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애경 제4권
16. 일심정의품(一心定意品)
[제7의 일] 인연의 과보와 인연으로 청정을 이루는 것을 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여래 지진은 그 한마음의 해탈문인 선정의 업을 아시고,
또 번뇌로 말미암아 성냄과 미워함이 따라 일어나는 것을 여실히 아시나니,
어떤 것을 아신다고 하는가?
중생들이 번뇌의 욕심에 얽매이어 그 과보를 받아서 이와 같은 인연을 이루는 일과,
또 어떤 인연으로 청정을 이룰 수 있는가를 여래께서는 다 아신다.
그렇다면 그 인연의 과보는 어떤 것이고 짓는 업은 어떤 것일까?
중생들은 수순하지 못한 생각을 따라 인연의 과보를 이룩하며, 무명(無明)의 업을 따라 욕심의 번뇌를 이루는 것이요,
무명의 업을 따라 행(行)을 이룩하고,
행을 따라 식(識)을 이룩하고, 식을 따라 명색(名色)을 이룩하고,
명색을 따라 여섯 감관[六入]을 이룩하고,
여섯 감관을 따라 부딪침[觸]을 이룩하고,
부딪침을 따라 느낌[受]을 이룩하고,
느낌을 따라 애착[愛]을 이룩하고,
애착을 따라 취함[取]을 이룩하고,
취함을 따라 존재[有]를 이룩하고,
존재를 따라 남[生]을 이룩하고,
남을 따라 늙음을 이룩하고,
늙음을 따라 번뇌의 욕심을 이룩하나니,
과보의 원인이 되는 이러한 업을 이룩하는 것이다.
그 견해[見]를 따라 애착을 이룩하고, 애착에서 번뇌를 맺으므로 이것이 바로 인연의 과보이고 또 업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또 어떤 것이 인연의 과보이고 업인가?
그 중생들로 하여금 청정을 이루게 하려면 두 가지의 과보와 열두 가지 일이 있어야 중생들은 이로써 청정을 이룩할 수 있다.
두 가지 과보란 어떤 것인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차례에 맞는 이치를 듣는 것이 그 하나이고,
자기 스스로가 법을 기억하는 것이 그 둘이다.
또 두 가지 일로써 청정을 이룩하게 되니,
한결같은 그 마음으로 오로지 학문에 뜻을 두어 마음이 흐리거나 어지럽지 않은 것이 그 하나이고,
고요한 방편의 이치를 깨달아 그 근원을 관찰함이 그 둘이다.
또 청정을 이룩하는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어디로부터 온 곳이 없으면서 발동하여 일어나는 바를 앎이 그 하나이고,
온 곳도 없는 동시에 가는 곳도 없음을 앎이 그 둘이다.
또 청정을 이룩하는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생겨난 곳도 없고 본래 처소가 없음을 관찰함이 그 하나이고,
멸도(滅度)에 들어 언제나 고요함이 그 둘이다.
또 청정을 이룩하는 두 가지 일이 있으니,
그 행을 남김없이 다 성취함이 하나이고,
밝은 지혜로써 바른 증득[證]을 이룩함이 그 둘이다.
또 청정을 이룩하는 두 가지 일이 있으니,
그 뜻이 도법(道法)을 닦아 순조롭게 해탈문에 들어감이 하나이고,
그 근본이 청정하여 해탈지견에 이르는 것이 둘이다.
또 청정을 이룩하는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생각 끊는 지혜에 이르러 아무런 집착 없음이 그 하나이고,
생사 없는 지혜로써 항상 치우침 없음이 그 둘이다.
또 청정을 이룩하는 두 가지 일이 있으니,
지극한 정성으로써 도덕을 이룩함이 그 하나이고,
항상 진실로써 성취하게 됨이 그 둘이다.
이러한 두 가지 과보와 두 가지 업으로써 중생을 청정하게 할 것을 여래께서는 다 아시는 것이다.
또 번뇌의 방편이 한량없으며, 청정케 하는 방편이 또한 한량없다.
또 번뇌로부터 청정을 이룩해야만 곧 가까이 성취하고 자세히 관찰할 수 있으며,
또 청정케 하는 방편이란 그 번뇌의 행을 따라 점차로 법에 다가가게 하는 것이요, 그 교만한 자를 포섭해야 하나니,
그러므로 여래의 성스러운 지혜는 이것을 다 통달하시어 그 인연을 뽑아 버리시는 것이다.
족성자야, 여래께서는 이와 같이 그 지혜가 고요하여 어떠한 욕심과 착하지 못한 법에도 담박할 뿐이고, 중생들을 안온하게 할 것을 생각하시므로 제1의 선정을 행하시되 한마음으로써 적멸한 경계에 머물러 고요히 선정에 드신다.
