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성령충만으로 나아가자
(이사야 61장 1-6절)
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61: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61: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61: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옛부터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61:5 외인은 서서 너희 양 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1: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너희가 이방 나라들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니라
1. 기름부음의 역사
본문 1절에서 언급된 ‘기름을 부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라고 하고 헬라어로 ‘그리스도’라고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로 따로 구별해 위임할 때 머리 위에 기름을 부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특별하게 구별된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구별된 존재 의식을 가질 때 영적인 자유와 부요함이 있게 된다. 영적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자란 의식을 가지자. 그 의식이 인생을 훨씬 진취적이고, 복되게 만든다.
사무엘하 23장 1절을 보면 다윗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 유언의 고백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는 다윗의 마지막 말이라 이새의 아들 다윗이 말함이여 높이 세워진 자,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부음 받은 자,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가 말하노라.” 다윗은 자신을 표현할 때 단순히 자랑의 차원을 넘어 자신을 신비로운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말한다. 자신을 ‘높이 세워진 자’라고 하며 스스로 높은 자리를 차지했다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높이 세워주셨다고 한다. 그는 하나님 중심적으로 살았던 겸손한 사람이었다.
또한 다윗은 자신을 ‘야곱의 하나님께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다. 이 표현에는 그에게 삶의 목적에 대한 분명한 자각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자연히 그의 삶에는 힘이 넘칠 수 있었다. 그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자신의 뚜렷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기에 각박한 현실에서도 노래를 잃지 않았다. 다윗처럼 성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존재라는 의식을 가지고 자신 있게 살아야 한다.
2. 기쁨이 넘치는 역사
본문 2절에 언급된 ‘여호와의 은혜의 해’는 50년마다 찾아오는 희년을 뜻한다. 희년은 온 이스라엘에 자유와 회복이 선포되는 해이다. 가난 때문에 빚지고 자기 땅을 남에게 넘긴 채 소작인으로 혹은 종으로 살던 이들이 기다리는 것은 희년의 나팔 소리였다. 희년의 해 7월 10일, 숫양의 뿔로 만든 나팔 소리가 길게 울리면 종은 자유인이 되고 땅은 원주인에게 돌아간다. 매인 사람에게는 그 나팔 소리보다 더 기쁜 소리는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가장 위대한 희년의 소식이지만 아직도 그 소식의 수혜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어떤 사람에게는 희년의 소식이 있지만 저 너머에서 머뭇거리고 사회의 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은혜로운 비는 누구에게나 내리지만 그 비가 어떤 사람에게는 기쁨의 눈물을 낳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슬픔의 눈물을 낳는다. 비로 인해 수입이 급감하는 직종 종사자에게 비는 한숨의 눈물을 낳는다. 좋은 것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좋은 것이 되지 못할 때도 많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희년의 기쁨을 전해주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성령충만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이 땅에서 물리적인 평등은 있을 수 없다. 물리적인 평등 추구는 삶의 의미와 땀의 의미와 책임의식을 희석시킬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가진 자의 화학적인 평등 추구이다. 뜻있는 사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사회는 저절로 양극단의 사회로 치닫는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양극화가 심각하다. 정치인들이 이것을 조장하고 있는 것 같다. 지역의 양극화, 이념의 양극화, 경제의 양극화가 심각하다. 성령충만한 사람이 되자.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만이 이러한 사회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성령충만한 성도가 성령충만한 공동체를 만든다.
3. 온전한 회복의 역사
메시아가 임하고 하나님의 영이 충만해지면 온전한 회복의 역사가 나타난다. 그때 황폐하게 되었던 성읍이 다시 깨끗하게 건축되고 단장되고 신분도 제사장 신분을 회복하게 된다(4-6절). 오늘날 무엇보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바로 우리의 신앙이요, 교회이다. 교회는 부단한 자기 갱신의 사명이 있다. 오늘날의 교회는 물량주의, 교권주의, 세속주의, 인본주의 등으로 많이 병들어 있다. 그 병의 치유를 위해 교회는 끊임없이 개혁되어야 한다. 한국교회가 회복되는 길도 성령충만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은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늘 계속되어야 할 명제이다. 한국 교회도 새롭게 개혁되어 영성과 십자가 정신을 회복하고 부단한 자기반성으로 세계 선교의 막중한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교회 회복을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 중심적인 삶이다. 중세 시대의 종교개혁은 초대교회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자는 갱신 운동이었다. 그 운동의 핵심 내용이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사실상 성령충만과 말씀충만은 같은 것이다.
요새 성령충만을 오해해서 성령을 시험하며 성령충만을 과시하려는 사람이 많다. 정상적인 사람은 함부로 뱀을 집어 올리거나 독을 마시지 않는다. 그런데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않는다는 성경 말씀(막 16:18)을 앞세워 실제로 그런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행동이 아니고 하나님께도 결코 영광이 되지 않는다. 믿음은 지식과 상식을 초월하는 것이지 상식을 멸시하는 것이 아니다. 성령충만을 영성을 과시하는 도구로 삼지 말고 말씀 안에서 바르게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