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요경 제15권
14. 이양품 ②
1
파초는 그 열매가 자랄 수 없고
대와 갈대 열매도 그와 같으며
거허(駏驉)는 새끼를 배서 죽고
선비는 탐욕으로 자신의 몸을 망친다.
“파초는 그 열매가 자랄 수 없고”란 무슨 뜻인가?
껍질과 껍질이 서로 싸여 있고 잎과 잎이 서로 잇달아 있어서 그 열매를 구하려고 하여도 끝내 얻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그 나무는 항상 그 뿌리에 하나의 싹이 나면 나무는 곧 죽고 만다. 대와 갈대도 그와 같다.
그러므로 “파초는 그 열매가 자랄 수 없고 대와 갈대 열매도 그와 같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선비는 탐욕으로 자신의 몸을 망친다”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선비란 용맹스런 대장으로서 능히 바깥의 도적을 물리치고 안으로는 간사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니, 그런 사람이라야 대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대장도 그 생각이 여러 사람의 생각보다 뛰어나지 못하면, 탐욕에 의해 적진에 깊이 들어가서 빠져 나오지 못하고 거기서 죽고 만다.
그런데 혹 어떤 사람은 속으로는 진실로 겁이 많고 약하면서 겉으로는 용기 있고 날랜 체하다가 싸움터에 이르러서는 적을 보고 곧 두려워한다. 그러면서도 상을 받을 때에는 우두머리에 앉기를 생각한다. 저 조달 비구도 그와 같아서 남의 믿음의 보시를 받되 날마다 5백 가마솥의 밥을 먹으면서 스스로 용기 있고 민첩하다고 일컫다가, 온갖 번뇌의 적들과 싸울 때에는 도리어 그 화(禍)를 부른다.
그러므로 “선비는 탐욕으로 자신의 몸을 망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허는 새끼를 배서 죽고”란 무슨 뜻인가?
마치 저 거허와 같아서, 그 정(情)을 깊고 견고히 하기 위해 교미하다가 화를 자초하여 스스로도 죽고 또 자신의 새끼까지 죽이고 마는 것이다. 스스로도 편안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남을 편안하게 하겠는가?
저 조달 비구는 그 이익으로 말미암아 몸이 허물어지고 목숨이 끝난 뒤에는 아비(阿鼻)지옥에 떨어졌으니, 그것이 이른바 스스로 죄에 빠졌다는 것이다.
‘남까지 빠뜨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저 아사세 태자로 하여금 보시하게 한 재물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지만 그 과보나 복을 얻게 하지 못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남까지 빠뜨린다는 것’이니, 두 가지 죄가 모였기 때문에 몸을 망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거허는 새끼를 배서 죽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
이와 같이 탐욕에는 이익이 없으니
그것은 무지에서 온 것임을 알라.
어리석은 자가 이로써 어진 이를 해치고
그 몸은 조각 나 땅에 뒹군다.
“이와 같이 탐욕에는 이익이 없으니”란 무슨 뜻인가?
조달 비구는 신통을 배웠기 때문에 스스로 화를 자초하였다. 만일 신통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이미 이익을 탐하였기 때문에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탐욕에는 이익이 없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무지에서 온 것임을 알라”란 무슨 뜻인가?
대개 범부들은 그 뜻이 견고하지 못하여, 혹은 바른 길에서 삿된 길로 들어가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남의 믿음의 보시를 얻으면 스스로 기뻐하고 경사스럽게 여기면서, 뒷날에 받을 과보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무지에서 온 것임을 알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어리석은 자가 이로써 어진 이를 해치고’란 무슨 뜻인가?
모든 선한 법은 다 어진 이가 익혀야 할 것이지 어리석은 자가 익혀야 할 것이아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이로써 어진 이를 해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몸은 조각 나 땅에 뒹군다”란 무슨 뜻인가?
저 조달 비구는 드나드는 숨길을 밝게 알고 더럽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정법(頂法)에까지 이르렀지만 또한 그 신통으로 이익에 탐착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죄에 빠진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몸은 조각 나 땅에 뒹군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3
어리석은 사람은 이익에 탐착하고
항상 명예롭게 되기를 구하며
집에서는 질투를 일으키고
언제나 남의 공양을 받기를 원한다.
“어리석은 사람은 이익에 탐착하고”란 무슨 뜻인가?
그는 선한 법을 밝게 알지 못하면서 안으로는 질투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남의 공양을 구하되, 사부(四部) 대중들에게 공경받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사람은 이익에 탐착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항상 명예롭게 되기를 구하며”란 무슨 뜻인가?
그는 밤낮으로 국왕과 대신과 1억 명의 거사들에게 문안을 드려서 그들을 붙들고 세력 있는 자에게 의지하여 그 명예를 탐한다. 그들의 눈치를 살펴 따라다니면서 맞추어 주고, 재빨리 기쁘게 하여 줌으로써 큰 이익을 얻으려고 한다.
때로는 대중들 속에서 갖가지 거짓말로 자신의 지식을 드러내어 홀로 존귀하기를 바라고 다른 사람은 비천하다고 말하며, 자기는 마음으로 의복ㆍ음식ㆍ침구ㆍ약품 따위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은 그런 이익을 얻지 못하게 한다.
저 조달 비구가 외우는 경전은 6만 마리 코끼리로도 다 실을 수 없었고, 12년 동안 항상 바위틈이나 큰 늪이나 쓸쓸한 산 속에 있으면서, 마치 길상병(吉祥甁)을 간수하듯이 계율을 굳게 지녔지만 그것은 다 이익을 탐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가 지은 공덕은 모두 분노의 불길에 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명예롭게 되기를 구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집에서는 질투를 일으키고”란 무슨 뜻인가?
집에 있는 어떤 거사가 가정의 번뇌를 스스로 즐기고 늘 비구를 싫어하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계율을 지니고 청정하다고 하는 사람을 보고 싶어하지 않는다. 혹 범행이 청정한 사람이 우리집에 오더라도 하룻밤이나 하루 낮도 쉬게 하지 않고 모두 그냥 돌려보낼 것이다.’
그는 다시 생각하였다.
‘혹 집에 머무르게 되더라도 이로움이 보잘것없으리라.’
그러므로 “집에서는 질투를 일으키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언제나 남의 공양을 받기를 원한다”란 무슨 뜻인가?
저 수행자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도에 머물러 있고 그 행이 남들보다 뛰어나다. 그러므로 저 날짐승 따위의 형상 있는 무리들로 하여금 날마다 내게 와서 의복ㆍ음식ㆍ침구ㆍ약품 등을 공양하게 하고 다른 사람은 그런 이익을 얻지 못하게 하리라.’
