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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문보살십주제구단결경 제7권
21. 승무상품(乘無相品)
[한 모양과 모양 없음]
최승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한 모양[一相]과 모양이 없음[無相]을 통달하여 알며,
다시 모양이 없음으로써 한 모양을 분별하나이까?
어떻게 보살은 청정한 마음으로써 애욕(愛欲)에 놀며 애욕에서부터 다시 청정한 데로 이르나이까?”
부처님께서 최승에게 말씀하셨다.
[도상 삼매, 모양 없는 청정한 마음]
“권도를 행하는[行權] 보살승(菩薩乘)은 모양 없는 청정한 마음으로 5도와 시방 세계를 돌아다니되,
혹은 욕계(欲界)나 형계(形界:色界)나 무형계(無形界:無色界)에 나느니라.
비록 그 세계에 처한다 하더라도 그 세계에 물들지 않고 선남자ㆍ선여인들과 함께 법의 즐거움[法樂]으로써 그들과 재미있게 즐기느니라.
다시 형계의 모든 천인(天人)들과 궁전에 같이 처하며,
혹은 범천(梵天)에 범천왕과 함께 있으며 미묘한 승(乘)의 모양 없는 법[無相法]을 말하며,
많은 범천의 대중에 있으면서 혹은 거닐기도 하고 혹은 때로 현성으로서 잠자코 있기도 하나니, 그 안에 있을 때는 홀로 높은 이가 되어서 미칠 수 있는 이가 없느니라.
또 최승아, 보살이 거기에 있을 때는 미묘하게 도의 가르침[道敎]을 나타내어 점차로 모든 하늘들을 항복받아 참된 이치[眞諦]를 행하게 하고,
모든 범천들이 청정하다고 헤아리는 마음을 제거시키고 그 형계에 머무르며,
혹은 백 겁, 나아가 백천 겁을 지나고 다시 형계에서 욕계에 내려와 태어나 안으로는 언제나 고요함을 좋아하고 혼자 산이나 숲에 거처하며, 비록 인간 안에 처한다 하더라도 뜻은 언제나 선정(禪定)에 있느니라.
혹은 때로 보살이 집에 살고 있으면 처자(妻子)가 스스로 따르기도 하고,
또 중생들과 같이 세간의 사업을 하는 것을 나타내기도 하며,
높은 데 있으면 낮음을 나타내고 낮은 데 있으면 높음을 나타내되,
중생들의 마음과 돌아다니고 앉고 일어나고 말하고 가고 오고 하는 거동을 관찰하며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또한 스스로 헐뜯지도 않나니, 왜냐하면 그가 본말이 청정함을 통달했기 때문이니라.
또 보살은 다시 백천 정(定)의 정수삼매에 노닐되 삼매의 위신(威神)으로써 다시 삼천대천세계를 관하고 몸의 상호와 광명과 신족을 나타내며,
권혜(權慧)의 방편으로 노닐면서 교화함이 자유자재하며 마음이 응당 청정해야 비로소 모양이 없다[無相]고 하느니라.
[모양이 없는 도]
보살마하살로서 이 선정과 상응하여야 비로소 승(乘)에서 모양이 없는 도(道)를 구할 수 있느니라.
모양[相]은 생기는 것을 보지 않고 모양은 없는 것도 보지 않으며,
생길 때는 없는 것으로써 익히고 도에도 또한 모양이 있지 않으며,
성인은 도가 없는 모양이며, 또한 모양을 구하지도 않고 또한 모양이 없는 것도 구하지 않으며,
도의 모양과 모양이 없는 것을 분명히 통달하여 일어날 적에는 곧 일어나고 소멸할 적에는 곧 소멸하며 도의 모양에 나아감이 있으며,
모양의 행(行)이 소멸하지 않고 있는 모양[有相]의 행이 소멸하여야 이것을 바로 보살의 도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또한 모양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도의 모양을 삼느니라.
