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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바새계경 제5권
20. 정삼귀품(淨三歸品)
선생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와서 구걸하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먼저 가르쳐서 삼귀의를 받게 한 연후에 베풀라’고 하셨는데,
무슨 인연으로 삼귀의를 받으며, 어떤 것을 삼귀의라고 하나이까?”
“선남자여, 모든 괴로움을 부수고, 번뇌를 끊어 없애고 위없는 적멸(寂滅)의 즐거움을 받나니, 이 인연으로 삼귀의를 받느니라.
네가 물은 삼귀의란 어떤 것인가?
선남자여, 불ㆍ법ㆍ승을 말함이니라.
불(佛)이란, 능히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바른 해탈을 얻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법(法)이란 곧 이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진실한 해탈이며,
승(僧)이란 번뇌를 부수는 원인과 바른 해탈을 얻는 것이니라.
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곧 이것은 일귀(一歸)라’고 하지만, 그 뜻이 그렇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바른 법은 항상 있어서 분별함이 없건마는 여래가 나오시고 곧 분별함이 있나니, 그러므로 응당 따로 부처님께 귀의하는 것이니라.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바른 법은 항상 있어서 받는 자가 없지만, 부처님의 제자들이 능히 받기 때문에 응당 따로 승가에 귀의하는 것이니라.
바른 길로 해탈하는 것을 법이라 하고,
스승이 없이 홀로 깨달은 이를 부처라 하며,
능히 법대로 받는 자를 승가라 하나니,
만약 삼귀가 없다면 어떻게 네 가지 무너지지 않는 믿음이 있다고 하겠느냐?
삼귀를 얻는 자에게 혹 구족함과, 혹 구족하지 않음이 있나니,
어떤 것을 구족함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불ㆍ법ㆍ승에 귀의함이요.
구족하지 않음이란 이른바 여래가 법에 귀의하는 것이니라.
선남자여, 삼귀를 얻는 자는 구족하지 않을 수 없나니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의 계(戒)와 같으니라.
선남자여, 부처와 연각(緣覺)과 성문(聲聞)이 각각 다르니, 그러므로 삼보는 다르지 않을 수 없느니라.
어떻게 다른가?
발심할 때 다르고, 장엄할 때 다르며, 득도 할 때 달라서 성분(性分)이 각각 다르니, 그러므로 다르니라.
무슨 인연으로 부처가 곧 법이라고 말하는가?
능히 이 법을 알기 때문에 부처라고 이름하며, 분별하여 설함을 받으므로 승이라고 하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도 승의 수에 든다’고 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으니, 왜 그런가?
부처가 만약 승에 든다면 삼보와 삼귀의와 사불괴신(不壞信)이 없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여, 보살의 법이 다르고, 부처의 법이 다르니라.
보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후신(後身)이요,
두 번째는 수도(修道)니라.
후신에 귀의 하는 것을 법에 귀의한다고 하고,
수도에 귀의하는 것을 승에 귀의한다고 하느니라.
유위법에 모든 죄과가 많음을 보고 혼자서 수행하여 감로미(甘露味)를 얻으므로 부처라고 하며,
일체의 번뇌가 없는 무위법계(無爲法界)이므로 법이라고 하며,
금계를 수지하고 십이부경을 독송하고 해설하므로 승이라고 하느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묻기를,
‘여래가 멸도 하였는데 부처에 귀의한다는 것은 어떠한 귀의인가?’고 한다면,
선남자여, 이와 같은 귀의를 과거 모든 부처님 무학(無學)의 법에 귀의한다고 하느니라.
내가 먼저 제위(提謂) 장자에게 가르치기를,
‘너는 마땅히 미래세의 승에 귀의하라. 과거의 부처에 귀의함도 또한 이와 같다’고 한 것과 같으니라.
복전(福田)의 과보에 많고 적음이 있으므로 차별하여 셋으로 하느니라.
만약 부처님께는 세상에 계시거나 열반한 뒤에 공양하면 과보에 차별이 없으며 귀의를 받은 자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시면서 모든 제자를 위하여 모든 필요한 법을 세우셨으니, 부처님은 비록 과거에 계셨지만 범함이 있는 자는 역시 죄보를 얻느니라. 과거불에 귀의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마치 여래가 열반에 다다를 때, 모든 인간과 하늘이 열반을 위하여 많은 공양을 베풀면, 그때 여래는 아직 열반에 들지 않고 오히려 세상에 계시면서 멀리 미래세의 공양을 받는 것과 같으니라.
