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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13권
변차별품 ⑤
6.8. 유위 4상(相)
1) 4본상(本相)
명근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다.
무엇을 온갖 상(相)이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상(相)이란 말하자면 온갖 유위가
생(生)ㆍ주(住)ㆍ이(異)ㆍ멸(滅)하는 성질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이와 같은 네 종류가 바로 유위의 상(相)으로,51) 이는 곧 유위의 성질을 나타내기 때문에 그것(유위)의 ‘상(相)’이란 명칭을 얻게 된 것이다.
여기서 ‘생(生)’이란, 이를테면 어떤 개별적인 법으로서, 바로 이러한 유위행(有爲行)이 생겨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게 하는 두드러진 원인[勝因]을 말하니, 제행을 능히 인섭(引攝)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생겨나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능히 인섭한다’고 함은, 그것이 생겨날 때 이러한 법(즉 生相)이 능히 그것의 두드러진 연[勝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 비록 제행(諸行)이 일어나는 것을 모두 ‘생’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여기서의 ‘생’이라는 개념은 다만 제행이 생겨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게 하는 두드러진 원인에 근거하여 설정한 것이다.52)
‘주(住)’란, 이를테면 개별적인 법으로서, 이미 생겨나 아직 괴멸하지 않은 제행이 자신의 결과를 인기(引起)하는데 어떠한 장애도 없게 하는 두드러진 원인을 말한다.
‘이(異)’란, 이를테면 개별적인 법으로서, 바로 제행이 상속하여 후 찰나의 그것이 전 찰나의 그것과 다르게 되는 원인을 말한다.
‘멸(滅)’이란, 이를테면 개별적인 법으로서, 함께 생겨난[俱生] 행이 괴멸하는데 두드러진 원인을 말한다. 그리고 [본송에서 말한] ‘성질’은 바로 실체(實體)의 뜻이다.
어찌 경에서는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다”고 설하지 않았던가?53) ‘주’는 [제행의] 좋은 벗[善友]이 되어 능히 유위를 안주(安住)하게 하는 것인데, 어떠한 까닭에서 설하지 않은 것인가? 계경에서 설하지 않은 데에는 필시 이유가 있을 것이니, 마땅히 이에 대해 설명[開示]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온갖 상(相)이 오로지 유위만을 나타내는 것이라면, 그 경에서는 바로 설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주상(住相)은 오로지 유위만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니, 모든 무위법 역시 스스로 머무는 것[自住]이기 때문이다. 혹은 여기서는 유위의 공덕과 과실을 모두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네 종류의 [유위상을] 설하였던 것이지만, 계경에서는 오로지 유위의 과실만을 나타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다만 세 가지만을 설하였던 것이다.54) 혹은 그 밖의 다른 경에서는 다만 “유위행에는 생법과 멸법이 존재한다”고 설하고 있지만 이법(異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듯이, 이 경 역시 그러한 경우로서, 주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 [계경에서는] 일부의 원인[少因]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오로지 세 가지 상만이 존재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4상(相)과 3상에는 서로 모순되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원인을 관찰하였기에 오로지 세 가지 상만이 존재한다고 설한 것인가?
‘주’는 유위와 무위 모두와 통하기 때문이다. 즉 교화되는 이가 ‘유위와 무위는 전전 상속하는 것이 서로 유사하다’고 하는 의심을 낳지 않게 하기 위해 비록 주상이 존재할지라도 다만 세 가지 상만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55) 혹은 이 경에서는 이미 은밀히 ‘주’를 설하였으니, 바로 ‘세 가지 상이 있다’고만 말하였을 뿐 ‘오로지’라는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마땅히 ‘오로지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다’고 말했어야 하는 것이다.
혹은 이 경에서는 ‘주’와 ‘이’를 합하여 설한 것으로, 만약 그렇지 않다면 마땅히 ‘주’라는 말은 쓸모없는 말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경에서 두 가지를] 합하여 설한 것은, 유위의 지속[住]은 반드시 변이[異]와 함께 한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56) 그러나 모든 무위법의 경우 지속하기는 하지만 변이하지는 않기 때문에 유위법의 경우와는 다르다. 이 경에서 주이(住異)라고 말한 것은, ‘주’가 바로 ‘이’임을 나타내려고 함이 아니라 다만 유위에는 일어남[起]이 있고 다함[盡]이 있으며, 지속함[住]이 있고 변이함[異]이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만약 [그럴 경우] 무위의 ‘주’는 미확정적인 것[不成]이 되고 만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에 맞지 않으니, 필시 확정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세 가지 무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성립되었으므로 이에 따라 무위에 주상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성취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유위상에는 결정코 [‘주’를 포함하여] 오로지 네 가지가 있는 것이다.
2) 4수상(隨相)
이러한 ‘생’ 등의 상이 이미 유위라고 하였으므로 그것은 마땅히 [그것을 낳게 하는] 별도의 ‘생’ 등의 4상을 또 다시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만약 또 다시 그러한 상을 갖는다고 한다면 바로 무한소급[無窮]에 떨어지고 말 것으로, 그것(‘생’ 등의 법을 낳는 생상)은 다시 또 다른 ‘생’ 등의 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실로 [‘생’ 등의 4상을] 또 다시 갖는다고 인정하지만, 그러나 무한소급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째서 그러한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이것(유위4상)은 생생(生生) 등을 가지니
여덟 가지와 한 가지 법에 대해 공능이 있다.
논하여 말하겠다.
여기서 ‘갖는다’고 하는 말은 결정적인 뜻을 아울러 나타낸다. 즉 의미상으로 볼 때 이것은 오로지 네 가지만 가질 뿐 그 밖의 다른 상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나타내니,57) 여기서 ‘이것’이란 앞서 설한 네 가지 본상(本相)을 말한다. 그리고 생생(生生) 등이란 말하자면 네 가지 수상(隨相)으로, 이러한 생의 생생(생을 낳게 하는 생), 내지는 멸의 멸멸(멸을 멸하게 하는 멸)이 바로 그것이다. 곧 제행으로서의 유위는 네 가지 본상에 따르고, 본상의 유위는 네 가지 수상에 따르는 것이다.58)
세존께서는 어디서 수상을 설하였던 것인가?
어찌 이 경(주53의 경)에서도 역시 수상을 설하였다고 하지 않겠는가? ‘생’ 등의 상을 역시 유위라고 하였기 때문이며, 생생 등의 상 역시 ‘생기’ 등의 존재[性]이기 때문이다.59) 즉 계경에서 이미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있으니, 유위의 생기(生起)도 역시 알 수 있고, 멸진(滅盡)과 주이(住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하였으니, 여기(유위의 유위상)에 어찌 수상이 포섭되지 않을 것인가?
또한 온갖 상에 대해 모두 ‘역시’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이 경문 중에서도 역시 수상을 설하고 있는 것이다. 즉 “유위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에서, ‘생기’는 바로 본상의 ‘생’이며, ‘역시’는 생생의 뜻을 나타낸다. “멸진과 주이도 역시 알 수 있다”고 하는 말에 대해서도 ‘생기’와 ‘역시’라는 말에 유추하여 마땅히 참답게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무슨 소용에서 ‘역시’라고 말하였겠는가? 그래서 계경 중에서는 무위법에 대해 “오히려 생기 등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이 경설은, 모든 무위법은 오히려 ‘생’ 등의 본상도 갖지 않음을 알 수 있거늘 하물며 생생 등의 수상이 획득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미로서, 만약 그렇지 않다면 경에서는 다만 “[무위법은] ‘생기’ 등을 갖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설했어야지 마땅히 ‘오히려--’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60)
또한 박가범(薄伽梵)께서는 계경 중에서 “모든 유위상에는 다시 상을 갖는다”고 설하고 있으니, 그래서 계경에서 “색은 생기와 멸진을 갖으며, 여기(생기와 멸진)에는 역시 생기와 멸진이 존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노사(老死)의 생기 등에 대해 설하고 있으니,61) 이에 따라 상은 다시 상을 갖는 것임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본상은 소상법(所相法)과 마찬가지로 그 하나하나가 마땅히 네 가지 종류의 수상을 가져야 할 것이며, 이러한 수상에는 다시 각기 네 가지가 있어야 하는 등 끝없이 전전(展轉)하게 될 것이 아닌가?62)
그러한 과실은 없으니, 네 가지의 본상과 네 가지의 수상은 [각기] 여덟 가지에 대해서와 한 가지에 대한 것으로, 공능(功能) 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63) 즉 직접적인 연[親緣]으로서 작용하는 것을 일컬어 공능이라고 한 것이니, 이를테면 네 가지의 본상은 하나하나가 모두 8법(法)에 대해 작용을 갖으며, 네 가지 종류의 수상은 하나하나가 모두 1법에 대해서만 작용을 갖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말하자면 어떤 법이 생겨날 때에는 그러한 법 자체와 아울러 9법(法)이 함께 생겨나니, 법 자체가 한가지이며, 상과 수상이 여덟 가지이다. 즉 본상 중의 생상(生相)은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낳으니, 제법은 그 자신에 대해 생 등의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상인 생생상(生生相)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생상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연으로 작용하여 그것만을 낳을 뿐이다. 이렇듯 [수상과 본상이 각기] 한 가지를 낳고 다수를 낳는 것은 공능이 다르기 때문이다.64)
‘낳는 것[生]’이라고 하는 성질에 이미 어떠한 차이도 없거늘 어찌 공능에 차별이 있다는 것인가?
예컨대 수(受)의 영납(領納)은 비록 그 성질상으로는 어떠한 차이가 없을지라도 손해와 이익이라고 하는 공능 상의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65) 또한 본상과 수상에는 경계대상이 많고 적음의 [차별이] 있으니, 5식과 의식에 대상의 적고 많음의 [차별이]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본상 중의 주상(住相) 역시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머무르게 하며, 수상인 주주상(住住相)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주상만을 머무르게 할 뿐이다. 즉 직접적인 연이 되어 법으로 하여금 잠시 머물게 하여 능히 자신의 결과를 낳게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주’의 공능이다.
또한 본상 중의 이상(異相)은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변이하게 하며, 수상인 이이상(異異相)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이상에 대해서만 직접적인 연이 되어 변이하게 할 뿐이다.
또한 본상 중의 멸상도 역시 그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8법에 대해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그것을 멸하게 하며, 수상인 멸멸상은 9법 가운데 오로지 본상인 멸상에 대해서만 능히 직접적인 연이 되어 소멸하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 등의 상이 다시 상을 가질지라도 수상에는 오로지 네 가지만 있을 뿐으로, 무한소급의 과실은 없는 것이다.
(1) 경설(三有爲之有爲相)을 통한 경주(經主)의 유위상 무별체설에 대한 비판
어떠한 이유에서 유위상(相)에 대해 이와 같이 분별하는 것인가?
이같이 분별하지 않으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와 같은 아비달마에서 제시한 상에 관한 올바른 이치[正理]를 버리고 다른 종의를 벗 삼아 따르게 되면, 그 누구도 능히 유위상을 세울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온갖 상(相) 등의 진실한 뜻에 관한 대법(對法)의 올바른 이치를 등지고서 낳은 각혜(覺慧)는 모두 그릇된 것으로, 무릇 그들이 설한 바 진실에 어긋나지 않은 것이 없다. 내가 이제 이에 대해 순서대로 널리 분별하리라.
바야흐로 저 경주(經主)는 다른 종의에 근거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어떠한 연유에서 이와 같이 [실재하지도 않는] 허공을 쪼개려고 하는 것인가? ‘생(生)’ 등의 상은 [유부(有部) 비바사사(毘婆沙師)가] 분별하는 바와 같이 실유의 법체(法體)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66)
그 까닭은 무엇인가?
