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 2024년 11월 1일(금))
장소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로 180
사릉(思陵) : 조선 제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의 능 (단릉)
찾아가는길 : 경의중앙선 도농역 2번출구에서 남양주 방향으로 가는 중앙버스차로에서 23번 버스를타고 사릉-송종2리-적성골입구에서 하차하여 300미터정도 직진하면됩니다.(사릉입구에서 하차하면 안됩니다)
▷ 사릉(思陵) 이야기
사릉은 조선 6대 단종의 왕비 정순왕후 송씨의 능이다. 1521년(중종 16) 정순왕후가 노산군부인(魯山君夫人)의 신분으로 세상을 떠나자, 대군부인의 예로 장례를 치렀다. 묘는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시댁 해주 정씨의 집안 묘역인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고, 해주 정씨 집안에서 제사도 지내주었다. 1698년(숙종 24) 정순왕후로 복위되면서 능의 이름을 사릉이라 하고 묘를 왕릉 제도에 맞게 다시 조성하였다. 이때 사릉 주변에 있던 해주 정씨 묘역을 옮기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숙종의 명으로 묘들을 그대로 두어 현재까지 남아있게 되었다.
사릉의 능침 봉분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생략하였고, 봉분 주변에는 문석인, 석마, 장명등, 석상(혼유석), 망주석을 세웠고, 석양과 석호는 1쌍씩 배치하였다. 능침 아래에는 정자각, 비각, 수라간, 수복방, 홍살문 등이 있고, 비각 안에는 ‘조선국 정순왕후 사릉(朝鮮國 定順王后 思陵)’이라고 새겨진 표석이 있다.
▷ 정순왕후(定順王后) 이야기
정순왕후 송씨(재세 : 1440년 음력 3월 12일 ~ 1521년 음력 6월 4일)는 본관이 여산인 여량부원군 송현수와 여흥부부인 민씨의 딸로 1440년(세종 22) 전북 정읍 태인(현 정읍시)에서 태어났다. 1454년(단종 2)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다음 해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남겨주고 상왕이 되자 의덕왕대비(懿德王大妃)가 되었다.
그러나 1456년(세조 2)부터 계속해서 단종복위운동이 일어나면서 사육신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제거되자 1457년(세조 3) 단종은 노산군으로 신분이 낮아져 영월로 유배되었고, 정순왕후도 군부인으로 신분이 낮아져 현재의 동대문 밖 정업원에서 생활하였다. 정업원 뒤쪽 산봉우리(동망봉)에 올라 영월을 바라보며 비통한 마음으로 단종을 그리워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냈다. 이후 1521년(중종 16) 82세로 세상을 떠났고, 1698년(숙종 24) 단종이 왕으로 신분이 회복되자 정순왕후도 왕비의 신분을 회복하였고, 시호(諡號)를 정순왕후라 정한 후 종묘에 신주를 모셨다.
정순왕후는 15세에 왕비가 되었다가 18세에 단종과 이별하고 평생 혼자 살았던 비운의 왕비인데, 정순왕후와 관련한 여러 일화가 전해진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서 세상을 떠나자, 이 소식을 들은 정순왕후는 아침저녁으로 산봉우리에 올라 단종의 유배지인 영월을 향해 통곡을 했는데, 곡소리가 산 아랫마을까지 들렸으며 온 마을 여인들이 땅을 한 번 치고 가슴을 한 번 치는 동정곡을 했다고 전한다. 그 뒤부터 이 봉우리는 왕후가 동쪽을 바라보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하여 동망봉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한경지략』에 의하면 영도교 부근에 부녀자들만 드나드는 금남의 채소시장이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정순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 때마다 정순왕후에게 채소를 가져다주었는데, 이를 궁에서 막자 정순왕후가 거처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장을 열어 주변을 혼잡하게 하고, 계속해서 몰래 채소를 전해주려는 여인들의 꾀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주) 조선왕릉 누리집 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