그래서 그들은 만일 다른 사람이 이익을 얻는 것을 보면, 마치 자신의 보물 창고를 잃어버린 듯 걷잡을 수 없이 질투를 낸다.
그러므로 “언제나 남의 공양을 받기를 원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4
이러한 이익에 의지하지 말며
집에 있더라도 죄를 버려라.
이익을 보는 것은 지극한 뜻이 아니니
그것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이러한 이익에 의지하지 말라”는 무슨 뜻인가?
저 수행하는 사람은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욕심이 적어 만족할 줄을 알며, 그 뜻이 견고하다. 또한 언제나 한적한 곳을 즐겨 하며, 이 몸에 가득 찬 더러움을 관찰하고 생각하니, 그 사이사이에 좋은 생각이 일어난다. 무릇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이익에 탐착하게 되면 스스로 게으름만 늘어나 차츰 죄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익에 의지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집에 있더라도 죄를 버려라”란 무슨 뜻인가?
혹 국왕이나 장자나 1억 명의 거사나, 비구ㆍ비구니ㆍ사미(沙彌)ㆍ사미니(沙彌尼)로 있으면서 자신이 어떠 어떠한 집에 있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려 하지 않으며, 논설과 신덕(神德)과 계행을 완전히 갖추려고 한다.
그러므로 “집에 있더라도 죄를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익을 보는 것은 지극한 뜻이 아니니”란 무슨 뜻인가?
나쁜 인연을 버리고 한량없는 선정을 닦는 것이다. 만일 나쁜 이를 만나게 되면 근본 서원에 어긋나서 그 행하는 일 모두가 자기를 위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이익을 보는 것은 지극한 뜻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란 무슨 뜻인가?
스스로 자신을 감추어서 남이 알지 못하게 하고,
‘나는 계율을 지니고 부지런히 행을 닦는다.’라고 하면서
한 번 일어나고 한 번 앉는 것도 알리지 않는다.
그리하여 번뇌가 다하고 뜻이 풀려 용맹스럽게 잘 기억하고 변재가 능숙하며 지혜가 한량없는데도 자신의 덕에 대해 남이 칭찬하는 소리를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에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5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게 생각하여
탐욕과 교만이 날로 자란다.
이상하여라, 세속의 이익이여.
열반으로 가는 길은 다 같지 않네.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게 생각하여”란 무슨 뜻인가?
어리석은 자는 생각생각마다 나쁜 일만을 생각한다. 이들은 다만 남의 이익만을 구하고 자신의 행은 바르지 못하며, 대중들 속에서는 홀로 존귀하게 여겨 남의 예배와 존경을 받으려 하고 다른 사람은 비천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는 어리석게 생각하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탐욕과 교만이 날로 자란다”란 무슨 뜻인가?
대개 정직한 사람은 이익을 얻는 것을 싫어하고 걱정하며, 계율과 지식과 보시 등의 온갖 덕을 갖추고 해탈지견(解脫知見)으로써 어떤 관(觀)에도 들어간다. 그리하여 공덕을 갖추었기 때문에 이롭게 되고 복으로써 가까운 사람을 제도하고는 다시 남도 제도한다. 이러한 사람은 이른바 부처의 종자를 이어받고 현성의 뒤를 계승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탐욕과 교만이 날로 자란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상하여라, 세속의 이익이여”란 무슨 뜻인가?
법의 이치가 아닌 것이다. 이익을 일으키는 사람은 날로 그 재물이 줄어든다. 그것은 지극하거나 요긴한 것이 아니어서 바른 길을 버리고 위태로운 길로 나아간다. 따라서 현성의 도의 가르침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상하여라, 세속의 이익이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열반으로 가는 길은 다 같지 않네”란 무슨 뜻인가?
열반으로 가는 길은 끝내 같지 않아서 먼저 세속의 묘한 법을 배우고 다음에는 현성의 도법을 익히며 다음에는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나함(阿那含)ㆍ아라한(阿羅漢)의 도를 차례로 얻는다.
그러므로 “열반으로 가는 길은 다 같지 않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6
이런 것을 능히 밝게 아는 이
이 비구가 진실로 부처님의 제자니
이익을 즐기거나 집착하지 말고
고요히 머물면서 산란심을 버려라.
“이런 것을 능히 밝게 아는 이”란 무슨 뜻인가?
저 수행하는 사람은 남에게서 받는 이익은 소화하기 어렵다는 것을 잘 안다.
자신에게 흠이 있으면서 남들에게서 많은 보시를 받는 것은, 마치 저 낡은 수레의 바퀴와 바퀴살이 튼튼하지 않으면 무거운 짐을 실을 때에 반드시 그 수레가 부서져 못쓰게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처럼, 계율이 없는 몸으로 남의 보시를 받게 되면 반드시 악취(惡趣)에 떨어진다.
그러므로 “이런 것을 능히 밝게 아는 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비구가 진실로 부처님의 제자니”란 무슨 뜻인가?
과거 모든 부처님의 제자와 그 대중들도 이 덕을 성취하였고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도 이 덕을 성취할 것이다. 어떤 이를 부처님의 제자라고 하는가?
이른바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 등의 이 네 무리의 제자다. 이들은 한결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기 때문에 어떤 나쁘고 삿된 외도들이 여러 가지 형상으로 변해 와서 시험하더라도 끝내 그 틈을 얻지 못한다. 왜냐 하면 그들은 진실로 진실을 알기 때문이다.
어떤 이가 물었다.
“저 못난 범부들을 부처님의 제자라고 일컫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대답하였다.
“그 까닭은 자꾸 망설이면서 결정짓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때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때로는 외도들의 다른 종교에 집착하니, 그들을 부처님의 제자라고 일컬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저 현성의 제자들을 믿음의 뿌리가 튼튼하여 한결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고 삼보를 공경해 받들기 때문에 부처님 제자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또 혹 어떤 이는 말하길,
“부처님에 대해 의심 없는 믿음의 뿌리를 얻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러므로 “이 비구가 진실로 부처님 제자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익을 즐기거나 집착하지 말고”란 무슨 뜻인가?
왜 그렇게 하여야 하는가? 부처님의 말씀에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니, 저 경전의 말씀과 같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익의 달콤한 맛은 나쁜 길로 사람을 인도하여 지극한 도에 이르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떠나야 도를 이룰 수 있다.”
어떤 이가 물었다.
“이미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었는데 또 무엇을 갖추지 못했기에 다시 도를 닦아야 합니까?”
