜 곧바로 화해할 수 없는 적대관계가 되는지를 자문하는 것, 그리고 왜 굴복했던 것이 철학인지를 자문하는 것은 흥미있는 것일 것이다. 또한 이 종교가 철학에게 승리한 후에 어떻게 그 철학을 흡수하였고, 또 그것의 최상의 사상으로(성 바실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유지했는지를 찾아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사상이 이들을 거쳐서 근대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어떤 것이 되었는지를 탐구해야 할 것이다.
나는 플로티노스의 철학 자체를, 그의 중심 부분에서 영혼의 이론을, 다시 말하면, 개별 영혼의 이론과 보편 영혼의 이론을 동시에 연구하는 데 만족할 것이다. 이 강의는 이 철학의 중심인 만을 제시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에 전념했던 특별한 책이 없기 때문에, 이 이론을 제시하는 것, 그리고 플로티노스의 방법에 맞게 플로티노스의 학설의 임시적이고 도식적인 하나의 총괄적인 진술을 통해서 시작하는 것이 유용할 것이다. 플라톤의 변증법의 출발점은 모순의 광경(구경꺼리)이었으며, 폴리테이아편 7권에서 물질적 사물들은 이 광경의 극장이다. 물질에 의해 제시되었던 모순들 앞에 있는 그 철학자는 반성[성찰]하기에 이르렀고, 우리가 지각하는 사물들은 현상들일 뿐이라고 말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실재적인 것은 움직이지 않는 관념들[이데아들] 속에 마땅히 감춰져 있다고 말한다.
플로티노스는 특히 인간적인 사물들의 모순들에 대해 충격을 받았던 것 같다(엔네아데스(Les Ennéades), III). 우리가 중대한 것으로 간주하는 사물들, 심지어는 비극들, 전쟁들 등, 이런 모든 것은 어린애 놀이며, 희롱(le badinage)이다. 그것은 인간 내부의 것이 아니라, 저 아래 비탄들과 한숨들에 전해지는 인간의 그림자이다. 그 증거로는 자연적인 잘못의 규칙성 자체 속에, (스파르타와 크레타에서 성행했던) 전투장면을 재현한 무사들의 춤(pyrrhique)의 리듬으로된 규칙성 속에 있다. 우리는 배우들의 고함소리의 극장에서 더 이상 감동받지 않아야 한다. 우리는 구경꾼들이다.
배우들의 각각을 이해해야 하고, 세계의 모든 접속들로서 이루어진 그 세계의 계열들(les lignes)을 따라야 한다. 플라톤의 변증법이 시작되는 분석은 실재적인 것을 성질들로 해결하는데 있다. 그 성질들의 혼합은 정확하게 모순들을 생겨나게 한다. 플로티노스에 따르면, 엔네아데스 제6권에서, 이 분석이 끝에 이르는 것이 살아있는 존재들이다. 돌은 땅위에 제자리에 있어야 하고, 우리는 땅이 다른 요소들과 마찬가지로 생기있는 존재(un être animé)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살아(생명)있는 존재(un être vivant)는 무엇인가? 소우주는 세계처럼 질서 지워져 있다. 소우주는 분할되어 있으나, 각각의 부분은 전체(le tout)이다. 그것은 양상들(des phases, 생명 성장의 모습들)을 거처 가며, 그 양상의 각각은 자연 속에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그것은 원리를 필요로 하고, 그 원리는 다양성(cette multiplicité)를 재통합한다. 그것은 로고스 엔 스페르마티(λόγος ἐν σπέρματι), 즉 생성적 이성(la raison génératrice, 생성근거)이다.
로고스(la logos)는 이데아(une ideé) 보다 모자란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업(노동)하기 때문이고, 사물보다는 더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사물은 무기력(inerte)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의 “역할”(un role)이며, 움직이는 이데아이며, 운동하고 있는 사유이다.
그러면 생성적 이성들의 작업에 의해 구성된 모든 생명있는 존재들을 고려해보자. 이 존재들 각각도 로고스를 표출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 자체에 의해서 생명의 어떤 사랑을 표출한다. 이로부터 이기주의와 투쟁이 나온다. 그러나 살아있는 모든 존재들이 함께 싸우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또한 협력(un concert)에 참여한다. 근본적인 조화가 드러난다(se révéler). 개별적인 로고스들(logoi) 이외에도, 전 세계의 물체의 보편적 로고스(un logos universel)가 있다.
