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의 작전개념에 따라 백마사단이 전개한 전술책임지역은 투이호와로부터 1번도로와 철도에 연하여 팜람까지 약 270Km, 폭 50Km에 달하는 광대한 지역이다. 전술책임지역 내에는 3개 성, 11개 군, 76개 읍 면이 있으며 면적은 약 3,000평방Km이고 38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그들의 생업은 평야지대와 해안지대를 끼고 있었으므로 농업과 어업이며 불교 신자가 대부분이었다.
특히 동노만,빈호아, 나트랑, 캄란 만에는 항구, 비행장 등 주요 시설이 있어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홍상운 대령이 지휘하는 백마 제29연대는 1966년 9월 25일에 월남에 도착 후 1번도로에 가해지는 위협을 제거하기 위한 예하 대대를 사용한 두 번의 작전을 시도하였으나 상황판단과 지형의 미숙 등으로 오히려 적으로부터 기습을 당해 전사 4명, 전상 17명의 피해를 입고 소총 6정과 기관총 1정을 적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지금까지 파월 한국군이 총기를 적에게 빼앗긴 적은 없었는데 이번 백마사단의 초전의 실패는 매우 수치스러운 것이었다.
이 첫 작전의 실패는 오히려 백마사단의 장병들에게는 월남전을 결코 얕잡아 보아서는 안되며 쉬운 전쟁이 아니라는 경각심을 주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연대는 계속 작전을 폈지만 다시 적의 기습사격으로 3명의 전사자를 내는 등 날고 뛰는 베트콩에게 약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편 백마 제28연대가 주둔한 투이호와까지의 1번도로를 개통시키는데는 성공하였다.
맹호사단 초기에 바람이 불어 나무가 흔들리는데 베트콩이 접근하는 줄 알고 수류탄을 던지고 총질을 했던 것과 같이 전투경험이 없는 병사들은 '제 방귀에 놀란다' 는 옛 속담처럼 사격군기가 서지 않을 때가 허다했다. 전장에서 과도기적 전쟁공포증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경우가 초전에는 흔히 있었던 병폐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달포를 지나면 사병들의 그런 공포심은 없어지는 것이 통상이었다.
백마사단 본대가 파월하기 전 부사단장 백문 준장이 인솔하는 선발대가 닌호와에 도착했다. 숙영지 외곽 경계를 위해 야간 매복을 내보냈는데 그 매복진지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수류탄을 투척하고 기관총을 발사하는 등 격전을 방불케 하는 일이 생겼다. 날이 새면서 격전장 전방을 살피니 난데없이 물소 20 마리가 죽어 자빠져 있었다. 매복진지에 접근한 것은 적이 아니라 물소 떼였던 것이다.
아침 10시가 지나자 아니나 다를까 월남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 아우성쳤다. "물소 값 물어내라" 는 것이었다. 조금 있더니 그 고장 군수와 서장까지 나타났다. 백문 부사단장은 해결책을 찾지 못하고 고민하다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동안에 있었던 사실을 보고 했다. 내용인즉 물소를 죽였는데 물소 값 내라는 것인데 백마사단 선발대로 왔으니 돈이 없다고 했다.
채명신은 '월남에 와서 별 보고를 다 받아본다' 고 기분은 상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소 값을 변상해 주고 민심을 달래라. 소 값은 소 임자가 달라는 대로 줘라"고 나무란 뒤 사령부에 있는 돈 다 털어서 3,000달러를 만들어 보내주었다.
사령부에서 보내온 달러를 받은 백문 부사단장은 소 임자들과 달라는 대로 주겠다며 흥정을 하니 한 마리에 30달러 정도밖에 안되었다. 그러나 채명신 장군 말을 떠올리며 백문 부사단장은 군수와 경찰서장 입회하에 마리 당 100달러씩 20마리 값 2,000달러를 배상했다. 그렇게 되면 죽은 물소가 백마사단 차지가 되어야 옳은 것이었다. 그런데 경찰서장이 '몇 마리 줄 수 없느냐'고 사정해서 다섯 마리를 떼어 주니 군수가 또 달라기에 또 주고 소 임자까지 사정해서 나머지를 모두 나누어 주는 것으로 그날의 해프닝은 끝났다.
그런데 그 해프닝은 손해가 아니었다. 닌호와 인심이 확 돌아섰다. 과거 일본군이나 프랑스군 그리고 미군들이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면서 외국군에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주민들이 "따이한의 협조자' 가 된 것이었다. 이 해프닝으로 말미암아 백마는 망아지 과정을 거쳐 이름 그대로 백마로 거듭나게 되었다.
