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1987년 3월 8일 설법
[1]
저번에 말씀드렸습니다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수행법(修行法) 가운데서
수행법이 많이 있으나 세 차원(次元)으로 나누어서 말씀할 수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사제법문(四諦法問),
사제법문 이것은 성문승(聲聞乘),
소리 성(聲)자, 들은 문(聞)자, 부처님의 법문(法門)을 듣고서
겨우 알 수 있는 그런 정도가 성문승입니다.
성문승에 대해서 하는 법문이 사제법문인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근기로 봐서는 조금 더 나아져서
부처님 말씀도 안 듣고
또는 딴 어느 성자(聖者)의 말씀을 안 듣는다 하더라도
스스로 사색(思索)도 하고 스스로 판단해서 이치(理致)를 안단 말입니다.
그러한 사색적인 그런 분들이 하는 수행법이
여기 있는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입니다.
그리고 보다 더 나은 수승한 분들
그 분들은 명색이 보살(菩薩)들인데
보살 근기는 그때는 스스로 사색도 하지만은
또한 동시에 주로 모든 중생(衆生)을,
만중생(萬衆生)을 제도 하겠다 하는 그런 서원(誓願)이 있단 말입니다.
아까 말한 성문승(聲聞乘)이나
또는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을 연구하는 연각승(緣覺乘)이나,
연각승들은 그때는 모든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그런 넓은 서원은 별로 없습니다.
헌데 그런 서원을 세운 분들 즉 보살근기는
그때는 육바라밀(六波羅蜜)로 공부한단 말입니다.
하기 때문에 부처님 경론(經論)의
일대시교(一代時敎)를 한말로 말하면
아까도 말씀마따나 부처님이나 선지식(善知識)이나
그런 분들의 말씀을 듣고 공부하는 성문승,
소리 성(聲)자, 들을 문(聞)자, 탈 승(乘)자, 승차한다는,
남의 말을 듣고서 공부한단 말입니다.
그런 성문승과,
성문승은 우리가 배운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으로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그보다 좀 더 나은 근기가 십이인연법인데
이것은 연각승, 인연 연(緣)자, 깨달을 각(覺)자 말입니다.
인연 따라서 깨닫는단 말입니다.
누구한테 별로 말도 안 듣지만
과거전생(過去前生)에 자기 선근(善根)으로 해서
생각을 많이 해서 사색하고 스스로 참구(參究)해서 깨닫는
그러한 근기가 닦는 그런 법이 십이인연법입니다.
그리고 아까 말 한대로 육바라밀,
이것이 부처님 일대시교의 세 가지 공부하는 법의 대요(大要)입니다.
사제법문(四諦法問),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 육바라밀(六波羅蜜) 말입니다.
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기초법문을 몇 가지만 외워 버리면은
무슨 경(經)을 본다 하더라도 별로 막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초를 우리가 안 들어놓으면
그때그때 무슨 말이 나오면 무슨 말인지
즉 말하자면 불교(佛敎)술어 때문에 자꾸만 막힙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佛敎)공부라는 것은
먼저 기본적인 기초의 불교술어를 해석을 해야 합니다.
헌데 특히 십이인연법이 중요한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부처님께서 깨달으실 때에
부처님이 몸소 하신 수행법(修行法)입니다.
과연 내 생명(生命)이 무엇인가 말입니다.
부처님이 자기 생명의 근원(根源)을 탐구(探究)한 법이 십이인연법입니다.
내가 지금 존재(存在)하지만은
과거(過去)에 나는 무엇일 것인가 말입니다.
그와 같이 거슬러 올라가서
자기 생명의 근원을 탐구했단 말입니다.
또한 나는 죽어서는 어떻게 될 것인가
자기 미래(未來)를 사색을 하고
그와 같이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를 사색을 하면서
자기 생명의 소재를, 내 생명은 대체로 근원이 무엇인가 하는
생명의 소재를 탐구한 법이기 때문에 이것은 중요합니다.
따라서 부처님께서 보리수하에서 성불(成佛)하실 때도
다른 공부도 물론 탐구를 하셨지만은
특히 십이인엽법을 탐구해서 깨달으셨다는 그런 말씀입니다.
그리고 학인(學人)들이 한문(漢文)실력이 없으니까
한문자를 그때그때 말이 좀 어색하지만은
한문자를 많이 넣었습니다.
넣고 또 한문자를 읽을 테니까 그리 알고서,
◎ 十二因緣法 ․․․ 이는 辟支佛의 觀法으로서
新譯으로는 十二緣起요 旧譯으로 十二因緣이며 또는 因緣觀이나
支佛觀이라고도 한다.