제1 선정에서 일어나서는 8해탈문을 닦아 순역(順逆)의 이치를 반복하여 삼매를 닦는데 보는 바가 모두 삼매임을 알고 평등을 드러내 보이신다.
또 선정의 뜻을 나타내시니, 여래의 삼매는 두려움이 없고 누구도 파괴할 자가 없으며,
여래의 삼매는 인연을 벗어나 다른 방편에 따르지 않으며,
여래께서는 항상 한마음으로 선정에 드는 것을 잊지 않아서 모든 삼매 중에 가장 으뜸이고 높으시니라.
또 여래께서는 항상 하나의 선정에 머물러 모든 삼매를 널리 보시되, 그 마음이 물러나지도 않고 더하거나 덜한 적이 없으시며, 그 나타내심이 언제나 선정 그대로이시다.
그러기에 여래의 삼매는 당초부터 생겨난 곳이 없으며 관찰할 수 없으므로 성문과 연각이 미치지 못함은 물론 모든 보살과 그 밖의 바르고 참되게 깨달은 이보다 뛰어나다.
여래의 삼매는 그 누구도 초월할 자 없어서 우뚝하며 훌륭하고 거룩하기 한량없으므로 어떤 중생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여래의 지혜는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끝없고 다함 없어서 훌륭한 방편으로 성문을 개화시켜 선정을 얻게 하신다.
그리고 여래께서는 또 연각과 보살의 일도 다 아시어 그 알맞은 시기를 따라 그들을 가르치시니,
이것을 바로 여래의 제7의 일이라 한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다시 게송을 읊으셨다.
중생들 인연의 일이
그 번뇌와 애욕인 것임을
끝없는 지혜 자재로우신
부처님께서는 다 아시네.
그 행이 청정하거나
또 청정하지 않음도
큰 지혜 자재로우신
부처님께서는 환히 꿰뚫어 아시네.
수순하지 않은 생각에 따른
그 과보의 인연이나
업으로 인한 무명과 행과
모든 조작을 부처님께서는 다 아시네.
식별과 명색도 그와 같으며
근본은 여섯 감관에 있으므로
그로 인한 인연의 업을
부처님께서는 다 모두 환히 아시네.
그 번뇌와 애욕으로 말미암아
온갖 탐내는 마음 일어나므로
그 인연의 자체가
곧 욕심을 행하는 업임을 보시네.
생각의 얽매임에
또한 인연을 이룩하므로
뭇 사람들 거기에 머물게 됨을
부처님께서는 다 아시네.
뭇 사람들의 서원(誓願)은
두 인연이 있으니
차례에 맞는 이치를 들으려면
성인을 따라 그 말씀 삼가히 받고
자기 스스로 생각하여
모든 법이 다 공함을 관찰해야만
그 사람 곧 생사의 바다를
능히 해탈할 수 있으리라.
고요히 그 이치를 관찰함에도
힘써 두 인연부터 제거한 뒤
오는 것도 가는 것도 없음을
거듭 생각하여 자세히 보고
그 근원까지 헤아리고 따져
처음도 없고 끝도 없음을 살펴야만
저 적멸한 도에 들어가
비로소 청정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슬기로운 자는
삼매를 닦아 항상 바른 행에 머물고
그 방일하지 않는 자는
3해탈문을 높이 받드네.
생각 끊는 지혜를 이룩하는 자는
지성으로 생사 없는 법을 얻나니
이러한 과보의 업이야말로
청정하게 일으킨 훌륭한 서원이네.
가장 뛰어나신 부처님만이
전일한 마음으로 항상 삼매에 들어
적멸한 지혜를 이룩하시고는
그 용맹한 뜻 다시 일으키셔서
모든 순역(順逆)의 이치를
관찰하고 또 생각하시네.
8해탈문에 들어가
한 가지 선정의 뜻으로써
한량없는 억천 선정을 이룩하시니
그러므로 큰 법왕인 부처님이시네.
견줄 데 없는 지혜로
넓고 평등하게 모든 행을 보시고
그 마음의 소행에 따라
도법(道法)이 또한 끝없으며
이러한 행을 말미암아
뛰어난 마음 그대로가 다 선정이시네.
성문ㆍ연각들의
선정이 이와 같고
모든 보살들은 이와 같으며
제각기 선정이 있기는 하지만
부처님께서 편히 머무시는 선정은
저들을 훌쩍 뛰어넘으시며
여래가 닦으신 업의 지혜는
수시로 그들을 교화하시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