왜냐하면 도(道)는 스스로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모양이 없음을 구하는 것으로 도의 모양을 삼지도 않고,
합하거나 흩어지는 것으로써 도의 모양이라고 보지도 않으며,
12인연의 근본과 아(我)ㆍ인(人)ㆍ수명(壽命)이 치(癡)로부터 행(行)이 있으나 도의 모양이 있다고 보지 않고,
또한 다시 아ㆍ인ㆍ수명이 없는 것도 치로부터 행이 있고 도의 모양이 있다고도 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도는 스스로 모양이 없고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으며,
생길 바를 원하나 도의 모양을 바라지도 않으며,
4대는 이것이 몸이라거나 몸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항상 있다거나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공이라거나 공이 아니라거나, 이것은 나라거나 내가 아니라거나, 취하고 버리고 합하고 흩어지는 것이 모두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으레 그와 같아야 하고 으레 그러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또한 다르지도 않고 다르지 않은 것도 아니며, 또한 다른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다르지 않은 것도 보지 않아야 비로소 도의 모양과 모양이 없는 것에 상응하여,
선의 몸[善身]ㆍ불선의 몸[不善身]ㆍ유기의 몸[記身]ㆍ무기의 몸[無記身]ㆍ유루의 몸[漏身]ㆍ무루의 몸[無漏身]ㆍ유위의 몸[有爲身]ㆍ무위의 몸[無爲身]ㆍ성공의 몸[成身]ㆍ패망의 몸[敗身]과 합하고 흩어지고 취하고 버리는 것이 모양과 도의 모양으로써 하면,
모두 다 공(空)하여 있는 바가 없는 것이 마치 꿈과 같고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고 따뜻할 때 생기는 아지랑이와 같다고 분별하느니라.
또한 몸은 공하지도 않고 또한 몸은 공함이 없지도 않으며,
또한 몸은 모양[相]이 있지도 않고 또한 몸은 모양이 없지도 않으며,
또한 몸은 원(願)이 있지도 않고 또한 몸은 원이 없지도 않으며,
몸이 아닌[不身] 것은 또한 욕심이 없는[無欲] 것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몸이 아닌 것은 또한 12인연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12인연도 또한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18계(界)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법성도 그러하여 역시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癡)에서 애(愛)가 생기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모든 법의 명색(名色)과 6입(入)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도의 모양과 상응하는 것]
또 보살마하살은 다시 멸진정의(滅盡定意)의 부동(不動)삼매에 들어가고,
또는 도의 모양[道相]은 18본지(本持)와 상응하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법성은 12인연과 상응하지 않으나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한없고 수없고 불가사의한 진로(塵勞)의 때(垢)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법성의 모든 정(情)도 12인연과 상응하지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노사(老死)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없는 법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작용이 있고[有數] 작용이 없는[無數] 것도 도의 모양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에는 둘이 없는지라 작용이 있고 작용이 없는 것과는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제일의(第一義)에서는 세속이 있고[有俗] 세속이 없는[無俗] 것과 유루ㆍ무루와 유위ㆍ무위와 유기ㆍ무기와 선법(善法)ㆍ악법(惡法)과 곱고 추한[好醜] 것이 둘이 아닌 행[不二行]이고 둘이 아닌 행도 아니며,
무너진다는 뜻[壞敗意]이 없으나 도의 모양을 구하느니라.
도의 모양을 구한다 함은 제일의와는 유속ㆍ무속ㆍ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ㆍ유기ㆍ무기ㆍ선법ㆍ악법ㆍ호ㆍ추가 함께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닌 것이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모양이 없는[無相] 모양에서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고 모양이 없지 않는 것도 아니며,
이 도(道)는 모양이 없는지라 또한 모양을 보지도 않나니,
이것이 바로 도의 모양으로 모양이 없는 것에 상응하며,
모양이 없는 모양은 법이 스스로 텅 비고 고요하여 마치 허공이 모양이 없는 것과 같되 모양이 있지 않는 것이 아니니,
마땅히 이런 모양에 상응해야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로서 이 도의 모양인 정의[道相定意]를 얻은 이는 모든 법계에서 다 자재할 수 있고,
이 정(定)에 든 뒤 자기 몸의 낱낱 털구멍을 분별하되 한이 없고 수량이 없고 불가사의한 모든 부처님 세계가 다 눈앞에 나타나며,
이미 세계가 나타나면 다시 좌우에서 모신 제자들이 나타나므로 보살은 간절히 우러러 법을 듣고 법을 듣되 만족해 함이 없으며,
그 대중으로 하여금 널리 삼천대천 국토에 계신 여래의 금빛 몸에서 나온 한량없는 광명과 그 낱낱의 광명에서 수없고 한량없는 국토를 보게 하며,
그 부처님 세계에서 몸의 색상(色相)을 나타내어 그 대중에 있으면서 큰 법을 드날려 듣는 이들이 견고하여 금강정의삼매(金剛定意三昧)를 버리지 않게 하느니라.
