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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보살소문경론 제7권
3.5. 인자한 마음을 성취함
[문] 인자한 마음[慈心]을 성취한다 함을 묻겠다.
무엇 때문에 여래께서는 방편에 회향함을 잘 아는 것을 말씀한 뒤에 인자한 마음 성취함을 말씀하셨는가?
[답] 계율의 지님과 보시는 바로 마음을 산란시키는 것이어서 도를 닦는 공덕은 결정코 욕심세계의 과보를 받지만,
보살은 방편에 회향하여 결정코 욕심세계의 과보를 거두어 큰 보리를 구하는 것으로 전환시켜 그 과보는 일정하지 않다 함을 나타내 보이고 보살도를 잘 닦고 익힐 수 있음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또, 계율을 지님과 보시는 바로 삼매의 마음이어서 도를 닦는 공덕은 결정코 선정 자리의 과보를 받지만,
보살은 방편에 회향하여 결정코 선정 자리의 과보를 껴잡아 큰 보리를 구하는 것으로 전환시켜 과보는 일정하지 않다 함을 나타내 보이고 보살도를 잘 닦고 익힐 수 있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래께서는 방편에 회향함을 말씀하시고 다음에 인자한 마음 성취하는 것을 말씀하셨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범부는 진실한 법계(法界)를 사실대로 모른다.
끝없는 세상으로부터 무지(無智)를 닦고 익혔으므로 무지 때문에 나[我]와 내 것이라는 법을 멀리 여읠 수 없었고
망령되이 나와 내 것에 집착하기 때문에 빛깔 경계의 애욕의 마음에 얽매이게 된다.
그 때문에 마음은 항상 세간의 과보를 구하고 극악한 행위를 지으며 저절로 세간의 과보가 성취되므로 계율과 보시를 수행하면 결정코 같은 세계의 과보가 성취된다.
그러나 보살의 마음은 모든 세간에 있는 온갖 허물과 근심들을 보고 열반의 안락한 이익을 보고서 진실한 법계를 잘 깨닫고 알 수 있으며,
인연과 함이 있는 모든 행을 잘 알므로 그 마음은 오직 위없는 보리만을 위하여 계율과 보시 등을 닦아서 세간의 모든 험난한 데 떨어져서 방일한 중생을 구제하고 제도하려 한다.
계율을 지니고 보시함이 비록 저 세간의 과보를 취득하지 않더라도 중생들을 위하여 온갖 행을 닦으며 자신을 위하여 과보를 취득하지 않으므로, 닦는 큰 공덕의 힘이 더욱 자라나며, 마음을 껴잡아서 방편에 회향하므로 구하는 곳의 과보가 따르며 성취된다.
[네 가지 한량없음]
[문] 네 가지 한량없음[四無量]을 말해야 하리라.
어떻게 보살은 네 가지 한량없음을 성취하는가?
어떤 것이 행(行)이며, 어떤 것이 세상의 변론[世辯]이며, 어떤 것이 바탕[體]이며, 어떤 것이 형상[相]이며, 어떤 것이 자리의 차별[地差別]이며,
어디에 의지하여 머무르며, 어느 경계를 자세히 살피며, 어떠한 법을 자세히 살피며,
어떤 것이 서로 응함[相應]이며, 어떤 것이 얻음[得]이며, 어떤 것이 성취된다는 이치인가?
[답] 어떻게 보살은 네 가지 한량없음을 성취하는가?
그것이 외도들과는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외도들이 비록 네 가지 한량없음의 행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애욕의 마음에 적셔지고 집착되었나니, 그러므로 형상세계의 과보를 성취한다.
또, 성문승의 사람과 벽지불 등은 온갖 선한 뿌리를 모두가 자신을 위하고 그 마음은 항상 자신의 즐거움을 위하기 때문에 열반을 취하며, 번뇌의 뜨거움을 두려워하고 모든 번뇌를 누르기 위하여 한량없음을 수행하는 것이며, 중생을 위함은 아니다.
만약 보살마하살들이라면, 그 마음은 언제나 일체 중생을 위하여 모든 행을 수행하여 모두를 다 일체 중생에게 돌려 베풀며,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써 계율과 보시 등을 일으킨다.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려 하여 비록 세간의 극악한 허물과 근심에 핍박을 당한다 하더라도 모든 중생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낱낱 중생의 괴로움을 없애 주고 마침내 온갖 괴로움을 고요히 없앤다.
한량없는 중생들의 몸과 낱낱의 몸에 한량없는 가지가지의 괴로움과 차별이 있음을 자세히 살피고, 또 하나하나의 방편을 사실대로 알아서 저 한량없이 괴로워하는 중생을 구제하며, 한량없는 시일에 비록 열반의 경계를 보고 한량없는 중생을 자세히 살핀다 하더라도 한량없는 부처님 법을 성취할 수 있나니, 이런 이치 때문에 보살이 한량없음을 성취한다고 한다.