[그것을 인식하기 위한] 정당한 인식수단[定量]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러한 온갖 상(相)들은 색법 따위처럼 현량(現量)이나 비량(比量) 혹은 지교량(至敎量)에 의해 그 실유성이 증명되지 않는 것이다.”67)
‘생’ 등의 상은 그 밖의 다른 분별과 마찬가지로 실유의 법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고 해야 함에도 어찌 그렇다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그 밖의 다른 분별과 마찬가지로 실유의 법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앞서 그가 말한 ‘생 등의 상은 [유부 비바사사가] 분별하는 바와 같이 실유의 법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은 아무런 쓸모가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러한 온갖 상이 어찌 항아리 따위처럼 현량이나 비량 혹은 지교량에 의해 그 자체 가유(仮有)임을 입증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68) 왜냐하면 그는 이미 그것이 실유라는 사실을 부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그는 결정코 마땅히 생 등의 상 자체는 바로 가유라고 인정하였을 것이니, [실유도 아니고 가유도 아닌] 제3의 유(有)라고 헤아릴 만한 이치는 필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4상의] 차별을 부정한 것으로 볼 때, 결정코 마땅히 생 등을 절대적 비존재[畢竟無]로 인정하였던 것은 아님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69)
먼저 현량으로 그러한 생 등이 그 자체 가유임을 입증할 수 없으니, 쟁론의 대상[諍論事]이 되기 때문이다.70) 또한 역시 지교량에 의해 그러한 생 등이 그 자체 가유임을 입증할 수도 없으니, [가유라고] 설한 곳이 없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가유는 비량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실유 역시 마찬가지로 [비량에 의해 입증되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즉 그대들이 [유위상의] 가유를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이 어찌 도리어 허공을 쪼게는 것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4상 자체가 실유임을 증명하는 이치(즉 理證)에 대해서는 뒤에서 분별하기로 하고, 지금 여기서는 먼저 지교를 인용하여 [그것의 존재를] 입증하도록 하겠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말하기를 “모든 사견자(邪見者)에게 존재하는 신업ㆍ어업ㆍ의업과 온갖 소원과 희구는 모두 다 같은 견해에 의한 것이니, [사견자에게] 존재하는 제행은 다 그러한 [사견의] 종류이다”고 하였다.71) 이 경의 뜻은, ‘생’ 등의 제행은 그것(사견)에 따라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의 동일한 결과이기 때문에, 그것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그러한 [사견의] 종류’라고 말한 것이다. 즉 이 경에서는 세 업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제행이라는 말은] ‘수(受)’ 등의 행온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또한 [제행은] 동일한 경계대상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다만 이에 따라 ‘동일한 [결과]’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경에서는] 다만 신ㆍ어ㆍ의의 업과 함께 작용[俱行]하는 생 등을 설하여 제행이라 말한 것으로, 이러한 행은 그 같은 사견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다시 말해 이는 바로 사견의 결과이기 때문에 ‘그러한 [사견의] 종류’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은 해석은 옳지 않다”고 한다면, 그대는 이 경에 다시 어떠한 뜻이 있다고 말할 것인가? 그렇지만 내가 해석한 바는 의미상 어떤 어긋남도 없는 것이다.
또한 『삼상경(三相經)』은 결정코 지교(至敎)이니, 그 경에서는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존재하니, 유위의 생기[起]도 역시 알 수 있고, 다함[盡]과 아울러 주이(住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설하고 있다.72) 만약 이와 다르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유위상이 유위제행과는 다른 개별적인 실체가 아니라고 한다면,) 경에서는 마땅히 다만 ‘세 가지 유위상이 [존재하니], 이를테면 ‘온갖 유위는 생기하고 다하고 머물러 변이한다’고만 말했어야 하며, ‘유위의’라는 말과 ‘역시 알 수 있다’는 말을 다시 설한 것은 모두 쓸데없는 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 등 세 가지 유위상은 소상법(所相法, 생겨나는 등의 본법)을 떠나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하는 그대는 이 경문에 어떠한 뜻이 있다고 추구(해석)할 것인가? 만약 “‘유위의’라는 말을 설하지 않으면 무엇의 상(相)인지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고 한다면, ‘유위상’을 설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상이 유위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여 수고스럽게 이 같이 [‘유위의 유위상’이라고] 설할 필요는 없으니, 이같이 설하지 않더라도 그 뜻은 역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계경에서] 나타낸 것[標]과 [이에 대해] 해석한 것[釋] 중에서 모두 제6성(聲, 소유격)의 용법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능상(能相, 즉 유위4상)은 소상(본법)을 떠나 존재함을 알 수 있으니, 다른 것으로써 다른 것을 나타내는 것은 바로 관찰할 수 있는 사실이기 때문이다.73) 그런데 만약 “제6성의 용법을 사용하더라도 다른 존재가 아닌 경우를 역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에 그 같은 논거는 [진위]부정의 오류를 범한 것이니, 어찌 능상은 소상을 떠나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한다면, 그럴 경우 [인용한] 경문에서는 마땅히 [그대가] 지향하였던 것처럼 [‘유위의’라는 말을 빼고] 설했어야 할 것이니, 제6전(轉)의 용법을 떠나서도 그 뜻은 역시 성취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언급한 ‘제6성의 용법을 [사용하더라도] 어떠한 차이가 없다(능상과 소상은 다른 존재가 아니다)’고 한 사실 역시 이 경문을 해석하는 근거로서 [진위]부정이니, 어떻게 이 같은 사실에 의거하여 ‘경에서 설한 3상은 가유이지 실유가 아니다’고 판별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그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천애(天愛)여! 그대는 글에만 집착하고 그 뜻에는 미혹하구나. 박가범(薄伽梵)께서 설하신 뜻이야말로 바로 우리가 의지해야 할 바이다.
그렇다면 이 경에서 설하고 있는 진실 된 뜻은 무엇인가?
이를테면 어리석은 범부들은 무명에 눈이 멀어 행(行)의 상속에 대해 아(我)와 아소(我所)라고 집착하여 오랫동안[長夜] 그것에 대해 탐착을 낳는다.74) 세존께서는 그들의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해 행의 상속 자체는 바로 유위이며 연생(緣生)의 성질임을 밝혔던 것이니,75) 그래서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존재한다’고 설하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이 말이] 제행의 일 찰나 중에 세 가지 상이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힌 것은 아니니, 일 찰나에 [구기하는] 생기 등의 세 가지 상은 알 수 없기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것은 마땅히 상(相)으로 설정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그 계경에서 다시 ‘유위법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고, 멸진과 아울러 주이(住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76)
그러나 여기서 말한 그의 해석은 경의 뜻과 부합하지 않는다. 먼저 제행의 상속 중에 다만 일 찰나의 생기[一起], 일 찰나의 멸진[一盡], 일 찰나의 변이[一異]가 존재한다고 인정해서는 안 될 것이며,77) 설혹 [일 찰나의 생기 등이] 존재한다고 인정할지라도 역시 ‘그것을 아(我)로 집착한다’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비록 일찍이 행의 상속 중에 생기와 멸진 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듣지 않았을지라도 역시 저절로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78) 그가 “비록 [저절로] 안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자아로 집착하기 때문에 다시 설하게 된 것이다”고 한다면, 이는 곧 부질없는 일[唐捐]이 되고 말 것이니, ‘일찍이 이미 알았음에도 자아관념[我執]이 여전히 떨쳐 일어나므로 지금 그것을 제거하고자 다시금 설하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79) [그럴 경우] 세존께서 가르침을 설하였을지라도 교화될 자에게 무슨 이익이 있을 것인지 마땅히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온갖 이생은 미세한 생멸(곧 찰나에 구기하는 생멸)에 미혹하여 행의 상속을 아(我)ㆍ아소(我所)로 집착한다. 세존께서는 그 같은 집착을 버리게 하고자 ‘제행의 한 상속 중에는 다(多) 찰나에 걸친 생멸의 차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나타내었던 것이며, 그래서 “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이 존재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고 말하였던 것이니, 바로 이와 같은 의미로 경을 설하였다면, 그것은 대단히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제행 중 찰나에 [구기하는] 생 등은 그들(이생)이 바로 현견(現見)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설할지라도 어떠한 이익도 없다”고 한다면, 그대들 역시 이를 현견하지 못하고 있으니, 어찌 이치를 추구하기만 한다면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지 않겠는가? 만약 찰나에 [구기하는] 생 등을 알지 못한다면 필시 아ㆍ아소에 대한 집착을 능히 버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오직 부처님만이 능히 선교(善巧)의 방편을 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치를 추구하여 [유위의 유위상을] 알게 하였던 것으로, 그들은 일찍이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아견(我見)을 낳았던 것이지만, 이제 알았기 때문에 아견을 바로 버리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유위상은 오로지 찰나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지 상속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80) 그리고 찰나에 [구기하는] 생 등은 비록 현견되지 않을지라도 그것을 설할 경우 유용함이 있지만, 그대가 해석한 경의 뜻대로라면 어떠한 유용함도 없기 때문에 필시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경문에 대한 우리의 해석은 그대의 해석과 같지 않은 것이다.
또한 그대는 마땅히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니, 무명에 눈이 멀어 행(行)의 상속 중에 아견을 일으킨 자는 행의 상속 [상에 드러나는] 생 등의 온갖 상을, 이에 대한 설법을 듣기 전에 현견하였다고 해야 할 것인가, 현견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현견하였다고 말한다면 종의로 삼았던 바를 어기는 것이며, 혹은 [현견한 것을] 다시 설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 되고 만다.81) 그러나 만약 현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부처님께서 그것을 설한 후에도 역시 알지 못해야 할 것이니, 달리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82)
만약 “가르침이라는 힘[敎力]에 의해 그것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면, 찰나에 [구기하는] 온갖 상에 관한 이치도 마땅히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상속 [상에 드러나는] 온갖 상은 거칠기 때문에 알기 쉽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나서도 (다시 말해 설법을 듣지 않더라도) 그는 역시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제행 중 상속의 온갖 상은 비록 현견되지는 않을지라도 가르침의 힘에 의해 그것을 알게 되고 [이에 따라] 능히 아집을 대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찰나에 [구기하는] 온갖 상 역시 그러하다고 해야 하거늘 어찌 “찰나에 [구기하는] 생 등은 그들이 바로 현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것을 설하더라도 어떠한 이익도 없다”고 말하는 것인가? 나아가 제행의 상속 중에 [드러나는] 생 등의 상을 누가 능히 알지 못하여 다시금 반드시 설해야만 하였던 것인가? 따라서 그의 해석은 경의 이치에 위배되는 것이다.
또한 일 찰나에 [구기하는] 생 등의 온갖 상은 미세한 각혜(覺慧)로만 능히 알 수 있다. 즉 찰나의 무간에 전전(展轉)하는 것을 잘 관찰하면 능히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세한 각혜는 가르침의 힘에 의해 생겨나는 것으로, 행(行)이 무상하다는 사실을 알면 능히 아집(자아관념)을 제거할 수 있는 것이다.83) 이렇듯 이미 미세한 각혜에 의해 알려지는 것이라고 하였으므로 “일 찰나에 [구기하는] 생기 등의 세 가지 상은 알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참다운 설이 아닌 것이다.
또한 그는 “알 수 없는 것은 마땅히 상(相)으로 설정해서는 안 된다”고 설하고 있지만, 결정코 “‘알 수 없기 때문에’라는 사실이 ‘상이 아니다’는 사실의 논거가 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84) 수(受) 등의 상은 거친 각혜로는 능히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상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알 수 없는 것은 상이 아니다.’--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이치에 맞는 논의가 아닌 것이다.
또한 그 경에서 “유위법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고, 멸진과 아울러 주이(住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찰나에 근거하여 설한 것으로, 이 경의 뜻은 곧 찰나에 [구기하는] 생기 등은 자세히 관찰할 때 알 수 있기 때문에 세존께서는 모든 교화 받을 자들이 자세히 관찰하도록 권유하기 위해 이 같은 말을 설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주(經主)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런데 경에서 유위라는 말을 거듭 설하고 있는 것은,85) 이러한 상이 바로 유위임을 나타낸다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한 것일 뿐으로, 마치 백로(즉 물새)가 있으면 물이 없는 것이 아님을 나타내듯이 이러한 상도 유위법의 존재[有爲有]임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86)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은 자신의 종의에 위배된다. 즉 [우리처럼]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未生位, 즉 미래]의 유위법의 존재를 인정하는 경우라면 ‘생’은 유위법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으니,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때에도 그러한 [유위법의 존재는]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는] 생겨나지 않은 상태의 유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이미 주장하였는데,87) 어찌 ‘생’이 유위법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백로가 물을 나타낸다’는 것은 바로 ‘생이 유위의 존재임을 나타낸다’는 그 같은 주장명제[宗]의 동유(同喩)이다. 그런데 만약 생(生)이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한다[本無今有]’는 의미로서의 유위법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도 아니라고 한다면, 이와 유사하게 오로지 ‘유위법이 바로 존재[有]’라고 인정하는 [자신의] 종의 역시 부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는 유위가 오로지 자체[自體, ātmalābha] 즉 그 자신의 본성을 획득하게 되는 것을 설하여 ‘생’이라 주장하였다. 그러나 생 자체가 [별도의 유위법의 존재가 아니라] 바로 유위의 존재라면, (다시 말해 유위를 떠나 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생과 유위는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유위와 ‘[본성으로서의] 존재[有, 즉 생]’ 또한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이러한 상(相)이 능히 유위를 나타내는 것일 뿐 [그 본성으로서의] 존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인가? 또한 만약 이를 위해, (다시 말해 상이 바로 유위의 본성임을 나타내기 위해) ‘유위’라는 말을 거듭 설하였다고 한다면, 앞에서 말한바(두 번에 걸친 ‘유위’라는 말)는 아무런 소용도 없게 될 것이니, “유위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다” 등의 말로도 능히 그와 같은 뜻을 성립시키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세 가지 유위의 유위상’에서 두 번째 ‘유위’라는 말)은 마땅히 별도의 뜻을 나타낸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저 상좌(上座)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만약 ‘유위’라는 말을 거듭하여 설하지 않았다면, 유위의 상[有爲之相]이 무슨 뜻을 나타낸다고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니, 이러한 상은 능히 색 등이 갖는 [유위법의] 성질을 나타낸다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맛 등이 갖는 성질을 나타낸다고 해야 할 것인가? 혹은 선악 등의 성질을 나타낸다고 해야 할 것인가? 바로 이 같은 의혹을 제거하기 위해 ‘유위’라는 말을 거듭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세 가지 유위의 상이 존재한다”고 이미 설하였는데, 어찌 이러한 상이 색 등이 갖는 [유위법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개별적인 법에 차별적인 상이 없어 마땅히 그러한 법의 차별상을 나타내기 위해 [‘유위’라는 말을 거듭 설한 것이] 아니다.