“그는 아직 근기의 문을 갖추어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물러서는 법에서 방편을 구해 물러서지 않는 근기에 이르고, 물러서지 않는 근기의 사람은 방편을 구해 법을 생각하는 사람의 경계로 나아가며, 법을 생각하는 사람은 다시 방편을 구해 법을 보호하는 사람의 경계로 나아가고, 법을 보호하는 근기의 사람은 다시 방편을 구해 굳건히 머무르는 근기의 사람의 경계로 나아가며, 굳건히 머무르는 근기의 사람은 다시 방편을 구해 걸림이 없는 근기의 사람의 경계로 나아간다.
이와 같이 차츰 공덕의 업을 진전시키는 것은 마치 굳건하여 흔들리지 않는 행이 스스로 ‘무원(無願)의 선정, 무상(無想)의 선정, 공(空)의 선정’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익을 즐기거나 집착하지 말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고요히 머물면서 산란심을 버려라”란 무슨 뜻인가?
항상 다섯 가지 고요한 법을 지니는 것이다. 즉,
첫째는 기뻐하는 것이니 기쁨을 몸으로 얻는 것이고,
둘째는 편안한 것이니 편안함은 중생들을 안락하게 머물게 하는 것이며,
셋째는 스스로 지키는 것이니 행을 지켜 잃지 않는 것이고,
넷째는 생각하는 것이니 생각이 안정되어 산란하지 않는 것이며,
다섯째는 기다리는 것이니 선을 기다리며 악을 버리는 것이다.
이른바 욕계(欲界)는 온갖 어려움의 근본이니, 좋은 방편을 찾아 부지런히 해탈을 구하여서 다시는 욕계에 나지 않기를 원해야 한다.
그러므로 “고요히 머물면서 산란심을 버려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7
대개 목숨을 편안히 하려면
마음을 쉬고 스스로 살펴보되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니
그것은 의복과 음식이니라.
“대개 목숨을 편안히 하려면”이란 무슨 뜻인가?
목숨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육신의 목숨이요
둘째는 지혜의 목숨이다.
육신의 목숨이 있어야 지혜의 목숨이 있다. 만일 육신의 목숨이 없다면 어떻게 지혜의 목숨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대개 목숨을 편안히 하려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을 쉬고 스스로 살펴보되”란 무슨 뜻인가?
마음을 쉬고 자신을 살펴본다는 것이니, 이른바 자신을 살펴본다는 것은,
‘계율과 학문과 보시 등 이런 것이 묘한 법이고, 최고의 진리에 있으면 곧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의 과(果)를 얻는다.’라고 살피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고 스스로 살펴보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지니”란 무슨 뜻인가?
옛날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나아가 땅에 엎드려 발에 예배한 뒤 합장하고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원컨대 비구들이 몸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해 주소서. 세간에 다니면서 교화할 때에 세상 사람들과 별다른 점이 있는 것은 유쾌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아아,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여. 그것은 성인의 계율에도 들지 못하고 도의 가르침에도 어긋나는 것이다. 온몸을 드러낸다는 것은 저 외도 니건자(尼乾子)의 법이요, 우리 현성의 법으로서는 행할 바가 아니다. 만일 우리가 벌거숭이로 세간에 나가 돌아다닌다면 저 짐승들과 무슨 차별이 있겠는가? 거기에는 존귀ㆍ비천이나 부모 친척의 구별도 없을 것이다.”
또 어떤 비구가 부처님께 나아가 말씀드렸다.
“대성인이시여, 저 비구들이 털옷을 입는 것을 허락하여 주소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것은 저 외도들이 입는 옷이요 우리 현성의 법률에서는 용납될 수가 없는 것이다.
이 무지한 사람아, 털로 짠 옷에는 다섯 가지 더러운 흠이 있다.
첫째는 냄새가 나는 것이고,
둘째는 그래서 가까이할 수 없는 것이며,
셋째는 이가 꾀는 것이고,
넷째는 쥐가 많이 쏘는 것이며,
다섯째는 더울 때는 더 덥고 추울 때는 더 추운 것이다.
대개 도를 닦는 사람이 승가리(僧伽梨)를 입는 것은 과거의 여러 부처님이나 현성들의 표지요 법식이니라.”
그러므로 “거기에 마음을 두지 말아야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은 의복과 음식이니라”란 무슨 뜻인가?
누가 물었다.
“이미 승가리에 대해 말하였는데 왜 또 의복과 음식에 대해 말하는 것입니까?”
“이른바 의복이란, 니원승(泥洹僧)ㆍ승기지(僧祇支)ㆍ안타위(安陀衛)ㆍ울다라승(鬱多羅僧)을 말한 것이요,
또 마시는 것이란, 감자장(甘蔗漿)ㆍ검은 석밀장[黑石蜜漿)ㆍ포도장(蒲桃漿)ㆍ석밀장(石蜜漿)을 말하는 것이다.
또 먹는 것이란 무엇인가?
먹는 것에는 본래 다섯 가지가 있으니, 검은 기장ㆍ 좁쌀ㆍ보리ㆍ밀ㆍ밀기울 등이다. 그러나 기본 먹거리로는 멥쌀이 제일이 된다. 가지 가지 음식[種種飮食]이란 것은 악함을 내니 피해야 한다.”
어떤 왕이 한 비구를 청하고는 태관(太官)에게 명령하였다.
“저 비구에게 음식을 주되, 내가 먹는 것과 같은 깨끗하고 맛있는 음식을 주어라.”
비구는 그것을 먹고 난 뒤에 왕에게 하직하고 나오려 하였다.
왕은 비구에게 물었다.
“공양을 하였소?”
“하였습니다.”
왕은 생각하였다.
‘비구가 평소에 먹는 것은 반드시 나쁜 것일 터인데, 지금 저 얼굴빛을 보니, 기뻐하는 기색이 없다. 틀림없이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왕은 다시 다음 날의 공양을 청하였다. 비구는 하직하고 절로 돌아갔다.
이튿날 비구는 다시 왔다. 왕은 친히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차려서 그 비구에게 공양하였다.
그리고 다시 비구에게 물었다.
“어떻소. 도사여, 공양이 맛이 있소?”
비구는 대답하였다.
“주시는 대로 먹었지요.”
왕은 속으로 화가 났다.
‘내가 몸소 음식을 차려 주었는데도 저 도사는 짐짓 〈 주시는 대로 먹었지요〉라고 말할 뿐이다.’
그 이튿날 왕은 다시 청하여서 쓴 술에 볶은 콩을 공양하였다. 도사가 먹은 뒤에 왕은 물었다.
“어떻소. 도사여, 음식이 맛이 있던가요?”
비구는 대답하였다.
“주시는 대로 먹었지요.”
왕은 다시 물었다.
“좋은 음식을 먹고도 ‘주시는 대로 먹었지요’ 하고, 이번과 같은 나쁜 음식을 먹고도 ‘주시는 대로 먹었지요’ 하니 무슨 까닭입니까? 그 뜻을 듣고 싶소.”
