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어 번역의 문제]
‘비아’[나가 아니다]와 ‘무아’[나가 없다]는 ‘아’[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그리고 ‘비아’는 보통 서술어로 쓰인다.
‘아’도 ‘비아’와 대비하여 서술어로 쓰일 수 있다.
(아함경의 용법) “눈ㆍ빛깔ㆍ눈의 인식ㆍ눈의 접촉ㆍ눈의 느낌ㆍ눈의 생각ㆍ눈의 의도는 아다, 비아다.” 등.
보통 ‘아다’는 ‘나다’로, ‘비아다’는 ‘나가 아니다’로 번역한다.
‘무아’는 서술어로 쓰일까?
좀 어색해 보이기는 한다.
(예) “눈은 무아이다.” 등.
보통 “눈은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등으로 번역한다.
[‘A가 없다’는 ‘무엇은 A가 아니다’의 집합이다. 따라서 ‘A가 없다’는 ‘무엇’을 주어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상’과 ‘무상’은 어떨까?
‘상하다’는 쓰지 않고 그 대신에 ‘항상하다’를 쓴다.
‘무상하다’ 애신에 ‘항상하지 않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아함경의 용법) “눈은 항상하다.” “눈은 무상하다.” “눈은 항상하지 않다.” 등.
‘소유’와 ‘무소유’는 어떨까?
이것들은 보통 서술어로는 쓰지 않는다.
이것들에 대응하는 용법으로는 다음과 같다.
(아함경의 용법) “눈은 내것[我所]이다.” “눈은 내 것이 아니다.” 등.
[한자어 ‘무’의 용법과 관련하여]
‘무’는 ‘비’[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하고, ‘유’[있다]와 대비되는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무아, 무상’은 위의 용법을 참고히시라.
‘무위, 무루’는 보통 ‘함이 없다, 번뇌가 없다’로 번역한다.
‘무소유’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있지 않다’로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무소유’를 불경의 문맥을 고려하면 ‘소유가 없다’로 번역하는 것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확인해야 할 것]
이 예들에서의 비와 유에 대한 산스크리트어는 모두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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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아[無我], 철학사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87793&cid=41978&categoryId=41985
산스크리트어의 anātman 또는 nirātman의 역어(譯語). '무아'가 일반적이지만, 비아(非我)로 번역되는 경우도 있다. '아트만(ātman, 我)이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주장은 불교를 다른 모든 철학사상으로부터 구별하는 특징이자 불교의 근본사상이다.
아트만은 인도의 정통적 철학의 여러 학파에 의해 실재라고 간주된 영원불멸의 본체이고, 고정적 실체이다.
불교에 의하면 모든 현상은 생멸(生滅) 변화하는 무상(無常)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영원의 본체와 실체는 인식될 수 없다. 이것을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라 한다.
무아,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AC%B4%EC%95%84
무아(無我)는 산스크리트어 아나트만(अनात्मन् anātman, anatman, 팔리어: anattā) 혹은 니르아트만(nir-ātman)의 번역어로 비아(非我)라고도 한다.
불교의 근본 교의 중 하나로 처음에는 자기 소유물을 자기 것으로서 집착함을 금하는 실천적인 입장에서 주장되었다. 즉 고타마 붓다가 말한 무아(無我)는 있는가 없는가에 대한 이론이 아니라 연기에 의해 이루어진 제법(諸法), 즉 유위법(有爲法)을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실천적 의미를 가리킨다.[1]
후에는 영원독립하며 주재적인 자아(아트만)의 실재를 주장하는 브라만교의 교의에 반대하여 사람은 5온(五蘊)의 집합이요, 생명의 주체인 실아(실재로서의 자아)는 없고 또한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써 생긴 것이며 고정적인 본성은 없다고 하는 무아설(無我說)을 주장하게 되었다.[2]
무상, 위키백과
https://en.wikipedia.org/wiki/Impermanence#Buddhism
무상함을 뜻하는 팔리어 anicca는 비-를 의미하는 "a"와 "일정한, 연속적인, 영구적인"을 의미하는 "nicca"로 구성된 합성어입니다. [1]
'nicca'는 연속성과 영속성의 개념이지만 'anicca'는 정반대를 나타냅니다.
