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당(上堂)
1-2 불법(佛法)의 대의(大意)
僧問, 如何是佛法大意오 師便喝한대 僧禮拜어늘
師云, 這箇師僧이 却堪持論이로다.
《해석》
한 스님이 물었다.
“무엇이 불법의 대의입니까?”
임제 스님이 곧 “할!”을 하시니, 그 스님이 절을 하였다.
임제 스님이 말씀하셨다.
“이 스님과는 법담(法談)을 나눌 만하구나.”
《강설》
청천백일에 천둥 치고 번개 치는 일이다.
임제 장군의 막하에 목숨을 담보로 녹슨 칼을 비껴들고
하늘을 덮는 기개로 바람을 몰아가며 뛰어 나온 장수가 있다.
관우인가. 장비인가. 조자룡인가.
불교의 대의가 무엇인가? ‘할’이다.
참 간단하다.
일도필살(一刀必殺)의 검법이다.
혹자는 이 ‘할’을 부처와 부처끼리 통할 일이고
범부의 측량할 바가 아니라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복잡할 까닭은 하나도 없는 것이 불교다.
질문을 하고, 그 질문을 듣고,
들은 사실에 대해서 즉시 반응하는 이 사실이다.
여기에는 처음도 끝도 오직 활발발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이 불법이기 때문에 이렇게 살아있는 사람이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한 번의 ‘할’ 소리에 육종 십팔상(六種 十八相)으로 진동하였다.
삼신(三身)과 사지(四智)와 팔해탈(八解脫) 육신통(六神通)이
이 ‘할’에 다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목숨을 걸었던가.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불법대의에 인생을 걸었던가.
한량없는 세월 동안 인생을 걸고 목숨을 버린 일이 무량 무수 아승지일 것이다.
세존의 6년 고행도, 달마의 9년 면벽도 모두가 이 불법대의 때문이었다.
‘할’이라는 그 한 마디, 그렇게 간단한 것을 위하여.
임제 할, 덕산 방이라 하여 임제 스님의 불법가풍을
흔히 ‘할’로 설명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임제 스님이 교화를 편 이후부터 오직 ‘할’과 ‘방’으로 학인들에게 보였다.
그래서 내방하는 사람이 문에 들어오기가 바쁘게 곧바로 ‘할’을 하였다.
어느 비구니 스님들의 선원에서 여름 안거를 마치던 날이었다.
차를 마시면서 입승 스님이 여름 한 철을 공부한 소감을 물었다.
구참(舊參) 스님들로부터 돌아가면서 이런 저런 소감들을 이야기 하다가
탁자 밑에 앉아있는 어느 초심자의 차례가 되었다.
그 스님 왈, “나는 ‘할’이요.” 하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순간 큰 방이 온통 박장대소하는 웃음바다가 되었단다.
연필 깎는 주머니칼을 들고 그 무서운 싸움터에 나온 것이다.
그 이야기가 얼마나 오랫동안 즐거운 공양이 되었는지 모른다.
그도 또한 불법의 대의를 아는 사람이리라.
임제 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법손들은 최소한 이렇다.
스님들의 법문에는 으레 ‘할’이 따른다.
심지어 한 생애의 영결을 고하는 장례식장에서도 ‘할’이 난무한다.
'할‘을 하고 싶어서 몸살이 난 것이다.
불교의 대의이기 때문이다.
임제 스님의 흉내를 낸다 하더라도 너무 심한 정도다.
《문수경전연구회 강좌》
1- 2 佛法(불법)의 大意(대의)
僧聞(승문),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師便喝(사변할)한대 僧禮拜(승예배)어늘
師云(사운), 這箇師僧(자개사승)이 却堪持論(각감지론)이로다.
오늘은 1-2 불법의 대의, 그랬습니다.
참 중요한 대목이죠.
이 임제록은 불법 대의를 물으러 임제 스님이 황벽 스님에게 갔다가
세 번에 걸쳐서 육십 방망이를 흠씬 두들겨 맞고
비로소 대우 스님에게 가서 눈을 떴습니다.
여기도 출발이, 임제록이 존재하게 된 그 출발이
‘佛法大意’ 라고 하는 넉 자에 있습니다.
해서 또 임제록을 편찬하면서 많은 법문이 있었겠만
맨 처음 질문하는 사람,
‘僧聞(승문), 如何是佛法大意(여하시불법대의)오’, 이렇게 했죠.
어떤 것이 불법대의입니까?
이건 불교와 인연 있는 사람, 특히 수행하는 사람,
불교라고 하는 것을 명패로 걸고 공부에 임하는 사람의 과제고 화두고
또 영원한 숙제가 바로 불법대의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글쎄 여러분들도 불법에 몸 바쳐 온 연륜이 적지가 않은데
나름대로 다 불법대의에 대해서 파악하고 계시고
또 나름대로 당당하게 이것이 불법이다 라고 말씀하실 거예요.
제 나름대로 불법대의를 말씀드리면,
임제 스님하고 관계 없습니다.
임제 스님 이야기는 천천히 보기로 하고요,
饒益有情(요익유정)이라고 나는 말씀드리고 싶어요.