또, 과보를 두루 거두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마하살들은 한량없고 그지없는 행을 수행하기 때문에 인자함[慈] 등이 한량없나니, 그러므로 보살은 한량없음을 성취한다.
무진의수다라에서 거룩한 무진의가 사리불에게 말한 것과 같다.
“대덕 사리불이여, 보살이 닦는 인자함 또한 다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러한가?
보살의 인자함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이러한 닦는 인자함이야말로 제한이 없으며 중생계(衆生界)와 같습니다.
보살이 인자함을 닦으면서 내는 마음은 널리 덮어지나니,
사리불이여, 마치 허공이 널리 덮지 아니함이 없는 것처럼 이 보살의 인자함도 그와 같아서 일체 중생에게 널리 덮지 아니함이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마치 중생계가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다할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의 닦는 인자함도 그와 같아서 한량없고 그지없어서 다할 수가 없으며, 허공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중생계도 다함이 없고 중생이 다함이 없기 때문에 보살이 닦는 인자함도 역시 다할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또, 다른 이를 안온하게 하고 공덕을 주기 위하여 마음을 일으켜 수행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마하살은 네 가지 한량없음을 닦지만, 자신을 위함이 아니고 일체 중생을 위함이며 필경에는 일체 중생을 안온하게 하기 위하여 공덕을 주는 마음이니, 그 때문에 성취한다.
무진의수다라에서 무진의보살이 사리불에게 말한 것과 같다.
“대덕 사리불이여, 이 인자함은 스스로 자기 몸을 옹호할 수 있을뿐더러 이 인자함은 역시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할 수 있으며, 이 인자함은 다툼이 없고 이 인자함은 온갖 성냄과 원한을 끊을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것 등이다.
어떤 것이 행이냐 함은 싫어하는 것이 있음을 말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싫어함에 의하여 얻게 되는 세 가지 한량없음이니, 저 초선(初禪)의 자리에 있는 한량없음은 욕심세계를 싫어함에서 얻고, 이와 같이 하여 제4선 중에 이르러 있는 한량없음은 3선을 싫어함에서 얻는다. 그런 뒤에 방편을 짓고 그 뒤에 나타나게 된다.
[문] 무엇을 한량없음이라 하여 방편을 수행하는가?
[답] 인자함은 친한 때에 의하여 일으킨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이 만약 네 가지 한량없음을 닦으려 하면,
그때의 마음에는 일체 중생을 세 가지로 분별한다.
첫째가 친한 부분이며,
둘째가 원망하는 부분이며,
셋째가 친함도 아니고 원망도 아닌 부분이다.
친한 부분 중에서도 다시 세 가지로 나누게 되고,
세 가지로 나눈 뒤에는 그 세 가지 부분 중에서 맨 위의 친한 데서 일어나는 것을 맨 위의 친함과 안온함과 즐거운 마음을 준다.
이른바 부모와 그 밖에 존중하는 여러 스승과 승가이다.
끝없는 동안 오면서 익힌 극악한 마음은 평등하기 어렵나니, 그러므로 이와 같이 분별하여 은혜를 갚으며 친한 신분 중에서는 평등할 수 없으므로 차츰차츰 닦고 익힌다.
또, 이에 평등하여 만약 마음이 저와 같이 왕성하게 친한 가운데에서나 원망하는 부분 중에서나 간에 마음이 평등함에 머무르면 부모에게 즐거움을 주는 마음과 같아서 다름이 없으리니, 그때에 인자한 마음을 성취한다고 한다.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과 기뻐하게 하는 마음[喜心]과 버리는 마음[捨心]도 역시 그와 같은 줄 알아야 하며,
버림의 한량없음[捨無量]은 원망하지도 않고 친하지도 않은 부분 중에서 일으켜야 비로소 성취된다.
또,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번뇌를 여의지 않고서도 선정 자리를 닦고 모은 방편이 한량없으며, 만약 번뇌를 끊으면 초선을 껴잡음이 한량없나니, 이와 같이 네 가지 한량없음을 차례로 성취하는 줄 알아야 한다.
[네 가지 한량없음의 세 가지]
또, 네 가지 한량없음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중생관(衆生觀)이며,
둘째 법관(法觀)이며,
셋째 무관(無觀)이다.