영속성과 연속성의 부재. 이 용어는 산스크리트어 용어 anitya (a + nitya)와 동의어입니다. [1][2]
무상함의 개념은 불교에서 두드러지며 힌두교와 자이나교의 다양한 학파에서도 발견됩니다. 이 용어는 Rigveda에도 나타납니다. [3][4]
사무색정,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2%AC%EB%AC%B4%EC%83%89%EC%A0%95
공무변처정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 산스크리트어: ākāśānantyāyatana, 팔리어: ākāsānañcāyatana 아-까-사-난짜-아따나, 영어: jhāna on infinite space, concentration on limitless space)은 물질[色]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무한한 공간에 집중하는 선정이다.[2][3][10][12]
식무변처정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 산스크리트어: vijñānānantyāyatana, 팔리어: viññāṇañcāyatana 윈-나-난짜-아따나, 영어: jhāna on infinite consciousness, concentration on limitless consciousness)은 공간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무한한 공간과 함께하고 있는 무한한 마음에 집중하는 선정이다.[2][3][13][14]
무소유처정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산스크리트어: ākiñcanyāyatana, 팔리어: ākiñcaññāyatana 아-낀짠나-아따나, 영어: jhāna on nothingness, concentration on nothingness)은 마음의 속박을 벗어나기 위해 아무것도 없음에 집중하는 선정이다.[2][3][15]
상좌부의 아비담마에 따르면, 즉, 공무변처(식무변처가 아님)에서의 마음이 없음, 즉, 무한한 공간과 함께하고 있는 무한한 마음이 없음, 즉 "거기에 그 무엇이건 아무것도 없음(natthi kiñci)"에 집중하는 선정이다.[16][17]
비상비비상처정
비상비비상처정(非想非非想處定, 산스크리트어: naiva-saṃjñānāsaṃjñāyatana, 팔리어: n’evasaññān’āsaññāyatana 네-와산나-나-산나-아따나, 영어: jhāna of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 concentration of neither perception nor non-perception)은 무소유처정에서 더 나아간, 무소유처정의 마음을 명상 대상으로 하여 집중하는 선정으로, 그 상태가 극히 미세하여 마음[想]이 있다고 할 수도 없고 마음이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선정이다.[2][3][18][19]
유위와 무위, 위키배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C%9C%84%EC%99%80_%EB%AC%B4%EC%9C%84#cite_
불교에는 일체법(一切法) 또는 제법(諸法)을 분류하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그 중에는 크게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이 있다.
이 분류 방식은 일체법을 크게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과 더불어 불교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분류법이다.[1]
유위(有爲, 산스크리트어: saṃskrta, 팔리어: savkhata, 영어: created, formed, conditioned)에서 위(爲)는 위작(爲作) ·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으로, 유위는 만들어진 것, 조작된 것, 다수의 요소가 함께 작용된 것, 여러 인연이 함께 모여서 지은 것, 인연으로 말미암아 조작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킨다. 또는 이렇게 하여 드러난 생성과 소멸의 세계, 즉 우리가 경험하는 현상의 세계를 뜻한다.[2][3]
유위법(有爲法, 산스크리트어: sajskrta-dharma, 영어: Karmic existence, conditioned existence)은 유위(有爲)의 세계, 즉, 여러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생성과 소멸의 현상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2][3]
무위(無爲,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 팔리어: asavkhata, 영어: uncreated, unformed, unconditioned)는 조작(造作: 만들다)의 뜻이 없는 것으로 유위의 대(對)가 되며, 조작되지 않은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세계, 즉 생멸변화를 떠난 절대적이며 항상 존재하는 진리 또는 진리의 세계를 뜻한다.[2][4][5]
무위법(無爲法, 산스크리트어: asaṃskrta-dharma, 영어: non-Karmic existence, unconditioned existence)은 무위의 세계, 즉 인연의 화합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진리의 세계의 모든 개별 존재(법·法)를 통칭한다. 또는 그러한 개별 존재(법·法)를 가리킨다.[2][4][5]
원래 무위 혹은 무위법은 열반(涅槃)의 다른 명칭이었는데, 후대의 아비달마불교와 대승불교에 의해 3무위(三無爲), 6무위(六無爲), 9무위(九無爲) 등의 설이 생겼다.[4]
유루와 무루,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C%A0%EB%A3%A8%EC%99%80_%EB%AC%B4%EB%A3%A8
불교에는 일체법(一切法) 또는 제법(諸法)을 분류하는 여러 방식이 있는데, 그 중에는 크게 유루법(有漏法)과 무루법(無漏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이 있다. 이 분류 방식은 일체법을 크게 유위법(有爲法)과 무위법(無爲法)의 두 가지로 분류하는 방식과 더불어 불교 전반에서 널리 사용되는 분류법이다.[1][2]
누(漏, 산스크리트어: āsrava)의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흐르다' 또는 '새어 나오다'이다.[3][4] 누(漏)는 인간이 번뇌 때문에 각종의 악업을 행하고 그 결과 고(苦)가 그 사람의 삶에 누출(漏出: 새어나옴)되어 나타나고 번뇌와 고의 이러한 누출로 인해 그 사람은 혹(惑) · 업(業) · 고(苦)의 윤회3도(輪廻三道)를 전전하면서 미혹의 세계[迷界]를 유전(流轉: 끊임없이 윤회함)하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누(漏)를 곧 번뇌라고 할 수 있다.[5]
번뇌 또는 고(苦)의 누출을 더욱더 증장시키고 있는 상태나 증장시키는 작용을 하는 법들을 유루(有漏, 산스크리트어: sāsrava) 또는 유루법(有漏法, 산스크리트어: sāsrava-dharma)이라고 한다.[1][2][6]
이러한 유루의 뜻과 반대의 경우를 무루(無漏, 산스크리트어: anāsravah) 또는 무루법(無漏法, 산스크리트어: anāsravah-dharma)이라고 하는데,[7][8] 적극적으로 정의할 경우, 번뇌가 끊어진 상태나 번뇌가 끊어지게 하는 작용을 하는 법들을 무루 또는 무루법이라고 한다.[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