비구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대답하였다.
저 첨복화(膽蔔華)를 짜
기름을 내어 수레에 바르고
그 기름 향기를 멀리까지 피우니
어찌하여 천박한 것을 귀하다고 하는가?
갖가지 음식으로 목숨을 잇고
몸을 유지하면서 도를 닦으니
쓰디쓴 술에 볶은 콩 음식으로도
목숨은 온전하거니 어찌하여 속이는가?
그러자 왕은 이 게송을 듣고 속으로 부끄러워하여 얼굴을 들지 못하였다. 그리고 생각하였다.
‘내가 저지른 일은 매우 부끄러운 짓이다. 지금까지 나쁜 마음을 내어 현성을 희롱하였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자신의 역량은 돌아보지 않고 나쁜 생각을 내어 수미산을 칠 때에 산에는 아무런 손실이 없고 그 손만 다치게 되는 것처럼, 또 조그만 되[升]나 말[斗]을 가지고 바닷물을 세려고 하는 것처럼, 내가 한 짓도 그와 같아서 보잘 것 없는 소견으로 현성을 다루어 보려 하였다.’
그리고 왕은 다시 생각하였다.
‘대개 수행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목숨을 유지하여 도를 수행하고자 하는 것이다. 또 현재의 몸으로 그 과보를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다. 지금 이 몸으로 좋은 것을 보시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나쁜 것을 보시하면 나쁜 과보를 받게 되니, 마치 그림자가 그 몸을 따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청정한 보시를 행하고 망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복과 음식이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8
스스로의 이익을 바라지 말고
또 남에게도 아첨하지 않으며
남을 의지해 살아가지 말고
다만 자기를 지켜 법을 행하라.
“스스로의 이익을 바라지 말고”란 무슨 뜻인가?
옛날 출가한 지 얼마되지 않은 비구들이 있었다. 그들은 걸식하는 것에만 마음을 두었는데, 어디를 가나 걸식하여 음식을 얻으면, 모두 거칠고 맛있지않았다. 그리고 걸식하는 집에서 음식을 얻게 되더라도, 빨리 주는 집도 있었지만 더디 주는 집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차츰 싫증이 생기나 수도할 수가 없어서 마음속으로 걱정이 되었다. 또한 나쁜 마음이 일어나 세상 법과 친하면서 다시는 경전이나 계율이나 아비담(阿毘曇)을 강론하지 않았다.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너희 비구들은 부디 전생의 인연에는 모두 그 과보가 있다는 것을 관찰하여라. 마치 저 시바라(尸婆羅) 비구와 아나율(阿那律) 비구의 일과 같다. 그들은 공덕에 만족하여 더 나아가기를 스스로 구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복은 있었으나 서로를 격려하지 않았다. 만일 전생의 인연에 높고 낮음이 있는 줄 아는 사람이라면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이익을 바라지 말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남에게도 아첨하지 않으며”란 무슨 뜻인가?
그 행이 한결같고 몸과 마음이 서로 알맞으며, 겉은 어리석은 듯하나 안은 지혜롭고 용맹스러우며, 마음으로 생각하는 생각과 입으로 말하는 말이 서로 어긋나지 않고, 간사함과 거짓과 삿된 일에 항상 멀리 떠나 있는 것이다.
옛날 계빈국(罽賓國)의 구수나라(拘秀那羅) 마을에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아첨과 거짓과 간사한 것을 좋아하였다.
그는 절 하나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름을 ‘바반나(婆槃那)’라고 하였다. 그 절에는 어떤 비구가 항상 대중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그때에 여러 비구들이 계획적으로 그 주인을 속이기 위해, 마음을 감추고 절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모두 누더기로 기운 얼룩덜룩한 가사를 입고 마을로 가서 주인과 인사하고 각각 한쪽에 앉았다. 주인은 감격하여 울면서 온몸을 땅에 던지고 도인들에게 말하였다.
“어디로부터 이 누추한 곳에 오셨습니까? 연못에서 오셨습니까? 다른 세계에서 오셨습니까? 신선산에서 오셨습니까?”
그는 매우 사랑하고 공경하는 마음으로 그 비구들에게 청하였다.
“내일은 저희 집에서 공양하소서.”
비구들은 대답하였다.
“우리가 온 것은 그대를 위해서요. 지금 이렇게 왔는데 어찌 다른 사람의 공양을 받겠소.”
그는 생각하길,
‘비록 사람을 제도할 수 있는 제일 좋은 복밭을 구하려고 하여도 이 사람들보다 나은 사람이 없으리라.’라고 하고는,
곧 안으로 들어가서 여러 하인들에게 명령하였다.
“속히 여러 가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여라. 지금 여러 신인(神人) 도사들이 우리집에 오셨다. 나는 공양하려고 한다.”
비구들이 주인에게 말하였다.
“현사여, 아는가? 우리는 여러 해 동안 도를 닦았으므로 거니는 데 있어 나아감과 멈춤에 언제나 법도가 있고, 하루 종일 수도하므로 보통 사람들과 다르오. 혹 거닐고 싶을 때에는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거닐고, 밤에 시작하면 새벽까지 거닐며, 해가 뜰 때에 밥을 먹으므로 계율에 어긋나지 않소.
그때에 한 상좌 비구가 그 집에 들어가 시주(주인)에게 말하였다.
“내 이름은 ‘한번 앉아 한번 먹기’라 하오. 그 음식과 과일을 한꺼번에 가지고 오시오, 내가 축원해 드리리다.”
시주는 이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 어쩔 줄을 모르면서 갖가지 음식을 마련하여 발우에 담아 주고, 따로 과일을 올렸다. 그리고는 앞으로 나아가 축원을 받은 뒤에, 다시 소(酥)로 만든 떡과 꿀을 미숫가루에 타서 그 상좌에게 따로 올렸다.
한편으로 그는 도사들이 먹다가 발우에 남길 음식을 기다리면서,
‘나는 저것을 얻으면 반드시 그 복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비구들은 공양을 받고 축원한 뒤에 다시 그 시주에게 물었다.
“혹 맛있는 음료가 있는가요?”
시주는 대답하였다.
“우리집에는 여러 가지 음료가 있습니다. 포도, 사탕수수, 석밀로 만든 여러 가지 음료수가 있는데, 존자들께선 어떤 음료가 필요하십니까?”
그들은 대답하였다.
“지금 말한 그런 음료수 따위는 이 세상에 난 뒤로 아직 먹어 보지 못했기 때문에 입에 대지도 않소. 우리가 묻는 음료수란 순수하고 맑으며 진하고 단 것으로서 여러 해를 두어도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이니, 그런 것이라야 우리는 마시오.”