처음 보리심을 낸 보살이 아직 중생의 모습[相]을 모르면 외도와 성문과 벽지불의 관(觀)과 같아서 한량없나니,
이를 중생관의 한량없음[衆生觀無量]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곧 저 중생관이 한량없다가 차례로 점점 더욱 자라서 뛰어나게 되면 사실대로 중생의 모습을 알고서 보살행을 닦지만,
아직 온갖 함이 있는 법의 모습을 모르므로 거짓으로 이름한 중생의 함이 있는 모든 행에 의하여 중생의 모습과 쓸모없는 의론을 일으켜 곧 이 함이 있는 행을 취하여 중생이라 생각하나니,
법관의 한량없음[法觀無量]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이 사실대로 함이 있는 모습을 알 수 있으면 생멸 없는 법의 지혜[無生法忍]를 얻으며,
인자한 마음을 따른 뒤에는 다음에 평등관(平等觀)의 반야를 내나니,
인자한 마음이라고 말하며 무관의 한량없음[無觀無量]이라고 하니,
마치 인자한 마음과 함께 서로 응하는 각분(覺分)과 같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인자한 마음의 뒤에 택법각분(擇法覺分)을 내어도 인자함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서,
이와 같이 인자함이 한량없는 뒤에 평등관의 반야를 얻으면 인자함의 한량없음[慈無量]이라 말하나니,
이를 무관의 한량없음이라고 한다.
또,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남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하여 인자한 마음으로부터 짐짓 온갖 행을 일으킨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일으키는 모든 행은 모두가 다 인자한 마음으로부터 나나니, 다른 중생을 이롭게 하기 때문이며 다른 중생을 안온하게 하기 때문이다.
생멸 없는 법의 지혜를 얻는 보살마하살의 반야가 만약 인자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난다면, 일체 중생의 안온한 즐거움과 함께 인자한 마음과 흡사하므로 인자함이라 말한다.
또, 세속 도리[世諦]의 경계의 법과 첫째가는 진리[第一義諦]의 경계의 법은 서로서로 함께 의지하여 더욱 자라서 힘을 지니니, 널리 수행하여 무관(無觀)을 성취할 수 있다.
좋고 깨끗하다고 말하며 인자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어찌하여 세속 도리의 경계가 반야의 원인이 된다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모든 법의 바탕을 보고서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의하여 중생들이 짓는 일을 자세히 살피므로 성문과 벽지불의 자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런 이치 때문에 중생의 하는 일을 버리지 않나니, 이것을 곧 세속 도리의 경계라고 하며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 등의 법은 반야의 원인이 된다.
어찌하여 첫째가는 진리의 경계인 반야는 세속 도리의 경계인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 등이 원인이 된다고 하는가?
모든 보살은 세속 도리인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 등의 법을 깨끗이 하려 하여 중생의 행과 모습에 의지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키고 번뇌를 자세히 살피어 깊이 중생의 행과 모습을 앎으로써 사실대로 번뇌는 중생의 행과 모습으로부터 일어나는 줄 안다.
그러므로 보살은 인자함 등의 깨끗하지 못한 원인인 온갖 번뇌를 멀리 여의나니, 이를 반야는 세속 도리의 경계인 법의 원인이 된다고 한다.
모든 보살들은 이와 같이 반야의 방편을 수행하고 널리 모든 행을 닦나니, 그 때문에 생멸 없는 법의 지혜를 성취한다.
그때에 무관(無觀)으로 중생의 하는 일인 원인을 버리지 아니하여 마지막의 인자한 마음을 깨끗이 하므로 이름이 인자한 마음이며, 인자한 마음이라 말하므로 이를 무관이라고 한다.
어떤 것이 세상의 변론인가 함은 저 한량없음의 이름을 해석하여 그지없는 중생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것이니, 그 때문에 한량없음이라고 한다.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
어떤 것이 바탕인가 함은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바탕은 성내지 않는 선한 뿌리가 그것이다.
왜 그러한가?
성냄을 다스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 성낼 수 있는 것을 다스리므로 이를 인자함이라고 하며,
성낼 수 없는 것을 다스리므로 이를 가엾이 여김이라 한다.
또, 중생을 버리려는 마음을 다스리므로 이를 인자함이라 하고,
중생을 때리는 마음을 다스리므로 이를 가엾이 여김이라 한다.
이는 공덕을 구하기 때문에 한량없음을 낼 수 있고 허물을 구함이 아니기 때문에 한량없음을 낼 수 있다.
왜 그러한가?
모든 보살은 선한 뿌리를 끊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만약 공덕을 구하면 깨끗한 업의 과보를 보고, 아라한의 주변에 이르기까지 만약 과실을 구하면 나쁜 업의 과보를 보기 때문이다.
왜 그러한가?
아라한은 현재 몸의 동안에는 선하지 못한 업의 과보를 받는 것을 보지만 과거의 남은 업이 다하지 않았음을 보지 못하나니, 아라한은 지금의 몸으로 나쁜 것을 지었음을 말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아라한은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의 한량없음을 일으킬 수가 없다.
기뻐하게 하는 마음의 바탕은 기뻐함의 뿌리가 그것이며, 버리는 마음의 바탕은 탐내지 아니함의 선한 뿌리가 그것이다.
[문] 만약 그렇다면, 탐욕과 해침의 뿌리 따위는 다스림의 법이 아니리라.
[답] 그렇지 않다. 성내지 않는 선한 뿌리와 서로 응하는 법이기 때문에 짐짓 그렇게 말한다.