또한 계경에서는 “유위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설하고 있으므로, 무위 중에는 응당 이러한 생기 등의 세 가지 상이 없다고 해야 한다. 이에 따라 이러한 상은 분명 유위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임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무슨 필요에서 거듭 설하였을 것인가? 또한 그는 어찌하여 이러한 온갖 상이 여타의 색 등이 갖는 성질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의심하는 것을 용인하는 것인가? [그럴 경우] 색 등이 갖는 성질은 바로 자상(自相)이기 때문에, 생기 등은 이것(색 등)이 자상을 성취하였음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의 법체(法體)에 세 자상이 존재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인데, 어찌하여 계경에서는 세 가지 상이 존재한다고 설한 것인가? 따라서 그는 이에 대해 의심하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88)
또한 [‘유위법의 생기도 역시 알 수 있고--’에서] ‘역시’라고 하는 말은 ‘모두 함께[集]’라는 뜻을 아울러 나타내니, 이를 통해 세 가지 상이 [모두 함께] 하나의 동일한 유위[의 성질]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세 가지 유위상에 별도로 나타내는 바가 있다고 의심하는 것을 용인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주장 역시 결정코 옳은 것[善]이 아니다.
(2) ‘상속’에 근거한 경주(經主)의 유위4상 설 비판
그렇다면 또한 그(경주)는 온갖 유위상에 대해 무엇에 근거하여 어떻게 시설하였던 것인가?
바야흐로 저 경주는 상좌(上座)의 종의를 벗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행의 상속이 처음으로 일어나는 것을 ‘생(生)’이라 이름하고, 끝내 다한 상태를 설하여 ‘멸(滅)’이라 이름하며, 중간의 상속으로 따라 일어나는 것[隨轉]을 ‘주(住)’라고 이름하며, 이러한 [머무는 때의] 전후 차별을 일컬어 ‘주(住)의 이(異)’라고 한다. 그리고 세존께서도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난타(難陀)에게 설하여 말하기를 ‘이 선남자(善男子)는 수(受)의 생(生)을 잘 알며, 수의 주(住)를 잘 알며, 아울러 수의 쇠이(衰異)와 괴멸(壞滅)을 잘 안다’고 하였던 것이다.”89)
‘제행의 상속’이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온갖 유위가 무간으로 유전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시 어떠한 법을 자성으로 삼는 것인가?
바로 가유(仮有)의 법이다.
[가유의 법에서] 어찌 자성을 추구하는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여러 찰나에 걸쳐 서로 유사하게 전전(展轉)하면서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계속 이어지는 제행의 간단(間斷)없는 감부(感赴, 결과를 초래하고 원인이 되는 것) 연환(連環, 연속적 순환)을 설하여 ‘상속’이라 이름하였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상속에 한번의 ‘생’만이 존재한다고 설하는 것으로, 이는 정리(正理)에 맞지 않으니, [찰나에] 구기(俱起)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무량(無量)의 제행이 찰나에 끊어짐이 없이 생겨나는 것을 ‘상속’이라 한다면, 어떻게 상속 중에 ‘생’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럴 경우] 그는 이미 생겨나서 아직 소멸하지 않은 [현재의] 제행에 근거하여서만 비로소 유위법의 생기를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미래법)이나 이미 소멸한 것(과거법)에 대해서는 [그 생기를 설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제행의] 상속이 이미 가유라면, 오로지 현재법만이 이러한 상속의 소의가 된다고 해야 할 것인가, 과거ㆍ현재법 모두를 소의로 삼는다고 해야 할 것인가? 만약 오로지 현재법만이 이러한 상속의 소의가 된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속을 바로 가유라고 말해서도 안 될 것이니, 일 찰나의 법이 홀로 상속을 이루는 가법(仮法)의 소의가 된다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항아리나 운동[行]의 경우처럼 다수의 법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하나의 상속으로 설정한 것이라면, 이는 바로 가유의 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상속이 과거ㆍ현재법 모두를 소의로 삼는 것이라고 한다면, 상속은 전 찰나에 생겨난 법과 현재법을 일시 소의로 삼는 것이 되며, 따라서 ‘상속의 생기’라는 뜻도 마땅히 없어야 할 것이니, ‘생기’가 과거에 존재하였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90)
또한 현재[찰나의] 법은 상속이 아니니, 만약 상속이라면 현재[찰나의] 법만으로 [이루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는] 이미 오로지 현재 [찰나의] 법에 대해서만 ‘생’을 설정할 수 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오로지 ‘찰나’에 [근거하여 생을 말해야지] ‘상속’에 [근거하여 생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러한 뜻(상속에 근거한 생ㆍ주ㆍ이ㆍ멸)이 아니라고 한다면, 마땅히 계경에 위배될 것이다. 즉 계경에서는 말하기를 “어떤 종류의 유정은 그 신체의 안주(安住, 지속)가 백년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하였으니, 일 찰나가 가히 백 년 동안 지속한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반론자)
누가 일념(一念, 일 찰나)의 신체가 백 년 동안 지속한다고 말하였던 것인가? 서로 유사한 [찰나로 이루어진] 이러한 몸의 상속 중에 다른 종류의 찰나가 그 사이에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다시 말해 몸이 그 이전[前前] 찰나와 서로 유사한 형태로 그 후[後後]의 찰나에 이르도록 끊어짐이 없이 계속하여 생겨나는 것을 일시 ‘어떤 소의신이 백 년 동안 안주한다’고 설한 것이니, 이러한 설명이야말로 경설과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또한 [경주는] 마땅히 상속에 주(住, 지속)가 존재한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즉 상속이라는 말은 다 찰나[多念]에 근거하여 설정된 것으로, 다 찰나가 필시 구시(俱時, 동시)에 머무는(지속하는) 일은 없기 때문이다.
어찌 찰나와 분위(分位, 상태)와 중동분의 세 가지가 현재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함께 인정하지 않았던가?91) 어찌하여 상속에 ‘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상속에 ‘주’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뒤의 두 가지(분위와 중동분)도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한다. 이는 앞의 경설(“어떤 종류의 유정은 그 신체의 안주가 백 년에 이르는 경우도 있다”)과 같은 경우로, 마땅히 이치에 맞게 해석해 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뒤의 두 종류는 [상속에 근거하여] 일시 현재라는 말로 설정하였으니, 이(상속)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생’ 등을 일시 설정해야 하는 것이다.(반론자)
삼세의 실유(實有)를 인정한다면 이러한 뜻은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과거와 미래는 존재하지 않으며[無體]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한다면, 일 찰나 중에 어떻게 상속의 생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전 찰나의 제행이 아직 소멸하지 않았으면, 그 때는 후 찰나의 생이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어떻게 이 두 찰나가 하나의 생상을 공유한다고 주장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오로지 현재만이 존재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일 찰나에 ‘생’과 ‘멸’의 두 상이 동시에 설정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여러 찰나가 서로 유사하게 전전하여 시간적으로 끊어짐이 없이 제행이 생겨날 때 상속의 ‘생’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지만, 그러나 만약 시간적으로 선한 의식의 찰나와 무간에 불선의 의식이 생겨나고, 다시 이러한 의식의 찰나와 무간에 무기의 의식이 일어났다면, 그 때 전후 찰나의 의식은 동일한 것이 아닌데, 어떻게 상속의 생 등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겠는가? 그러나 만약 “전후 찰나는 바로 동일한 의식의 종류이므로 역시 서로 유사하게 상속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러한 상속은 마땅히 생겨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무시(無始)이래로 동일한 의식이 상속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아직 무여열반에 들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상속의 ‘주’는 마땅히 멸하는 일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선한 의식의 찰나가 이미 생겨났다가 이미 멸하고서 불선의 의식이 일어나며, 불선의 의식의 찰나가 이미 생겨났다가 이미 멸하고서 무기의 의식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찌 그 때도 일 찰나 동안 ‘생’과 ‘멸’의 두 상이 동시에 설정된다고 하지 않겠는가? 제행의 상속에 ‘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상속의] ‘주’와 ‘멸’에 대해서도 역시 마땅히 유추하여 비판해 보아야 할 것이다.
몸과 마음에 광란이 없는 자라면, (다시 말해 온전한 정신을 지닌 자라면) 그 누가 능히 이미 멸한 것이나 아직 생겨나지 않은 것에 지속함[住]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이며, 혹은 일 찰나에 상속이 존재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또한 만약 색 등과 같은 제행 각각의 찰나에 모두 ‘생’과 ‘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비유자(譬喩者) 역시 유위는 다 찰나에 걸쳐 지속[住]한다고 주장해야 할 것이니, 그럴 경우 외도인 승론(勝論) 등의 논사가 주장한 것과 어떠한 차별이 있을 것인가?92) 그럼에도 끝내 [제행은] 찰나멸하기 때문에 각각의 찰나에 모두 ‘멸’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으니, 이 어찌 마음으로는 다른 것을 생각하면서 다른 종의(승론)를 비판하기 위해 입으로는 다른 것을 말하는 [생각과 말이 다른] 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또한 오로지 법으로서 멸성(滅性)이라고 이름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종의에서 멸성의 법은 비존재[無]를 본질로 한다.93) 그런 즉 제법은 마땅히 무상한 것이 아니어야 할 것이니, 제법은 비존재가 아니라야 법이라 이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94) 그러나 만약 제법을 설하여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멸성은 비존재를 본질로 한다고 해서는 안 될 것이니, 제법은 모두 존재[有]를 본성[性]으로 삼기 때문이다. 여기서 ‘멸성’이란 멸상(滅相) 자체[體]를 말하는 것으로, 그 자체의 본질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면 ‘성(性)’이라는 말을 설정할 수 없는데, 어떻게 그들 종의에서 ‘멸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제행은 멸을 갖는 법[有滅法]이다”고 말하는 것도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으니, [그들에 의하면] ‘멸’ 자체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마땅히 법의 본성으로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무상성이 만약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면, 이를테면 ‘색의 무상’과 같은 제6전(轉, 소유격)을 설해서도 안 될 것이니, 비존재는 자신이나 다른 이에게 계속(繫屬)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95)
또한 ‘상속의 변이[異]’라고 하는 이치 역시 성립하지 않으니, [그는] 모든 때 모든 곳에서 전후 차별되는 법의 성질(곧 異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니, 만약 ‘소의신 등은 각각의 찰나[念]에 모두 변이의 성질[異性]을 갖는 것이 아니다’고 주장한다면, 외연(外緣, 외적 조건)에 어떠한 차별도 없었는데 어떻게 그 후 소의신 등에 바로 차별이 생겨날 수 있었을 것인가?96) 외연에 어떠한 차별도 없을 때에는 그 무엇이 그 같은 소의신의 상속을 전후 차별되게 하는 것인가? 마땅히 “그러한 차별은 저절로[自然] 존재한다”고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그 특성이 동일한 상속에는 마땅히 [전후의] 어떠한 차별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며, [그럴 경우] 역시 또한 ‘생’도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자기 존재[自類]를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상속에 전후] 차별이 있다”고도 말해서는 안 될 것이니, 존재에는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자기 존재로서 전[찰나]에 생겨난 것을 후[찰나]에 인연으로 삼아 상속에 차별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곧 지(地) 등은 화(火) 등과의 화합을 떠나 다만 전[찰나]의 ‘지’ 등에 의해 숙변(熟變)의 상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해야 하겠지만, 실로 [‘화’ 등과의 화합을 떠나 숙변의 상은] 생겨나지 않기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97)
또한 그는, 구생(俱生)의 이상(異相)을 부정하고 다시 외연(外緣)의 전후 차별도 없다고 하면서도 결정코 상속의 이상은 모든 때 모든 곳에 두루 존재한다고 주장하니, 이는 다만 어떠한 논거도 없이 완고히 주장하는 것일 뿐이다.