시주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괴상히 여겨,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아, 이런 재앙이나 변괴도 있는가? 나는 이 도사들이 6신통(神通)을 얻어 도를 통한 아라한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제 그 하는 짓을 보니 바로 큰 도둑이구나.’
그는 곧 도인들에게 말하였다.
“나는 어려서부터 술을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감히 도인들에게 술을 드리겠습니까?”
도인은 속옷에다 싼 돈을 보여 주며 시주에게 말하였다.
“만일 집에 술이 없거든 이 돈으로 우리를 위해 술을 사다 주시오.”
시주는 그 말을 듣자 곧 손으로 귀를 막으면서 생각하였다.
‘아아, 괴상한 일이다. 도사가 돈을 가지고 있을 줄을 어찌 생각했겠는가? 이 사람들은 모두 뢰제(賴鞮) 도사인데, 무슨 도의 마음이 있겠는가?’
그는 그들에게 말하였다.
“다른 사람을 시키시오. 나는 당신네들의 종이 아니오. 왜 나더러 술집에 가서 술을 사오라고 하오. 이 뢰제 도인들아, 나는 아까는 그런 줄 모르고 당신네들 속임에 빠졌지만 이제는 결코 속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말하였다.
“그만 하시오. 시주여, 그런 비방을 하지 마시오. 우리가 여기 온 까닭은 당신 한 사람을 깨우치기 위한 것뿐이오. 당신은 지금까지 많은 재물을 소비하면서 보시하였으나 주인을 만나지 못하였던 것이오. 시주가 만일 진정한다면 우리가 어떤 비유를 들 것이니 들으시오.”
“매우 좋습니다. 듣겠습니다.”
“잘 들으시오. 이것은 마치 활을 잘 쏘는 사람과 같소. 즉 그가 백 보 밖에서 털을 쏘면 가끔 그 털을 맞힐 수 있지만, 혹은 높거나 낮거나 혹은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비뚤어지게 되면 과녁을 맞히지 못하오. 그러나 저 땅을 과녁으로 삼아 쏘면 높거나 낮거나 동서남북의 어디를 쏘더라도 모두 맞히므로 결코 땅 밖으로 나갈 수 없소.
지금 이 대중도 그와 같소. 가리지 않고 보시하면 반드시 참 사람을 만날 것이지만 가려서 보시하면 가끔 만날 것이오. 그러므로 헛되이 소비만 많이 하고 이익이 없을 것이오.
그런데 우리 대중은 4과(果)를 완전히 갖춘 4쌍8배(四雙八輩)의 열두 현인의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소. 보물을 얻으려면 큰 바다나 수미산으로 가야 하고 도를 얻은 현인, 아라한을 만나려면 저 대중에게로 가야 하오. 시주여, 분명히 들으시오. 또 한 가지 비유를 말하리니 마음을 터놓고 받들어 지니시오. 지혜로운 사람은 비유를 들으면 스스로 이해하는 것이오.
옛날 당신이 사는 이 나라에 어떤 나그네가 있었는데, 그는 마침 남천축(南天竺)으로 갔었소. 그와 동행한 사람은 저 주술사 사바라(奢婆羅)의 딸과 정을 통한 이였소.
그래서 그가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때에는 그 몸이 갑자기 나귀로 변하였으므로 돌아갈 수가 없었소.
이 사람이 그에게 말하였소.
‘우리는 여러 해 동안 집을 떠나 있었지만 무슨 길흉의 재변이 있었다는 소식을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데, 너는 왜 돌아가려고 하느냐? 만일 돌아가고 싶으면 곧 준비하라.’
그는 대답하였소.
‘나는 장래 일을 생각하지 않아서 나쁜 인연을 만났소. 즉, 저 주술하는 집의 여자와 정을 통하고 지냈는데, 지금 돌아갈 마음을 내자 그만 내 몸이 나귀로 변하였소. 정신이 혼란하여 천지가 텅 빈 것 같아 동서남북을 전혀 분별할 수가 없소. 그래서 돌아갈 수 없소.’
이 사람은 말하였소.
‘너는 왜 그처럼 미련한가? 저 남쪽 산꼭대기에는 차라파라(遮羅波羅)라는 풀이 있다. 아무리 주술이 씌여 억눌린 사람이라도 그 풀만 먹으면 곧 본래의 몸으로 돌아온다.’
그는 대답하였소.
‘그 풀을 모르는데 그런 줄 안들 무엇하겠소.’
이 사람은 말하였소.
‘네가 거기 가서 차례차례로 풀을 뜯어먹으면 자연히 그 풀도 먹게 될 것이다.’
그는 이 사람의 시키는 대로, 비록 나귀의 몸이었지만, 남쪽 산으로 가서 차례차례로 풀을 뜯어먹다가 드디어 다시 사람의 몸이 되었소. 그리하여 갖가지 진기한 보물을 얻어 가지고 그 동행과 함께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소.
시주는 알아야 하오. 이것도 그와 같소. 저 무지한 사람은 한결같이 믿음을 가지고 보시하기 위해 도를 얻은 아라한을 찾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겠소? 어디서나 아무리 구해 보아도 끝내 만나지 못할 것이오. 만일 진인(眞人)인 아라한을 구하려고 하거든 저 대중 속에 가서 찾되, 차례로 공양하면 반드시 현성을 만날 것이니, 그 성과를 거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소.
시주여, 또 똑똑히 들으시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부처님의 이모인 대애도(大愛道) 구담미(瞿曇彌)는 금실로 가사를 만들어 부처님께 바쳤소. 그때에 부처님께서는 대애도에게 말씀하셨소.
‘무릇 보시하려는 사람은 대중 속으로 가야 하는데, 왜 내게만 하는 것입니까? 나도 저 대중의 한 사람이요, 또 극히 작은 일부분 뿐입니다. 금실로 짠 이 가사를 가지고 저 대중에게 가서 보시하십시오. 내 비록 삼계에서 가장 높다고 하지만 그래도 이 보시를 혼자 받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대중에게 사양하고 당신 혼자 받지 않으셨소.
시주여, 혹 이 지방의 남쪽 성안에 있는 바반나(婆槃那)라는 절의 주인이 대중에게 물을 시주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소?”
시주는 대답하였다.
“그 소문을 들은 지는 되었지만 이 세상에 난 뒤로 아직 그 얼굴은 보지 못하였었는데, 이제 비로소 그 분이 현성인 줄을 알았습니다.”
비구들은 말하였다.
“지금까지 간사하게 거짓말을 하여 갖가지로 시주를 속이고 미혹되게 하였지만, 우리처럼 행한 것은 다만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오. 지금부터는 만일 복을 베풀고자 하거든 대중에게서 그 과보를 구하면 틀림없이 그 결과를 얻을 것이오.”