[문] 만약 버리는 마음으로 탐냄의 법을 다스릴 수 있다면 부정관(不淨觀)도 역시 탐냄의 법을 다스리리라.
[답] 그대는 어떠한 탐냄의 법은 버리는 마음으로 다스릴 수 있고, 어떠한 탐냄의 법은 부정관으로 다스릴 수 있음을 아는가?
[문] 모른다.
[답] 그대는 들어라. 빛깔의 탐냄은 부정관으로 끊을 수 있고, 음행의 탐냄은 버리는 마음으로 끊을 수 있나니, 이 네 가지 한량없음은 마음과 한가지로 차츰차츰 다섯 가지 쌓임이 바탕이 된다.
[네 가지 한량없음의 형상 등]
어떤 것이 형상인가 함은
중생에게 즐거운 형상을 주어 중생을 편안하게 하고 고요하게 하면 이를 인자한 형상[慈相]이라 하고,
중생의 괴로운 형상을 뽑아서 사라짐의 형상과 고요함의 형상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기면 이를 가엾이 여기는 형상[悲相]이라 하고,
즐겁지 아니한 마음의 형상을 버리고 시샘이 다스려지는 법이면 이를 기뻐하게 하는 형상[喜相]이라 하며,
사랑함[愛]과 사랑하지 않는 형상을 버리고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과 원인에 서로 어긋나는 법이면 저절로 멋대로 놓아버리면, 이를 버리는 형상[捨相]이라 한다.
어떤 것이 자리의 차별이냐 함은
기뻐하게 함의 한량없음[喜無量]을 제외한 그 나머지 세 가지 한량없음은 여섯 가지 자리[六地] 안에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무엇이 여섯 가지 자리인가?
미래선(未來禪)과 중간선(中間禪)과 네 가지 근본의 선정이니, 이를 여섯 가지 자리라고 한다.
초선과 2선은 기뻐하게 함의 한량없음이 있고, 나머지 세 가지 한량없음은 네 가지 선정 중에 두루 있으며 기뻐하게 함의 한량없음은 기뻐함의 뿌리로 바탕을 삼기 때문이다.
어디에 의지하며 머무르는가 함은
욕심세계에 의지하여 머무르나니, 욕심세계 중에서 실제로 네 가지 한량없음이 일어나고 그 밖의 처소는 아니다.
왜 그러한가?
욕심세계 중생은 괴로움이 많기 때문에 중생이 괴로워함을 보고서 즐거움을 주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중생이 괴로워함을 보고서 괴로움에서 뽑아 주려는 마음을 일으키지만 형상세계와 무형세계에는 괴로움이 없기 때문이다.
또, 이는 괴로움과 해침 따위가 다스려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네 가지 한량없음은 해침 따위를 다스리는 법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치 때문에, 경전에서 말씀하기를
“인자한 마음의 아래와 중간과 위를 수행하면 해침을 여의는 마음을 성취하며,
가엾이 여기는 마음의 아래와 중간과 위를 수행하면 성냄을 여의는 마음을 성취하며,
기뻐하게 하는 마음의 아래와 중간과 위를 성취하면 즐겁지 않음을 여의는 마음을 성취하며,
버리는 마음의 아래와 중간과 위를 수행하면 탐욕과 해침 따위를 여의는 마음을 성취하느니라”고 하셨나니,
형상세계의 무형세계에는 탐욕과 해침 따위가 모두 없다.
이런 이치 때문에, 욕심세계 안에 있고 형상세계와 무형세계는 없으며, 비록 욕심세계에 있기는 하나 오직 3천하일뿐이며, 울단월(鬱單越)에는 제외된다.
어느 경계를 자세히 살피는가 함은
인자함으로써 즐거움을 살피고, 가엾이 여김으로써 괴로움 뽑아버림을 살피고, 기뻐하게 함으로써 기뻐하는 경계를 살피며, 버림으로써 버리는 경계를 자세히 살핀다.
어떠한 법을 자세히 살피는가 함은
욕심세계 중생의 다섯 가지 쌓임인 몸을 자세히 살피나니, 혹은 두 가지 쌓임[二陰]을 자세히 살피기도 한다.
또, 만약 마음을 한 가지로 하는 같은 무리면 그것은 곧 다섯 가지 쌓임이며, 마음을 한 가지로 하는 같은 무리가 아니면 그것은 곧 두 가지 쌓임이다.
혹은 마음이 없는 중생[無心衆生]을 살피기도 하고, 혹은 한 가지 쌓임[一陰]의 중생을 살피기도 하고, 혹은 두 가지 쌓임의 중생을 살피기도 한다.
[문] 어느 경전에서 말씀하시기를
“인자함, 가엾이 여김, 기뻐하게 함, 버림[慈悲喜捨]은 한 편의 허공 법계에 널리 두루하고, 이와 같이 하여 시방 세계에 이르기까지 두루 덮느니라”고 하셨는데,
이 중에서는 다만 중생 살피는 것만을 말하는가?