此는 衆生이 三世에 涉하여 六途에 輪廻하는 次第緣起를 說한 것.
十二因緣法,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인(因), 이것은 원인이란 인입니다.
인연 연(緣)자, 법 법(法),
이는 辟支佛의 觀法으로서,
이것은 치우칠 벽(辟), 또는 물리칠 벽(辟)자,
지탱할 지(支), 부처 불(佛), 볼 관(觀), 법 법(法),
新譯으로는 十二緣起요,
새로울 신(新), 풀 역(譯), 번역한다고 풀 역(譯)자, 풀이한다고 말입니다.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연(緣), 일어날 기(起),
旧譯으로 十二因緣이며,
예 구(旧)자, 이것은 약자입니다. 신구(新旧) 할 때에 말입니다.
새로운 것은 신(新)자 쓰고 낡은 것은 구(旧) 하지 않습니까.
이것은 예 구(旧)자, 풀 역(譯)자, 열 십(十), 두 이(二), 인연 연(緣),
또는 因緣觀이나,
이것도 인연관(因緣觀),
支佛觀이라고도 한다.
지탱할 지(支), 부처 불(佛), 볼 관(觀), 지불관(支佛觀).
此는 衆生이 三世에 涉하여
이 차(此), 무리 중(衆), 날 생(生), 석 삼(三), 인간 세(世),
이것은 건널 섭(涉)자, 간섭(干涉)한다고 할 때에 이자를 씁니다.
또는 섭렵(涉獵)이라, 섭렵이라는 것은
책이나 모다 이것저것 모든 학문(學文)도 많이 공부도하고
또는 경험(經驗)도 하고 그런 것보고 섭렵 그러지요.
六途에
길 도(途), 이 자는 길 도(道)자와 같이 쓰입니다.
같이 쓰이나 진리(眞理)라고 말할 때는 길 도(道)자를 쓰는 것이고,
또는 진리 외에 무슨 방도나 무슨 방법이나
그런 때는 이자[途]를 쓰는 것입니다.
같은 '길 도'라고 말하지만은
아까 말마따나 진리를 말할 때는,
즉 보리(菩提)나 또는 진리(眞理)나 그렇게 말할 때는
길 도(道)를 쓰는 것이고,
그 외에 가사 육도윤회(六途輪廻)한다,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이와 같이 육도윤회 한다, 그런 때는 도(途)자를 쓰는 것입니다.
輪廻하는 次第緣起를 說한것.
바퀴 륜(輪), 돌 회(廻), 윤회(輪廻)라 한단 말입니다.
윤회, 빙빙 돈단 말입니다.
즉 말하자면 끝도 갓도 없이
개미 쳇바퀴 모양으로 빙빙 돈단 말입니다.
버금 차(次), 차례 제(第), 인연 연(緣), 일어날 기(起), 말씀 설(說),
십이인연법 이것은 무엇 인고 하면은
벽지불의 관법(觀法)으로서,
벽지불은 어떤것인고 하면은,
성자(聖者)를, 성인(聖人)을 불교(佛敎)에서
세 차원(次元)으로 구분합니다.
부처(佛)가 있고,
또는 그다음에 보살(菩薩), 연각(緣覺), 성문(聲聞)인데
부처를 제외한 성자는 세 등급으로 구분합니다.
즉 말하자면은 가장 높은 성자가 보살 아닙니까.
그다음에 벽지불입니다.
그다음에가 아까 말한 성문승, 성문입니다.
또는 나한(羅漢) 그러는 것이고
다시 말합니다만 부처와 합치면 성자를 네 속성으로 구분하지만은
부처님을 떼어 놓으면 성인들을 세 차원으로 구분합니다.
부처 다음에는 보살, 벽지불, 벽지불보고 연각 그래요.
연각이라고 말합니다만은, 그러고 아라한(阿羅漢) 말입니다.
보살, 벽지불, 아라한, 아라한은 나한(羅漢)이지요.
즉 말하자면 이것은 도(道)가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서
구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도(道)를 성취(成就)해서
일반중생과 더불어서 중생(衆生)을 제도하는
그런 정도는 보살인 것이고 말입니다.
자기만 닦아서 겨우 자기 생명의 근원을 아는 정도
그것이 여기 있는 벽지불이란 말입니다.
또한 성문은 이것은 아까도 말했습니다만
남의 말을 듣고서 깨달은,
즉 말하자면 아라한, 아라한 이것이 성문법에 해당하는 셈입니다.