다시 그 세계에서 백천억 겁 동안 돌아다니며 교화하고 권지(權智)를 나타내 보이되 마치 권지가 없는 것과 같고 권지로서 교화해야 할 이들도 보지 않으며,
비록 그 세계에 처한다 하더라도 마음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나 세차게 타는 불길이나 거울 속의 형상과 같아, 마음으로는,
‘겁수가 길고 영원하므로 그것을 찾아보아도 근원이 없으며, 그 중간에 게으른 뜻을 내었다’라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또한 다시,
‘중생이 교화되기 쉬워서 나는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교화하고 돌아다녔는데, 두루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모든 부처님 세계에서 억천만 겁 동안 모든 부처님께서 교화한 이들보다 나는 특히 훌륭하였다’라고 하는 생각도 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로서 도성(道性)의 모양이 없는 정[無相定]에 들어간 이는 낱낱이 몸의 털구멍을 분별하고 돌아다니며 교화하되 역시 고달파하거나 싫증을 내지 않으며,
교화를 받음이 없는 이도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에 크지도 않고 은근하면서 그 세계가 청정해지며,
그 여래의 큰 법회의 처소에 나아가도 장점ㆍ단점이나 부정한 생각[不淨念]을 일으킨 이를 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이 한량없는 법계에 노닐되 마음과 뜻을 항복 받고 모든 진로(塵勞)를 참고 일찍이 없던 일을 행하였으며,
방소 없이 행을 깨우쳐 정진하는 행을 세우고 모두 다 분별하였기 때문이니라.
부사의정(不思議定)과 무도상정(無道相定)과 진제상정(眞際相定)은 하나요 둘이 아니며 또한 차별도 없나니,
그 중생으로 하여금 도의 모양을 분별하되,
세속이 있고 세속이 없는 것과, 유루ㆍ무루ㆍ유위ㆍ무위ㆍ유기ㆍ무기ㆍ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는 데서, 도의 모양과 상응함을 보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도 세속이 있고 세속이 없는 것과, 유루ㆍ무루ㆍ유기ㆍ무기ㆍ욕심이 있고 욕심이 없는 것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도의 모양은 12인연과 상응하지도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癡)를 반연[緣]하여 애(愛)와 생ㆍ노ㆍ병ㆍ사가 있되 역시 상응하지 않으며,
12인연도 도(道)와 상응하지 않되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며,
치를 반연하여 애와 생ㆍ노ㆍ병ㆍ사가 있는 것도 도와는 상응하지 않되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느니라. 최승아, 보살마하살로서 이 도상정의(道相定意)를 얻은 이는 상응함을 보지도 않고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도상정의에서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는 것이니라.
무상정(無相定)에서도 역시 상응함을 보지 않고 또한 상응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상응하되 상응한 바가 없음이며,
아라한이나 벽지불로서 미치거나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니라.
왜냐하면 그들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모든 부처님 세존은 불가사의하여 널리 온갖 시방 세계에 들어가서 모든 상호와 위의와 예절과 18가지 변화(變化)와 사자분신무외삼매(師子奮迅無畏三昧)를 나타내시느니라.