그 이치는 무엇인가?
[답] 시방에 두루한다 함은 세계를 의지하여 머무는 모든 중생 일체를 살피기 때문이다.
시방 세계를 두루 덮는다 함은 저 기세간(器世間)를 두루 덮는다는 것이 아니며, 널리 두루하다 함은 저 기세간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모든 중생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또, 초선의 자리 한량없음[初禪地無量]은 욕심세계 중생을 자세히 살피며, 2선의 자리 한량없음[禪地無量]은 욕심세계와 초선을 자세히 살피며, 이와 같이 하여 4선의 자리 한량없음에 이르러서는 욕심세계와 제3선까지를 자세히 살핀다.
또, 초선의 자리 한량없음은 욕심세계와 초선을 자세히 살피며, 이렇게 하여 4선의 자리 한량없음에 이르러서는 욕심세계와 제4선까지를 자세히 살핀다.
또, 인자함은 욕심세계와 3선까지를 자세히 살핀다.
왜 그러한가?
인자한 마음으로써 즐거움의 경계를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또 즐거움의 뿌리는 욕심세계로부터 제3선까지이기 때문이다.
가엾이 여김은 욕심세계와 초선까지를 자세히 살핀다.
왜 그러한가?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써 괴로움의 경계를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욕심세계 중생은 괴로움이 많기 때문이며, 또 괴로움의 뿌리는 욕심세계로부터 초선까지이기 때문이다.
기뻐하게 함은 욕심세계와 제2선까지를 자세히 살핀다.
왜 그러한가?
저 기뻐하게 하는 마음은 매우 기뻐하는 형상이기 때문이며, 또 기쁨의 뿌리는 욕심세계로부터 제2선까지이기 때문이다.
버림은 욕심세계와 제4선까지를 자세히 살핀다.
왜 그러한가?
버림과 버림의 형상[捨相]으로써 자세히 살피기 때문이며, 또 버림의 뿌리는 욕심세계로부터 제4선까지이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한량없음은 욕심세계의 중생만을 자세히 살핀다”고 하였다.
어떤 것이 서로 응함인가 함은 초선과 2선 자리에서 기뻐하게 함의 뿌리와 버림의 뿌리가 서로 응하며, 제3선의 자리에서 즐거움의 뿌리와 버림의 뿌리가 서로 응하며, 미래선과 중간선과 제4선의 자리에서 버림의 뿌리가 서로 응하게 된다.
어떤 것이 얻음인가 함은,
만약 제3선, 제4선이 생기면 기뻐하게 함의 한량없음을 제외한 세 가지 한량없음을 얻는다.
왜 그러한가?
3선 이상에서는 기뻐하게 함의 뿌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 욕심세계에서 번뇌를 여읨이 생기거나 초선과 2선에 있으면서 생기면 네 가지 한량없음을 얻는다. 마치 여래의 수다라에서 말씀한 것과 같나니,
“인자함의 한량없음은 변정천(遍淨天)까지를 끝으로 삼고, 가엾이 여김의 한량없음은 허공의 처소[空處]까지를 끝으로 삼고, 기뻐하게 함의 한량없음은 위로 의식의 처소[識處]까지를 끝으로 삼고, 버림의 한량없음은 아무것도 없는 처소[無所有處]까지를 끝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왜 그러한가?
근본인 초선은 포섭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한량없음은 그지없는 허공의 처소를 끝으로 삼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곳의 거룩한 도[聖道]는 한량없음의 이름으로써 말한다”고 하였다.
왜 그러한가?
교화할 수 있는 중생은 이와 같은 근기가 있으므로 한량없음의 이름을 듣고서 거룩한 도에 와서 들기 때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저 대치각분(對治覺分)과 보리분(菩提分)에 의하여 말한다”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제3선이 대치각분으로서 곧 각분은 인자함이라 말하며, 이렇게 하여 아무것도 없는 처소에 이르기까지 저 대치각분에 의하여 버림이라 말하게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것은 서로가 비슷한 법이다”라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인자함으로써 즐거움과 즐거움의 느낌을 자세히 살피고,
이에 제3선까지 가엾이 여김으로써 괴로움과 그지없는 허공의 처소가 빛깔이 같은 것과 서로가 어긋남을 자세히 살피며,
기뻐하게 함으로써 즐거워함이 없음과 그지없는 의식의 처소에서 의식의 기쁨이 머무르는 까닭을 자세히 살피며,
버림으로써 버림과 아무것도 없는 처소에서 버리되 버리는 것이 없음을 버림이라고 말함을 자세히 살핀다.
또, 다른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대덕 사리불이여, 처음 마음을 낸 보살은 네 가지 한량없음으로써 중생을 자세히 살피므로 중생관(衆生觀)이라 하며,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행을 행하면서 자기의 행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법관(法觀)이라고 하며,
보살마하살이 매우 깊은 생멸 없는 법의 지혜를 얻으므로 무관(無觀)이라고 하느니라”고 하셨다.