또한 마땅히 “[상속의 변이는] 외연과 함께 한다”고 주장해서도 안 될 것이니, 선행한 원인[前因]의 찰나를 조건[緣性]으로 삼는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즉 [선행한 원인의 찰나란] 능히 후 찰나의 결과를 낳는 찰나로서, 이에 따라 상속에 전후 다름[異]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혹 제행이 외연에 근거하지 않고 [변이하는] 경우가 있다면, 그것은 유위의 이상(異相) 자체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소상법(所相法, 변이하는 본법)이 오랫동안 상속하면서 미세하게 손감(損減)되는 것을 설하여 변이[異]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옳지 않으니, 일체의 상속에 이상 자체가 두루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즉 [소상법이] 증익(增益)할 때에는 마땅히 이상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으로, 어떤 이가 “이러한 4대종과 소조색의 화합에 의해 이루어진 소의신은 어느 때에는 증익됨이 관찰되고, 어느 때에는 손감됨이 관찰된다”고 말한 바와 같다. 또한 이러한 상속은 다시 어떠한 이유에서 손감되는 것인가? 그 허물은 앞서 말한 바와 같다.98)
이와 같이 상속의 생(生) 등에 대해 이미 비판하였다.
나아가 [경주가] 인용한 계경도 의미상 [그들의] 논거(즉 經證)가 되지 않으니, [계경에서 수의 생을 잘 알며, 수의 멸을 잘 안다고 함은] 그 선남자(즉 난타)가 미래와 과거의 수(受)를 잘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그의 현재의 앎은 미래의 수를 아는 것으로, 막 생겨나려고 하는 것을 [수의] ‘생’이라 말한 것이지 이미 생겨난 상태[의 수]를 [수의 ‘생’이라] 말한 것이 아니다. 또한 [그의 현재의 앎은] 과거의 수를 아는 것으로, 이미 멸한 것을 [수의] ‘멸’이라 말한 것이지 막 소멸하려고 하는 상태[의 수]를 [수의 ‘멸’이라] 말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수의 생을 잘 알며, 수의 멸을 잘 안다고 하는 것은] 이미 생겨났거나 아직 멸하지 않은 상태의 수를 아는 것이 아니니, 그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의 주(住)와 아울러 쇠이(衰異)를 잘 안다”고 하는 말은 본래 암송되어 [전승된] 것이 아니다. 설혹 이를 암송하여 [전승하더라도] 의미상으로는 역시 위배됨이 없을 것이지만, [경주는] 과거와 미래법의 생 등은 일찍이 존재하였고[曾] 앞으로 존재할 것[當]이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또한 생 등의 상은 [과거ㆍ현재ㆍ미래의] 일체 시에 걸쳐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에 그가 인용한 경설은 논증에 어떠한 공능도 없는 것이다.99) 그렇기 때문에 마땅히 성교(聖敎)와 정리(正理)에 따라 생 등은 제행의 각각의 찰나에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지 상속상에 [일시 가설한 것이] 아님을 신해(信解)해야 하는 것이다.
(3) 경주(經主)의 일 찰나 유위4상 설 비판
또한 경주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각각의 찰나에 제 유위법이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4상은 역시 이루어질 수 있다.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각각의 찰나[念]에 일찍이 없다가 지금 있는 것을 ‘생’이라 이름하며, 있다가 다시 없어지는 것을 ‘멸’이라 이름하며, 후후(後後)의 찰나가 전전(前前) 찰나에 이어 일어나는 것을 일컬어 ‘주’라고 하며,100) 그리고 그러한 ‘주’에는 전후 차별이 있기 때문에 ‘주이(住異)’라고 이름하니, 전후 찰나가 서로 유사하게 생겨날 때에도 전후를 서로 비교해 보면 차별이 없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생’ 등이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하지 않더라도 일 찰나 동안의 4상은 역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101)
그대의 종의는 일찍이 두려워한 바가 있었기에 ‘생’ 등이 개별적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으면서 이제 와서 다시금 그것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성립시키니, 어찌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어째서 유위법이 일 찰나 동안 생ㆍ주ㆍ이ㆍ멸의 네 법을 자성으로 삼는다면서 어떠한 법도 동일한 시간에 생겨나고 지속하고 쇠퇴하고 괴멸하는 과실이 없다고 하는 것인가? 만약 “중연(衆緣)과 관계[繫屬]하였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중연도 이러한 [4상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단박[頓]에 연이 되어야 할 것이니, 말하자면 그러한 중연도 각기 모두 생ㆍ주ㆍ이ㆍ멸을 자성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이치에서 연 자체에 네 가지가 있음에도 처음의 것이 ‘생’의 연이 되어 바로 소멸하지 않게 하는 것인가? 또한 어떠한 이치에서 제 유위법은 단지 [법] 자체를 낳는 연(즉 생상)의 조건[緣]이 되어 처음에 먼저 제법이 생겨나게 할 뿐, [법] 자체를 멸하는 연(즉 멸상)의 조건이 되어 법이 본래부터 일어나지 않게 하지는 않는 것인가?102)
또한 ‘생’과 ‘멸’은 동일한 법에 근거하여 성립한 것이니, 만약 [양자가] 다르다고 하든 다르지 않다고 하든 여기에는 다 과실이 있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것(생과 멸)이 만약 다른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생겨나는 것)은 바로 이것(소멸하는 것)과 다른 것이 되어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다르지 않은 것이라면, 생겨날 때 마땅히 소멸해야 할 것이며, 소멸할 때에 마땅히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두 가지는 [동시에] 존재해서도 안 될 것이니, 생과 멸의 두 종류는 서로가 서로를 장애하기 때문이다. 또한 생겨나는 법[生法] 자체가 바로 소멸하는 법[滅法] 자체라고 하면서 ‘생’과 ‘멸’에 잡란의 과실이 없다고 말하니, 이는 필시 비슬노천(毘瑟笯天, 비쉬누viṣṇu신, 자재천을 말함)이 부리는 환혹(幻惑)이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마땅히 과거와 미래가 존재한다고 해야 할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지 살핀 연후에 결택(決擇)해야 할 것이니, 그런 후에야 ‘일찍이 없다가 지금 있으며[本無今有], 있다가 다시 없어진다[有已還無]’는 의미의 상속이나 혹은 ‘[각각의] 찰나가 모두 일시 4상을 성취한다’는 사실을 설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어떤 뜻에 근거하여 주상(住相)을 ‘후후(後後)의 찰나가 전전(前前) 찰나에 이어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인가? 전 찰나에 이어 일어나는 것은 마땅히 ‘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며, 이미 ‘생’을 다시 설하였으므로 마땅히 4상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어떠한 연의 힘에 의해 전후 찰나의 상속에 다름[異]이 있는 것인가? 그 허물은 앞에서 설한 바와 같다. 또한 오로지 법으로서 멸성(滅性)이라고 이름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 허물도 앞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103) 따라서 ‘생’ 등은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4) 4상 구유(俱有)에 관한 경주의 논란 비판
또한 경주는 “만약 유위인 색법 등의 자성을 떠나 ‘생’ 등의 [개별적인] 실체[物]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법도 동일한 시간에 생겨나고 머물고 쇠퇴 괴멸해야 할 것이니, [4상은 본법과] 동시에 존재[俱有]하는 것이라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고 말하면서,104) 유위를 떠나 별도의 생 등의 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그와 같은 과실의 병은 구제하거나 치료할 수 없으니, 어떠한 법도 동일한 시간에 공능이 차별된다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 생ㆍ주ㆍ이ㆍ멸한다는 것은) 이치상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105)
그러나 유위를 떠나 별도의 생 등의 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 그러한 과실은 없을 것이니, [상] 자체가 동일하지 않듯이 작용에도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갈랄람(羯剌藍, 잉태 후 첫 일주일 간의 상태)이나 종자(種子) 등 안팎의 온갖 법을 현견하건대, 그것들은 그 밖의 다른 연의 도움[攝助]을 받아야 비로소 자신의 결과를 낳는 데 뛰어난 공능을 지닐 수 있다. 이를테면 갈랄람 등은 식(識)의 도움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아 알부담(頞部曇) 등을 낳게 된다. 비록 알부담 등이 식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식에 의해서만 낳아지는 것은 아니니, 알부담 등에는 이러한 두 가지 상속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106) 그렇지만 이러한 식이 알부담 등에 대해 두드러진 연이 되지 않은 것은 아니니, 이것(식)이 존재함으로 말미암아 그것(알부담)이 존재하며, 이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식은 갈랄람 등에 대해 구조연(俱助緣, 그것과 동시에 존재하는 보조적인 연)이 되어 알부담 등을 낳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식으로 하여금 역시 종자 등에 대해서도 구조연이 되어 싹 등을 낳게 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종자 등은 땅[地] 등의 도움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아 싹 등을 낳게 된다. 비록 그러한 싹 등이 땅 등에 근거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땅 등에 의해 싹 등이 낳아지는 것은 아니니, 종자 등이 무간에 싹 등을 낳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땅 등은 그러한 싹 등에 대해 두드러진 연이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니, 싹 등의 존재 유무는 땅 등에 달렸기 때문이다. 또한 땅 등은 종자 등에 대해 구조연이 되어 싹 등을 낳을 뿐만 아니라 땅 등으로 하여금 역시 그러한 갈랄람 등에 대해서도 구조연이 되어 알부담 등을 낳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밖의 다른 법의 도움[緣助]이 있을 때 원인은 자신의 결과를 낳게 되는 것이니, 상응하는 바대로 마땅히 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스스로 석가(釋迦)의 제자라고 말하는 이는 필시 마땅히 구생인(俱生因, 함께 생겨나는 원인)의 존재를 인정해야 할 것이니, 계경에서 “식과 명색은 서로가 서로에 연이 되어 머문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갈랄람과 종자 등은 알부담과 싹 등에 대해 전생인(前生因, 먼저 생겨난 원인)이 되지만, 식과 땅 등은 구생연(俱生緣)이 된다. 이러한 구생연은 전생인에 비해 그 힘이 보다 뛰어나니, 비록 그 같은 갈랄람과 종자 등의 온갖 전생인이 존재할지라도 만약 식이나 땅 등의 구생연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알부담이나 싹 등의 온갖 결과는 필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알아야 할 것이니, 온갖 유위법은 여러 가지 외적인 보조인연도 가져야 하지만 반드시 내적인 생ㆍ주ㆍ이ㆍ멸을 직접적인 보조인[近助因]으로 삼아야 비로소 세간에 나타날 수 있다.
그런데 유위법의 분위(分位, 작용하는 상태)는 동일하지 않지만 간략히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결과를 인기(引起)하는 작용을 아직 획득하지 않은 것[未得]과 지금 막 획득하려고 하는 것[正得]과 이미 소멸한 것[已滅]의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온갖 유위법에는 다시 두 가지 종류가 있으니, 작용을 갖는 것(kāritra)과 오로지 본성 그 자체[體]로서만 존재하는 것(svabhāva)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전자가 바로 현재라면, 후자는 바로 과거와 미래이다. 나아가 이러한 유위법에는 다시 그 하나하나에 각기 두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그것의 공능이 뛰어난 것과 저열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온갖 유위법으로서 만약 능히 원인[因]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인섭(引攝)하는 것을 일컬어 ‘작용(즉 뛰어난 공능)’이라고 하며, 만약 능히 조건[緣]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기를 섭조(攝助)하는(돕는) 것이면, 이를 일컬어 ‘공능(즉 저열한 공능)’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두 종류에 대해서는 삼세(三世)를 분별하는 중(본론 제50권; 제52권)에 마땅히 널리 생각해 보게 되리라.