이때에 최승보살마하살은 여래의 도상정의를 완전히 갖추고 금강서원정의(金剛誓願定意)를 버리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보다 더 뛰어나게 제도하되 제도하는 바가 없으며,
또한 제도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제도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았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마음으로 한 생각 동안에 삼매에서 일어나,
시방 세계에서 고통과 액난을 당하는 중생을 버리지 않고 곧장 그들에게로 가서,
네 가지 일[事]인 의복ㆍ음식ㆍ코끼리ㆍ말ㆍ7보[珍]ㆍ평상ㆍ침구와 병을 치료하는 의약을 공양하게 하고 권혜(權慧)로써 온갖 것들을 다루되, 모두 다 중생만을 위하고 자기 자신은 위하지 않으며,
한 부처님 국토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 교화하고 돌아다니면서 바른 법을 드날리되 또한 만족해 함이 없고,
모든 부처님 국토에 들어가서 그 곳의 중생으로 하여금 다 교화를 받게 하되 깨달아 아는[覺知] 이가 없게 하며,
불사(佛事)를 왕성하게 일으키고 온갖 지혜를 나타내며 마음에 두루 접할 때면 생각나는 즉시 그에게로 가느니라.
[도상정의에 들어가면]
보살마하살이 이 도상정의에 들어가면,
널리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헤아릴 수 없는 세계의 모든 부처님 세계에 살고 있는 중생들의 마음ㆍ뜻ㆍ식 안으로 들어가서 생각하고 있는 바를 관찰하여 전에 지은 행[宿行] 때문에,
이 사람은 지옥[泥鯖]으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아귀로 나아가며, 이 사람은 축생으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천도(天道)로 나아가고, 이 사람은 인도(人道)로 나아간다는 것을 분별하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에 모두 다 중생들이 나아갈 바를 능히 분별하며,
혹은 어떤 중생은 선도(善道)를 수행하여 도상정(道相定)에 상응하나니,
역시 그 중생은 소승의 마음이나 벽지불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이 있음을 아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널리 모든 부처님 세계에 노닐되, 모든 부처님 세존을 예배하고 받들고 섬기며, 모든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하고, 온갖 중생들이 생각하는 바를 고루 원만하게 하며,
혹은 부처님 국토에 있을 적에 간탐(慳貪)하는 중생들을 보면 곧 스스로 나타내 보여 크게 보시하느니라.
그 국토에서 큰 보시의 깃대[幢]를 세우고는 청정한 범음(梵音)으로써 온갖 중생들에게 말하였다.
‘여러 어진 이들이여, 알아야 하오. 나의 이름은 온갖 것을 보시하면서도 보답을 구함이 없는 이[一切施無求報者]라 합니다.’
만일 의복ㆍ음식ㆍ병을 치료하는 의약과 평상ㆍ침구 등이며 나라ㆍ재물ㆍ자식ㆍ아들ㆍ코끼리ㆍ말ㆍ7보 등에 모자람이 있으면 보살은 보시하되 처음 뜻을 내면서부터 부처님이 되기에 이르기까지 세 가지 보시하지 않는 것[三不施]을 제외하고 그 밖의 것은 다 보시하나니,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첫째 아버지요,
둘째 어머니이며,
셋째 사장(師長)이니라.
이것이 바로 근(根)을 세운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국토에 있어 보시를 행하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선권방편으로써 다시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 국토에 노닐면서 거기에 살고 있는 중생들로서 게으름을 피우는 이를 보면,
몸으로 계율을 지니는 것을 나타내고 18가지 법(法)을 실천하며,
혹은 나무 아래나 들판이나 무덤 사이나 높은 산이나 깊은 낭떠러지나 숲속이나 굴에 숨어서 은근하게 계율을 받들어 온갖 법을 범하지 않느니라.
인간에 노닐 적에는 위의와 예절을 지키며,
들고 나는 거동과 다니거나 앉거나 간에 마음은 언제나 진정으로 측은히 여기며,
처음부터 계율을 여의지 않고 금계는 본래 있는 바가 없다고 분명하게 통달하느니라.