[문] 네 가지 한량없음은 중생을 자세히 살피거늘, 어찌하여 또 법(法)을 자세히 살피고 없음[無]을 자세히 살피는가?
[답] 다른 이를 위하여 이롭게 하는 온갖 행 등이 인자함과 서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을 위하여 온갖 행을 닦으나 모두가 반야로써 근본을 삼는다. 그러므로 반야는 인자함이라 말한다.
저 인자함은 남을 즐겁게 할 수 있는 형상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보살은 자신의 즐거움을 버리며, 반야바라밀은 남에게 즐거움을 주는 형상이므로 반야는 인자함이라 말한다. 그 때문에 법을 자세히 살피고 없음을 자세히 살핌은 모두가 이는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것과 반야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무관(無觀)의 인자한 마음을 인자함이라 말한다”고 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모든 보살은 중생을 자세히 살피고, 또 자신을 위하여 번뇌를 멀리 여의는 방편을 추구하면서 함이 있음의 행을 자세히 살피어 매우 깊은 한량없음의 마음을 얻을 때에 곧 마지막 반야의 힘을 얻으며,
생각하기를
‘이 모든 중생들은 무지(無智)에 덮여서 사실대로 법계를 알거나 볼 수가 없으니, 나는 장차 그 중생들이 점차로 바른 도에 들 수 있게 하리라’고 한다.
또, 다른 수다라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세상에 7년 동안 인자한 마음을 닦고 행하였더니, 세계가 이루어졌다가 무너지기를 일곱 번을 하는 동안에 여기에 와서 나지 않았으며, 한량없는 백천만겁에 이르기까지 전륜왕 등이 되었느니라.”
[문] 만약 네 가지 한량없음으로써 얻게 되는 과보가 욕심세계의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여래의 경전 중에서 말씀하시기를
“한량없음을 수행한 과보로 한량없는 백천만 겁에 이르기까지 전륜왕(轉輪王)이 되었느니라”고 하시는가?
[답] 그 경전 중에서는 세 가지 자리[三地]의 한량없음에 의하였으므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이 뜻은 무엇인가?
욕심세계 자리의 과보로서 한량없음은 전륜왕이 되고, 초선 자리의 과보로써 한량없음은 범천왕이 되고, 2선 자리의 과보로서 한량없음은 소광천(少光天)에 난다.
또, 욕심세계에서 일으키는 마음의 삼마발제(三摩跋提)로서의 온갖 과보는 제석왕과 전륜왕이 되고, 근본자리의 선정으로서의 온갖 과보는 범천왕이 되며 소광천에 나게 된다.
또, 다른 수다라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에게 말씀하시기를
“과거의 세상에 외도의 스승으로서 선안세존(善眼世尊)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신통을 얻었고 욕심세계의 번뇌를 여의었느니라.
비구들아, 그 외도의 스승 선안세존은 한량없는 성문제자들이 있어서 한량없는 백이 있었고 한량없는 천이 있었고 한량없는 만이 있었고 한량없는 백천만이 있었느니라.
비구들아, 그 외도의 스승 선안세존의 모든 성문들은 두루 갖추어서 계율을 지녔으며, 그 외도들은 네 가지 맑은 행[四梵行]을 닦아 욕심세계의 번뇌(煩惱)를 여의었는데, 네 가지 맑은 행을 닦았으므로 범세간(梵世間)에 났느니라.
비구들아, 그 외도의 스승 선안세존에게 있었던 제자들은 네 가지 맑은 행을 갖추어 닦지 못하였으므로 그 제자들 중에는 혹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나기도 하고 인간 중에 나기까지 하는 등 이러하였느니라.
그때 외도의 스승 선안세존께서는 이러한 마음을 내었나니,
‘나는 이제 이것이 아니로다. 어떻게 하여야 제자들과 함께 한 처소로 가고 한곳에 나게 될까?’ 하고,
이렇게 생각하고서
‘나는 인자한 마음에 의하여 제2선을 닦아 소광천에 나리라’고 하였느니라.
비구들아, 그때 외도의 스승 선안세존은
‘으뜸가는 큰 인자함을 닦아 제2선에 들자 제2선이 생기었느니라’”고 하신,
이와 같은 등이다.
[문] 만약 모든 보살마하살들이라면 다른 이를 이롭게 하기 위하여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거늘
무엇 때문에 스스로가 훌륭한 마음과 인자한 마음을 내어서 제2선을 닦고 소광천에 나는가?
그리고 제자들을 위하여 소광천에 나는 법을 말하지 않았는가?
또 다시 따질 것이 있다.
왜 그러한가?
저 모두가 으뜸가는 선한 갈래에 났기 때문이니, 여래의 성문들도 나쁜 갈래에 들어가는 이가 있다.
[답] 이것은 과실이 없다.
왜 그러한가?