증명1, 만일 점성술이 하늘에서 사건들을 예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숙명들에서 별들이 숙명들에 미치는 영향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모든 사물들 사이의 어떤 음모(une telle conspiration, 결탁)가 있어서 모든 배치 또는 고장은 다른 곳에서 그 반향(contrecoup. 반동)을 갖는다. 점성술은 모든 사물의 근본적 조화를 드러낸다.
증명2, 마술, 즉 거리를 두고 작동하는 수단이며, 물질의 몇몇 변모(모양 변형)들을 생산한다.
증명3, 사랑은 마술가의 어떤 것이다. 사물들의 실재적인 근친성들은 마술에서 드러나며, 또한 사랑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또한 음악에서도 드러난다.
따라서 모든 사물들의 조화가 있고 그리고 보편적 로고스도 있다. 그러나 어떻게 전체의 이성과 개별적 로고스들의 일치를 설명하는가? 이 점은 대부분의 해석가들에 의해 잘 못 해결되었다. 이 순간에는 일치가 확인되었다고 하는데 그치자. 더하여 보편적 이성이 자체에서 정돈되고 자체로부터 유출되는 것과 똑 같은 계획(le plan)[숙명, 의도]에서 자리를 차치하게 되는 것처럼 개별적 이성들을 고려해야 한다. 이 로고스들(λόγοι, 이성들)이 펼치는 점을 고려하는 것이 당연하다. 이 이성들은 살아있는 신체들에, 말하자면 힘들의 체계들에 또는 조직화된 성질들 자체들 사이에, 작용하기에 이른다. 로고스가 작업하면 할수록, 로고스는 더 많이 분화된다. 로고스는, 자체 속에서는 통일을 유지했고 또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는 느슨하게 하는 형상들을 점점 더 내 놓은다. 자기 속에서 불가분이었던 것이 풀려나고, 이리하여 물체들과 생명있는 존재들을 구성한다.
그것의 출발점은 어떠한가? 그 작업은 (...). 귀결로서 출발점은 작업하지 않는 관념, 즉 플라톤의 관념[이데아]이다. 단지 플로티노스에서 이 관념은 개별적 대상을 표상한다. 따라서 움직이지 않는 관념[이데아]들이며, 그래서 우리가 로고스의 다른 한 극단성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높은 곳에서[상층에서] 이데아들, 바닥에서[심층에서] 신체들이다. 이들[상층과 심층] 사이에 펼쳐져(긴장되어) 있는 지도적인 관념들의 다발들 중의 이 다발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한 아직은 바닥에도 정상에도 있지 않다. 플로티노스가 말하듯이, 만일 사람들이 하나의 고깔로서 실재성을 표상한다면, 관념들은 이 고깔의 뽀쪽점에 더 가까운 단면(une section)이며, 이 형상들은 바닥에 더 가까운 단면이다.
형상들은, 우선은 형상들의 상호 작용을 고려하기 위하여 그 다음에는 형상들의 점진적인 쇠퇴(“déchéance” 실추)룰 설명하기 위하여, 지지점, 즉 물질을 요청한다. 왜냐하면, 형상은 작동하기 때문에, 형상은 쇠퇴한다. 물질을 정의하려고 애쓰지 않아야 한다. 이 말은 물질에게 형상을 줄 수도 있으리라. 그리고 물질은 가설상으로 형상이 없는 무엇이다. 그것은 환영(un fantôme)인데, 이것이 존재한가도 주장하는 것 모든 것에서 거짓을 말한다. 이것은 모든 형상의 결여(la privation, 결핍), 모든 연결의 결핍이며, 무한자(l'infini), 즉 아페이론(ἄπειρον)이다.
이로부터 형상과는 실제적으로 구별된 원리가 있다는 결론을 실재적으로 내려야 하는가? 무엇이 형상에 섞여있는가? 아니다. 왜냐하면, 물질이라는 이 표현은 아주 임시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이성들의 소진자체로써 생각한다. 이성들이 출발점에서 멀어지는 정도에 따라서 [멀먼 멀수록] 이성이 소진된다. 빛의 분산하는 고깔은 [멀먼 멀수록] 어둠 속에 잠긴다. 말하는 방식으로는 분산하는 광선들이 약화되지 않는다. 물질은 결코 도달하지 못하는(기대치 없는) 한계(une limite극한)이다.