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벽지불, 아라한과
그 위에 있는 보살 합해서 3성인입니다.
부처와 합치면 그때는 4성인이 되겠지요.
한데 이것은 벽지불, 그러니까 불교법문에는
이것이 다 통용(通用)이 됩니다.
통용이 되나 특별히 어떤 성품(性品)은 어떤 공부를 한다,
그런 특별 한 것이 없잖아 있습니다.
앞서 말씀마따나 근기가 낮은 사람들은
사제법문(四諦法問)으로 해서 공부하고 말입니다.
허나 그렇다고 그래서 꼭 그 사람들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불교에 다 통해있단 말입니다.
여기 있는 십이인연법,
이것도 역시 주로 벽지불,
즉 말하자면 자기만 탐구하는 그런 분들이 주로 공부하지만은
또 역시 불교를 전부다 통관 하는 법문인 것입니다.
부처님 법문이라는 것이 아무리 쉬운 법문도
역시 근원을 꿰뚫어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다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까 불교자체가
이것이 원래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인생(人生)과 우주(宇宙)의 근본원리(根本原理)를 탐구(探究)하는
가장 고도한 철학(哲學)이기 때문에
사실 아무리 쉽게 해도 역시 하다보면
결국 어렵게 안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주를 통관해서 관찰하니까 말입니다.
이것도 내내야 인간은 무엇인가?
우리가 먹고살고 경제(經濟)문제 생각하고 정치(政治)하고
그런 것만 생각하면 쉽습니다만
인간(人間)생명의 근본(根本)을 생각 할 때는
그때는 역시 문제가 어렵단 말입니다.
인류역사(人類歷史) 오랜 동안
개벽(開闢)이래 그야말로 참 몇 만년동안 이렇게 되는 것이고
또는 역사시대(歷史時代)만 두고 보더라도
벌써 몇 천년동안인데 말입니다.
그런 동안에 사람이 무엇인가?
인간성이 무엇인가?
그 문제를 탐구해 봤지만은
사실은 딴 것으로는 확연히 해답을 못 내린단 말입니다.
그런 오랜 동안에 우리 인류(人類)가
탐구하고 탐구해서 해답을 못 내린 그런 문제기 때문에
지금 이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학인들도 역시 그런 것을 생각해서 공부를 해야지
까다롭다 그래 버리면 불교(佛敎)는 할 수가 없지요.
이와 같이 교리(敎理)로 해서는 어려운 것이니까,
허나 불교라는 것이
내내야 어려운 그것이 우리 마음 깨닫는 길이기 때문에
참선(參禪)은 교리만 따지고 있어놓으면
자기 평생을 다해도 할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교리는 불립문자(不立文字)라, 문자를 떠나서 오직,
내내야 불교라는 것이 어려운 것이지만
마음이 무엇인가?
마음 깨닫는 하나의 방편(方便)에 불과하기 때문에
문자(文字)를 떠나서 마음만 닦으면 된다,
그래서 염불(念佛)이나 참선(參禪)이 있는 셈 아닙니까.
하니까 사실은
교리는 아무것도 안 배운다 하더라도
내 마음이 부처인지를 믿고서 닦으면
그때는 되는 것입니다.
허나 현대란 사회가 하도 복잡하고 갈래가 많고
불교도 여러 가지 복잡해놔서
어느 정도 체계가 안서면 확신(確信)이 안 선단 말입니다.
체계가 딱 서야 만이
딴 삿된 것하고 구분해서 아는 것이고 확신이 섭니다.
같은 불교(佛敎)도 아시는 바와 같이 18종파,
종파들마다 각기 자기 종파가 옳다고 합니다.
그런 때에 있어놔서
우리가 어느 체계가 안 서놓으면
무엇이 무엇인가 한계를 몰라버립니다.
과연 어느 것이 좋은가? 어느 것이 그른가? 한계를 모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이 어렵지만은
이와 같이 여러분들은 대체로 고등학교 이상은 나왔으니까
마땅히 어렵지만은 충분히 인생철학(人生哲學)을 공부 할 수 있는
시기(時期)인 것이니까 그리 알고서
아까 내가 말한 부처님 당시에 말씀하신 사제법문(四諦法問),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제법문 말입니다.
인생고(人生苦), 인생고의 원인인 집(集),
인생고를 떠나서 참다운 영생(永生)의 행복인 멸(滅),
또는 영생의 행복에 이르는 방법인 도(道),
도(道)는 저번에 말한 팔정도(八正道) 말입니다.