마땅히 [여러 형태로] 차별되는 연기(緣起)의 올바른 이치를 마음에 간직하고서 그러한 ‘생’ 등의 공능차별에 대해 응당 믿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즉 어떤 법이 있어 아직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 [그 법은]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막 획득하려고 하거나 이미 소멸한, (다시 말해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외적 조건[外緣]의 도움[攝助]으로 자신의 일[自事]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공능인 내적 조건[內緣]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생상(生相)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법이 있어 결과를 낳는 작용을 지금 막 획득하려고 할 때, 그 때 외적 조건의 도움으로 자신의 일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공능인 내적 조건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러한 내적 조건이 바로 나머지 세 가지 상이다.
즉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位]에서는 ‘생’이 내적 조건이 되어 소생법(所生法)을 일으켜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에 이르게 하니, 이러한 소생법을 일컬어 ‘이미 일어난 것[已起]’이라고 한다. 또한 막 소멸하려고 하는 상태[正滅位]에서는 ‘주’가 내적 조건이 되어 소주법(所住法)을 안주시켜 자신의 결과를 낳고 이미 소멸한 상태[已滅位]에 이르게 하니, 이러한 소주법을 ‘이미 자신의 결과를 능히 낳은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막 소멸하려고 하는 상태에서는 ‘멸’이 내적 조건이 되어 소멸법(所滅法)을 괴멸시켜 이미 소멸한 상태[已滅位]에 이르게 하니, 이러한 소멸법을 일컬어 ‘이미 괴멸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상(異相)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원인은 요컨대 장소[處]ㆍ3세(世)ㆍ시간ㆍ상태[位]ㆍ반려[伴]에 근거[待]하여 비로소 결과를 낳기 때문에,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와 이미 생겨난 때에 일으키는 작용이 다르다”고 하였다. 이를테면 혹 어떤 원인은 장소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비는 요컨대 구름이 있는 곳에 근거하여 비로소 생겨나며, 섬부주(贍部洲)의 유정은 요컨대 금강좌(金剛座)에 처하여 비로소 무상정등보리(無上正等菩提)를 증득하는 것과 같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3세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이숙인이나 순해탈분과 같은 것은 요컨대 과거세에 존재할 때 비로소 능히 결과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시간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전륜왕의 업과 같은 것은 요컨대 겁(劫)이 더해질 때 비로소 능히 전륜왕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상태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온갖 종자는 그것이 변이한 상태에 이르러 비로소 능히 싹을 낳을 수 있으며, 첫 번째 무루심(고법지인)이나 광명 등은 본성 그 자체[體]가 비록 이전에 존재하였을지라도 요컨대 막 생겨나려고 하는 미래 상태[正生位] 중에서만 능히 작용하는 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혹은 다시 어떤 원인은 반려에 근거하여 결과를 낳으니, 이를테면 온갖 대종이나 심ㆍ심소 등은 요컨대 그 반려와 함께 하여야 능히 작용하는 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곧 이같이 차별적인 연기의 올바른 이치에 따라 4상이 작용을 일으키는 상태[分位]는 동일하지 않다. 이를테면 막 생겨나려고 할 때[正生時]에는 생상(生相)이 작용을 일으키며,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에 이르면 주ㆍ이ㆍ멸 세 가지가 다같이 일시에 각기 개별적인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4상이 작용하는 시간이 이미 다른데, 어떻게 ‘어떠한 법도 마땅히 동일한 시간에 생겨나고, 지속하고, 쇠퇴 변이[衰異]하고, 괴멸해야 한다’고 힐난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막 소멸하려고 할 때[正滅時], 이러한 소상법은 그 밖의 또 다른 상인 주상(住相)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잠시 안주하여 능히 자신의 결과를 낳으며, 바로 그 때 또 다른 상인 이상(異相)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결과를 낳는 작용)은 쇠퇴 변이하게 되고, 또한 바로 그 때 또 다른 상인 멸상(滅相)을 두드러진 원인으로 삼기 때문에 그것이 괴멸하게 된다.
따라서 세 가지 상이 동일한 시간에 [존재할지라도] 서로 모순 되는 과실은 없는 것이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14권
변차별품 ⑥
(5) 4상 구유(俱有)에 관한 경주의 논란 비판(續)
또한 저 경주(經主)는 이에 대해 이같이 의심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때 그 같은 법(즉 所相法)을 안주(安住)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쇠이(衰異)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 괴멸(壞滅)하는 것이라고 말해야 할 것인가?”107)
여기서 마땅히 결택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 중에서 주ㆍ이ㆍ멸의 세 가지 상은 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각기 달라 동일한 시간 중이라도 소상법과 관계하는 바[所望]가 같지 않기에 세 가지 의미를 모두 갖는다고 할 수 있으니, 이와 같은 통석(通釋)이 어떠한 이치와 어긋난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그의 의심은 이치에 맞는 것이 아니다.
또한 [그는 앞의 논설] 바로 앞에서 “설령 미래[법의 존재]를 인정할지라도 ‘생’이 작용을 갖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미래를 성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미래의 [생]상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러한 미래]법이 현재할 때 생상의 작용은 이미 낙사(落謝)하였는데, [그것이] 어떻게 현재를 성취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인가? 마땅히 현재의 [생]상을 설해야 하는 것이다”고 설하고 있지만,108) 여기에는 어떠한 어긋난 점도 없으니, 현재법이 아니라면 작용을 갖는 일도 없기 때문이다.
생상은 미래[법]이 생겨나려고 할 때 능히 제법을 낳으며, 그것이 바로 생의 작용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떠한 까닭에서 ‘이러한 [생상의 작용은] 오로지 현재이다’고 말하는 것인가?
천애(天愛, 어리석은 자)여! 작용(作用)은 그대가 아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공능(功能)으로, 작용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다. 즉 유위법으로서 만약 능히 원인[因]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인섭(引攝)하는 것이면, 이를 일컬어 ‘작용’이라 하고, 만약 능히 조건[緣]이 되어 다른 존재의 생기를 섭조(攝助)하는 (돕는) 것이면, 이를 일컬어 ‘공능’이라고 하니, 앞(제13권 말미)에서 이미 분별한 바와 같다.109) 일체의 현재[법]은 모두 능히 원인이 되어 자신의 결과를 낳을 수 있지만, 모든 현재[법]이 다 능히 조건이 되어 다른 종류[異類]의 생기를 돕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어둠 속의 안근(眼根)이나 혹은 공능에 손상을 입은 안근은 능히 안식의 조건이 되어 그것의 생기를 도와 일어나게 할 수 없지만, 그러나 그 작용(자신의 결과를 산출하는 작용)은 어둠에 손상되는 것이 아니니, 결정코 능히 원인이 되어 당래의 안근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작용과 공능에는 다름이 있는 것이다.
나아가 같은 종류[同類]의 상속 중에서 결과를 낳는 데에는 결정적인 [세력도] 있고, 결정적이지 않은 [세력도] 있으니, [자신의 결과를] 산출[攝引]하는 세력을 일컬어 작용이라 하고, 역시 공능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만약 다른 종류의 상속 중에서 결과를 낳는 경우라면 다만 조건[緣]이 되어 그것의 생기를 도와 일어나게 할 뿐이니, 이는 작용이 아니라 다만 공능일 따름이다.
“[앞에서] 어찌 논하여 말하지 않았던가? 고법지인(苦法智忍)과 광명과 생상, 이와 같은 세 법은 모두 미래에서 능히 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고.110)
천애여! 그대는 지금 글귀에 집착하여 뜻에 미혹하구나. 우리의 종의에서는 이 글귀를 다만 직접적 조건[近緣]이 되는 공능을 ‘작용’으로 가설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즉 여러 가지 종류의 법의 생기조건[生緣] 중에서 생상은 바로 직접적인 조건이니, 그 이치는 지극히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밖의 다른 상태(현재)에서 원인으로서의 ‘작용’이라는 말을 이러한 상태(正生位) 중에서 개념[名想]적으로 일시 설정하게 되었던 것이다.111) 이와 마찬가지로 ‘주’ 등의 경우도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고법지인이나 광명은 역시 이러한 상태에서 뛰어난 공력이 있어 이러한 [작용이라는] 명칭을 일시 설정하게 된 것이지만, 실로 오로지 결과를 인기하는 [현재 찰나의] 세력에 대해서만 비로소 ‘작용’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혹 어떤 이는 힐난하여 이같이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位] 중에 ‘생’ 등의 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이때 ‘생’은 작용을 갖는데 (다시 말해 생은 그 작용을 이행하는데) 주ㆍ이ㆍ멸은 작용을 갖지 않는 것인가? 또한 만약 이러한 상태 중에 ‘생’ 등의 상이 존재한다면 어떻게 ‘주’ 등은 작용을 갖지 않는데 오로지 ‘생’만이 작용을 갖는 것인가?”
이러한 힐난은 옳지 않으니, 바야흐로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에서 ‘생’ 등의 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주’ 등은 그 때 현재하지 않기 때문에 아직 그 공능을 갖지 않았을 뿐이다. 설혹 이러한 상태 중에서 아직 ‘생’ 등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그대들의 인과(因果)의 이치와 마찬가지로 역시 어떠한 어긋남도 없을 것이니, 그대들의 종의 중에서도 결과가 장차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에서 능히 그것을 낳는 원인적 존재[因性]가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든 [관계없이] 인근(隣近)과 전전(展轉)의 원인이 존재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이다.112)
(6) 이상(異相)에 대한 경주의 논란 비판
또한 저 경주(經主)는 4상 가운데 이상(異相)을 부정하고 세 가지만을 인정하면서 이같이 말하고 있다.
“또한 마땅히 일법(一法, 일 찰나의 법)이 생겨나서 아직 괴멸되지 않은 상태를 ‘주’라 이름하고, 머물다가 괴멸하는 때를 ‘멸’이라 이름한다고 하는 것은 이치상으로 그럴 수 있다 할지라도, 이상(異相)이 일법 상에 존재한다는 것은 아무리 앞뒤로 미루어 따져보아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異)’ 즉 다름이란 이를테면 전후 성상(性相, 본성과 양태)이 전변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러한 법을 이러한 법과 다르다고는 말할 수 없으니,113) 따라서 게송을 설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앞의 것과 같으면 이상(異相)을 성취할 수 없고
앞의 것과 다르면 일법(一法)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일법 상에서는
이상을 설정하여도 끝내 성취할 수 없는 것이리라.”114)
먼저 이상(異相)이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이미 간략히 언급하였지만, 찰나상속 상의 다름[異]에 대해서는 함께 언급하지 않았으니, 이제 다시 각기 마땅히 이러한 뜻에 대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본법과는 별도로 이상 자체가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경우, 이에 따라 능히 소상(所相)의 일법은 변이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본법 자체가] 변이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점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본]법 이외 이상 자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서 찰나상속 상에서만 다름이 존재할 뿐이라고 인정한다면, 외적조건에 어떠한 차별도 없을 경우 어떻게 변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경주는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내가 생각한 바에 대해서는 뒤(본론 제50권)에 삼세(三世)의 뜻을 분별하는 곳에서 응당 그것과 함께 나타내게 될 것이다.
지금 여기서는 바로 뜻만을 간략히 성립시켜 그것으로 [경주의] 의심을 물리치도록 하겠다. 본래 제법은 오로지 본성 자체[體]로서 안주하는 것일 뿐 차별적 작용[用]은 갖지 않았지만, 이전에 생겨난 구생연(俱生緣)의 힘과 만남에 따라 본래 없던 차별적 작용이 일어나게 되니, 이를 일컬어 ‘현재의 작용’이라고 하며, 역시 또한 ‘능히 자신의 결과를 인기하는 공능’이라 이름한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 근거하여 세존께서는 “일찍이 없다가 지금 있으며[本無今有] 있다가 다시 없어진다[有已還無]”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작용과 본체는 다른 것이라고 말할 수 없으니, 마치 능히 증익하고 감손하는 차별적 공능과 능히 영수(領受)하는 것 자체(즉 ‘受’)가 다르지 않은 것과 같다.115) 또한 [그대(경부)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후 찰나의 마음 중에 전 찰나 마음의 차별에 의해 인기된 습기(習氣, vāsanā, 공능의 異名)가 [존재한다면], 이것이 후 찰나의 마음과 다른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혹은 또한 유견유대(有見有對)로서 선한 조색의 업이 비록 색과 다르지 않다고 할지라도 그 같은 품류의 차별은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116)
이러한 점에서 모든 대법자(對法者, 아비달마논사)들은 오로지 법 자체에 대해서가 아니라 법 자체의 차별적 작용에 대해 ‘이(異)’ 즉 변이라는 말을 설정하였으니, 이를테면 유위법이 자신의 법체[自體] 중에서 능히 자신의 결과를 인기하는 작용을 ‘주(住)’라고 이름하였으며, 이러한 작용이 쇠퇴하여 감손(減損)되는 것을 ‘이(異)’라고 이름하였다. 즉 이러한 ‘주’나 쇠퇴(즉 ‘이’)는 [법] 자체가 갖는 [본성]이라고는 할 수 없으며, 마땅히 개별적인 법으로서 존재하여 [본법을] 지속하게 하고 쇠퇴하게 하는 것이다. [지속하게 하고 쇠퇴하게 하는] 이러한 두 가지 원인이 바로 주이(住異)의 상이니, 이 같은 정리(正理)를 어찌 인가하지 못하는 것인가?