이제 다른 항목, 즉 관념들(이데아들, les Idées), 즉 움직이지 않는 본질들에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이 관념들은 이성들(이유들) 자체보다 훨씬 더 많으며, 공간 속에도 시간 속에도 있지 않다. 관념들은 어떤 관념들안에서 다른 관념들이 서로 서로 흘러나오며, 서로들 안에서 서로 표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표상들 보다 더 많은 하나의 이데아(une Idée)가, 마치 보편적 로고스와 같은 전체의 표상이 있다. 이것이 누스(le νοῦς)이다. 이 이데아는 실체적으로 다는 이데아들과 구별되지 않으나, 이 이데아 아래에는 다른 모든 이데아들이 상호 배열된다. 이것은 아직 순수 단위(l'unité)가 아니다. 이것은 다수성을 포함하고 있다. 이것 위에, 따라서 순수 단위가 있다. 이것을 어떻게 정의하는가? 사람들은 이것에게, 이것이 감당할 만한 어떠한 이름도 부여할 수 없다. 이것은 모든 규정성보다 상위에 있다. 존재에 비유되는 이것은 존재보다 더 많은 것이다. 이것은 사유보다 더 많은 것이다. 만일 이데아들이 대상들의 원인들이라면, 이것은 원인의 원인이다. 만일 그것을 이름 부를 필요가 있다면, 토 헨(τό ἕν), 토 아우타르케스(τό αὔταρκες), 토 프로톤(τό πρώτον), 토 휘페르타톤(τό ὑπέρτατων)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직도 아페이론(ἄπειρον)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존재보다 모자라는 무한자와 존재보다 더 많은 무한자 사이에 있다. 이 두 무한자들 사이에 현존들의 연쇄고리가 늘어져 있다. 정상에는 빛보다 더 많은 무엇이 있다. 그 다음으로 빛의 점, 즉 빛나는 점의 통일성[통일점]이 있는데, 그러나 분화하는 모든 빛살들을 안에 감싸고 있다 결국에는 점점 더 분화되는 이 모든 빛살들은 어둠 속에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이 세 위격들(les trois hypostases)이다. 일자(l'Un). 이것을 제시하고 그리고 사람들은 모든 누스(tout le νοῦς)을 제시한다. 사람들은 일자의 관조(une contemplaion)를, 즉 호라시스(ὅρασις)를 제시하지 않고서는 일자를 제시할 수 없다. 이데아들은 일자의 그 만큼 많은 관점들(autant de visions)이다. 그러나 이 이데아들의 다수성[다양체]는 영원하고도 불가분이다. 이때 시간과 공간 안으로 그러한 모든 것의 굴절이 온다.
이 셋째 위격이 영혼이다. 영혼은 하나의 혼합체(un mélange)이다. 우리는 우선 이데아(관념)이, 그리고 이성이, 그리고 형상이, 그러고 나서 물질이 있다. 영혼은 정상에 의한 이데아이며, 그리고 그것은 이데아 안에 있으며 거기로 되돌아 올 수 있다. 그것(영혼)은 환경에 의해서 로고스이며, 토대에 의해서 형상이며 심지어는 물질이다.
특별한 이데아, 즉 누스(le νοῦς)를 고려해 보자. 만일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가지적인 것을 주어 본다면, 우리는 그것에 따라서 이완에 따라 작업하면서, 지나간 가지적인 것을 얻는다. 이러한 한 것이 세계의 영혼일 것이다. 이것은 사유 자체이며, 이 사유자체는 충분하여 넘쳐났으며, 방심(distraction)에 의해서처럼 그자체로 넘쳐났다. 그러면 세계의 영혼은 세계의 신체를 생산하려고 할 것이며, 다시 말하면 가능한 살아있는 신체들을 초벌로 그리려 할 것이다.
그러나 이때 개별이데아를 각각은 또한 잠재적으로 영혼을 포함하며, 자기의 로고스에 의해 신체로 이어지게 될 것이다. [그런데] 보편 이성은 영혼에게 이렇게 신체를 준비해 놓았다. 개별영혼의 각각은 개별이데아들의 각각 속에 포함되어 있고 또 보편 로고스가 자기의 이미지에 맞게 단지 묘사되는 신체를 통각하는데, 이 개별영혼의 각각은 이미지에 의해 매료되었다. 어떤 것이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생각에 유혹된 그 개별영혼의 각각은 아래로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로부터 낙하(la chute, 타락)가 이루어진다. 이때 영혼은 신체 속에, 물질적 세계라는 커다란 환상세계(la fantasmagorie) 속에 잡혀있다. 영혼은 그의 아버지인 신에로 항상 되돌아 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자주 영혼은 실재적인 것의 그림자일 뿐일 것을 실재성으로서 간주할 것이고, 우리 앞에서 상연되는 드라마에서 배우가 된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출발점에 되돌아 왔다. 우리는 어떻게 위격(위상)들이 생겨나는 지를 안다. 나는 이제 플로티노스의 학설들로부터 고유한 의미에서 그에게 속하지 않은 생각들을 제거하고자 할 것이다.