지난 번에 우리가 법화경을 공부했는데
법화경의 최후의 품들이 약왕보살본사품, 묘음보살품, 관세음보살품
그리고 보현보살권발품 이렇게 네 품을 보현행원 내지 보살행,
饒益有情(요익유정), 救世濟人(구세제인), 세상과 사람을 구제하는 것,
이것으로 법화경에서는 그렇게 살펴보았고.
사실 화엄경도 삼분의 일에 해당되는 입법계품이
전체가 선재동자가 선지식을 만날 때마다 묻는 것이,
어떻게 하면은 보살행을 실천할 수 있습니까?
보살행을 배울 수 있습니까?
보살행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한결같이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많지만
결론적으로는 보현행원품으로서 결론을 맺죠.
무수한 보살행이 있지만 보현보살의 십대 행원으로서 결론을 삼을 수 있다,
이렇게 된 것이 화엄경입니다.
소위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화엄경과 법화경은
끊임없이 보살행을 이야기하고 또 보살행으로서 결론을 삼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면 요익유정이고 구세제인이죠.
세상과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으로서 불법대의로 삼습니다.
저도 사실은 그쪽에 훨씬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이 선불교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도 불법대의를 묻고 또 부처님을 모시기도 하고
불교의 수행 도량인 사찰에서 이 선불교가 행해지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선불교, 선불교 이런 표현을 합니다만
솔직하게 선불교의 절정이 임제 스님 무렵이라고 말씀을 드렸는데,
그 무렵의 소위 선불교는
불교라고, 선불교라고 이름 붙히기가 좀 거북할 정도로 순수한 禪(선)입니다.
불교하고 달라요.
원불교가 불교하고 다르다고 하듯이
선불교의 진면목은 선불교라고 이름 붙히기가 좀 거북스러워요.
그냥 禪(선)이라고 해야 돼.
불교하고 어느 정도만 상관 있지
사실은 기존의 불교하고는 정말 새로운 색깔입니다.
정말 새로운, 다른 거예요.
이건 흔히 표현하기를 소위 인도의 천재성과 중국의 천재성이 만나서 탄생시킨
전혀 새로운 정신세계다.
그리고 또 앞으로 동양 사상과 서양 사상의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이다, 이렇게 이제 표현을 합니다.
그리고 물질과 정신, 이 두 가지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것도
또한 이 선의 가르침 뿐이다 이렇게 말하면서
선은 불교라고 하기 보다는 전혀 다른 세계다 그런 표현을 해요.
사실 그렇습니다.
아주 면밀히 정말 깊이 깊이 따져보면은 그런 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뭐라고?
如何是佛法大意오, 불법 대의가 뭐냐.
나는 요익유정이다 구세제인이다 보살행이다
이렇게 일반 불교에서 대답할 수 있는 것을, 여기는 뭐라고?
師便喝(사변할), 喝! 이라고 했습니다.
전혀 다른 세계죠.
이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고
또 해석해도 맞지 않는 그런 입장이 바로 할의 입장이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이 한 대목만 보더라도
불교라고 하는 것과 선이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달라요.
그 선의 견해에 치우쳐 있는 사람은
아! 이 할이야 말로 진짜 불법대의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을 거예요.
그렇게 붙히면 또 붙어는 집니다.
붙어는 지지만 상식적인 불교하고는 전혀 다른 세계라는 그런 말씀입니다.
師便喝, 할, 고함을 쳤습니다.
僧禮拜, 그러니까 스님이 예배를 했어요.
그러니까 ‘師云(사운), 這箇師僧(자개사승)이 却堪持論(각감지론)이로다.’
아 이 스님이야말로 나하고 한번쯤 이야기해볼 만한 사람이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임제스님이 법상에 올라가서
사실은 내가 어쩔 수 없어서 올라왔다,
하지만 여기서 눈 밝은 사람이 있거든 한번 나와서
법거량을 제대로 해보자 라고 말이 떨어지자마자
어떤 스님이 나와서 여하시불법대의오 이렇게 물었습니다.
이거는 말이 불법대의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불법대의가 아니죠.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불법대의가 아니라고 하는데
말하자면 선의 정신이 있습니다.
선과 불교가 다르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 맞는 대답으로서 할을 했습니다.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당시 소위 선불교의 분위기에는
할이라는 게 맞는 상당히 근사한 대답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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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임제스님의 이전에 볼수 없는 독특한 가풍의 모습봅니다
불교공부 조금 부족한 이에게는 너무나 황당하고 어렵게만 보여집니다
불교 알고나면 쉽고 진면목이며, 참된성품의 표현임을 알게 됩니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참된 깨침의 소리 배웁니다
늘 청안하소서..나무아미타불 ()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귀한 가르침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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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
고맙습니다. 나무관세음보살 ()
감사합니다
無比스님 講說 21 - 臨濟錄 - 上堂 - 1-2 佛法의 大意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 나무 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
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나무아미타불,_()__()__()_
감사합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_()_
佛法僧 三寶님께 歸依합니다.
거룩하시고 慈悲하신 부처님의 加被와 慈悲光明이 비춰주시길 至極한 마음으로 祈禱드립니다. 感謝합니다.
成佛하십시요.
南無阿彌陀佛 觀世音菩薩()()()
I return to Buddha, Law, and Seung Sambo.
I pray with utmost heart that the holy and holy Buddha's robe and mercy light will shine on it. Thank you.
Holy Father.
Avalokitesvara Bodhisattva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