보살은 근기를 자세히 살펴서 법을 말씀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저 외도 바라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생각하기를,
‘처음 범천의 처소가 마지막 처소다’ 하여,
즐거운 마음을 따르면서 그곳에 나므로 제2선을 내는 네 가지 한량없는 행을 수행할 수 없었다.
이런 이치 때문에 보살은 저 제자들의 마음을 잘 알므로 그들을 위하여 제2선을 내는 네 가지 한량없는 행을 말하지 않았다.
또, 힘이 없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심을 제외하고, 외도로서는 2선의 한량없음을 갖추 수행하여 제2선을 낼 수 없다. 다만 큰 힘을 지닌 보살들만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또, 외도의 법이 부처님 법보다 훌륭하다고 하는데, 이 이치는 그렇지 않다.
왜 그러한가?
외도는 세간의 과보를 취득하기 때문이다.
또, 시절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이러한 때에 있어서도 많은 중생들이 선한 갈래의 처소에 나거든, 하물며 다시 한량없는 중생들이 한량없음을 닦고 행하는 것이겠는가?
또, 여래의 제자들도 나쁜 갈래에 들어간다고 하는데 여래의 허물이 아니다.
또 다른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 행이 있는데, 맑은 행[梵行]과 하늘의 행[天行]과 거룩한 행[聖行]이니라.
맑은 행이라 함은 네 가지 한량없음이며,
하늘의 행이라 함은 이른바 4선(禪)이며,
거룩한 행이라 함은 서른일곱 가지의 보리분법(三十七菩提分法)이니라”고 하셨다.
[문] 무슨 이치 때문에, 네 가지 한량없음을 맑은 행이라 말씀하셨는가?
[답] 네 가지 한량없음은 범천의 원인이기 때문이며,
또 수행하는 이는 몸 안에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맑은 행 아닌 것을 다스리기 때문이다.
[문] 무엇 때문에 형상세계의 여러 선한 뿌리 가운데서 오직 한량없음만이 복되는 일이 된다고 말하는가?
[답] 다른 이의 이익되는 행을 일으키게 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세상 사람들은 남을 이롭게 하는 가운데서 공덕의 모습이 많이 생기고, 다른 이익 중에서는 생기는 것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문] 또, 다른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네 가지 사람이 있어서 범천의 공덕을 낼 수 있느니라.
무엇이 네 가지 사람인가?
[답] 첫째 기세간의 땅에 아직 탑이 없는 곳인데 그 가운데 탑을 세우는 이이며,
둘째 동산에 숲을 심어서 사방의 승가에 보시하는 이이며,
셋째 먼저 깨뜨려졌던 승가를 화합시키는 이이며,
넷째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을 낼 수 있는 이이니라”고 하셨다.
[문] 만약 네 가지 한량없음을 닦으면 범천의 과보를 얻으므로 범천의 과보를 성취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는데, 탑 등을 세우는 세 가지도 범천의 과보를 얻는다면 이 이치는 어떠한 것인가?
[답] 맑은 행에 의하여 말하는 것이므로 허물이 없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탑 등을 세우는 것으로 범천의 과보를 성취하는 것이 아니고,
만약 어떤 사람이 맑은 행에 의해 여래의 사리탑을 세우면 그 사람은 맑은 행의 공덕을 낼 수가 있으며, 또 맑은 행을 닦는 이에게 동산과 숲을 보시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보시하는 이는 맑은 복을 성취하게 된다.
또 거룩한 도에 의하여 맑은 행을 닦아 익히고 깨뜨려진 승가를 화합시키면 범천의 과보를 얻게 된다.
또, 그것은 서로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탑 등을 세우는 세 가지로 범천의 과보를 성취하지만, 공덕은 한결같이 네 가지 한량없음의 과보와 같은 것이 아니며, 그것은 조금씩 서로가 비슷한 이치이기 때문이다.
마치, 사람이 네 가지 한량없음의 마음을 성취하는 그 사람은 곧 중생을 거두어 받기 위하여 한량없는 이익의 공덕을 성취하는 것처럼,
이것도 그와 같아서 만약 사람이 그 기세간 가운데서 아직 탑이 없는 처소에서 사리탑을 세우거나 승가에 동산과 숲을 보시하거나 깨뜨려진 승가를 화합시키면 그것은 한량없는 복덕을 성취할 수 있다.
이런 이치 때문에 네 가지 한량없음을 닦는 것과 탑을 세우는 것 등의 세 가지는 서로가 비슷한 이치가 있게 된다.
[문] 맑은 행의 공덕은 그 양이 얼마나 되는가?