그런 사제법문과 십이인연법과 앞으로 배울 보살의 육바라밀법,
이런 정도는 우리가 명확히 명념(銘念)을 해야 쓴단 말입니다.
‘이는 辟支佛의’
벽지불이란 즉 말하자면 자기만 주로 공부하는 그러한 근기의
‘觀法으로서’, 관조(觀照)하는 법으로서.
불교의 수행법(修行法)은 따지고 보면
전부가 모두가 다 관법(觀法)입니다.
관조(觀照)한단 말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지금 보이는 것이 아니니까 말입니다.
우리 중생은 내내야 네가 있다 내가 있다,
이렇게 눈에 보이는 것 밖에는 못 보는 것인지라
우리는 바로 못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런 정법(正法),
바른 식견(識見)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가 오랫동안 관조(觀照)함으로 해서,
관찰(觀察)함으로 해서
그때는 우리 번뇌(煩惱)를 맑히고서 진리(眞理)를 본단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처님의 수행법(修行法)은
모두가 사실은 한말로 말하면 관법(觀法)이지요.
모두가 다, 어떻게 관(觀)하라, 어떻게 관조(觀照)하라 말입니다.
우리 중생 업(業)으로 진리(眞理)가 안보이지만은
결국은 진리를 관조함으로 해서
차근차근 그때는 진리하고 하나가 되어간단 말입니다.
관법으로서 ‘신역(新譯)으로는’,
그러니까 불교가 복잡한 것이 무엇 인고 하면은
같은 번역도 중국(中國)에서 주로 인도(印度)말로 하는 그런 번역도
신역, 구역이 있습니다.
구역(舊譯)은 구마라집(鳩摩羅什)이란
그분이 한 번역이 구역이고 말입니다.
그러니까 보다 연대(年代)가 위에지요.
신역(新譯)은 현장법사(玄獎法師),
현장법사는 여러분들이 잘 아시지요.
손오공(孫悟空) 데리고 인도(印度)에 가서 법(法)을 구한 현장법사,
현장법사 이후에 번역(飜譯)한 번역이 신역입니다.
즉 말하자면 연대가 좀 새로운 번역이란 말입니다.
허나 그와 같이 새롭고 구역이고 하는 것도
역시 그 당시에 말 한 것이고
사실은 그야말로 현장법사도 벌써 지나간 지가 천년세월 넘습니다.
‘신역(新譯)으로는 십이연기(十二緣起)요,
구역(旧譯)으로 십이인연(十二因緣)이며’,
그러니까 열두 가지 속성으로 해서
인생(人生)의 낳고 죽고 하는 그런 문제를 풀이했단 말입니다.
인생의 낳고 죽고 하는 문제가 십이인연법에가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아까 말마따나 석가모니(釋迦牟尼)께서 내가 무엇인가 하는 그 문제를
이와 같은 사색(思索)으로 해서 공부했단 말입니다.
즉 이와 같은 관법(觀法)으로 공부했단 말입니다.
‘또는 인연관(因緣觀)이나’,
불교에서 말하는 인연법(因緣法)이라,
인엽법이라는 것도 역시 이런데 가서 근원(根源)을 둡니다.
인연법이란 말입니다.
모두가 인연이라, 좋으나 궂으나 인연이다,
그와 같이 쉽게 말 하지만은
인연이라는 것이 따지고 보면 불교(佛敎) 전부를 다 포섭한
심심미묘(深深微妙)한 법문(法門)인 것입니다.
인연이란 말입니다.
원인(原因)이 있으면 연(緣)이 있고,
연(緣)이 있으면 과(果)가 있고 말입니다.
인과(因果)라, 인과라 할 때는
인(因)·연(緣)·과(果) 가운데서 연(緣)을 빼버리고
간단히 인과(因果)라고 하지요.
허나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은
인연과(因緣果)라 해야 쓰는 것입니다.
인(因)과 연(緣)과 과(果)말입니다.
원래 종자(種子)인,
가사 우리가 종자를 둔다고 하면
종자는 인(因)에 해당하고,
종자를 움트게 하는 땅이나 일광(日光)이나
수분(水分)이나 비료나 이런 것은 연(緣)에 해당하고 말입니다.
그것이 성장해서 열매를 맺는 그것은 과(果)에 해당하는 셈 안 되겠습니까.
그와 같이 모든 것은 인연과(因緣果)로 해서
생성(生成) 소멸(消滅)해 갑니다.
인연관(因緣觀)이나 ‘支佛觀이라고도 한다.’