우선 두 극단들에서, 우리에게는 본질과 사유보다 상위인 일자가 있으며, 이 양자보다 하위인 물질이 있다. 거기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두 원리들의, 즉 형상과 질료의 고조(l'exaspération, 심화)를 인정할 수 있는데, 후자는 잠재성보다 덜 한 것이 되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플로티노스의 일자를 플라톤의 일자에 접근시킬 수 있고, 그 본성이 플라톤이 말한 무한정의 원리에 유사하다. 닮음은 사람들이 원리들을 정지로서 고려할 때 분명하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거쳐감을 생각할 때 훨씬 덜하다. 거기에 아주 특별한 발산(une irradiation)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두 항목을 제거해보자.
로고스들(les logoi)과 이데아들이 남는다. 이 로고스들은 스토아학자들의 로고스들과, 에이도스들(les eidē)은 플라톤의 에이도스와 닮았다. 그러나 차이는, 특히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행에서 크다. 스토아학자들의 로고스들은 물질에 내재(immanants)하며 초월적 원리로부터 도출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이데아들은 류적인 것들을 대리한다. 반대로 플로티노스의 로고스들은 이데아들의 이어짐(les prolongement)일 뿐이며, 이데아들 그 자체들로는 개별적이기 때문에, 로고스들 속에서 각각이 다시 살아갈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플로티노스에게만 고유하게 속하는 것, 그것은 그의 선배들에게서 잠재적인 이원론에서 해방되기 위한 이행(le passage)이며, 노력(l'effort)이다.
만일 우리가 이데아들과 일자를 다룬다면, 우리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적 세계를 갖는다. 그리고 그 밑에는 감각적 세계가 있다. 플로티노스는 후자의 세계들로부터 전자를, 에이도스로부터 로고스를, 누스로부터 프쉬케(영혼, ψυχή)을 도출하기를 바랐다. 거기에 그의 위대한 독창성이 있다.
어떻게 이 이행이 재현되기에 이르렀는가? 물질적 세계는 행동과 생산의 세계이며, 이데아 세계는 관조의 세계이다. 이때에 물음이 나온다. 어떻게 사람들은 사변으로부터 행동으로 이행하는가? 공간과 시간의 밖에 있는 것으로부터 이완되고 쇠퇴하는 것으로 이행하는가? 에 기에 문제가 있다. 플로티노스는 이 물음을 심리학적으로 해결했는데, 지성적인 것에서 감각적인 것으로 이행을, 이것(이행)을 단순한 약화로 이르게 하면서, 순수하게 분석적이 되게 시도했다.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제3권을 보세요. 거기에서 그는 행동(l'action, 행위)과 생산(la production)은 사색의 약화일 뿐이라고 선언했다. 행하는 자를 위하여 행하다(agir), 이것은 사유를 약화시키는 것이고, 느슨해지는 것이다. 기하학자가, 자기가 강도있게 도형을 사유하는 동안에, 방심에 의해서[놀이삼아] 도형을 그리는 것처럼, 이렇게 순수 관조는 행동으로 약화된다. 따라서, 자 여기에, 발산(l'irradiation)이란 관념 속에 중요한 것이 있으며, 그는 그러고 나서 그것을 위격[위상]들 사이에서 모든 변천들(toutes les transtion)로[이전 방식으로] 넓히기를 시도 했다.
그의 관념은 훨씬 더 심리학적이다. 이 관념은 단순 주제가 아니며, 이 주제에 사람들은 그것과 다른 주제들을 대립시킬 수 있다. 그것은 하나의 사실이며, 하나의 확인이다. 엔네아데스 제4권에서 그는 상태를 묘사한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 신체로부터 각성되어서 그는 자기에게 되돌아 올 때, 자기가 발견되는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그때에 그는 경탄할 정도로 아름다운 세상의 통찰(vision)을 갖게 되고, 그 가까이에 있는 나머지 상태는 꿈이었다. 신체는 잠에 빠져 있다. 그리고 신체는 행동의 도구이며, 그 행동은 관조의 약화이다. 그것은 잠자고 있는 정신(l'esprit)이다.