[답]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떠한 업을 따라서 전륜왕이 되어 4천하에서 임금 노릇을 하며 세력이 자재한 것과 맑은 행의 공덕은 그 양이 그와 같은가?”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떠한 업을 따라서 제석왕이 되며 세력이 자재한 것과 맑은 행의 공덕은 그 양이 그와 같은가?”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떠한 업을 따라서 악마왕이 되어 욕심세계 안에서 세력이 자재한 것과 맑은 행의 공덕은 그 양이 그와 같은가?”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어떠한 업을 따라서 범천에 나게 되는 것과 맑은 행의 공덕은 그 양이 그와 같은가?”라고 하며,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범천이 부처님께 법바퀴 굴리기를 청하여 그에 따라 얻게 되는 복과 맑은 행의 공덕은 그 양이 그와 같다”고 한다.
[문] 또, 다른 수다라 중에서 여래께서 말씀하시기를
“만약 어떤 사람이 인자한 마음을 능히 성취하면, 그 사람의 공덕은 불이 태울 수 없고 물이 떠내려 보낼 수 없고 칼이 벨 수 없고 독이 해칠 수 없으며 수명은 중간에 죽지 않느니라”고 하셨는데, 어떠한 이치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하였는가?
[답]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지닌 경계는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일체 선정은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으며, 온갖 업은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나니, 이와 같은 것 등이다.
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라도 한량없는 중생에게 한량없는 편안함과 고요함을 줄 수 있다”고 하였나니,
그 때문에 저 바깥의 인연으로써는 해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또, 그 사람은 형상세계의 네 가지 원소[四大]를 기억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그는 인자한 마음을 닦고 익히는 사람으로서 인자한 마음에 들어갔기 때문에 형상세계에 의한 형상세계의 네 가지 원소의 몸을 성취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바깥의 여러 인연으로써는 해칠 수 없다.
[문] 어떠한 이치 때문에, 이 수다라에서는 다만 인자한 마음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수행하면 많은 공덕을 얻는다고만 말하고 기뻐하게 함과 버림은 말하지 않는가?
[답] 다른 이를 이롭게 하며 수행함이 많기 때문이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닦아서 즐거움을 부여하고 고통을 뽑아 주며,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에 의하기 때문에 마음을 일으켜 수행하고 버리며 보시하는 따위로 한량없는 복을 얻지만, 기뻐하게 함과 버림 등은 이렇게 할 수가 없다.
이런 뜻은 무엇인가?
저 기뻐하게 함의 마음은 다른 중생을 보고 스스로가 선한 업을 닦고 스스로가 즐거움을 받게 됨으로써 그 사람은 기쁨을 낸다. 그러므로 기뻐하게 함과 버림은 이와 같아서 다른 중생이 스스로가 마음으로 성내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愛心]과 해침이 없는 마음을 분별하므로 버림이라 한다.
이런 이치 때문에,
기뻐하게 함과 버림의 복은 적지만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의 복은 많으며,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의 마음으로써 다른 이에게 주는 한량없는 이익과 즐거움을 성취하는 것이며,
이는 기뻐하게 하는 마음과 버리는 마음으로써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성내는 마음을 다스리면 인자한 마음이라 하며 성내지 않는 선한 뿌리가 바탕이 되기 때문이니, 가장 훌륭한 이치로써 성냄을 다스린다.
왜 그러한가?
성내는 마음 때문에 중생들을 버리며 일체 중생에게 줄 이익되는 일과 서로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지 않는 일을 다스린다.
이로 인하여, 경전 중에서 다스림을 수행하는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 등을 말씀하셨다.
또, 보리심을 내어 모든 선한 행을 닦음은 모두가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근본이 된다.
이는 무슨 뜻을 설명하는 것인가?
곧 이 수다라에서 물러나지 않는 마음은 보리심을 내는 원인을 성취하는 것이라 말하였으며, 그 보리심을 내는 데에 처음 내려고 함에는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근본으로 삼나니, 곧 한량없는 공덕을 닦고 모을 수 있는 것은 기뻐하게 함과 버림 등이 아니다.
이런 이치 때문에, 이 수다라에서는 오직 인자함과 가엾이 여김만이 공덕을 많이 낸다는 것을 말하고 기뻐하게 함과 버림은 말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10지(地) 수다라에서 말씀하시기를
“저 보살이 보리심을 내되 이 마음은 크게 가엾이 여김이 근본이 되느니라”고 하셨다.
이와 같은 것들은 마침내 크게 인자함과 크게 가엾이 여김의 몸ㆍ업ㆍ뜻의 업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또 이 삼매의 몸ㆍ입ㆍ뜻의 업은 인자함과 가엾이 여기는 마음에 의하여 일어나며, 즐거움을 주는 것과 서로 응하므로 인자한 마음이라고 말한다.
세간의 원인을 보고 가운데서 결과를 말함은 마치 세간에서 나무로 만들고 그림으로 만드는 원인 가운데서 결과를 말하는 것과 같나니, 해침이 없는 몸ㆍ입ㆍ뜻의 업을 성취함은 가엾이 여기는 것으로써 해치는 마음을 다스리고 남을 괴롭히는 몸ㆍ입ㆍ뜻의 업을 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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