과거불에 귀의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나니, 비유하건대, 어떤 사람의 부모가 먼 데 있을 때, 혹 때로는 성내고 욕하고 하여 죄를 얻고, 혹 때로는 공경하고 찬탄하여 복을 얻음과 같이, 과거불에 귀의함도 역시 이와 같으니라.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세상에 있거나 열반한 뒤거나 공양을 베풀면, 베푼 자가 받는 복은 같아서 차별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선남자여, 남자거나 여자거나 만약 능히 세 번 삼귀의를 말하는 자는 우바새라고 이름하고 우바이라고 이름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이 비록 법에 귀의하지만 법은 부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나오는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먼저 부처님께 귀의할지니라.
신ㆍ구ㆍ의를 청정히 하고, 지심으로 염불하며, 두려움과 고뇌를 이미 여의었음을 염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마땅히 먼저 부처님께 귀의할지니라.
지혜로운 자는, 깊이 여래의 지혜와 해탈이 가장 뛰어나서, 능히 해탈의 원인을 말씀하며, 능히 위없는 고요한 자리를 말씀하며, 능히 생사 고뇌의 큰 바다를 말하고, 위의(威儀)가 정중하며, 삼업이 적정함을 관하니, 그러므로 먼저 부처님께 귀의하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깊이 생사의 법이 큰 괴로움의 덩어리인데, 위없는 바른 도로 능히 영원히 끊으며, 생사의 법인 갈애와 굶주림을 위없는 감로미(甘露味)로 능히 충족시키며, 생사의 법의 두렵고 험난함을 위없는 바른 법으로 능히 끊어 없애느니라.
생사는 잘못된 것이라, 사특하고 바르지 못하여서 항상 함이 없는 것을 항상 한 것으로 보고 내[我]가 없는 것을 내가 있는 것으로 보며 즐거움이 없는 것을 즐거움이 있는 것으로 보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깨끗한 것으로 보는 것을 위없는 바른 법으로 모두 능히 끊어 없애는 것을 관찰하나니, 이러한 인연으로 마땅히 법에 귀의하느니라.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관찰하지니라.
외도의 무리들은 부끄러움도 없고 염치도 없으며 법답게 사는 것이 아니어서, 비록 도행(道行)을 한다 하더라도 바른 도를 알지 못하고, 비록 해탈을 구하나 바른 요체를 얻지 못하며, 비록 세속의 작은 선법을 얻으나 아까워하고 인색하여 능히 전하여 설하지 못하며, 선행성(善行性)이 아닌 것에 선행의 생각을 하느니라.
불교의 승려는 고요한 마음으로 연민하는 마음이 많으며, 욕심이 적고 족함을 알아 법답게 살며, 바른길을 닦아서 바른 해탈을 얻으며, 얻고 나서는 다시 남을 위하여 설하나니, 그러므로 마땅히 다음으로 승에 귀의 할지니라.
만약 능히 이와 같은 삼보께 예배하고, 옴에 맞이하고 감에 배웅하며 존중 찬탄하고, 법답게 살며, 믿어서 의심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삼보께 공양하는 것이니라.
만약 어떤 사람이 능히 삼보께 귀의하고는 비록 계를 받지 않았더라도, 온갖 악을 끊고 모든 선(善)을 닦으며 비록 재가자라 하더라도 법답게 살면 이 또한 우바새라고 할 수 있느니라.
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먼저 불ㆍ법ㆍ승보에 귀의하지 않으면, 마땅히 알라, 이 사람은 계를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그 뜻이 그렇지 않으니라.
왜냐하면 내가 먼저,
‘잘 왔다. 비구야’ 하였는데,
이는 필경 삼보께 귀의함을 얻지 못하였어도 그 계율을 모두 구족하였음과 같으니라.
혹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만약 구족계를 받지 않으면 계를 얻지 못하며, 8계재법(戒齋法)도 마찬가지다’고 한다면,
그 뜻이 옳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만약 구족하게 받지 않으면 계를 얻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바새가 되려고 할 적에 어떻게 계를 얻겠는가?
실로 이 계를 얻으나, 다만 8계재법만 구족하지 못 하느니라.
만약 구족하게 받지 않으면 재(齋)라고는 할 수 없어도 선(善)하다고는 할 수 있느니라.
선남자여, 만약 능히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정결하게 하고 우바새계를 받으면 이것을 5음(陰)이라고 하나니,
무엇이 5음인가?
사견(邪見)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견을 말하지 않으며, 정견(正見)을 신봉하고 받아들이며, 정견을 설하며 바른 법을 수행하는 것, 이를 5음이라고 하느니라.