황홀경은 훨씬 더 학문적인 이 상태의 이어짐일, 즉 영혼의 국면에서 지성의 국면으로 이행하는데 있는 상태의 이어짐일 뿐이다. 그것의[상태의 이어짐의, 즉 황홀경의] 형이상학적 방법은 깊은[심층적] 내성이다. 이 내성은 우리 영혼과 실재적인 것 전체 사이에서 공감의 깊은 호소에 의해 관념들 저넘어로 가는데 있다. 황홀경은 이 공감의 형식들 중의 하나이지, 유일한 것은 아니다. 그 아래에는 노력이 있고, 영혼은 노력에 의해 스스로 누스에로 올라간다. 그리고 제6권 7에 따르면, 바로 그 아래, 아주 특별한 상태가 있는데, 만일 사람들이 스스로를 물질로 재현하고자 원한다면, 그 특별한 상태에 마땅히 이른다고 한다. 사람들은 물질을 사유할 수 없지만, 그러나 사람들은 아노이아(ἄνοια, 방심) 상태에서 스스로를 위치시킬 수 있다. 아노이아 상태는 실재성속에서 진실로 비존재인 것과 공감의 상태에 있는 것이다. 따라서 소위말해서 사유되지 않는 것과 일치하려고 애쓰는 영혼에는 여러 태도들이 있다.
- 주14) 벩송의 문장(MR 234): <플로티누스에 관한한 대답은 의심스럽지 않다. 그는 대답으로 약속된 땅을 본다고 했지 그 흙을 밟는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황홀경(l'extase)에까지, 즉 영혼이 느끼는 또는 신의 현전(en présence)에 있다고 느끼는, 신의 빛이 비추어지는, 상태까지 갔다. 그는, 관조가 행동 안에서 심연에 빠져있어서, 인간의 의지와 신적의지가 뒤섞인 그 점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지막 단계를 건너지 못했다. 그는 절정에(au faîte) 있다고 믿었다. 더 멀리 가는 것은 그에게있어서는 내려가 것이었다. 이것이 그가 찬탄할 만한 언어로 표현했던 것이고, 그 언어는 신비주의로 가득한 언어가 아니다. 그가 말하기를 “행동은 관조의 약화이다.”(희랍어 원문 엔네아데스(Les Ennéades) III, 8, 4.) (234) ... 한마디로 [그리스]신비주의는 우리가 취하기로 합의한 절대적인 의미에서 볼 때, 그리스적인 사고에 의해서는 도달되지 않았다. 아마도 [그리스] 신비주의가 존재 하고자 원했으리라. 그것은 단순히 잠재적인 상태에서 몇 번이고 문을 두드렸다. 문은 점점 크게 열렸으나 결코 그리스적 사고를 온전히 지나가게 하지는 않았다. (234)>
플로티노스의 방법은 따라서 심리학적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의 주의(son attention)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의보다 훨씬 더 많이, 심리학에 관하여 영혼의 삶에 호소했었다는 것은 자연적이다(당연하다). 플로티노스는 소크라테스의 격률(la maxime)을 과학적... 처럼 고려했다. 그는 우리에게 제4권에서 말하기를, 영혼은 모든 것에 대해 표상적이라고 하고, 그리고 그것을 인식하는 사람은 전체를 인식한다고 한다. 그의 계승자들은 그것을 잘 이해했다. 얌블리코스(Jamblique, Ἰάμβλιχος, 242년경-325)가 포르피리오스(Porphyre, Πορφύριος, 234-305)에게 그노티 세아우톤(γνῶθι σεαυτόν, “너 자신을 알라 Connais-toi toi-même”)에 관해 이야기했던 논문의 조각글 속에서, 영혼을 아는 자는 사물들의 본질을 아는자이다, 이렇게 되어있다. 마찬가지로 프로클로스(Proclus, Πρόκλος, 410-485)는 그의 알키비아데스편의 주석(Commentaire sur l'Alcibiade)과 또한 티마이오스편에 관한 주석(Commentaire sur le Timée)에서 영혼을 안다는 것은 반대로 전체를 안는 것이고 신에로 고양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48UMF)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