내(경주 세친)가 이를 능히 인가하지 않는 것은, 이러한 차별적 작용이 현재 찰나에 있어서는 [법]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용이 이미 변이하였다면, 법체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거늘 어찌 작용은 변이한다고 하면서 법체는 [변이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인가?
만약 그가 종의로 삼는 바인 ‘과거ㆍ미래법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면, 이러한 과실이 있을 수 있을 것이지만, ‘법체는 삼세에 걸쳐 항상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경우에는 [이러한 과실이] 없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만약 작용이 멈추면 단지 현재[상]만을 버릴 뿐 법체는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찌 법체도 역시 변이하는 일이 있다고 하겠는가? 따라서 게송으로 설하여 말하면 다음과 같다.
[법] 자체에 변이가 있다고 말한 것은
뛰어난 작용이 쇠퇴하고 감손하였기 때문이니
그러니 어찌 일법(一法) 상에
이상을 설정하여도 끝내 성취할 수 없다고 하겠는가?
그러나 막 생겨나려고 하는 상태[正生位]에서는 ‘이(異)’라는 말을 설정할 수 없으니, 그 때는 아직 작용이 쇠퇴하거나 감손되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 같은 이치에 의해 ‘주이(住異)’라는 말을 설정하게 된 것으로, 이는 능히 결과를 인기하는 작용(즉 ‘住’)을 쇠퇴 감손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법은 그 작용이 쇠퇴 감손될 때 비로소 자신의 결과를 인기하는데, 원인이 감손됨에 따라 후 찰나의 결과[後果]가 낳아지는 상태에서는 점차 전 찰나의 원인[前因]이 저열하게 된다. 따라서 결과가 [낳아지는 상태가] 점차 저열해지는 것은 [전 찰나의] 원인에 변이[異]가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러한 결과의 찰나 다시 [결과와] 함께 일어난 [또 다른] 이상(異相)이 조건이 됨에 따라 [그 같은 결과를] 쇠퇴하고 감손하게 하며, 따라서 그것은 다시 능히 후 찰나의 결과를 점차 저열하게 만드는 조건이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유위의 상속은 찰나 찰나에 걸쳐 후후(後後) 찰나를 달리하니, 그래서 전전(前前) 찰나에 이상(異相)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뜻이 이미 성립하였으니, ‘최후 찰나에 차별이 있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앞의 모든 찰나에서도 결정코 차별이 존재한다’고 마땅히 추리[比量]할 수 있는 것으로, 이는 비유논사(譬喩論師)가 주장한 허깨비[幻惑]와 같은 찰나상속 상의 ‘이(異)’의 이치와는 같지 않은 것이다.117)
그러나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찰나의] 상속이 점차로 증장할 때 이상은 마땅히 존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니, [감손 쇠퇴의] 결과를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같은 과실은 없으니, 그 때(상속이 점차 증장할 때) 주상은 외적 조건[外緣]의 도움으로 그 세력이 증강되어 이상을 억제하여 숨겼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유여사는 설하기를 “제법의 작용은 어떠한 경우라도 일 찰나를 초과하여 능히 머무는 일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를 유이(有異, 변이를 갖는 것)라고 이름하기도 한다. 그러나 자상을 버릴 때 비로소 ‘이(異)’라는 명칭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할지라도] 유위가 상주성의 허물을 갖게 되는 것도 역시 아니다”고 하였다. 즉 이러한 법성 자체는 항상 그러하여 조작하는 것도 아니고, 전변하는 것도 아니며, 바뀔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118) [예컨대] 불은 항상 따뜻함[煖]을 자신의 본질[自體]로 삼는 것으로, 따뜻함을 떠나 불 자체를 획득할 수 없다. 그렇지만 불의 작용은 요컨대 온갖 조건을 갖추어야 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온갖 조건에 따라 생멸하기 때문에) [우리의] 종의에서는 불을 무상한 것이라고 설정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경주가 말하듯이] 법 자체가 변이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개별적인 법은 마땅히 무상한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들에 따르는 한] 법 자체는 변이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오로지 현재세의 법만 존재하고 과거나 미래의 법은 그 자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경우, 제행의 법성은 마땅히 항상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니, 어떠한 변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어째서 변이가 없다는 것인가?
이를테면 존재하는 것[有性]과 존재하지 않는 것[無性]은 각기 어떠한 변이도 없는 것으로 안립(安立, 확정)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오로지 찰나성인 현재세의 법만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이러한 찰나성의 법이] 변이한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또한 과거와 미래의 법은 그 자체 모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을 어떻게 변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119) 따라서 [그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할 수도 없을뿐더러 ‘변함이 없는 것을 존재[有]라 하고, 변함이 있는 것을 비존재[無]라고 하며, 이러한 [양자의 차별]을 일컬어 변이라고 한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곧 존재와 비존재의 두 가지 자체가 서로 함께 [변이를] 성취할 수는 없으니, 존재와 비존재는 그 자체 서로 모순 되기 때문이다.120)
또한 역시 결과(현재법)가 변이하는 것이면 원인에도 변이함이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존재와 비존재가 서로 함께 변이를 성취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원인에 변이가 없으면 결과에도 변이가 있을 수 없으니, 결과는 필시 원인에 따라 비로소 변이를 갖기 때문이다. 그런데 만약 유성(有性) 즉 존재하는 것이 바로 무상(無常)한 것이라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럴 수 없으니, 유성은 그 밖의 다른 성질(즉 무성)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법으로서 유성인 것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유(有)와 비유(非有)는 각기 별도로 설정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볼 때, [그는] 제행에는 결정코 변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즉 유위는 모두 다 마땅히 상주하는 것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만약 [제행에 변이가 존재하며 무상한 것이라고 한다면], 과거와 미래는 역시 존재하고 역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니, 아직 생겨나지 않은 [상태인] 비존재[無]도 생겨나 존재[有]가 될 수 있기 때문이며, 이미 생겨난 [상태인] 존재도 소멸하여 비존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이 [경주에 따르는 한] 과거ㆍ미래[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도, 현재[법]이 존재한다는 것도 다같이 결정적인 것이 아니어서 [법성 자체가] 바뀔 수 있지만,121) 과거ㆍ미래[법]의 존재는 현재[법]과 마찬가지로 일체시에 걸쳐 항상하여 [법체가] 바뀌는 일이 없다.
곧 [법] 자체는 [항상] 존재하지만 그 작용은 존재하기도 하고 존재하지 않기도 하기 때문에 유위의 분위(分位, 작용하는 상태)에 변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제법은] 삼시(三時)에 걸쳐 존재한다’고 설하는 종의에서만 일법(一法) 중에 변이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일법 상에 변이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상(異相)이 성취될 수 있는 것이며, 이상이 성취되고 나서야 무상의 뜻이 성립될 수 있으니, 이는 오로지 ‘현재[법]만이 존재한다’고 설하는 종의에서 ‘상속의 찰나 상에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과 같은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에서 설한 바와 같기 때문에 마땅히 이만 그치기로 한다.
3) 생(生) 등의 상과 인연의 관계
만약 ‘생’이 미래 [상태]로 있으면서 소생법(所生法) 즉 생겨나야 할 법을 낳는 것이라면, 미래의 일체의 법은 어째서 단박[頓]에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그것(소생법)은 능히 그것을 낳는 원인[能生因]과 항상 화합해야 하기 때문으로, 이에 대해서는 앞(본론 제13권 말)에서 이미 분별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분별하였던 것인가?
이를테면 혹 어떤 법이 있어 아직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획득하지 않았을 경우, [그 법은] [자신의] 결과를 인기할 만한 작용을 아직 획득하지 않았거나 막 획득하려고 하거나 이미 소멸한, (다시 말해 미래ㆍ현재ㆍ과거의) 외적 조건[外緣]의 도움[攝助]으로 자신의 일[自事]을 성취하는 것을 돕는 공능인 내적 조건[內緣]을 일으키게 되는데, 이를 생상(生相)이라 이름한다고 하였다. 바로 이러한 뜻에 근거하여 이와 같은 말을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생’은 능히 소생법을 낳지만
인연과의 화합을 떠나서는 낳지 않는다.
논하여 말하겠다.
그 밖의 다른 인연(因緣)과의 화합을 떠나 오직 생상의 힘만으로는 소생법 즉 생겨나야 할 법을 능히 낳을 수 없기 때문에 온갖 미래법이 모두 단박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즉 생상은 비록 [소생법과] 동시 생기하는 직접적인 원인[近因]이 되어 능히 소생법을 낳을지라도, 제 유위법은 반드시 전 찰나의 자기존재로서의 원인[自類因]과, 그리고 그 밖의 외적 조건[外緣]과 화합하여 그것들의 도움을 받아야 하니, 이를테면 씨앗과 땅 등의 차별적인 인연이 싹 등의 ‘생’을 도와 싹 등을 낳게 하는 것과 같다.122)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즉 經部師를 말함)들은 오로지 인연이 ‘생’의 공능을 갖는 것으로 간주할 것이다. 즉 생상이 별도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인연과 화합하기만 하면 제법은 바로 생겨날 것이며, 화합하지 않으면 바로 생겨나지 않을 것인데,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생상을 설정할 것인가? 따라서 오로지 인연의 힘만 갖추어지면 [제법은] 마땅히 생겨나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힐책은 옳지 못하니, [그대들처럼] 오로지 중연(衆緣)에 의해 제법이 낳아진다는 사실만을 인정하더라도 동일하게 힐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만약 오로지 ‘미래의 제법은 인연이 화합하면 생겨날 수 있다’는 사실만을 인정한다면, 이 역시 동일하게 힐책되어야 할 것이니, 미래 제법의 인연은 [생기 순서상의] 어떠한 차별도 없는 것인데, 어찌 단박에 생겨나지 않는 것인가?
또한 인연 중의 어느 한 가지를 결여하더라도 그 밖의 인연을 갖추었기 때문에 결과 역시 마땅히 생겨나야 할 것이다.123) 그럴 경우 가령 안근과 같은 것은 선행한 업에 의해 인기(引起)되는 것이므로 비록 대종을 떠나서도 역시 마땅히 생겨나야 한다. 혹은 선행된 업에 의하지 않고 다만 대종의 공력(功力)만에 의해서도 안근은 생겨날 수 있어야 한다. 혹은 모든 안근은 업에 따라 인기된 것으로, 능히 대종을 낳아 그것과 화합하지 않는 때가 없으므로 하나의 안근이 생겨날 때 다른 안근도 역시 마땅히 일어나야 한다.124) 혹은 대종은 안근에 대해 어떠한 능력도 없어야 할 것이니, 전 찰나의 안근을 떠나 대종이 홀로 [안근을] 낳는 일은 관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다만 전 찰나의 안근에 의해 후 찰나의 안근이 생겨나는 것일 뿐이라면, 대종이 능히 [안근을] 낳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런 쓸모도 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또한 종자의 경우, 물이나 흙 등의 조건 중 어느 하나라도 결여될 때 싹은 필시 생겨나지 않지만, 종자 등의 공력은 상식적으로 알 수 있다. 그러나 안 등이 생겨날 때, 지(地) 등의 대종이 갖는 능생(能生)의 공력은 바로 관찰[現見]되지 않는다. 따라서 마땅히 바로 관찰되지 않은 대종의 공력이 원인이 되어 안근 등을 낳는다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그대는 ‘업의 종자가 있어 상속 전변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럴 경우 무엇이 장애하여 일체의 업의 과보를 능히 단박에 낳지 않는 것인가?125) 만약 중연의 도움에 의해 업의 종자가 비로소 능히 [과보를] 낳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는 다만 연이 능히 낳는 것이라고 해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수고스럽게 업의 종자를 설정하는 것인가? 즉 중연이 업을 도와 결과를 낳은 것이니, 만약 중연이 없었다면 결과는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이미 중연의 도움에 힘입었더라도 업의 종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면, 비록 중연을 갖추어야 할지라도 어찌 생상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첫 찰나[初念]의 무루도가 생겨날 때를 살펴볼 것 같으면, ‘생’이 능히 원인이 되어 무루의 득(得)을 일으키는데, 득의 자상이 실유라는 것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잘 성립시켰다. 그럴 때 ‘생’을 배제하고 어떠한 별도의 법이 있어 능히 이러한 무루득의 전 찰나의 구기인(俱起因)이 된다고 설할 것인가? 만약 그러한 원인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면, 득은 마땅히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첫 찰나의 무루도가 성취되었다고 마땅히 설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생상이 생겨날 때에도 역시 별도의 구생인(俱生因)이 있어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아도 되는 것인가?