그리고 비구들은 곧 다음과 같은 게송을 읊었다.
독사는 그 목을 꼿꼿이 세워
호랑이의 아롱진 무늬 옷을 입었으나
그 행은 물고기를 엿보는 학과 같이
고요하여서 소리가 없다.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等]이 없어
그 주인을 속였으니
그러므로 온갖 아첨을 버리고
진실로써 그 정신을 단련하여라.
부처님께서 널리 가르침을 펴실 때에
삼계가 환히 밝아서
온갖 이로움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 현성의 도 때문이다.
보시하는 사람은 탐욕을 버리고
마음을 다해 삼보를 섬겨라.
이와 같으면 간사한 속임을 여의어
법으로써 그 본성을 성취하리라.
그때에 그 시주는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온몸을 땅에 던지고 그들을 예배한 뒤에 자기의 참회를 받아 주기를 원하였다.
“지금 그 은혜를 입었으니, 이것은 일찍이 들어 보지 못하였던 것으로서, 비록 부모나 스승이라고 할지라도 저를 이런 진실한 도로 이끌어 주지 못하였습니다. 지금 거룩한 은혜를 입어 이 마음의 번뇌를 영원히 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부터 보시하려 할 때에는 그 다소를 묻지 않고, 감히 혼자서 마음대로 하지 않을 것이며 대중에게 물어 보고 하겠습니다.
이제 거듭 귀의하오니, 원컨대 여러 현성께서 모두 제 스승이 되어 주시면, 의복ㆍ음식ㆍ침구ㆍ약품 등의 네 가지를 공양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또 남에게도 아첨하지 않으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남을 의지해 살아가지 말고”란 무슨 뜻인가?
옛날 조달(調達) 비구는 5백 명의 비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 왕으로부터 온갖 세간살이에 이르기까지 중한 공양을 받고 있었다. 왕은 때때로 돌보아서 그의 뜻을 어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5백 명의 제자들은 모두 다 이러한 이익을 얻는 것에 대해 조달을 우러러보았지만, 스스로에게는 공덕이 없기에 귀히 여길 것이 못 된다. 반드시 자기 자신이 온갖 법을 갖추고 공양받는 것이라야 귀히 여길 만하다.
그러므로 “남을 의지해 살아가지 말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자기를 지켜 법을 행하라”란 무슨 뜻인가?
법이란 모든 선의 법이니, 언제나 그것을 두루 갖추기를 생각하여 남의 가르침을 받지 않아야 한다. 사문이나 속인은 자기의 마음을 잘 가르침으로써 그 마음을 쉬게 하고, 항상 정근하여 그 법도를 잃지 않게 하며, 언제나 바른 법을 따르고 삿된 길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그러므로 “다만 자기를 지켜 법을 행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9
뜻대로 얻더라도 그것에 의지하지 말고
남에게 칭찬받기를 바라지 말라.
그것을 바라는 비구는
바른 선정에 이르지 못하리라.
“뜻대로 얻더라도 그것에 의지하지 말고”란 무슨 뜻인가?
무릇 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덕을 보지 않아야 하고, 덕을 행하면서도 그 행하는 것을 보지 않아야 하며, 스스로 그 덕만을 믿고 덕이 없는 이를 업신여기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저 조달(調達)의 제자들은 진실로 덕이 없이 헛되게 남의 보시를 받으면서도 모두 홀로 존귀하여 비할 데가 없기를 구한다.
그러므로 “뜻대로 얻더라도 그것에 의지하지 말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남에게 칭찬받기를 바라지 말라”란 무슨 뜻인가?
저 조달의 제자들은 각기 규칙을 세워서 서로 비방하지 못하게 하고, 서로 칭찬하게 하면서 한 사람이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를 대중 밖으로 쫓아내었으며, 덕이 없다고 바른 말을 하면 덕이 있다고 억지를 부린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각기 자신의 신분을 지키고 부디 거짓으로 그 공덕을 칭찬하지 말아라. 그 행이 자신의 몸에 맞지 않으면 재앙을 자초하여 구경(究竟)에 이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칭찬 받기를 바라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바라는 비구는 바른 선정에 이르지 못하리라’란 무슨 뜻인가?
마음으로 항상 요행을 바라는 것이 있으면, 그 뜻이 온전하지 못하다. 또한 바른 행을 행하지 못하므로, 그 동안에는 끝내 그것에서 벗어나 바른 선정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것을 바라는 비구는 바른 선정에 이르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0
무릇 그 목숨을 편히 하려면
마음을 쉬고 스스로를 살펴보되
마치 저 쥐가 구멍에 들어 있듯
숨어 살면서 가르침을 익혀라.
“무릇 그 목숨을 편히 하려면”이란 무슨 뜻인가?
이른바 목숨을 편히 한다는 것은, 온갖 선한 일을 모두 모으고 그윽한 이치를 밝게 드러내면서 살아간다는 것이니, 이것은 의복이나 음식을 위해서만이 아니다.
그러므로 “무릇 그 목숨을 편히 하려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을 쉬고 스스로를 살펴보되”란 무슨 뜻인가?
계율, 학문, 보시, 지혜, 해탈, 해탈지견으로써 그 몸을 장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쉬고 스스로를 살펴보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저 쥐가 구멍에 들어 있듯”이란 무슨 뜻인가?
대개 구멍 속에 사는 동물들에게 구멍이 깊으면 견고하여 아무런 두려움이 없으니, 나쁜 사람이나 사나운 짐승의 침해를 받지 않고, 맹렬한 불길에 타거나 큰 홍수에도 휩쓸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치 저 쥐가 구멍에 들어 있듯”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숨어 살면서 가르침을 익혀라”란 무슨 뜻인가?
사문의 계율을 모두 갖추고 조용한 곳에 숨어 살면서 마음을 고요히 하고 음식을 절도 있게 하여 만족할 줄 알면, 어떤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 것도 그 틈을 엿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숨어 살면서 가르침을 익혀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1
무릇 그 목숨을 편히 하려면
마음을 쉬고 스스로를 살펴보되
얻은 물건에 만족할 줄 알고
한 가지 법을 닦기를 생각하라.
“무릇 그 목숨을 편히 하려면”이란 무슨 뜻인가?
무릇 사해를 돌아다니며 험난한 고초를 겪더라도 끝내 고생만 더할 뿐이요 조그만 선도 없다.
그러므로 “무릇 그 목숨을 편히 하려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을 쉬고 스스로를 살펴보되”란 무슨 뜻인가?
음식에 만족할 줄 알아서 널리 구하지 않으면 혹 의복ㆍ음식ㆍ평상ㆍ침구 따위를 얻고자 하여도 그리 애닲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얻은 물건에 만족할 줄 알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한 가지 법을 닦기를 생각하라”란 무슨 뜻인가?