중공의 모택동이 정강산에서 처음으로 게릴라전을 시작할 때 부하들에게 하달한 '8개 항목' 중 하나가 "물건을 살 때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말라, 정당한 가격을 주도록 하라" 는 것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채명신은 그 일을 떠올리며 3,000달러를 백문 부사단장에게 보낸 것이었다. 소값 2,000달러는 결코 아까운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몇 배 더 아군에게 유익한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맹호사단 장병이 처음 월남에 도착 직후 밤을 무서워 했던 것처럼 백마사단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서 채명신이 기다렸더니 과연 백마 또한 맹호처럼 제 값을 톡톡히 하기 시작했다.
파월 백마사단의 초대 사단장은 이소동 소장이었다. 백마사단 본대가 도착하여 이 물소 떼 소동을 보고 받는 자리에서 사단장은 큰소리를 웃는 것이었다. 혼줄이 날까 보아 긴장하고 있던 부사단장 이하 참모들은 사단장의 웃는 모습을 보고 서로 얼굴을 바라보면서 의아해 했다. 그렇다고 함께 웃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사단장은 다시 웃으며
"사단장 이름이 소동이니 백마사단이 소동을 벌였구먼, 잘 했어, 잘 했어 !."
그때서야 백문 부사단장 이하 참모들도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백마 길들이기 작전
백마 도깨비 2호작전 (동영상에서 갭쳐했음) |
채명신 주월한국군 사령관은 백마사단 증파 이후 많은 관심을 백마사단에 집중해야 했다. 주월미군 사령부는 기회 있을 때마다 백마사단을 베트남 오지에 투입 시키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막는 길은 배치된 전술책임지역에서의 활발한 탐색전을 전개하는 길 밖에 없었다. 더구나 백마사단이 파월 초기이기에 갖은 실책이 이어져 더욱 신경을 곤두세워야 했다.
최명재 대령이 지휘하는 제28연대는 1966년 10월 17일 미 제101공수여단으로부터 전술책임지역을 인수한 후 지역 내 소탕작전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 혼바산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는 적을 고립시키기 위하여 작전계획을 세웠다.
혼바산 일대의 고지군은 전체가 석회암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단부에서 정상까지 많은 천연 동굴이 있었다. 바로 맹호6호작전의 목표지역이었던 푸캇 산과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다.
백마사단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들어가기 전인데도 불행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10월 23일. 2대대장 오상욱 중령이 지형 정찰을 하다가 베트콩이 설치한 부비트랩이 폭발하여 대대장과 부하 4명이 순직하는 사고가 발생하였다. 오 중령의 순직은 안타까운 일이었다. 조사결과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전투경험이 없는 부하들이 머뭇거리며 앞으로 나아가기를 겁내자 스스로 앞장서서 진로를 개척하다 사고를 당했다는 것이다. 이번 이 일에 대해 여러 교훈을 얻을 수 있었다. 첫째, 대대장이 나서야 되는 지형 정찰이 아니었다는 것과 둘째, 부주의가 불러낸 사고였다는 점이었다. 또한 진로 개척시는 지뢰나 부비트랩에 의한 사전 대비가 필요했다는 점이다.
채명신은 즉각 오 중령 후임으로 사령부 작전장교로 근무 중인 김기택 소령을 임시 중령 계급을 부여 대대장으로 임명했다.
새로 임명된 대대장에 의해 작전은 계속되었다.
채명신은 11월 28일 낮 12시 경 백마사단장 이소동 소장과 함께 최명재 대령의 연대 지휘소에 도착하여 작전 상황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내용을 듣고 보니 작전과정 하나하나가 맹호사단이 실시한 맹호6호작전의 초기 상황과 흡사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채명신은 이자리에서 사단장을 비롯한 각급 지휘관에게 맹호6호작전의 전개 과정을 설명하면서 맹호6호작전에서 얻은 교훈 하나하나를 설명해 주었다. 또한 채명신은 이번 작전을 서둘지 않게 하면서 시일에 구애 받지 말고 샅샅이 탐색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에 제28연대는 작전 방식을 바꾸어 일시에 구애받지 않고 맹호6호작전의 방식대로 작전을 하기로 방향을 바꾸었다.
드디어 그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11월 29일.2대대 5중대 3소대가 혼바산 서북단 계곡 일대를 탐색 중 인기척이 엿보인 위장한 동굴입구를 발견하였다. 즉시 동굴 입구를 포위하고 특공조를 투입하면서 수류탄을 투척 후 깊숙히 진입 사격으로 제압하여 동굴 안 적을 모두 사살하였다.21명의 적 시체를 확인하고 소총 21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서 제1대대 1중대 또한 혼바산 북단에서 동굴에 은신 중인 적과 교전 7명을 사살하고 소총 4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두 경우를 보아 맹호6호작전에서의 푸캇산 동굴 수색 방식이 실효성이 있음을 확인하고 연대장은 예하 장병에게 시일에 구애받지 말고 동굴 수색에 역량을 집중하도록 다시 강조했다.