마땅히 역시 있어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생’ 자체를 제외한 그 밖의 결과가 동일한 법 (다시 말해 동일한 결과를 낳는 법)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異)와 멸(滅)을 ‘생’의 보조적 원인[助因]이라 하겠는가?126)
옛날의 여러 스승[古昔諸師]들은 모두 이와 같이 해석하였다. “동일한 결과를 낳는 법은 전전(展轉)하며 [서로] 원인이 되기 때문으로, 예컨대 온갖 대종이 서로가 서로를 따르는 것과 같다.” 다시 어떤 이는 해석하여 말하기를 “모든 유위법은 일체가 모두 바로 생[멸]하는 등의 존재[性]이기 때문에 ‘생’ 등의 4상 하나 하나가 작용할 때, 이를 근거[門]로 하여 그 밖의 다른 [세 가지] 법은 모두 보조적인 힘[助力]이 되니, 이를테면 4념주(念住) 중 신(身) 등을 무상성으로 관찰하라고 한 것이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명하기 때문이다”고 하였다.127)
(7) 주상(住相)에 대한 상좌(上座)의 논란 비판
그런데 상좌(上座)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제행(諸行)은 머무는(지속하는) 일[住]이 없다. 만약 제행이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머무는 것이라면, 어떠한 까닭에서 수유(須臾)ㆍ하루ㆍ한달ㆍ한철ㆍ한해ㆍ겁(劫) 동안은 머물지 않을 것인가? [양자는 머문다는 점에서] 그 근거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아급마(阿笈摩)』에서도 역시 제행은 어떠한 경우라도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하였으니, 이를테면 세존께서는 ‘필추들이여, 제행은 모두 막 멸하려고 할 때 머무는 일도 없으며, 역시 또한 멸하는 일도 없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만약 제행이 지극히 짧은 시간만 머무는 것이라면--’이라고 한 그의 말은 이치상 마땅히 인정할 수 없다. 여기서 ‘지극히 짧은 시간’이란 일 찰나를 말하는 것으로, 만약 일 찰나도 역시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제행은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畢竟無]’이 되어야 한다. 만약 “유위는 어떠한 경우라도 전혀 머무는 일이 없으니, [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순간과 무간에 멸하기 때문이다”고 한다면, 어찌 이 같은 [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순간[時]은 존재한다고 하지 않겠는가? 따라서 제행은 지극히 짧게 머무는 시간[諸行極少住時]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128)
비록 ‘이러한 시간(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순간)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어떠한 경우라도 머무는 일은 없다.
[제법의] 어떠한 상태에 근거하여 ‘머무는 일이 없다’는 말을 설하게 된 것인가? [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때인가, [법성] 자체를 획득한 이후인가? ‘머무는 일이 없다’는 주장은 오로지 이 두 때에 [근거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때도 역시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제법은 그 자체가 생겨나는 일 찰나도 머무는 일이 없다고 한다면) 앞에서 설한 [절대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만다는] 허물을 능히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만약 [법성] 자체를 획득한 이후 비로소 ‘머무는 일이 없다’고 말한다면, [우리도 그러한 상태에서 제법이 머문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힐난하는 것 자체가 쓸모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대(상좌)들이 말한 ‘[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때’란 바로 내가 말한 ‘주(住)’로서, 능히 결과를 인기하는 때이다. 즉 우리의 종의에서도 제행은 결과를 인기한 이후에도 지속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데, 어떠한 까닭에서 그대들은 내가 말한 제행의 주시(住時)를 부정하고 비판하는 것인가? 그대가 [주장한] ‘제행은 [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순간(시간)만 존재한다’에서 ‘존재하는 [순간]’은 반드시 그 밖의 다른 법에 근거하여 그 작용이 성취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결과를 인기하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말 역시 마땅히 반드시 그 밖의 다른 법에 근거하여 그 작용이 인기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니, 바로 이같이 [제행의 작용이 일어나는데] ‘근거가 되는 법’을 ‘주’라는 말로 설정한 것이다.129) 그런 즉 우리의 종의는 그대가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분명한 진술인데, 무엇이 이증(理證)과 교증(敎證)에 위배된다는 것인가?
어찌 경에서 “제행은 머무는 일이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따라서 만약 머무는 일이 있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교증에 위배되는 것이다.
오히려 그대의 주장에 위배됨이 있으니, [그대가] 여러 형태로 헤아려 본 것[計度]은 참다운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법(對法)의 여러 논사들이 설한 바는 이치를 헤아린 것인데, 여기에 무슨 어긋남이 있을 것인가? 그리고 계경에서 “머무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은 상주(常主)를 부정하기 위해서였으며, 그 후 다시 “역시 또한 멸하는 일도 없다”고 말하고 있지만, 이 말은 제행의 단멸(斷滅)을 부정하기 위해서였다. 만약 제행의 단멸을 부정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같은 ‘멸하는 일도 없다’는 말은 다시 무엇을 부정하는 것이라 해야 할 것인가?130)
즉 제행의 멸에는 다만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생겨남과 무간에 멸하는 것[生無間滅]이며, 둘째는 완전히 끊어져서 멸하는 것[畢竟斷滅]이다. 따라서 상주와 단멸의 두 극단을 부정하기 위해 경에서는 ‘머무는 일도 없고 멸하는 일도 없다’고 설한 것이지, 대법의 여러 논사들이 설정한 ‘결과를 인기하는 근거로서의 주(住)’를 부정하기 위한 말이 아니다. 청하건대 지혜 있는 모든 이는 자세히 살펴 관찰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구의 말이 정리(正理)와 성교(聖敎)에 어긋나는 것인가? ‘제행은 [결과를 낳는 동안] 잠시 머문다[暫住]’고 설하는 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제행은 완전히 멸하는 일이 없다’고 설하는 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처음부터 ‘제행은 생겨나서 어떠한 경우라도 완전히 멸하는 일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았다.(대론자)
그렇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계경에서 ‘[제행은] 모두 막 멸하려고 할 때 역시 또한 멸하는 일도 없다’고 설하였던 것인가?(중현)
여기서 ‘멸하는 일도 없다’고 말한 것은 ‘쉬는 일이 없다[無息]’는 뜻이니, 이 경에서의 뜻은 ‘제행은 생겨나서 무간에 반드시 멸하니, 잠시도 쉬는 때가 없다’는 것이다.(대론자)
그러나 ‘머무는 일이 없다’는 말만 설하면, 여기에는 이미 이러한 [‘제행은 생겨나서 무간에 반드시 멸하니, 잠시도 쉬는 때가 없다’는] 뜻이 드러나 있으므로, 다시 ‘멸하는 일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응당 쓸모없는 말이 되어야 한다. 나아가 우리 또한 ‘제행은 생겨나서 필경 상주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중현)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이유에서 ‘유위법은 생겨나서 머무는 일이 있다[有住]’고 말하는 것인가?(대론자)
‘머무는 일이 있다’는 말은 ‘잠시 머문다[暫停]’는 뜻이니, 이를테면 막 멸하려고 하는 때[正滅時] 제행은 잠시 머무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멸하였거나 막 생겨나려고 하는 때에는 ‘머문다’는 말을 설할 수 없으니, 작용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즉 앞에서 이미 논설한 것처럼 막 멸하려고 하는 때 제행은 비로소 결과를 인기하는 작용을 갖기 때문이다.(중현)
비록 이 같이 설할지라도 ‘주(住, 즉 주상)’는 필시 존재하지 않으니, 일찍이 계경에서 ‘머무는 일이 있다’고 설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대론자)
일찍이 [계경에서 ‘주’를] 부정한 일이 없는데, 어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토록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인가? 또한 [‘주’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경우] 이론적 난관에 부딪칠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어야 한다. 설혹 지교(至敎)에서 [‘머무는 일이 있다’고] 설한 일이 없다 할지라도 ‘주’는 정리(正理)에 어긋나는 바가 없는데, [머무는 일이] 있다고 말한들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렇지만 ‘머무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지교가 있으니, 예컨대 『무장유경(撫掌喩經)』과 같은 것이 바로 그것이다. 즉 계경 중에서는 “필추들이여, 제행은 환상과 같고 불꽃과 같아 잠시 머물다가 바로 다시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소멸한다”고 설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에 의해 이미 대법(對法)에서 설한 ‘제행은 잠시 머무는 때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지 않겠으며, 이에 따라 비바사(毘婆沙)의 해석 역시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지 않겠는가?
즉 [계경에서] ‘머무는 일이 없다’고 말한 것은, [작용한] 찰나 이후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설한 것이지 [머무는 일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상좌)가 말한 바는 이같이 자의에 따라 선서(善逝, 불타의 異名)의 경(經)을 분별 계탁(計度)하여 통석(通釋)한 것일 뿐이다. 즉 “경에서는 일찍이 ‘머무는 일이 있다’고 말한 일이 없기 때문이다”고 말한 것은, 이를테면 그들 부류가 이 경(앞서 인용한 『무장유경』)을 아직 읽지 못하였거나, 혹은 [읽었더라도] 자기들의 정의(情意)에 따라 이를 부정하여 올바른 인식수단[量]으로 삼지 않았든지, 혹은 그들 패거리[朋黨]의 주장이 그의 마음을 흐리고 어지럽게 하여 비록 자주 자주 경문을 펼칠지라도 명기하여 알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청하건대 온갖 이치를 탐구하는 자는 살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니, 누가 부처님의 경설을 자의에 따라 주장한 것인가? 제행은 잠시 머무는 일이 있다고 설하는 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경설을 부정하여 올바른 인식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자라고 해야 할 것인가? 그리고 박가범께서 앞서 인용한 경에서 “막 멸하려고 할 때 제행은 머무는 일이 없다”고 설한 것은 미래세를 고려한 것인데,131) 비유부(譬喩部)의 논사들은 그 같은 경문에 집착하여 찰나의 지속[刹那住]마저 부정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이 같은 『무장유경』을 설하여 제행은 잠시 머무는 일이 있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그럼에도 그(상좌)는 이 같은 위대한 스승[大師, 즉 불타]의 말씀을 수용하기를 거부하고서 다시 이같이 힐책하고 있다. “어떤 까닭에서 [‘제행은 머무는 일이 없다’는 경설을] 단지 [작용한] 찰나 이후에 근거하여 밀의(密意)로서 설하였다는 사실만을 인정하고, 중동분 이후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는 것인가? 찰나와 이것(중동분)에 어떠한 차별이 있다는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힐책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양자 사이에는]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즉 찰나 동안의 ‘주’는 구기인(俱起因)이지만, 중동분의 ‘주’는 그 같은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니,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힐책은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는 다시 이같이 힐책하고 있다. “만약 제행이 ‘주’의 힘에 의해 능히 잠시 머물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이러한 힘은 모든 유위를 일천 구지(俱胝, koṭi, 10의 6승)에 걸쳐 머물게 하지 않고 일 찰나 동안만 머물게 하는 것인가? 어떠한 이유에서 [‘주’는] 제행이 일념(一念, 일 찰나)만 머무는 원인이 되고 일천 구지의 찰나동안 머물게 하지 않는 것인가?”