어떤 것이 한 가지 법인가?
한 가지 법이란, 모든 선한 법에 있어서 모두 만족할 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가지 법을 닦기를 생각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2
어떤 이익이나 좋은 일도 삼가하며
계율을 받들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면
지혜로운 사람의 칭찬을 받으니
맑고 깨끗해 게으르지 않게 하라.
“어떤 이익이나 좋은 일도 삼가하며”란 무슨 뜻인가?
그 행을 삼가하여 삿된 일에 굴하지 않고, 비록 이익을 얻더라도 먼저 대중에 권하여 보시한 뒤에 스스로 받으며,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優婆塞)ㆍ우바이(優婆夷) 등 사부대중을 위하거나, 혹은 국왕ㆍ대신ㆍ1억 명의 거사나 큰 부자 장자들을 위해 밤낮으로 물음을 받되, 먼저 사양한 뒤에 스스로 나타낸다.
그러므로 “어떤 이익이나 좋은 일도 삼가하며”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계율을 받들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면”이란 무슨 뜻인가?
온전한 마음으로 계율을 받들어 터럭만큼도 범하지 않으며, 오고 가는 데 있어 그 위의를 잃지 않고, 마음을 다스려 계율을 닦되 화재를 당한 듯이 한다.
그러므로 “계율을 받들고 마음속 깊이 생각하면”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의 칭찬을 받으니”란 무슨 뜻인가?
지혜로운 사람은 그 뜻이 높은 것을 숭상하여 남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을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수행하는 사람을 보면 붙들고 도움을 주어서 행을 성취하게 하며 그 이름과 덕을 기리고 찬탄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의 칭찬을 받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맑고 깨끗해 게으르지 않게 하라”란 무슨 뜻인가?
밤낮으로 정근하되, 앉거나 눕거나 거닐거나 하는 것에 그 근본법을 잃지 않고, 아침에 시작하면 밤에 이르고 밤에 시작하면 새벽에 이르도록 생각하고 지관(止觀)하여 조금도 쉬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맑고 깨끗해 게으르지 않게 하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3
세 가지 지혜를 통달한 비구는
완전히 해탈하여 번뇌가 없다.
그를 아는 이 많지 않고
지혜로운 사람만이 기억해 안다.
“세 가지 지혜를 통달한 비구는”이란 무슨 뜻인가?
근기가 날카롭고 덕이 높은 사람은 의심 없는 해탈을 얻어 8사(邪)를 여의니 이것을 첫째 밝음[明]이라 하고 또 첫째 통달이라고 한다. 또한 모든 번뇌가 없어졌으니 이것을 둘째 밝음이라 하며, 또한 온갖 신통을 얻었으니 이것을 셋째 밝음이라고 한다.
또 달리 말하는 이도 있다. 모든 번뇌가 없어졌으니 이것을 첫째 밝음이라 하고, 또 어디서 왔는지 아니 이것을 둘째 밝음이라 하며, 스스로 전생의 일을 아니 이것을 셋째 밝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가지 지혜를 통달한 비구는”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완전히 해탈하여 번뇌가 없다”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은 이미 늙음과 죽음을 떠난 자이다.
죽음에는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번뇌의 죽음이고,
둘째는 음(陰:五蘊)의죽음이며,
셋째는 마지막의 죽음이고,
넷째는 자재천(自在天)의 죽음이니,
이것을 네 가지 죽음이라고 한다.
또 세 가지 지혜를 통달한 비구는 두 악마를 영원히 항복받는다.
두 악마란,
첫째는 번뇌의 악마고,
둘째는 하늘의 악마다.
그러므로 “완전히 해탈하여 번뇌가 없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를 아는 이 흔하지 않고”란 무슨 뜻인가?
그의 지혜는 광대하여 끝이 없지만 세상 사람들과 돌아다니지 않고, 또 친구들과 왕래하지 않지만 오직 지혜 있는 사람만이 그를 분별한다.
그러므로 “그를 아는 이 많지 않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지혜로운 사람만이 기억해 안다”란 무슨 뜻인가?
그는 모든 범행을 닦는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그것은 그의 위신력이 진실로 자재하여 걸림이 없다는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만이 기억해 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4
그는 또 여러 사람으로부터
음식이나 이익을 많이 얻으니
거기서 나쁜 법이 생기는 것은
공양에 의한 질투 때문이다.
“그는 또 여러 사람으로부터 음식이나 이익을 많이 얻으니”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다 그가 전생에 보시하기를 좋아하였기 때문에 현세에 와서는 그 몸이 단정하고 얼굴은 복숭아꽃 빛이며 부잣집에 태어나 재보가 많고 말할 때에는 먼저 웃고 말을 하며 그 얼굴빛이 부드럽고 화기롭다. 정신은 맑고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재주가 많고 널리 배워서 모르는 일이 없으므로, 그가 가는 곳에는 법다운 일만 늘어난다.
그러므로 “그는 또 여러 사람으로부터 음식이나 이익을 많이 얻으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거기서 나쁜 법이 생기는 것은 공양에 의한 질투 때문이다”란 무슨 뜻인가?
많은 도를 닦는 자들이 서로 번갈아 가며 공양을 받는데, 공양하는 법은 한 사람이 공양을 얻으면 뒤의 사람은 그것을 본받아 또 공양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지혜의 깊고 옅음과 그 도덕의 많고 적음을 잘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지혜 있는 사람이 도리어 멸시를 받고 간사하고 허물만 있는 사람이 도리어 공경과 섬김을 받는다.
그리하여 진실을 거짓이라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 하여 서로 시비를 따지고 비방하되,
‘내 지혜와 기예는 남보다 나은데 너는 아는 것이 아직 옅다.’라고 하면서,
각기 그 틈을 엿보고 선량한 사람을 억울하게 죽이므로 죽는 사람이 한량이 없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하여금 숨어서 나오지 않게 하니, 무지하고 나쁜 사람만이 세상에 나와 방종한다.
그러므로 “거기서 나쁜 법이 생기는 것은, 공양에 의한 질투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5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마음에 없는 법복을 입고는
다만 바라는 것은 음식과 의복
그리고 평상과 침구뿐이다.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마음에 없는 법복을 입고는”이란 무슨 뜻인가?
혹 간사하고 거짓된 비구는 헌 누더기를 입고 겉으로는 드러내어서 비밀이 없는 체하면서도 안으로는 은밀히 모여 지낸다. 또한 세상에 나다닐 때에는 조용히 법답게 걸으면서도 눈을 앞에서 떼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럿이 몰려다니면서 마음에 없는 법복을 입고는”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음식과 의복, 그리고 평상과 침구뿐이다”란 무슨 뜻인가?