나는 것[生者]은 모두 다하고 온갖 것은 덧없으며 나의 몸과 그는 하나요 다르지 않고 마지막으로 청정한 데에 이르며,
지(地)로부터 지에 이르고 이에 10지(地)에 이르렀으나 10지의 장애를 보지도 않고 10지의 장애 없는 데로 건너가는 것이,
마치 나는 새가 허공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 것과 같으며,
만물은 모두가 공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물건도 또한 물건이 아니요, 물건이 아닌 것도 또한 물건이 아닌 줄 아는 것이니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세계를 노닐되, 큰 서원과 견고한 마음을 버리지 않고, 그 게으른 중생을 섭수하여 편안히 있으면서 도상정수(道相正受)에 들게 하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권도의 지혜를 지니고 다시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노닐되,
그곳의 중생들로서 게으름이 있는 이가 언제나 성을 내고 처음부터 기뻐함이 없는 것을 보면 보살은 그에 대하여 몸소 인욕을 나타내 보이며,
어떤 사람이 욕설을 퍼부어도 잠자코 갚지 않고, 설령 다시 어떤 사람이 그의 손발을 자르거나 그의 몸을 헐어뜨리고 욕되게 하여도 마음이 변하거나 바뀌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되 마음을 지니는 것이 마치 땅과 같고,
‘이 몸은 4대로 합하여 이루어진 것이라 정신이 떠나면 곧 흩어질텐데, 무슨 귀히 여길 만한 것이 있겠는가?’라고 관하여 환히 통달하느니라.
지혜로운 이는 하나도 탐할 만한 것이 없다고 분별하는 것이 또한 마치 소를 도살하는[屠牛] 집에서 소를 네 갈래로 찢어서 나누어 놓으면 근본이나 가지가 모두 있는 바가 없는 줄 분명히 아는 것처럼,
보살 대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몸에는 주인이 없고 또한 있는 바가 없으며 어느 것이 이 몸이고 몸은 또 누구의 소유인가?
그리하여 이름이나 모양도 다 진실이 아닌 줄 아는 것이니라.
혹은 어떤 보살이 선정으로 인하여 인욕을 행하되 너른 들판에 사람이 없는 곳이나 나무 아래 단정히 앉아 한 마음으로 사유할 적에,
길 가던 사람이나 소 치는 사람이나 땔나무와 풀을 짊어지고 가는 이들이 그 곁을 지나다가, 혹은 풀 가지로 그의 코를 찌르거나, 혹은 그의 귀를 찌르거나 해도,
보살은 곧 깨닫고 그를 눈여겨 자세히 보고 나서 다시 그 눈을 감고 마음과 뜻을 고요히 하며 뜻에 어지러운 생각이 없고 또한 다른 생각도 하지 않았으며,
혹은 길가던 사람이 기왓조각이나 돌로써 때리거나 던져서 머리나 눈이 깨지고 몸이 다쳤다 하여도,
보살의 심식(心識)은 역시 움직이거나 변하지도 않고 산란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선정으로 인하여 인욕을 행하고 중생을 접하고 제도하되 헤아리거나 기억하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또 보살마하살은 불가사의한 힘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가서 노닐 적에,
그곳 중생들이 항상 게으름을 품고 있는 것을 보면 보살은 거기에서 몸소 정진을 나타내 보이되, 중생을 섭취(攝取)하여 무위(無爲)에 안전하게 있게 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한 중생을 위해서도 백천 겁을 경과하도록 마음에 게으르지도 않고 또한 고달파하거나 싫어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법계는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는 줄 통달하여 알고 여래의 도(道)로써 제도하고 해탈시키기 때문이니라.
비록 중생을 제도한다 하더라도 역시 제도하는 것을 보지도 않고 또한 제도하지 않는 것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은근히 정진하여 마음이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고 또한 딴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며,
그 중간에 모든 고뇌를 받거나, 혹은 그 세계 국토가 겁소(劫燒)로 불이 일어나서 불길이 범천(梵天)에까지 이르거나, 혹은 큰 불이 나서 역시 범천에까지 이르거나, 혹은 바람이 일어나서 모든 세계의 국토가 티끌이나 안개처럼 부수어질 적에,
보살은 그 곳에 있으면서 중생들을 다 섭취하여 무위에 안전하게 있게 하여 동요하거나 어지럽지 않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노닐 적에 정진하되 궐(闕)하지 않는 것이니라.