삼귀의를 받고 나서도 치업(痴業)을 지어서 외도의 법자재천의 말을 받아들이면, 이 인연으로 삼귀의를 잃느니라.
만약 사람의 마음이 소박하고 정직하여 인색함과 탐욕이 없고 항상 참괴(慚愧)심을 닦으며, 욕심이 적고 만족함을 알면 이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적정신(寂靜身)을 얻느니라.
만약 갖가지 업을 짓되, 즐거움을 받기 위하여 착한 일을 한다면, 장사를 하는 것과 같으니라. 그는 마음으로 능히 중생을 가엾이 여기지 못하나니, 이러한 사람은 삼귀의를 얻지 못하느니라.
만약 사람이 사택(舍宅)과 신명(身命)을 보호하기 위하여 모든 신들에게 제사하면, 이 사람은 귀의법을 잃었다고는 하지 않느니라.
만약 사람이 지극한 마음으로 그것이 능히 온갖 무서움을 구원한다고 믿고 외도에게 예배한다면 이 사람은 삼귀의법을 잃는 것이니라.
만약 모든 천신들이 일찍이 부처님의 공덕이 수승함을 보았다는 것을 듣고 나서 예배 공양한다면 법을 잃는 것이 아니니라.
혹 때로는 자재 천왕에게 예배하되 마땅히 세간의 모든 왕이나, 장자나, 귀인이나 연로한 어른이나 유덕한 이에게 예배하는 것과 같이 하면 이러한 사람도 역시 귀의의 법을 잃는 것이 아니니라.
비록 또 예배는 하되 설한 삿된 법은 삼가서 이를 수용하지 않고 하늘에 공양할 때도 마땅히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서 신명과 재물과 국토와 인민의 공포를 지키기 위하여서 할지니라.
설해진 사견(邪見)은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지혜로운 자는 마땅히 외도가 말하는 바를 보되, 온갖 것이 모두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고 하나,
만약 이것이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면, 왜 내가 이제 이 선업을 닦아야 하는가?
혹 또 말하기를,
‘물에 몸을 던지고, 불에 들어가며, 스스로 굶어서 목숨을 버리면 곧 고통을 여읠 수 있다고 하나, 이는 곧 고통의 원인인데 어떻게 고통을 멀리 여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일체 중생이 선과 악의 업을 지어서 이 업연으로 스스로 과보를 받는 것이다.’하느니라.
또 말하기를,
‘일체 만물과 시간과 장소는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고 하나, 이와 같은 삿된 말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어 현재에 업을 짓고 또한 과거에 지은 바 업의 과보를 받을 것인가?’
지혜로운 자는 분명히 이 업의 과보를 알거늘, 어떻게 시간과 장소를 자재천이 지은 것이라고 말하는가?
만약 시간과 장소의 인연으로 괴로움과 즐거움을 받는다면, 천하에는 같은 시간과 장소가 많이 있는데,
어떻게 또 한사람은 괴로움을 받고, 한 사람은 즐거움을 받으며,
한 사람은 남자이고, 한 사람은 여자일 수 있는가?
천신ㆍ아수라에게도 동시생과 동수생이 있는데,
혹 천신이 이기고 아수라가 지기도 하며, 아수라가 이기고 모든 천신이 지기도 하며,
또 모든 왕도 동시동수로서 함께 정치를 하여도,
한 사람은 나라를 잃고, 한 사람은 국토를 보전하는 경우가 있다.
또 외도들은 말하기를,
‘만약 좋지 않은 시기, 좋지 않은 장소가 나타날 때에는 마땅히 중생에게 가르쳐서 선법을 닦게 하여 막아내어야 한다’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해와 별을 어떻게 착한 일을 함으로써 없앨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인연으로 지혜로운 자가 어떻게 외도의 삿되고 잘못된 말을 받아들이겠는가?
선남자여, 일체 중생이 업행(業行)을 따르나니, 만약 정견을 닦으면 안락함을 받고, 사견을 닦는 자는 큰 고뇌를 받느니라.
선업을 닦기 때문에 크게 자재함을 얻고,
자재함을 얻고 나면 중생이 친근히 하며,
또 위하여 선업 인연을 설하면 선업 인연 때문에 안락함을 받을 수 있는 것이요,
해와 별로 말미암아서가 아니니라.
선남자여, 아사세왕(阿闍世王)과 제바달다(提婆達多)가 모두 악업을 지은 인연으로 지옥에 떨어진 것이요,
해와 별로 인하여 이 과보를 얻은 것이 아니니라.
울두남불(鬱頭藍弗)은 사견 때문에 미래에 대지옥 가운데 떨어지리라.