청신사나 청신녀들은 길에서 그들을 보면 모두 공경하고 좋은 마음을 낸다. 그래서 그들을 대할 때에는 마치 피는 꽃을 대하듯 밝은 해를 보는 듯 마음이 안타깝고 애련하여서 차마 떠나지 못한다.
그러나 그 비구는 비록 법복을 입기는 하였지만 그 마음은 승냥이나 이리와 같고, 또 쥐를 엿보는 삵과 같다. 아무 계율도 없이 남의 보시를 받으니 도덕을 생각하지 않으면서 세상 사람을 속이고 미혹되게 하며 경전이나 계율을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저 중생들은 마치 언덕이 무너지듯 그들에게로 달려가되 목마른 사람이 물을 만난 듯 벌거숭이가 옷을 얻은 듯이, 마음으로 공경하고 대우하면서 그 자리에서 복을 바란다.
그러면서 ‘이 세상에는 이 보다 나은 좋은 복밭이 없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만 바라는 것은 음식과 의복, 그리고 평상과 침구뿐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6
그러므로 그 허물을 알아야 하니
이익이란 가장 두려운 것이다.
적게 취하면 걱정이 없으리니
그로 하여 비구는 마음이 놓인다.
“그러므로 그 허물을 알아야 하니 이익이란 가장 두려운 것이다”란 무슨 뜻인가?
이익이 병이 되어 골수에 박히면 죽어서 지옥에 떨어질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것에는 온갖 두려움이 많아 끝내 편안하지 않고, 혹 인간으로 나더라도 많은 위해가 있어서 그것을 막으려고 하여도 좋은 방책이 없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죽음이 두렵고 나가면 도적이 두렵다.
그러므로 “그러므로 그 허물을 알아야 하니, 이익이란 가장 두려운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적게 취하면 걱정이 없으리니, 그로 하여 비구는 마음이 놓인다”란 무슨 뜻인가?
어떤 선남자 선여인이 믿음을 굳게 하여 처자를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배울 때에, 수염과 머리를 깎고 3법의(法衣)를 입고는, 때가 되면 발우를 들고 나가 중생들에게 널리 복을 주되, 나쁘거나 좋은 음식을 얻더라도 그 시주를 위해 축원하면 이것을 인연으로 하여 복을 얻고 시주들은 모두 해탈을 얻는다. 그러나 그는 아는 사람을 적게 두어 널리 돌아다니지 않는다.
그리고 유창한 변재로 두루 설법하여 제한이 없고, 또 천(天)ㆍ용(龍)ㆍ귀신 따위의 8부중(部衆)의 존대를 받으므로, 그들이 모두 와서 바른 법을 듣고 삼귀의한다. 그래서 무수한 귀신들도 온갖 번뇌를 여의고 청정한 법안(法眼)을 얻는다.
그러므로 “적게 취하면 걱정이 없으리니, 그로 하여 비구는 마음이 놓인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7
먹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 못하니.
그 누가 능히 먹지 않으랴?
무엇보다 먹는 것을 앞세워야 하니
그런 줄 알면 질투하지 말라.
“먹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 못하니”란 무슨 뜻인가?
형상이 있는 모든 중생들은 음식에 의해 그 목숨을 보전한다. 그러므로 혹은 음식에 탐착하고 그 탐욕으로 인하여 수천만 중생을 살해한다.
그러나 어떤 중생은 마음에 탐욕이 없어서 음식에 대해 그다지 간절해 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그들은 모두 여덟 가지 대인(大人)의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음식에 만족할 줄을 알고 그것으로 몸과 목숨을 유지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먹지 않으면 목숨을 보전 못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누가 능히 먹지 않으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드나드는 숨길이 있고 정신이 안정되어 경전을 읽으며 도를 닦는다. 음식에는 네 종류가 있지만 보통 음식[揣食]이 우선되는 것으로서 나아가고 올 때를 모두 성취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 누가 능히 먹지 않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무엇보다 먹는 것을 앞세워야 하니”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은 항상 음식을 관(觀)하되, 이 음식은 어디서 왔는가?
또 어디로 가는가를 낱낱이 분별하여서, 그 음식에 의하여 도의 과(果)를 성취한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먹는 것을 앞세워야 하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 줄 알면 질투하지 말라”란 무슨 뜻인가?
수행하는 사람은 깊은 산 속에 깃들어 살면서 홀로 한적한 것을 즐기니, 기린의 뿔은 하나며 혼자 있고 동무가 없듯 각기 둘씩 기거하면서 무리를 짓지 않는다.
세상에 살기를 즐겨 하지 않는 까닭은 그 기미를 살펴 알아 미연에 걱정을 막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걱정은 상대가 있는 데서 생기고 물은 근원에서 넘쳐 나오는 것이니, 만일 상대가 없으면 내게는 걱정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성인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고요한 곳에 머물고 번잡한 곳에 살지 않아서 미워하거나 질투하는 생각이 없도록 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그런 줄 알면 질투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18
질투는 먼저 나를 해치고
그 다음에는 남을 해친다.
때리고 맞기도 하면서
끝내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
“질투는 먼저 나를 해치고”란 무슨 뜻인가?
마치 어떤 사람이 수렁에 빠져 있으면서 거기서 빠져 나와 그 액난을 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거늘 어떻게 남을 구제할 수 있겠는가? 부디 방편으로써 그 액난을 면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질투는 먼저 나를 해치고”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 다음에는 남을 해친다”란 무슨 뜻인가?
이미 자신을 건졌으면 다시 방편으로써 건너지 못한 사람을 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 다음에는 남을 해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때리고 맞기도 하면서”란 무슨 뜻인가?
모두 사람의 마음에서 시비를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현재의 과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허공을 올려다 보며 침을 뱉으면 침이 다시 내려와 그 얼굴에 묻는 것과 같지만 사람들은 그런 줄을 생각하지 못한다.
또 음향은 원래 고요하고 형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의 욕설을 듣더라고 거기에는 다만 소리가 있어서 귀가 가서 듣지만 다 듣고 나면 거기에는 어떤 형상도 바탕도 없다.
그런데 왜 텅 빈 법에 대해서 제멋대로 기뻐하고 성내는 것일까?
무지한 사람은 스스로 분별하는 생각을 내어 서로 시비를 겨루다가 드디어는 망하고 만다.
그러므로 “때리고 맞기도 하면서”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끝내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란 무슨 뜻인가?
무지한 사람은 고집이 세어 죽을 때까지도 고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혹 어떤 이익을 보면 그것을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질투가 생겨서 두루 나누지 못한다.
그러므로 “끝내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