‘벽지불’을 ‘벽’자를 빼버리고서
그냥 ‘지불’이라고도 간단히 말합니다.
지불관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차(此)는 중생(衆生)이 삼세(三世)에’,
삼세 이것은 과거(過去), 현재(現在), 미래(未來)입니다.
우리 중생(衆生)이 과거, 현재, 미래(未來)를 통해서
육도(六道)에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중생이 죽고살고 갔다 왔다 하는 경계(境界)가 육도(六道)안 되겠습니까.
가장 나쁜 갈래는 지옥(地獄), 아귀(餓鬼), 축생(畜生)이고 말입니다.
이것 보고는 나쁘니까 삼악도(三惡道)그러지요.
세 가지 악도(惡道)라 그래서 삼악도,
그 외에 수라(修羅), 인간(人間), 천상(天上), 아수라(阿修羅)도
역시 우리 인간의 눈에는 안 보이는 것입니다.
안 보이는 아수라도 역시 아주 힘이 굳센 귀신(鬼神)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공부방식도 모르고 산에 가서 공부하면
더러는 아수라(阿修羅)가 시켜(씌워)가지고서
굉장히 힘도 내고 아는 척도 많이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인간의 눈에는 안보이지만은
깊은 산중에나 바다 가운데나 그러한 데서 존재하는 대력신(大力神),
큰 힘을 가진 신(神)이 아수라 신인데
아수라하고 인간하고 천상 이것은 좋은 데라고 해서,
물론 극락(極樂) 같은 그런 곳은 못 되겠지만
하여튼 악도에 비해서는 좋다고 그래서 삼선도(三善道),
착할 선(善)자, 삼선도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三惡道) 하고,
아수라, 인간, 천상, 삼선도(三善道) 합해서
육도(六道)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육도에 우리 중생은 갔다 왔다, 갔다 왔다 합니다.
앞에처럼 모두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우리가 업(業)을 지으면
그때는 인간보다 못하게 태어나고 말입니다.
가사 금생(今生)에 요새 사람들
모양으로 잘 싸우면 죽어지면 아수라(阿修羅)로 태어나가지고서
싸움을 좋아하고 말입니다.
우리가 함부로 남을 많이 죽이면
지옥(地獄)으로 가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러나 십선업(十善業)이라,
십선업을 닦아서 말조심하고 행동주의하고
마음으로 항시 맑은 마음 가지시면
천상(天上)가서 태어나고 말입니다.
또는 그런 죄악의 씨앗을 다 없애고서 완전무결하면
그때는 극락(極樂) 가서 태어나는 것이고,
그와 같이 우리가 태어나는 것인데,
우선 우리 중생(衆生)할 때는,
극락(極樂)은 성자(聖者)만 가는 곳인지라,
일반 중생한테는 아까 말한바와 같이
삼악도(三惡途), 삼선도(三善途)란 말입니다.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와 싸움을 좋아하는 아수라와
또 인간과 천상이란 말입니다.
이런 ‘육도(六途)에 윤회(輪廻)하는’, 뱅뱅 돈단 말입니다.
뱅뱅 도는 ‘차제(次第)연기(緣起)를 說한 것.’
인과가 차례로 일어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을 말씀한 이것이
여기 있는 바와 같이 십이인연법(十二因緣法)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그야말로 우리 생명(生命)에 가장 접근된
가장 밀접한 법문인 것입니다.
과연 내가 어떻게 해서 나왔는가 말입니다.
왕자고 누구고 아무리 잘났다 하더라도
내내야 결국은 십이인연법의 범주(範疇)내에서
윤회(輪廻)하는 가운데서 인간으로 잠깐 나왔을 뿐입니다.
죽어지면 어디로 갈 것인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만 업(業)따라서 자기가 지은 행위(行爲) 따라서
내세(來世)에 가서 과보(果報)를 받을 뿐이라 놔서
우리 중생은 내세가 안보이니까 알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우리 중생은
그야말로 참 캄캄한 것입니다.
내가 과거(過去)에 어디서 왔는가,
또한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재 모실 때에
항시 듣는 생종하처래(生從何處來),
우리 생(生)이란 대체 어디서 왔는가?
사향하처거(死向何處去)라, 죽으면 어디로 갈 것인가?
이런 문제를 천박(淺薄)한 사람들은 그냥 보아 넘깁니다만
역시 깊은 사람들은 이런 문제를
생명(生命)의 본질(本質)문제를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는 나이가 많아지면
자연적(自然的)으로 그런 문제를 생각 안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죽음이 임박하니까.
☞ 출처 : 본정 김영동 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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