또 보살마하살이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가 노닐 적에,
그곳 중생들이 마음이 산란하여 안정하지 못한 것을 보면 보살은 그곳에서 좌선하는 것을 나타내 보이되,
혹은 촌락에 앉아 있기도 하고, 혹은 나무 사이에 앉아 있기도 하며, 혹은 산 속 숲이나 깊은 굴 속에 앉아 있으면서,
백천 겁을 지나도 마음에 딴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인도하고 섭취하여 마음이 산란하지 않게 하느니라.
[무형상정]
이때에 보살은 길 옆에 있으면서 정(定)에 들어가나니, 그 삼매의 이름은 무형상정(無形想定)이니라.
이 정에 들어가면 혹은 한 겁을 지나기도 하고 백천 겁에 이르기까지 하늘과 땅이 녹아 문드러져서 산이나 하천이나 수목이 모두 다 흩어져 떨어지고, 바닷물이나 샘의 근원이며 강물이 빠르게 흘러 버려 모두 다 바짝 말라버렸다 하여도,
선정에 든 보살은 그 안에서 좌선하고 있으되, 마음이 변하거나 동요하지도 않고 또한 무너지지도 않느니라.
혹은 소 치는 사람이나 땔나무를 지고 풀을 지고 가던 사람이 그의 곁을 지나다가, 혹은 나뭇가지로 코를 찌르거나, 혹은 귓구멍을 찌르거나, 혹은 곧장 눈을 벌려 보게 하거나, 혹은 입을 벌려 이가 보이게 하거나, 혹은 머리칼을 거머쥐고 목을 뽑아내려 한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가 없으며,
혹은 날카로운 칼로써 보살의 손톱을 베려 하여도 그렇게 할 수 있는 이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두 다 이것은 보살의 정의 힘[定力]이라 무너뜨릴 수 없기 때문이며,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다시 위신(威神)을 더하여 주어 이 보살로 하여금 고뇌를 만나지 않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세계에 노닐되,
그곳에 사는 이들의 산란한 뜻을 보고 곧 스스로 선정에 들어가 겁(劫)으로부터 겁에 이르기까지 고달파하거나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선권방편]
또 보살마하살이 다시 선권방편으로써 항하의 모래 수만큼 많은 국토에 노닐 적에,
중생으로서 어리석고 미혹된 이가 있는 것을 보면,
보살은 그들에게 지혜를 나타내 보이되 그 중생들을 위하여 의취(義趣)를 분별하고,
삼세와 현재의 일을 사유하되 차례로 모든 지(地)를 초월하며,
지로부터 지 없는[無地] 데에 이르고 지 없는 데서부터 지(地)에 이르는 것이 마치 날으는 새가 부딪치거나 걸림이 없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형상이 아닌[非像]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며,
물건 아닌[非物] 데서 물건이 되고 물건에서 물건이 아닌 것이 되느니라.
어떻게 형상이 아닌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는가?
이에 보살은 허공제(虛空際)의 정의정수(定意正受)에 들어가서, 다른 지방 세계의 약 열매[藥果]나 수목이나 산하(山河)나 석벽(石壁)이 다 공(空)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그 공도 또한 공하여 없다[空無]고 관하나니,
보살마하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세계가 모두 공과 같아 평등한 것이니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형상이 아닌 데서 형상이 되고 형상에서 형상이 아닌 것이 되며,
물건이 아닌 데서 물건이 되는 것도 역시 그와 같다 하느니라.
다시 온갖 지혜[衆智]의 자재정의(自在定意)에 들어가서 중생들에게 나타내 보여 어리석고 어두운 생각[愚闇想]을 제거하며,
모두 다 편안히 처하여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에 노닐되,
그곳의 중생들이 어리석고 미혹된 것을 보면 그들을 위하여 지혜의 광명을 나타내어 영원히 어두움을 없게 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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