12월 1일에는 2대대 5중대가 동굴 탐색 중 기름칠을 해서 3정씩 포장하여 깊숙이 숨겨 둔 프랑스제 마우저 소총 72정을 찾아냈다. 적이 도주하면서 숨겨둔 것으로 추정했다. 같은 날 2대대 7중대 3소대도 동굴 탐색 중 두 곳에서 기름칠 해서 포장한 프랑스제 마우저 소총 84정을 찾아냈다.그런데 포장된 소총은 장기간 숨겨둔 탓인지 녹슬어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계속 탐색하니 포장 채 숨겨 둔 마우저 소총을 더 찾아냈다. 이를 분석한 결과 이소총은 프랑스군이 패주 당시 숨겨 둔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그후 확인되지는 않았다.
제28연대의 혼바산 탐색작전은 적 63명을 사살하고 7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작전에서 마우저 소총 285정과 기관총 4정을 비롯 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 작전은 백마사단이 파병 이래 의미 있는 첫 전투로 기록됨과 동시에 백마사단 장병들에게 전장에서 자신감을 갖게 한 동기부여 작전으로 평가되었다. 이 작전에서 아군 피해는 전사 3명,전상22명이었다.
백마사단이 도착한 이래 제28연대 2개 대대를 투입한 이 작전으로 혼바산 일대에서 발판을 잃은 베트콩은 1번도로 서측의 혹놈산,사레오산 차이산 등으로 피해 가서 이곳 지방 게릴라와 합세하여 투이호아 평야지대는 물론 1번도로까지 위협하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적은 때때로 반탄강 상류까지 침투하여 주민을 위협하는 등 횡포가 잦았다. 더구나 맹호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의 1번도로 상에는 단 한 번 도로상에 지뢰를 감히 매설을 못하고 있었는데 백마사단이 장악하고 있는 1번도로상에는 빈번히 지뢰를 설치하여 적지 않은 피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백마사단은 이에 마두1호작전을 전개하여 이 지역 평정에 나섰다.
1967년 1월 29일에 개시한 마두1호작전은 사실상 백마1호작전의 전 단계 작전이었다. 백마1호작전은 사단장 이소동 소장에 의해 지휘되는 최초의 작전이었다. 백마사단은 미 공군의 지원을 받아가며 예상 목표지역을 타격 후 탐색하는 방식을 취했다.
적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공중기동작전으로 일시에 2개 대대를 투입하는 대규모 기동작전이 전개되었다. 수백대의 헬기가 하늘을 까맣게 덮어가며 백마사단 장병을 실어나르는 굉장한 광경은 채명신을 위시한 모든 한국군 지휘관에게 각별한 감회에 젖게 하였다. 6.25당시 소총만으로 싸워야 했던 이들 지휘관의 눈에 비추어진 이 현대전의 파노라마는 한국군이 월남전에 참전한 보람과 명분을 느끼게 했다. 무전기 요청 하나만으로 B52중폭격기 편대가 날아와 융단폭격을 하는 그 입체작전은 아마 50년 후 지금의 한국군도 경험할 수 없는 장관이었다.
사단은 백마1호작전을 통하여 닌호아와 나트랑 지역의 한국군은 물론 미군과 월남 국민에게 위협을 가하던 베트콩과 월맨군 제188연대에게 커다란 타격을 가한 것은 중요한 의의가 있었다.왜냐하면 백마사단이 상륙한지 불과 3개월만에 사단급 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적에게 백마사단의 위엄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 적이 백마사단을 함부로 넘보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전투력 유지를 위해 보탬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공산군은 언제나 아군의 약점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들은 바로 그 약점을 꼬리잡아 타격하는 것을 기본전술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백마사단의 이번 작전으로 적393명을 사살하고 포로 31명 소화기 271정,중화기 33문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리고 전사19명, 전상 35명의 아군피해를 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 작전 기간 중 질병 등으로 인한 76명의 비 전투 손실을 냈다
첫댓글 채장군님의 국군 현대화에 대한 집념에 목이 매입니다. 맹호부대에 이여 백마사단까지 원남전으로 현대화되여 이북과 대치하고있는 우리로서는 절호의 기회였읍니다.미군이 우리에게 투자한만큼 열심히 사워주신 장병들에 경의를 표함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