선남자여, 일체 선법(善法)은 하고자 하는 생각이 근본이니, 이 하고자하는 인연으로 삼보리와 해탈의 과보를 얻고 출가법(出家法)에 들어가서 큰 악업과 모든 존재의 업을 부수며 능히 계를 수지하고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 하느니라.
능히 일체를 버리어 구걸하는 자에게 주며,
능히 정성(定性)을 짓고 악한 과보를 부수며 대악죄를 멸하고 결정취(決定聚)를 얻으며,
세 가지 장애를 여의고 능히 잘 번뇌를 부수는 길을 닦느니라.
이 하고자하는 인연으로 능히 삼귀의를 받고, 삼귀의로 인하여 곧 능히 계를 받고나면 견도(見道)와 수도(修道)를 행하여 성문(聲聞)보다 뛰어나게 되느니라.
만약 사자나 호랑이나 이리 등 사나운 짐승들을 두려워하여 부처님께 귀의하여도 오히려 해탈함을 얻거늘 하물며 착한 마음을 내어 세속에서 나오기를 구하는 자가 해탈을 얻지 못하랴?
아나분저(阿那邠坻)는 집안에 명령하여 태중에 있는 아들도 모두 귀의를 받게 하였으나, 이 태중의 아들은 실은 성취하지는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법은 꼭 입으로 제가 말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록 성취는 못하지만 또한 능히 이를 보호하느니라.
선남자여, 모든 외도들은 말하기를,
‘일체 세간이 모두 자재천이 지은 바라’고 하고,
또 말하기를,
‘미래의 세상에 백겁을 지내고나면 마땅히 환(幻)이 있어 나온다’고 한다.
이른바 환이라는 것은 곧 부처인데 만약 자재천이 능히 부처를 만든다면 이 부처가 어떻게 능히 자재천에 귀의하는 뜻을 부수겠느냐?
만약 자재천이 부처는 만들지 못한다면 어떻게 일체가 모두 자재천이 만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외도들은 또 말하기를,
‘대범천왕(大梵天王)과 대자재천과 비유천왕(毘紐天王)이 모두 하나이다’라고 하기도 하고.
또 ‘낳은 곳은 각각 다르다’라고도 한다.
자재한 하늘이란 자재천이라고 이름하고, 상(常)이라고도 하며, 주(主)라고도 하고 유(有)라고도 하며, 율타(律陀)라고도 하고 시바(尸婆)라고도 하는데,
이 낱낱의 이름에 각각 다른 일이 있어, 해탈을 구하기도 하고 곧 해탈을 하기도 한다고 하나, 그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자재천이 능히 중생을 낳고 모든 존재를 만들었다면 선과 악의 업과 업의 과보도 지었을 것이고 탐ㆍ진ㆍ치로 얽매인 중생도 지었을 것이다.
또 말하기를,
‘중생이 해탈을 얻을 때 모두 몸 가운데로 들어가니 그러므로 해탈은 이것이 항상 함이 없는 법’이라고 하는데,
그 뜻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약 항상 함이 없다면 어떻게 해탈이라고 하겠는가?
바라문의 아들이 도리어 수명을 얻는 것과 같으니, 그러므로 자재천이라 이름 할 수 없느니라.
이 세 가지 천신이 또한 하나일 수 없으니, 왜 그런가?
아주나인(阿周那人)은 비축대천(毘紐大天)으로 해탈을 삼으니, 그렇기 때문에 또한 하나일 수 없느니라.
만약 해탈을 항상 함이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알라.
곧 환(幻)이니 부처를 환이라고는 이름하지 않느니라.
만약 분명히 바로 참나[眞我]를 보면 이것이 해탈이니라.
다시 말하기를,
‘미진(微塵)을 보는 이를 해탈이라’하느니라.
또 말하기를,
‘성의 차이[性異]와 아의 차이[我異]를 보면 이것이 해탈이라’고 한다면,
그 뜻은 그렇지 않으니,
왜냐하면 만약 능히 도를 닦아서 사성제를 보면 이 사람은 성품을 보고 나를 보게 되고,
만약 사람이 능히 삼귀의를 받는다면 이 사람은 능히 참으로 사제를 보게 되니,
이 삼귀의는 일체 무량한 착한 법과 내지 아누다라삼먁삼보리의 근본이니라.
보살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 번째는 재가보살이요,
두 번째는 출가보살인데,
출가보살은 청정한 삼귀의가 어렵지 않으나,
재가보살로서 청정함을 닦기란 어려우니라.
왜냐 하면 재가보살은 많은 악연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