이 역시 올바른 이치가 아니니, 그 역시 능히 [제행을] 낳을 수 있는 원인[能生因]을 떠난(배제한) 제행의 생기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럴 경우 “어떠한 이유에서 제행을 [능히 낳는 원인은] 일념 동안만 생기의 원인이 될 뿐 일천 구지의 찰나에 걸쳐 생겨나게 하지 않는 것인가?” 이처럼 [‘생’과 ‘주’는] 도리의 진퇴(進退, 주장과 비판)가 동일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말하기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낙수의 생(生)도, 주(住)도 모두 즐거움이다”고 하였으며, 또한 어떤 계경에서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색 등은 생겨나는 일도 있고 머무는 일도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만약 “이들 경에서 [‘머문다’는 말은] 상속에 근거하여 설한 것이다”고 한다면, 정리(正理)에 맞지 않으니, 그 뜻(‘제행의 상속이 머문다’는 말의 뜻)이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 “[그럴 경우] 찰나에 머무는 일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상속의 지속한다’는 뜻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 상속은 필시 [그것을 구성하는] 찰나에 근거하여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주상(住相)은 이증(理證)으로나 경증(經證)으로나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비유사(譬喩師)는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결같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니, 주상과 일찍이 무슨 원한을 맺었기에 그 이치가 이토록 분명하게 드러남에도 차마 받아드리지 않으려고 하는 것인가?
(8) 멸상(滅相)에 대한 유여사(有餘師)의 논란 비판
그런데 다른 어떤 이는 힐난하여 말하기를 “만약 무상상(無常相, ani- tyatā, 즉 滅相)이 [유위제법의 본성인] 무상성(性)을 떠나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어찌 고(苦)를 떠나 고상(苦相)이 별도로 존재한다고 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예로써 힐난하는 것은 그 이치가 이루어질 수 없으니, 만약 무상성이 무상상으로 말미암아 존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이러한 말에 근거하여 “고성(苦性) 역시 고상(苦相)으로 말미암아 존재해야 한다”고 힐난하여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위법의 본성이 바로 무상으로, 다만 멸상을 조건[緣]으로 삼았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이니, 이는 곧 유위법의 본성은 바로 무상이지만 요컨대 생기의 조건[生緣]에 근거하여 그것을 조건으로 삼았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유위제법의 본성인] 고성이 다시금 고상을 조건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고 한들 이것이 또한 무슨 힐난꺼리가 되겠는가? 따라서 그 같은 예로써 힐난하는 것은 그 이치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에 따라 공(空)과 무아(無我)를 통한 힐난에 대해서도 이미 비판한 셈이다.132)
또한 무상상이 바로 고상(苦相)이니, [제법의 본성] 자체가 무상하기 때문이며, 『고경(苦經)』에서 [“무상한 것은 바로 괴로운 것이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다른 어떤 이) 역시 이와 같은 힐난과 마주치게 될 것이니, 만약 생겨나는 법[所相法]은 그것과는 다른 별도의 생기의 조건이 있을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는 것이라면, 괴로움 역시 이와 다른 별도의 괴로움의 조건에 근거해야만 비로소 괴로움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괴로움 따위가 [생기의 조건 없이 저절로 생겨나는] 것처럼 생겨나는 법도 마땅히 생기의 조건을 떠나 저절로 생겨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마주치게 될 힐난에 대해서]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앞에서 어떻게 논설하였던 것인가?
“그대가 [주장한] ‘제행은 [법성 자체를 획득하는] 순간(시간)만 존재한다’에서 ‘존재하는 [순간]’은 반드시 그 밖의 다른 법에 근거하여 그 작용이 성취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결과를 인기하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하는 말 역시 마땅히 반드시 그 밖의 다른 법에 근거하여 그 작용이 인기될 때 비로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하였다.133)
즉 우리의 종의에서는 [제행은] 일체 시(時)에 걸쳐 존재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에 법의 유성(有性, 법성 자체)은 인연에 근거하지 않는다. 그런데 만약 괴로움이나 무아 등도 마땅히 유성과 같은 것이라고 한다면 (다시 말해 고성이나 무아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면), [인연에 근거하지 않는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의 소멸은 마땅히 생기처럼 요컨대 그 밖의 다른 법에 근거해야 한다. 따라서 소멸하는 법[所滅法, 즉 본법으로서 유성]을 떠나 능히 소멸하게 하는 별도의 내적 원인이 있으니, 이를 무상상(相)이라 이름함을 알아야 한다. 만약 ‘제행은 별도의 소멸의 원인(즉 멸상)을 갖지 않는다’고 한다면, 생기 역시 마땅히 그러하여 [별도의] 원인(즉 생상)에 근거하지 않고 일어나야 할 것이지만, 이 두 가지(소멸과 생기)와 [법] 자체(즉 본법)는 동시적인 것[俱]이면서 다른 법이기 때문에 [생기가 원인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면 소멸 또한 원인에 근거하여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혹 이 두 경우에는 역시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면 (다시 말해 ‘생기는 원인에 근거해야 하지만 소멸은 원인에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마땅히 두 가지가 차별되는 근거에 대해 말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를테면 제행의 생기는 반드시 원인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생겨날 때 늦고 빠름의 차별을 바로 관찰할 수 있지만, 만약 제행의 소멸 역시 원인에 근거하여 일어나는 것이라면 역시 마땅히 소멸할 때 늦고 빠름의 차이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약 소멸이 생기와 마찬가지로 때에 따라 늦고 빠름이 있다고 한다면, 제행은 찰나에 소멸한다는 [찰나멸(刹那滅)의] 종의에 위배되고 만다. 따라서 알아야 할 것이니, [제행은] 원인 없이 저절로 소멸한다고 하면 그 같은 허물이 없을 것이다.(이상 반론자가 이해한 생기와 소멸의 차이)
소멸의 원인은 [소멸하는] 행과 반드시 동시에 존재[俱有]하기 때문에 시간상의 [늦고 빠름의]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생기의 원인은 [생겨나는] 행과 동시에 존재하기도 하고 동시에 존재하지 않기도 하니, 비록 [생겨나는 법과] 시간적으로 떨어져 있더라도 역시 원인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제행이 생겨날 때 늦고 빠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제행의 소멸이 원인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막 생겨나려고 할 때[正生時]에 마땅히 괴멸하고 말아야 한다. 혹은 그 후(생겨난 이후)에도 역시 괴멸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니, 그대는 [생겨나기] 전이나 [생겨난] 후에도 다같이 [소멸의] 원인이 없다고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이러한 상태(즉 正生位)에서는 제행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는데, 어찌 바로 괴멸하게 된다고 힐난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다면, 마땅히 생기가 소멸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니, 요컨대 ‘생’이 존재할 때 비로소 ‘멸’도 존재하는 것임을 바로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제행의 소멸은 반드시 생기에 근거하는 것이라고 이미 인정하였으니, 어찌 원인 없이 소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지교(至敎)에 의해서도 ‘소멸에 원인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이러한 법이 멸하였기 때문에 그 법도 역시 멸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와 같은 일체의 법(유위제행)은 원인을 갖는다고 설하고 있으니, 따라서 제행은 원인에 의해 소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한 온갖 유위상은 모두 전전(展轉)하며 [서로에 대해] 원인이 되니, 반드시 ‘생’이 존재할 때 비로소 멸할 수 있기 때문이며, 반드시 ‘멸법’이 존재할 때 비로소 생겨날 수 있기 때문이며, 반드시 ‘주(住)’가 존재할 때 비로소 변이할 수 있기 때문이며, 반드시 ‘이(異, 쇠퇴)’가 존재할 때 지속이 변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어떤 이는 힐책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제행이] 머무는 데에는 [주상과 같은 별도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법은 저절로 소멸하는 것이니, 소멸에 무슨 [별도의] 원인이 필요할 것인가?” 그러나 이러한 힐책은 올바른 이치가 아니다. 즉 오로지 앞서 생겨난 법만이 원인이 된다고 설하는 대론자의 경우, 원인이 막 존재하려고 할 때[正有時] 생겨날 것은 아직 존재하지 않으니, 그는 미래의 법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 후 결과가 생겨난 상태에서도 선행한 원인은 [과거로 낙사하여] 이미 존재하지 않는데, 비록 [제행이] 머무는 데 [별도의]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어찌 ‘머문다’는 사실마저 부정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제행이 머무는 것을 소멸시킬 어떤 원인(멸상)이 설정되어야 하며,] 따라서 그가 설한 바는 ‘소멸에 [별도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지 않는 것이다.
또한 앞에서 ‘제행은 생겨나서 주상을 원인으로 하여 일 찰나 동안 머문다’고 이미 분별하여 놓고선 어찌하여 이제 다시 [제행이] 머무는 데에는 어떠한 [별도의] 원인도 없다고 설하는 것인가? 그는 이에 대해 “제행은 일 찰나 후에는 필시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저절로 소멸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만약 멸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그것을 존재하지 않게 할 것인가? 생겨난 것이 멸하게 되는 것은 모두 멸상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유위(즉 所相法)를 떠나 멸상은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마땅히 멸상은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니, 앞서 인용한 계경 중에서 “유위의 생기(生起)도 역시 알 수 있고, 멸진(滅盡)과 주이(住異)도 역시 알 수 있다”고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존재하지 않는 법[無法]에 대해 응당 알기를 권유하지는 않았을 것이니, 모든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존재하는 것’의 다른 명칭이기 때문이다.134) 또한 필시 [제법을] 능히 낳는 차별적[인 공능]이 있어 낳아질 법[所生法]으로 하여금 이미 생겨난 상태[已生位]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필시 [제법을] 능히 소멸하는 차별[적 공능]이 존재하여 소멸할 법[所生法]으로 하여금 이미 소멸한 상태[已滅位]에 이르게 하기 때문에 멸상은 생상처럼 개별적인 존재로서 설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저 상좌(上座)는 이와 같이 말하고 있다. “이를테면 비록 별도의 존재성(有性)ㆍ단일성(一性)ㆍ장성(長性)ㆍ단성(短性)ㆍ결합성(合性)ㆍ분리성(離性) 등에 근거하지 않더라도 존재ㆍ하나ㆍ김ㆍ짧음ㆍ결합ㆍ분리 등의 법을 성취할 수 있는 것처럼, ‘머문다’는 등의 사실 역시 그러하여 [주상 등과 같은] 별도로 근거하는 바가 없어도 [성취될 수 있다].”135)
그러나 이러한 설은 도리어 자신의 종의에 위배되는 과실을 범하는 것이니, 그들의 종의에서는 존재ㆍ하나ㆍ김ㆍ짧음ㆍ결합ㆍ분리 등의 법은 그 밖의 다른 법에 근거하여 성취되는 것이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제법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지만 어떤 인연에 의탁하여 지금 존재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제법은 그 밖의 다른 근거를 가지며, 존재성 역시 [이러한 입장에 따라] 근거하는 바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요컨대] 제행은 본래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는 것[本無今有]이라는 그대의 종의에 의하는 한, 이러한 존재성[有性]은 ‘생’과 마찬가지로 어떤 존재[有]에 근거할 때 비로소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법자(對法者)는 “제법의 존재성은 일체 시에 걸쳐 항상 존재하며, [다른 어떤] 인연에도 근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따라서 그가 말한 바는 자신의 종의를 스스로 어기는 것일 뿐 [대법의 종의에는 어긋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종의에 따르면,] 이러한 ‘하나’[라는 말]도 그 밖의 다른 동류(同類)를 부정할 때 비로소 성립하기 때문에, ‘하나’[라는 말]의 의미 역시 그 밖의 다른 것에 근거하여 성립한다.136) 길고 짧음 또한 전전(展轉)하며 서로가 서로에 근거하여 성립한다.137) 혹은 극미의 [특수한] 배열에 근거하여 성립하기 때문에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다른 법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결합과 분리 역시 별도의 실체[別物]에 근거하여 [성립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예로서 인용한] 모든 법은 다 근거하는 바를 가지며, 근거하는 바를 갖지 않는 것은 [‘하나’ 등이라는] 말로 설정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법의 생기원인 역시 마땅히 바로 이러한 예에 따라 부정[遮遣]되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상좌가 말하고 있듯이] 존재성[有性] 등이 어떠한 것에도 근거하지 않고 성립하는 것이라면, ‘생’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같은 경우는 없다. 따라서 온갖 유위의 차별적 상태[分位差別]는 모두 그 밖의 다른 인연에 근거하여 성립하는 것으로, 저절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위상(有爲相)이 각각의 찰나에 모두 개별적인 실체로서 존재한다는 뜻은 지극히 잘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생 등의 제 유위상은 [제행의] 상속 상에 일시 존재하는 것’이라는 비유부(譬喩部) 논사들의 주장은 정리(正理)에 부합하지 않을 뿐더러 계경에도 위배된다. 오로지 우리의 종의만이 경에도 부합하고 정리에도 수순하니, 따라서 지혜 있는 자라면 마땅히 [이러한 종의에 따라] 부지런히 수학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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